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2백 년을 대표하는 화가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3원 3개 여섯 분을 꼽고 있다. 3원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3재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碩),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등을 일컫는다. 이런 식으로 말을 만들어 한 시대의 예술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물론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회화사는 3원 3재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으며, 사실상 이들이 영조, 정조시대라는 그림의 전성기와 왕조의 마지막 미술을 상징하고 있으니 이런 세평을 그저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또 그런 평가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나름의 역사성을 갖는다.
본래 3원 3재라는 말이 생기기 이전에 먼저 ‘3재‘라는 말이 있었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보면 "세사인명화삼재(世稱士人名畫三齋)라 했다"는기록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사대부 출신의 선비화가로 영조 연간을 대표한다. - P15

실제로 3재의 화가들은 문자 그대로 우리나라 회화의 신경지를 개척한분들이다. 겸재는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담은 동국진경산수(東國眞景山水)라는 새로운 장르를 확립시켰고, 관아재는 그의 뛰어난 인물 묘사력과관찰력을 기반으로 하여 속화(俗)의 틀을 갖추어냈으며, 현재는 중국의남종문인화(人)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토착화시키는 데 성공한 분으로 관념적 화풍의 그윽한 멋과 조선 그림의 국제적 조응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ㅈ이들 3재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진경산수, 속화, 문인화라는 세 장르는 이후 조선 후기 화단의 일반적 경향으로 공인되어 훗날 3원의 화원들이 추구한 예술 세계는 모두 3재의 화풍에 근거해 있다. 그러니까 영조시대의 선비화가인 3재에 의해 개척된 그림의 새로운 지평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정조시대 이후에 일반화되어 3원을 비롯한 도화서 화원이라는 일종의 테크노크라트들에 의해 확산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조선 후기 회화사의 큰 흐름이며, 이는 영조와 정조시대 문화적 성격의 중요한 변별점이 된다. - P15

그런 3재 중에서 현재 심사정, 1707~1769)은 이래저래 가엾고 불우한 처지의 화가였다. 그의 삶이 딱했다는 것은 살아 생전의 팔자 소관으로 돌린다손 치더라도,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고독과 가난을 예술로 승화시킨 주옥 같은 명작들을 당시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은 바 없건만사후 2백 년이 넘도록 왜 그의 삶과 예술은 올바른 조명 한번 받아보지 못했는가.
심사정은 정말로 그림을 잘 그리는 명화가였다. 
남겨진 유작들을 봐도 그의 회화적 기량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으며, 동시대의 평가 또한 당대의 최일류 화가였다. 영조시대 서화가에 대해 가장 풍부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이규상(李奎象)의 『일몽고(一夢稿)』 중 「화주록(畫廚錄)」에는 다음과 같이 증언되어 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은 현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앙하였고, 어떤 사람은 겸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숭하였는데, 그림이 온 나라에 알려진 것도 비슷하였다. - P16

그런 현재 심사정의 예술이 오늘날에 와서는 겸재에 비할 때 그 예술적성과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대중적인 지명도도 낮게 되어버렀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과 그림을 대하는 관념에서 영조시대와 오늘날은 엄청나게 차이가 생겼다는 점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림을 평가할 때 그 예술적 입장과 관계없이 거론하는 첫번째 덕목으로 작가의 개성, 독창성을 든다. 또 진보적이고 민족주의적인예술관에 입각한다면 현실적 리얼리티가 문제로 대두되는데, 이 두 측면에서 심사정의 예술은 결정타를 입는다. 같은 3재의 화가 중 겸재의 진경산수와 관아재의 속화는 장르 자체의 독창성도 돋보이고, 그 나름으로 사회적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스트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그들의 예술은 오늘날 더욱 부각될 수 있는 소지를 담고 있지만, 현재에겐 그런 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이룩했다는 문인화풍의 확립이라는 것도 중국에서 제시된 패턴을 소화해낸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해버리면 그의예술에서 남는 것이라곤 붓을 다루고 먹을 쓰는 재주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 P18

조선 후기 중국의 남종문인화가 본격적으로 이입될 때 심사정만큼 대가의작품을 많이 방작한 화가는 없었고, 또 그것을 심사정만큼 자기화한 화가도없었다. 그의 방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 중 송나라 마원(馬)을방한 <방마원산수>, 송나라 미 남궁(南宮: 米芾)을 방한 <방미남궁산수>, 원나라 예 운림을 방한 <방예운림산수>등을 보면 구도 · 필법등은 대가의 고전적 작품을 본받아 그렸지만 단순히 그것을 본떠서 베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여기에 예를 든 작품은 그 누구를 방했건 관계없이 여름산수, 가을 산수의 그윽한 멋과 조용한 시정이 은은히 일어나는 명품들이다.
그 필치의 세련됨, 구도의 완벽성은 모두 심사정 산수의 특징으로 그는 이렇 - P20

게 자신의 예술, 우리 예술의 넓이와 깊이를 더해갔던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건 역사적 관점에서 보건, 현재 심사정은 이렇게 확고한 자기의 예술 세계를 견지해왔으니 그에 대한 오늘날의 대접은 부당한것이다.

현재 심사정은 1707년(숙종 33), 죽창(竹) 심정주沈廷胄, 1678~1750)의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심사순(沈師淳, 1701~1723)과 누이가 있는 3남매중 가운데였다. 어려서 이름은 이숙(叔)이라 했고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호는 현재라 하고 묵선(禪)이라는 도인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1769년(영조 45)까지 63세의 일생을 살았는데, 배천(白川) 조씨와 결혼했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여 사촌인 심사문師)의 둘째 아들 심욱진(沈郁鎭)을 양자로 받아들였음을 족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밝혀주는 전(傳)이나 행장은 고사하고 벗이나 동시대문장가들이 증언하는 제대로 된 글귀 하나 아직껏 발견된 것이 없다. 어쩌면 그런 기록은 씌어진 일조차 없을지도 모를 정도로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고적하고 불우한 일생을 살아갔다. - P21

그런 가운데 그의 삶을 얘기해주는 오직 한 편의 글이 전해지고 있으니, 그것은 심사정의 7촌 손자 되는 심익운(沈翼雲, 1734~?)이 쓴 「현재거사 묘지명(玄齋居士墓誌銘)」이다. 심익의 병세집(竝世集)』에 실려 있는 이 글은 "현재거사를 이미 장사 지낸 이듬해 경인년(1770)에 심익운이 그 묘의뜻을 돌에 새긴다"라는 부기와 함께 시작되는데, 쓸쓸하기가 이를 데 없다.
흔히 옛 사람이 묘지명을 지을 때면 고인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그 삶의 아름다움을 수식하는 것이 관례였건만 어찌하여 그 손자뻘 되는 사람은 이토록 애절한 글을 지었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이 묘지명을 통해 심사정의 살아 생전 모습을 애처로운 마음으로 그려보게 된다.

청송 심씨는 그 공훈(功勳)과 덕이 세상에 빼어났다. 우리 만사부군(晩君之源)에 이르러서는 더욱 번창했는데 거사는 그의 증손자였다. - P21

거사는 태어나서 몇 해 안 되어 홀연히 물체 그리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고, 네모 나고 둥근 형상을 모두 그려낼 수 있었다. 어렸을 적에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워 수묵산수를 그렸는데, 옛 사람의 화결(訣)을 보고 탐구하고 나서는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여到] 드디어는 이제까지 해오던 방법을 크게 변화시켜 그윽하면서 소산한 데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종래의 고루한 방법을 씻어내는 데 힘써 중년 이후로는 융화천성(融化天成)하여 잘 그리려고 기대하지 않아도 공교롭게 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관음대사(觀音大師)와 관성제군(關聖帝君)의 상을 그렸는데 그것은 꿈에 본 것을 그린 것이었다고 한다. 연경(燕京)에 다녀온 사신들이 말하기를 연경의 시중에는 거사의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돌이켜보건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50년간 근심과 걱정, 낙이라곤 없는 쓸쓸한 날을 보내면서도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몸이 불편하여 보기에 딱할 때도 그림물감을 다루면서 궁핍하고 천대받는 쓰라림이나 모욕받는 부끄러움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 P22

그리하여 통유(通幽)의 경지, 입신(入神)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으니 멀리 이국 땅까지 전파되고,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그를 사모하고 좋아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거사가 그림에 임한 바는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하여 대성(大成)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거사가 이미 세상을 떠났건만 집이 가난하여 시신을 염(殮)하지도 못했다. 나 심익운은 여러 사람의 부의賻儀)를 모아서 장례 치르는 것을 도와주어모년 모일 그의 상자(喪子) 욱진이 파주(坡州) 분수원(分水院) 언덕(坐原)에 장사 지냈다. 장지는 만사부군의 묘소 동쪽 어느 언덕이다.
이어 명(銘)을 붙이니, 거사의 이름은 사정이며 이숙은 그의 자이다. 아버님은 정주이고 어머니는 하동정씨였다. 아내에게는 자식이 없어 사촌형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고 향년 63세에 돌아가시어 여기에 장례를 치렀다.
애닯을지어다! 후세인이여, 이 무덤을 훼손치 말지어다!

이 애처로운 「현재거사 묘지명」을 읽노라면 그의 예술은 궁핍과 고독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야생화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 P22

늙을 때까지......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말 속에서 그의 작품은 감추어진 예술의 열정과 인내의 노작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심사정 예술의 남다른 매력과 개성은 바로 이런 삶의 조건에서 형성된 것이다.

현재 심사정이 그토록 불우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그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청송 심씨 집안의 몰락 과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심사정의 집안은 묘지명에도 씌어 있듯이 당대의 명문이었다. 증조할아버지되는 만사(심지원, 1593~1662)은 인조반정의 일등 공신으로 이후 출세가도를 달려 평안감사, 이조판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올랐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셋째 아들인심익현, 1641~1683)은 효종의 둘째딸인 숙명(淑明)공주와 결혼하여 청평위(淸平)에 봉해지고 임금의 총애를 받아 세 차례나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여러 차례 지냈으니왕가의 사돈집으로 권문세가라 할 만하였다. - P23

그러던 집안이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심익현의 막내 동생이자 심사정의 할아버지 되는 심익창(沈益昌, 1652~1725)이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있을 때인1699년(숙종 25)에 단종의 복위를 경축하는 과거 시험에서 시험관과 공모하여 답안지에 이름을 바꿔치기 하다가 들통이 나서 엄벌을 받게 되는 과거 시험 부정 사건 때문이었다. 이때 심익창은 간신히 특명으로 곽산(郭山)에 귀양살이를 떠나는 것에 그쳤으나, 이른바 이 기묘과옥(己卯科獄)은 명문 청송심씨 가문을 파렴치한 패륜가로 전락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심익창은이후 무려 10년간의 유배 생활을 보내고 1709년(숙종 35) 11월에 풀려났다.
과옥의 수치와 10년간의 귀양살이 후 근신하고 있던 심익창에게 또다시정치적 풍파가 덮친 것은 이른바 왕세제(王世弟) 시해 미수 사건이었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은 숙종의 유언을 내세워 연잉군(延礽君: 후에 영조)을왕세제로 책봉하는 데 성공하고 이어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 청정하게 했으나, 소론의 정치적 반격에 밀려 노론 4대신이 유배되고 종국에는 사사되는 신임사화(士禍)가 일어났다. - P23

이렇게 정권을 차지한 소론측은 아예 노론의 지지를 받는 연잉군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 사건의 주범은 소론 중에서도 과격파인 준소(峻)의 김일경(金鏡)으로, 그는 내시 박상검(朴尙)과 궁녀를 매수하여 왕세제를 시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사건 수사 과정에서 그 배후에 심익창이 있었다는사실이 드러났다. 심익창은 박상검의 옆집에 살면서 어려서부터 그를 가르쳤고, 김일경은 심익창 전처의 외사촌 오빠였다는 사실 등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김일경이 내시 박상검과 궁녀를 죽여 증거를 없애버림으로써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그 후 3년 뒤인 1724년에 병약한 경종이 마침내 죽고 연잉군이 임금(영조)으로 즉위하게 되자 사태가 달라졌다. 영조는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이때의 사건들을 재수사하기 시작했다. 먼저 김일경을 신임옥사의 무고죄로처형하고 이듬해인 1725년 봄에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 미제 사건의 배후인물인 심익창을 극형에 처해버렸다. 그리고 심익창의 큰아들인 정옥(玉),
넷째 아들인 정신(神)은 죽기 직전에 감형되어 변방으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니 집안은 완전히 절단나고 말았다. - P24

이때 심사정의 나이 18세였다. 젊은 나이에 그가 받았을 심적 타격은 능히 알 만하다.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의 저서로 생각되는 동패락송 속(東稗洛誦)』을 보면 "현재는 성품이 몽매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숙맥이었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가 이렇게 소심하고 소극적이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소년 시절에 겪었던 이 가정사적 충격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로부터 3년 후인 1728년에는 ‘이인좌의 난‘이 터졌다. 영조 즉위와 동시에 권력을 잃은 소론 중 준소가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여 이인좌가 참형되는 사건이었으니, 이후 소론 중의 준소는 출세할 생각은 꿈에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왕조 사회에서 이럴경우 얼마나 오랫동안 그 꼬리표가 따라다녔는가는 오늘날 우리로서는 결코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혹심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심사정의 그림은 "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에게는 패트런은 고사하고 어느 선비도 내놓고 그의 그림에 시 한 수 지어 붙이는 일조차 없을 정도로 철저히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P24

사실 알고 보면 조선왕조 사회에서는 심사정처럼 불우한 환경에서 일생을보내야만 했던 수많은 양반이 있었다. 개중에는 세상을 등지고 처연한 은일자적 삶으로 일생을 보낸 사람도 있고, 세상을 비관하면서 술로 그 고통을잊으려 한 사람도 있었고, 풍류객이 되어 세상을 떠돌다 일생을 마친 사람도 있었다. 살아가면서 자기 실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억울한 사람들이 보인 참담한 굴욕, 낭만적 반항, 생에 대한 의욕 상실은 그런 식으로나타나곤 한다.
그러나 심사정은 다행히도 그림 솜씨가 있어 그것을 통해 자기 인생을 꾸려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마련했다. 마치 중종 때 양송당(堂) 김시(金)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김안로(金)가 처형되는 비극적 환경을 자신이 예술적 삶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아가서 현재는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쓰라림과 고독의 감정을 붓끝에실어 동시대 누구보다도 화가의 감정이 깊이 개입된 명상적이며 때로는 애수의 시정이 들어 있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삶이 불우했던 만큼 그의 예술은 정서의 심화를 일으킬 수 있는 회화적환경으로 전환해갔던 것이다. - P25

마치 현대미술에서 서구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국제성이라는이름 아래 외래 사조를 추종하는 데 지나지 않았느냐, 아니면 그 모더니즘의 미학에 자극받고 힘입어 우리 미술의 폭을 넓히고 질을 고양시킨 무엇이있느냐에 따라 그 예술을 달리 평가하게 되는 것과 같다.
현대미술에서 대부분의 화가들이 국제적 유행 양식을 추종하는 것에 급급하여 자기 예술을 만들어내지 못했음에 비해, 수화(樹) 김환기(金煥基)와고암 이응로(李應魯)가 보여준 예술 세계는 우리 현대미술사의 가장빛나는 부분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듯이, 심사정은 중국 그림을 모방하면서그것을 단순히 수평적으로 이동하거나 물리학적으로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반응에 의한 재창출이라고 할 만큼 자기화하였다는 데 중요한 미 - P53

덕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겸재나 관아재처럼 현실과 현상을 추구하다보면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근원성 내지 철학성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의 남종문인화풍속에서 보이는 작가정신의 철학적 고양과 작가적 감성의 적극적 개입이라는미덕을 살려내어 심사정은 그런 관념성과 정서를 적극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진경산수나 속화의 박진감과는 또 다른 미감의 세계, 즉 그림 속에서차분하고 명상적이고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서 고양과 정서의 환기작용이 거기에는 있었던 것이다. 이규상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심사정은 "그림에서 정신을 숭상(畫尙精神"한 화가였다. - P54

조선 후기 회화에서 사람들은 진경산수와 속화가 지닌 사회 변혁적 기류를 읽어내고, 그것이 이 시기의 중요한 미술적 동향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사실인즉 그렇고, 특히 시대 분위기 내지는 현실의 직접적 반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게 해석할 만하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진경산수와 속화라는 즉물적 사고의 뒤안에 서려 있는 철학적 관념적 사고로서 문인화풍이 공존하고있었음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철학적·정서적뒷받침에서 즉물적 사고는 깊이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겸재의 진경산수와 현재의 남종문인화를 그런 면에서 대비시켜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겸재에게는 존재론적 사고가 우위를 차지한다면, 현재에게는 인식론적 사고가 앞선다. 겸재에게는 개별성 · 사실성·현실론이 중요했다면, 현재에게는 보편성. 관념성 · 원칙론이 중요했다. 겸재는 대상을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다면, 현재는 그 대상의 성격을 보편화시키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그림 형식에서 겸재는 묵법(墨法)보다 필법(筆法)을 중시한 데 비해, 현재는 필법보다 묵법을 중시한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있었다. 그것은 양자의 강점이자 곧 특징이기도 하다.
모든 대비는 대비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혼연히소통되는, 그리하여 서로의 약점을 보강할 수 있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 P54

현실적 사고에 얽매이다보면 보편성을 잃기 십상이고, 존재론에 집착하다보면 인식론의 지평을 망각하게 마련이다. 겸재의 진경산수가 박진감을 표현한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실경의 개별적 성격을 조선 산수의 보편적차원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할 때 반드시 보완했어야만 했던 그 무엇이 있었다. 현재가 보여준 보편성 관념성이라는 것도 당대적 정서와 조선적 서정에 뿌리지 않으면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겸재의 진경산수에 서려있는 남종화적 분위기, 현재의 문인화에 배어 있는 조선적 서정은 바로 그런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힘이었다. 또 겸재도 관념적 남종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렸고, 현재도 금강산 같은 진경산수를 그렸다는 사실은 양자의 대척적 측면 못지 않게 상호 보완적 측면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3재의 시대가 지나가고 3원의 시대가 오면, 단원 김홍도는 바로 이 대비된 양자를 통합하면서 그림의 새 차원을 펼치게 된다. 한마디로 줄여서 겸재의 진경산수를 현재의 남종문인화풍으로 재해석한 것이 곧단원의 산수화라고 할 것이다. 그런 현재 심사정인데 우리는 영조시대의 회화적 성과를 말하면서 그를 너무 소홀히 대접하고 있다는 자책이 일어난다.
살아 생전에 쓸쓸한 나날을 보냈던 현재 심사정의 신세를 더욱 가엾게 만든 것은 사실 이 시대 미술사가들이었다는 미안한 생각이 내 손끝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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