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喪服)을 입고 건(巾)을 뒤집어 쓴 채로 지팡이를 비스듬히 집고는 등을 돌린 채 걸어가는 이 인물은 저승길로 걸어가는 연담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한 화가가 <죽음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사실은 연담 이전에도 없고, 연담 이후에도 없는 오직 연담만이 보여준 그의 뛰어난 개성이다. 그 처연함이란 화면 속에 긴장감을 자아내면서 연담의 허허로운 임종을 엿보게 한다. 자신의 죽는 모습을 마치 유언을 남기듯 그림으로 그렸다는 소탈한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연담은 연담이로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며, 그는 결코 한낱 환쟁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연담 김명국, 그는 죽음 앞에서 <죽음의 자화상>을 그린 인생의 달인(達人)이었고 그림의 신필이었던 것이다. - P51
김명국은 확실히 인조시대 화가로서 당대의 이단이었고, 기인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취흥에 따라 그려낼 수 있는 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의 절묘한 작품을 보고 상찬해준 사람들이 없었고,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모습은 더욱 없었다. 오직 두 차례 일본에 갔을 때 그 영광을 누렸을 뿐이다. 그는 시류 속에 편안히 안주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낭만적 반항의 표정일지언정 자기 자신을 지켰다. 그 점에 연담의 큰 매력과 미덕이 있다. 바로그 점 때문에 연담은 훗날 17세기 조선시대 화단에서 가장 개성적인 작가로살아남게 되었다. 그것이 김명국의 영광이다. 세상이 바뀌고 반세기도 안되어 숱한 찬사 속에 그는 다시 태어난 셈이다. 결국 그의 삶과 예술은 시절을 잘못 만나 기인이 되고 만 한 신필의 자랑스런 반항의 이야기인 것이다. - P51
윤두서는 당당한 한 선비로서 정확하게 시대정신의 추이를 인식하고서 그것을 학문적으로, 예술적으로 실천한 한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그의 지인들은 공재를 가리켜 일국의 재상에 되고도 남을 높은 지식과 도덕의 크기를 갖고 있고, 그의 풍모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넓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고 삶에 지친 그는 결국 고향 땅 해남으로 낙향해 불과 48세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가 낙향하던 바로 그 해, 45세 때 그런<자화상>은 공재의 그러한 풍모와 고독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공재의 <자화상>은 얼굴만을 그리는 일종의 소조(小照)라 할 수 있는데, 상투 위와 수염 아래쪽은 모두 생략하고 얼굴만 부상시키는 구도가 파격적이고 박진감이 있다. 본래 이 <자화상>은 철선묘(鐵線描)로 풍만한 어깨선을 흐미하게 그려넣은 것이었는데 후대에 보수하는 과정에서 아예 지워져버렸으니 마치 허공에 떠오른 얼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범의 상을 한 준수한 얼굴은 육색(肉色)에 윤기가 역력하며 정면을 응시하는 눈초리가 자못 삼엄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압도해버린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속에서 느꼈던 온갖 고뇌가 서려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 역정이 이 작은 화폭에 완벽하게 담겨 있다. 그리하여 한국 회화사상 최초의 자화상인 이 그림은 우리나라 초상화 중최고 걸작으로 손꼽혀 회화로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되었다. - P58
그러나 공재가 간접적으로 조선 후기 회화 전체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다. 특히 속화는 그가 개척한 바를 관아재 조영석과 단원 김홍도가 계속 발전시켜 마침내 가장 조선적인 장르로 완성된다. 또 그가 시도한 문인화풍은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등으로 이어져 마침내 조선적으로 정착되었다. 또 그가 시도한 동국진체(東國眞體)는 백하(白下) 윤순(尹淳)과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에 의해 완성을 보았다. 그런 미술사적 신경지의 선두에 공재 윤두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 P107
실제로 공재 글씨는 고전으로 거슬러올라가 거기에 우리 풍토에 맞는 향색(鄕色)을 가미한 글씨로서, 옥동과 함께 공재가 추구한 동국진체는 결국50년 뒤 그 후배인 백하 윤순과 원교 이광사에서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이점에서도 공재는 선구였던 것이다.
공재 윤두서는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의 후예라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시운을 얻지 못하여 평생 경륜을 펴보지 못한 불우한 선비였다. 그러나공재는 세월을 탓하지 않고 학문과 예술에 힘써 숙종 연간의 문화 기류 속에서 명백히 진보적 입장을 취하며 ‘실득(實得)‘ 있는 학문을 추구하고, 민족주의적인 ‘동국진체‘를 개발하고, 현실주의의 입장을 띤 ‘속화‘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진실로 불운하게도 공재는 학문과 예술이 원숙하게 무르익을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은 너무도 안타깝고 아까운 변고 - P111
였다. 그리하여 벗 옥중 이서는 다음과 같은 통곡의 제문을 바쳤다.
슬픈 일이로다. 하늘은 이 세상을 편안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어찌이다지도 빨리 공을 앗아갔단 말인가? 공의 인후하고 관대한 덕과 공평하고정직한 의지, 영민한 지혜와 폭 넓은 지식,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학문적·예술적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개척한 선구적 과제는 모두 뛰어난 후배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학문에서 실학은성호 이익이, 글씨에서 동국진체는 백하 윤순이, 그림에서 속화는 관아재조영석이 마침내 하나의 장르로 완성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영조시대 문예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의 모든 기틀은 사실상 숙종시대에 그 밑거름이 만들어진 것이라 말하는데, 공재 윤두서는 바로 그 문화를 일구어낸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공재의 선구적 위업, 그리고 천수를 다하지 못한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성호 이익이 눈물로 쓴 제문은 공재가 누구였는가를 이 세상에 가장 극명하게 증언한 글이었다. - P113
죽은 자는 유감이 없고 산 자는 더욱 힘써야 하는 법. 공은 진실로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생은 또한 일찍이 밖에 나아가서는 공의 풍채를 보며 즐거워하였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의 생각하는 바를 간직하였습니다. 말씀하시는 데는 사물의 이치를 갖추었고, 행동함에는 법도가 있었으니 선비로서 현자(賢者)를 희구하는 분이었습니다. 사람을 대함에 공손함과 관대함이 있어, 어진 이고 어리석은 이고 환영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사람과 잘 사귄 분이었습니다. 일에 임할 때는 민첩하면서도 중용을 지키셨고, 예술에서는 편벽됨이 없었습니다. 오호라! 공이 세상을 떠나니 좋은 벗을 잃은 외로움이 앞서고, 들어보기 힘든 얘기를 들어볼 곳도 없게 되었으며, 그 당당한 풍모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재능은 있었으나 명이 짧음은 하늘의 뜻이거늘 어찌 공이 의도한 바라 하겠 - P113
습니까. 혹 이를 애석하게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공은 그림 같은 한가한 일과 외도로 나간 재주 에서도 스스로 묘(妙)함을 얻었지만 혹 이것만으로 공을 찬탄하는 것은 공에게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오호라! 세상에서 공이 장부(丈夫)라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었음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고? 이것이 더욱 슬플 뿐입니다.
공재 윤두서, 그는 진정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과 아쉬움을 동시에 남긴 당대의 선구적 지식인이자 예술인이었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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