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광호 교수는 연담 김명국의 <은사도(隱士圖)>라는 작품의 화제시를면밀히 분석한 결과, 이 그림은 어떤 은일자를 그린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죽음을 그린 "죽음의 자화상"임을 밝혀내었다. 화제를 다시 새겨보면, 연담은 유언을 말이 아니라 그림으로 남겼다는 뜻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을 만드니 將無能作有 그림으로 모습을 그릴지언정 어찌 무슨 말을 전하랴畫貌宣傳言 세상엔 시인이 많고 많지만世上多騷客 누가 이미 흩어진 혼을 불러주리오誰招已散魂
연담이 이처럼 <죽음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사실은 너무도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나는 이러한 모든 지적과 가르침에 감사하며 책의 3쇄를 출판하기에 앞서 세밀한 교열을 다시 보아 여러 곳의 미세한 오류를 바로 잡았다. 이미책을 구입한 독자들을 위하여 정오표를 만들었으나 전달할 길이 없는 것이 죄스럽기만 하다. 앞으로도 오류가 발견되면 곧바로 수정할 것을 약속드리며 강호제현들의유익한 가르침을 기다리겠다.
2001년 5월 15일 유홍준 - P-1
활달한 필치로 아무 거리낌없이 북북 그어내린 몇 가닥 선으로 달마대사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얼굴을 묘사하는 데서도 담묵(淡墨)의 속필(速筆)로 그의 이국적 풍모와 깊은 정신 세계를 인상 깊게 드러내주고 있다. 그야말로 손이 움직이는 대로, 붓이 가는 대로 내맡기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수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동양화에서 말하는 운필(運筆)의 힘과 선의 함축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실감할 수 있으며, 도대체 그가 이그림을 완성하는 데 과연 몇 분이나 걸렸을까 생각할 정도로 일필휘지의 속도감을 엿보게 된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작품을 가리켜 신품(神品)이라 했고, 그런 화가를 신필이라 했다. 연담 김명국은 조선시대 화가 중에서 신필로 추앙받은첫번째 화가이다. 김명국 이전에도 안견, 강희안, 이상좌, 김지 같은 수많은대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신필이라는 평을 듣지 못했다. 신필이란 천재성과 기존의 격식을 뛰어넘는 기격(奇格)이 뒷받침되어야 붙여지는 칭호이다. 김명국 이후에도 정선, 김홍도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이 줄을 이었지만 이들은 대가(大家)·거장(巨匠)이라는 칭호를 받았어도 신필이라 불리지는 않았다. 오직 후대의 오원 장승업만이 신필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니 김명국은 조선시대 두 명의 신필 중 첫번째 화가인 셈이다. - P15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다. 그 화법은 앞시대 사람의 자취를 밟으며 따른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주어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으니, 포치(布置)와 화법 어느 것 하나 천기(天機)가 아닌 것이 없었다. 비유컨대 허공으로 하늘나라의 꽃이 날리듯 눈부시고 황홀하여 형상을 잡아내기 힘들고, 바다에서 용이 일어나듯 변화를 헤아리기 어려우며 무궁함은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 작으면 작을수록 더욱 오묘하고, 크면 클수록 더욱 기발하여 그림에 살이 있으면서도 뼈가 있고, 형상을 그리면서도 의취(畵意)까지 그려냈다. 그 역량이 이미 웅대한데 스케일 또한 넓으니, 그가 별격의 일가(一家)를 이룬즉,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다.
김명국의 예술적 천재성에 대한 남태응의 이 같은 찬사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와 완암(浣巖) 정내교(鄭來僑, 1681~1757)가 연담을 평한 글에서도 그대로 만나게 된다.) - P16
김명국이 그림 그리는 데 술버릇이 어떻게 작용했느냐는 것은 한낱 재미있는 얘깃거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술이 창작의 촉매제였건 아니였건, 그 취하는 정도에 따라 걸작과 태작이 섞여 나왔다는 것은 자신의 작품 관리에 철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은 엄격히 말해서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오만일 수도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천재성은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기인으로 더 유명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태응은 이것을 꼭 김명국의 작가적 결함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김명국이 한낱 ‘환쟁이‘일 뿐이라는 신분적 제약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고 그를 두둔했다. 남태응은 「청화사」에서 공재 윤두서를 아주 높게 평가한 다음, 세상 사람들이 공재 윤두서가 연담 김명국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박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공재의 재주가 연담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연담은 천한 신분이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아낄 수 없었던 것이다. 남이소매를 끌고 가면 어쩔 수 없이 손에 이끌려 하루에도 수십 폭을 그려야 했으니, 그 득실이 서로 섞이고 잘되고 못 된 것이 나란히 나와 공재처럼 절묘하게된 것만을 단단히 골라낼 수 없었다. 만약 연담으로 하여금 그 처지를 공재와 같은 위치에 두게 했다면 이름을 얻은 그 성대함이나 작품의 귀함이 어찌 공재만 못하겠는가. 그러니 이런 식으로그림의 등급을 매기는 것은 진실로 어린애나 가질 소견인 것이다. - P24
그러나 김명국의 예술적 천재성에 대한 이러한 찬사나 증언들은 모두 한두 세대 건너 후대인의 저술들이고,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사실은없다. 이 점은 참으로 이상스러운 일이다. 사실 김명국의 예술을 높이 평가한 남태응과 윤두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태어난 숙종 · 영조 때 문인이었으며, 김명국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뜨거운 애정으로 그의 전기를 쓴정내교는 그들보다 또 한 세대 뒤의 문인이었다. 그러니까 김명국의 예술은동시대가 아니라 반세기 뒤에서야 기록되고 재평가받은 셈이다. 동시대인에게는 하나의 기인으로, 또는 미치광이로 생각되었던 그의 개성적인 필치와기발한 행동이 후대 사람들에게는 그 기행(奇行)과 광태(狂態)가 곧 세상이받아주지 않는 천재성의 굴절로 이해되고 평가되었다는 셈이다. 김명국의 전기로 가장 먼저 씌어졌고, 또 이후에 나오는 모든 그에 대한전기의 모본이 된 정내교의 「화사 김명국전」을 보면 이런 얘기로 끝맺고 있다. - P28
내 나이 15, 16세 되었을 때(1699년 무렵) 어느 지체 있는 집에서 소위 그의제자라고 하는 자를 만나서 연담의 얘기를 대략 들었으며, 또 동네의 늙은이에게서 ‘지옥도‘ 일화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유묵을 보니 넓고 기이하고 탁월하게 빼어나서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었다. - P29
궁실에서는 인조뿐만 아니라 왕자들도 그림을 좋아했다. 봉림대군(효종)이 심양에 끌려가 있을 때 맹영광에게 구천(句踐, ?~B.C.465: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의 왕)이 회계오나라에게 욕보인 그림을 가져오라고 한 것은 그림 자체보다 그 내용에 더 뜻이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지만, 인평대군은 산수를 잘 그려 이름이 높았고, 그가 한양 낙산 동쪽에 저택을 짓고서 이징에게 단청을 시공하고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게 하여 이징은 수모의 눈물을 흘리며 붓을 잡은 적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인평대군의 남다른 회화 완상 취미를 말해준다. 사대부의 그림에 대한 취미와 감상 풍조 또한 이전의 어느 시대 못지 않았다. 대신들이 인조의 그림 취미를 공박한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사대부들의 그림에 대한 천기 사상이 얼마나 완고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 중에는 그림에 일가를 이룬 화인이 많았다. 까치와산수를 잘 그린 조속(趙涑)을 비롯하여 포도의 이계호(李繼祜), 매화의 오달제(吳達濟), 소 그림의 김식(金植), 산수의 윤의립(尹毅立), 송민고(宋民古)와 조직(趙稷) 등이 화명을 남긴 이들이다. 특히 선조 · 인조 연간에는 명나라 풍습에 따라 사대부가 어느 한 소재에 특출한 솜씨를 보인다는 이른바 명사(名士) 일기가 문인으로서 하나의 멋이고 교양이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그래서 조속이 세상을 떠났을 때 『현종실록』에는 그의 행장을 기록하면서 신하로서의 모습과 함께 "그의 그림이 절묘하여 세상에 많이 전하고있다"는 것을 적어놓고 있다. 사대부 중에서 김상헌(金尙憲)과 허목(許穆)은 당대의 감식안으로 많은 화평을 남기고 있다. 이들의 회화에 대한 견식은 우리나라 화가뿐만 아니라송나라의 유송년, 명나라의 구영(仇英), 당인(唐寅), 문징명(文徵明) - P31
등의 작품에 찬을 붙일 정도로 넓었다. 게다가 낭선군(郎善君) 이우(李俁, 1637~1693) 같은 대안목의 수장가도 있었다. 그가 소장한 화첩에는 공민왕의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와 안견의<산수도>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20)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화원별집(別集)』의 80여 점은 본래 낭선군의 수장품을 기본으로하여 꾸며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안목이었다. (이 『화원별집』에는 연담의 그림이 3점 실려 있다. 도판) 참조) 또 도화서 화원 중에서는 이징과 김명국 이외에 선조 때부터 활약한 이신흠, 유성업, 이기룡, 한시각 등이 궁중과 사대부 취미에 맞는 감상화를 잘그려 화명을 남기고 있다. 이렇듯 어느 면으로 봐도 인조시대의 화단은 결코 빈약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예술적 환경 속에서 김명국은 화가로서 활동했던 것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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