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올해로 8년이다. 전에 살던 곳은 4층이었고 바로 위에 옥상이 있어서 빨래도 널고 볕 좋은 날에는 책도 바람을 맞게 해주고는 했다. 반지하에 살다가 널찍하고 밝고 4층이란 거에 혹해서 이사했는데 기쁨도 잠시, 천정부터 벽까지 모서리마다 벽지가 느슨해지고 슬금슬금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다. 곰팡이의 악몽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겉만 번드레할 뿐 날림으로 지은 집은 당시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밤이면 꿈마다 속절없이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짓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겨우 틈이 나는 휴일이면 옥상 그늘에 책을 널어놓고 뒹굴뒹굴하며 책들과 놀았다. ‘이 책은 언제 샀던가‘, 언제 읽은 거지.‘ ‘내용이 뭐더라‘ 자문자답하는 시간은 책과 나 사이의 관계를 돌아보고 세계를 다시 정립하는 시간들이 되어주었다. 그런 날들마다 노을은 어찌나 장엄하던지 ‘곰팡이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가 되어버렸다.
‘다시, 올리브‘를 읽으려니 ‘올리브 키터리지‘부터 찾게 된다. 요즘 내가 그렇다.
책 위에 먼지가 소복하다.
곰팡이 때문에 책을 관리하던 습성이 이제 사라져버린 것이다. 습관처럼 내가 자주 중얼거리는 ‘나쁜 게 꼭 다 나쁜 것만은 아니고, 좋은 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는 것이 여기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쌓인 먼지만큼 기억에도 먼지가 앉아서 책은 처음처럼 새롭다. 아니, 처음보다 더 또릿또릿 읽힌다. 등장인물들이 한 명씩 살아서 말 걸고 바라보고 자기네들끼리 속닥거린다. 어이가 없다. 혼자 비실비실 웃으며 읽는다. ‘이거 좋은 일이지.‘

헨리 키터리지는 오랫동안 이웃 마을에서 약사로 일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여름날 약국으로 이어지는 큰길로 들어서기전 마지막 구간의 가시덤불에서 야생 라즈베리가 송알송알알이맺힐 때나,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약국으로 차를 몰았다. 은퇴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 예전에 그런 아침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떠올렸다. 마치 세상이 혼자만의 비밀인 듯이. 발밑에서 타이어가 부드럽게 구르고 햇살이 이른 아침 안개를가르고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오른쪽으로는 만(灣)이, 그다음엔키 크고 늘씬한 소나무들이 잠시 보였다. 코끝을 간질이던 솔숲 향기와 소금기 짙은 공기, 그리고 겨울이면 찬 공기에서 묻어나는 냄새를 그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 P9
았지만, 그렇다고 데니즈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천성이과묵한 데니즈의 성품 때문에 그는 오히려 올리브를 전에 없이더욱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올리브의 날카로운 의견과 탱탱한가슴, 격렬한 감정 변화와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큰 웃음은 그의내면에 아프도록 격심한 욕정을 새로이 불러일으켰고, 때로 어둠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쉴 때 떠오르는 건 데니즈가 아니라 묘하게도 그녀의 젊고 건강한 남편-동물적인 소유욕에 무너지는 젊은 사내의 걱정이었다. 뭇 사내가 몸속 깊이 어둡고 이끼낀 땅의 비밀을 간직한 여성들의 세계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는 행위에서만은 헨리 키터리지도 다른 모든 사내와 다를바가 없었다. "세상에." 올리브는 헨리가 제 몸에서 내려올 때면 진땀을 빼며 말했다. - P24
헨리의 천성에 쉽게 융화되었다. 헨리의 나날은 순조로웠다. 라디에이터의 쉭쉭대는 속삭임도, 누가 가게 안으로 들어설 때 나는 작은 벨 소리도, 마룻바닥의 삐걱임도, 금전등록기가 ‘카칭하고 열리는 소리도. 당시 그는 가끔씩 약국이 조용하고 원활히돌아가는 건강한 자율신경계 같다고 생각했다. 저녁이면 아드레날린이 샘솟으며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는종일 요리하고 청소하고 식구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올리브가비프스튜 한 그릇을 헨리 앞에 탁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다들목을 빼고 내가 뭘 해주기만을 기다리잖아." 경계경보에 팔뚝의살갗이 따끔거렸다. - P27
약국에서 헨리는 그녀가 멍하니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예상치 못했건만 그 자신의 삶도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갑자기 그렇게 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경계해야만 했다. 실수를 할 수도 있었다. 우선, 클리프 모트에게 이제 강심제에 이뇨제를 추가 복용하기 시작했으니 칼륨 섭취를 위해바나나를 먹으라고 말하는 걸 잊었다. 티벳 집안 여자들은 에리트로마이신 때문에 잠을 설친 적이 있었다. 음식과 함께 복용하라고 말하는 걸 그가 잊었던가? 일도 느려졌다. 알약을 병에 담기 전에 두세 번씩 세면서 자신이 타자로친처방내용을 조심스레 확인하는 날도 많았다. 집에서는 올리브가 말을 하면 집중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다. 올리브가 무섭도록 낯설었다. 아들은 종종 그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 P42
봄이 왔다. 낮이 길어지고 남은 눈이 녹아 도로가 질척했다. 개나리가 활짝 피어 쌀쌀한 공기에 노란구름을 보태고, 진달래가 세상에 진홍빛 고개를 내밀었다. 헨리는 모든 것을 데니즈의눈을 통해 그려보았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이 폭력이리라 생각했다. 콜드웰 씨네 농장을 지나다가 ‘아기 고양이를 그냥 드립니다‘ 라고 쓴 안내문을 본 헨리는 다음 날 작은 고양이 배변함과 고양이 사료, 그리고 발이 얼마나 하얀지 휘핑크림 그릇 속을지나온 것 같은 작고 검은 아기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약국에들어섰다. - P43
그는 먼 북쪽으로 가 작은 집에서 데니즈와 사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북쪽 어디라도 일자리는 구할 수 있을 터이다. 그녀가 아이를 가질 수도 있겠지. 아빠를 좋아할 어린 딸아이를 여자아이들은 아빠를 좋아하니까. "그래, 좀 들어보자. ‘과부 위로꾼‘ 아, 미망인은 어떠시던?" 어둠 속에서 올리브가 침대에서 물었다. "힘들어하지." 그가 대답했다.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 다음 날 그와 데니즈는 친밀한 침묵 속에서 일했다. 그녀는 계산대에, 그는 안쪽 조제실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데니즈가 그에게 기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녀가 슬리퍼스가 된듯, 또는 그가 고양이가 된 듯 두 사람의 내면은 서로에게 부비대고 있었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 그가 말했다. "내가 자네를돌봐줄게." 그의 목소리는 일렁이는 감정으로 충만했다. 데니즈는 그의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는 그녀의 외투를 여며주었다. - P47
그리고 올리브가 몇 주 동안이나저녁만 먹고 나면 바로 침실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통곡한 후에야 헨리는 올리브가 짐 오케이시를 사랑했으며, 어쩌면짐도 그녀를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는 한 번도 올리브에게 묻지 않았고, 그녀도 헨리에게 말하지않았다. 데니즈를 향한 아프도록 절실한 감정에 대해 그가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 데니즈가 다가와 제리의 청혼에 대해 알렸고 그는 말했다. "가" 그는 카드를 창턱에 놓는다. ‘친애하는 헨리‘ 라고 쓰는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후로 다른 헨리를 알게 되었을까? 알 도리가 없었다. 토니 쿠지오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성당에서는 아직도 헨리 시보도를 위해 촛불을 켜는지도 알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불현듯 데이지 포스터가 춤추러 가는이야기를 할 때 내비치던 미소가 생각난다. 방금 데니즈의 카드에 대해, 데니즈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해한다는 사실에 대해 느낀 안도감이 갑자기, 묘하게도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으로 변한다. "올리브." 그가 불러본다. - P55
"올리브, 그가 부르고, 그녀가 돌아본다. "당신, 날떠나지 않을 거지, 그렇지?" "아, 또 무슨 소리야, 헨리.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 있다. 니까." 그녀는 얼른 수건에 손을 닦는다. 헨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올리브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평생 말하지 못할 것이다). 데니즈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던 그오랜 세월 동안, 데니즈에 대한 작은 미련 한 톨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아니지, 그런 생각은 감히 품을 수도없어 그는 곧 아니라며 이 생각을 떨쳐버릴 것이다. 누가 스스로를 남의 행복에 배 아파하는 좀스러운 사람이라 생각하겠는가. 말도 안 된다. "데이지한테 남자가 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곧 두 사람을초대해야겠어." - P56
만(灣)에서는 하얀 포말이 부서지고 파도가 밀려들어 조그만돌멩이들이 바닷물에 쓸려가며 달그락거렸다. 정박해 있는 요트들의 돛대를 때리는 케이블 소리도 띠잉띵 울려왔다. 소년이 고등어를 손질하며 대가리와 꼬리, 반짝이는 내장을 발라내 선창에서 집어던지면 갈매기 몇 마리가 그것들을 잡아채려고 내려오면서 끼룩끼룩 울어댔다. 케빈은 차 안에 앉아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이런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는 마리나에서 멀지않은 풀밭에 대놓았다. 좀더 먼 선창 곁 자갈길 진입로에는 트럭두 대가 주차돼 있었다. - P57
"아버진 여기서 가능한 한 먼 곳으로 가고 싶었던 거 같아요.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시간과 공간적으로 먼 곳으로 가라고. 그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케빈은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무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아버진 작년에 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재혼은 안 하셨고, 제가 집을 떠난 다음에는 거의 뵙지 못했어요." ‘케빈이 학위를 받을 동안 연구비며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다널 동안 아버지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곳에 갈 때마다 그곳엔 희망이 있어 보였다. 모든 곳이 처음에는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좋았어. 여기라면 살 수 있을 거야. 여기서라면 쉴 수 있을 거야. 어울릴 수 있을 거야. 남서부의 거대한 하늘, 사막의 산 위에 걸쳐진 그림자, 끝이 붉은 선인장, 노란꽃이 피는 선인장, 혹은 끝이 민숭민숭한 선인장까지, 처음에 투손으로 이사했을 때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그는 혼자서, 그다음엔 대학 친구들과 같이 하이킹을 했다. 광막한먼지투성이와 거친 해안선 사이의 강렬한 대조 가운데 선택을해야만 했다면 아마 그는 투손을 골랐을 것이다. - P79
물이 다시 차오르고, 두 사람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둘이다시 물속에 가라앉았을 때 그의 다리에 뭔가가 걸렸다. 오래된파이프였고,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번 파도가 다시 몰려올 때 두 사람은 모두 머리를 한껏 높이 쳐들고 한번 더 크게 숨을 쉬었다. 키터리지 선생님이 위에서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도와줄 사람이 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패티가 떠내려가지 않게만 하면 되었다. 소용돌이치며 두 사람을 집어삼키는 바닷물속에 다시 잠겼을 때 그는 패티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녀의 팔을 꼭 붙잡았다. 널 놓지 않을게. 파도가 칠 때마다 햇살이반짝이는 짠 바닷물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케빈은 그녀의 눈을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그 옛날 여왕처럼 줄넘기를 하던 소녀, 지금은 바다에 빠진 젖은 머리의 여인이 두 사람의 구조만을 바라며 바다의 힘만큼이나 격렬하게그를 붙잡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오, 미친, 이우스운, 알 수 없는 세상이여! 보라. 그녀가 얼마나 살고 싶어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붙잡고 싶어하는지. - P86
그녀는 공중전화로 가서 맬컴의 번호를 돌렸다. 번호는 오래전부터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십이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집에전화를 건 적은 없었다. 이십이 년이면 그녀는 신호음을 들으며생각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오랜 시간이라고 생각할걸. 그러나 앤지에게 시간은 하늘만큼이나 크고 둥글었고, 시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바로 음악과 신을, 왜 바다가 깊은지를 이해하려는 것과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앤지는 오래전부터 그러지 않는 방법을 알았다. 맬컴이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맬컴" 그녀가 나지막이입을 열었다. "난 더이상 당신을 만날 수 없어요. 정말 미안하지만 더는 못 하겠어요." 침묵. 아내가 바로 곁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안녕." 그녀가 말했다. - P97
올리브는 크리스가 왜 굳이 친구를 많이 사귀려 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크리스는 그런 면에서 올리브를 닮았다. 말이 많은 걸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내가 등만 돌리면 바로 수군거릴 것이다. "사람을 절대 믿지 마라." 수십 년 전에, 누가 마른 소똥 한 바구니를 현관 문 앞에 갖다 놓은 후로 올리브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말했다. 헨리는 그런 사고방식에 짜증을 냈지만 헨리 자신부터가 짜증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인생이 시어스백화점 카탈로그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두가 미소 짓고 있는 광경인 듯, 남편은 언제나 순진하기만 했다. - P123
그녀가 오늘 종일 뿌듯하게 여겼던 이 드레스로 변신한 그 꽃들수잔이 자신의 하객들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방충문이 다시 쾅 닫히더니 정원은 조용해졌다. 누가 자기를 이방에서 발견하기 전에 거실로 내려가야 한다. 몸을 숙이고 저 신부의 뺨에 입 맞춰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담뿍 미소를 담고 뭐든지 다 아는 그 얼굴로 주위를 빙 둘러볼 그 뺨에. 아, 그 생각을 하니 아프다. 침대에 내려앉는 올리브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몇 달 전만 해도 거의 죽어가던, 완전히포기할 뻔했던, 이따금 너무나 아픈 심장에 대해 수잔은 무얼알까? 그녀가 운동을 안 하는 것도, 콜레스테롤 수치가 하늘을찌를 듯한 것도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핑계일 뿐이다. 실로 사위어가는 것은 그녀의 영혼임을 숨기는 핑계일 뿐이다. - P128
스웨터는 망가지고, 신발은 브래지어와 같이 던킨 도너츠 화장실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져 쓰고 버린 화장지와 오래된 생리대 더미에 덮여 있다가 다음 날 대형 쓰레기통 안으로 구겨져들어갈 것이다. 사실 닥터 수가 올리브 가까이에서 살 거라면, 수잔이 스스로에 대해 계속 의구심을 갖도록 올리브가 이것 조금, 저것 조금을 가져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올리브가 스스로에게 작은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자기가 뭐든 다안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살 필요는 없다. 뭐든 다 아는 사람은아무도 없으니까. 사람은 자기가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니까. "가" 올리브가 마침내 입을 열고는 겨드랑이 아래로 핸드백을 챙기면서 거실을 가로지르는 여정을 준비한다. 머릿속으로꽃무늬 드레스 밑에서 두근대는 자신의 심장을, 그 커다란 붉은근육을 그리면서.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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