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보도에 나와 있었는데, 많은 이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거나 유아차를 밀고 있었다. 모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함께있다는 것을,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을 얼마나 쉽게 당연한일로 받아들이는가! 누구도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지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그는 그저 배 나온 늙은이일 뿐 전혀 쳐다볼 만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 사실이 그를 거의 자유롭게 했다. 인생의 많은 시간을키 크고 잘생기고 배가 나오지도 않은 남자로 하버드 캠퍼스를거닐며 보냈다.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학생들은 존경어린 눈빛으로 힐끔거렸고, 여자들 또한 눈길을 주었다.
동료들이 말해주기로, 학과 회의 때 그는 위압적인 존재였다. 그런 모습을 의도했던 터라 그는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제 그는 콘도를 짓고 있는 부두 한곳을 어슬렁어슬렁 걸으면서,
사방에 물과 사람이 보이는 이곳으로 이사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흘끗 본 뒤 다시 집어넣었다.
딸과 통화하고 싶었다. - P10

이제 잭은 올리브키터리지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을 그냥 두었다. 키 크고 덩치 크고, 맙소사, 올리브는 이상한 여자였다. 그는올리브를 꽤 좋아했는데, 솔직했고-그게 솔직한 건가? 그녀에겐 뭔가가 있었다. 남편과 사별한 여자, 올리브는 잭의 인생을구해준 거나 다름없었다-그는 그렇게 느꼈다. 같이 몇 번 저녁을 먹으러 갔고, 한 번 콘서트를 보러 갔다. 그가 그녀의 입술에키스했다. 그때를 생각하니 큰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그녀의 입술, 올리브키터리지. 따개비가 잔뜩 들러붙은 고래와 키스하는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두 해 전 태어난 손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할아버지, 즉 올리브의 죽은 남편 이름을 따서 헨리라고 지었다. 잭은 그게 딱히 신경쓰이지 않았지만, 올리브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잭이 뉴욕으로 가서 리틀 헨리를 만나보라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음,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 P19

지금잭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락의자로 가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오늘 물고기 눈을 한 끔찍한 남자가 그를 차에 붙여 세웠을 때 목격한 개미들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개미. 해야 하는 일을하면서 죽을 때까지 사는 존재들. 잭의 차에 짓뭉개져 그토록 무분별한 학살을 당해도. 그는 정말로 개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중세시대 인간행동, 그리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살해되고 그 결과 유럽의 모든 이들이 서로를 학살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시대 인간행동을 연구해온 잭 케니슨-그런 잭이 개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내일은 일요일이고, 긴 하루가 될 거라고 예감했다. - P37

 그 말을 한사람이 누구였더라? 대단하지 않다는 말? 올리브 키터리지였다.
타운의 어느 여자에 대해 말할 때 그 표현을 썼다. "그 여자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요."올리브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여인이존재했고, 사라졌다. 지워졌다.
결국 잭은 종이를 꺼내 펜으로 썼다. 올리브키터리지, 당신이보고 싶습니다. 혹 당신이 전화해주거나 이메일을 보내거나 나를 보러 와줄 수 있다면 아주 기쁠 거예요. 그리고 그는 편지에서명을 한 뒤 봉투에 집어넣었다. 침을 묻혀 봉인하지는 않았다.
보낼지 말지는 아침에 결정할 것이다. - P38

 올리브는 자신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올리브는 남자가 좋았다.
늘 남자가 좋았다. 아들을 다섯 낳고 싶었다. 그리고 그랬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늘 있었는데, 왜냐하면 크리스토퍼가……… 오, 사 년 전 헨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부터 줄곧그래왔듯, 올리브는 자신을 내리누르는 생생한 슬픔의 무게를느꼈다. 그리고 헨리가 죽고 이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무게가 가슴에 묵직하게 얹혀 있는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크리스토퍼와 앤은 첫아기 이름을 크리스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헨리라고 지었다. 헨리 키터리지.참 멋진 이름이었다. 멋진 남자였다. 올리브는 손자를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 P45

자 있을 때 찾아사실 올리브는 나이를 먹으면서 왜 남편에 대한 마음이 굳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그것은 그녀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긴 결혼생활 동안 그들 사이에 생겨난긴돌담-그들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중간중간 예상치 못한 곳에 이끼로 덮인 따뜻하고 움푹 팬 자리가 있어서, 때로 느닷없는 이해의 웃음이 터질 때면 두 사람 사이의 그 자리에 햇빛이 일렁이기도 했다―이더욱 높아지고 단단해져서 작은 구멍에 꽃이 피기는커녕 담을따라 얼음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달리 말하면 그들 사이에뭔가가 생겼고,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듯 보였다. 어떤 날에는여기는 돌덩이가 더해진 자리, 저기는 돌멩이 한 무더기 (크리스토퍼의 사춘기, 오래전 그녀와 같은 학교 동료 교사였던 짐 오케이시에 대한 감정, 시보도라는 여자와 헨리가 벌인 어이없는 애정행각. 죽음의 협박 속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면서 헨리와 함께 견딘 범죄의 공포, 크리스토퍼가 이혼하고 타운을 떠난 것)가 보태진 자리라고 짚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노년으로 향하면서 그들 사이에 왜 그렇게 높고 끔찍한 담이 세워졌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쪼그라들수록 헨리의 심장은 더욱 굶주렸다 - P50

애슐리가 끙하는 신음과 악 하는 비명이 뒤섞인 큰 소리를 냈다. 그리고 뭔가가 쑥 빠져나왔다.
올리브는 여자가 아기를 낳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뭔가 덩어리 같은 것을 낳았다고 생각했다. 거의 진흙덩어리 같은 것을. 그러다 곧 그것의 얼굴과 눈과 팔을 보았다. "오, 맙소사"올리브가 말했다. "아기가 태어났어요."
"자, 어떤 아기가 태어났는지 볼까요" 하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올리브는 그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잡은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자는 구급차를 타고 왔는데, 차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책임감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그에 대한 사랑이 와락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말린이 잔디밭에서 일어섰다. 얼굴 위로 눈물이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 올리브." 그녀가 말했다. "오, 놀라워요." - P55

잭이 잠시 그녀를 지켜보았고, 이어 재미있다는 듯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잡혔다.
"올리브," 그가 마침내 말했다.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나는 몰라요. 몇 번 전화했는데, 아마 뉴욕에 손자를 보러 간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자동응답기 없어요?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예전에 내가 메시지를 남긴 적이 있는 것 같거든요."
"손자는 만나본 적 없네요."올리브가 말했다. "그리고 자동응답기는 당연히 있죠." 그러고는 다시 말했다. "아, 어느 날 꺼버렸네요. 누가 자꾸 전화해서 휴가 상품에 당첨됐다는 메시지를 남겨놓는 바람에. 다시 켜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녀는 이제자신이 진짜로 그랬다는 걸 깨달았다. 그 빌어먹을 기계를 다시켜지 않은 것이다. - P62

그날 밤!
올리브는 파도가 자신을 높이높이 던져올리며 위아래로그네를 태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어둠이 아래에서 밀고 올라오는 것 같아 공포를 느끼며 버둥거렸다. 자신의 삶이 자신의 삶이라니,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 아닌가 자신의삶이 달라진 것을 많이 달라질지도 모르고 혹은 전혀 달라지지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양쪽 생각 모두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파도가 자신을 높이 밀어올릴때만큼은 기쁨을 느꼈으나,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고, 곧 다시내려와 파도가 출렁이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런 식이었다―이쪽저쪽, 위로 아래로. 그러는 동안 그녀는 지쳤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녀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 P69

그러고는 말했다. "자는 중이에요."
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가 참 우렁찼다. 그것이 올리브의 신체감각을 자극했다. 전율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공포를 느꼈다. 몸이 기름에 흠뻑 적셔진 상태에서 누가 성냥을켜서 갖다댄 것처럼. 그의 웃음이 일으킨 공포, 전율, 그 느낌은악몽 같았지만, 한편으로 그녀 자신이 쑤셔박혀 있던 거대한 캔의 뚜껑이 방금 열린 것 같았다.
"진짜예요." 올리브가 말했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돌아누웠다. "얼른, 저리 가요, 잭."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눈을 꼭 감았다. 제발,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알지 못했다. 제발, 그녀가 다시 생각했다. 제발.. - P70

토요일 오후, 케일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지나 미스 미니가 지내는 요양원으로 갔다. 3월 중순의 날씨는 추웠지만 눈은거의 내리지 않았다. 케일리의 자전거는 보도에 떨어져 있던 잔가지 위를 덜컹거리며 달려갔다.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아서 손이시켰다. 미스 미니는 케일리가 지금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 위층에 살았었다. 미스 미니는 그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케일리가 청소를 맡았던 첫번째 집의 주인이었다. 노부인은 작은 체구에 눈이 아주 크고 눈동자 색깔이 짙었다. 케일리는 세월과 더불어 집안에 덕지덕지 눌어붙은 때에, 특히 부엌에 낀 때에깜짝 놀랐다. 그래서 케일리는 때를 닦아내고 또 닦아냈고, 그러는 동안 미스 미니는 부엌 입구에서 들여다보며 "오, 일을 참 잘하는구나, 케일리!" 하고 말했다. 미스 미니는 손뼉을 치기까지하며 케일리가 한 일에 감탄했고, 케일리는 그래서 미스 미니를좋아했다. 미스 미니는 케일리가 일을 마치면 늘 오렌지주스를따라주고, 식탁 맞은편에 앉아 케일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학교나 친구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케일리에게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83

아버지의 병세가 아주 깊었던 어느 날, 그가 침대에 누워 케일리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케일리가 가서 아버지의 입에 귀를 갖다댔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는 늘 너를 가장 예뻐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덧붙였다. "네 엄마는 브렌다를 가장 예뻐하지."
그의 입가에 하얗고 끈끈한 침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사랑해요, 아빠." 케일리가 말했다. 그러고는 티슈를 집어 그의 입가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고, 아버지는 따뜻한 눈빛으로그녀를 쳐다보았다.
케일리는 종종 그 순간을 아버지가 당신이 가장 예뻐하는 아이가 그녀라고 말해준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늘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지금은 시내치과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저녁에도 케일리에게 할말이 거의 없는 듯했고, 케일리는 종종 그것이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이따금 케일리는 실제로 아픔이 작은 파도처럼 가슴에 들이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마음의상처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상처를 말하는 거라고. - P87

그녀가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말했다. "어디 갔었니?" 케일리는 링로즈 부부의 집에서 청소를 끝낸 뒤 자전거를 탔다고 말했다. 아주 아름다운 날이었다고. 그리고 케일리는 피아노 앞에앉아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오, 어찌나 열심히 쳤던지! 아무리건반을 눌러도 음악의 신선한 토양 속에 손가락을 충분히 깊이박아넣을 수 없다는 듯이 모차르트 소나타를 잇따라 쳐나갔다.
치고 또 쳤다.
그러고 나서 앉아서 저녁을 먹는데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피아노에는 손도 대지 않더니. 거기 덩그러니공간만 차지하고."
케일리가 말했다. "계속 칠 거예요. 그러니 없애지 말아주세요." - P90

케일리가 아주 어렸을 때, 어느 날 그녀는 어머니에게 자신이예쁜지 물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글쎄, 어떤 미인대회에 나가도 우승은 못할 거다. 하지만 기형쇼 같은 데 나갈 일도 없겠지."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케일리 -그때 6학년이었다는 미인대회에 나가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체육 선생이 그녀를 따로 불러 셜리폴스 타운에서 ‘리틀 미스 목시‘ 대회가 열리는데 나가보지 않겠느냐고 한 것이다. 케일리의 아버지는 길길이 날뛰었다. "내 딸은 누구든 외모로 평가받는 일이 없어야한다!" 아버지는 정말로 화를 냈고, 그래서 케일리는 체육 선생에게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럴 수 없다고. 그리고 케일리는 대회에 나가든 못 나가든 상관이 없었다. - P92

슬픔의 파도가 밀려와 케일리를 덮쳤고,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통과했고 해안을 따라 달렸다.
링로즈 씨를 생각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사이 일어난 일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지만, 그 일은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거의 항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하던 대로 해나갔다. 자전거를 탔고, 도넛가게에서 일주일에 이틀씩 오전에 일했다. 가게를 운영하는 남자가목요일 오전에 하루 더 일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피폐해졌고, 어느 오후 비사 배브콕의 부엌에서 칫솔을 들고 바닥에 엎드렸을 때는 정말로 어질어질했다. 버사 배브콕은 집에 없었고, 케일리는 일어서서 편지를 남겼다. 여기서 더이상 일할 수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들통도 비우지 않고 칫솔도 바닥에 둔 채로 떠났다. - P101

케일리는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고 또 지르는 모습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케일리에게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더이상 그 상황이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녀 안의 스위치가 꺼진것 같았다. 그녀 안에서 커져가던 모든 공포가 사라졌다. 이걸로끝. 신경쓰이지 않았다. 심지어 어머니가 그녀의 뺨을 때렸고 눈물이 와락 솟구쳤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느껴본 가장 이상한 감정이었고, 그 감정이 무서웠다-어머니가 아니라 그 감정이. 그녀의 침묵은 어머니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키는 것 같았다. "네 언니한테 전화해야겠다!"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상황이 종료되고 어머니가 케일리의 침실에서 나갔을 때, 케일리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방안은 무참히 파괴된 듯 보였다. 작은 책상에는 넘어진 전등 위에 팬티 한 장이걸려 있었고, 양말은 저만치 벽에 날아가 있었으며, 분홍색 퀼트이불은 찢겨 있었다. - P103

많은 일, 시민권 운동, 이제는 훨씬 좁아진 세상, 링로즈 선생이결코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방식들로 연결된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케일리는 링로즈 씨를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춘 적이 없었다. 그가 견뎠을 외로움을, 고작 몇 피트 떨어진 곳에서 지금도 견디고 있을 외로움을.
케일리는 고개를 젓고,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지금 이순간에 그저 이 순간만큼은-다시 그와 가까이 있는 것, 그것이 그녀가 바라는 전부였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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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위에 뿌연 안개가 걸려 있어 물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산책로마저도 조금 먼 곳은 보이지 않아 올리브는 곁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 연거푸 놀라곤 했다. 평소보다 늦게 나왔더니 사람이 더 많았다. 포장된 산책로 옆으로는 솔잎 더미가 드문드문 보였고, 키 큰 풀들의 끝과 관목 떡갈나무의 나무껍질, 산책하다앉을 수 있는 화강석 벤치가 있었다. 젊은 남자가 가벼운 안개를뚫고 올리브를 향해 뛰어왔다. 그는 손잡이가 자전거 핸들처럼생긴 삼각형 모양의 유모차를 밀면서 뛰었다. 올리브는 유모차안에 얌전히 누워 잠자는 아기를 얼핏 보았다. 저 자만심 강한베이비부머 부모들은 별의별 장비를 다 갖추었다. 크리스토퍼가 저 아기만 했을 때 올리브는 아이가 아기 침대에서 자도록 내버려두고 길 아래 사는 베티 심스를 찾아가곤 했다.  - P283

 너무 더운 날이어서 물안개도 후텁지근하고 끈적였다. 눈 아래로 땀이 눈물처럼 흐르는 게 느껴졌다.
온몸에 시커멓고 지저분한 진창을 주사라도 놓은 듯, 라킨의 집에 갔던 일이 마음속에 퍼지며 가라앉았다. 이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을 해야 더러운 진창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버니에게 전화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고, 이야기를 털어놓을 헨리도 없으니- 걷고 말도 하는 헨리가 없으니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바로 오늘 아침에 그를 다시 한번 뇌졸중으로 잃은것 같았다.
- P284

요양원으로 운전하는 동안 보슬비가 차에, 그리고 앞에 펼쳐진 도로에 내렸다. 잿빛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여느와는 달리 속이 상했다. 크리스토퍼 때문인 것은 맞지만, 심한자책의 양 날 사이에 끼어버린 것만 같았다. 사실 한 번도 해본적은 없지만 가게에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사적이고 깊은 부끄러움이 훅 올라왔다. 수치심이 지금 눈앞의 차창 와이퍼처럼 영혼을 가로질러 쉬익쉭 훑고 지나갔다. 거대하고 가혹한 검정 손가락 두 개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올리브를 질책했다. - P288

그 가을 공기는 아름다웠고, 땀에 젖은 건장하고 젊은 몸뚱이들은 다리에 진흙을 묻히고 공을 이마로 받으려고 온몸을 내던지곤 했다. 골이 들어갔을 때의 환호, 무릎을 꺾고 주저앉는 골키퍼 집으로 걸어가면서 헨리가 올리브의 손을 잡던 날들이 있었다. 이런 날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중년의 그들, 전성기의 그들. 그들은 그 순간을 조용히 기뻐할 줄 알았을까? 필시 그렇지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정작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올리브는 지금은 그 추억을 건강하고 순수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장에서의 그 순간들이 올리브가 지녔던 가장 순수한 추억들인지도모른다. 순수하지 않은 다른 추억들도 있었으니까. - P292

 하지만 루이즈는 자식들을 사랑했고, 끊임없이 자랑했다. 루이즈가 도일이 여름 캠프에서 집을 그리워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적시던 걸 올리브는 다시금 기억해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며 루이즈 라킨을 찾아간 것은 잘못이었다. 또한 가고 싶으면 가라고 헨리에게 말했다고 해서 그가 죽으리라고 생각한 것도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이 이상하고 불가해한 세상에서그녀는 자신이 대체 누구라고 생각했던 걸까? 올리브는 앞으로돌아누우며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당기고 트랜지스터라디오를켰다. 튤립을 심을 것인지를 곧 결정해야 할 것이다. 땅이 얼어버리기 전에. - P293

이 집에 들어와본 적이 없는 올리브는 집이 낡았다고. 몹시 피로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단지 스토브 옆의 부엌 바닥에 타일 몇개가 없어서, 또는 싱크대 상판의 가장자리가 불룩 올라와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집은 그저 대단히 지친 분위기였다. 죽어간달까. 죽어가는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됐든 보는 사람도 피로해졌다. 올리브는 커다란 창문으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거실을 흘끔 들여다본다. 손볼 것이 많은 집이다. 하지만, 말린의 집이다. 물론 말린이 집을 판다면, 차고 위의 방에 사는 케리도 같이 이사를 나가야 할 것이다. 안된 일이군, 두 사람의 코트를 걸어놓은 벽장문을 닫으며 올리브는 생각한다. 몇 년전 케리 먼로는 크리스토퍼에게 눈길을 준 적이 있다. 아들의 병원에서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헨리마저도 아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세요, 크리스토퍼는 말했다. 그여자는 제 타입이 아니에요. 그 말은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우습다.  - P302

이 광경을 지켜보는 올리브는 기분이 묘하다. 질투심? 아니,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질투를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가갈수 없는 느낌, 그래 그런 기분이었다. 통통하고 천성이 친절한여인이 아이들과 사촌, 친구들에 둘러싸여 소파에 앉아 있다. 그런 여인은 올리브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다. 올리브는 이감정이 가져오는 낙심을 깨닫는다.
그녀는 오늘 왜 여기에 왔던가? 헨리가 에드 보니의 장례식에꼭 가보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니, 그녀는 누군가의 깊은 슬픔을 보며 자신의 어두운 마음에 한줄기 빛이 비쳐들기를 바라며 왔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로 가득한 오래된 집은그녀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리고 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 위로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 P310

파도가 밀려나가고 있다. 바닷가 부근의 물은 잔잔하고 쇳덩이 빛깔이지만, 롱웨이 록을 지나는 지점부터는 물살이 변덕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하얀 물마루마저 보인다. 작은 만에서 바닷가재 부표가 살며시 까딱까딱 움직이고, 갈매기가 마리나 부근의 선창에서 배회한다. 하늘은 아직 푸르지만 북동쪽으로는 막일어나고 있는 구름 띠와 수평선이 나란하고, 저쪽 다이아몬드섬의 소나무들은 꼭대기가 휘어져 있다.
올리브는 결국 떠나지 못했다. 진입로의 차가 다른 차들로 막혀 있어 나가려면 이리저리 차 주인들을 찾아 묻고 다니며 법석을 떨어야 하는데, 그 짓은 하기 싫다. 그래서 올리브는 눈에 띄지 않는 좋은 자리를 찾아낸다. 데크 바로 아래 구석에 있는 나무 의자, 거기 앉아 구름이 만 위로 서서히 지나가는 걸 구경할 - P311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올리브는 깊은 숨을 내쉬며 나무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사실이아니기도 하니까. 불과일년전 새방의 굽도리 널에 필요한 치수를 재려고 무릎을 꿇고 자를 들고 엎드린 다음 그녀가 받아 적도록 수치를 불러주던 헨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리고 일어서던 키 큰 헨리 됐어, 올리. 개들을 오줌 누이고 시내로 가자구." 그리고 차를 탔었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아, 올리브는얼마나 기억하고 싶었던가, 그러나 기억할 수 없었던가. 시내로들어간 다음, 목재 가게에 갔다가 우유와 주스가 필요해서 들렀던 ‘숍앤세이브‘의 주차장에서 올리브는 차에 있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걸로 두 사람의 인생은 끝이었다. 헨리는 차에서나와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고, 다시는 집으로이어지는 자갈길을 걷지 못했고, 다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저 가끔씩 그 커다란 청록색 눈으로 병원 침대에서 올리브를 멀거니 바라볼 뿐.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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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바빴다.
3층과 1층을 오르락내리락...
바람빠진 올리브같다.
뚱뚱하고 늙은 올리브처럼 숨을 쉭쉭 쉬면서 다닌다. 오늘도 지쳤다라고 쓰려니 어쩐지 쓸쓸타. 비 때문인가.




보니 몰래 바람을 피운다는 말은 롱웨이 록을 맴도는 갈매기들만큼이나, 해안에서 보면 점보다도 더 작게 보이는 그 갈매기들만큼이나 먼 이야기 같았다. 이런 말들은 하먼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말은 아내에게서 그를 갈라놓을 열정을 뜻하는데. 하먼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보니는 그의 인생에 동력장치와 같았다. 일요일 아침에 데이지와 보내는시간이 애틋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것은 새를 관찰하는 취미를 함께하는 것처럼 관심의 공유에 가까웠다. 그는 다시 잡지로 눈을 돌렸고, 아들 중 하나가 그 비행기를 탔다면 어땠을까생각하고 내심 몸서리를 쳤다. - P150

나뭇잎들은 이제 반쯤 떨어지고 없었다. 노르웨이 단풍은 아직 노란빛을 잃지 않았지만 사탕단풍의 붉은 주황빛 잎들은 벌써 대부분 떨어져 땅바닥에 뒹굴었고, 비죽 튀어나온 팔과 조그만 손가락처럼 보이는 황량한 가지는 해골처럼 을씨년스러웠다.
하먼은 데이지 곁의 소파에 앉았다. 그 젊은 커플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데이지 말이 레스 워시번 부부가 파티와체포 사건 이후로 그들을 쫓아냈다는데, 그후로 그들이 어디 사는지는 모르겠고 티모시는 여전히 제재소에서 일하는 걸로 안다고 했다.
보니 말이 여자애가 죽도록 굶는 병이라던데. 그런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어." 하먼이 말했다.
데이지가 고개를 저었다. "죽도록 굶는 젊고 예쁜 여자들 기사에서 읽었어요. 스스로 체중을 통제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외려 그게 통제를 벗어나게 되고, 그다음엔 멈출 수가 없는 거죠.
너무나 슬픈 일이에요." - P160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예쁘장한 니나 화이트가 마리나의 카페밖에서 티모시 버넘의 무릎에 앉아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생각했다. 넌 아냐, 넌 아냐, 넌 아냐.
일요일 아침,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깔려 있고, 데이지의 거실안 작은 스탠드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데이지,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어. 나는 당신이 대답하거나, 어떤 식으로도 책임감을 느끼길 바라지 않아. 당신이 뭘 어떻게 해서 그런 게 아냐. 당신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을 뿐이지."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데이지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
하먼은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친절하고 부드럽게 거절하리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데이지의 부드러운 팔이 자신을 끌어안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이고, 그녀의 입술이 제 입술에 포개졌을 때 몹시 놀랐다. - P185

그는 예금계좌에서 레스 워시번에게 임대료를 지불했다. 보니가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알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몇 달은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엇을 기다렸던가? 새로운 인생을 밀어내는 산고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던가? 세상이다시 서서히 깨어나는 2월이 되자 공기는 냄새부터가 가벼워 - P185

지고, 조금씩 더 길어진 낮이 눈 덮인 들판에 더 오래도록 남아들을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하먼은 두려웠다. 오래된 추억을헤집는 질문들을 던지며 시작된 그들이 ‘섹파‘ 였을 때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애틋한 관심으로 시작된 그것은 니나의 짧은삶에 대한 애정과 애도를 나누며 그의 가슴에 한 줄기 사랑의 빛을 선사했다. 이 모두는 이제 누가 뭐래도 격렬하고 무르익은 사랑이 되었으며, 그의 심장도 이 사실을 아는 듯했다. 하먼은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뛴다고 생각했다. 레이지보이 의자에 앉아있어도 심장 박동이 들리고, 갈비뼈 바로 아래에서 펄떡이는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심장은 거세게 뛰면서 계속 이렇게지낼 수는 없다고 경고하는 듯했다. 젊은이들만이 사랑의 가혹함을 견딜 수 있는가, 하먼은 생각했다. 계피색 가녀린 니나는예외였지만, 그리고 모든 게 뒤집히고 뒤가 앞이 되어버린 듯,
니나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것만 같았다. 절대 절대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 P186

하지만 하먼이 그후 언제나 기억하게된 것은 책상 위의 서류철을 갑작스럽게 만지작대다가 다시 하먼을 마주하던 의사의 몸과 그의 동작이었다. 하먼이 지금 알지못하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인생은 뼈와 마찬가지로서로 얽혀 직조되며 어긋난 뼈는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하지만 하먼은 알 수 없었다. 이런 병에 걸렸을 때는 누구도알 수 없다. 그는 이제 데이지 포스터의 너그러운 몸이라는 환각적인 세상에 살면서 그날 - 언젠가는 그날이 오리란 걸 알았다만을, 그가 보니를 떠나거나 보니가 그를 쫓아낼 그날만을기다렸다. 둘 중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었다. 머핀 루크가 개심술(開心術)을 기다리듯이, 수술대에서 죽게 될지, 살게 될지 알지 못하면서 개심술을기다리듯이. - P187

6월 어느 날, 키터리지 부부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헨리는 예순여덟, 올리브는 예순아홉이었고, 두 사람은 딱히 젊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늙었다거나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일 년이 지나자, 뉴잉글랜드 지역의 작은 해안 마을 크로스비주민들은 모두 입을 모았다. 그 사건으로 키터리지 부부는 변했다고 헨리는 요즘 우체국에서 마주치면 인사로 우편물만 잠시들어 보였다. 그의 눈을 바라보면 방충망을 쳐놓은 현관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는 외동아들이 갓 결혼한 신부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갑자기 이사 갔을 때조차-사람들은 이 일이 키터리지부부를 크게 낙심시켰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순진한 표정의쾌활한 남자였기에, 이는 더욱 슬픈 일이었다.  - P189

그는 마치 귀에 들어간 물이라도 빼려는 듯 고개를 한 번 홱저었다. 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는 다시고개를 돌려 바닷물로 눈길을 주었고,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 초기에 많이 싸웠다. 올리브가 지금처럼 지긋지긋해하는 싸움도 많았다. 하지만 결혼 후 어느 시기가 되면, 어떤 종류의 싸움은 더는 하지 않게 된다고, 그 이유는지나온 날이 남아 있는 날들보다 더 많아진 시점에서는 사물이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올리브는 생각했다. 산 아래 이쪽 물가에서는 바람이 살을 에는 듯 매서운 편인데도, 올리브의 팔에 햇살 - P221

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만은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선체 밖에 엔진이 달린 모터보트가 다이아몬드 코브 쪽으로 물살을 가르며 지나갔다. 뱃머리가 높이 들려 있었다. 더 멀리로는 붉은 돛과 하얀 돛을 단 소형 요트가 한 척 떠 있었다. 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거의 만조였다. 홍관조 한 마리가 노르웨이 소나무에앉아 지저귀었고, 볕을 담뿍 빨아들이던 베이베리 관목 앞에서는 향이 풍겼다.
서서히, 헨리가 방향을 돌려 가까이에 있는 나무 벤치 위에 앉더니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두 손에 머리를 묻었다. "올리, 그거알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은 고단했고, 눈 주위 피부는 붉었다.
"결혼하고 수십 년을 같이 사는 동안, 당신은 한 번도 사과를 한적이 없는 거 같아. 무슨 일에도."
이내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얼굴이불타는 듯했다. "음, 미안, 미안, 미안해." 그녀가 머리 위에 꽂혀 있던 선글라스를 빼내어쓰며 말했다. "그런데 정확히 무슨뜻이야?" 그녀가 물었다.  - P222

그리고 올리브는 그 일 이후 내면의 비밀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늘 눈물을 흘렸기에. 마치 소년과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여드름쟁이 붉은 머리 소년과 그 겁에질린 얼굴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소년원 정원에서 오후 작업에 열심일 소년을 그려보았다. 간수의 허락을 받은 올리브는 오늘 소 프로에서 산 원단을 가지고 소년에게 원예용 작업복을 만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꾸 마음이쓰였다. 미드코스트 파워에 다니는 남자에게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주었을 캐런 뉴턴처럼. 연모의 정으로 가련히 시들어가는 캐런처럼, "내 할머니라고 해서 내가 꼭 당신을 사랑하란 법은 없잖아요"라고 말하는 아이를 낳은 캐런처럼. - P224

튤립은 터무니없이 아름답게 피었다. 튤립이 자라는 언덕에서 한낮의 햇살이 넓게 퍼졌다. 올리브의 부엌 창에서도 튤립이보였다. 노란색, 하얀색, 분홍빛, 진홍빛의 튤립이 올리브가 깊이를 각각 달리하여 구근을 심었더니 튤립은 예쁘게 불규칙했다. 산들바람이 튤립을 살며시 휘청이게 하면, 형형색색이 떠다니는 마법의 수중(中) 들판처럼 보였다. 헨리가 몇 년 전에 짜넣은 ‘툭 튀어나온 방‘ - 창틀 바로 밑에 작은 침대를 넣어도 될만큼 커다란 베이 윈도우가 있었다ㅡ에 누워서도 튤립과 활짝핀튤립에 내리쬐는 햇살이 보였다. 올리브는 누울 때마다 귀에갖다 대던 트랜지스터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때로는 잠깐씩 졸기도 했다. 매일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다보니, 하루 중 이맘때면 올리브는 몹시 피곤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이면 개를 데리고 차에 올라 강으로 갔다. 강변을 따라 3 마일을 걷고 다시 3마일을 걸어 돌아오다보면, 선조들이 옛날에 한쪽 포구에서 다른포구로 노를 저어 갔던 넓은 띠 같은 강물 위로 해가 떠올랐다. - P264

마치 예뻐지고 싶어했던 젊은 시절의 루이즈의 노력이 염색한 금발과 짙은 분홍 립스틱, 수다스러움과 조심스럽게 맞춰 입었던 옷차림, 비즈와 팔찌와 좋은 구두 등(올리브는 기억하고있었다)이 외려 루이즈의 본질을 가리고 있었던 듯했다. 슬픔과고립으로 이런 것들이 다 벗겨지고, 아마도 약에 잔뜩 취해 있으니,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얼굴과 더불어 연약함 속에서 루이즈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아름다운 늙은 여자는 보기 어려운데, 하고 올리브는 생각했다. 젊었을 때 예뻤던여자라면 아름다움의 잔상은 볼 수 있겠지만 지금 올리브의 눈 - P272

에 보이는 것과 같은 아름다움은 보기 어려웠다. 다른 세상의 눈처럼 빛나는 갈색 눈은 조각상처럼 고운 뼈대 안에 쏙 들어가 있고, 피부는 광대뼈 양쪽으로 팽팽했으며, 입술도 아직 탱탱했고,
하얀 머리칼은 작은 갈색 리본으로 옆으로 묶고 있었다.
"차를 만들었는데." 루이즈가 말했다.
"됐어. 하지만 고마워."
"그래, 그럼." 루이즈가 가까운 의자에 우아하게 앉았다. 그녀는 암녹색의 기다란 스웨터 같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캐시미어로군, 올리브는 대번에 알아보았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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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7-21 17: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집에 사다둔 통통한 올리브 절임병이 있어서
산님 말씀하시는 ‘바람빠진 올리브‘ 비유는 어떤 경우에 쓰시는 걸까?
그러고 보니 저는 바람 빠진 올리브를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갸우뚱.


올리브 카트리지, 알라딘 서재 열혈 마니아분들 중 안 읽으신 분 이제 거의 없으신가봐요. 대세 책...저도 슬슬 압박 느끼고 갑니다

2022-07-24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쟁일기 - 우크라이나의 눈물
올가 그레벤니크 지음, 정소은 옮김 / 이야기장수 / 202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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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가 봄에 선물해준 버츄오플러스를 며칠전에야 개봉했는데 우크라이나에서 만든 제품이었다. ‘우크라이나‘,국가명이아니라 상징성이 되어버린 대명사에 멈칫했다. 전쟁이 일기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전쟁으로 삶이 무너진 사람들이 먼 곳이 아니라 곁에 있음을 깨닫게해준 단순하고 명징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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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7-21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에 대한
글을 보고 있노라니 참...

지금의 삶이 너무 비현실적이어
서 놀라게 됐습니다.

2022-07-24 14: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틴은 왜 그만두지 못할까요?
 

  지금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올해로 8년이다. 전에 살던 곳은 4층이었고 바로 위에 옥상이 있어서 빨래도 널고 볕 좋은 날에는 책도 바람을 맞게 해주고는 했다. 반지하에 살다가 널찍하고 밝고 4층이란 거에 혹해서 이사했는데 기쁨도 잠시, 천정부터 벽까지 모서리마다 벽지가 느슨해지고 슬금슬금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다. 곰팡이의 악몽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겉만 번드레할 뿐 날림으로 지은 집은 당시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밤이면 꿈마다 속절없이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짓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겨우 틈이 나는 휴일이면 옥상 그늘에 책을 널어놓고 뒹굴뒹굴하며 책들과 놀았다. ‘이 책은 언제 샀던가‘, 언제 읽은 거지.‘ ‘내용이 뭐더라‘ 자문자답하는 시간은 책과 나 사이의 관계를 돌아보고 세계를 다시 정립하는 시간들이 되어주었다. 그런 날들마다 노을은 어찌나 장엄하던지 ‘곰팡이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가 되어버렸다.

  ‘다시, 올리브‘를 읽으려니 ‘올리브 키터리지‘부터 찾게 된다. 요즘 내가 그렇다.

  책 위에 먼지가 소복하다.

  곰팡이 때문에 책을 관리하던 습성이 이제 사라져버린 것이다. 습관처럼 내가 자주 중얼거리는 ‘나쁜 게 꼭 다 나쁜 것만은 아니고, 좋은 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는 것이 여기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쌓인 먼지만큼 기억에도 먼지가 앉아서 책은 처음처럼 새롭다. 아니, 처음보다 더 또릿또릿 읽힌다. 등장인물들이 한 명씩 살아서 말 걸고 바라보고 자기네들끼리 속닥거린다. 어이가 없다. 혼자 비실비실 웃으며 읽는다. ‘이거 좋은 일이지.‘



헨리 키터리지는 오랫동안 이웃 마을에서 약사로 일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여름날 약국으로 이어지는 큰길로 들어서기전 마지막 구간의 가시덤불에서 야생 라즈베리가 송알송알알이맺힐 때나,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약국으로 차를 몰았다.
은퇴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 예전에 그런 아침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떠올렸다. 마치 세상이 혼자만의 비밀인 듯이.
발밑에서 타이어가 부드럽게 구르고 햇살이 이른 아침 안개를가르고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오른쪽으로는 만(灣)이, 그다음엔키 크고 늘씬한 소나무들이 잠시 보였다. 코끝을 간질이던 솔숲 향기와 소금기 짙은 공기, 그리고 겨울이면 찬 공기에서 묻어나는 냄새를 그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 P9

았지만, 그렇다고 데니즈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천성이과묵한 데니즈의 성품 때문에 그는 오히려 올리브를 전에 없이더욱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올리브의 날카로운 의견과 탱탱한가슴, 격렬한 감정 변화와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큰 웃음은 그의내면에 아프도록 격심한 욕정을 새로이 불러일으켰고, 때로 어둠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쉴 때 떠오르는 건 데니즈가 아니라 묘하게도 그녀의 젊고 건강한 남편-동물적인 소유욕에 무너지는 젊은 사내의 걱정이었다. 뭇 사내가 몸속 깊이 어둡고 이끼낀 땅의 비밀을 간직한 여성들의 세계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는 행위에서만은 헨리 키터리지도 다른 모든 사내와 다를바가 없었다.
"세상에." 올리브는 헨리가 제 몸에서 내려올 때면 진땀을 빼며 말했다. - P24

헨리의 천성에 쉽게 융화되었다. 헨리의 나날은 순조로웠다. 라디에이터의 쉭쉭대는 속삭임도, 누가 가게 안으로 들어설 때 나는 작은 벨 소리도, 마룻바닥의 삐걱임도, 금전등록기가 ‘카칭하고 열리는 소리도. 당시 그는 가끔씩 약국이 조용하고 원활히돌아가는 건강한 자율신경계 같다고 생각했다.
저녁이면 아드레날린이 샘솟으며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는종일 요리하고 청소하고 식구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올리브가비프스튜 한 그릇을 헨리 앞에 탁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다들목을 빼고 내가 뭘 해주기만을 기다리잖아." 경계경보에 팔뚝의살갗이 따끔거렸다. - P27

약국에서 헨리는 그녀가 멍하니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예상치 못했건만 그 자신의 삶도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갑자기 그렇게 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경계해야만 했다. 실수를 할 수도 있었다. 우선, 클리프 모트에게 이제 강심제에 이뇨제를 추가 복용하기 시작했으니 칼륨 섭취를 위해바나나를 먹으라고 말하는 걸 잊었다. 티벳 집안 여자들은 에리트로마이신 때문에 잠을 설친 적이 있었다. 음식과 함께 복용하라고 말하는 걸 그가 잊었던가? 일도 느려졌다. 알약을 병에 담기 전에 두세 번씩 세면서 자신이 타자로친처방내용을 조심스레 확인하는 날도 많았다. 집에서는 올리브가 말을 하면 집중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다. 올리브가 무섭도록 낯설었다. 아들은 종종 그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 P42

봄이 왔다. 낮이 길어지고 남은 눈이 녹아 도로가 질척했다.
개나리가 활짝 피어 쌀쌀한 공기에 노란구름을 보태고, 진달래가 세상에 진홍빛 고개를 내밀었다. 헨리는 모든 것을 데니즈의눈을 통해 그려보았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이 폭력이리라 생각했다. 콜드웰 씨네 농장을 지나다가 ‘아기 고양이를 그냥 드립니다‘ 라고 쓴 안내문을 본 헨리는 다음 날 작은 고양이 배변함과 고양이 사료, 그리고 발이 얼마나 하얀지 휘핑크림 그릇 속을지나온 것 같은 작고 검은 아기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약국에들어섰다. - P43

 그는 먼 북쪽으로 가 작은 집에서 데니즈와 사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북쪽 어디라도 일자리는 구할 수 있을 터이다. 그녀가 아이를 가질 수도 있겠지. 아빠를 좋아할 어린 딸아이를 여자아이들은 아빠를 좋아하니까.
"그래, 좀 들어보자. ‘과부 위로꾼‘ 아, 미망인은 어떠시던?"
어둠 속에서 올리브가 침대에서 물었다.
"힘들어하지." 그가 대답했다.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
다음 날 그와 데니즈는 친밀한 침묵 속에서 일했다. 그녀는 계산대에, 그는 안쪽 조제실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데니즈가 그에게 기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녀가 슬리퍼스가 된듯, 또는 그가 고양이가 된 듯 두 사람의 내면은 서로에게 부비대고 있었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 그가 말했다. "내가 자네를돌봐줄게." 그의 목소리는 일렁이는 감정으로 충만했다.
데니즈는 그의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는 그녀의 외투를 여며주었다. - P47

그리고 올리브가 몇 주 동안이나저녁만 먹고 나면 바로 침실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통곡한 후에야 헨리는 올리브가 짐 오케이시를 사랑했으며, 어쩌면짐도 그녀를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는 한 번도 올리브에게 묻지 않았고, 그녀도 헨리에게 말하지않았다. 데니즈를 향한 아프도록 절실한 감정에 대해 그가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 데니즈가 다가와 제리의 청혼에 대해 알렸고 그는 말했다. "가"
그는 카드를 창턱에 놓는다. ‘친애하는 헨리‘ 라고 쓰는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후로 다른 헨리를 알게 되었을까? 알 도리가 없었다. 토니 쿠지오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성당에서는 아직도 헨리 시보도를 위해 촛불을 켜는지도 알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불현듯 데이지 포스터가 춤추러 가는이야기를 할 때 내비치던 미소가 생각난다. 방금 데니즈의 카드에 대해, 데니즈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해한다는 사실에 대해 느낀 안도감이 갑자기, 묘하게도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으로 변한다. "올리브." 그가 불러본다. - P55

 "올리브, 그가 부르고, 그녀가 돌아본다. "당신, 날떠나지 않을 거지, 그렇지?"
"아, 또 무슨 소리야, 헨리.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 있다.
니까." 그녀는 얼른 수건에 손을 닦는다.
헨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올리브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평생 말하지 못할 것이다). 데니즈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던 그오랜 세월 동안, 데니즈에 대한 작은 미련 한 톨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아니지, 그런 생각은 감히 품을 수도없어 그는 곧 아니라며 이 생각을 떨쳐버릴 것이다. 누가 스스로를 남의 행복에 배 아파하는 좀스러운 사람이라 생각하겠는가.
말도 안 된다.
"데이지한테 남자가 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곧 두 사람을초대해야겠어." - P56

만(灣)에서는 하얀 포말이 부서지고 파도가 밀려들어 조그만돌멩이들이 바닷물에 쓸려가며 달그락거렸다. 정박해 있는 요트들의 돛대를 때리는 케이블 소리도 띠잉띵 울려왔다. 소년이 고등어를 손질하며 대가리와 꼬리, 반짝이는 내장을 발라내 선창에서 집어던지면 갈매기 몇 마리가 그것들을 잡아채려고 내려오면서 끼룩끼룩 울어댔다. 케빈은 차 안에 앉아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이런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는 마리나에서 멀지않은 풀밭에 대놓았다. 좀더 먼 선창 곁 자갈길 진입로에는 트럭두 대가 주차돼 있었다. - P57

"아버진 여기서 가능한 한 먼 곳으로 가고 싶었던 거 같아요.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시간과 공간적으로 먼 곳으로 가라고. 그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케빈은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무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아버진 작년에 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재혼은 안 하셨고, 제가 집을 떠난 다음에는 거의 뵙지 못했어요."
‘케빈이 학위를 받을 동안 연구비며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다널 동안 아버지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곳에 갈 때마다 그곳엔 희망이 있어 보였다. 모든 곳이 처음에는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좋았어. 여기라면 살 수 있을 거야. 여기서라면 쉴 수 있을 거야. 어울릴 수 있을 거야. 남서부의 거대한 하늘, 사막의 산 위에 걸쳐진 그림자, 끝이 붉은 선인장, 노란꽃이 피는 선인장, 혹은 끝이 민숭민숭한 선인장까지, 처음에 투손으로 이사했을 때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그는 혼자서, 그다음엔 대학 친구들과 같이 하이킹을 했다. 광막한먼지투성이와 거친 해안선 사이의 강렬한 대조 가운데 선택을해야만 했다면 아마 그는 투손을 골랐을 것이다. - P79

물이 다시 차오르고, 두 사람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둘이다시 물속에 가라앉았을 때 그의 다리에 뭔가가 걸렸다. 오래된파이프였고,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번 파도가 다시 몰려올 때 두 사람은 모두 머리를 한껏 높이 쳐들고 한번 더 크게 숨을 쉬었다. 키터리지 선생님이 위에서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도와줄 사람이 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패티가 떠내려가지 않게만 하면 되었다. 소용돌이치며 두 사람을 집어삼키는 바닷물속에 다시 잠겼을 때 그는 패티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녀의 팔을 꼭 붙잡았다. 널 놓지 않을게. 파도가 칠 때마다 햇살이반짝이는 짠 바닷물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케빈은 그녀의 눈을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그 옛날 여왕처럼 줄넘기를 하던 소녀, 지금은 바다에 빠진 젖은 머리의 여인이 두 사람의 구조만을 바라며 바다의 힘만큼이나 격렬하게그를 붙잡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오, 미친, 이우스운, 알 수 없는 세상이여! 보라. 그녀가 얼마나 살고 싶어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붙잡고 싶어하는지. - P86

그녀는 공중전화로 가서 맬컴의 번호를 돌렸다. 번호는 오래전부터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십이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집에전화를 건 적은 없었다. 이십이 년이면 그녀는 신호음을 들으며생각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오랜 시간이라고 생각할걸. 그러나 앤지에게 시간은 하늘만큼이나 크고 둥글었고, 시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바로 음악과 신을, 왜 바다가 깊은지를 이해하려는 것과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앤지는 오래전부터 그러지 않는 방법을 알았다.
맬컴이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맬컴" 그녀가 나지막이입을 열었다. "난 더이상 당신을 만날 수 없어요. 정말 미안하지만 더는 못 하겠어요." 침묵. 아내가 바로 곁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안녕." 그녀가 말했다. - P97

올리브는 크리스가 왜 굳이 친구를 많이 사귀려 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크리스는 그런 면에서 올리브를 닮았다. 말이 많은 걸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내가 등만 돌리면 바로 수군거릴 것이다. "사람을 절대 믿지 마라." 수십 년 전에, 누가 마른 소똥 한 바구니를 현관 문 앞에 갖다 놓은 후로 올리브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말했다. 헨리는 그런 사고방식에 짜증을 냈지만 헨리 자신부터가 짜증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인생이 시어스백화점 카탈로그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두가 미소 짓고 있는 광경인 듯, 남편은 언제나 순진하기만 했다. - P123

그녀가 오늘 종일 뿌듯하게 여겼던 이 드레스로 변신한 그 꽃들수잔이 자신의 하객들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방충문이 다시 쾅 닫히더니 정원은 조용해졌다. 누가 자기를 이방에서 발견하기 전에 거실로 내려가야 한다. 몸을 숙이고 저 신부의 뺨에 입 맞춰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담뿍 미소를 담고 뭐든지 다 아는 그 얼굴로 주위를 빙 둘러볼 그 뺨에.
아, 그 생각을 하니 아프다. 침대에 내려앉는 올리브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몇 달 전만 해도 거의 죽어가던, 완전히포기할 뻔했던, 이따금 너무나 아픈 심장에 대해 수잔은 무얼알까? 그녀가 운동을 안 하는 것도, 콜레스테롤 수치가 하늘을찌를 듯한 것도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핑계일 뿐이다. 실로 사위어가는 것은 그녀의 영혼임을 숨기는 핑계일 뿐이다. - P128

스웨터는 망가지고, 신발은 브래지어와 같이 던킨 도너츠 화장실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져 쓰고 버린 화장지와 오래된 생리대 더미에 덮여 있다가 다음 날 대형 쓰레기통 안으로 구겨져들어갈 것이다. 사실 닥터 수가 올리브 가까이에서 살 거라면,
수잔이 스스로에 대해 계속 의구심을 갖도록 올리브가 이것 조금, 저것 조금을 가져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올리브가 스스로에게 작은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자기가 뭐든 다안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살 필요는 없다. 뭐든 다 아는 사람은아무도 없으니까. 사람은 자기가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니까.
"가" 올리브가 마침내 입을 열고는 겨드랑이 아래로 핸드백을 챙기면서 거실을 가로지르는 여정을 준비한다. 머릿속으로꽃무늬 드레스 밑에서 두근대는 자신의 심장을, 그 커다란 붉은근육을 그리면서.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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