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에는 형벌을 형벌이 아니게 하는 세 가지 순간이나온다. 그중 특히 마지막 순간, "또 한차례 그 바위를짊어지고 오르기 위해 / 천천히 산을 내려갈 때 / 주변풍경이 주는 짧지만 깊은 위로"의 순간은 특별하다. 이시간에 내가 주로 한 일이 책을 읽거나 자연 속에 들어가는것이었다.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내 노동 말고, 내 짐 말고, 내 압박감, 긴장감 말고 다른 것에 빠져보고, 내 내면 말고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을 발견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선물이었다. 빛의 일렁거림이나 꽃의 하늘거림 같은것에 눈길을 주고 있으면 지친 와중에도 행복했다. 나는 늘 책을 읽거나 뭔가를 바라보고 있으니, 늘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있는 셈이다. - P11

책을 읽다 보면 ‘선물 같은‘ 생각 하나, 문장 하나가떠오르기도 한다. 우연히 마주친 책의 한 구절, 시한 소절, 얼핏 떠오른 생각 하나, 사랑의 말 한마디. 이런 것들이 대체무엇이길래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마음을 뒤흔드는 이 덧없는 것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들이무엇이길래 감동을 받고 조금 더 잘해야겠다, 이겨내야겠다.
다짐하게 하는 것일까? 그것들이 무엇이길래 어떻게든삶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일까?
그 짧은 휴식 시간에 많은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간다. ‘가장 좋은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하라‘ 이런 마음이 든다면, 작은 빛 하나를 들고 일어서는 것과도 같다. 휴식은 끝나도끝나지 않는 생각이, 계속 말을 거는 목소리 하나가 마음에 남을 수 있다. - P12

우리 인류가 옛날에도 좋아했고 앞으로도 좋아할 것이 많다. 나는 머리 위로 커다란 구름이 지나갈 때의 인간의 모습이 좋고 꽃그늘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이 좋다. 햇살이 좋은 날 사랑하는 사람이랑 빛을 쬐는 인간의 모습이 좋다. 강물에 손을 담그고 빛을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 좋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모여 있는 인간의 모습이 좋고새들이 새끼를 품고 있는 둥지가 숨겨져 있는 절벽이 좋고그 둥지를 지키려는 인간의 모습이 좋다.
나쓰메 소세키의 기도가 민들레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면 나는 저 멀리서 빛이 새어 나오는 숲길이고싶다. 아니, 사실은 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나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영원히 함께하는 많은 것들이 되고 싶다. - P13

자아라는 것은 다름 아닌 기억의 총합이므로 동물을 사랑하면서 나의 자아도 확장되었다. 동물들은 그 고유한 아름다움으로 나를 붙잡아뒀다. 그 아름다움으로 지상의 갖가지 생명체와 세상을 바라보게 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을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아직 남아있으므로 세상은 본질적으로 자비로운 곳이다. 사랑하는 것이 늘어날수록 행복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진짜 감탄할 것이 있는 세상에서 진짜 감탄할줄 아는 인간("우와! 우와!" 한 인간으로 살 수 있으면그게 행복이고 삶의 의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시작한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사랑하는 것들 속에 있는것이 행복이다.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행복의모습이었다. - P55

그것만 바라는 것이 아니다. 위축되어 초라함에 떨지않기를, 고개를 떨구고 혼자 어둠 속에 있지 않기를, 혐오에 빠져들지 않기를,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기를, 너무고통받지 않기를, 힘을 잘못된 데 쓰지 않기를, 존엄성과생명을 잃지 않기를, 자신의 능력과 기쁨을 찾기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기회를 가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되었다.
나는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사랑하는 것을 지키면서힘을 내는 법을 배웠다. 지금은 한 가지를 더 배우고 있다. 워즈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학생이다. 사랑에 빠지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기 속에 있게 되고 이 사랑은 세상을다르게 보게 만든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 일이었다. 나는 이제 고래를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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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
앞날이 두려운 사람이,
상실감에 젖어 있는 사람이,
어두운 예감에 사로잡힌 사람이,

문장 안에 있는 힘을 발견하고
문장을 붉은 실 삼아 가슴의 상처를 꿰매려고 할 때,
문장을 유일한 친구삼아 스스로 다짐을 할 때,

문장은 네 이야기가 된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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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침


내가 우는 건 좀 하지

낮부터 저녁까지 일하다가
밤이 깊으면,
다 큰 어른이나 된듯
술병을 딴다

새벽에 잠들어 아침 늦게 일어난다
스물 때도 이랬는데
조금만 마시거라,
나무라기도 달래주기도 하던 말씀이
이젠 없고

어느 먼 곳이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눈을 감는다
늦은 아침이 어리고,
또 어리다

내가 한 눈물 하지 - P112

노인이 온다


내장에 꽃이 피고 관절에 불꽃이 튀어요
노인이 되느라고
현인도 선인도 악인도 아니고
삐걱거리는 노인이 될 줄은
몰랐는데

눈사람처럼 우물거리다 고개 푹 꺾는
노인이 될 줄은
알고도 몰랐는데,
활처럼 휘고 못처럼 굽은
노인이 온다
흔해빠진 그 노인이라는 마지막
사람이 돼야 할 줄은
모르고도 알았지만,

뇌 속에 안개가 퍼지고 심장에 음악이 흘러요
기운 없고 정신없고 내일 없는
노인이 되려고,
너는 이제 새 세상이 왔는데도 결코 - P109

해방되고 싶지 않은
해방 노예처럼

그 사람을 업고 다니고 품고 다니며
주인처럼 병아리처럼
눈물처럼 모셔라
노인과 살아라 버리지
말아주세요.
노인에게 빌어라

가장 오래 기다린 마지막 인생
마지막 연락,
첫 사람이 온다
원한 없고 인생 없고
노인도 없는
노인이 웃으며 온다

노인들이 사방에서 몰려온다
노인을 사랑하라 - P110

원수를 기뻐하라
꽃처럼 불꽃처럼 타올라라
안개처럼 음악처럼
흘러가라 - P111




예버덩문학의집 앞에 주천강이 흘렀다
나는 밤이면 강에 나갔고
어머니는 강 건너에 나타났다
나는 취해 강을 건너가다 빠지고
어머닌 강을 건너오다 사라져
안을 수 없었다 가으내,
주천강가에 예버덩문학의집이 흘렀다
물은 차고
목은 탔다
술 그만 마시라는 말씀이 달아서
들어드리지 못했다 - P114

잎들은


등나무 긴 줄기에서 잎들이
늦었다고
더디다고
돋아난다
깨알만한 손톱만한 것들이
많이,
아주 많이
늦었다고
그러나 어느 봄 숲 여름 계곡에도
바쁜 잎들은 없네

등나무 마른 줄기에서 잎들이
빠르다며
이르다며
떨어진다
다 커서 더는 자라지 않는
시든 것들이,
이건 너무
금방이지 않느냐고
그러나 어느 가을 산 겨울 들판에도
게으른 잎들은 없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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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얼마 안 걸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번에도 대답은 그녀의 몫이었다.
남편이 자전거를 안으로 옮겨오는 동안 그녀는 바닥에 흩어져있는 공구 중 필수적인 것들을 따로 챙겼다. 남편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그래서 그녀는 늘 그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남편이 바퀴를 분리하려고 손을 뻗기 전에 얼른 앞바퀴를 들어주고, 그가 타이어 레버를 집어들 때 다음에 사용할 펑크패치를 바로 옆에 가져다놓는 식이었다. 두 사람은 일사불란하게, 질서정연하게, 마치 한 사람처럼 움직였다. 어쩌면 그런 것이야말로 삼십여 년 결혼생활의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녀는 종종 했다. 둘 사이엔 아이가 없었다. 아이를 가지려고 애를 쓰던 시기가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적당한때 마음을 접었고, 자신의 노력을 배반하지 않을 만한 목표로 눈을 돌렸다. 남편이 목표로 삼은 건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공구, 타이어, 가죽 안장, 로드 자전거, 미니벨로 같은 결과적으로 손에 돈을 쥐여줄 수 있는 것들.
그럼 자신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 P167

몇 해 전, 오스트리아 빈의 구시가지를 걷다가 상점에서 파는빈티지 엽서를 보았다. 사실 그때는 누가 누구에게 썼는지도 모를 그 오래된 엽서들을 사고판다는 게 신기했고, 여느 관광객처림 엽서들을 잠깐 뒤적거렸지만 크게 관심은 두지 않았다.
당시엔 빈티지 엽서로 소설을 쓰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소설 쓰는 일은 내 삶과 타인의 삶 사이에 반투명한 종이를 겹쳐놓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타인의 삶은 내가 모르는 것이어서 힘껏 상상해야 겨우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속엔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삶과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던 삶, 한때갈망했던 삶과 단 한 번도 그려보지 못했던 삶이 모두 있다. - P182

"부족하다거나 초라하다거나 보잘것없다는 생각도 충분하다거나 만족스럽거나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자신의 일상은 두 가지 상반된 마음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고.
이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일상을 지키고 싶은 마음 사이. 그래서 이 해석할 수 없는 엽서는 버릴 수 없다. ‘빈티지 엽서‘
라는 수신자와 발신자, 타인과 연결된 얇고 납작한 사물이 바로 그 점을 상징하는 것만 같기에.
소설은 친절과 선의 나누기의 어려움으로 시작해 익숙한 일상지키기의 어려움으로 이어지며 한 겹 더 나아간다. 단순한 엽서읽기에서 마음 들여다보기로, 빈티지 엽서를 읽는 ‘그녀‘는 어느새 희미해졌거나 놓쳐버렸을지 모를 꿈을 간직한 ‘나‘의 이야기로 되돌아와 이제 여기 놓여 있다. 소설에 작가가 집중한 힘, 문장을 고른 세심함과 함께 또다른 해석을 기다리며.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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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 접근을 막는 펜스 바깥,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에 벤치가있었다. 평생 ‘밟지 마세요‘라는 표지판만 보고 살아온 유자는 걱정 없이 잔디를 밟고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그 벤치가 좋았다. 그게 실은 조경용이라 결코 잔디밭 안으로 들어가 앉으라는 의도가아니었다는 걸 몰랐을 때까지는 그랬다. 그후에도 가끔씩 잔디밭안으로 들어갔지만 전처럼 생각 없이 그곳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펜스 앞에도 벤치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암벽을 등지고 앉아 잔디밭 한가운데의 벤치를 바라보았다. 잔디를 밟을 때의 폭신하고, 미끌하고, 심지어는 바삭하기까지 한 감촉이 그리움처럼남았는데, 그게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기억인지 금지된 것을 안후의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때때로 발밑이 아찔한 것을 보면, - P120

시작은 그랬다. 그게 유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 때로는 앙심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모진 마음 그대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죄책감으로 변환해가며 살았다. 자기를 먼저 놓아버린 아빠 대신 쩔쩔매느라 자기를 놓아버리지도 못한 엄마를미워했던 건 그게 쉬웠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사이가 나빠진 후은율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매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는엄마는 할퀴기도 쉽고 꼬집고 물기도 쉬웠다고. 꿈속에서는 주먹질도 했다고. 유자는 이해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다가 나중에는 일 년에 한두 번도 안 만나게 된 아빠에게는, 품고 있는 마음이 무엇이든 그걸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을 테니까.
잔뜩 준비를 하고 나가도 다 쏟아붓기는커녕 잠깐 미워하기도 전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그는 은율을 집으로 보낼 때마다 버스 창밖에서 손을 흔들었다고 했다. 나의 상처야, 안녕, 해맑은 웃음을 감추지도 못하며, 그래도 너무 해맑게 보이는 건 아닐까 잠깐씩 망설여가며.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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