‘모든 것이 아주 창백했다. 강도 창백했고, 들판은 풀이 무성하고 분명 붉은 빛일 꽃들이 우거져 있는데도 아무 빛깔 없이 술렁이며 펼쳐진 채, 빛깔 없는 농가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윽고 한 농가의 문이 열리더니 농부와 그의 가족이 마치 언덕 위 교회에라도 가려는 듯이 말끔한 차림으로 말없이나타나, 엄숙한 태도로 행렬에 끼어들었다. 때로는 2층 창턱에 기대선 여자들이 재미있다는 듯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잠자코 내려다보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대체 뭘 보려고 수백마일씩 온 걸까?> 그녀들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우리는마치 어느 배우와 약속이라도 지키러 온 듯한 기묘한 느낌이들었다. 그는 너무나 스케일이 커서 소리 없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 P152

우리는 아주아주옛날 새벽에 경의를 표하러 온 원시 세계의 남녀들이었다.
스톤헨지의 경배자들이 더부룩한 풀숲과 비바람에 씻긴 바위들 사이에서 필시 그런 모습이었을 터였다. 갑자기 어느요크셔 향사의 자동차로부터 네 마리의 크고 여윈 붉은 개들, 고대 세계로부터 온 듯한 사냥개들이 뛰쳐나와 코를 땅에 처박는 것이 마치 멧돼지나 사슴의 자취라도 찾는 듯이보였다. 그러는 사이 해가 뜨고 있었다. 구름 한 송이가 마치하얀등갓 뒤에서 천천히 불이 켜지는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금빛 쐐기 모양의 빛줄기가 구름에서 쏟아져나와 골짜기의 나무들을 녹색으로, 마을을 청갈색으로 물들였다. 우리 등 뒤 하늘은 연청색 호수에 하얀 섬들이 떠다니는 듯했다. 하늘은 활짝 열리고 개었지만, 우리 눈앞에는 희고 부드러운 눈의 둔덕이 쌓여 있었다.  - P153

태양은 구름들 사이로 달려 나가 그 신성한 몇 초가 끝나기 전에 결승점에 도달해야만 했다. 결승점이란 오른쪽에 있는 엷은 투명함이었다. 태양은 출발했다. 구름들이 그가 가는 길에 온갖 장애물을 던져 놓았다. 들러붙고 가로막았다.
그는 그것들을 뚫고 질주했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도 번개처럼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굉장한 속도였다. 잠깐 나와밝게 빛나는가 하면, 다음 순간 구름 뒤로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결승점을 향해 그 먹장을 헤치고 나아가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순간 그는 나타나서 우리의 안경을통해텅빈 태양, 반월형 태양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그가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일 터였다. 이제 그가 마지막 힘을 쓸 때였다. 그는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순간들이 지나갔다. 저마다 손에 시계를 들고 있었다. 신성한24초가 시작되었다. 마지막 1초가 지나기 전에 이기고 나오지 못한다면 그는 지고 마는 것이었다. 여전히 그가 구름 뒤에서 몸부림치며 달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구름들이 그 - P154

를 붙들고 있었다. 구름장들이 퍼져 나가며 두꺼워지고 느슨해져서 그의 속력에 제동을 걸었다. 24초 중에 5초밖에 남지않았건만, 그는 여전히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치명적인순간들이 지나고 <태양이 지고 있구나, 정말로 경주에서 졌구나 하고 실감했을 때, 황야에서 모든 빛깔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보랏빛이 되었고, 흰빛은 격렬하지만 바람없는 폭풍이 다가올 때처럼 납빛이 되었다. 분홍빛 얼굴들이녹색이 되었고, 갑자기 더 추워졌다. 그러니까 이것이 태양의 패배로군, 이게 다군> 하고 우리는 실망해서 우리 앞쪽의 음울한 구름 담요로부터 등 뒤의 황야를 향해 돌아섰다.
황야는 납빛이었고, 보랏빛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뭔가가 더일어나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예기치 않았던 무섭고피할 수 없는 것이 닥쳐 오고 있었다. 황야를 뒤덮은 그늘이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이, 마치 배가 위기의 순간에 균형을되찾는 대신 조금씩 더 기울다가 돌연 전복되고 마는 것과도같았다. 그렇게 빛이 차츰 기울다가 완전히 나가 버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세상의 피와 살이 죽고 해골만 남겨졌다.  - P155

다. 물고기들도 의도적으로 그런 모양을 띠고서 오직 자기자신이 되기 위하여 세상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듯하다. 그들은 일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그들의 형태에 그들의존재 이유가 있다. 완벽한 실존이라는 충분한 목적 외에 다른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겠는가? 어떤 것은 통통하게, 어떤 것은 얄팍하게, 어떤 것은 등성이에 지느러미를활짝 펼치고, 어떤 것은 전기를 띤 빨간 줄무늬를 하고, 어떤것은 프라이팬 위의 새하얀 팬케이크처럼 너울거리고, 또 어떤 것은 푸른 갑옷을 입고, 어떤 것은 엄청난 집게발을 달고,
어떤 것은 거대한 구레나룻을 잔뜩 달게끔 말이다. 인류 전체보다도 대여섯 마리 물고기에게 더 많은 정성이 쏟아진 것만 같다. 우리의 트위드와 실크 밑에는 단조로운 분홍빛 맨살밖에 없다. 시인들도 이 물고기들만큼 뼛속까지 투명하지는 않다. 은행가들도 집게발은 갖지 못했으며, 왕과 왕비들도 주름 목깃이나 프릴장식을 달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요컨대 만일 우리가 맨몸으로 수족관에 넣어진다면 - 아니,
이쯤 해두자. 이제 눈이 감긴다. 눈은 우리에게 죽은 세계와불멸의 물고기를 보여 주었다. - P158

나방의 죽음

낮에 날아다니는 나방은 나방이라 불리는 것이 어울리지않는다. 그것들은 커튼 그늘에 잠들어 있는 흔하디흔한 노랑뒷날개나방이 어김없이 환기하는 어두운 가을밤과 담쟁이꽃의 기분 좋은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것들은 잡종으로 나비처럼 화사하지도 않고 자신의 동류인 나방답게 칙칙하지도 않다. 하여간 좁다란 건초 빛깔 날개와 같은 빛깔 술이 둘린 이 나방은 살아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9월중순의 기분 좋은 아침, 공기는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여름날보다는 선득한 바람결이 느껴졌다. 창문 저편 들판에서는 이미 쟁기가 자국을 내고 있었고, 보습이 지나간 땅은 평평하게골라져 습기를 머금은 채 빛나고 있었다. 들판과 그 너머 언덕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활기 때문에 눈은 가만히 책만 들여 - P159

다보고 있기 어려웠다. 떼까마귀들도 연례행사를 벌이는지,
나무들의 우듬지 주위로 날아오르는 것이 마치 수천 개의 검은 매듭이 있는 커다란 그물이 공중에 던져지는 듯했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천천히 나무 위로 내려앉아, 나뭇가지 끝마다검은 매듭이 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또 갑자기 이번에는더 큰 원을 그리며 그물이 펼쳐지고 일제히 퍼덕거리며 깍깍대는 것이, 그렇게 공중에 던져졌다가 천천히 나무 꼭대기에내려앉는 것이 엄청나게 신나는 경험이기나 한 것 같았다. - P160

떼까마귀들과 쟁기질하는 사람들과 말들, 그리고 심지어풀이 말라 민둥한 언덕에까지 활기를 불어넣는 동일한 에너지가 나방을 네모난 유리창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파닥여 가게 했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묘한 동정심이 드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에는 즐거움의 가능성들이 너무나 크고 다양해 보였으므로, 고작 한 마리 나방, 그것도 낮에 다니는 나방 몫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이 가혹한 운명이라생각되었다. 그런데도 그 오죽잖은 기회를 최대한 즐기려는그의 열의가 비장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갇힌 유리창의한쪽 구석으로 힘차게 날아가, 거기서 잠시 기다렸다가 또다른 구석을 향해 가로질러 날아갔다. 세번째, 네번째 구석으로 날아가는 것 말고는 그에게 달리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언덕들이 아무리 크고, 하늘이 아무리 넓고, 집들의 연기가 아무리 멀리까지 올라가고, 바다에 나가 있는 증기선들이 - P160

이따금 아무리 로맨틱한 소리를 낸다 해도, 그가 할 수 있는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를 지켜보노라니, 마치 세계가 지닌 거대한 에너지의 아주가늘지만 순수한 한 가닥이 그 작고 연약한 몸속에 밀어 넣어진 듯했다. 그가 유리창을 이리저리 가로지를 때마다, 내게는 활기 찬 빛 가닥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거의 생명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작고 그토록 단순한 형태의 에너지로서 열린 창문 안으로 들어와 나나 다른 인간들의 두뇌 속에 있는 그토록 많은 좁고 복잡한 복도들을 지나왔으므로,
그에게는 비장한 동시에 경이로운 무엇인가가 있었다. 마치누군가가 순수한 생명의 작은 구슬을 가지고 솜털과 깃털로
"가능한 한 가볍게 꾸며서, 우리에게 생명의 진정한 본질을보여 주기 위해 춤추거나 지그재그로 움직이게 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제시된 것의 낯설음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 P161

우리는 그것이 둥그스름하고 오톨도톨하고 거추장스럽게 꾸며져서 극도의 조심성과 위엄을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 것만을보고, 생명에 대해서는 잊기 쉽다. 만일 그가 다른 형태로 태어났더라면 어떤 삶이 되었을지 생각하니, 그의 단순한 움직임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잠시 후 그는 춤추기에 지친 듯 양지바른 창턱에 내려앉았고, 그 진기한 구경이 끝났으므로 나는 그에 대해 잊어버렸 - P161

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드니 그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는다시금춤추려 애쓰고 있었지만, 몸이 굳어져 움직이기가 거북한지 유리창 바닥으로 퍼덕여 가는 게 고작이었고, 창문을가로질러 날아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다른 일들에 몰두한 채, 잠시 별생각 없이 그 헛된 시도들을 바라보면서, 무의식적으로 그가 다시금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기계가 고장 난 원인은 생각지도 않고 다시 작동하기만을 기다리듯이 말이다. 대략 일곱 번쯤 시도한끝에 그는 나무로 된 창틀에서 미끄러져 날개를 퍼덕이며 떨어져 창턱에 널브러졌다. 뒤로 나가떨어진 그의 무력한 자세가 나를 자극했다. 그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다리를 버둥거려 봤자 더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그가 바로 서도록 도우려고 연필을 뻗어 주려다 말고, 나는문득 그렇게 떨어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 죽음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연필을 도로 내려놓았다. - P162

다리들이 한차례 더 버둥거렸다. 나는 그가 맞싸우는 적을 찾기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밖을 내다보았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정오경인 듯, 밭일은 멈춰 있었다. 조금 전의 활기 대신 적막과 고요가 자리하고 있었다.
새들도 먹이를 찾아 개울가로 날아가고 없었다. 말들은 조용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여전히 힘이, 특별히아무것에도 괘념치 않는 무심하고 비개성적인 힘이 있었다. - P162

그 힘이 작은 건초 빛깔 나방과 맞서고 있었다. 무엇을 하려해도 소용없었다. 그 작은 다리들이 다가오는 숙명에 맞서최대한 노력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숙명은마음만 먹으면 온 도시를, 도시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라도
‘잠기게 하려면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죽음에 맞설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잠시 지쳐 정지했던 발이 또다시 버둥거렸다. 이 최후의 항거는 훌륭했고, 너무나 필사적이라 그는 마침내 바로 서는 데 성공했다. 나는 물론 전적으로 생명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작은 나방의 이거대한 노력, 아무도 돌아보지도 알아주지도 않건만 그처럼엄청난 힘에 맞서서, 다른 아무도 높이 평가하거나 간직하려하지 않는 것을 애써 지키려는 노력은 이상하게 감동적이었다. 다시금 생명이, 그 순수한 구슬이 보이는 듯했다.  - P163

나는다시 연필을 들었다.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하지만 바로 그순간 죽음의 틀림없는 징후들이 나타났다. 나방의 몸이 풀어지더니 즉시 뻣뻣해졌다. 싸움은 끝났다. 그 작은 생물이이제 죽음을 맛보았다. 죽은 나방을 바라보노라니, 그토록하찮은 적수에 맞선 그토록 큰 힘의 대수롭잖은 승리가 나를경이감으로 휩쌌다. 조금 전에는 삶이 기이했듯이, 이제 죽음이 기이해 보였다. 나방은 몸을 바로 하여 단정하게, 아무불평 없이 침착하게 누워 있었다. <오, 그렇다>라고 그는 말하는 듯했다. <죽음은 나보다 강하다>라고. - P163

시간은 저녁, 계절은 겨울이라야 한다. 왜냐하면 겨울이라야 샴페인처럼 밝게 빛나는 대기와 길거리의 화기애애함지,
람이 고맙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그늘과 고독과 건초 널린 들판에서 불어오는 달콤한 바람에 대한 동경에 도발당하지 않는다. 저녁이라는 시간 또한우리에게 무책임함을 허락하는 것이, 어둠과 가로등 덕분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다. 날씨 좋은 저녁 4시에서 6시 사이에 집을 나서면서, 우리는 친구들이 아는 우리자신을 떨쳐 버리고 익명의 보행자들로 이루어진 저 거대한군중의 일부가 된다. 그들과의 어울림은 자기만의 방에서 누린 고독 끝이라 한층 더 유쾌하다.  - P166

눈에는 이상한 속성이 있다. 눈은 아름다움에만 머문다.
마치 나비와도 같이, 빛깔을 찾아다니며 온기를 다 자연이 스스로 한껏 갈고 닦아 모양을 낸 이런 겨울밤에도, 눈은가장 어여쁜 전리품들을 골라내며, 마치 온 지구가 보석들로이루어지기나 한 것처럼 자잘한 에메랄드와 산호 조각들을떼어낸다. 눈이 할 수 없는 것은(보통의, 비전문적인 눈 말이다)이 전리품들을 배열하여 좀 더 섬세한 각도와 관계를도출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 소박하고 달콤한 식사를, 순수하고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오래 즐긴 후에 우리는 포만감을 의식하게 된다. - P170

여름이면 자기 뜰에서 키운 꽃이 담긴 화병이 먼지투성이 책 더미 위에서 가게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사방이 책이고, 언제 봐도 한결같은모험심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운다. 헌책들은 집 없는 책, 야성적인 책들이다. 그것들은 온갖 빛깔의 깃털을 지닌 방대한무리 속에 섞여 왔으며, 길들여진 도서관 책들에는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무리 가운데서, 우리는 전혀 모르던 이를 만나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이 되기도 한다. 위쪽 서가에 꽂힌 회백색 책의 허름하고 버림받은 듯한 태도에 마음이 끌려손을 뻗칠 때면 항상 희망에 부푼다.  - P178

그러나 이런 개별적인 존재의 순간들은 훨씬 더 많은 비존재의 순간들 속에 묻혀 있다. 나는 레너드와점심을 먹으면서, 또 차를 마시면서 했던 이야기를 벌써 다잊어버렸다. 어제는 좋은 하루였는데도 그 좋았던 것이 일종의 솜 같은 두루뭉술한 것 안에 묻혀 버렸다. 언제나 그런 식이다. 하루하루의 상당 부분은 의식적으로 살아지지 않는다.
산책하고, 식사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보고, 해야 할 일들을처리한다. 고장 난 진공청소기, 저녁 식사 지시하기, 메이블에게 지시할 사항을 적어 두기, 빨래, 요리, 책 제본 등. 좋지않은 날이라면 비존재의 비중이 훨씬 더 커진다. 지난주에는약간 열이 있었고, 거의 종일 비존재였다. 진짜 소설가는 그두 가지 존재를 어떻게인가 전달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이그랬고, 트롤럽도 그랬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그 두 가지를 다 전달할 수 있었던 적이 아직 없었다. - P206

 그런데 그를 치려고주먹을 드는 순간, 이런 느낌이 스쳤다. <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해? 나는 제풀에 손을 떨구고 서서 그가 나를 때리도내버려 두었다. 그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가망 없는 슬픔의 느낌이었다. 마치 무엇인가 무시무시한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의 무력함을 알아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끔찍하게 풀이 죽어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렸다. 두 번째 예도 세인트아이브스의 정원에서였다. 나는 현관 앞 화단을 바라보고 있다가 <저게 전체야>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널따랗게 잎을 펼친 어떤 식물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 한순간 그 꽃자체가 대지의 일부라는 것, 어떤 고리가 그 꽃을 에워싸고있다는 것, 그 꽃은 진짜 꽃이고 일부는 대지이고 일부는 꽃이라는 것 등이 갑자기 명백해졌다. 나는 그런 생각을 나중에 아주 유용할 것 같아서, 간직해 두었다.  - P207

 어떤 질서의 현현이거나 장차 그 현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현실로 만든다. 오로지 그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온전하게 만들며, 이때 온전하다는 것은 곧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할 힘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나뉜 부분들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을 없애기 때문인 듯한데 ㅡ 내게 큰 기쁨을 안겨 준다. 그것은 아마 내가 아는 가장 큰 기쁨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글을 쓰면서 무엇이 무엇에 속하는지 발견하고,
어떤 장면을 제대로 표현하고, 어떤 인물을 온전히 드러나도록 만들 때 느끼는 황홀경이다.  - P210

이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경지를 철학이라 불러도 될는지. 하여간 그것은 나 자신이 갖고 있는 변함없는 생각이다. 즉, 솜의 이면에는 어떤 패턴이숨어 있고,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는 이 패턴과 연관된다는 생각, 세계 전체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고, 우리도 이 예술 작품의 일부라는 생각이다. 『햄릿 Hamlet』이나 베토벤의사중주곡은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이 거대한 덩어리에 관한 진리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셰익스피어도 없고, 베토벤도없고, 더더구나 신은 없다. 우리가 말이고, 우리가 음악이고,
우리가 물자체(物自體)이다. 나는 충격을 받을 때 이 사실을확인한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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