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에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굽는 생활처럼 태연하게
잘 지냅니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
나는 알게 된다
아파요, 살고 싶어요, 감기약이 필요해요,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나는 되기로 한다
더러워진 채로 잠드는 발과
더러워진 채로 악수를 하는 손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했던 사람이
불구가 되어간 곳을 유적지라 부른다
커다란 석상에 표정을 새기던 노예들은
무언가를 알아도 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 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있다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중에서

시인 정지용은 여행을 ‘이가락離家樂‘이라 했다. 집 떠나는 즐거움.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우선 근사한 여행지를 전제하지않아서 좋다. 그저 집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뜻이 좋다. 집을 떠나면 우선 나는 달라진다. 낯선 내가 된다. 낯설지만 나를 되찾은 것 같아진다. 내가 달라진다는 게 좋다. 달라질 수 있는 내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좋다. - P32
나에게 여행은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구별 짓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로 기꺼이 나아간다. 낯설어져서 비로소 새로워지는 나를 자랑하고 싶을 때, 엽서를 사러 나간다. 엽서를 고르는 데에 한나절, 엽서에 쓸문장을 고르는 데에 한나절을 쓴다. 엽서를 부치면 나는 내용을 잊는다. 그 내용을 기억하는 건 친구들의 몫이다. "나는 이곳에 와 있어"로 시작되는 엽서 한 장을 쓰기 위해서 어떤 하루를 다 쓴다. - P35
이번 여행에선 친구들이 내 가방을 들어주었다. 발에 깁스를 한 탓에 내 두 손은 목발을 붙잡아야 했다. 이번 여행에선친구들의 사진을 많이 찍어주었다. 해줄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였다. 이번 여행에선 주로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친구들이 멀리까지 갔다가 내게 돌아와 자신들이 본것에 대해 얘기해주면 나는 귀를 기울여 그 얘기를 들었다. 상상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나도 들려줄 이야기가 있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에 대해서. 걸음걸이에 대해서. 돌아올 때에달라진 표정에 대해서. - P59
터키에서 나는 길을 잃고 방황한 적이 없었다. 무거운 배낭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보면, 잘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 말만 남기고 그냥 가는 사람은 한 번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을 불러와서, 내가 길을 제대로 알 때까지 나를 도와주었다. 교통카드 없이 현금만 갖고버스를 타서 당황했을 때에도, 버스기사는 괜찮다며 그냥 태워주었다. 내릴 정류장을 몰라서 옆에 서있던 승객에게 말을붙였을 때에도, 버스에 탄 승객들 모두가 한꺼번에 나에게 대답을 해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지도를 보고 있을 때에도 누군가 다가와 배낭을 들어주고 숙소까지 동행해주었다. 민박집 여자는 배부르다고 말할 때까지빵을 주었고, 차를 따라주었다. 매일매일 과일을 함께 먹자고나를 불렀고, 시시때때로 차를 마시자고 나를 불렀다. 금의환향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지만, 금의환향한 자가 누렸을 법한대접을 받았다. 터키를 여행한 다음부터는 여행가방을 끌며길을 헤매는 듯한 여행객을 보면, 나도 터키사람이 된다. 길만 가르쳐주지 않고 찾아가고 싶은 그곳까지 데려다준다. - P68
고산증 덕분에 호흡이 가쁘고 심장에 압박을 느끼고 두통과 메스꺼움에 시달렸지만, 그 도시가 좋았다. 가깝게 내려앉은 구름도 좋았고, 산등성이를 타고 형성된 빨간 지붕의 마을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거리를 걸어다니는게 좋았다. 긴장을바짝 하며 소매치기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움츠렸지만, 골목골목을 구석구석 걸어보고 싶어했다. 결국 지갑을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당장 이 도시를 떠나야겠다 낙담했지만, 숙소로 돌아와 코카차를 끓여주는 한 사람의 미소 덕분에 오래오래 그 도시에 머물렀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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