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재학 중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단편소설 「탑」이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 『객지」 가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무기의 그늘」 「장길산』 「오래된 정원」 『손님」 「모랫말 아이들』 「심청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철도원 삼대』, 자전 수인』 등이 있다.
1989년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다룬 『무기의 그늘로만해문학상을, 2000년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변혁을 꿈꾸며 투쟁했던 이들의 삶을 다룬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모티프로 한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손님 「심청, 연꽃의 길」 「오래된정원이 프랑스 페미나상 후보에 올랐으며, 『해질 무렵으로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을 수상했다. 2024년 『철도원 삼대가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 P-1

작가의 말

군산은 일제가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설계한 식민지 근대의 살아 있는 흔적이다. 항구에밀집한 적산가옥과 근대건축군 등은 모두 식민 권력의 경제적 지배를 가능케 한 기반 시설이었다. 젊은 시절 전주에 놀러 갔다가 기차를 타고 이리역에서 내려 일부러 시외버스를 타고 군산 항구를 찾아 들어와보기도 했다. 그 무렵만 해도 옛 군산 내항 일대는 마치 일본의 작은 어촌을연상시키는 항구 뒷골목의 선술집 분위기와 해물 안주로술꾼들에게 잘 알려진 명소였다.
나는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수도 장춘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 외가인 평양을 거쳐 서울 변두리 산업지구였던 영등 - P218

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지금 와서 따져보면 네살 적부터 살았던 영등포야말로 내 고향이다. 예전 영등포역과시장 일대의 기억이 각인된 나는 그곳과 비슷한 장소를 만나면 정서적으로 안정된 느낌이 들곤 했다.


군산에 오니 문정현 신부가 떡 버티고 있었다. 문 신부는 노동자 시위와 각종 철거 현장에 출몰하여 ‘길 위의 사제‘라는 불편한 별명을 얻었는데, 군산에 와보니 그이가 ‘만년 사업‘ 중이었다. 문 신부와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 환경·평화 활동가들은 미군기지 용지로 결정되어 철거한 삼백년 된 포구 마을 ‘하제‘ 터를 지키고 있었다. 그 하제 마을 제일 안쪽 구석에 있는 육백년 묵은 서낭목 팽나무가 빈터의 상징이었다. 문정현 신부와 ‘평화 바람‘ 일동은 한달에 한번씩 팽나무 제를 지내며 전국의 문화 놀이꾼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으며, 드디어 시민들의 염원에 따라 팽나무는 천연기념물 및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제 이 나무는 아무도 함부로 베거나 없애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군산에 이사 오자마자 하제 마을 빈터를 찾아가 막걸리 네병을 나무뿌리에 부어드리고 축문을 지어 소지하며 지켜드릴 것을 서원했다. 그 서원 안에는 팽나무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한편 쓰겠다는 염원도 들어 있었다. - P219

이 나무가 통과한 육백년이라는 시간은 물론 사람이 정한 시간일 뿐이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바다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구분되지 않는 흐름 가운데 있다. 나는 사람으로서 이 육백년을 나무와 더불어 생각해보기로했다. 불교의 시간 개념 가운데 윤회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윤회란 고대 브라만교 이래로 내려온 생각일 뿐, 석가모니는 윤회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는 관계의 영원한 순환에 대하여 말하고 카르마의 이어짐에 대하여 말했다. 브라만나 후대의 세속 불교가 전도와 사원의 유지를 위하여 윤회를 말하고 있을 뿐, 석가모니는 죽음 이후나 그 어떤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도 침묵했다. 가령 내가 죽어 수백의 화학물질이 분해되어 어느 소나무 뿌리를 타고 올라 나뭇가지 끝의 일부분이 되어 다시 수백년 마을 풍경을 내다본다든가 하는 상상은 브라만의 영원한 자아 ‘아트만‘과 상관없으니, 석가모니 식으로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이 나무를 둘러싼 육백년은 역사가 아니라 인연과 관계의 순환이며 카르마의 계속되는 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년 전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부처의 ‘열반경‘과 해월 최시형의 ‘사인여천‘에 깃든 설법을 읽으며,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던 생각이 - P220

군산에 와서 ‘팽나무‘를 만나면서 이제야 성사되었다.
생사는 물론 세상만사는 인연에 따라 변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벽은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큰 바람일 것이다.


준비부터 마치기까지 사년이나 걸렸다. 그동안 참아주고 기다리며 자료 수집에서 잡다한 일에 이르기까지 거들어주던 창비의 이진혁, 전성이 편집자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곁에서 일상을 책임지며 보살펴준 아내 윤지원의 격려가 없었다면 이 작품을 잘 끝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몇해나 더 글을 쓰게 될지 모르지만 그가 든든한 버팀목이되어주리라 믿고 있다.

2025년 늦가을, 군산에서
황석영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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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노래


작은 사과나무를 돌보는 아버지 옆에 서면 사과나무꽃입술이 흙 가장 보드라운 살에 떨어져 분홍 웃음소리. 아버지는 꺼멓게 말라가는 속잎을 따내면서 "얘야 일찍들어온나 처녀애들 밤길은 위험하니라" 전지가위에 잘려 나간 곁가지를 주워 담을 때 본 근육통으로 부어오던 아버지의 손등. "밤길 어둡다고 바래다주는 사람이 있는걸요" 물뿌리개에서 햇살이 번져 올랐습니다. - P41

임지은

아빠는 가꾸고 돌보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쉬는날이면 심은 나무의 가지를 치고, 잡초를 솎고, 집 앞마당에서 시작해 동네 골목을 전부 쓸곤 했다. 한 친구는그런 아빠를 보고 내게 저 사람은 청소부냐고 물어보았다. 아빠가 그 친구의 자전거까지 고쳐주는 것을 보고 나는 알았다. 아빠는 가족을 가꾸는 일을 제일 어려워했다는 것을. 아빠가 내게 당부한 것은 대체로 알아서 잘해라, 라는 종류의 것이었다. 시 속에서 아버지가 최대한 다정하게 할 수 있는 당부가 위험하니 일찍 들어오라는 말인 것처럼, 딸이 귀가할 때까지 잠들지 않고기다렸다 문을 따줄 거면서 왜 마중을 나온 적은 없었을까. 그래서 나는 바래다주는 사람이 없어도 바래다주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 같다. - P42



젖은 발가락으로 꿈을 꾼다 무거운 흙 속에서도 꼼지락거리며 꿈은 사랑과 같이 스며들어 자유로 다시 선다
잠 속에서도 자유하지 못하는 한낱 남루보다 못한 깃발
꿈은 하늘이 되고 땅이 되고 숟가락처럼 가지런히 버티고 선다 이렇게 아래에서 꿈꾸는 것들이 자식을 기른다천년을 버티고 역사를 세운다 - P43

정재율이 시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다 나의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몸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새와는 다르게 꿈에서조차 가벼울 수 없는, 무거운 흙 속에 두 발이 묶인 이는 그 누구보다 자유를 원할 것이다. 무거운 마음을 묻어둔 채 그 위에 깃발을 꽂고, 숟가락을 꽂는 사람만이, 그렇게 안간힘을 써가며 자유를 외치는 사람만이또 다른 역사를 세울 수 있다. 지나온 과거의 날들에 대해, 그 행적에 놓여 있는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생각한다. 정말 감사하게도 나는 이 역사의 땅에서 시인 허수경의 시를 다시 읽을 수 있다. 창밖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자유를 원하는 새 한 마리가. 그것도 무척이나 가볍게.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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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가능성


아침에 물을 받아 몸을 담근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비누의 미끄러지는 속도와
그 비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속도를 지켜봤습니다

제힘으로 펼치고 닫는 것들이 있습니다
매달아놓은 휴지가 저 혼자 힘으로 풀려버리거나
가만히 있던 돌이 구르기 시작하죠

목욕하는 동안의 고독은 잠시였으며
오전 내내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는
점퍼의 지퍼와 씨름했답니다

열어놓은 창문 앞에는
하나 남은 사과가 있습니다

친구에게 빌린 차 뒷자리에는
1미터쯤 되는 선물 포장지가 말려 있고요

오늘을 오래 기다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P-1

내가 잘못 들은 말인지도요

어디쯤 오고 있나요
나는 조금 일찍 도착할 것 같습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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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너희들의 아버지인 내가 후에 너희들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 그것은 상상할 수 없다. 아마 내가 지금 여기서 사라져 간 시대를 비웃고 연민하듯, 너희들도 나의 케케묵은 마음가짐을 비웃고 연민할지모른다. 나는 너희들 스스로를 위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너희들은 나를 발판으로 삼아 높고, 멀리 나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은 몹시 쓸쓸하다. 우리들은 그저 이렇게 말만 하며 태연히 있을수 있을까? 너희들과 나는 피의 맛을 본 짐승처럼 사랑을 맛보았다. 가자. 그리고 우리들 주위의 쓸쓸함을 제거하기 위해 일하자. 나는 너희들을 사랑했다. 영원히 사랑한다. 이것은 어버이로서 너희들에게 보답을 받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쳐 준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나의 감사를 받아달라는 것뿐,
죽어 넘어진 어미를 먹어 치우면서 힘을 기르는 사자 새끼처럼 힘차고 용감하게, 나를 떨쳐버리고 인생의 길로나아가거라.
내 일생이 아무리 실패작이더라도, 내가 아무리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의 발자취에 불순한 어떤 것을 너희들이 발견할 만한 짓은 하지 않겠다. 꼭 그렇게 하겠다. 너희들은 내가 죽어 넘어진 곳에서 새로운 - P182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걸어가야하는가를 너희들은 나의 발자취에서 어렴풋이나마 찾아낼수있을 것이다.
아이들아, 불행하지만 동시에 행복한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의 축복을 가슴에 간직하고 인생의 여정에 오르거라. 앞길은 멀다. 그리고 어둡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거라.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앞에 길은 열리기 마련이다.
가거라 용감하게, 아이들아! (1919)

루쉰의 산문 <아이들에게>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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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부르는 소리로 저리도 청랑하게 흐를 수 있는 세상은 두렵습니다 아름다워진 것이 겁나고 오밀조밀하게 색칠한 것이 화장독 오른 계집 아침 분세수 세모시 옷깃 새로 페니실린 냄새가 납니다
물결같이 이를 악물고 바스라지기도 하지만 아래에서면 빛나고 싶어 두려워집니다
희끗희끗 칼금 그으며 지나는 바람이 나뭇잎 수척한 얼굴에 계절 굽이지는 길을 만들고 그 길 위에 내려앉아 우수수 몸을 떨지만 거미줄은 은빛으로 빛나도 나비는 거미에게 먹히고 불러 세워 뒤돌아보아도 나는
몇 광년 후에야 보는 별빛으로 먼데요 - P32

김연덕


빛에 관한 이 짧은 시를 읽다 보면, 섬세하고 날카롭고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느끼곤 하는 매혹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들어온다. 이때의 두려움은 빛과 멀찍이 떨어지려는 두려움이 아니다. 관조하는 두려움이 아니다. 빛나고 싶어" 찾아오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기로 한 빛의 끝은, 잡아먹힘 혹은 몇광년 후에야 겨우 멀게 나타날 수 있는 빛. 빛나는 찰나를 위해 감수해야만 하는 암흑 같은 시간들을 떠올려본다. 그 시간들은 절망으로 가득하지만, 시간의 결을 따라 어둠을 반으로 쪼갠다면 은빛을 띤 페니실린 냄새가생생히 퍼져 나갈 것이다. - P33

백은선


청량하게 흐르는 세상이 두려운 까닭은 세상이 얼마나 망가져 있고 악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겁나는 이유는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 삶이라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일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리라. 그 비천함과 아름다움 사이의 검게 벌어진 틈을 끝없이바라볼 수밖에 없기에 아름다워질수록 더더욱 겁이 날것이다. 그럼에도 빛나고 싶어지는 마음. 그 마음 또한 진심이어서 이승과 저승으로 현재와 먼 곳으로 계속해서 분열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비밀을 목도한 사람이 감내해야만 하는 형벌이라면우리는 한쪽 눈으로만 눈물을 흘리고 한 발로만 나아가야 하는 걸까. 영혼의 시차에 멀미를 느끼며 흔들리는 한 그루 나무. 달빛 아래 떠오르는 나무를 생각한다. 나를 불러 세우는 것은 누구이며 돌아보는 나는 무엇을마주하는 걸까? - P34

안미린


한 사람의 시간이 그치고 남겨진 것은 이상할 만큼우리다. 우리는 놀라울 만큼 가볍게 우리로 묶인다. 한사람을 떠나보내는 동안 우리는 거의 처음으로 우리를느낄 수 있다. 우리는 연약한 세계 단위가 된 것 같다. 끝과 처음 어디쯤에 우리가 놓인다. 끝없는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느낌에 휩싸이고, 끝나버린 것들이 끝없다는 생각에 가닿는다. 그 끝에 투명한 바통이 남겨진다. 바통에 손을 뻗듯 고인의 첫 책을 펼친다. 다시 첫책을. 또 다른 세계로 떠난 시인의 첫 시집을. 우리는 그러고 싶어 한다. 새로운 처음을 보고 싶어 한다. 남겨진 우리 세계를, 끝남이 끝이 없는 세계를 다시 조금씩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한다.
한 사람의 시간이 그치면 연약한 세계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처음인 일이 반복된 지 오래인 것. 투명한 바통이 오가던 무수한 궤적들. 또 다른 세계로 떠난 시인의 첫 시집을 펼치면서 나는 그리운 미래감感의 흔적을살핀다. 「달빛」에 닿으면, 이 자태에 오래 의지하고 싶어진다. 아득한 빛을 발하는 시의 자태에.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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