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일 2007. 2. 14.


판사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을 죽일 수는 있다. 선고 전날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을 산책한다. 내일의 판결을 머리로 그려보고, 결론에 자신 있는지를 검증한다. - P47

좋은 변호사 2007. 3. 1


성공을 장담하는 변호사는 좋은 변호사가 아닙니다. 재판을 해보면 판사도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명쾌하게 결론 나는 사건도 있지만, 선고하는 그순간까지 결론이 왔다 갔다 하는 사건도 많습니다. 그런데 일부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성공을 장담하며 사건을 수임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무실은 결코 좋은 변호사 사무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재판이라는 것은 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이고, 이길 가능성이 높을 수는 있겠지만 성공을 장담할 수 있는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 P50

말 대신 계약서 2007. 3. 31.


계약서는 그대로 두고 말로 약속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없습니다.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격언이 있지만, 살다 보면 계약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몇 가지 법률만 알아도 억울한 일을 덜 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간혹 법정에서 "법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법을 떠나 상식적으로 상대방 주장은 말이 안 됩니다"라는 말을 듣는데, 부질없는말입니다.
법을 아는 것도 상식을 넓히고 힘을 기르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사전에 법을 제대로 알고 대처하는 것만이 넋두리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특히 착한 사람들은....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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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고 제18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부산지방법원 창원지방법원·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부산가정법원장 등 부산·경남 지역 법관으로 공직 생활 대부분을 보냈다. 판사 시절, 양형 기준을 강화하여 공직 부패와 비리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판결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에겐 상담과 치료 프로그램을 이행하게 한 후 그 결과를 양형에 반영했다. 민사 재판에서는 원고와 피고 각각 실리와 명분을 찾아 모두가 이길 수 있는 협상과 조정에 무게를 두었고 형사 재판 중 단 한 번도 사형 선고를 하지 않았다. 2018년 4월 19일 헌법재판관 임기를 시작하여 2025년 4월 18일 퇴임했다.
정상에 오르지 않는 등산을 좋아하고 나무 이름에 해박하다.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券書行萬里路지향하는 엄청난 독서광이자 산책광이다. - P-1

"이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것이다." 김장하선생의 말씀은 제가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지침이 되었습니다. 2025년 4월 19일, 저는 38년의 공직 생활을 끝내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에게 재판권을 위임한 사람도 재판을 받은 사람도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좋은재판을 하기 위하여 시민들과 소통하였고 책을 읽었습니다. 공자의 말씀처럼,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망에 빠지기 쉽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지기 쉽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배운 바를, 생각한 바를 글로 썼습니다. - P5

요구하기 위해 쓴 글도 있고 성찰하기 위해 쓴 글도 있습니다.
이제 무직이 되어 여유가 생겼으므로 인생과 함께 글을한번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우선 그동안 썼던 글들을다시 읽고,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골랐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인생에 조언할 만큼 지혜롭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판사나 재판관으로 있으면서 생각하였던 바를 여러분에게 말하고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저의 인생이 풍요로워질 것이고, 어쩌면 여러분의 인생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한국민으로서 비슷한 고민을 하니까요. - P6

평생 책 한 권 내는 것을 꿈꾸었던 저에게는 이 책의 발간이 큰 의미가 있음이 명백하지만, 여러분께는 어떠한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던 어느 판사의 기록입니다. 호의를 갖고 썼던 글을 책으로 내놓습니다. 판사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판사들은 무슨 책을 읽는가? 궁금한 분들, 특히 저의 생각이 궁금한 분들은 한번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2025년 8월
문형배 - P7

나는 ‘헌법의 존립을 해하거나 헌정 질서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헌정 질서 파괴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배제되고 있는 동안(1983~1986년) 대학교를 다녔다. 그때 열심히사법 시험 공부를 하였다. 헌정 질서가 파괴되건 말건, 헌정 질서가 파괴되는 것에 저항권을 행사하건 말건.
그렇다고 20대 초반의 들끓는 피를 가지고 있던 내가 현실을 초월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생 운동을 하던 친구가 있었고 당장 도서관 공부를 방해하는 최루탄이있었다. 나는 판단을 유보하였다. 시험을 끝내놓고도 얼마든지 시간은 있다고.
1986년 2차 시험을 끝내고 그 무렵 유행하던 공장 체험을 해보기로 하였다. 민중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은 주장이나 실천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거나, 기득권때문에 민중의 고통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그 당시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 P13

내가 원했고,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결정할 수 있고, 또내가 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판사. 국민으로부터 의심 어린 눈초리와 못 미더운 시선을 받은 적도 있지만 법원만큼 자연 치유력을 갖고 있는 국가 기관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자존심이 누구보다도 강하면서, "불의가 법을 유린할때 그건 불법이다. 불의가 법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그건 정의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지 못한 과거를 스스로 반성할줄도 아는 판사들의 법원.
안치환의 노래는 종반부로 치닫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않았네. 길은 멀은데 가야 할 길은 더 멀은데. 비틀거리는 내모습에 비웃음 소린 날 찌르고. 어이 가나 길은 멀은데." - P18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하다.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 - P20

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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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망


깃털이 작게 날았다
그걸 본 사람이 있었다

얼음으로 된 절벽이 아니라고 해도
절망할 수 있다

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계속 끓고 있어서

벌레는 갉아 먹는다
제 몸이 될 것들을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생각할 때
바깥이 생겼다 - P9


나는 이제 꺼내놓을 것들을
꺼내놓는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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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하다


물을 버린 나무들이 동네 건달 같다

여름내 가죽을 뚫고 나온 햇송아지의 뿔,

강가의 왜가리들이 내년에 쓰려고

물속에서 한쪽 다리를 들고

거기다 표를 한다

오래도록

울타리 팥배나무에게 젖을 물리던 해도

붉은 산을 넘어가는 저녁,

나에게는 아직 많은 가을이 있지만

이번 가을은 이게 다라고

나도 마음에다 표를 한다 - P14

가을 서사


나는 이파리처럼 가벼워서 두고 가기 좋으나 그래도 해질 때 바닷가 술집에라도 데리고 가면 나의 시가 얼마나 좋아하겠냐며......

그전에 선배 시인이 죽어 화장장 불가마에 들어가는 걸본 적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의 시는 계속 세상을 떠돌았다. 시처럼 가여운 것도 없다.

사람들이 무작정 가을 산에 와 죽으니까 군(郡)에서 자살수상자 신고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래도 어디든 죽음은 제집에 들기 마련이다.

나의 지구에서 가을 하나가 떠나간다. 어둑한 길을 걸어 당도했는데 그래도 그는 나를 두고 간다. 잘 가라 가을.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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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불어 젖히던 시대에 늘 뿌리를 박고 있었다. 음악에 기여하겠다는 생각, 그것에 무엇인가를 바쳐야겠다는 생각은 나팔이든, 피아노든, 무엇이든 간에 자신만의 소리를 발견하도록 만들었다.


‘기여‘는 그 말을 쓰는 사람에게 품위를 부여하는 단어다. 그리고 에너지를 끌어올리게 하는 단어다. 기여라는 행위가없었다면 인류 역사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고 지상의 많은 좋은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기여하고자 했던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자신만의 소리를 찾거나 말거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물론 중요했다. - P77

그것이 그들의 말이자 삶, 불타는 핵심, 존재 이유, ‘이것이나다!‘라고 할 만한 것, ‘인생을 건다‘는 말이 의미하는 모든것이니까.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이 연주한 음악에 둘러싸여있다. 그들은 음악에 삶을, 슬픔과 희망을 집어넣었고 우리는 삶에 그들의 음악을 집어넣는다. 가끔은 눈을 감고 듣는다. 가끔은 내가 음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내가 받아들여지는 중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잠시나마 뭔가를 이해할 것도 같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삶의 복잡성과 그 너머에 있는 순수함에 대해서. 사랑보다도 행복보다도 더 깊은 그 무언가에 대해서. - P78

그럴 때 음악은 시간을 멈춰 세운다. 우리를 다른 곳으로데려간다. 그 순간에는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않는다. 그 순간 우리는 삶에 대해서 뭔가 알 것만 같은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그러나 아름다운‘은 이 결함 많은 삶에서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라는.
제아무리 노력해봤자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한 것 같은 나날들은 이렇게 위로받고 우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길을 간다. 제프 다이어는 이 모든 것을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음악을 이야기로 펼쳐냈다. 책을 읽은 우리는 얼른 음악을 찾아 듣고 싶어진다. 「그러나 - P78

아름다운』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인 ‘듣기‘를 촉구하는책이다. 그들이 음악에 얼마나 많은 것을 걸었는지, 얼마나많은 피, 땀, 눈물을 쏟아부었는지를 알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만든 음악에 귀를, 몸을, 인생을 완전히맡겨보고 싶다. 마치 사랑에서처럼.

이 책을 읽는 방법이 더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아름다운」은 우리의 덧없는 순간들에 관한이야기다. 세상은 잘 돌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않다고 느끼는 쓸쓸한 순간,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지만마음은 다른 곳에 있던 순간, 접시를 반짝반짝 닦아 싱크대에 올려놓는 순간. 내일은 더 낫겠지 생각하며 잠이 드는 순간, 창가에 서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는순간. 장바구니에 담을 세일 중인 물건을 찾아 마트를 빙빙 도는 순간, 돈을 아끼다 지친 순간, 병원에서 나와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 무서운 병에 걸린 것은 아니겠지 혼자서 옷자락을 들춰 보는 순간. 벚꽃잎이 바람에 날려 떨어져버리는 것을 아쉬워하는 순간, 뉴스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 그늘 없어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초라해지는 - P79

순간. 지쳐서 물 한잔을 마시는 순간, 카페인을 찾아 헤매는순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상 속의 미세한 시간들. 제프다이어의 표현을 빌리면 "참을만한 절망이 반복되는 일상의 일부분, 일상 속에 녹아든 모든 시간의 압축본" 같은순간.
아니면 정반대되는 삶의 순간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들. "우와, 오늘 달 진짜 환하다!", "저구름 좀 봐. 양 같아!", "그때 그 은행나무 기억나?" 이런대화를 하는 순간들.
이런 순간들이 아무것도 아닐까? 책에는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으로 바뀌는 부분이 몇 차례 나온다. - P80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 물음이 전부였다. 
이 단순한 물음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밀려들곤 했었다. 위대한 계시가 밝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위대한 계시가 찾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이나 등불, 어둠 속에서 뜻밖에 켜진 성냥불이 있을 뿐이었다.


울프는 우리의 하루하루는 존재보다 비존재로 이루어지는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누구랑 뭘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잠시 후면 다 잊어버린다. 대부분의 날이 그렇다. 그냥 하던 일을 하고 빨래하고 밥먹고 뭐 좀 보거나 가족들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잔다. 건강검진이나 시험 결과를 기다리거나, 큰 걱정거리가있거나 고통에 시달리면 비존재의 시간이 더 커진다. 어린시절도 비존재의 시간이 더 크다. 비존재의 시간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시간이다. 기억이 없는 시간이다. 그런데 무슨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갑자기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일처럼, 마치 눈앞에 성냥불이 켜진 것처럼 생생한 순간들. 이것이 존재의 순간들이다. 비존재의 흐름을 끊어주는 시간.
울프는 삶의 의미는 엄청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 - P87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그러나 강렬하고 빛나는, 어쩌면 충격과도 같은 ‘존재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소중히 여기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등대로』에서 화가 릴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건 일상적 경험의 차원에서 이건 의자고 저건 식탁일 뿐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이건 기적이고 저건 희열이라고 느끼는 거야.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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