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돌탑

                   이산하

   절로 가는 오솔길

   가파른 모퉁이마다

   돌탑들이 쌓여 있다.

   나도 빌어볼 게 많아

   돌 하나 얹고 싶지만

   하나 더 얹으면

   금방 무너질 것 같아

   차마 얹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나를 하나 더 탐하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시집 [악의 평범성]중에서

    80년 5월 5일 자 소인이 찍힌 엽서가 한 장 있다. 김춘수의 시, 꽃이 적혀있고 작은 풀꽃이 스카치테이프로 붙어서 바래진 23년 된 엽서. 그저 엽서엔 시 한 편과 꽃이 전부이지만 아직도 시를 옮겨 적던 친구의 마음과 내 이름, 친구의 이름, 그리고 10원짜리 엽서에 추가로 붙인 5원짜리 우표. 그렇게 그해 5월은 내게 왔다. 세상은 80년 서울의 봄에서 점차 경직되고 대학생들은 데모를 다시 시작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의 감성에 빠져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소녀였다. 그 친구는 광주 '전대사대 부고' 학생이었고 나는 '기본 수학의 정석'을 끼고 다니는 '여공' 이었다. 그저 세상의 많고 많은 풀 한 포기, 잡초에 불과한 이름 '여공' 쉽게 밟아 버려도 아무런 죄책감조차 들지 않는 바로 그 이름의 '공순이' 그 시절의 나였다. 하지만 내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 있어 꽃이었다.

    세상에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 어렸고, 너무 고민할게 많았고, 너무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은 시절이었다. 둘 다 궁극적으로 되고 싶었던 대학생들은 날마다 데모만 했지만, 미성년의 여공인 나의 눈에는 그것조차도 부럽고 낭만적인 대학생만의 빛나는 특권이었다. 그저 당장 계속하고 싶은 공부의 꿈을 접어야 하는 현실에 절망하고, 어둡게 내 안으로 침잠하느라 세상의 봄도 현기증으로 어질어질했던 것이다. 늘 불평으로 닦달하는 고참 언니에 치여서 12시간의 작업 후 퇴근은 녹초로 만들었고, 책을 펴면 졸고 앉아있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는 날들이기도 했다. 유일한 끈이 있다면 친구들과의 편지가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코딱지만 한 작은방에 더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로 들은 뉴스, 간첩들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이 광주를 장악했다 한다. 놀래서 언니네 집으로 tv를 보러 뛰어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광주에 빨갱이가 쳐들어가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 빨갱이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붙들고, 경상도 군인이 여고생들을 강간하고, 임신부를 총으로 쏴 죽이고, 전라도 사람이면 닥치는 대로 칼로 찔러 죽이더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해서, 흥분한 시민들이 다 들고일어나서 파출소를 불지르고, 군인들을 찔러 죽인다는 얘기를 전하는 것이다. 듣느니 끔찍하고도 믿기지 않은 얘기들뿐이었다. 혼란의 와중에 tv는 광주 엠비시 건물이 불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사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별밤 DJ 소수옥이 있는 광주 MBC, 거기 내 엽서도 예쁜 엽서로 남아있는데, 그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아! 광주에 있는 내 친구들 다 여고생인데... 광주 인근이 우리 집인데 그럼 엄마랑 동생은... 전화국으로 시외전화를 하러 뛰어갔지만 전화는 불통이었다. 별일 없는지 전보라도 쳐봤지만 소식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이것은 난리가 확실했다. 광주는 고립무원의 전쟁터가 되어있는데, 그저 뉴스에 귀를 뺏기고 눈을 박을 뿐, 그 흉흉한 소식들에 애달아 하며 그저 가족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심정으로 아주 긴 며칠을 보냈다. 휴~ 안도의 소식, 계엄군이 시민을 가장한 깡패들과 폭도들을 진압해서 광주는 평화를 되찾았고 바람대로 주변 모두 무사했다. 내 주변에는 다행히 단 한 명의 깡패도, 단 한 명의 빨갱이도 없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끌려가지 않았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다시 세상도, 나도, 일상 속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제 누구도 드러내놓고 광주를 얘기하지 않았고 나 자신도 얘기하지 못했다. 그 단절로 내 고향은 내 속에 서럽게 잠겨있어야 했고, 그저 광주가 고향이라는 것 때문에 덩달아 폭도라도 되는듯한 시선을 참아내야 했다. 직장에서는 동료들조차 작은 실수라도 하면 깽깽이가 그렇지 였고, 뭘 좀 잘하면 쩌, 저! 지독한 전라도 것이 되었다.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은 사기꾼 기질이 있는 것이었고, 싸움을 아주 잘 할 것이고, 상종 못할 지독한 악질이라는 동의어였다. 광주사태의 영향은 나에게 그렇게 왔다. 상사의 시선을 받다가도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답을 하고 나면 나는 갑자기 전염병 환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원래도 별로 쓰지 않는 사투리를, 혹여 쓸까 봐 조심하게 됐고 의식적으로 안 쓰게 되었다. 누구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선입견의 손해를 보지 말아야겠다는 영악한 계산이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회사는 전라도 사람은 아예 입사도 안 시킨다는 둥, 승진을 꿈도 꿀 수 없다는 둥의 얘기를 새로운 소식인 양 비아냥 거리는 고참 선배의 잔소리에도 나는 언론이 말하는 것들을 믿었다. 그리고 그런 시선만을 빼고 광주사태를 빠르게 잊어갔다.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니고, 회사에서 외에는 밥을 먹지 않아도, 여전히 학원 다닐 형편은 안됐고 책 사 볼 돈도 모자라서, 책방에서 눈치 받으며 서서 책을 읽는 가난에 스스로도 지쳐가고 있었다.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리라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는데 가정 형편도 점점 나빠져만 가고 있었다. 그래도 광주는 친구들이 있고, 무등산이 있고, 눈을 감아도 훤하게 떠오르는 충장로의 길들이 있는 그리운 곳이었다. 언제나 가고 싶지만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 바로 광주였다. 왜? 아니겠는가! 광주는 내게 고향이었고 거기서 꿈꾸던 길들이 있었는데. 하지만 다음 해 추석에야 내려간 광주는 달라졌다. 내가 그리던 광주가 더 이상 아니었다.

    2003년 5월에 망월동에 다녀와서 쓴 글의 시작 부분이다.

    어제, 전두환 씨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본 이후, 망월동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산하 시인의 [돌탑], '차마 얹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나를 하나 더 탐하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자신을 위해서는 돌 하나 보태 얹기도 저어하는 우리, 이 땅의 모든 우리들에게 존경을 보낸다.

    잘 가라, 가서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만나보라. 이런 인사도 아깝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11-24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8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lstaff 2021-11-24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을, 모레 읽을 거라서 서재에 들어와보았습니다.
본문이 시와 견줄 수 없이 무겁군요. 그땐 그런 시절이었지요.
잘 읽었습니다.

2021-11-28 15:26   좋아요 0 | URL
이제 시집을 읽으셨겠군요.
시집도, 시인의 삶도 죽은 그와 무관하지 않아서... 무겁게 되어버렸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