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ㅣ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평점 :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은 뒤로 '어린이'라는 입버릇과 생각버릇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린이를 어린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도 좋다. 아이와 어린이는 다른 존재인 것 같다. 말해보면 그렇다. 어린이가 있다, 하고 말하면 거기 있는 어린이가 조금 더 또렷하게 보이고 그가 나와 조금 더 관련된 존재로 느껴진다. 이 차이는 뭘까. 어린 사람이었던 적이 나도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모든 이가 아이를 둔 부모일 수는 없지만 누구나 어린 사람이었던 적은 있기 때문일까.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지 혹은 조카들이 자라는 과정을 보고 듣기 때문인지, 창작물에서든 현실에서든 어린이가 곤란을 겪거나 학대당하는 것을 견디기 어렵다. 온라인 뉴스를 눌러 보기가 두렵고, 드라마나 영화에 어린이가 등장하면 일단 긴장한다.
하지만 나는 매 맞는 형제가 등장하는 「소년」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이라는 단편을 쓴 적이 있고 다시 매 맞는 형제가 등장하는 『야만적인 앨리스씨』라는 장편을 쓴 적이 있다. 왜 소년들인가, 그 소설들을 그런 생각을 한 날도 있다. 화자를 소녀로 두었을 때 가능해질 이야기들이 당시 내게는 가능하지 않았던 거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다. 당시에 나는 그 이야기를 서술하는 나를 일단은 보호하고 싶었을 테니까. 지금의 나는 일부러 읽지는 못할 이야기를 썼다는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소년」은 화자를 끊임없이 소년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데 기대고 썼고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내가 지금 문장 하나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쌓은 문장들의 모양에 기대어 썼다. 어찌되었든 그 이야기들을 끝까지 썼다는 점이 중요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성장기에 내가 방치한 동생들을 향해 해야 할 이야기가 내게는 있었으니까.
잘못을 저지르면 매우 엄하게 혼났기 때문에 어릴 적 나는 내 부모를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잘못'의 영역에 제한이나 기준이 딱히 없었으며 체벌의 강도나 형태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는 점은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나의 부모는 불운하고 서글픈 데다가 늘 누군가를 향한 격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감정의 골이 깊은 사람들이기도 했고 나는 성장기 내내,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한동안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부모 중 누군가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그들 각자가 스스로를 연민하는 강도로 그들을 연민하느라고 마음을 다해 애를 쓰고 그들의 기분에 따라 절망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면서, 그들의 감정을 내 감정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열렬히 부모를 바라보느라고 나는 어린 동생들을 살피지 못했다. 시간을 돌려 바꿔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일단 그 시기로 돌아가 동생들을 돌보고 싶다. 나도 어렸으니까, 그 돌봄은 내 몫도 책임도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질 않고, 그게 사실도 아닐 것이다. 나는 동생들이 겪은 시간에 책임을 느낀다. 지금의 동생들이라기보다는 당시 내 어린 동생들에게.
우리 자매의 부모는 여전히 불행했고 불운해 당신들의 감정과 삶에 가족 구성원이 모두 휩쓸리기를 바라고 있으며 마땅히 그렇게 되는 것을 화목이고 친밀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나는 그런 시도들에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 내가 내 부모와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씁쓸하거나 놀랍다는 듯한 얼굴로 그래도 부모인데 가족인데, 하고 말한다.
그래요.
그게 무슨 말인지 나도 압니다.
동거인은 요즘 뉴스를 보다가 자꾸 한숨을 쉰다.
또 죽었어.
또.
또 죽였어.
동거인과 나는 요즘 부모와 자식 간,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를 두고 자주 대화를 나눈다. 자식을 벗겨 집 밖으로 쫓아내는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동거인은 시장 근처에서 자랐는데 자기가 사는 집 근처에도 발가벗겨진 채 집밖에 서 있곤 했던 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낮에 같이 놀았는데 밤에 그러고 있어서 못 본 척했어.
그래.
애가 벗고 있어서.
그런데 당시 어른들은 왜 자식을 왜 벗겨서 내쫓곤 했을까.
멀리 가지 말라고, 라는 것이 동거인의 의견이었고 나는 그게 전권의 확인이라고 생각했다. 멀리 가지도 못하도록 벗긴 몸을 바깥에 전시하는 체벌 행위는 그 몸이 자기 것이라는 주장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부모의 매질엔 늘 그런 근거가 있다. 자식(의 몸)에 대한 권리. 지금까지 내가 겪은 한국사회는 관습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인정하고 있다. p49~53
나는 어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이유를 곰곰 생각해본 일은 드물다. 생각이라기보다는 깊게 따지고 싶지는 않은 감정의 영역이었으니까. 이 글을 쓰려고 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가 어린 시절 한때 어른들을 기다린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른들이 우리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견딘 밤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우리가 마당에서 골목에서 놀이터에서 등교하거나 하교하는 길에 시장길에서 늘 어른들을 보곤 했으니까 이웃에 늘 어른들이 있으니까, 그들 중 누군가는 이런 밤에 문을 두드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줄 것이다. 그런 것을 바란 밤이 우리에게 있었으나 우리는 그런 어른을 만나지 못했다. 나의 어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지금 어린이의 어른들은 다를 것이다. 어른들은 이웃에서 어린이가 울면 주의를 기울이고, 어린이가 맞고 있지는 않은지,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지는 않은지 걱정할 것이고, 주저 없이 그의 부모를 의심할 것이고, 경찰에 신고할 것이고, 최소한 공권력이 도착하는 순간까지 그 집 기척에 귀를 곤두세울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는 어른이 이웃에 살고 있다는 메세지가 되어줄 것이고 그다음을 궁금하게 여기는 어른이 되어줄 것이다. 폭력으로부터 분리된 어린이에게는 그 뒤에 갈 곳이 있어야 하니까, 우리의 구조에 그게 마련되어 있는지를 묻는 어른이 되어줄 것이다. p59
황정은 산문집 일기중에서
또 세살짜리 아이가 맞아서 죽었다.
의붓 엄마의 소행이라한다. 그럼, 아빠는 대체 어디 있었을까? 엄마는 의붓엄마이면 그런 친 아빠는???
아이는 죽고, 이런 일들은 멈추지 않는다. 프레임은 나쁜 엄마로만 한정 된다. 그러는 한 이런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