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를 여전히 먹여 살리는 것처럼, 죽어도죽지 않는 문화적 아이콘들이 떠받치고 있는 도시들이 세계 여기저기 적지 않을 것이다. 한가할 때 한번 그렇게 유령 시장이 된 사람들과 그들의 도시를 쭉 짝지어 리스트로 만들어보고 싶다. 게으른 여행자라 다 가보지는 못한다 해도 말이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실존하지 않았던 가상의 인물들도 좀 껴 있어서, 흥미가 더해지지 않을까 한다.
돌아오는 기차에선 호엔잘츠부르크성에서 재미 삼아 쏘아본 석궁 과녁 종이를 꺼내보았다. 화살이 뚫어 일어선 가장자리가 촉감이좋았다. 가운데를 두 번이나 맞힌 것이 아직까지도 자랑이다. - P168

영어로 치면 스리 랜드 포인트인 것 같았다. B와 S가 나를 끌고경계석으로 향했다. 무엇의 경계인가 했더니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 세 나라의 국경이 한 점에서 만나는 꼭짓점을 표시하고 있었다.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그 전날, 유연한 국경이 재밌다고 말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야말로 가장 유연한 곳에 데려다준 것이었다. 네 살, 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경계석 근처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 걸음 딛을 때마다 발밑의 나라가 바뀌었다. 뒤로 국기가 셋 꽂혀 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군인이 없었다.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공원이었다.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높은ㅅ 목소리로 신이 난 채 어린이들과 경계석을 빙빙 돌았다. 내 격한 반응에 B 자매는 만족한 듯했다. 한 걸음마다 벨기에였다가 네덜란드, 네덜란드였다가 독일, 독일이었다가 벨기에……. 뭐라 할 수 없이 멋진 경험이었다. - P184

브뤼셀 왕립 미술관이 벨기에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왕립 미술관을 향해 따뜻하고 달콤해진 배를 안고 걷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서 땡땡과 스머프가 튀어나왔다. 땡땡의 모험은 1929년부터 연재되었던 작품이라 이제 와서 보면 아시아인으로서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인종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시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손이 가지는 않는 편이다. 그보다 더 전에 쓰였어도 지금의 우리를 상처 주지 않는 좋은고전을 탐색하거나 동시대의 작품들을 성실하게 찾아보는 게 폭력적인 작품을 견디며 계속 읽는 것보다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어떤 작품은 잊히고 어떤 작품은 계속 살아남는 것일 테다. 오래 살아남는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당대의 인식보다 더 멀리 나아가야 하는 것 같다. 설령 곧바로 이해받지 못하고 비난만 돌아온다 해도……………. 우리가 지금 사랑하는 작품들 중 많은 수가 감내해야 할 것들을 감내하며 멀리 밀고 나갔던 작품들인 것이다.  - P197

각났세상은 망가져 있다. 어떻게 고쳐야 할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무참히・・・・・・・ 그것을 알면서 여행하는 것은 묘한 일이다. 여행지에 이르러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사실은 아름답지 않다니‘ 중얼거릴때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지는 마음은 현기증을 일으키고 만다.
브뤼셀에서 묵은 숙소는 맨해튼 거리에 있었다. 브뤼셀을 떠나던 7월 21일은 벨기에의 국경일이어서 오줌싸개 동상은 전날과는달리 옷을 잘 차려입고 있었다. 동상의 옷을 갈아입히는 사람들을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했다. - P203

브뤼헤의 정취에 발목까지만 담근 다음,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돌아왔다. 숙소 근처를 산책하며 전날 본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다시금 이해했다. 밤도 낮도 아닌 그 그림 속 시간은 개념적인 것일뿐만 아니라 벨기에 북부엔 실제로 존재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가로등이 켜지고도 해가 어찌나 천천히 지는지 영원히 지지 않을 것같았다. 10시가 넘어서야 해가 지는 서늘한 여름이었고 잡음 없이조용했다. 빛의 제국이란 소리가 없어야 성립될 수 있는 것이구나,
아마추어 감상가로서 가슴 두근거리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일찍 귀가해 발걸음 소리도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풀벌레도 날개를떨지 않는 깨끗한 무음 속을 걸었다. 직접 감각하고서야 이해할 수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예민한 몸을 끌고 다니는게 싫어 여행을 망설이는 사람도 계속 여행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요소들에 대해서.
- P207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긴 의자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등받이가 거의 누워 있어서 거기 앉는 사람도 눕게 되었다. 그 의자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긴 있었지만 어째선지 잠든 이들이 많았다. 코를 골기까지 했다. 깨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약간 해양 포유류가 된 기분으로 나란히 누워 있거나, 아트 북 코너에서 트렁크에 몇 권이 들어가려나 탐욕스럽게 계산을 해보곤 했다. 아트 북들이 그렇게 크고 무겁지만 않았더라면 많이 사 왔을 것이다. 가격도국내 가격의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때 그 책들에서알게 된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지금껏 열심히 따라 살펴왔다. 해외예술가들의 동향을 이처럼 쉽게 알 수 있다니, 인터넷은 대부분의경우에 끔찍하지만 가끔 정말 멋지다. - P225

여자들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세계 곳곳의 여자들의 삶에 대해, 여자 이름으로 된 제목의 소설들을 많이 쓴 것은 그래서인것 같다. 하루는 처음으로 부르카를 입은 여자를 보기도 했다. 여자는 혼자 걷고 있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평범한 랄프 로렌 셔츠와 나이키 운동화 차림이었다. 색색의 평상복 사이에서 혼자 눈만 남기고 검은 천으로 휘감은 모습은 둔중하게 다가왔다. 어디까지가 당사자의 선택이고 어디서부터가 집단적 압력의 결과일지, 존중에서 비롯된 문화상대주의가 폭력에 대한 방관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는 지점을 어떻게 짚어낼지 항상 어렵게 느껴진다. 세계가 이렇게망가지고 무너져가는 것은, 이 세계를 복원하고 개선할 가능성을 가진 여성들이 교육과 사회활동의 기회를 얻지 못해서가 아닐까 두려워하며 추측하기도 한다. 그 여성들이 잃은 가능성은 결국 인류가잃은 가능성이 될 확률이 높아 조급해지지만, 여성이 극도로 억압받는 지역에서도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보이고 먼 곳에서도 지지를 보내기 예전보다 쉬워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모여서강해지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인권 단체에 기부를 하고 오지은의 작은 자유를 들으며 마음을 다진다. - P227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단 걸 깨닫고도 끝까지 가야 하는 경우였다. 인생에 대한 비유처럼 들리네, 하고 그와중에도 웃었다. 문제는 뒤셀도르프 숙소의 체크인 시간이었다. 아무리 시간 계산을 해봐도 뒤셀도르프에 도착하면 자정을 넘길 게 분명했다. 숙소에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아아, 그런 일도 종종 일어나죠. 체크인 시간 안에 못 온단 말이군요? 그럼 와서 현관에 붙은 인터폰을 눌러요. 내가 열어드릴게요."
숙소 사장님은 흔쾌히 대답했다. 스트레스를 한참 받은 와중에도 안심이 되었다. 차가워진 손을 주무르며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고 어찌어찌 상황을 해결했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렸는데…………사장님은 호언장담을 저버리셨다. 숙면을 취해버리신 것이다.
그 밤만큼 난감했던 적이 또 없었다. 뒤셀도르프역에 도착했을때는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고 숙소 근처까지 가자 1시였다. 가는 길엔 지하도를 건너야 했으며 벽에는 위협적인 늑대 그래피티가그려져 있었다. 인적이 없는 게 무서웠는지 있었으면 더 무서웠을지모르겠다. - P233

장르가 달라도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린 다음 힘든 중간 단계를거쳐 끝까지 밀어붙이는 과정은 비슷하니 다 통할 거라고 대답했다.
효과를 믿기보다는 강렬하게 바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것자체가 의미 있었다. 한편, 모차르트 초콜릿은 있는데 베토벤 초콜릿은 없는 게 의아했다. 피너츠』의 슈로더가 알면 서운하겠네, 하고웃었다. 슈로더가 베토벤을 생각하듯이, 자주 박완서 선생님을 생각한다. 편집자로 일할 때 멀리서 딱 한 번 뵌 적이 있다. 그것도 뒷모습이었지만. 돌아가셨을 때 슬펐는데, 곧 「박완서 소설 전집이 스마트폰 앱으로 나와 색다른 위로가 되었다. 그렇구나, 선생님은 돌아가셨지만 전집 앱으로 오래오래 머무시겠구나, 그럴 수 있는 작가가정말 적은데 대단한 탁월함이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과 실루엣을 딴 초콜릿들을 잠시 상상해보았다. - P240

미완결성은 물리적으로도 들어맞아, 도시 한가운데공동들이 산재했고 온통 새로 지어지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 사진을찍어도 크레인이 찍혔다.
짧게 머문 것이 아쉬웠는데 다행히 언제나 책이 있고, 한은형의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와 박민정의 서독 이모』를 읽으며 베를린만의 질감을 즐길 수 있었다. 다시 베를린에 갈 수 있게 될 때까지, 베를린에 대한 책을 잔뜩 읽고 싶다. 베를린에 다녀와서 베를린에 대한 책을 끝없이 읽는 것과 베를린에 대한 책을 모조리 읽은 다음 베를린에 가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베를린을 이해하는 데 적합할까? 알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 쓰고 싶다. - P259

 트럭 운전사의 보조를 하며 생크림을 배달하셨다고 한다. 생크림을 배달하는 젊은 할아버지를 상상해보았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막막했을 것이고, 또 어떤 날은 막막하면서도 햇빛이 좋아 작은 즐거움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그렇게 유학한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된할아버지가 엄마를 포함해 딸들을 다 대학에 보내셨고, 손녀들에게도 언제나 큰 기대를 걸어주셔서 힘을 얻었다. 문학 애호가답게 헨리크 입센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추천해주신 데다, 책을 쓰고 드라마를 쓰라고 격려해주신 적도 있는데 뭘 어떻게 미리 아셨던 걸까싶다. 돌아가시기 전에 데뷔했으면 기뻐하셨을 텐데 1년 반쯤 어긋나고 말았다. 내 소설 속 좋은 어른들은 할아버지를 닮았다. 누군가를 동등하게 대해주는 것, 북돋아주는 것, 가능성을 알아봐주는 것은교육자의 자질이기도 하고 어른의 자질이기도 한 것 같다. 내가 받은 응원과 지지를 이야기로 감싸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 P272

어느 나라나 위험한 일부가 있고, 상식적인 나머지가 그 위험한일부에 휘둘리고 끌려가고 동조해버릴 때 모든 게 나빠지는 것 아닐까 추측한다. 나는 그즈음 베를린에서 묵었던 티어가르텐이 히틀러시기엔 정신질환자와 장애인, 외국인들을 강제로 불임시키고 각종생체 실험을 하던 지역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참이었다. 21세기의국가들은 20세기 국가들로부터 멀리 왔지만, 조금만 경계를 낮추면악의는 습기 높은 계절의 곰팡이처럼 기세를 떨치며 확산하고 지우기 어려운 얼룩을 남긴다. 이를테면 일본에는 나와 내 책을 극진히사랑해주는 다정한 독자들이 계시지만, 서점에서 내 책은 혐한 서적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일 것이다.  - P273

오사카 국제미술관에서는 엘 그레코 특별전이 한창이었다. 처음에는 왜 현대미술관에서 16세기 그림을 전시하는지 의아했지만 그림을 보자마자 모던함이 느껴져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은 스스로 뭘하는지 인식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엄청 다른 걸 그리고 만 듯했다.
정신은 시대에 속해 있지만 몸이 먼저 앞서 나가는 예술가들이 재밌는 것 같다. 특히 「사도 성요한」의 독배를 든 초록빛 옆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기다란 손가락들이 16세기를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 시대와 묘하게 불화하는 느낌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만큼 가까이에 그 작품을 신나게 등장시켰다. 여행의 조각들이 소설에 석영처럼 박혀 있는 것을발견할 때마다, 좀처럼 여행하지 않는 나의 등을 떠밀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느낀다. - P276

존재하지 않는 괴물도 존재하는 괴물도 이겨낼 수있을 것이다. 일부러 통과하기 쉬운 의례를 만들고, 삶과 기억에 분기를 두어 다음 세대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겠구나, 짐작했다.
결국 해가 질 무렵, E씨와역앞에서 헤어지게 되었고 아쉬운 마음에 주소를 주고받았다. E씨와의 여섯 시간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서 얻은 빛을 오랫동안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보답을바라지 않는 친절을 곱씹을수록 나도 E씨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감사 인사 삼아 홍삼과 여러 가지를 담은 소포를 보냈고, E씨도 교토의 해조류 절임과 아름다운 찻잔을 보내주시는 등 몇 번의 교류가 더 있었다. 너무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아서 자제하지만, 언제나 E씨의 안녕과 건강을 바란다. 특히 여름마다아라시야마의 홍수 뉴스가 보도되는데 그럴 때마다 걱정이다. 또 편지를 쓰고 싶다. 함께 걸었던 길을 자주 생각합니다, 저는 뒤에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잘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고 번역기가잘 번역해줄지 모르겠다. - P284

생몰년이 정확하지 않아 970년 즈음 태어나 1025년 즈음 사망한걸로 추정되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삶이 궁금하다. 보수적인 전근대아시아에서 가장 사랑받은 여성 소설가가 아닐까? 지금 시대를 여성 소설가로 사는 것도 여러 가지 소설 외적인 것에 시달려 지치고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앞선 작가들을 생각한다.
20세기의 작가들, 19세기의 작가들을 거쳐 자꾸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0세기 사람도 언니처럼 느껴지고 만다. 비슷한 괴로움을 가졌었나요? 외로울 때가 있었나요? 이야기를 미끄러지듯이 쓸 때와 쓰다가 멈췄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나요? 한 시간쯤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것을 잔뜩 물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도 죽고 나서 작은도서관 같은 게 되고 싶다."
신이 나서 엄마에게 말했더니 엄마가 당황해하던 게 기억난다.
부모는 아무래도 자식의 죽음을 그다지 떠올리지 않는 것이다. 자식의 경우는 그러지 못해 수많은 동화책들이 부모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쓰였는데 말이다. 부모는 자식을 더 속 편하게 사랑하며, 동시에 더한 무방비에 놓이고 만다. - P287

이틀 연달아 너무 많이 걸어 발톱이 빠지려 하는 상태여서, 엄마는 숙소로 먼저 올라가고 C와 둘이 도토루에 갔다. 둘 다 동절기 한정 메뉴인 밤 맛이 나는 커피를 골랐다. 마지막 밤, 카페인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해도 그렇게 친구와 이야기하는 게 좋았다. 사람마다맞는 장소가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내 경우엔 그게 서울이었지만 C는 다시 찾아야 했다는 걸 한층 이해할 수 있었다. 걷다 보면거리에 녹아들 수 있는 도시가 꼭 태어난 도시는 아닐 수도 있고 그런 경우 그곳을 찾기 위해 떠나봐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친구와 일상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게 슬퍼도 걸음걸음을 응원한다.
C와 사흘 연달아 만나서 좋았는데, 그날 밤 마음이 헛헛해지고말았다. 역시 초능력을 얻는다면 순간 이동이 좋겠다. 친구들이 있는도시의 커피 체인점에서 한 시간씩만 만나고 올 수 있도록. 그래도며칠에 한 번씩 서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서로의안녕을 바라고 감미로운 잠과 이어질 다음 날을 기원해주는 사이인것만으로도 계속해나갈 수 있다. - P290

사랑 아닌 다른 부분이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 명확히 관여했는데 스스로가 그걸 보지 못했다는 것이 기묘했다.
여러모로 공적인 문제를 공적으로 파악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행이다. 모두가 안전하다고 느낄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도저히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이 마땅히 안전을 누리게 되면,
삶의 선택들이 크게 바뀔까? 외부의 폭력이란 불순물이 제거된 사랑과 시민 결합은 어떤 형상일까? 바뀌어갈 사회가 궁금해서 오래살고 싶어진다. - P304

SF 작가라서 믿는 건 과학밖에 없지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언제나 한껏 이끌리고 만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한 사람이 어떤 것을 강렬히 염원하는지 존중으로 멀리서 나누고 싶어진다. 룽산사와 바오안궁을 가보기로 한 것은 그래서였다.
룽산사는 들어서자마자 건축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물론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사찰이니 아름다운 게 당연하지만, 분명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다고 했는데 그런 흔적을찾아볼 수 없는 화려함이 대단했다. 기둥만 두 시간쯤, 지붕만 한 시간쯤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P315

하지만 결국 누구나 아프기 마련이니, 이야기 매체에 잔잔하게아픈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프지 않은사람이 잘 없는데 이야기 속 세계에는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과 중병에 걸린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다. 중병을 다루는 방식에도 문제가없지 않고, 안고 사는 병은 아예 생략되고 있는 게 아닌지 싶다. 얼마전 또 한 번의 위로는 블랙핑크 다큐멘터리 「세상을 밝혀라」에서 제니 씨가 "온몸이 아파"라고 말한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아이돌이 솔직하게 온몸이 아프다고 말하는 걸 보자뭉클했다. 세븐틴 다큐멘터리 ‘히트 더 로드」에서도 투어 중에 멤버분들이 돌아가며 아프던데, 편집하지 않고 보여주어서 좋았다. 우리사회는 지나치게 항상 건강함을 연기하고 있지 않은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 P317

이기존의 통로들이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길들이 아닌지 늘은근히 의심하고 있다. 문학계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서구의 문학상들을 그렇게 선망할 필요가 있나? 권위를 너무 바깥에서 찾고 있는게 아닐까? 국제 문학상이 연결의 매개체인 것은 확실하니, 차라리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함께 문학상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지? 영미권이나 서유럽의 인정을 받아야 작품을 재평가하는 분위기도 좀아리송하다. 그 전에도 그 작품들은 좋은 작품이었는데 무관심과 냉대 속에 있지 않았나? 반면에 1세계 작가들이 아시아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그것으로 본국에서 호응을 얻는 일은 잘 없는 것 같아기울어진 지형에 마음이 좀 꼬이고 만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하기어려운 우회 경로들이 많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가가 내한했을 때 릿터」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프리카작가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ME작가를 만나기 위해 유럽을 통해야 하는 기이함에 대해 깊이 공감하며 대화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직접 항로들이다. 그리고 그 굴절되지 않은 길들을 아끼고 우선시하는 일이다. 아시아인으로서 아시아를 더 열렬히 사랑하고 싶다. - P335

런던아이를 해 지는 시간을 계산하여 예약했는데, 비가 오지 않아 노을과 야경을 모두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탔을 때 마지막으로 하얗게 빛나던 하늘이 내릴 때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클래식영화 속 런던의 건물들이 그대로여서, 우리의 시대가 지나고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도 그대로겠구나, 우리가 건물들을 방문하는 게 아니고 건물들이 잠깐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다. 언제나 거기 있을 것과 잠깐 거기 있는 것들 사이를 누빌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여행할수 있는 시기가 오면, 행운들이 고르고 넓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 P377

무형의 콘텐츠가 가지는부가가치는 무시할 게 못 되었다. 이전 시대의 창작자들과 그들을계승한 동시대의 창작자들이 이뤄내고 있는 풍부한 문화적 축적과그것을 즐기고자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도시가 가지는 저력이 탐나는 목표가 되었다.
뮤지컬을 보고 나서 더더욱 자주 로알드 달의 말을 떠올린다.
"친절함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한다. 용기나 대담함이나 너그러움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친절함이 말이다. 당신이친절한 사람이라면, 그걸로 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의 말을 어설프게 번역해보았다. 어른이되고 나서야, 세상의 보고 싶지 않았던 면들을 보고 나서야 이 말이의미 있게 와닿았다. 아동문학을 쓰고 싶었는데 다른 방향으로 와버렸지만, 세계에 대한 태도를 다시 다잡고 싶을 때는 역시 아동문학을 찾게 된다. - P382

여행 전에는 기대감으로 즐겁고 여행 중에는 충만감이 차오르는데여행 후에는 상실감이 찾아오는 것 같다. 어떤 여행이든 그렇지만런던에 다녀왔을 때 유독 심해서, 집에 돌아온 밤 카메라의 메모리를 살펴보다가 이상한 착각을 하고 말았다. 찍은 사진의 절반이 날아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분명히 찍었던 것 같은 사진들이 없었다. 당황해서 메모리 복원 프로그램으로 몇 번 복원도 시도해보았는데, 그러다가 깨달았다. 머릿속에 남은 강렬한 이미지들을 사진으로착각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사진으로 착각할 만큼 생생했던 이미지들도 이내 희미해지고 잊히게 된다. 안쪽에서 그렇게 빛을 잃고 사라져가는것들을 느낄 때 안타까움이 깊어진다. - P389

 겨울에도 유유히 물 위를 미끄러지는 물새들 가운데 가끔 다른 종이 하나 천연덕스럽게 섞여 있는 경우가 많던데 혼자 다른 종류라는 걸 알고 다니는지 모르고 다니는 건지……….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새를 보러 자발적으로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순천만에도 가고 연천에도 가고 강원도에도 가고 제주도에도 갔다. 새들이 많고 보호에도 힘쓴다는 싱가포르에도 갔었다. 매번 누군가의 부추김에만 여행을 떠났는데 몇 안 되는 자발적 여행을 한 셈이다.
새의 사진을 찍어볼까도 했는데, 그것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내수준으로는 도저히 움직임을 쫓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이상하게도새들의 이미지는 내 안에서 덜 유실되는 것 같다. 물총새의 움직임처럼 강렬한 것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서, 상실감 없는 취미를찾은 것이 기쁠 뿐이다. - P3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