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시골 마을을 발견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할아버지와 자그마한 와사비소금 한 병을 소중하게 포장해주는 할머니를 만났다. 그런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는 그런 할머니로 늙어가야지 하며 빙그레웃었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 속 어묵을 꺼내고 무 반토막을꺼내어 멸치 우린 물에 넣었다. 팔팔 끓여 푹 익힌 어묵과 무를 와사비소금에 찍어 먹었다. 그 다음날도 먹었다. - P122
1월 3일 델리, 비벡 호텔에서
인드라간디의 새벽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다. 두렵던 마음이 안도감으로 바뀌자 무거운 배낭도 가볍게만 느껴졌다. 아홉시 반에 로비에서 만나자던 인도인 가이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아침부터파하르간즈를 헤매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고서 길을 찾는다는 게 의미가 없다는, 쉼터주인의 말씀이 백번 옳았다. 첫 인도 식사를 했다. 커리만 먹고 두 달을 지낸대도 기뻐할 수 있을 맛이었다. 바나나 라씨를 디저트로 마셨는데 다 먹고 나자 컵 밑바닥에 파리가 익사해 있었다. 맛있었는데. 너 때문이었던 거니. - P126
1월 29일 우다이푸르, 드림헤븐 루프탑에서
세탁물을 찾아왔는데, 멋지게 찢어진 나의 청바지는 모든구멍들이 깔끔하게 누벼졌다. 세탁소 아저씨가 "이건 서비스야, 완벽하지?"라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짓지 않았더라면 화를 낼 뻔했다. J와 함께 라자스탄 전통 댄스 공연을 보았다. 그리고 J의 배웅을 받으며 터미널에 갔다. 버스에 올라탈 시간이 되자 J가 비닐봉지 두 개를 건넸다. 오렌지 세 개, 과자두 개, 바나나 세 개가 담겨 있었다. 이 애는 여기에 오래 머물면서 얼마나 많은 배웅을 이렇게 했을까. 비닐봉지를 머리맡에 놓아두고 싱글 슬리퍼 칸에 누웠다. 폭이 너무 좁아서 어깨가 꽉 들어찼다. - P134
2월 21일 뭄바이, 타지마할 호텔에서
무더위가 창궐하고 있다. 나는 타지마할 호텔에 묵지도 않으면서 이 호텔의 로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을 하며, 책을 읽거나 엽서를 쓰면서 소일하고 있다. - P145
2월 28일 뭄바이, 공항에서
무엇에든 카메라를 들이댔다. 지갑 속에 들어 있던 지폐와동전을 하나하나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서, 정겨운 간디의 얼굴들을 프레임에 담았다. 라씨 한 잔, 차이 한 잔, 커리한 접시마저 카메라에 담아두었다. 중앙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고 엽서를 부쳤다. 깨끗하게 빨아 창가에 널어둔 운동화를 신었다. 신고 다니던 조리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숙소 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 가는 택시를 탔다. 공항으로 향하는 그 밤길에서, ‘인도‘라는 나라에 정이 듬뿍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다이푸르에서 만났던 J를 공항에서 우연히 만났다. J가 차이를 사주었다. 마지막 차이. - P148
어느 해 여름에는 친구의 고향집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다폐가에 들어갔다. 작은 대문 옆에 걸린 우편함에 비에 젖었다가 다시 말라버린 고지서며 편지 같은 것들이 터질 듯이 꽂혀있었다. 청첩장 같은 것도, 연하장 같은 것도, 성탄카드 같은것도 꽂혀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흰 봉투가 누렇게 변해 있고 제대로 다물려 있지도 않았다. 이 집의 주인인 양 그것들을 꺼내어 읽어보았다.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한 글자 한글자 읽어보았다. 다시 우편함에 꽂아두고 집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아무도 없지만 누군가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있었으니까. 노인이 살았나보네. 아이가 살았나보네. 남아 있던 것들을 통해서 살았던 사람을 상상해보았다. - P156
폐사지들을 두루 방문하고 나서 내게 남은 잔상은 오로지 이끼였다. 햇빛이 비스듬한 시각, 곁에 있는 사람의 옆얼굴에서나 보이던 솜털 같은 이끼. 길에 카펫처럼 깔린 이끼, 바위를 망토처럼 덮고 있는 이끼, 불상에 표정처럼 끼인 이끼. 팔다리나 머리가 잘린 채로 훼손된 석상도 아름답게 감싸며세월의 깊이를 풍겨오던 이끼. - P158
시간이 덧없이 흘러간 흔적을 보았다고 표현해야 할까. 아니면 시간이 켜켜이 쌓여갔다고 표현해야 할까. 버려진 장소라고 느꼈다면 덧없는 시간의 흐름이 더 느껴졌을 것이지만그렇지만은 않았다. 그 장소가 이끼에게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천천히 스스로를 내어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곳은무언가가 뿌리를 내린 장소였다. 이끼는 장소의 허락을 받은 듯이 온전히 그곳을 차지했다. 폐사지들은 시대와 사건들을 초월한 채로 이끼의 장소가 되어갔다. 거기에 아침부터저녁까지 햇살이 깃들고, 자주 바람이 훑고 지나가고, 가끔 빗방울이 차곡차곡 쌓여갔을 것이다. 그 곁에 인간의 무덤들이 들어서도 이끼는 구분 없이 그곳으로 번져갔다. 서로 다른 목적과 서로 다른 시간을 이끼가 어우르고 있었다. - P159
고양이가 다가왔다 멀어지고, 새소리가 들리고, 강줄기가 지나가는 물소리가 합쳐졌다. 폐허에는 언제나 온전치 못함에서 발생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이면을 간직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훼손된채로 세월 속에 간직되어있는 그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 비극과 참담과 세월. 이세개의 꼭짓점이 먼 곳에서 한데 만나는 소실점 같은. - P160
어떤 여행지에서는 여행을 멈추는 게 더 좋은 여행일 때가있다. 여행을 멈추고 방을 얻어 많이 자고 많이 먹으면서 많이쉬는 것이 더 좋은 여행이 될 때가 있다. 이렇다 할 찾아갈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없는 장소인 것은 아니다. 그곳은 지내기 좋은 빵집과 찻집이 있고, 오래 머물기 좋은 서점과 도서관이 있고, 무엇보다 모든 것이 저렴하다. 모두가 인심이 좋다. 그런 도시에서 방을 얻어 한참 동안 머물고 나면또다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을 떠날 힘을 얻는다. - P168
좋은 것에도, 나쁜것에도 즉각적으로 입 바깥으로 표현하며 동행자와 함께 그감정과 소회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쁜 일에 대한 푸념이 하루의 여백 곳곳에 전시되었다. 먼저 여행을 제안한 것부터 소급해서 반성과 후회를 범벅하며 이유를 알 수 없는 한숨을 짓는 나와, 매번 푸념을 앞세웠다 나의 한숨 때문에 또다시 푸념을 거두며 한숨을 짓는 친구. 우리 둘의 남인도 여행은 이렇게 요약이 되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어딘지 모를 불편함을 안고서, 슬리핑 버스의 한 칸씩을 차지하며 각자 누워 커튼을 친 후, 우리 둘은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구불구불한 길을지날 때에는 누운 채로 이리저리 굴러가며 끝없는 잠을 잤다. - P174
잠이 깨어 눈을 떴을 때, 창 바깥에는 뿌연 안개가 뒤덮인대도시가 있었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인파를 한가득 실은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 아직 내가 인도에 있구나!‘ 했다. 비몽사몽 잠깐의 시간, 나는 이 년 전부터 내내 그골목에 앉아서 울고 있어왔거나 이 슬리핑 버스 속에 누워 있는 줄로만 알았다. 여기는 두번째로 찾아온 인도이며, 이 년전과 달리 친구가 옆에서 동행하고 있다는 걸 한 박자 늦게알아챘다. 지금 집에 돌아가는 중이라는 것도. 나는 슬리퍼를꺼내 신고 버스 복도로 나왔다. 친구 방의 커튼을 열었다. 친구는 전에 없던 평화로운 얼굴로 꿀 같은 잠을 자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껴 친구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친구에게 고백했다. 고맙다고. 옆에 있어줘서 너무 안심이라고. - P175
겨울에 꺼내는 여름
어떤 날은 외투가 무거워 집에 일찍 돌아옵니다. 외투를 벗고 잠옷을 꺼내 입는 홀가분함을 겨울이라 불러봅니다. 외출모드의 보일러를 적정온도로 맞춰서방바닥이 따뜻해지길 기다립니다. 무릎 담요도 덮었지만 수면양말도 필요합니다. 성에가 낀 북향 창문을 열면 매서운 바람이 기습해 들어옵니다. 이제는 앙상해져 볼품이 없는 숲을 내다봅니다. - P178
담요를 벗고 카디건을 벗고 양말을 벗고 잠자리에 듭니다. 두꺼운 이불을 덮어도 코끝이 약간 시립니다. 발이 이불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않게 몸을 웅크립니다. 깜깜한 방안을 빽빽하게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생각들이차례차례 펼쳐집니다. 여름이 펼쳐집니다.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던 바다가 펼쳐집니다. 뚜벅뚜벅 멀리까지 걸어가는 내가 보입니다. 어느덧 몸에서 살얼음이 빠져나가고 어느덧 잠이 듭니다. - P179
겨울은 여름을 떠올리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여름을 떠올리며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한 가지를 아쉬워할 수 있는 계절이다. 여름을 열렬히 그리워하는 밤. 성에가 낀 얼룩덜룩한유리창을 보면서, 다음번 여름엔 소낙비가 내릴 때에 유리창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창 바깥에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 숲을 선명하게 내다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귤피차를 마시다 안경알에 낀 성에가 사라지길 기다리는 잠깐 동안에, 여름의 냄새가 다녀간다. 겨울의 반대편에 여름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는다. - P179
너무나 유명한 나무 한그루라서, 누구나가 한 번쯤 사진에담아봄직한 나무라서, 그 나무를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본 적이 없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 흔한 사진이라서, 별다를 게 없는 사진이라서, 게다가 한 그루 나무 사진이라서, 나는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본 적이없는데 본 것 같은 느낌을 다만 신기해했다. 한 그루 나무일뿐이지만, 이 나무가 누구나의 나무인 것이 좋다. 모두가 찾아와 사진에 담게 되는 나무라서 좋다. 누가 사진에 담아도 멋질 수밖에 없는 멋지게 생긴 나무라서 더 좋다. 무엇보다 이나무를 맨 처음 만났던 그 거실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다. - P182
남루함이 빛난다
ItalyFirenze
엄마는 팔십 평생을 보아왔어도 해 지는 모습은 질리지가 않는다 하셨다. 엄마의 남루한 가구들의 모서리가 반짝거렸다.
프하라, 산토리니, 피렌체.. 해가 지는 걸 보겠다고 모여든 여행자들 사이에서 나도 눈을 가늘게 뜨고 오직 지는 해만 바라보았다. - P184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녀 발은 붓기 시작하고 땀을 흘려 옷에서는 짠내가 나고 꾀죄죄해진 몰골이었지만
황금빛을 받아 잠시나마 나는 빛이 났을 것이다.
오늘도 꿈같은 하루였구나 생각하며 배낭 속에서 카디건을 꺼내 입고서 쌀쌀한 황금빛 골목을 터덜터덜 걸어 숙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 P185
관광지
나는 관광지가 고향인 사람이다. 경주 노서동 사거리 봉황대 앞에서 살았다. 옆집은 기념품 가게였고 수학여행객들로 항상 붐볐다.
사방치기나 비석치기 같은 걸 하고 놀던 꼬마였던 내게 다가와 - P204
외국인 관광객들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동전을 쥐여주려고도 했다.
도망치듯 대문 안으로 들어가 혼자서 욕을 해댔다. 수학여행 철마다 내 골목을 누비고 다니던 이방인들을 무작정 미워했다.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고 어른들에게 혼이 났고 나는 자꾸 골목을 빼앗긴 느낌만 들었다. 친구들과 골목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그들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던 시간.
그들이 되어 나는 다른 도시를 그렇게 지나갔다. 그 아이들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았다. 골목 속 나는 웃고 있고 골목 속 나는 숨어 있다. - P205
휴양지의 리조트에서 나는 친절한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 돈을 내고 팁을 주면서, 방도 치워주고 식탁도 치워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 P205
하염없이 물놀이를 하고 하염없이 낮잠을 자고, 휴양지에서하염없는 휴양을 하고서,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불렀다. 친절한 사람이 내 트렁크를 차에 실어주었다. 휴양지를 벗어나자소낙비가 쏟아졌다. 소낙비를 맞고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무너질 듯 무너질 듯 서로 지붕을 기댄 채로 지어진 집들이 보였다. 비현실적인 휴양지와 비현실적인 공항 사이, 아주잠시, 친절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스쳐지나갔다. - P206
내가 마음먹은 일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실천할 능력이부족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마음먹었는지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필리핀의 어떤 섬으로 휴가를 떠났을 때의일이다. 단지 나는 짧게 다녀올 여행지를 고르고 있었고 멀지않은 곳이기를 바랐다. 기왕이면 바다가 있었으면 했고 관광객들이 들끓지 않는 조용한 곳이었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찾아간 곳은 필리핀의 다바오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이었다. 필리핀의 전통 수상가옥으로 한 채 한 채가 지어진, 아주 아담한 그 숙소에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깨끗한 바다. 간단한 스노클링으로도 만날 수 있는 알록달록한 열대어들. 매일매일 산해진미가 차려지는 레스토랑, 매일 저녁식사와 함께 펼쳐진 민속 공연, 파도 소리가 귓전에서 들리는 방, 방에서 내다보는 아무도 없는 바다, 열대우림의 산책로. - P215
대문 앞에 멈춰 서서 집안을 들여다보니 마당에서 가족들이 저녁식사를 하며 모여앉아 있었다. 경계심을 잔뜩 품은 한남자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버스 티켓과 숙소의 바우처를 번갈아 보여주며 내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이 동네에 친구가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는데, 그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다고 했다. 도움을 주어 고맙다며 기꺼이 대답을 했지만, 그순간, 눌러두었던 두려움들이 모두 동원된 듯한 커다란 무서움에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이 사람의 도움이 과연 믿을만한지에 대한 판단 불가능함이 주는 두려움, 그렇다고 다른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해결책이 없다는 두려움, 이 모든두려움을 안고 나는 그 사람의 차에 올라탔다. - P230
내가 요 근래에 주로 맺어온 관계는 대체로 교류나 친목에 해당한다. 나의 교류란 주로 성과에 대하여 서로 거래하거나 응원하거나 침투하는 것이다. 거리와 감정과 체면 같은 것을 미세하게 측정하고, 적정선을 지키기 위해 항상 긴장을 해야 한다. 나에게 친목이란, 준거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인맥을형성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어느 정도는모두가 모두에게 경쟁 상대이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겸손을 스스로에게 무장시키고, 선을 지키기 위해서 다정함과 호의도 과하지 않은 선에서 유지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감정 노동이라고 일축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나‘라는존재는 대개 누군가의 도구로 취급된다. 사람을 만나서 힘을얻고 용기를 얻고 살아 있다는 기쁨을 얻는 일은 점점 드물어진다. 눈치를 보고 눈치를 주고 말조심을 하면서 경계심을최대한 갖추고 있되 경계심을 들켜서는 안 된다. 알고 지내는사람은 많지만, 친구라고 부를 만한 편한 사이는 두어 사람에불과하다. - P243
결속력 없이도 행할 수 있는 다정한 관계, 목적 없이도 걸음을 옮기는 산책, 무용한 줄 알지만 즐기게 되는 취미생활, 이름도 알지 못하는 미물들에게 잠깐의 시선을 주는 일, 아무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 싱거운 대화, 미지근한 안부 식물처럼 햇볕을 쬐고 바람을 쐬는 일. 인연이희박한 사람, 무관한 사람, 친교에의 암묵적 약속 없는 사람과나누는 유대감이 수수한 마주침을 누리는 시간이 나는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에 사람은 목소리와 표정과 손길로실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245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우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한 걸음도 앞으로 걸어갈 수 없는 시간이 올 것은 몰랐다.
어떤 경우에도 바깥을 두리번거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 P248
바깥을 돌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올 것은 몰랐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마음먹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인간을 이해하면 내가 훼손될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용서해야 한다고 마음먹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감옥에 갇힌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어떤 경우에도 도처에 새로 알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어떤 경우에도 도처에 새로 만나는 사람이 생긴다.
어떤 경우에도 도처에서 나는 새로 태어나야 한다. 죽을 때까지 완전하게 숨이 멎을 때까지 - P249
아무것도 아닌 장면을 오래 들여다볼 때가 많다. 하염없이. 생각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장면인 줄 알지만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내가 아는 말 중에 가장 기만에 가까운 말이 되어간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 요즘 나의 주된 업무이다. 아무것도 아닌 장면을 차곡차곡 모아서 이불을 내다 널듯이 세상에 내다널고 싶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가 우리집을 올려다보며, 아나도이불널어야겠다 생각할 수 있기를바라면서, 화분을대문바깥에 쪼로록 내다놓을 줄 아는 집처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발길이 머무는 사람이 없을 수는없는 것처럼.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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