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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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의 시간

           심보선

   책을 읽을 시간이야

   너는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네가 조용히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나는 이혼은 했는데 결혼한 기억이 없어

   이혼보다 결혼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키스할 때

   서로의 혀를 접으려고 애쓴다

   무언가

   그 무언가를 표시하기 위해

   영원히

   키스하고 싶다

   이별하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나는 천성 바깥에서 너와 함께 일생을 헤맬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

   떠나가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어디론가

   그 어디론가

          시집[오늘은 잘 모르겠어] 중에서

   출근 시간이 좀 늦었지 뭐야. 읽고 있던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얼마 남지 않았고 다 읽고 나면 어쩌나 싶어서 빼어든 시집이 심보선의 『오늘은 잘 모르겠어』 였어. 나란히 꽂힌 세 권의 시집 중 가장 최근 것으로 고른 셈이지. 그렇게 허겁지겁 출발했고 조금 늦어서 허둥대다가 보도블록 튀어나온 걸 못 보고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 뭐야. 작년 겨울에 사고 이후로 얼마나 다치는 걸 무서워하는데, 걸음걸음마다 조심하고는 해도 원체 잘 넘어지는 걸음걸이는 자주 위태위태해. 아무리 조심했어도 무르팍이 성하지 않는 걸 보면 몇 번 넘어지기도 했던 거지. 땅 한 뙈기도 갖지 못한 설움을 몸뚱이가 그렇게 표출하는 것인지, 수원에 이어 용인 땅도 내 것으로 삼으려고 그러는지 쿵~ 찜해두는 영역이 자꾸만 늘어나서 정말 걱정이야.(아, 아니다. 땅 한 뙈기도 갖지 못했다는 말은 수정되어야겠구나. 40년 가까운 낡은 아파트의 지분이 반 있는데, 비록 또 그중 반은 대출이기는 해도. 어쨌든 몇 평 정도는 내 몫의 땅이 있기는 하다. 그래서 수정~땅땅. 이렇게 해 놓으면 덜 넘어지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맨날 빨빨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잖아. 하루에 두 시간에서 네 시간씩 걸어다는 건 기본인 것 같은데. 언제였는지 본 기억이 있는데 인도의 공사가 제대로 마무리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사고를 당한 시민이 지자체를 상대로 소송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어. 만약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느 쪽일까? 아닌 걸 아니라고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의 용기는 부럽고, 꼭 그런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응원하지만 나는 혼자 끙끙대고 말겠지. 나란 사람이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지. 그러니까 그냥 조심하자 그렇게 티셔츠가 조금 젖을 만큼의 땀이 찬 상태로 늦지 않게 출근을 했고 예상대로 『그 남자네 집』은 다 읽고 말았어. 단편으로 실린 적이 있는 글을 장편으로 이어서 쓴 글이어서 읽을 분량이 줄어든 이유도 있었지만 술술 잘 읽히는 책이야.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분명 다 아는 내용이고 읽었던 책인데도 처음인 것 같아. 기억이 날아가서 그런 걸 테지만 꼭 그럴까? 오래된 글인데 신선한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 다시 읽고 있는 선생님이 책이 현재까지는 다 그래. 다음에 읽을 건 『아주 오래된 농담』인데 이 책도 그럴까? 역시 신선하게 잘 읽힐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어. 가지고 있는 선생님 책들을 다 읽으면 나머지는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을 생각이야. '책을 줄여야겠다'라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려고는 하는데 지킬 수 있을지는 정말 모르겠어.

   『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시집치고는 꽤 두꺼워. 전체적으로 시들도 긴 편이어서 호흡이 힘들어지고 어려운 느낌이 마구마구 들어. 그나마 [독서의 시간]은 짧은 편에 속하고 마침, 독서의 시간을 마쳤잖아.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그 남자의 집]은 결국은 이별 이야기야. 그 남자의 집과, 그 남자와, 그 시절과 이별하는 이야기.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처럼 죽음에 골똘한 적이 있을까 싶어. '모든 이별은 결국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고 그 사실을 수행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거라는 현재를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있는 거지. [독서의 시간]이 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쏙쏙 들어오지 뭐야.

   그 남자는 시를 좋아할 뿐 아니라 외우고 있는 시가 많았다. 가로등 없는 골목길을 오 리를 십 리, 이십 리로 늘여서 걸으면서, 또는 삼선교의 포장마차집의 새파랗고도 어둑시근한 카바이트 불빛이 무대조명처럼 절묘하게 투영된 자리에서, 그는 나직하고도 그윽하게 정지용, 한하운의 시를 암송하곤 했다. 그 남자는 그 밖에도 많은 시인들의 시를 외우고 있었지만 내가 누구의 시라는 걸 알고 들은 건 그 두 시인의 시가 고작이었다. 포장마찻집에서는 딴 손님이 없을 때에만 그런 객쩍은 짓을 했기 때문에 주인 남자도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다 듣고는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한 것 같다고 고마워했다. 나에겐 그 소리가 박수보다 더 적절한 찬사로 들렸다.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그 남자의 집 p44]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이 한 줄의 문장으로도 [그 남자의 집]을 다시 읽는 [독서의 시간]은 충분했어. 꼭 그런 시절은 아니지만 가끔 나의 사치에도 '시'가 있으니까. 예를 들자면 지금 같은 때가 그렇고, 어쩌다 타게 되는 아침 버스 안에서, 어쩌다 앉게 되어 읽는 '시 한 편'이 그렇고.

   오늘은 잘 모르겠어. 책이 나를 "어디론가/그 어디론가" 끌고 갈지는. 그래도 책이 있어, 시가 있어, 일이 있어서 나의 하루하루는 완성되어간다는 믿음이 있어. 넌, 어때? 너는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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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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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박소란

 

 

   우리는 자주 다툰다

   너는 고집이 세고 언제나 나를 이긴다

 

   한 사람을 향해 갈 때

 

   한 사람으로부터 힘겹게 돌아서 올 때

   느닷없이 너는

   한 사람을 부른다 더없이 긴한 몸짓으로

   불러 세운 뒤 그 팔을 목을 끌어다 잡는다

 

   나는 당황스럽다

   너의 상스러운 행동이 지나치게 진지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한 사람은 놀란다

   마음을 호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채

   재빨리 달아난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는 붙든다

   버림받은 자 특유의 파리한 몸뚱이를 다섯개의 가느다란 리본으로 얼기설기 포장한

   너를

 

   누군인가

   누구의 슬픈 애인인가

 

   나는 껴안은다 껴안고야 만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면 그만 한 줌 꿈으로 부서져버릴 것 같은

   너를

 

   나는 왜 고작 손인가 우두커니 생각에 잠긴

   너를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중에서

 

 

 

   왼쪽 엄지손가락을 살짝 베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상처 부위에서 피가 나오길래 밴드를 붙이고, 그 위에 반창고까지 붙였다. 고작 손가락의 작은 상처도 이렇게 확실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내친김에 손톱을 깎고 핸드로션을 발랐다. 손가락이 휘어지고 튀어나온 관절들이 이제는 쉽게 눈에 띈다.

  누군가를 만나면 손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다. 상대방의 손짓이나 손 모양, 손을 쓰는 방식, 손가락 길이, 손톱 상태 등. 손은 그저 손일뿐인데도 참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이야기를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신체의 일부분인 손 하나로 그 사람의 전부를 다 알 순 없지만 손으로 그 사람을 파악하려는 은밀하고 나쁜 짓거리가 고쳐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재주가 있는 손인지, 고생을 많이 한 손인지, 손을 정성스레 가꾸는 사람인지 혼자 유추해보고는 한다.

   "나는 왜 고작 손인가 우두커니 생각에 잠긴" 손을 떠올렸다. 손가락이 길고 가늘고 얇은 손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은 어쩐지 악기도 잘 다루고 그림도 잘 그릴 것만 같아서다. 내게 부족한 예술가적 기질이 짧은 손가락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긴 손가락의 소유자는 다재다능할 것이란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내 손은 짧고 뭉툭한 손이다. 울 엄마의 손도 그랬고 살아있던 세월보다 이제는 떠난 세월이 길어버린 귀안 오빠의 손이 그랬다.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던 거칠고 따뜻하고 뭉툭하던 두 사람의 손이 생각난다. 오늘은 벌써 34년 전 서른에 세상을 떠난 버린 귀안 오빠의 기일이다.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것을, 사라져가는 흔적을 나라도 기억하고 싶다. 내가 아는 한 한번도 이생에서 평안하지 못했던 오빠는 그곳에서는 평안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생전에도 평생을 속깨나 썩이던 자식이 너무도 일찍 당신을 만나러 왔을 때 엄마가 어떻게 했을지 알 것만 같다. 등짝을 후려치면서 어쩌자고 벌써 왔냐고 대성통곡을 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발을 동동 구르며 또 한 번 등짝을 후려치면 단춧구멍 보다 작은 눈의 오빠는 잘못했다고 눙치며 너스레를 떨었을 것이다. 그것도 벌써 34년 전이네. 두 사람은 그쪽에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여전히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사람 안 변한다. 그래도 두 분, 평안하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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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련을 만나던 날부터 생각이 날 듯, 날 듯했다. 목련에 대해 연정을 품게 만든 구절을 만난 적이 있는데 뭐였지? 뭐였지? 그렇게 박완서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 마침 묵혀두고 있는 기나긴 하루도 있겠다. 그래, 이 아픈 사월, 박완서 선생님과 함께하자고 마음먹었다. 당신이 떠난 지 십 년, 멀리 두고 있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기나긴 하루,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친절한 복희씨까지 읽었다. 분명 다 읽은 책들을 다시 읽는 것인데, 처음 읽는 새로움을 만난다. 특히 친절한 복희씨속 작품들은 완전히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고 놀라웠다. 어떻게 10년을 멀리하고 있었던 건지 스스로에게 화가 날 지경이다.

   그리고 오늘 4월 16일. 벌써 7주기다.

   여전히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퇴근길에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선생님, 이 꼴은 안 보셔서 다행이라고. 그날 아침 뒤집힌 배를 보셨더라면 '천 불은 불도 아니라는'라는 것을, 다시 전쟁을 겪은 것처럼 참혹하셨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우리 세 몸뚱이 추위를 가리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해서 온전한 마을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국도 연변 마을의 파괴상은 참담했다. 꽤 큰 마을이 장독만 남겨 놓고 잿더미만 남은 데도 있었다. 초가집이 불타, 가볍고 고운 잿더미로 폭삭 내려앉은 집터를 지키고 있는 장독대의 아름다움은 너무 천연덕스럽고 기품이 있어서 혼령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마을의 고요는 묘지의 그것처럼 유구해 보였다. 평화로운 농촌을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한 게 미군의 폭격이든 인민군의 방화이든 잊거나 용서한다면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평화의 이름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이런 정당한 분노가 바로 인간다움일진대 어찌 이 땅의 평화를 바라겠는가 싶은 것도 우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기저귀를 구들장에 말리는 것보다는 밖에다 내 너는 게 훨씬 더 잘 마르게 생긴 햇살이 도타운 날이었다. 모조리 불탄 마을에서 좀 떨어진 외딴 집에서 무료한 낮 시간을 보내다가 그 마을에 감도는 고요에 홀려서 그 고운 잿더미 사이를 거닐 때였다. 장독대 옆에 서있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망울이 부푸는 것을 보았다. 목련나무였다. 아직은 단단한 겉껍질이 부드러워 보일 정도의 변화였지만 이 나무가 봄기운만 느꼈다 하면 얼마나 걷잡을 수없이 부풀어 오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미친 듯한 개화를 보지 않으면서도 본 듯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무가 된 거였다.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를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p98,99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해 5월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때는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아무 꽃이나 피어나는 시대가 아니었다. 오직 5월만이 잎도 꽃처럼 피어날 때였고, 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계절이었다. 교정에 꽃내음이 그득했고, 벌들이 윙윙댔다. p258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50년 5월이다. 다가올 불행을 알고 읽는 화사함은 전혀 화사하지 않다. 아니, 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화사함이 불행을 더욱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지금은 오월이 되기도 전에 라일락이 지는 고온의 시절에 살고 있지만, 1950년 5월은 6월의 무게에 눌려 없는 시절인 줄 알았다. 2014년 4월 이후 도 없는 시절이다. 수돗가에 앉아서 재재거리며 상추를 씻다가 그 소식을 들었던 날로부터 7년, "숨 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리고 찔리고 아리고 결국은 찢어질" 가족들은 어떨지 나로선 상상조차 안 된다.

   해가 더디 지는 봄날이었다. 밤 벚꽃 놀이는 중단된 채였지만, 전차가 창경원 앞을 지날 때는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릴 정도로 무르익은 화사함이 고궁 담을 넘쳐 전차 속까지 투영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나도 석간신문을 보다 말고,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비틀어 미친 듯이 만개한 벚꽃을 내다보았다. 왜 만개한 꽃만 보면 미쳤단 느낌이 드는지 몰랐다. 밤도 아닌 낮도 아닌 시간의 벚꽃이 풍기는 밝음은 화사하다기보다는 숨을 틀어막을 듯이 요기로워서 그런지도 몰랐다. p318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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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어나더커버 특별판, 양장 합본)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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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 여자 --20세기의 봄

            조선희 장편소설 (한겨레출판)

   정숙이 덤불 위로 고개를 빼고 보니 의용대 세 사람이 총을 쏘며 뛰어가고 있었는데, 하나는 능선 쪽으로 올라가고 하나는 산허리를 가로질러 가고 또 하나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가운데는 윤세주가 틀림없었다. 뛰며 구르며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대원은 진광화 같았는데 그 뒤를 일본군 수색대가 장총을 쏘아 대며 뒤쫓고 있었다. 일본군 하나가 총을 맞고 덤불 속으로 고꾸라지는 게 보였다. 계곡 쪽에서 콩 볶는 듯한 총성이 한동안 계속됐다. 총소리는 점점 먼 데서 들려오더니 마침내 최후의 총성이 산울림을 남긴 뒤 사위는 고요해졌다.

   적막 속에서 삼사십 분쯤 흘렀을까. 정숙의 일행은 두리번거리며 하나둘씩 덤불 속에서 걸어 나왔다. 모두 창황함으로 얼굴에 푸른빛이 돌았다. 세 사람은 일행의 퇴로를 만들어 주기 위해 스스로 표적이 되어 일본군 수색대를 유인했던 것이다. 일행이 세 명 줄어들었다.

   계곡 가까이 내려왔을 때 그들은 절벽 아래서 진광화의 시신을 보았다. 얼굴이며 가슴이며 팔다리가 구멍투성이 벌집이 되었고 핏물이 흘러 계곡을 벌겋게 적시고 있었다.

   정숙은 그 모습을 외면하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연안에서 진광화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중국 공산당원이었고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재원이었다. 평양에서 중학교를 나온 그는 광주廣州에서 중산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마르크스주의 서클활동 때문에 감옥살이하고 나와서는 대륙의 남쪽 끝인 광주에서 황하 이북의 연안까지 혼자 찾아왔다. 홍군 이동연극단 단장으로 태항산 전선에 파견돼 온 것을 조선의용대로 끌어들인 게 여섯 달 전이었다. 그는 선전용 단막극도 예술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고 진중陳中에서도 틈틈이 쉴러나 브레히트를 읽었다. "농부가 호주머니에 노신魯迅 문집이나 황신파黃新波의 연환화를 넣고 다니는 날이 오겠죠?" 그런 꿈을 꾸던 그는 1911년생, 이제 서른둘이었다.

   그들은 시체를 바위 아래 후미진 곳에 옮기고 나뭇가지를 덮어 은폐했다. 위치를 기억해두었다가 전투가 끝난 뒤 수습하러 오기로 했다.

   벌써 아침 해가 중천을 향하고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빗줄기는 황토 먼지 날리는 밭을 버리고 떠나오는 길에 뿌리더니 하늘은 다시 구름 하나 없이 파랗게 메말라 있었다. 태항산 지리에 밝은 그들은 총성이 들리는 반대편으로 우회해 종일 산길을 걸어서 저녁 무렵 팔로군 진지에 도착했다.

   1942년 5월 27일이었다.

   마전의 포위를 뚫고 나오면서 팔로군도 격전을 치렀고 부사령관 팽덕회와 정치위원 등소평 등 지휘부는 무사했지만 부참모장 좌권이 전사했다 한다. 전투는 일주일쯤 더 계속되었다. 일본군이 퇴각한 뒤 의용대가 진광화의 시신을 찾아왔다.

며칠 뒤 윤세주가 돌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정숙은 방을 치우다 말고 달려 나갔다.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이론가, 불굴의 용기와 기백을 가진 이 남자가 의용대 공동숙소의 마당에 누워 있었다. 날이 더워 주검은 이미 심하게 훼손되었다 했다. 정숙은 그 선량하게 생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거적때기를 들춰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계림에서 의용대를 이끌고 태항산으로 오지 않고 의형제 지간인 김원봉 옆에 남았다면 이런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숙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안으로 삼켰다.

   평양 사람 진광화와 밀양 사람 윤세주가 중국 대륙 깊숙이 태항산 골짜기에 묻혔다. 해질 무렵이었다. 정숙은 비 뿌리고 진한 핏빛으로 젖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몸이 땅에 묻히면 영혼은 노을에 묻히는가. 이곳에서 세주의 고향은 너무 멀구나. 그의 노모는 이 시각에 무얼 하고 있을까. 밭에서 호미질하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고 있으려나. p551~553

 

출처; 네이버이미지, 포토그래퍼; 이봉섭

 

 

  태항산, 세 여자를 읽기 전까지 태항산이 어디에 있는 어떻게 생긴 산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태산이나 황산처럼 험준하리라는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저 페이지를 읽고 나서 네이버 이미지로 찾아보았다. 전체는 아닐 것이지만 대강은 감이 오는 '태항산'이다. 저 압도하는 스케일에서 무엇이 우리의 젊은이들을 중국 내륙 저 깊숙한 골짜기에서 죽음으로 내몰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들의 후손인 나는 그들이 죽음으로도 지키고자 했던 이념과 국가에 부합한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자신 없다.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지만 그들의 죽음 앞에서 서늘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소설로 불러내는 개인은 "평양 사람 진광화와 밀양 사람 윤세주가 중국 대륙 깊숙이 태항산 골짜기에 묻혔다. 해질 무렵이었다. 정숙은 비 뿌리고 진한 핏빛으로 젖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몸이 땅에 묻히면 영혼은 노을에 묻히는가. 이곳에서 세주의 고향은 너무 멀구나. 그의 노모는 이 시각에 무얼 하고 있을까. 밭에서 호미질하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고 있으려나."로 그려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소설이 있어, 책이 있어,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영영 그들을 모른 채로 살았을 것이다.

   우리의 근 현대사가 이념에 휘말려서 사회주의자인 이 사람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한 세기가 지난 이 봄, 소설 속에서도 잠시 스쳐 지나가는 그들을 소환해보고 그들의 기록을 살펴본다. 이제 이 이름은 기억될 것이다. 진광화, 윤세주, 김원봉. 사는 동안 치열했던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후손인 나의 소임이다.

 

  진광화 陳光華, 1911년 ~ 1942년

  일제강점기 용진학회 집행위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본명은 김창화(金昌華). 평안남도 평양 출신이다.

  1925년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의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독서회’에 가입해 진보적 학생들과 함께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식민지 조국의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9년 12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에 적극 참가해 숭덕중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일제 경찰 당국의 추적을 받게 되자 동지들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남경 오주(五州)중학교에 입학해 중국어 등을 수학하는 한편, 한국인 학생들의 비밀조직인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33년 오주중학을 졸업하고 광주(廣州)의 중산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 한국인 학생단체인 ‘용진학회(勇進學會)’에 가입했고, 1933년 10월에는 이 학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중국내 항일운동과 반봉건운동을 주도하였다.

또 1935년 여름에는 중국공산당과 연계된 ‘중국청년항일동맹’에 가입해 중국 학생들의 항일운동에 동참하였다. 이 해 12월 12일 중국 광주(廣州)의 중산대학 학생 3,000여 명이 참가한 항일시위운동 ‘12·12학생운동’에 주요 지도자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12월 중순과 하순에 전개된 광주(廣州) 학생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광동 군벌 진제당(陳濟棠)의 탄압으로 1937년 1월 중순 체포되어 잠시 옥고를 치렀다.

  1936년 7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37년 6월 중산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뒤 광주 교외 농촌의 소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광주청년항일선봉대’ 등 항일조직을 건립해 항일운동의 기초를 닦았다. 같은 해 9월에는 중국공산당의 근거지 연안(延安)에 있는 중앙당학교에 가서 공산주의 사상과 이론을 학습하였다.

  그 뒤 중국 관내지역의 한국인 독립운동 조직인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 진기로예(晉冀魯豫) 변구(邊區) 당학교 교무과장과 조직과장 등을 맡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말에는 한국인들의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또는 중앙특파원)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진기로예 지회 지회장을 겸하며 중국 관내지역 한인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42년 1월에는 ‘조선혁명청년간부학교’ 건립에 참여했으며, 이 학교의 부교장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의 교육에도 헌신하였다. 장기간의 독립운동에 따른 과로와 영양실조로 폐렴을 앓고 있었으나,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항일전투에 동참하였다.

  1942년 5월 일본군의 태항산(太行山) 일대 포위공격에 맞서 ‘반소탕전(反掃蕩戰)’을 전개하다 산서성(山西省) 마전(麻田)의 화왕산(花王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중국 하북성(河北省) 한단시(邯鄲市) 혁명열사능원(革命烈士陵園)에 가묘가 있고, 하북성 섭현(涉縣) 석문촌(石門村) 뒷산에 묘와 기념비가 있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윤세주 尹世胄, 1900년 ~ 1942년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에 입단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

  일명 석정(石正)·소용(小用)·소룡(小龍). 경상남도 밀양 출신.

  1919년 3·1운동 때밀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주길림(吉林)으로 망명,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만주에서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한 뒤, 이해 10월 단원 곽재기(郭在驥)·황상규(黃尙奎)·이성우(李成宇) 등 수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성일보사 등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폭파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0년 3월 중국인으로부터 3개의 폭탄을 구입한 뒤, 동지들과 폭탄과 무기의 국내반입 및 군자금모금, 폭파공작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한 다음 각기 별도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이해 6월 매일 숙소를 바꾸면서 비밀리에 거사시기와 지점을 물색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협력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7년김원봉(金元鳳)과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고, 그해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윤세주의 최후에 대하여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1942년 화북(華北)의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하였다는 것이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원봉 金元鳳, 1898년 ~ 1958년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약산(若山). 독립운동 때에는 최림(崔林)·이충(李冲)·진국빈(陳國斌)·천세덕(千世德) 등의 가명을 썼다. 경상남도 밀양 출생. 아버지는 김주익(金周益), 어머니는 이경념(李京念)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의열단·조선의용대를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잔류하여 활동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08년 보통학교 2년에 편입하였으며, 1910년에 인근 동화중학(同和中學) 2년에 편입하였다. 

  1913년에는 서울의 중앙학교에 다니기도 하였으며, 1916년 중국에서 독일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김약수(金若水)·이여성(李如星) 등과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면서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귀국하는 김약수·이여성 등과 헤어져 길림(吉林)을 거쳐 서간도에서 폭탄제조법을 습득하는 등 일제와의 무장투쟁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1919년 12월 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의백(義伯: 단장)에 피선되었다. 의열단의 암살대상은 이른바 칠가살(七可殺)에 해당되는 자들로서 조선총독 및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와 매국적 친일파 거두 등이었다. 그들은 본거지를 만주와 상해·난징 등지로 전전하면서 국내의 경찰서 폭파, 요인 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지속하였다.

  6년 여에 걸쳐 의열단 단장으로 대규모 암살계획 및 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 투척사건 등을 배후에서 지휘 조종하며 무력 항쟁에 의한 일제와의 투쟁을 지속하였으나, 연합투쟁 및 조직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에는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훈련생으로 입소하여 투쟁노선을 변경하였다.

  1927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北伐)에 합류하였고, 1929년 상해에서 정치학교를 개설하고 1932년 난징에서 조선인혁명간부학교를 창설하는 데 중국 국민당계의 도움을 받았다. 1930년경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엠엘파(朝鮮共産黨ML派)인 안효구(安孝駒)와 제휴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고 기관지 『레닌』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932년 11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여 혁명세력의 결집을 꾀하였다. 1935년에는 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의 5개 단체를 규합하여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조직하였다. 1937년 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武漢)으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전위동맹·혁명자연맹·민족해방연맹 등 단체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대일선전전(對日宣傳戰)에 주력하였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장개석(蔣介石)의 주선으로 김구(金九)와 함께 각 혁명단체가 공동 정강하에 단일조직을 만들 것을 제의하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을 1939년 5월 발표하였다.

  이러한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합작노력은 최창익(崔昌益) 등과 달리 당시의 민족운동은 계급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운동이 아니라, 일본과의 투쟁을 위한 연합전선 결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노선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으로부터는 ‘소시민적 기회주의자이며 개인영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자신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이 이탈하여 김두봉(金枓奉)의 독립동맹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하고,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시에는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전에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군사부장으로 명단에 올랐으며, 귀국 후 계속 환국한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임시정부측이 좌우합작을 거부하자 비상국민회의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어 임시약법기초위원(臨時約法起草委員)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지속적으로 연합전선구축에 노력하였으나, 여운형(呂運亨)이 암살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하여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세칭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그 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내각 노동상·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숙청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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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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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8. 학교에 대해서

 

 

   책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아무튼 실로 다양한 종류의 책을 불타는 가마에 삽으로 푹푹 퍼 넣듯이 닥치는 대로 허겁지겁 읽었습니다. 책을 한 권 한 권 맛보고 소화해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서(미처 소화해내지 못한 것도 많았지만) 그것 이외의 일에 대해 머리를 굴릴 만한 여유는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나로서는 그게 오히려 좋았는지도 모른다고 이따금 생각합니다. 내 주위의 상황을 둘러보고 그곳에 있는 부자연스러움이나 모순이나 기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정면으로 따지고 들어갔다면 아마 막다른 곳에 내몰려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동시에, 다양한 종류의 책을 샅샅이 읽으면서 시야가 어느 정도 내추럴하게 '상대화'된 것도 십대의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묘사된 온갖 다양한 감정을 거의 나 자신의 것으로서 체험하고, 상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온갖 신기한 풍경을 바라보고 온갖 언어를 내 몸속에 통과시키는 것으로 내 시점은 얼마간 복합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즉 현재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다른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까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그것을 배운 것은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습니다.

만일 책이라는 게 없었다면, 만일 그토록 많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썰렁하고 뻑뻑한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나에게는 독서라는 행위가 그대로 하나의 큰 학교였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맞춤형 학교고, 거기서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몸으로 배워나갔습니다. 까다로운 학칙도 없고 수치에 의한 평가도 없고 격렬한 순위 경쟁도 없었습니다. 물론 따돌림 같은 것도 없습니다. 나는 커다란 '제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책을 통해 그러한 나 자신만의 별도의 '제도'를 멋지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그리는 '개인 회복 공간'은 바로 그런 곳에 가까운 것입니다. 아니, 꼭 독서만은 아닙니다. 현실의 학교 제도에 잘 섞이지 않는 아이라도, 교실에서의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아이라도, 만일 그런 맞춤형 '개인 회복 공간'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것을 찾아내고 그 가능성을 자신의 공간에서 키워나갈 수만 있다면, 훌륭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도의 벽'을 극복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의 존재 방식='개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해 주고 평가해 주는 공동체의 혹은 가정의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p224~227]

 

 

 

   9. 어떤 인물을 등장시킬까?

 

 

  소설을 쓰려면 무엇이 어찌 됐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라는 얘기와 동일한 의미에서, 인간을 묘사하려면 사람을 많이 알아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해도 상대를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선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이나 언행의 특징들을 언뜻 눈에 담아두기만 됩니다. 단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솔직히 영 안 맞는 사람도, 가능한 한 가리지 말고 관찰하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 이해하기 쉬운 사람만 등장시켰다가는 그 소설은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인데) 폭이 부족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행동을 취하고, 그런 것이 맞부딪치면서 상황이 굴러가고 얘기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얼른 한 번 보고 '이 인간은 영 마음에 안 드네'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눈을 돌리지 말고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은가' '어떤 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가' 등의 요점을 머릿속에 담아둡니다. [p236, 237]

 

  소설을 쓰면서 내가 가장 즐겁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마음만 먹으면 나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애초에 일인칭 '나'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그런 글쓰기 방식을 이십 년쯤 유지했습니다. 단편에서는 이따금 삼인칭을 쓰기도 했지만 장편에 있어서는 줄곧 일인칭 '나'로 밀어붙였습니다. 물론 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레이먼드 챈들러=필립 말로가 아닌 것처럼) 각각의 소설에 따라 '나'의 인물상은 바뀌었지만 그래도 계속 일인칭으로 쓰다 보니 현실의 '나'와 소설 주인공인 '나'의 경계선이 때로는- 쓰는 사람 쪽에서도, 또한 읽는 사람 쪽에서도- 얼마간 불명료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문제가 없었는데,라고 할까, 나 자신이 가공의 '나'를 지렛대의 받침점으로 삼아 소설 세계를 만들어내고 크게 펼쳐가는 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삼았는데, 그러다 보니 점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소설의 분량이 늘어나고 범위가 커지면서 '나'라는 인칭만으로는 약간 비좁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나(남성형)'와 '나(여성형)'라는 두 종류의 일인칭을 각 장별로 분류해가며 썼는데 그것도 일인칭 기능의 한계를 타개해보려는 시도 중의 하나였습니다.

  일인칭만을 사용한 장편소설은 『태엽 감는 새』(1994, 1995)가 마지막 작품인 셈입니다. 그런데 분량이 그만큼 길어지자 '나'의 시점으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어서 곳곳에 다양한 소설적 연구를 도입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서술을 끼워 넣고 긴 서간문을 끼워 넣고 ‥‥‥. 아무튼 온갖 화법의 테크닉을 도입해 일인칭 구조적 제한을 돌파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여기까지가 한계다'라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그다음 『해변의 카프카』 (2002)에서는 반절만 삼인칭으로 대체했습니다. 카프카 소년의 장은 그때까지 해왔던 대로 '나'라는 화자로 이야기하지만 그 이외의 장은 삼인칭입니다. 절충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반절이나마 삼인칭의 목소리를 도입해서 소설 세계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적어도 나 자신은 이 소설을 쓰면서 『태엽 감는 새』의 집필 때보다 기법적인 면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느꼈습니다. [p240~242]

 

 

 

   10.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내가 작가가 되고 정기적으로 책이 출간되는 동안에 한 가지 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긴 소설을 쓰면 '너무 길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반으로 줄여도 충분하다'라고 하고, 짧은 소설을 쓰면 '내용이 얄팍하다. 엉성하다. 명백히 태만한 티가 난다'라고 합니다. 똑같은 소설을 어떤 곳에서는 '같은 얘기를 되풀이한다. 매너리즘이다. 따분하다'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작이 더 낫다. 새로운 시도가 겉돌고 있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미 이십오 년 전쯤부터 '무라카미는 시대에 뒤떨어진다. 이제 끝났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평을 늘어놓는 쪽에서야 간단하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입에 올릴 뿐 구체적인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말을 듣는 쪽에서는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했다가는 우선 몸이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쁜 말을 들을 거라면 아무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자'라고 하게 됩니다.

리키 넬슨이 만년에 발표한 노래 <가든 파티>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면

   나 혼자 즐기는 수밖에 없지"

  이런 기분, 나도 잘 압니다. 모두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봐도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나 자신이 별 의미도 없이 소모될 뿐입니다. 그러느니 모른 척하고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만일 평판이 좋지 않더라도, 책이 별로 팔리지 않더라도 '뭐, 어때, 최소한 나 자신이라도 즐거웠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즈 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멍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 말은 네가 원하는 대로 연주하면 된다는 거야.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건 생각할 것 없어.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서 너를 세상에 이해시키면 돼. 설령 십오 년, 이십 년이 걸린다고 해도 말이야."

  물론 나 자신이 즐거우면 그게 결과적으로 뛰어난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에는 준열한 자기 상대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최소한의 지지자를 확보하는 것도 프로로서 필수 조건입니다.

  ‥‥‥ (중략)

  중요한 것, 교환 불가능한 것은 나와 그 사람이 이어져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어디서 어떤 상태로 이어져 있는지, 세세한 것 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참 저 아래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의 뿌리와 그 사람의 뿌리가 이어져 있다는 감촉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깊고 어두운 곳이라서 잠깐 내려가 상황을 살펴본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이어졌다고 감지합니다. 양분이 오고 간다고 실감합니다.

  그렇지만 나와 그 사람은 뒷골목을 걷다가 마주치더라도, 지하철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앞뒤로 줄을 서 있더라도, 서로의 뿌리가 이어진 것은 (대부분의 경우)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서로 낯선 이들로서 그냥 스쳐 지나가고, 아무것도 모른 채 각자 갈 길을 갈 뿐입니다. 아마 두 번 다시 마주칠 일도 없겠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땅속에서, 일상생활이라는 표층을 뚫고 들어간 곳에서, '소설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공통의 이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합니다. 내가 상정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독자입니다. 나는 그런 독자들이 즐겁게 읽어주기를, 뭔가 느껴주기를 희망하면서 매일매일 소설을 씁니다. [p269~272]

 

 

 

     나의 하루는 매일매일 소설 한 권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요즘은 그 생각이 틀렸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하루가 아니라 내가 만난 이들의 하루하루가 소설이었던 것이다. 그 소설을 읽는데 집중한다. 주인공의 이야기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사소한 등장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고 작은 눈을 부릅뜨고 매일매일의 소설을 읽는다. 날마다 클라이막스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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