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나는 한 명뿐‘이라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 삶을 혼자서 책임져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 여러 나이의 나를 떠올린다. 일곱살, 열다섯 살, 스물세살, 서른여섯과 마흔여덟 살, 쉰아홉 살, 기타 등등의 나를 스스로가 너무 못마땅해서 끈적끈적하고 희뿌연 기분에 잠겨 버릴 때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와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여기나는 무겁게 지쳐 있으나 거기 나는 상심을 털어내고 웃고 있구나.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힘이 난다. 책임감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다양한 시간, 다양한 공간, 다양한 우주에 내가 존재한다면.…… 어떤 세계에서 내가 슬퍼할 때 다른 세계에서 나는 기쁘다. 저 세계에서 내가 삶의 경이로움에 빠져 있을 때 그 세계에서 나는 전력을 다해 삶을 저주한다. 무수한 나는 나라고 말할수 없고 유일한 나는 찰나의 찰나. 우주는 아주 넓고 깊고 신비로우므로 내가 유일하든 무수하든 상관없을 테고, 허무하긴 마찬가지다. 허무를 잊지않으면 낙관할 수 있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담대해진다. 괴팍한 불안이혼자 지껄이도록 내버려두고 소설을 쓸 수 있다.
쓰다 보면 견딜 수 있다.


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차가운 수요일 오후 2시경, 할머니는 엄마가 쟁반에 차려온 마음도 약도마다하고 창을 조금만 열어달라고 했다. 엄마는 창을 열고 할머니 옆에 누웠다. 할머니의 고맙다는말에 엄마는 무언가를 느꼈고,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는 창에 담긴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지금은 맑다고. 엄마는 할머니의 말을 잘 들으려고 몸을 꿈틀거리며 할머니 가까이 다가갔다.
할머니는 1년 전쯤 병원에서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요양원 생활에 불만은 없었고 건강이회복되리라는 기대도 없었다.  - P9

할머니는 대부분 날들 건강했고 노환은 서서히찾아왔다. 늙으면 죽는다. 모두 알고 있잖아. 그렇다 해도 ‘할머니가 죽어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내게 커다란 산 하나를 옮기는 일과 비슷했다. 산을 절반도 옮기지 못했는데 할머니는 떠났다. 남아 있는 절반의 산을 바라보며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말을 종종 떠올렸다.
지금은 맑다.
엄마는 ‘맑다‘는 단어를 귀중하게 간직했지. 나는 ‘지금‘이란 단어에 집중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나. 지금은 금방 사라지지. 할머니가 죽었다는 건할머니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내게 시간이 있다는 것.  - P11

그때 내가 이해할 수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른의 일이었다. 죽음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사람들, 죽음이란 원래 그런 것임을 어렴풋이 경험한 사람들의 일. 이제 그들의 나이가 되어서 나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할머니가내게 남긴 2백만 원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못하는 거를 네 엄마가 하는 거고 네 엄마가 못하는 거를 내가 하는 거고.
나를 맡아 보살피던 어느 날엔가 할머니가 무심히 꺼낸 말.
언젠가는 네가 못하는 거를 네 엄마가 할 거고네 엄마가 못하는 거를 네가 할 거고. 그런 거다.
사는 게. 지금이 영영일 것 같지만 나중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고. - P21

나는 내 시간을 사는데 거기 누가 들어오는 거야 그런다고 내 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해가 뜨고 진다고 시간이 가는 거겠나. 내가 알고 살아야 그게 시간이지. 네가 지금 부모를 원망할 수는 있어. 원망하는 그 시간은 어디 안 가고 다 네거야. 그런 걸 많이 품고 살수록 병이 든다. 병이별게 아니야. 걸신처럼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지.
그때 나는 싱크대에 기대앉아 마늘을 까면서 할머니의 말을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가또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잔소리라고 생각했던 할머니의 어떤 말들은 내 몸에 체취처럼 스며들어 지울 수 없는 일부로 남아 버렸다.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라면 나는 지금 병이 든 상태인지도 모른다. - P22

교복이 한두 푼도아니고 가게 하는 입장에서야 교복을 또 사러 오면 이득이니까 말리지는 않겠지만 내가 진짜 손님입장에서 하는 말인데 내년이면 분명 후회할 거야.
엄마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 정도 후회는 매일 하고 살아요. 후회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고요.
아빠라면 돈만 주고 알아서 사 입으라고 했겠지. 내가 큰 옷을 입고 있어도 큰 옷인지 모르겠지.
내가 아빠 양복을 입고 있어도 그게 자기 옷인지모를 거다. 정말 그런지 확인해 보고 싶지만 그러려면 부산까지 가야 한다. 아빠도 아빠 양복도 너무 멀리 있다. - P52

‘지름길론‘을 짧게뻔한 대답을 듣지 않으려면 뻔한 질문을 피해야한다. 뻔한 질문을 하지 않으려면 시간과 정성을들여야 한다. 아빠에게는 내게 들일 시간과 정성이 없다. 그래서 나름 지름길을 선택한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는 대신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만 나를 생각하는지름길. 내가 그 틀을 벗어나면 ‘네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라고 말하면서 틀을 벗어난 나를 비정상으로 잘라 버리는 거다. 아빠가 생각하는 틀 안의 자식은 공부 열심히 하고 말썽 부리지 않고 예의 바르고 싹싹하고 정직한 사람. 아빠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신경을 써야 하니까. 골치가 아플테니까.  - P53

아빠에 비하면 엄마는 좀 복잡하다. 엄마에대해서라면 나쁜 말도 좋은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겠다. 엄마는 아빠와는 다른방식으로 나를 외롭게 한다.
나는 아빠에게 기대하는 게 없다. 사실 뭘 기대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기대하는 게 있다. 엄마는 아빠보다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오이와 양파를 싫어한다는 걸안다.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프다는 걸 안다. 필통에 연필을 넣을 때 흑심은 꼭 같은 방향으로 넣어야만 하고 조각난 지우개는 쓰지 않는 걸 안다. 내가 특별히 아끼는 옷과 좋아하는 가수를 안다. 잠을 못 자면 짜증을 부린다는 걸, 눕기 전에 손으로베개를 세 번 치는 습관이 있다는 것도 안다.  - P55

외박을하고 각방을 쓰더라도 같이 사는 건 같이 사는 것.
가구와 생활용품과 공기와 공간과 냄새를 공유하는 것. 상대의 흔적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 엄마와 아빠는 그걸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부산과경기도만큼의 거리가 필요했던 거다. 그리고 나를딱 중간에 뒀다. 마치 시소 받침처럼, ‘같이 살고싶지 않다‘와 ‘혼자 있고 싶다‘는 의미가 다르지 않나? 엄마와 아빠의 마음이 두 문장 중 어느 쪽으로기울었는지는 모르겠다. 엄마도 아빠도 나와 같이살기를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것, 내겐 이 사실이가장 중요하다. - P57

오늘 미지를 처음 만났는데도어쩐지 미지와 시내에 여러 번 다녀온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도 그랬다. 처음 가본 장소였고 처음만난 사람들이었는데도 오늘과 같은 날을 여러 번겪어 본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익숙한데왜 어색하지?
다시 통유리를 쳐다봤다. 거기 비친 나는 과거의 나 혹은 미래의 나였다. 그래서 무수히 겪어 본나였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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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책가방에는 금세 적응했다.


익숙하고도 어색한 날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 P79

바람을 타고 향기가 왔다. 라일락 향기라고 한수가 말했다. 우리는 라일락을 찾아서 비탈을 올랐다. 라일락을 찾으려고 했는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거대한 봄이 숨어 있었다. 숨어서 뽐내고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경쟁하듯 미끄러졌다. 스타킹이 찢어지고 블라우스가 더러워졌다.
웃음은 커졌다. 다람쥐다, 하고 말해서 다람쥐가사라졌다. 우리는 라일락을 찾지 못했다. 비탈을내려오자 다시 향기가 불었다. - P80

편지는 이상하다. 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펼치면 내가 전혀 몰랐던 마음이 펼쳐진다. 말은 사라지고 기억은 희미해져도 글자는 남는다. 비밀스러운 마음이 선명하게 남아 버린다. 내게 그걸 주면 나는 가진다. 편지를 쓸 때의 그 마음을 나는 확실히 가진다. - P86

여름에 나를 훑어보던 눈빛, 과학 선생이 뜬금없이여자들이 생리할 때 나는 냄새가 무슨 냄새랑 비슷하다고, 지금 이 교실에서 누가 생리를 하는지자기는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알 수 있다고 말하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을 때, 사회선생이 우유를 담아 놓은 통을 발로 차면서 젖통이라고 부르고 이상한 농담을 했을 때………. 쉬는 시간이면우리는 재수 없고 더럽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선생들의 기분 나쁜 말과 행동을 떨쳐 내려고 했다. - P87

이전까지 나는 나의 가난에 관심 없었다. 용돈이 부족할 때가 있었지만, 세상에는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기 때문에 용돈이란 언제나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은이 집에 놀러갔을 때, 은이가 주방 식탁 바구니에 담긴 만 원짜리 지폐 서너 장을 자연스럽게 집어서 자기 지갑에 넣는 걸 보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둑질을 보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은이에게 그건 도둑질이 아니었다. 생활 방식이었다.  - P88

아, 그리고 기말고사 칠 때 시험 감독을 보던 국어 선생이 내가 커닝을 시도한다고 오해하고는 갑자기 ‘이 돼먹지 못한 것이라고 소리 지르면서 화를 냈는데 (나는 문제를 다 풀고 시간이 남아서 잠깐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도 상당히 모욕적이었다. 선생은 내게 다가와서 나의 시험지와 OMR 카드를 거칠게 빼앗아 살펴봤다. 문제를 다 풀었다는 걸 확인한 뒤에도 선생은 계속나를 주시했다. 나는 기분이 나빠서 자리에서 일어나 OMR 카드를 교탁 위에 탁 내려 놓고 교실을나왔다. 너무 분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자기 멋대로 나를 의심해 놓고 사과도 없이 어쩜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교실 앞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에이씨 될 대로 되라‘라는 혼잣말이 튀어 나왔다. - P89

모욕감은 남한테서만 받는 게 아니라는 것, 내가나를 모욕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 P90

못된 것을 배웠다. 무례를 권력처럼 썼다. 내가 지금 힘드니까 너에게 너무해도 된다고.
길을 잃은 채로 너무 오래 살아서 길을 잃었다는사실조차 잊은 사람.
이 회사를 나가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는 생각을 주문처럼 하고 있다. 길을 잃은 게 아니야.
길은 없는 거야. 먹고 사는 건 중요한 문제다. 남지하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젊으니까. 나도늙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늙은이 취급을 하고있지. 삶이 길이라면 돌아갈 수 있나? 과거 어느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탈출하고 싶다. 어디로달려도 현재에 갇혀 있을 뿐이다. 나로 계속 사는건 지겹다. 일시 정지 버튼이 없다.
선배, 여기는 정말 너무합니다.
박수원은 나의 미래가 아니다.
누가 대신 살아 주지 않았다. 내가 살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과거는 꿈이 아니다. 나의 미래는 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모르겠다는 말이 지겹다. - P97

내게 편지를 쓰면서 나를 괴롭게 하는 것에 관해서만 가득 썼다. 이것이 지금 내 상태를 말해 준다. 해결될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고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자.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지금과 같은 나를 상상한 적도 없다. 과거가 아깝다. 살아갈 날보다 내가 분명히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 아까워. 겨우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 P98

아무도 내가 될 수 없고 나도 남이 될 수 없다.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자칫하면 나조차 될수 없다.
미래의 내가 이 편지를 아주 우습게 여기기를 바랄뿐이다. - P99

이모가 불을 끄며 말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누웠다.
미안해.
말하면서 이모는 울먹거렸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이모가 할머니를 이긴 것 같을때가 있다는 말은 취소. 이모는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다. - P120

넌 이유가 뭔데?
그냥, 짜증나니까.
그 정도로는 부족해.
미지는 가출 전문가처럼 말했다.
그런 이유로는 하루도 못 버텨. 잘 곳 없고 배고픈건 더 짜증나거든. - P121

진짜로?
갈 곳이 아예 없어야 해. 진짜 가출하려면.
미지의 말은 약간 어려웠지만 무슨 뜻인지 알것도 같았다. 외갓집에서 나간다면 엄마의 집을찾아가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지. 어찌어찌 엄마의 집을 찾는다고 치자. 엄마는 나를 다시 외갓집으로 보내지 않을까? 만약 엄마와 같이 살게 된다고 해도 그건 진정한 가출이 아니다.
돌아갈 집이 없어야 해. 집을 완전히 폭파시키고 나가야 해. 그래야 성공할 수 있어. - P123

기억은 거의사라졌고 마음은 예전처럼 애틋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난감을 간직하는 이유는… 버릴 수 없기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자 장난감에 지저분한 슬픔을 묻히는 것만 같고 내가 더 싫어졌다. 만약에 내가 사라진다면 결국 이렇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나를 찾고 슬퍼하겠지. 그리워하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드문드문 생각하겠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는 어떤 물건을 봐야 간신히 나를 떠올릴 테고, 언젠가는 그런 기억마저 사라질 것이다. 내가 만약천사의 장난감을 간직하지 않았다면 나도 천사를완전히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버릴 수 없어서 다행이다. 버릴 수 없다는 마음은 중요하다. 버릴 수 없는 것들을 더 많이 떠올리고 싶었다. - P126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더는 떠오르지 않았고.…… 가출이나 하겠다고 마음먹은 내가 우스웠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한 어젯밤의 나를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싶었다. 엄마가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엄마가 필요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마음대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집을 나갈 필요도 없고 누군가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어른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모도 어른이잖아. 어른인데도 할머니 눈치를 보고 데이트할 때마다 거짓말을지어내잖아. 생각이 점점 팽창해서 뇌가 간지러운느낌이었다. - P127

그리고 나는 자꾸만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재작년 여름에는 다리가 너무 아팠다. 앉아도누워도 아팠다. 키가 크느라고, 뼈와 근육이 자라느라 아픈 거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머리가 아플때도, 감기에 걸렸을 때도, 배앓이로 고생할 때도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몸이 싸우는 거다‘ ‘몸이 자라는 거다‘ 내 몸은 멋대로 자라면서 나를 아프게 하고 어른들은 나의 모든 통증을 ‘크느라 그런다‘는 한마디로 덮어 버렸다. 할머니는 할머니의 모든 통증을 ‘늙어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몸은자라고 늙는다. 통증을 느낀다. 정신은 몸인가? 영혼은?  - P130

사전에 정의된 ‘마음‘은 내가 생각하던 의미와비슷했지만 아주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마음‘
이 무슨 뜻인지 알고 쓰는 걸까? 우리는 서로 다른
‘마음‘을 같은 글자로 쓰는 거지. 각자 다른 의미를최대한 가까이 이어 보려고 계속 쓰고 말하는 거지. 그런데 어른들은 때로 내게 그 정도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나를 ‘몰라도 되는 존재‘로 치워 버린다.  - P131

나는 왜 태어났을까. 일찌감치 죽었으면 좋았을거다. 죽음이 뭔지도 몰랐을 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안타까워하지. 죽은 사람은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을 안타까워할 거다.
아픔이 뭔지도 모르는 천사는 엄마를 아프게 하고 죽었다.
천사가 죽었을 때는 그렇게 슬퍼했으면서 살아있는 나를 버렸다.
영혼에게 공간은 필요 없다. 천사는 그렇게 태어났다. 훨씬 넓은 세상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겨우 인간인 주제에 슬프다고 울었다.
내가 있는데 왜 그렇게 불행하냐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의 어두운 방에서 나는 나의 빛을 뽐내고싶었다. - P132

이모는사랑한다고 말하는 자기를 사랑한다. 이모는 행복해서 유치한 사람.
한수가 나쁜 년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겠다고말했을 때 나는 행복했다. 나는 내가 뭐라도 된 줄알았고 최소한 나쁜 년은 된 거니까.
간직하고 싶은 기억 같은 건 없다. 나는 없는 것같은데 없어지지도 않고.
나는 진짜 울어 본 적이 없다. 우는 나는 우습다.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겠지. 나는서로 모르는 것과 서로 잊은 것을 기억한다. 오직나만 우리를 망칠 수 있다.
나는 천사는 될 수 없다. 나는 악마는 될 수 있다.
모두 나를 견딘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지 않았다. - P134

진실이라 생각되는 것을 쓰고 나자 시시해졌다.
펼쳐진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 나는 방금 모든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세계를 경험했다. 이제 더는좋게 생각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예전처럼 틈새의 빛에 마음을 쏟지는 않을 것이다. - P134

해변은 휑했다.
아니, 가득했다. 비와 바람으로 거센 파도로.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파도소리 때문에 귀가 얼얼했다. 우산을 쓸 필요가 없었다. 눈물을 참을 필요도 울음소리를 감출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해변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에 서서 쓸모없는 우산을 간신히 들고 비 오는 바다를 바라봤다. 그건 정말…… 이상한 풍경이었다.
봄에 비가 내리면 꽃이 진다. 여름에 비가 내리면 개구리가 운다. 가을에 비가 내리면 낙엽이 물들고 겨울에 비가 내리면 눈을 기다리게 된다. 숲에 비가 내리면 나무가 자라고 논밭에 비가 내려서 - P164

면 곡물이 자란다. 운동장에 비가 내리면 흙이 젖고 도로에 비가 내리면 아스팔트가 식는다. 바다에 비가 내리면…… 바다가 된다. 바다가 될 뿐이다. 무수한 물방울이 거대한 물에 합쳐질 뿐이다.
대체 무슨 소용이지? 물은 물이 되고 물은 다시 물이 된다는 게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나밖에 될수 없다는 게? 물고기는 물고기로만 살고 새는 새로만 사는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자 너무 갑갑했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지? 신은 신으로만 살까?
신은 우주인가? 우주는 우주로만 존재할까? - P165

나는 계속 나일뿐이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 같고,이별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 같고, 포기를 위해 꿈꾸는 것만 같다. 가방에 국어사전이 있었다면 ‘허무‘라는 단어를 찾아봤을 거다. 내가 지금 느끼는이 감정과 ‘허무‘가 딱 들어맞는 단어인지 확인해봤을 거다. - P166

이별이란 이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일이란 걸. 이별은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 아닌가? 엄마와아빠는 아직도 이별 중일까? 벌써 이별했을까? 남과 남이 만나서 사랑하는 사이로 지내다가 다시남과 남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별은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겠지만… 완전히 처음과 같은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젖은 채로 바람을 맞으니 추웠다. 그만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계속 바라보고도 싶었다. 물이 물이 되는정직하고도 허무한 광경을 분노의 춤을 추는 비내리는 바다를. - P167

샌들을 벗어 젖은 모래를 털어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모는 야단맞은 아이처럼 작은 소리로 겨우겨우 고맙다고 말했다.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반드시 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던 엄마의 길 끝에는 집이 있었다. 엄마도 무서웠을까. 나를 보살피며 무서움을 덜어 냈을까. 엄마에게도 그리운마음이 있었던 걸까. 방금 이모가 말하길, 그리운마음은 착각이랬다. 이모는 오늘 무언가를 확인했다. 나도 확인하고 싶었다. - P169

올 때만큼 기나긴 길이 남아 있었다. 택시를 타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집에 닿으면 깜깜한밤일 것이다. 여전히 비가 내릴까? 집은 변함없을것이다. 우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방에서 똑같은 이불을 덮고 누울 것이다. 하지만 이모는 어제와는 조금 다른 사람으로 잠들겠지. 비 내리는 바다를 봤고 사실을 확인한 나도 조금은 다른 사람으로 잠들 것이다. 비는 비고 바다는 바다다. 섞인다고 하나가 되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이별할 수도 있다.
우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않을 것이다. - P170

하지만 글자 그대로 ‘추운 사람‘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춥게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추운 사람. 따뜻해지려고 노력하지 않고, 추운 상태로 존재하는 사람. 그래서 바라보는 사람을 춥게만드는 사람. 나의 문제집에 자기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쓰고 그것을 지우는 엄마는 무척 추워보였다. 나도 나를 형편없다고 생각할 때가 아주많지만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 엄마는 했다. 해 놓고 후회하듯 지웠다. 엄마는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훨씬 서투르고 나약한 사람인지도 몰라.
그렇다면 기꺼이 엄마의 핑계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내 핑계를 대고 잘 지내면 좋겠다고. - P181

나는 친구란 뭘까 생각했다. 우리는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떤 기억을 만들었나. 같이 있으면 재밌었고 질투했고 외로웠고 때로는 지겨웠고, 친하니까 더욱 비밀을 감췄던 우리들. 미지가 자조적으로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는 순간에도 ‘그래도 넌 인기도 많고 예쁘잖아‘라고 생각하면서 미지보다 더 불행한 이유를 찾으려는 내가너무 한심했다. - P204

많은 사람이 미지의그림을 보며 감탄했지만 미지는 자기 그림이 얼마나 특별한지 모르는 것 같았다. 숱하게 고백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미지는 누구나 고백을 받고 자기만큼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미지는 자기만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미지가 좋았다. 나의 미래보다 미지의 미래가더 궁금했다. 미지 말이 맞다. 나는 나에 대해서는 - P208

비관적인 사람.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 버리는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눈은 조금씩 쌓였다.
거뭇한 하늘은 점점 내려앉으면서도 차차 멀어지는 것 같았고.
비슷한 옷을 입고 겨울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은 자세히 보면 저마다 달랐다.
한때 나는 우리 모두 지옥에서 왔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행복할 수도 있다. - P209

이제 정말오지 않을 거라고 미지는 말했다. 같은 다짐을 계속하며 우리는 어른이 되겠지. 남들은 절대 알지못할 하루와 마음을 끌어안으며, 중요한 말일수록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하지않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 P210

깊은 비관에 사로잡힌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면 마찬가지일까.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까.
답장을 쓰고 싶었다. 펜을 들었다. 어린 나에게이런 문장을 주고 싶었다.
나는 불행하지 않다. 그래도 너는 행복하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위와 같은 문장을 줄 수 없다. 행복은 나의 몫이다. - P212

나는 다시 빠르게 일기를 훑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이모와 속초 바다를 보고 왔다‘라고 시작하는 일기에서 멈췄다. 그 일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비는 비고 바다는 바다다. 나는 나만 될 수 있다. 나는 남이 될수 없다.‘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 지난 번 카페에서. 1년 후에 정말 그 편지를 받을 수 있을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없지만, 그래도 변치 않은 부분은 존재할 테고, 일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순간 마치 만난 것만 같았다. 문장 속에서. 과거의 나를. - P221

말하면서 예감했다. 언제가 되었든 나는 이것을버릴 수밖에 없으리라. 엄마나 할머니의 손이 아니라 내 손으로 할머니가 내게 남긴 진짜 유산은 바로 그런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럼 테이프로 박스를잘 포장해 두라고 엄마는 말했다. 테이프와 가위를 찾아 박스를 밀봉하려다가 일기장을 살짝 들춰봤다. 입 속의 혀처럼 편지 봉투는 거기 잘 들어 있었다. 아주 닫아 버리기 전에 다시 한번 읽어 보고싶었다.
봉투를 열고 종이를 펼쳤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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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는 하루하루를 대개 이와 같이 보낸 듯하다. 7시쯤일어나 긴 터키 망토로 몸을 감싸고, 궐련에 불을 붙인 뒤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곤 했다. 그렇게 서서 도취된 듯 발아래펼쳐진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는 안개가 너무 짙게끼어서 산타 소피아 성당의 반구형 지붕과 다른 건물들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개가 차차 옅어지면서 본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단단히 뭉친 물방울들이 보이기도 했다. 저기에 강이 있고, 저기 갈라타 다리가 있다. 저기에 눈이나 귀가 없는 순례자들이 녹색 터번을 두르고 동냥을 하고있다. 저기에 잡종 개가 죽은 동물의 내장을 파헤치고 있다.
저기에 숄을 두른 여자들이 있다. 저기에 수많은 원숭이들이있다. 저기에 긴 장대를 들고 말을 탄 남자들이 있다. 오래지않아 온 도시가 채찍 소리, 징소리, 기도를 올리는 외침 소리, 당나귀를 내리치는 소리, 놋쇠로 보강된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로 깨어났다. 그동안 발효된 빵과 향, 향신료에서나는 시큼한 냄새가 페라의 고지까지 올라왔는데, 그것은 피부색이 다양한 야만적 주민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내뿜는 숨결 같았다. - P126

거기에는 목사관도 없고, 영주의 저택도 없었다. 오두막도,
참나무도, 느릅나무도, 제비꽃도, 담쟁이도, 들장미도 없었다. 양치류가 타고 오를 산울타리도 없고, 양들을 방목할 초윈도 없었다. 집들은 달걀 껍데기처럼 하얗고 아무런 꾸밈도없었다. 뿌리부터 속속들이 영국인인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친 전경에서 마음속 깊이 환희를 느끼고, 멀리 저 산길들과 고원을 거듭 바라보면서 예전에 염소들과 목동들만다녔을 저곳을 혼자 걸어 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절기에맞지 않는 화려한 꽃들에 열렬한 애정을 느끼고, 너저분한잡종 개를 고향의 사냥개보다 더 사랑하고, 거리의 매캐하고톡 쏘는 냄새를 열렬히 콧구멍에 들이마신 것은 스스로에게도 놀라웠다. 그는 십자군 전쟁 시절에 자기 조상 중 한 사람이 체르케스족의 소작농 여성과 어울리지 않았을지 궁금했다.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자기 얼굴이 약간 거무스름한 편이라고 상상하고는 몸을 씻으러 안으로 들어갔다. - P127

그 소문들은 이제 인생의 전성기에 이른 그가 사람들의애정을 불러일으키고 눈길을 사로잡는 힘을 갖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 힘을 보존하기 위한 보다 지속적인 자질들까지모두 잊힌 후에도 그것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 힘은아름다운 외모와 혈통, 그리고 희귀한 천부적 자질이 혼합된신비로운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매력이라고 부르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사샤가 말했듯이 그는 촛불 하나를밝히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의 내면에서 1만 개의 촛불이타올랐다. 자기 다리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아도 그가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수사슴 같았다. 그가 평상시의 목소리로 말해도 그 메아리는 은으로 만든 징처럼 울렸다. 그런 까닭에 그를 둘러싼 소문이 무성했다. 많은 여자들과 몇몇 남자들이 그를 흠모했다. 그들은 그에게 말을 걸 필요도, 그를볼 필요도 없었다. 특히 낭만적인 경치가 펼쳐지거나 해가지고 있을 때 그들은 실크 스타킹을 신은 귀족 신사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렸다. 올랜도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부자들에게 그렇듯 똑같이 매력을 발휘했다. - P130

신사들은 모두 정중하고…… 너와 사랑하는 벳시가 이곳에있기를 수천 번이나 바랐고……… 그런데 모든 이들이 바라보고, 모든 눈들이 주목한 대상은.....… 그 점을 부정할 만큼 고약한 사람은 없으니까 모두들 인정했듯이 그건 바로 대사님이었어. 그토록 멋진 다리를 갖고 있다니! 그토록 멋진 얼굴이라니! 그토록 기품 있는 태도라니! 그분이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그분이 다시 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데 그분의 표정에 어딘가 관심을 끄는 구석이 있어서, 왠지 모르지만 그분이 고통을 받았다고 느끼게 되더구나! 사람들 말로는어떤 숙녀 때문이래. 몰인정한 괴물 같으니! 다정한 존재라고일컬어지는 우리 여성 중 한 명이 어찌 그리 뻔뻔스러울 수 있는지! 대사님은 미혼이고, 그곳에 모인 숙녀 중 절반은 그분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어...….  - P135

이튿날 아침에 이제는 공작으로 불려야 할 올랜도가 잠옷엉클어진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을 그의 비서들이 발견했다. 침실은 약간 어수선했고, 그의 보관은 굴러떨어져바닥에 뒹굴었고, 망토와 가터 훈장은 의자 위에 무더기로던져져 있었다. 탁자에는 서류가 흩어져 있었다. 전날 밤의피로가 상당했기에 처음에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후가 되어도 그가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자 의사를불러왔다. 의사는 연고와 쐐기풀, 구토제 등 예전에도 사용했던 비법을 써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올랜도는 계속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비서들은 탁자 위의 서류들을 검토할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를 갈겨 쓴 종이가 많이 있었는데, 참나무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 P138

그가 수면 상태에 빠져든 지 이레째 되는 날(5월 10일 목요일), 브리그 하사가 그 징후를 처음 감지했던 무시무시하고 유혈 낭자한 폭동의첫번째총성이 터져 나왔다. 술탄에 저항해서 봉기한 터키인들이 온 도시에 불을 지르고 눈에띄는 외국인들을 칼로 찌르거나 태형에 처했다. 몇몇 영국인들은 가까스로 달아났지만, 영국 대사관의 신사들은 예상할수 있는 대로 정부 서류함을 지키다가 죽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열쇠 더미를 이교도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삼켜 버리는쪽을 택했다. 폭도들은 올랜도의 방에도 쳐들어왔지만 겉보기에 죽은 듯 쭉 뻗어 있는 그를 보고는 손대지 않고 내버려둔 채 그의 보관과 가터 예복을 빼앗아 갔을 뿐이었다. - P139

그의 기억은 그런데 앞으로는 관례에 따라 <그의> 대신 <그녀의>라고 말해야 하고, <그> 대신 <그녀>라고 말해야 하니 그녀의기억은 아무런 장애도 맞닥뜨리지 않고 과거 생애의 온갖 사건들을 생생히 되돌아볼 수 있었다. 기억의 맑은 연못에 검은물방울 몇 개가 떨어진 것처럼 약간 흐릿한 부분이 있을지도모른다. 어떤 일들은 조금 희미해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고통 없이 완벽하게, 올랜도 스스로도 놀란 기색이 전혀없게끔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성의 변화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 것이라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입증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1) 올랜도는 언제나 여자였다. (2) 올랜도는 이 순간도 남자이다.  - P144

인간의 성과 성징을 다루는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자.
우리는 그런 불쾌한 주제에서 가급적 빨리 발을 빼려한다.
이제 올랜도는 몸을 씻었고, 성별과 무관하게 입을 수 있는터키식 코트와 바지를 입고 나서 자기 처지를 생각해 보아야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따라온 독자라면그녀가 몹시 위태롭고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으리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귀족인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 보니 신분 높은 아가씨에게는 더없이 난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녀가 벨을 누르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기절해 버렸다 해도 우리는 그녀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올랜도는 혼란스러운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은 극히 용의주도해서,
미리 계획한 징후를 드러낸다고도 생각할 수 있었다.  - P145

산꼭대기에서 저 멀리 마르마라 바다 너머의 그리스 평원을 바라보면서(그녀의 시력은 놀라웠다) 분명 파르테논 신전일 것이라 짐작되는 희고 기다란 줄한두 개가 보이는 아크로폴리스를 알아보았을 때, 그녀의 동공과 더불어 그녀의 영혼도 확장되었다. 그녀는 자연의 신도들이 모두 그렇듯이 산의 장엄함을 공유하고 초원의 평온함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고나서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면 붉은 히아신스와 자주색 붓꽃에 마음이 동해서 자연의 선함과 아름다움에 황홀해하며 소리쳤다. 다시 눈을 들어날아오르는 독수리가 보이면 그것이 느낄 환희를 상상하며자기도 그런 환희를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녀는 별과봉우리, 횃불이 제각기 자기에게만 신호를 보내 준 듯이 인사를 보냈다. - P149

올랜도는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집시들을 떠나 다시 대사가 되는 것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잉크도, 종이도 없고, 탤벗 가문에 대한 존경심이나 수많은 침실에 대한 존중심이 없는 곳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도마찬가지로 불가능했다. 어느 맑은 날 아침에 아토스산의 비탈에 앉아 염소 떼를 돌보면서 그녀는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그녀가 신봉하는 자연이 아마도 어떤 속임수를썼거나 기적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 P155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하고 또렷해 눈 속에서 벌레를 쪼아 대는 까마귀도 볼 수있었다. 그러고 나서 자줏빛 그림자가 서서히 짙어지더니 수레와 잔디밭과 방대한 저택을 뒤덮었다. 모든 것을 완전히삼켜 버렸다. 이제 그 초록색 구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초록색 잔디밭이 아니라 눈부시게 빛나는 산비탈뿐이었고 수천 마리의 독수리가 쪼아대서 풀 한포기 없이 헐벗은바위 같았다. 그러자 그녀는 격렬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 집시들의 야영지로 돌아가서, 바로 이튿날 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 P157

그녀는 생각했다. <여자들이 (내가여자로서 짧은 기간에 경험한 것으로 판단하자면) 순종적이거나 순결하고, 향기롭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천성이 아니니까. 여자들은 삶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이런 매력을 더없이 따분한 훈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어. 머리치장만 봐도 그래. 그녀는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오전에 한 시간은 걸릴 거야. 거울을 들여다보는 데 또 한 시간이걸리고. 코르셋을 하고 끈을 졸라매고 몸을 씻고 분을 바르고, 실크 옷을 벗고 레이스를 입고, 레이스를 벗고 실크 드레스를 입고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와도 순결해야 하고…….〉이런 생각을 하다가 짜증이 나서 그녀는 발을 휙 쳐들었는데,
종아리가 몇 센티미터쯤 드러났다.  - P163

 <가난과 무지에 휩싸여 있는 편이 나아. 그건 여성의 검은 옷이지. 세상의 규칙과 원칙을 남들에게 맡기는 편이 나아. 호전적인 야심이나 권력욕, 온갖 남성적인 욕망에서 벗어나는 편이 나아.
인간의 영혼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황홀함을 더 속속들이느낄 수 있으려면 말이야. 그녀는 마음에 깊은 울림이 있을때 습관적으로 그랬듯이 소리내어 말했다. 사색과 고독, 사랑을 만끽할 수 있으려면.」「고맙게도 나는 여자야!」 그녀는 이렇게 소리쳤고, 자신의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극단적인 어리석음에 여자에게든 남자에게든 이보다 더 애처로운 일은 없다―빠져들 뻔했다. 그런데 그때 제자리에 집어넣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마지막 문장 끝에 기어 들어온 한 단어, 사랑에서 멈췄다. 「사랑」그녀가 말했다. 그 즉시 - 사랑은 이렇게나 성급하므로사랑은 인간의 형태를 띠었다.  - P167

선원들이 <안녕히가세요, 안녕히, 스페인의 숙녀들>이라고 노래하기 시작했을때, 그 가사가 올랜도의 슬픈 가슴에 메아리쳤다. 뭍에 오르는 것이 아무리 크나큰 안락과 풍요, 높은 지위와 신분을 의미한다 하더라도(의심할 바 없이 그녀는 어떤 귀공자를 선택하고, 그의 배우자로서 요크셔 절반을 지배할 테니까) 그래도 만일 그것이 인습과 노예 상태, 기만을 의미한다면,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고 자신의 팔다리에 족쇄를 채우고 입술을오므리고 혀를 억제하는 것을 뜻한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다시 그 배를 타고 방향을 돌려 집시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 P170

그녀가 가슴 속에 간직한 것은 부적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의 성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위의 성적 혼란이 가라앉았다.
이제 그녀는 시의 찬란한 아름다움만 생각했다. 말로와 셰익스피어, 벤 존슨, 밀턴의 위대한 시행이 웅장하게 울리고 메아리쳤다. 그녀의 마음이라는 성당 탑의 황금 종에 황금 추가 부딪힌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 처음에 아주 희미한 형체를 포착했고 시인의 이마를 연상시키면서 일련의 무관한 생각들을 불러일으켰던 그 대리석 돔의 형상은 사실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체였다. 배가 순풍을 받아 템스강으로 올라가면서, 온갖 연상을 불러일으켰던 그 이미지가 진실을 드러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번개무늬로 세공된 흰 첨탑들 사이에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성당의 반구형 지붕이었다.
「세인트 폴 성당입니다.」 - P171

하인들은 돌아온 올랜도가 자신들이 예전에 알던 올랜도가 아니라는 의혹을 한순간도 품지 않았다. 혹시 인간의 마음에 어떤 의혹이 있었다 해도, 사슴과 개들의 행동을 보면그런 의혹이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말 없는 동물들은 정체나 특징을 인간들보다 훨씬 더 잘 감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주인님이 레이디가 되셨다면그분보다 더 사랑스러운 숙녀는 본 적이 없고, 또한 그 두 분이 엇비슷해서 어느 쪽이 더 낫고 말고 할 것이 없다고 그림스디치 부인은 그날 밤 차를 마시며 더퍼 씨에게 말했다. 주인님이나 마님이나 똑같이 잘생기셨고, 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복숭아 두 알 같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그럴지 모른다고 늘 의심해 왔기에 (이 부분에서 그녀는 아주 은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지 않은 일이며(이 부분에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에게는 매우 큰 위안이 되는 일이라고 그림스디치 부인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수건들을 손질해야 하고, 목사님 응접실의 커튼 가장자리에 좀이슬어서 집 안에 마님이 계셔야 할 때라는 것이었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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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자체도 교훈적이다. 사과 바구니는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지 않다. 바구니는 유리처럼 투명하고, 사과들은 공중부양 하듯 바구니 안에 떠 있다. 사과는 빨간색도 아니고 금색인데, 뚫어져라 보면 사과들이 납작한 그림에서 삼차원 형체로 변하면서 녹은 금박 같은 것이 사과 속에서 빛을 발한다. 따라서 이 그림은 선물(바구니 전체 안의 선물(사과들 안의 또 다른 선물(빛나는 에너지)을 보여준다. 각각의 사과는필시 각각의 셰이커교도를 대변할 것이다. 각자 내면의 선물로 따뜻하고 은은하게 빛나지만, 사과들의 크기가 모두 같기 때문에 누구도 공동체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사과들을 한데 담고 있는 용기, 즉 투명한 바구니는 짐작건대 최초의 감상자들에게 신의 은총을 의미했을 것이다. 하이드는 책 표지를 대충 선택하지 않았다. - P240

만약 내가 인터넷에서 돈을 지불하지 않고 음악이나 영화를 훔쳤다면, 다시 말해 인터넷에서 뭔가를 얻어낸 다음 그것을 정신적 가치는있지만 금전적 가치는 없는 선물로 치부했다면, 나는 그 선물이 내 손에 도달하는 데 매개체가 되어준 창작자에게 무엇을 얼마나 빚진 걸까? 감사의 말 한마디? 진지한 관심? 시주 그릇에 넣는 라테 한 잔 값의 팁?
분명한 답은 그것이 결코 ‘공짜‘는 아니라는 것이다. 저작권 분쟁이확산되면서 이런 이슈들에 대해 엄청난 디지털 잉크가 쏟아졌다. 분명히 말하지만 해결책의 일부는 신세대 e청중에게 선물의 이치를 교육하는 것이다. 선물은 주는 사람이 선택권을 행사할 때 선물이다.  - P243

내가 만난 선물』의 독자들은 모두 이 책에서 통찰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본인의 예술 활동에 대한 통찰뿐 아니라, 일상을 너무 넓게차지하고 있어서 오히려 자세히 볼 틈이 없었던 문제들에 대한 통찰을얻었다고 했다. 누군가 나를 위해 문을 잡아주면 나는 그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빚진 걸까? 내 정체성을 다지려면 크리스마스를 가족과함께 보내야 할까? 만약 동생이 신장을 기증해달라고 부탁하면 즉각그러겠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동생에게 수천 달러를 청구해야 할까?
범법 행위를 요구받는 입장이 되기 싫으면 마피아의 선물은 사양하는게 좋지 않을까? 내가 정치인인데 로비스트에게 포도주 상자를 받아도 될까? 다이아몬드는 정말 여자의 ‘베스트 프렌드인가? 아니면 현금화가 불가능한 격정적인 손등 키스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할까?
한 가지는 보증할 수 있다. 선물』을 읽기 전의 당신과 읽은 후의 당신은 같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이 책이 선물로서 가지는 위상이기도 하다. 선물은 단순한 상품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혼을 변화시키니까. - P244

헨리 왕의 궁정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고,그들 모두 나름의 잇속을 챙기거나 참수의 도끼를 피해 다닌다. 독자가 이들의 뒤를 빠짐없이 따라가게 하는 것은 보통 재능이 아니다.
역사소설 쓰기에는 난관이 많다. 다수의 등장인물과 그럴듯한 속옷은 그중 단 두 가지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어떤 말씨를 써야 할까? 16세기 어휘는 못 알아들을 것이고, 현대 속어는 못 들어줄 것이다.  - P248

우리가 역사소설을 읽는 이유는 『햄릿』을 계속 보는 이유와 같다. 중요한 건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다. 우리는 플롯을 알지만 등장인물들은 플롯을 모른다. 맨틀은 크롬웰이 안전을 확보한 듯한 시점에 남겨두고 책을 끝낸다. 앤 왕비뿐 아니라 그를 저주하던 네 명이 방금 참수됐고, 더 많은 이들이 무력화됐다. 비록 ‘여우가 집에 간 사이 닭장이
‘누리는 평화‘에 불과하지만 잉글랜드는 평화를 목전에 두었다. 하지만사실 크롬웰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고, 그의 적들은 무대 뒤에 모여 불평을 토하고 있다. 책은 처음처럼 피에 젖은 닭털들의 이미지로 끝난다.
하지만 책의 끝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결말이란 없다." 맨틀이 말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결말의 실체에 대해 기만당한 것이다. 결말은 모두 시작이고, 이것도 그중 하나다. - P250

올해 레이철 카슨의 기념비적 저서 『침묵의 봄이 출간 50주년을 맞았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20세기 환경 서적 중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는다. 이 책은 20세기에 인간이 병충해 방제의 목적으로 만들어 대대적으로 사용한 무수한 화학약품이 생물권을 파괴하는 독이 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레이철 카슨은 이때 이미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생태주의 작가였고, 해당 분야의 선구자였다. 카슨은 일반 독자들도쉽게 이해할 수 있게 과학을 설명하는 방법을 알았다. 또한 뭔가를 구하려면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카슨이 저술한 모든 것에서 자연 세계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빛을 발한다. 그녀는 ‘침묵의 봄』이 풍차를 향한 자신의 마지막 돌격이 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자신이 가진 수사학적 무기들을 골고루 연마했고, 연구들을 광범위하게 종합했다. 그런 다음 단순하면서도 극적인 프레젠테이션과 방대한통계자료를 결합했고, 환경보호를 위한 구체적 실천이 시급하다는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 책의 영향은 엄청났다. 많은 단체들, 입안들, 정부 기관들이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그 핵심 통찰들은 오늘날까지 주효하게 남아 있다. - P253

카슨에 대한 인신공격의 대부분은 20세기 중반의 여성관-약한 정신 능력, 지나친 감상주의, ‘히스테리‘ 경향에 기초한 젠더 차별적 비방이었다. 일례로 전 미국 농무부 장관 에즈라 태프트 벤슨(Ezra TaftBenson)이 황당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사적인 편지에서 카슨이 매력적인데도 미혼인 걸 보면 "필시 공산주의자일 것이라고 썼다. (대체 무슨뜻일까? 공산주의자는 자유연애에 탐닉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섹스를 배격한다는 뜻일까?)레이철 카슨은 이 모든 것을 꿋꿋이 견뎌냈다. 비방에 굴하지 않고 품위와 존엄과 용기로 맞섰다.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지는 얼마 안가 분명해졌다. 그녀는 암으로 투병하다 1964년 초에 세상을 떴다. 이로써 『침묵의 봄』은 그녀의 임종 유언이 됐고, 더한 영향력을 얻었다. - P254

『침묵의 봄』은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도적잖은 파문을 몰고 왔다. 내 아버지는 숲을, 특히 캐나다 북부 대부분을 뒤덮은 침엽수림을 파괴하는 해충 침습을 연구하는 곤충학자였다.
아버지는 1930년대 내내 삼림 곤충학자로 일하며 살충제 혁명의 도래를 보았다. 처음에는 기적과 같았을 것이다. 살충제에 내성 있는 곤충은 아직 없었고, 1차전의 결과는 싹쓸이 압승으로 보였다. 약품 제조업 - P254

체들은 해충 문제에 대한 화학적 해법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그 대상은 삼림 해충에 그치지 않았다. 사과·면화·옥수수를 비롯한 각종 작물의 해충, 질병 매개 곤충, 짜증 나는 모기, 노변 야생화로 확대됐고, 결국은 모든 벌레와 원치 않는 곳에 자라는 모든 것으로 번졌다. 약품 살포는 싸고, 효과적이고, 인간에게 안전합니다. 쓰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일반 대중은 약품 회사들의 홍보를 믿었다. 마시지만 않으면 사람에게 안전해요. 1940년대 우리 어린 시절의 즐거움 중 하나는 플리트건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플리트건은 DDT 살충제를 담은 분무기인데,
그걸 뿌리면 실제로 어느 벌레나 죽었다. 우리는 플리트건을 들고 집파리를 추적 암살하거나 장난삼아 서로를 쏘면서 뿌연 DDT 입자들을흡입했다. - P255

그런데 이런 때에 레이철 카슨이 비밀을 폭로했다. 우리가 그동안속아왔다고? 단지 살충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진보와 발전과 발견에대해서도 전부 다 거짓이었다고?
그러니까 이것이 『침묵의 봄』의 핵심 교훈 중 하나였다. 진보라는 명찰이 붙은 것들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다른 교훈도 있었다. 사람과 자연을 가르는 경계는 우리의 인식에만 있을 뿐 실재하지 않는다. 즉우리 몸의 내부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연결돼 있고, 우리의 몸에도 생태계가 있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것-우리가 먹거나 흡입하거나 마시거나 피부로 흡수하는 것은 우리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은 이것이 당연한 상식이 됐기 때문에 일반의 생각이 이와 달랐던 시대를 상상하기 쉽지 않다. 세상은 레이철 카슨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카슨 이전의 자연은 그저 ‘그것(it)‘이었다.  - P257

레이철 카슨이 살아 있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무슨 말들을 했을지 궁금하다. 베트남전쟁 때 미군은 베트남 정글들을 말려 죽일 독성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를 태평양 너머로 무지막지하게 실어 날랐다. 카슨이 이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인류가 파멸의 낭떠러지로 향한다고 경고하지 않았을까? 이때 파괴된 정글들은 여태 회복되지 않았고, 당시 고엽제에 노출됐던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아직도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카슨의 경고는 거기서 끝나지않았을 것이다. 에이전트 오렌지의 해양 유출에 따른 결과를 상상해보라. 바다 남조류의 죽음은 곧 지구적 재앙이다. 지구 대기권 산소량의50~80퍼센트를 해조류가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P261

카슨이 살아 있다면 자신이 뿌린 희망의 신호들도 봤을 것이다. 카슨 덕분에 사람들이 문제의 일부에라도 경각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개인이 모든 문제를 놓치지 않고 파악하기란 어렵다. 우리의 첨단 기술 문명은 구멍투성이고 그 누출물들이 우리에게 떨어지고 있다. 우리가 혁신을 할수록 우리가 호흡하고, 먹고, 피부로 흡수하는 화합물의목록이 길어진다. 폴리염화비페닐, 염화불화탄소 냉매, 다이옥신 등은유해성이 밝혀져 얼마간 통제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유해 화학물질들이 환경에 만연하고, 해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화학물질들이 여기에 가세한다. - P262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본인이 직접 피해자가 되지 않는 한, 보이지 않는 독성을 걱정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지 않는다. 인간은 단기적종이다. 인류사의 대부분을 그렇게 살았다. 대개의 사냥꾼과 약탈자처럼 우리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포식했다. 하지만 우리의 보금자리인 지구를 망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로 단기적 종으로 끝난다.
내 아버지의 암울한 예언처럼 바퀴벌레가 지구를 접수하게 된다. 환경운동가들을 악마로 만드는 일 - 레이철 카슨에게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 일어나는 일은 이 운명을바꾸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긍정적인 변화도 있다. 인식이 높아졌다. 환경 단체들로 가는 기부금 비중은 여전히 초라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인류 최대의 질문에 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이 많아졌다. 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인가?  - P262

환경 단체들이 피라미드를 이루고 그 위에 그린피스, 세계자연기금, 버드라이프 인터내셔널(Birdlife International) 같은 국제단체들이 있다. 이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는 카스의 시대에 비해 지구 생명의 자초지종에 대해 훨씬 많이 안다. 해류가 어디로 흐르는지, 숲이 어떻게 영양분을 보충하는지, 바닷새 무리들이 어떻게 해양 생물을 풍요롭게 하는지를 안다. 우리는 1940년대 이후 어류 자원의 90퍼센트를 파괴했다. 하지만 해양 공원 지정으로 회생을 도모 중이다. 우리는 새들이 어디에 둥지를 트는지, 그들이 계절이동을 하며 어떤 위험을 헤쳐나가는지 안다. 우리는 서식지 보존의 중요성을 알고, 체계적으로 보호지역을 지정해나가고 있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의 중요조류서식지(IBA) 지정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방대해진 지식에 비해 공동의 정치적 의지는 강하지 않다.
변화를 향한 에너지와 보존 활동은 앞으로 풀뿌리 네트워크에 기댈 수밖에 없고, 지금도 대부분 거기서 나온다. - P263

제가 1960년대에 처음 청중과 질의응답 세션을 갖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언제 자살할 생각이세요?" 저는 여성시인이었고,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의 망령이 아직 떠돌던 시대였고 자살이 필수로 여겨졌습니다. 여권운동 초기에는 이런 질문이 왔습니다. "남자들을 증오하세요?" 1980년대가 되자 사람들이 글쓰기 과정에 대해 묻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 이후에는 시녀 이야기』에 대해말하고 싶어 했고, 그건 지금도 그렇습니다. 국가가 여성의 신체를 관리하는 정책에 대해 제가 정곡을 좀 세게 찌른 모양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질문이 들어옵니다. "희망이 있나요?" 제 대답은 "언제나 희망은 있죠"입니다. 희망은 내장형입니다. 그리고 잘 옮습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 희망이 더 많아집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들은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노력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좀비의 진정한 의미일지 모릅니다. 그들은 우리입니다. 다만 희망을 뺀 우리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에게 희망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 P285

하지만 책을 쓰는 데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플롯보다는 내용과 관련된 이유들. 우리는 기이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한편에서는 온갖 생물학, 로봇공학, 디지털 기술이 매순간 발명과 발전을 거듭하며 한때 불가능이나 마법의 영역에 있었던 위업들을 실현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의 생물학적 터전을 숨 막히는 속도로 파괴하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수세기 동안 서구에서 찬양과 홍보의 대상이었던 민주주의가 첨단 감시 기술과 기업 자본의 힘에 의해 안에서부터 붕괴하고 있다. 현재 인간사회는 세계 인구의 단 1퍼센트가 전체부의 80퍼센트를 장악한 극단적 가분수 피라미드를 이룬다. 이는 본질적으로 위태로운 구조다. - P291

어린 내 눈에 사진 속 인물은 동화에 나오는 마법의 생명체 같았다.
적어도 천 살은 된 듯한, 믿을 수 없이 나이 든 여자. 화려한 착장에 당대의 화장법에 충실했음에도, 그 효과는 카니발 분위기였다. 변장한멕시코 해골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총기와 냉소가 빛났다.
그녀는 자신이 뿜어내는 엽기적 인상까지는 아니어도 다분히 기묘한분위기를 즐기는 듯했다. - P294

이것이 이자크 디네센 단편집 『일곱 개의 고딕 이야기』(1934)에서 의도했던 분위기였을까? 그중 「엘시노어의 저녁 식사(The Supper atElsinore)」에서 데 코닝크 집안의 세 남매는 살아 있는 메멘토 모리(죽음의 상징)로 묘사된다. "오빠의 용모 못지않게 두 자매의 모습에서도, 독특한 분위기의 미모로 유명했던 집안 내력을 한눈에 실감할 수 있었다. 심지어 벽에 걸려 있는 세 남매의 어린 시절 초상화마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만 세 사람의 머리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전반적으로해골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 P294

이자크 디네센은 『라이프 지의 사진을 찍을 당시 이미 투병 중이었다. 하지만 9년 후 뉴욕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도 당당함은 여전했다. 그녀는 최고의 명사 대접을 받았고, E. E. 커밍스와 아서 밀러를 포함한 유명 작가들이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녀가 참석하는 자리에는 인파가 몰렸고, 더 많은 사진들을 낳았다. 그 후 3년만에 그녀는당연히 미리 알고 있었을 죽음을 맞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의 현란한 자기표현은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죽음을 앞 - P294

둔 투병 시기에는 한때 빼어났던 미모가 망가진 모습을 카메라로부터숨기고 은둔을 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디네센은 세간의 스포트라이트에 자신을 온전히 노출시켰다. 혹시 그녀는 자신의 문학을 지배한모티프 중 하나-거의 확실한 죽음에 맞선 용감하지만 부질없는 제스처-를 직접 체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솔깃한 추측이다.
뉴욕은 디네센의 마지막 무대로 어울리는 곳이었다. 1934년에 그녀가 일곱 개의 고딕 이야기』로 미국을 사로잡으며 인기를 얻은 곳이 바로 뉴욕이었다. 당시 이 책은 단편집은 판매가 저조하고, 작가가 무명이며, 이야기 자체도 괴이하고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고루한 이유로 출판사들에게 퇴짜를 맞았다. 그러다 결국 해리슨 스미스 & 로버트 하스라는 미국의 작은 출판사가 출간을 결정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유명 소설가 도로시 캔필드(Dorothy Canfield)의 서문을 달아야 하고,
작가에게 선인세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 P295

카렌 블릭센은 도박을 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도박에서 이겼다. 『일곱 개의고딕 이야기』는 모두의 예상을 깼다. 무엇보다 ‘이달의 북클럽(Book ofthe Monch Club)‘의 선택을 받았다. 대대적인 관심과 대량 판매를 보장받는 일이었다.
이제는 카렌 블릭센이 조건을 내걸 차례였다. 그녀는 이자크 디네센이라는 필명을 쓰기로 했다. 디네센은 결혼 전 성이고, 이자크는 ‘웃음‘을 뜻하는 이름 아이작(Isaac)의 덴마크어 버전이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노령에 예상치 못한 늦둥이를 낳고 기뻐서 붙인이름이었다. 블릭센의 미국 출판사는 필명을 쓰지 말 것을 권했지만소용없었다. 그녀는 다중성을 띠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이를 통해 남성 - P295

또는 적어도 중성이 되고자 했다.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여류‘ 작가의 새장에 갇히고 싶지 않았던 걸까.)작명은 적절했다. 카렌 블릭센의 작가 데뷔는 사실상 늦고 예상치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1931년 파산 상태로 아프리카에서 덴마크로 귀국했다. 결혼은 파경을 맞았고, 그녀의 아프리카 커피 농장은 빛에 넘어갔고, 연인이었던 영국 귀족 출신 맹수 사냥꾼 데니스 핀치 해턴은경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엄밀히 말해 『일곱 개의 고딕 이야기』가 그녀의 첫 책은 아니었다. 갓 스무 살 때 처음 단편집을 낸 후 그녀는 글쓰기 대신 결혼과 아프리카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 삶은 이제 끝났다.
마흔여섯 살의 그녀는 적막함과 절박함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 느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창의적 에너지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 P296

디네센에게는 사라진 나라가 보인다. 그녀는 그곳을 세심함과 애정을가지고 묘사한다. 거기에는 편협함, 속물주의, 억눌린 삶 같은 불쾌한 측면들도 포함돼 있다. 그곳으로 돌아갈 방법은 스토리텔링밖에는 없다.
그 나라는 영원히 사라졌고, 다만 회자될 뿐이다. 그녀의 작품은 금욕적이고 명민한 노스탤지어의 맥이 관통하고, 그녀가 종종 배치하는 냉소적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애가 느낌을 잃지 않는다.
그럼에도 디네센이 창작 과정에서 느꼈을 즐거움과 그녀가 이날까지 독자에게 제공해온 즐거움은 결코 적지 않다. 『일곱 개의 고딕 이야기는 주목할 만한 커리어의 서막이었고, 이자크 디네센을 20세기의주요 작가 반열에 올렸다. 제임스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끝에서 미노스의 미로 설계자 다이달로스를 불러냈듯"옛날의 아버지 - P300

여, 옛날의 장인(匠人)이여"-앞으로 많은 독자와 작가들이 이자크 디네센을 부르게 될 것이다. "옛날의 어머니여, 옛날의 이야기꾼이여, 지금 그리고 영원히 저를 도우소서.‘
「라이프」지의 사진 속에서 그녀가 우리의 시선을 당당하게 마주한다. 생생한 눈빛과 화려한 치장의 불가사의한 해골의 모습으로. - P301

1963년에 우리가 몰래 읽던 또 다른 여성은 시몬 드 보부아르였다.
하지만 우리 같은 식민지 출신 소녀들의 어린 시절은 빳빳이 풀 먹인페티코트와는 거리가 멀었고, 대단히 프랑스적이지도 않았다. 우리는차라리 제국의 변방에 살던 졸부의 딸과 더 공통점이 많았다. 레싱은1919년 이란에서 태어나 영국 식민지였던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의대농장에서 자랐고, 두 번의 결혼 실패 후 장래도 전망도 없이 도망치듯 영국으로 갔다. 우리 식민지 소녀들이 장래도 전망도 없이 유럽으로 내뺐던 것처럼.
‘레싱의 에너지 중 일부는 변방 출신이라는 배경에서 왔을 것이다.
바퀴가 회전할 때 불꽃이 튀는 곳은 가장자리다. 또한 그녀의 성장 배경은 타자들의 입장과 역경에 대한 통찰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영원히 주변인에 머무를 것이며, 언제까지나 ‘진짜 영국인‘은 되지 못할것임을 알았다. 그것을 안다면 잃을 것도 적다. 그래서인지 도리스는무엇을 하든 혼신을 다해서 했다.  - P309

나는 시몬 드 보부아르는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 어릴 때는 상상만해도 오금이 저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은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 그것도 여러 번. 그 만남들은 모두 문학적 맥락에서 일어났고,
매번 그녀는 젊은 여성 작가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선배였다. 친절했고, 도움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고, 영국 내 비영국인 작가들의 위치에대해 남다른 이해를 갖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로 희화된다. 여성 작가들은젊은 여성 작가들에게 악녀 크루엘라 드빌 아니면 착한마녀 글린다이다. 지금까지 나도 내 몫의 크루엘라들을 만났다. 하지만 레싱은 글린다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여성 작가들의 귀감이었을 뿐 아니라, 머나먼 오지 출신 작가들의 좋은 본보기였다. 그녀는 너무나 뚜렷이 보여주었다. 아무 배경이나 기반이 없는 사람도 재능과 용기가 있다면,
역경과 맞서 싸울 뚝심이 있다면, 그리고 약간의 행운이 따라준다면작가가 오를 수 있는 최고봉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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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디킨스의 은밀한 의도는 따로 있었다. 한때 이 작품의 가제였던 ‘쇠망치 (The Sledgehammer)‘가 암시하듯, 그의 의도는 그가 열중했던 사회정의를 향한 작은 문학적 봉기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탐욕과빈곤을 대비시키고, 개인적 박애의 확산이라는 해독제를 제안했다. 조지 오웰도 언급했듯, 디킨스는 사회적 부당함에 격노하는 사람이었지만 전면적 정치혁명을 촉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 에버니저 스크루지의 압도적인 장수와 인기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스크루지는 햄릿처럼, 자신을 낳은 원작에서 독립한 캐릭터들 중 하나다. 크리스마스캐럴』을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스크루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유가 뭘까? 내가 불멸의 스크루지를 처음 접한 것은 언제였으며,
어째서 나는 스크루지라면 사족을 못 쓰게 되었나? 날 때부터 스크루지를 알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1940년대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읽어주던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은 게 처음이었을까?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는 라디오 시대였으니까.  - P196

어찌 됐든, 디즈니 만화의 스크루지 맥덕을 알게 된 일곱 살 무렵에는 나도 ‘스크루지‘란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맥덕의 늙고 교활한 껍데기 속에 다정하고 관대한 맥박이 뛰고 있다는깨달음도 포함돼 있었다. 아기 오리 세쌍둥이가 스크루지 삼촌이라면좋아 죽는 것이 분명한 신호였다. 맥덕은 장난치고 놀 때는 어린 조카들 못지않게 유치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웃기기도 엄청 웃겼다.
이것이 원작의 스크루지를 이해하는 한가지 열쇠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어린아이다. 우리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처음 만나는 그는 겉은 늙은이지만 상처 입은 아이다. 스크루지를 쓰면서 디킨스는 자기내면을 깊이 파고들었고, 자신의 창조물에 자신의 숨겨진 고통을 상당량 투영했다. 디킨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시기, 그의 무책임한 아버지가 채무자 감옥에 갇히고 어린 그가 학교를 떠나구두약 공장에서 일하며 궁핍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시절을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시절이 영원히 이어지진 않았다.  - P197

비참한 곳에 방치되고 잊힌 의지가지없는 아이의 모습을 한 외로움.
이것이 스크루지가 연기한 디킨스의 악몽이다. 노년까지 이어진 스크루지의 구두쇠 성향을 낳은 것은 바로 이 악몽이다. 스크루지의 어린누이가 학교에 와서 그에게 집에 가자고 했던 순간도 아니었고, 스크루지가 페지위그 씨의 수습생으로 일하던 시절의 다사다난함도 아니었다. 스크루지의 유명한 욕설 "망할 성탄!(Bah! Humbug!)"에는 이런 뜻 - P198

이 있다. "나는 인간적 나눔과 행복의 가능성 따위 믿지 않아. 인생에서가장 중요한 시기에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이야." 환대와 박애라는 크리스마스 정신은 사기에 불과했고, 스크루지의 어린 시절이 그명백한 증거였다. 얼마쯤은 디킨스의 어린 시절도 그랬다. ‘누추하기짝이 없는 학교‘는 구두약 공장이었고, ‘아들을 방치하는 무정한 아버지는 빚지고 감옥에 가면서 아들에게 고통을 안긴 아버지였다. 스크루지의 심장은 여물기도 전에 시들어버렸다. 디킨스의 심장이 그렇게될 뻔했기 때문이다.
구두약 공장 시절로 인해 디킨스는 평생 두 가지 충동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하나는 파산에 대한 공포였다. 이 공포는 그를 광적으로돈벌이에 주력하게 했다. 다른 하나는 아랑을 베풀려는 욕망이었다.
만약 과거에 누군가 관대함을 베풀었다면 어린 디킨스는 구두약 공장의 노동을 면했을지 모른다.  - P199

어린 팀을 더 간단하고 더 간접적인 방식으로 보내버리며 연민을 일으키는 것쯤 디킨스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팀은 구조될 수 있는 아이다. 과거에 구조되지 못했던, 또는 너무 늦게 구조됐던 스크루지와는 다르다. 그리고 스크루지 본인이 구조자가 될 수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아무도 베풀지 않았던 구원의 관대함을 이제그가 팀에게 베풀 수 있다. 그는 ‘제2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 그것은디킨스 본인은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그래서 그가 그렇게 반복적으로만들어냈던 자애롭고 유능하고 재정적으로 든든한 아버지다.  - P200

우리 시대는 영혼의 구원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시대다. 대신 지연된 깨달음과 치유 과정을 즐겨 말한다. 어쩌면 스크루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해석이 무엇이든, 스크루지는 문학 캐릭터를 위한 유일하고 진정한 시험을 통과했다. 즉 그는 오늘날까지 새롭고 생생하게 남았다. 스크루지는 죽지 않는다! 티셔츠에 어울릴 문구다. 그렇다. 그는 살았고, 우리는 그와 함께 기뻐한다. - P201

대아, 맞다. 글쓰기. 삶.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것이 문제다. 삶을 살 수도 글을 쓸 수도 있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하기는 어렵다. 삶은 글의 주제가 되기도 하지만 원수이기도 하니까.  - P202

독자에게 바치는 기도


미지의 독자여, 그대가 누구든
그대가 가까이 있든 멀리 있는, 현재의 사람이든 미래의 사람이든, 심지어 과거의 혼령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아니면 인생의 중반에 있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또는 이 가상의 양극을 잇는 연속선상의 어디에 위치하든
종교가 무엇이든, 종교가 있든 없든, 정치적 견해가 무엇이든, 정치색이있든 없든
키가 크든 작든, 머리가 풍성하든 벗겨지기 시작했든, 건강하든 아프든,
골프 선수든 카누 선수든 축구 팬이든, 어떤 스포츠를 하고 어떤 취미에 - P211

빠져 있는
그대가 작가이든, 독서 애호가이든, 아니면 교육제도의 강제에 따라 원치 않은 독자가 된 학생이든
그대가 어떤 방식으로 읽든 종이책으로 읽든 전자책으로 읽든
욕조, 기차, 도서관, 학교, 교도소, 비치파라솔 아래, 카페, 옥상정원, 손전등으로 밝힌 이불 속, 기타 무수히 많은 장소 중에서 그대가 읽는 곳이 어디든
우리 작가들이 말을 거는 상대는 언제나 바로 그대, 미지의 존재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인 그대입니다.
오 독자여, 영원히 살기를! (그대 개별 독자는 영원히 살지 않겠지만, 이렇게말해야 재밌고 듣기 좋으니까요.)우리 작가들은 그대를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상상해야 합니다.
그대가 없다면 글쓰기란 의미도 목적도 없는 활동이 되고 맙니다.
글쓰기는 읽을 자유가 존재하는 미래를 상정하기에 본질적으로 희망의 행위입니다. - P212

미지의 독자여, 우리는 마술처럼 그대를 만들어내고 불러냅니다. 보세요, 그대는 존재해요! 그대가 방금 여기서 그대의 존재에 대해 읽었다는것 자체가 그대가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려는 것이다. 2010년 7월 10일에 내가 이 말들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여러분이 종이와 화면을 통해 지금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 - P212

‘정치적 대리인으로서의 작가‘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려운 일이다. 나는 작가들을 딱히 정치적 대리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동네북이라면 모를까. 정치적 대리인은 의도적으로 선택한 행위이자 본질적으로 대단히 정치적인 행위를 암시하는데, 모든작가가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많은 작가들이 정치에 있어서 벌거벗은 황제를 본 아이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황제의 나체를 언급한다. 주제넘고 싶어서도, 찬물을 끼얹고 싶어서도 아니다. 단지 그들 눈에 옷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고함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한다. 위험한 종류의 순진함일 수는 있지만 흔한 일이다. 소설 『악마의 시』의 저자에게 파트와의 사형언도가 내려졌을 때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저자 살만 루슈디 (SalmanRushdie) 본인이었다. 루슈디는 그저 자신이 무슬림 이민자들을 문학적지도에 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 P214

소설가나 시인이 항상 이런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써야 한다는 뜻은결코 아니다. 소설을 그것이 내세우는 대의의 타당성이나 ‘정치적 정당성‘으로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검열로 이어지는 사고방식이다.
혁명은 종종 젊은 작가들을 잡아먹는 결과를 낳았다. 권력투쟁의 승자들이 한때 허용됐던 작품들을 이단으로 선언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내 모태 공산주의자 친구가 최근 자기 부모의 공산주의그룹을 두고 한 말처럼, "그들은 언제나 작가들에게 가혹했다".
혁명가, 수구 반동, 종교적 정통파, 또는 각종 대의의 열성 지지자들에게 소설과 시는 수상쩍은 것이며 부차적인 것이다. 많은 이들이 글 - P216

쓰기를 대의에 봉사하는 도구로 취급한다. 만약 작품이나 작가가 선을지키지 않거나 나아가 대놓고 선을 넘을 경우 해당 저자는 기생충으로매도되거나 배척당한다. 또는 처리된다. 파시스트들에 의해 재판도 없이 총살당해 암매장된 에스파냐의 위대한 시인 로르카(Federico GarciaLorca)처럼.
하지만 소설가와 시인에게는 글쓰기 자체가 직업이자 예술이며, 글쓰기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이는 설사 다른 충동이나 영향력이 글쓰기에 개입할 때도 변함없다. 자유에 다가가는 사회란 인간의 광범위한 상상력과 자유분방한 발언이 허락되는 곳이다. 작가에게 무엇을 어떻게 쓰라고 참견하지 못해 안달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중 일부는 토론회에 패널로 나와 ‘작가의 역할‘이나 ‘작가의 도리‘를 논한다.
마치 글쓰기 자체는 경박한 소일거리에 불과하다는 듯이, 애국심 고취, 세계 평화 함양, 여성의 지위 향상 등 뭐라도 대외적인 역할과 도리를 갖다 붙일 수 없는 글쓰기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듯이. - P217

짧게 답하면 이렇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환경‘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마시는 물, 먹는 음식- 이 없다면 어떤 문학도 없을 겁니다. 우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사람은 대개 물 없이 사흘이면 죽습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산소가 처음부터 지금처럼 지구 대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건 아닙니다. 산소는 녹색식물이 만든 것이고, 녹색식물이 지금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식물을 모두 없애버리면 우리도 없어집니다. 지구 온도가 더 올라가면 우리 행성은 살수 없는 곳이 됩니다. 모든 생명체가 해당되진 않겠죠. 바다가 끊어 없어지지 않는 한 일부 심해 생물들은 분명히 살아남을 겁니다. 하지만인류는 도리 없이 사라집니다.
이런 이유로 환경 보존은 문학 존속의 전제 조건입니다. 환경을 지금과 비슷하게라도 보존하지 못하면 여러분과 저의 글쓰기, 모두의 글쓰기는 그저 무의미해질 뿐입니다. 그걸 읽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테니까요. - P222

하지만 저는 예술과 자연이 그렇게 대단히 분리돼 있다고 생각하지않습니다. 예술은 원래 자연과 뒤얽혀 있었고 애초에 자연에서 나왔으며, 특히 문예는 한때 인간 종(種)의 존속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것이 저의 전제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두 갈래로 고려하고 싶습니다.
한편에는 구술이나 문자를 통한 스토리텔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야기의 기록과 전파 방법으로서의 글쓰기 자체가 있습니다.
먼저, 스토리텔링, 서사 행위라고도 하죠. 저와 함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실까요. 도시와 마을이 있기 전으로, 농경이 시작되기 전으로요.
스토리텔링에는 두 가지가 요구됩니다. 언어와 상징적 사고. 이 두능력은 아주 오래됐습니다. 최근 연구에서 네안데르탈인이 확실히 언어를 보유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장례 의식과 음악과 신체 장식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네안데르탈인이우리와 별개의 종이며 우리의 출현으로 멸종했다는 이전의 주장과 달 - P224

리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의 염기서열 일부를 공유한다고 합니다. 만약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이 교접해서 둘의 유전자를 모두 지닌 번식력 있는 후손을 낳았다면,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은 사실 같은 종의 하위집단들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이 분기하기 전의 공통조상 때부터 언어 사용과 상징적 사고가 있었을 겁니다. 또는 적어도그것을 가능케 할 패턴들을 보유했을 겁니다.
이처럼 언어와 상징적 사고는 까마득히 오래됐습니다. 개체발생은계통발생을 반복한다. 이것이 생물학이 주문처럼 외는 말입니다.  - P225

이야기의 효과는 막강했습니다. 이야기에 보호기제가 내장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초자연적 존재가 이야기에 등장하게 됩니다. 마땅한 대우와 존경을 해주면 성공적인 사냥으로 우리에게 보상하거나 적어도 우리를 잡아먹지 않을 존재요, 사실
‘초자연적‘이란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과 동떨어진 존재는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처음에는 자연에 있거나 자연을 이루는것들이었습니다. 환경에 있는 모든 것, 심지어 돌과 나무도 정령이 깃든 존재였고, 이 정령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경우 우리에게 등을돌리고 치명적인 불운을 안길 수 있었습니다.  - P228

하지만 이야기 기록 기술들도 자연에서 나왔어요. 쓰기 위해서는 먼서 문자, 즉 상징체계가 필요했습니다. 때로 문자는 소리를 적는 기호였습니다. 이때는 소리 기호들을 연결해 단어를 만들었죠. 또 때로는문자 자체가 단어나 사물을 상징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문자와 중국문자를 비롯한 많은 문자들이 이렇게 사물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모든 문자가, 심지어 영어의 ABC도, 자연에 있는 형상들에 기초했다고 합니다. - P229

위기일발로 치닫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우리 작가들은 어떤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요? 어떤 종류의 이야기가 우리가 속한 인류 공동체에 도움이 될까요?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모르니까요. 다만 이건 압니다. 우리가 희망을 놓지 않는 한우리는 아직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할 것이고, 우리에게 시간과 재료가 있는 한 우리는 그것을 계속적어나갈 겁니다. 이야기를 하고, 듣고, 전달하고, 거기서 의미를 끌어내려는 바람은 우리 인간에게 내장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경‘, 그리고 앞서 언급한 환경에 닥친 온갖 위기들. 우리 작가들이 나서서 이것들을 다루게 될까요? 다룬다면 어떻게요? 설교 투의 경고를 통해서?
인류에게 주어진 최선의 선택을 착실히 실천하는 서사를 통해서?  - P232

우리가 쓸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이 변화들을 반영하게 됩니다. 그러다 때로는 우리가 현대판 샤먼 무아경과 영적 여행을 통해 이계(異界)에서 뭔가를 건져내게 될지도 모르죠. 그 뭔가가 설명서는 아닐 겁니다. 설명서 같은 건 없어요. 그보다는 부적에 가까울 겁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부적이요. 효험이 있을지는 모르지만요. 아니면 위험 목록일 겁니다.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주문일 겁니다.
아니면 우리가 다시 동물과 대화하고 식물의 지시를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은유들이 어떤 형태를 띠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 P233

주인공은 과거를 낱낱이 기억한다. 그때의 폭력과 학대와 반목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와 동시에 한때 자기피부처럼 친밀했던 풍경이 세월에 의해 거리감을 입고 중립적으로 변해버린 것을 본다. 하지만 그 변화는 반전될 수 있다. 세월이 낡은 벽지처럼 벗겨져 그밑의 생생하고 놀랍도록 선명한 패턴이 드러날 수도 있다.
앨리스 먼로는 체호프와 자주 비교되지만, 어쩌면 세잔과 더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사과를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린다. 이 지독히익숙한 사물이 낯설어지고 어둠 속에 빛나며 신비로워질 때까지. 하지만그것은 여전히 사과로 남는다. 결국 먼로는 모종의 신비주의자가 아닐까?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가 말했다. "그대는 작은 것들에도 위대하게 임하시며, 어떤 것에도 작게 임하심이 없다." 앨리스 먼로에게도해당되는 말이다.
("아유 제발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적당히 좀 해요! 허버트는 하느님에 대해 말한 거잖아요! 저 동상이면 하루치로 충분하지 않아요?! 그나저나저거 청동인 건 확실해요?") - P236

선물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다. 선물은 전달을 통해 존속한다. 주는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영적 삶을 일으키고, 이를 통해 선물 자체도 재활하고 재생한다.
선물 주기와 예술의 관계를 탐구한 루이스 하이드(Lewis Hyde)의 명저 『선물(The Gift)』도 마찬가지다. 선물』은 절판된 적이 없다. 입소문과 선물을 통해 가지각색의 예술가들 사이로 지하 기류처럼 움직인다.
이 책은 내가 작가와 화가와 음악가 지망생들에게 어김없이 추천하는책이다. 이 책은 입문서가 아니다. 입문서는 넘쳐난다. 이 책은 예술가가 하는 일의 본질에 대한 책이자 예술 활동과 우리의 지극히 상업적인 사회의 관계를 다룬 책이다. 작문, 그림, 노래, 작곡, 연기, 영화제작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물』을 읽기 바란다. 여러분이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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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택은 너무나 방대해서 바람도 그 안에갇힌 듯 겨울이든 여름이든 이리저리 불어 댔다. 사냥꾼들이그려진 초록색 벽걸이도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의 조상들은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귀족이었다. 그들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안개 낀 북부에서 나타났다. 거대한 문장(章)이그려진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햇빛이 방안에 검은 막대 무늬와 노란 웅덩이를 만들어 바닥을 얼룩지게하지 않는가? 지금 올랜도는 햇빛에 투과된 문장 속 사자의노란 몸뚱이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가 창틀에 손을 얹고 창문을 밀어낸 순간 그의 손은 나비의 날개처럼 빨강, 파랑, 노랑으로 물들었다. 그러므로 상징을 좋아하고 상징을 해독하려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올랜도의 맵시 있는 다리와 멋진 몸, 건장한 어깨 전체가 문장의 다양한 색조로 물들었지만,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 그의 얼굴은 오로지 햇빛을 받아환히 빛났다고 말할 것이다. 그보다 더 정직하고 침울한 얼굴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 P14

그는 어떤 공적을 쌓고 또 다른 공적으로, 어떤 명예를 얻고또 다른 명예로, 어떤 관직을 수행하고 또 다른 관직으로 나아갈 것이고 전기 작가는 그의 뒤를 따를 테니, 결국 그 어떤자리이든 그들 욕망의 최고 정점에 이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올랜도는 바로 그런 인생을 살아가기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발그레한 뺨은 복숭아처럼 솜털에 덮여 있었는데,
입술 위에 난 솜털의 색깔이 뺨의 솜털보다 아주 조금 더 짙었다. 짧은 입술은 아몬드처럼 하얗고 정교한 이빨 위로 살짝 올라가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 같은 코는 조금도흐트러짐 없이 곧게 뻗었다. 머리칼은 검고, 작은 귀는 머리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아, 이 소년의 아름다움을 다열거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마와 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 P15

아아, 이마와 눈 없이 태어난 사람은 거의 없다. 창문 옆에서있는 올랜도를 흘끗 쳐다보면, 그의 눈은 물에 흠뻑 젖은 제비꽃 같고, 눈이 아주 커서 넘치도록 고인 물로 부풀어 오른듯 보이는 것을, 또 그의 이마는 장식 없는 메달 같은 양쪽 관자놀이에 눌려 봉긋 부풀어 오른 대리석 돔처럼 보이는 것을당장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눈과 이마를 보면 그 즉시우리는 그렇게 열광적으로 찬미한다. 그의 눈과 이마를 보면그 즉시 우리는 훌륭한 전기 작가들이 무시하려 드는 수천가지의 불쾌한 것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P15

얼마 지나지 않아 올랜도는 시를 열 페이지 이상 써내려갔다. 그의 글은 확실히 유창하지만 관념적이었다. 그의 비극 속 등장인물은 <악〉, <범죄>, <고통>이었다. 또 괴상망측한나라의 왕들과 여왕들도 있었는데, 무시무시한 음모에 빠져혼란을 겪었고 고귀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가 실제로입에 올렸을 법한 단어는 단 하나도 없이 전체적으로 유창하고 감미로운 시였다. 아직 열일곱 살도 되지 않은 그의 나이와 16세기가 끝나려면 몇 년 더 지나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때, 그 시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이윽고 그는 쓰기를 중단했다. - P16

사물 그 자체를 관찰하였다. 우연히도 창문 밑에서 자라던 월계수 관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글을쓸 수 없었다. 자연의 초록색과 문학의 초록색은 전혀 별개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문학은 본래 서로 적대적인 듯하다.
이 둘을 붙여 놓으면 서로를 산산이 찢어발긴다. 지금 올랜도의 눈에 들어온 초록색은 그의 운을 망쳐놓고 운율을 쪼개 놓았다. 더욱이 자연은 그 나름의 술수를 부린다. 일단 창밖의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꿀벌이나 하품하는 개, 지는태양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내가 석양을 얼마나 많이 볼 수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하게 되면(이런 생각은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자세히 쓸 만한 가치도 없다) 펜을 내려놓고 망토를 걸친 뒤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가게 되고, 그러다가 페인트를 칠한 궤에 발을 부딪힌다. 올랜도는 약간 재바르지못했으니까. - P17

그는 깊은 숨을 내쉰 뒤 참나무 발치의 땅에 몸을 내던졌다(그의 동작에는 열정이라 불릴 만한 면이 있었다). 그는 덧없이 흘러가는 이 여름날 하늘 아래에서 땅의 등뼈를 느끼며누워 있기를 좋아했다. 참나무의 단단한 뿌리가 대지의 등뼈로 여겨졌던 것이다. 혹은 이미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 뿌리는 그가 타고 있는 큰 말의 잔등이 되고 혹은 요동치는 배의 갑판이 되었다 단단한 것이면 뭐든 상관없었다. 그는 떠도는 자기 마음을 끌어다 맬 무언가가 필요했기때문이다. 그의 옆구리를 잡아당긴 그 마음을 저녁나절 이시간쯤에 산책을 나올 때마다 자극적인 사랑의 질풍으로 채워지는 듯한 그 마음을. 그는 그 마음을 참나무에 묶었다. 거기 누워 있다 보면 그의 내면과 주위의 소란한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 P19

올랜도는 더 이상 보고 있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언덕을내달렸다. 쪽문으로 들어섰다. 나선형 계단을 부리나케 올라갔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양말을 방 한구석에 내던지고 조끼를 다른 쪽에 내던졌다. 머리를 물에 적시고 손을문질러 닦았다. 손톱을 깎았다. 6인치짜리 거울과 낡은 양초두 개만 앞에 둔 채, 그는 마구간 시계로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진홍색 반바지를 입고 레이스 깃을 달고 호박단 조끼를입고 겹꽃 달리아만큼 커다란 장미 모양의 리본이 달린 신발을 발에 끼워 넣었다. 이제 준비가 다 끝났다. 얼굴은 발갛게달아올랐고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름길을 통해 수많은 방들과 계단들을 지나 연회장으로 향했다. 저택의 반대편으로 5에이커나떨어진 곳이었다. - P21

그는 너무 수줍어서 장미 향수에 담근 여왕의 반지 낀 손밖에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인상적인손이었다. 여윈 손의 긴 손가락들은 마치 보주(寶珠)나 홀()을 감싸고 있듯이 구부러져 있었다. 초조하고 성마르고병약한 손이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는 손이기도 했다. 높이 쳐들기만 해도 모가지를 떨어뜨릴 수 있는 손이었다. 그손은 좀약을 넣어 모피를 보관하는 장롱 냄새를 물씬 풍기는늙은 몸에 붙어 있으리라고 그는 짐작했다. 하지만 그 몸은온갖 비단과 화려한 보석에 둘려 있었고, 좌골 신경통으로고통에 시달릴지라도 아주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수천가지 공포에 엮여 있어도 절대 움찔하지 않았다.  - P22

낮은 덧없이 지나가고, 그 짧은 시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랜도가 날씨가 이끄는 대로, 시인들과 그 시대가 이끄는 대로, 땅에는 눈이 덮여 있고 여왕이복도에서 경계의 눈길을 늦추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창턱의의자에 앉아 그의 꽃을 땄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는 아직 어렸고 소년 같았다. 그는 자연이 명령한대로 행동했다. 그 아가씨의 이름이 무엇인지 우리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마찬가지로 알지 못한다. 도리스나 클로리스,
델리아, 다이애나였을 것이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차례로시를 써 보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아가씨는 궁녀였을수도, 하녀였을 수도 있다. 올랜도는 다양한 취향을 갖고 있었으니까. 정원에서 자라는 꽃만 좋아하지 않았고, 야생화나잡초에도 언제나 매혹을 느꼈다. - P28

그 혹한은 영국에서 유례없이 극심한 것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새들이 공중에서 날아가다 얼어붙어 돌멩이처럼 땅에 뚝뚝 떨어졌다. 노리치에서는 젊은 시골 여자가 평소처럼 튼튼하고 건강한 몸으로 길을 건넜는데, 길모퉁이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돌풍이 불어닥치자 그 순간 가루가 되어부서져서는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지붕 위로 날아가는 것을본 사람들이 있었다. 양들과 소들이 어마어마하게 죽어 나갔다. 자다가 얼어붙은 시신들은 이불에서 떼어 낼 수가 없었다. 길 위에서 얼어붙어 꼼짝 못 하는 돼지 떼는 드물지 않게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들판에 가득한 양치기나 쟁기질하던사람, 말, 새를 쫓던 어린 소년들 모두 그 순간의 동작 그대로, 누군가는 코에 손을 댄 채, 누군가는 술병을 입술에 댄채, 누군가는 1미터쯤 떨어진 산울타리에 박제처럼 앉아 있는 큰 까마귀들을 향해 던지려고 돌을 든 자세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 P34

그러나 이런 소소한 것들은 그 인물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특이한 유혹적 매력에 가려졌다. 올랜도의 마음속에서 더없이 극단적이고 터무니없는 이미지와 비유들이 솟아올라 뒤엉키고 휘감겼다. 그 3초 사이에 그는 그녀를 멜론이라고, 파인애플이라고, 올리브라고, 에메랄드라고, 눈 속의여우라고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지, 그녀를 맛본 적이 있는지, 그녀를 본 적이 있는지, 아니면 이 세가지를 다 경험한 적이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이야기를끌어가는 동안 한순간도 중간에 끊어서는 안 되지만, 여기서서둘러 말해 두는 편이 좋겠다. 이 순간 그가 떠올린 이미지는 죄다 그의 감각에 어울리게 지극히 단순했고, 대부분 그가 소년 시절에 맛보기 좋아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감각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강렬했다. - P38

어떤 소년도 저렇게 바다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듯한 눈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마침내 스케이트를 타던 그 인물이, 시중드는 어느 귀족의 팔에 기대어 느릿느릿 발을 옮기던 국왕에게 최대한 우아하게 절하기 위해 미끄러지듯 다가와 멈추었다. 그에게서 한 뼘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여자였다. 올랜도는 뚫어져라 응시했다. 온몸이 떨렸고 뜨겁게열이 올랐다가 차가워졌다. 여름날 허공에 온몸을 내던지고싶었다. 발로 도토리를 짓밟아 으깨고 싶었고, 두 팔을 번쩍들어 너도밤나무와 참나무를 흔들어 대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저 그의 작고 흰 이빨들 위로 입술을 오므렸고, 그러다 뭔가 물어뜯으려는 듯 1센티미터쯤 벌렸다가 깨물듯이다물었다. 레이디 유프로시니가 그의 팔에 기대고 있었다. - P39

 그러면 그는 엎어져서 얼굴을 빙판에 대고 얼어붙은 물속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했다. 행복과 우울함을 갈라놓는 것은 칼날보다도 두껍지 않다는 철학자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철학자는 행복과 슬픔이 쌍둥이라는 의견을 밝히고, 모든 극단적 감정은 광기와 결합된다는 결론을이끌어 내면서, 우리에게 참된 교회 (그의 견해로는 재세례파교회)에서 위안을 구할 것을 당부한다. 참된 교회야말로 이바다에서 세파에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유일한 항구이자피난처이고 정박지라고 그는 말했다.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나지.」 올랜도는 똑바로 앉아서 우울하고 어두운 얼굴로 말하곤 했다. - P47

그녀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지 그 숱한 이미지들을 불러일으켰던 여자들처럼 진부해진 수천 가지 이미지들 속에 뛰어들어 철벅거리며뭔가를 건져 내서 말해 주었다. 당신을 눈이나 크림, 대리석, 체리, 설화 석고, 황금 현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여우나 올리브 같아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에 밀려오는 파도 같고, 에메랄드 같고, 아직구름에 가린 푸른 산에 비치는 태양 같고..... 영국에서 내가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던 그 무엇 같아요. 그는 언어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 보아도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풍경과 다른 언어가 필요했다. 사샤를 묘사하기에는 영어가 너무나 거침없고 너무나 노골적이며 너무나 입에 발린 언어였다. 그녀가 하는 말은 대단히 솔직하고 도발적으로 보였지만, 거기에는 무언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아무리 대담하게 보였어도 어딘가 감추어진 부분이 있었다.  - P48

그래서 그는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갑자기 무언가가 그의얼굴을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하게 내리쳤다. 그는 기대감에부풀어 잔뜩 긴장하고 있었기에 깜짝 놀라 칼을 움켜잡았다.
그는 이마와 뺨을 열두 번이나 세차게 얻어맞았다. 메마른한파가 아주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1분이 지나서야 그것이 빗방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빗방울이 얼굴을내리친 것이다. 처음에는 빗방울이 천천히, 유유히, 하나씩떨어졌다. 그러나 여섯 개의 빗방울이 이내 60개가 되었고그러고는 6백 개가 되었고 그러다가 끊임없이 분출하듯 쏟아져 내렸다. 마치 단단하게 굳은 하늘이 풍부하게 넘치는샘물을 쏟아붓는 듯했다. 5분이 지나자 올랜도는 온몸이 흠뻑 젖었다. - P62

올랜도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지금까지는개인적인 문서와 역사적 자료들 덕분에 전기 작가는 첫 번째의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의무란 지워질 수 없는 진실의족적을 따라 좌고우면하지 않고 터벅터벅 걷는 것이고, 길가의 꽃에 유혹되지 않고 그늘을 탐하지 않으며 우리가 무덤에털썩 떨어져서 머리 위의 비석에 <끝>이라고 쓸 때까지 끊임없이 체계적으로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마주칠 사건은 바로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기에 무시할 수없다. 하지만 그 사건은 비밀스럽고 불가사의하며 문서화되어 있지 않아서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을 해석하려면 여러권의 책을 쓸 수도 있고, 그것의 진정한 의미에 입각하여 종교적 체계를 세울 수도 있겠다. 우리의 소박한 의무는 오로지 알려진 대로 사실을 기술하고, 독자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 P69

가장 추악하고 비열한 사건까지도, 윤기와 작열하는 빛으로 아름답게 꾸며 주는 최면이자 치유책이었을까? 인생의 격동이 우리를 산산조각 내지 않도록 죽음의 손가락이 이따금 그 격동 위에얹혀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을 소량씩 섭취해야 하는 존재이고, 그러지 않으면 살아가는 일을 지속할 수없도록 만들어진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은밀한 곳까지 파고들어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것들을 바라지 않는데도 변화시키는 그것은 어떤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을까? 극심한 고통으로 지쳐 버린 올랜도가 일주일간 죽었다가다시 살아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죽음의 본질은 무엇이고,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30분 넘게 기다렸지만 아무 답도 나오지 않으니 이야기를 계속해 가자. - P72

일단 독서의 질병이 잠식해 들어가면 몸이 너무나 쇠약해져서, 잉크병에 숨어 있고 깃털 펜에서 아가는 치명적 병균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버린다. 가여운 인간이 글을 쓰는데 빠져드는 것이다. 이것은 가진 것이라고는 비가 새는 지붕 아래 놓인 의자와 탁자뿐이라서 결국 잃을 것이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나쁜일이지만, 여러 채의 저택과 가축, 하녀, 당나귀와 리넨을 소유하고있으면서도 글을 쓰려는 부자의 고충은 가련하기 그지없다. 그 모든 재산을 향유하는 즐거움이 달아나버린다. 그는 뜨거운 쇳덩이에 난타당하고 해충에 뜯긴다. 작은 책 한권을 쓰고 유명해질 수 있다면, 가지고 있는 마지막 동전 한 푼까지도(그 세균의 악성은이 정도로 지독하다)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페루의 금을 모두 내놓아도 보석처럼 우아한 시 한 줄도 얻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폐결핵에 걸려 앓아눕거나 자기 머리통을 권총으로 쏴버리고 혹은 돌아누워 벽만 바라본다. 그가 어떤 자세로 목격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 P79

이 중단은 그의 인생사에서 대단히 중요하며, 사람들을 무릎 꿇리거나 강물이 핏물이 되어 흐르게 하는 수많은 행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가 왜 멈추었는지를 묻고 충분히 숙고한 후에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수없이 기묘한 장난을 쳐왔는데, 진흙과 다이아몬드, 무지개와 화강암을 조합하여 각양각색으로 인간을 만들고 이것을 종종 걸맞지 않은 상자에 채워넣는다. 그래서 시인은 도살업자의 얼굴을 갖고, 도살업자는시인의 얼굴을 갖고 있다.  - P81

그 잡동사니 전부를 어떻게든 실 한 가닥으로 살짝 엮어 놓았다. 기억이란 재봉사이고, 더군다나 변덕스러운 재봉사이다. 기억은 안팎으로, 위아래로, 여기저기로 바늘을 놀린다.
우리는 다음에 무엇이 올지, 이후에 무엇이 이어질지 알지못한다. 그러므로 탁자에 앉거나 잉크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과 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동작도 서로 무관한 수천 개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뒤흔들어 놓아, 때로는 밝은 조각이, 때로는 어두운 조각이 빨랫줄에 걸린 열네 명 가족의속옷이 돌풍에 나부끼듯 매달려 까닥이고 펄럭이다가 떨어진다. 더없이 일상적인 우리의 행위는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의기양양하게 장담했던 한 가지 일이 아니라, 펄럭이며 퍼덕이는 날갯짓과 명멸하는 빛으로 시작한다.  - P82

셰익스피어와 크리스토퍼 말로, 벤 존슨, 토머스 브라운,존 던이 지금도 글을 쓰고 있거나 바로 얼마 전까지도 써왔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올랜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영웅들의 이름을 줄줄열거하며 말했다.
그린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셰익스피어가 꽤 괜찮은 장면들을 쓴 것은 사실이라고 그는 인정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 장면들을 주로 말로에게서 가져왔다. 말로는 유망한시인이었지만, 서른 살도 되기 전에 죽은 청년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브라운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산문으로 시를 쓰려 했는데 그런 기발한 착상에 사람들은 오래지않아 싫증을 느꼈다. 존 던은 의미의 결핍을 어려운 단어로포장한 사기꾼이었다. 얼간이들은 속아 넘어갔다. 하지만 그런 문체는 앞으로 열두 달만 지나면 한물가고 말 것이다. 벤존슨을 보자면, 존슨은 자기 친구이고, 그는 자기 친구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 P92

요즘의 젊은 작가들은 출판업자들에게 고용되어 돈벌이가 될만한 쓰레기를 쏟아낸다. 셰익스피어가 이런 일의 주범이었고, 벌써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지금 시대의 특징은 젠체하는 기발한 발상과 무모한 실험인데, 그리스인들은 그런 것을한순간도 용인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이런 말을하려면 몹시 가슴 아프지만 자기 생명을 사랑하듯이 문학을 사랑하므로 - 이 시대에는 좋은 점을 하나도 찾아볼 수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고나서 그는 직접 포도주를 또 한 잔 따랐다. - P93

같은 순간에 닉 그린은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렀다. 어느날 아침 한없이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더없이 푹신한 베개를베고 누워 수백 년간 민들레나 소루쟁이 같은 잡초 하나 나지 않았던 드넓은 잔디밭을 퇴창 너머로 바라보며, 그는 어떻게든 여기서 달아나지 않으면 산 채로 질식할 거라고 생각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비둘기 소리를 들으면서 옷을 갈아입고 분수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플리트 스트리트의 자갈길에서 짐마차 말이 헐떡거리는 소리를 듣지못한다면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옆방에서 하인이 꺼져 가는 불을 되살리고 식탁에 은접시를 차려놓는 소리를 들으며, 이런 식으로 더 오래간다면 잠에 빠져들 테고(여기서 그는 입을 딱 벌리고 하품했다) 자다가 죽음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 P97

그 후로 그는 날마다, 주마다, 달마다, 해마다 변함없이 그언덕에 올랐다. 너도밤나무가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고, 돌돌말린 어린 고사리 잎사귀가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달이 초승달 모양에서 둥글게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또 보았다ㅡ하지만 독자들은 이어지는 변화를 묘사한 문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초목이 녹색에서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달이 떠오르고 해가 지는 것을, 겨울이 지나 봄이 오 - P101

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는 것을, 낮이 저물어 밤이 되고 밤이 지나 낮이 되는 것을, 폭풍우가 몰려왔다가 맑은 날이 이어지고, 한 노파가 30분이면 쓸어 버릴 수 있는 먼지 조금과거미줄 몇 개를 제외하면 자연이 2백~3백 년간 대체로 변함없이 지속되어 온 것을. 그런데 이 문단은 그저 시간이 흘렀다>(이 부분에서 얼마만한 시간인지 정확하게 괄호 안에 표기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간단한 진술만으로 훨씬 더 빨리 결론에 이를 수 있었으리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P102

하지만 시간은 동물과 식물이 놀랍도록 때맞춰 번성하고서서히 사라지게 하면서도, 불행히도 인간의 마음에는 그처럼 단순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은마찬가지로 기묘하게 시간에 작용한다. 한 시간이 언짢은 상태의 인간 마음에 머물 때는 시계 시간의 50배나 100배 길이로 늘어날 수 있다. 반면에 한 시간이 마음의 시계에서 정확히 1초를 나타낼 수도 있다. 시계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이 희한하게도 일치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보다 많이 알려져야 하고 더욱 깊이 연구할 만하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관심사가 매우 제한된 전기 작가는 한 가지 단순한 진술에 국한해야 한다. 지금 올랜도처럼 서른 살에 이른 인간에게는생각하고 있을 때의 시간은 지나치게 길어지는 반면에 행동하고 있을 때의 시간은 지나치게 짧아진다는 것이다. - P102

올랜도가 지시를 내리고 방대한 자기 장원(莊園)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데 걸린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하지만 그가 홀로 언덕에 올라 참나무 밑에 주저앉으면 그 즉시1초 1초가 둥글어지며 채워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1초 1초는 더없이 기이하고 다양한 것으로 채워졌다. 그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도 곤혹스럽게 여겼던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에 직면하여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에 잠기면 매우 길고 복잡다단하게 보였던 자신의 과거가 그 즉시, 사라져 가는 1초에밀려 들어가, 그것을 원래 크기의 열두 배로 부풀리고 수천가지 색채로 물들이며 세상의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채워넣었다. - P103

이러한 사색 (아니면 그것을 어떤 단어로 부르든간에)에잠겨서 그는 자기 인생의 여러 달을, 여러 해를 보냈다. 그가아침 식사 후에 서른 살의 젊은이로 나갔다가 저녁 식사 시간에 적어도 쉰다섯의 장년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몇 주가 지나면 그의 나이에 백 년이 더해지기도 했고, 또 몇 주가 지나면 최대 3초만 더해지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인간 생애(동물의 생애에 대해서는 주제넘게 언급하지 않겠다)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넘어서는 일이다. 인생이 아주 길다고 말하자마자 장미꽃잎이 땅에 떨어지는 시간보다도 짧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 P103

느닷없이 맹렬한 격정에 압도되어 방을 뛰쳐나갔다면, 분명무언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걱정이었느냐고 당연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사랑 그 자체만큼이나 양면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하지만 사랑을 잠시 논외로 하자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렇다.
황녀 해리엇 그리젤다가 잠금장치를 끼우려고 몸을 숙였을 때, 올랜도는 갑자기 이해할 수 없이 멀리서 퍼덕이는 사랑의 날갯짓 소리를 들었다. 멀리서 흔들리는 부드러운 깃털이 급히 밀려드는 물결, 눈 속의 사랑스러운 자태, 홍수 속의부정(不貞), 이런 수천 가지 기억을 그의 내면에 일깨웠다. 날갯짓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떨었다. 다시는 이렇게 동요되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동요했다.  - P121

그는 양손을 들고 그 아름다운 새가 자기 어깨에 내려앉게 하려 했다. 그때ㅡ끔찍하게도!
끔찍하게도! - 까마귀가 나무에서 굴러떨어지며 찢어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기는 거친 검은 날개에 덮여 어두워졌다. 깍깍 소리가 들렸고, 지푸라기와 잔가지, 깃털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모든 새들 가운데 가장 육중하고 더러운 콘도르가 그의 어깨에 거꾸로 처박혔다. 그래서 그는 방을 뛰쳐나갔고, 하인을 보내 황녀 해리엇을 마차까지 전송하게 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돌아가서 말하자면, 사랑은 두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검다. 두 개의 몸이있어 하나는 매끄럽고, 다른 하나는 털북숭이다. 그것은 두 - P121

개의 손, 두 개의 발, 두 개의 발톱이 있고, 실로 모든 부위가두 개이고 정확히 상반된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아주 단단하게 결합된 까닭에 분리될 수 없다. 이번에 올랜도의 사랑은 하얀 얼굴을 그에게로 향하고 매끄럽고 사랑스러운 몸은바깥쪽으로 향한 채 그에게로 날아왔다. 그녀는 순수한 기쁨의 공기를 퍼뜨리며 점점 다가왔다. 갑자기 (어쩌면 황녀를보았을 때) 그녀는 빙 돌아 몸을 돌리더니 검은 털투성이의야만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어깨에 떨어진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은 낙원의 새, 사랑이아니라 콘도르, 욕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달아났고, 그래서 시종을 불렀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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