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슬픔이라는 개념으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세월호와 함께 사라져갔던 단원고의 어린 학생들이우리에게 전한 이 슬픔은 우리를 스펙터클의 관객석에 ‘가만히 앉
‘아 있을 수 없게 하는 특별한 슬픔의 형식이었다. 존재를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드는 그리하여 광장으로 나서게 만드는 슬픔이었다."(61쪽)슬픔은 이렇게 혁명이 된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내가 1980년대 ‘광주‘를 통해 그랬듯이 ‘세월호‘로 존재의 지진과 정치적 각성을경험했다. 슬픔의 주체로서 광장을 메웠다. 저자가 라캉의 말을 빌려 강조하는 것은 슬픔 자체보다 슬픔을 끌고 가는 힘이다. 권력의부패와 무능이 야기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끝까지 이해하지 않기. 죽음과 상처를 쉽게 봉합하지 말기. - P205

못했다. 마음의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사무치는 나날이다. 일터 괴롭힘이든 아동학대든 학교 왕따든 성폭력이든 다수의침묵과 방조 없인 불가능하단 얘기다. 살면서 가해자가 되지 않기위해 정신 차리고 피해자가 됐을 때 대응하자며 공부하지만 시급한건 목격자로서 행동 매뉴얼, 남의 일에 간섭하고 목소리를 내는 훈련 같다.
영화 <패터슨>의 남자 주인공 직업은 버스 운전기사다. 그는 운전석이라는 공적 공간에 비눗방울 같은 막을 만들어 고요를 누린다.
사람과 주변을 관찰하고 시상을 떠올리며 짬짬이 시를 쓴다. 그의내적 세계를 함부로 터뜨리거나 침해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 생각과감정을 가진 노동하는 존재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장면은 천국 같았다. 우리 일상이 시를 낳는 공간이 되려면 똥물 같은 언사를 휘두르는 현실로부터 눈 돌리지 않고 같이 뒹굴고 치워야 할 것이다. 이제는 나도 ‘반격하는 몸‘이 되고 싶다. 시 쓰는 운전기사를 위해. - P209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강력한 첫인상은 석탄을 나르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나는 무시무시한 소음에서 비롯된다. 갱도 안에서는 멀리까지 볼 수가 없다. 램프 불빛은 뿌연 탄진에 막혀 얼마 뻗지 못한다."(53) 조지 오웰이 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한 장면이다. 1936년 영국 북부지역 탄광노동자의 실상을 기록한 오웰은 그곳은 "내가 마음속으로 그려보던 지옥 같았다" (32쪽)고 말한다.
오웰이 묘사한 지옥을 나도 보았다. 석탄 먼지 어둑한 공간을밝히는 희미한 손전등, 굉음을 내며 굴러가는 컨베이어벨트, 그 아래 수십 개 구멍에 몸을 반으로 접어 머리를 넣어 살피고 바닥에 떨어진 석탄을 삽으로 치우는 사람, 2킬로미터 넘는 동선을 오가며 일 - P210

명 ‘낙탄 작업‘을 나 홀로 처리하던 스물넷 청년은 기계에 빨려들어가 몸이 분리된 채 숨을 거둔다. 태안화력 노동자 고 김용균 씨의 사고 당일 CCTV 장면이다.

오웰은 같은 책에서, 해마다 광부 900명당 하나꼴로 사람이 죽어갔다며 오랫동안 광부생활을 한 이라면 누구나 자기 동료가 목숨을 잃는 광경을 보게 된다고 보고한다. 김용균 씨가 일하던 작업장도 다르지 않다. 태안화력이 속한 한국서부발전에서 지난 7년간 산
‘업재해로 아홉 명이 목숨을 잃었다. 모두 하청업체 노동자다.
이 통계가 섬뜩한 것은 죽음의 누적이 아닌 죽음의 허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평소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떨어진 석탄을손으로 줍지 않도록 개선해달라, 어두워서 위험하니 조명을 밝게해달라 요구했으나 번번이 묵살됐다고 한다. 이 의도적 외면은 죽어도 되는 사람과 죽지 않는 사람이 갈리는 원인이자 결과가 됐다. - P211

어머니 김미숙 씨를 보면서 오웰이 말한 ‘눈뜬 자‘의 힘을 느낀다. ‘김용균법‘으로 일컫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어머니는 누워 있지 않고 광장이나 현장에 있다. 지난 주말
‘고 김용균 3차 범국민 추모제‘에서도 다른 죽음을 막아내자고 목소리를 냈다. 안타깝게도 이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최다 추천을 받았다. "나라 구하다 죽은 위인도 이렇게 길게 추모하지 않는다. 이제그만하라."
이제 그만하라고 해야 할 것은 무고한 죽음을 양산하는 이 잔인한 체제다. 성실하게 일하다가 죽는 청년이 더는 없도록 하는게 나라 구하는 일이다. 하나뿐인 자식을 잃은 어머니 김미숙 씨는 한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모에게 자식은 햇빛이다. 그 빛을 이렇게 허무하게 잃고 나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다. 단지 이 느낌을다른 부모가 겪지 않게 해주고 싶은 게 지금의 바람이다." - P212

저자는 십수 년간 책을 만든 편집자 출신으로 시골로 거처를 옮겨 안빈낙도의 삶을 산다. 풀·새·나무 • 자연밥상 이야기가 멋들어지게 펼쳐지는데, 독서 내공이 빚은 수려한 문장력과 영혼을 정화하는 고고한 인용문에 매혹되어 책장이 막 넘어간다. 어쩔 수 없이알아버린, 살충제 달걀의 예고편이 되어버린 산란계 이야기는 "닭뿐 아니라 소와 돼지, 젖소 등의 동물에게서 사람들이 어떻게 달걀과고기와 젖을 뽑아내는지 그 실상 (13)을 차분히 들려준다.
그리고 무능한 도시주의자이자 애매한 육식주의자이며 마음만생태주의자인 내 마음을 아는 듯 실행 매뉴얼을 내놓는다. "고통의고기‘를 대량 소비하는 육식의 습관을 조금씩이라도 바꿔나가는 일,
동물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공장식 사육 방식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 일, 달걀 하나를 사더라도 좀 더 건강한 환경에서 생산된 달걀을 선택함으로써 닭들의 사육 환경을 개선시키는 일" (133쪽)이 사소해 보이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일이고 ‘꼭 필요한 연민‘이라는것이다. - P219

3년 전 친족 성폭력 피해 경험을 담은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은수연 씨를 인터뷰했을 때다. 그는 가해자로부터단절된 이후 일상의 변화를 말했다. 요즘 눈에 독기가 빠졌다는 얘기를 듣고, 시끄러운 카페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세월호 사건에 남들처럼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보면서 ‘나는 평범해지고 있다‘고 느낀다고. 힘든 과거가 불쑥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더 이상 일상이 엉망이 되지는 않는 상태를 그는 ‘평범함‘으로 규정했다.
평범한 삶을 누구는 집 안에서 찾고 누구는 집 밖에서 찾는다.
무엇이 평범함이냐, 그 뜻과 의미와 기준은 각자 다르다. 평범함이행복이고 평범하지 않음이 불행이 아니라, 평범의 기준이 나에게있으면 행복하고 남에게 있으면 불행한 거 같다. 평범함의 의미를자기 삶의 맥락에서 똑부러지게 규정하는 은수연 씨에게서 불행의그림자를 찾아보긴 어려웠다. - P254

남성, 이성애자, 대졸자, 비장애인, 기혼 출산자 등 ‘디폴트맨‘에게 세상은 수월하다. 여성보다 남성에게,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에제 화장실도 충분하다. "남성의 권력이 언어 자체에 깃들어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므로 ‘말의 민감성‘을 기르지않아도 되는 권리가 주어진다. 그래서 남자에게 남성성을 설명하려면, 비남성이 겪는 존재의 제약을 설명하려면, "물고기들을 상대로물에 관해 이야기 (63) 하는 것처럼 애를 먹게 된다.
생존의 문제다. 글쓰기부터 타로점까지 배움의 자리에 여자가몰린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언어가 절실하다는 증거다. 그 배움의종착역은 ‘디폴트맨 자리‘의 탈환보다는 제거가 됐으면 좋겠다. 남자들도 "언제나 옳아야 하고 책임지는 일을 해야 하는 데서 오는 심장병을 유발하는 스트레스를 떨쳐내고 "자기를 잘 드러내고 감정을 잘 인식하여 좋은 인간관계를 누리"는 복락을 누려야 하니까. 동시에 "여성과 소수 집단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인생 경험을 정책 결정에 반영" (5) 하려면 우선 ‘여탕의 언어‘가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와야 할 것이다. - P263

"게으름뱅이로서 나는 맹세한다.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을, 특히 몇몇 기업 양아치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려 투쟁하기로 가능한 한 스트레스가 나를 침범하지 못하게 막아내기로 천천히 먹기로 리얼 에일을자주 마시기로 더 많이 노래하기로. 더 많이 웃기로, 토하기 전에 정시근무라는 회전목마에서 내려오기로 혼자 있을 때나 남들 앞에서나 스스로 즐기기로 일이란 단지 고지서에 찍힌 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것임을 인식하기로 친구들이 힘의 원천임을 항상 기억하기로 단순한 것을즐기기로, 자연 속에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기로 대기업과 회사에 소모하는 시간을 줄이기로. 그 대신 좋은 것을 많이 만들기로, 순리를 벗어나기로. 아무리 사소한 수준이라도, 세계와 주위 사람을 변화시키기로" (영국 게으름뱅이 연합 맹세‘ 목록 중에서) - P271

《잘 표현된 불행》은 그즈음 눈에 들어왔다.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이라는 명제를 발견하곤 행복 없이 사는 훈련에 임하면서조석으로 시를 읽던 중 만난 823쪽짜리 황현산의 시 평론집이다.
"아름다운 말로 노래하지 못할 나무나 집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못할 불행도 없다. 불행도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선율 높은 박자와 민첩하고 명민한 문장의 시를 얻을 권리가 있다."(605쪽)이 책을 인식의 베개 삼아, 나는 깊이 있는 독해의 향연을 누리고 덤으로 글쓰기의 목적과 방향도 잡았다. 왜 행복하지 못할까 비탄하는 반성문이나 이런저런 조건이 충족되면 언젠가 행복해지리라는 판타지 장르가 아니라 불행의 편에 서서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하는 기록물을 썼다. 그런다고 불행의 내용이 바뀌진 않지만 ‘잘표현된 불행‘은 묘한 쾌감을 주었다. 불행에서 오는 인식과 감정의진수성찬을 발견하자 조금 행복해지는 것도 같았다. 내가 해보니좋아서, 글쓰기 수업에서 나는 불행 전도사가 되었다. - P273

이것은 잘 표현된 불행! ‘개인의 증언이 어떻게 사회의 변화에기여할 수 있나‘라는 문제의식을 담아낸 결과물에 감격하는 내게그가 말했다. "불행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불행하다 여겼거든요. 불행하다고 인정하는 순간 무너질 것 같아서 자꾸 행복한 이유를 찾는 강박이 있었고 행복을 전시하곤 했어요. 그게 꿋꿋함, 씩씩함, 밝음으로 포장되어 사람들에게 좋은 피드백을 받으니까 문제의식을 스스로 잘 의식하지 못했지만 마음 한 켠은 불편하고 헛헛했어요. 그런데 불행해도 되는 거구나 생각하니 자유로움을느꼈고, 그래도 되는구나 싶으니 운신의 폭도 넓어지고요. 그러니까불행을 이야기할 용기가 생겼어요." - P274

주부는 집 안에 머무는 일면적이고 기능적인다. 그러니 실제 삶에서 ‘락페에 온 아줌마‘처럼 지정 구역을 벗어난사람을 ‘처음 보면‘ 혼란을 느낀다. 그게 심하면 혐오가 될 테고.
나 역시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삶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인터뷰와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매번 낯선 존재와 마주하는데, 무지로 인한 긴장과 혼돈의 시간을 치르며 공부하는 중이다. 얼마 전엔 비혼모를 처음 봤다. 만남이 거듭되자 그는 "책 낸 사람 처음 봐요" 내게 말했고 "이렇게 글 잘 쓰는 비혼모 처음 봐요" 나도 고백하고 같이 깔깔댔다. 처음 보면 한 사람이 비혼모로 보이지만 자꾸 보면 비혼모는 결혼제도 외부에 위치한 상태의 설명일 뿐임이 드러나고 자기 한계와 고민을 안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입체적인존재로 다가온다. 처음 보고 계속 보는 게 관건이다. 영화처럼 서로삶이 스밀 때까지. - P278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어르신도 청년 시절엔 섬이 갑갑했다.
제주의 명문 고등학교를 나왔고 ‘서울 유학‘을 몹시도 꿈꾸었지만가난 때문에 포기했고 돈 벌러 일본을 드나들다가 결국 간첩 누명까지 썼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그의 무죄를 증명한 건 어린시절부터 그를 보아온 동창과 이웃인 제주 사람들이었다. 팔순의 길목에서 생의 한 주기를 돌아보는 그는 서울 간 친구들이 부럽지 않다며 벗이 있는 고향에서 죽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고 했다. 그 말씀에서 배웠다. 잘산다는 건 내 일상을 오래 묵묵히 지켜본 사람을 갖는거구나.
청춘의 몸은 질문을 낳는다. 1960년에 제주 청년이 그랬듯이2017년에 부여 청년이 뒤척인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이 있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나마 막막한 질문만이 숨길을 열어주고 살길로 인도한다. 근래 육지 것이자 서울 것이라는 정체성을 받아 안은 나 역시 질문의 말풍선 하나 띄운다. 육지-서울이라는 다수, 주류, 중심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 P281

"고립은 피해자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확보하는 과정으로서 가정(31쪽)폭력의 주요한 형태의 하나" (31) 라고 한다. 어디 가정폭력뿐일까. 성폭력이나 학교폭력의 경우도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피해자를 고립시킨다. 그래서 ‘세상과의 연결‘, 즉 내 존재를 남이 알게하는 것이 피해자에게는 상황을 돌파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아울러 ‘피해자‘란 어떤 일시적 상태의 명명이지 한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다. 폭력과 존엄 사이가 그들이 무자비한 국가폭력에맞서 어떻게 존엄을 지키고 살아갔는가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이주여성들의 생존담도 꼭 그러하다. "피해자의 취약성보다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도 문제 해결을 위해 참여하는 이들의 행위성을 강조한다."(187쪽)사실 그날 강연에서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살면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니 여러분도 폭력을 당하면 꼭 도움을 주는 기관이나 단체를 찾아가라고. 이런 말을 해야 하는 현실이 착잡했지만, 《아무도몰랐던 이야기>를 읽고 나니 잘한 것 같다. "폭력이 발생하기 전에폭력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건 중요하니까. - P284

내가 아는 배움의 최고 동력은 절실함이고 필수 조건은 덩어리시간이다. 당장 생존에 필요하지도 않고 놀 시간도 없는 아이들에게 글을 쓰라니 얼마나 고역일까. 자투리 시간으로 학습지 하듯 해치우는데 생각이 여물까 싶다. 6학년 학부모에게 제안했다. 어떤 점이 힘든지 아이에게 물어보고 독서록을 당분간 쉬어보라. 자기 의견과 생각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경험하게 하라. 그래야 아이에게도 의견과 생각이 형성되고 글도 잘 쓴다고 말이다.
사실 그 마음 모르지 않는다. 나도 엄마로서 아이 손에 스마트폰 대신 책이 놓여 있길 바란다. 집에 책이 널려 있으면 우연히라도손에 닿아 펼쳐 볼 텐데 무슨 몹쓸 것인 양 만지지도 않는 아이들과나는 산다. 글은 오죽하랴. 처음엔 섭섭하다가 속으로 비난했는데지금은 내버려둔다. 나는 책 읽는 엄마니까 아이 뜻을 존중해줘야지 최면을 걸다가 아이가 아직 본능이 살아 있어서 ‘거부‘도 하는구나 건강하다는 징표로구나, 해석술을 발휘하는 단계까지 왔다. - P288


"나를 방목한다/ 빈둥빈둥/ 내가 사랑하는 어슬렁어슬렁이다//속도와 움직임 다 버린다! 그냥 햇살/ 그냥 해찰이다." 저녁 아홉 시가 넘자 정장 차림의 직장인 무리가 들어온다. 그들의 신청곡일까.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흐르고 흥성흥성 말이 피어난다. 삼겹살집 지글거림이나 노래방의 왁자함이 아닌 좋아하는 노래를 골라 듣고 노래에 얽힌 사연을 곁들이는 장면은 회식이라기보다 누구도 배제되는 사람 없는 민주적인 ‘봄 회의‘
같았다. "봄과 슬픔을 투시하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 누구보다 먼저 온몸으로 발언하리." 우리는 레드 제플린을 시작으로 올드 록을 듣다가 너바나의<컴 애즈 유아Come as You Are>까지 도달했다. "센티멘털만이 서럽게 기타 줄을 튕기는 봄밤, 음악은 봄비처럼 본래 감성을 두드려 깨운다. 나를 나로 환원시키는 시간, "나도 모르는 나의 깊이"를 잰다. - P310

자유기고가로 일할 때부터 최저 원고료를 보장하지 않는 곳과는 가급적 일하지 않았다. "대중소설가가 그 출판사와 절교를 한다는 건 식량 수송로를 끊어버리는 것과 같다"(234쪽)는데, 비슷한 강도의 결단으로 버텼다. 남들 보기에 유명의 날개를 단 나는 아직도 ‘돈몇 푼‘ 갖고 싸운다. 수십 번 망설이다 그래도 말한다. 안정된 직업,
고정된 급여 없이 오직 글에서 밥을 구하는 노동자를 위해.
글은 정자세로 앉아 시간을 바치지 않으면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목뒤부터 어깨를 타고 손끝까지 흐르는 저림을 겪으며 문장의길을 터나가야 한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을 수 없는 직업이지만 그미련스러움 때문에 내 일이 좋다. 새해를 맞아 순정하게 다짐해본다. "두부 장수가 두부를 만들듯이 성실하게 규칙적으로 아름다운것을 써나가고 싶습니다." - P320

이 자리에서 일일이 나열할 수 없지만, 수 많은 잘못을 저지른 삼성을 정부가 한 번 제대로 처벌해본 적이 있냐고 묻고 싶어요.
또 하나의 가족은 없다. 지금까지 삼성그룹에서만 320명의 직업병 피해 제보가 있었고, 118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3년엔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에어컨 수리기사로 일하던 서른두 살 최종범 씨가
‘노조 인정‘을 요구하며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유가족인 형은 말한다. "삼성 조끼를 입은 동생의 자부심도 컸습니다. (.…) 동생은 개처럼 일했습니다. 스스로를 ‘여왕개미‘(삼성)를 먹여 살리느라 죽어나는 일개미라고 동료들에게 말하곤 했습니다."(25) 그로부터 7개월 뒤,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센터 분회장도 노조를 인정하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P333

나는 노조 사무실에 한 시간 일찍 출근해 기타 코드 어설프게 잡아가며 시간을 보냈다. 자격증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왜 그토록 열심을 다했는지 설명할 순 없지만, 사랑과 신념이 가슴에 출렁대던 시절임은 분명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원칙과 사랑의 원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의 급류에서 부서진 삶을 복구하는 사람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사랑의 원리를 깨우쳤다. "삶은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은 무시되고, 개개인은 고립된 채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두"(111쪽)도록세상이 우리를 길들이고 있기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 P342

무모하게 시간을 보낸 것들만 곁에 남아 있다. 무던한 사람, 철 지난노래, 변치 않는 신념, 짠 눈물 같은 것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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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22-11-02 11: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산님께서 적어 주신 오늘의 한문장 덕분에 오늘 제 하루는 충분히 ‘선물‘이 되었습니다.
어쩜 이렇게 주옥같은 문장들을 캐내셨는지요.
십 년 전, <올드걸의 시집>으로 처음 은유 작가를 만났던 그때의 기쁨이 되살아나네요.
그래도 그때는 지금보단 좋은 시절이었다 생각이 듭니다. 요즘 세상은 아수라장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22-11-02 14: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선물‘이 되었다니... 고맙습니다.
고단하고 시끄러운 시절에
은유 작가의 문장들에 매혹당하는 요즘입니다.
세상이 ‘아수라장‘ 맞아서
서글픕니다.
 

우리 엄마도 아픈 자식 얘기를 어디서든 후련하게 할 수 있었으면 울화가 풀렸을까. 조금 더 오래 살았을까. 동준 군 어머니 말씀에서 엄마가 감내한 외로움의 크기를 짐작한다. 피붙이인 나도 감정노동을 거부했다. 나 역시 인생 최대의 난국을 보내는 중이어서 같이 무너질까 봐 엄마를 더 피했다. 만약 어느 자리에서든 엄마가 위축되지 않고 괜찮은 척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슬픔을 떠들었다면, 듣는 사람들이 동정이나 입막음이 아닌 토닥이는 눈길로 들어주었다면 적어도 ˝자신의 존재가 통째로 세상에서 삭제되는 ‘시선의 차별˝을 겪진 않았을 것 같다.
동준 군 어머니는 자식이 그리울 땐 가끔 기사를 검색해 읽는다고 했다. 그렇게 아이를 기억하는 게 슬프지만 그게 세상과 자식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인 것이다. 아이가 허술한 시스템에 의해서 죽었고, 그렇게 자식을 보낸 사람들은 아이를 배려하지 못한 세상과사람에 대한 분노가 있다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우리 엄마의 친척이, 동준 군 어머니의 친지가 그랬듯이 ˝악의없는 농담과 별생각 없는 자랑˝에 차별의 싹이 숨어 있다. ˝사회적으로 낙오자도 사회적 부적격자도 아닌 ‘선량한 시민‘인 그들이 차별 감정을 생산하고 있다.˝ 이처럼 ‘악독한 권력자‘가 아닌 ‘선량한 시민‘에 의해 생산되는 차별 감정이기에 이것을 해결하기가 어렵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방법은 이것이 유일하다. 자기 안에 숨은나태함, 눈속임, 냉혹함과 끊임없이 싸우기. ˝나는 차별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빠져 있는 한, 나는 ‘옳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한, 사람은차별 감정과 진지하게 마주할 수 없다.˝
어김없이 돌아온 슬픔의 달 4월, 타인의 아픔을 알아채지 못하는 나의 나태와 둔감을 경계하며 세월호에서, 세월호만큼 위태로운일터에서 침몰당한 이들과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생각한다. 그들은어떤 표정을 지으며 숱한 자식 이야기가 오가는 그 쓸쓸한 자리를견뎠을까. p196,197



또 다시 이런 일이......
먹먹하다.
가을볕도 슬프다.




 "행복이란 거의 없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노년에 자신의생을 되돌아본 많은 위인들은 자신들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합쳐보아야 채 하루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 <길 위의 철학자》의 저자 에릭 호퍼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지 불행해지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듯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충족은 또 얼마나 금세 냉소로 식어버리는가. 읽고 쓰고듣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나는 삶의 ‘행복 불가능성‘을, 즉 그냥살아감 자체를 받아들였다. - P141

에릭 호퍼는 이런 통찰도 내놓는다. "우리는 일이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이 세상에는 모든 이들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 (190) 일이 의미 있기를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몰염치‘라고 했다는 조지 산타야나의 말까지 덧붙이면서, 삶의 유일한 의미는 배움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에릭 호퍼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떠돌이 노동자 출신의 사상가다. 도스토옙스키나 몽테뉴의 저서를 거의외울 정도로 읽었고, 글을 쓰면서는 "제대로 된 형용사를 찾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51)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무모함, 빠져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부어댈 때 잠깐의 흘러넘침, 그것이 사유의 결과물로 손 - P141

에 쥐여진다. 이 아름다운 낭비에 헌신할 때 우리는 읽고 쓰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부디 그 이공계 학생이 한번의 강좌, 몇 번의 시도로글쓰기에 좌절하고 물러나지 않았으면 한다. - P142

나는 작가라는 말이 여전히 어렵다. 뜻과 범주가 모호하다. 행위인지, 직업인지, 자격인지, 욕망인지, 존재 그 자체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글 쓰는 사람‘으로 내 꿈을 구체화하고 실천했다. 주변에서는 작가로 활동하려면 문창과나 국문과를 늦게라도 가라고 권했지만,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자격 요건을 갖추기보다 일단 쓸 수 있는 걸 쓸 수 있는 데에 썼다. 블로그에 에세이를 쓰고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등록해 활동했다. 본 것, 들은 것, 한 것을쓰다보니 그게 사실과 경험에 기반한 논픽션이었다. 논픽션 분야는등단 제도나 절차가 없으니 내가 작가가 됐는지 안 됐는지 가늠할척도가 없었다. 그게 속 편했다. 작가라는 긍지 없이, 작가가 아니라는 결핍도 없이 쓸 수 있었다. - P144

작가를 꿈꾸는 학생에게 말했다. "쓰고 싶으면 빨리 쓰세요. 작가는 쓰는 사람이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문창과간다고 작가의 길이 보증되고 경영학과 간다고 그 길이 봉쇄되진않는다. 가장 큰 장벽은 부모의 반대가 아니라 자기생각의 빈곤이다. 자꾸 몸에 들러붙는 생각, 솟아나는 얘기, 복받치는 불행이 아니라면 무엇을 쓸까.
"나는 우리나라의 하고많은 불행을 보아왔다. 내가 보는 가난ㅡ나는 그걸 외면할 수가 없다." (129쪽)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창작 동력은 ‘하고많은 불행‘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현장을 지키면서 고통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나는 그들 책에서 큰 자극을 받는다. 하고많은 불행의 언저리를 서성이다 보아버린 것을 쓰고자 노력한다. - P145

작가가 되려면 얼마나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도 곧잘 나온다. 나는 네루다의 이 시를 읽어주고 싶다. "내가 책을 덮을 때 나는삶을 연다! 책들은 서가로 보내자, 나는 거리로 나가련다/나는 삶자체에서 삶을 배웠고, 단 한 번의 키스에서 사랑을 배웠으며/ 사 - P145

람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의 말을 내 노래 속에서 말하며 그들과더불어 산 거 말고는 누구한테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었다. " <책에 부치는 노래 1> 중에서, 96쪽) - P146

하시 ㅊ읽고 쓰고 말하고 고치기의 반복. 이 고된 노역을 우리는 왜 자처하는가. 글쓰기의 목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정리해본다.
삶이 고차함수인데 글이 쉽게 써지면 반칙이다. 정확한 단어와 표현을 고심하다 보면 자신을 스스로 속일 가능성이 줄어들고, 몸을숙여 한 사람의 내면의 갱도에 들어가는 훈련으로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모든 사물과 현상을 씨 - 동기 -로부터 본다" (김수영) 는 것,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타인의 처지가 되어보는 일, 사람살이에 꼭 필요한이것을 교육받을 기회가 드물었던 우리는 글쓰기를 핑계 삼아 공부하고 있다. 꼰대 발언, 혐오 발언이 승한 시대에 말을 지키는 것은나를 지키는 것이기도 하니까. - P149

부모와 산다고 다 행복하지 않듯이 부모가 없다고 꼭 불행하지않다. 복지시설에서 사는 열다섯 살 아이의 비밀이 아픈 것이지, 그아이의 삶 자체가 슬픈 것은 아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고 아이돌 좋아하고 친구들이랑 싸우고 떠들고 치마 기장 줄이기에 연연하며 핸드폰 카톡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은 또래 아이와 다르지 않다. 부모의 부재를 무조건 동정하거나 차별하는 시선만 아니라면 아이가기죽을 일도, 거짓으로 둘러댈 일도 없다.
한 아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타인의 돌봄이다. 그 타인이꼭 부모일 필요는 없다. 부모이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인간은 나 - P162

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다. 자식을 낳는다고 남을 돌볼 수 있는 육체적·정신적·경제적 상태가 자동으로 세팅되지는 않으며 세팅되었다고 한들 영원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아이는 무조건 친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혈연을 강조하고 모성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는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128쪽).
한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신체적 온전함과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후원금을 척척 내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부모님 뭐하시느냐‘다짜고짜 묻지 않는 어른이 많아져야 하고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생겨야 한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굴레를 씌우고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가족이라는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 P163

그날 우린 깔깔대다가 같이 울었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실화.
구토가 치미는 정도의 기억. 가부장제 생존자의 증언은 왜 언제나새롭고도 새삼스러운가. 한 사람이 물꼬 터주면 "삭히거나 잊어야 하는 줄만 알았던 자신의 이야기 (278쪽)를 너도나도 꺼내놓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참고 또 참는 사람, 남자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않는 사람, 남자와 아이들에게 궁극의 편안함을 제공하는 사람. 자기 욕구를 헐어 남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 자기주장이 없거나 약하므로 갈등을 일으킬 일도 없는 사람" (51쪽)으로 길러졌으나 이제 그런 자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으로 변신한 한 존재가 있다. 그저 말하고 있음. 단지 말하고 싶음. 나는 말해야겠으므로 쓰인 소설 한 권,
여성들의 삶을 정가운데로 놓은 이야기가 있어 참 다행이다. - P174

사건의 핵심 명제, 성폭력은 강자가 가까이 있는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것. 토르디스를 성폭행한 것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듯이, 내가 본 성폭력 피해자 가운데 90퍼센트는 아는 사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아버지, 삼촌, 이모부, 오빠, 선배, 친구, 담임선생님, 교수, 직장 동료, 남편 등등. 그들은 힘으로든 돈으로든지위로든 피해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이렇게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로부터의 폭력이기에 여파가 크다. 피해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바로 알아차리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토르디스는 말한다. "나는 네가 나한테 한 행동이 강간이라는 걸 몰랐어.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상처가 컸는데도 말이야." (192쪽) 가까스로 인지한 다음에는 가해자가 아니라 자기를 혐오한다. "첫 이성 관계에서 참혹하게 실패한 후로 나는 스스로의 판단을 믿을 수가 없었다." (23) 이는 피해자들이 공통으로 겪는 아픔이다. - P176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면, 왜 수년이 지났는데 지금 말하느냐는 반응부터 나온다. 시간은 만인에게 공평하게 흐르지 않는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제 겨우 말하는 것이다. 친척에게 17세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열일곱 스물일곱, 서른일곱 등 10년 단위로 악몽에 시달렸다. 그해마다 몸이 아팠고 일상이 무너졌다고했다. 고등학생 때 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그 오빠의 딸이 결혼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복수를 꿈꾼다. 조카의 결혼식장에 찾아가서 ‘사실을 폭로하는‘ 상상을 한다. - P177

《용서의 나라》를 읽는 내내 분노하고 의심하다 안도했다. 성폭력 사건이 믿기지 않는 것만큼 용서의 귀결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저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가능하게 되어가는 장대한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는 성폭력 사건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용서는 신이 지급하는 쿠폰이 아니고 인간의 용기를 거름 삼아 자라는 나무라는 것. 가해자와 피해자,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용기 내어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살아 있음 자체가 용기다. "삶은 계속된다. 한껏 이용하라. 네가 가진 게 별로 없다 해도 삶만은 네 것이다."(451쪽)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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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기회에 관심이 많다. 이제껏 사랑을몇 번 해봤느냐는 물음을 실없이 던져보기도 한다. 상대는 거의 머뭇거린다.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의 기준 설정부터 간단치 않은 거다.
내게 사랑은 나 아닌 것에 ‘빠져듦‘ 그리고 ‘달라짐‘이다. 우연한 계기로 엮여 서로의 세계를 흡수하면서 안 하던 짓을 하거나 하던 짓을 안 하게 되는 일, 연애가 그랬고 공부가 그랬다. 이전과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계기적 사건이 사랑 같다. - P87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사랑은 없다."(151쪽) 사랑은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치 않다는 점에서 쉽고,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다. 그러니 사랑을 얼마나 해보았느냐는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당신은 다른 존재가 되어보았느냐. 왜 사랑이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비활성화된 자아의 활성화가 암울한 현실에숨구멍을 열어주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존재의 등이 켜지는 순간사랑은 속삭인다. "삶을 붙들고 최선을 다해요." (123쪽) - P91

평생 아픈 몸을 살았다.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자기 고통에 매몰되어 살았기에 타인의 고통을 좀처럼 보지못했음을 그는 뒤늦게 자각하고 반성했다. 하지만 그토록 혹독한고통의 시간을 살아온 그이기에 배제와 차별, 불의와 불공정에 대한 남다른 예민함을 지녔을 것이다. 읽고 쓸 때 단어 하나 잣대 삼아자기 생각의 크기를 재어보고, 책 한권 거울삼아 자기 일상의 태도를 점검했던 그의 영전에 책 한권을 놓아드리고 싶다. - P95

‘노키즈존‘이라는 말을 보고 철렁했다. 개인의 시간과 공간이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내세우며 식당이나 카페에서 아이들 출입을 금한다는데 그 논리가 옹색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시공간을 침해하면서 어른이 됐다. 여전히 힘 있는 어른들은 자기보다 약한 자의 시공간을 임의로 강탈하면서 자기를 유지한다. 왜 아이들을 대상으로만 권리를 주장하는 걸까? 그래도 되니까 그럴 것이다. 나 역시 양육의 책임을 나누지 않는 어른(배우자)에게 가야 할 원망이 애꽃은 아이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곤 했으니까. - P100

인간사회는 민폐 사슬이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사회성을 갖는다. 살자면 기대지 않을 수도 기댐을 안 받을 수도 없다. 아기를 안고 공부에 나선 엄마처럼 폐 끼치는 상황을 두려워 말아야 하고 공동체는 아이들을 군말 없이 품어야 한다. 배제를 당하면서 자란 ‘키즈‘들이 타자를 배제하는 어른이 되리란 건 자명하다. 건강한 의존성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관계에 눈뜨고 삶을 배우는 어른이 될 수 있다. - P100

동한다‘로아무려나, 제 몸 써서 일한 사람들이 갖는 삶에 대한 통찰력, 남의 몫 가로채지 않고 자기 손 놀려 ‘저금통‘ 같은 갯벌 일구어 살아온 이들의 가뿐함, 그 와중에도 기역자로 굽은 허리를 펴 "누부리7곱과(노을이 고와) (98) 라며 감탄할 줄 아는 우아함을 배운다. 이 책의최고령 97세 소무의도 윤희분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농땡이가최고야. 젊어서 일 많이 하지 마시오. 늙어서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했어. 젊었을 때는 뼈가 나긋나긋하니까 물불 안 가렸지, 농땡이가 최고야." (220) 짐승처럼 일하다가 벌레처럼 작아진 몸피에서 나온 사리 같은 말, 인간다움을 추구하기에 너무도 혁명적인 그 입말을 곱씹는다. - P104

‘엄마표 김치‘라는 말이 그리운 말에서 징그러운 말이 되어간다. 엄마의 자기희생이 강요된 말,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자들이 계속 받아먹기를 염원하는 말이다. 어느 소설가의 문학관에는 대하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한 볼펜과 원고지가 탑처럼 쌓여 있다고 하는데, 엄마들이 평생 담근 김치와 사용한 고무장갑을 한눈에 쌓아놓으면 어떤 붉은 스펙터클이 나올지 상상해본다. 어머니가 해주신밥과 김치 먹고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 가시화되지 않는이상한 노동, 피와 살로 스며서 똥으로 나가버리는 엄마의 땀. 부불노동unpaid work 으로서 가사노동의 불꽃인 김장.
한 동료의 엄마는 여든 살을 맞아 김장을 안 한다고 선언했다고한다. 늦은 은퇴다. 엄마들의 잇단 김장 파업 선언에 김치 난민이 속출하는 또 다른 겨울 풍경을 그려본다. - P107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어머니의 은혜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통이어야 했다. ‘평생 밥 당번‘으로 사느라 뼈가 녹는 고충을 당사자들은 제대로 말하지 않았고,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 고통을 남들이 먼저 알아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 고통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하면 나쁜 어른으로 오래 늙는다. 살면서 제대로 배운 적 없지만 살면서 너무도 필요한 일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라는 걸 절감하던 나날에, 참고서 같은 책이 내게로 왔다.
"어린 나는 엄마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생각할 수 없었고,
엄마의 내부에서도 무너지고 있는 게 있을 거라고 마음 쓸 수 없었다. (…) 꼬박꼬박 월급을 가져다주는 건실한 남편과 크게 속 썩이지 - P109

않는 아들딸을 두고도 그럴 수 있다. 그런 걸 이제 나는 안다. 나는엄마의 삶을 이해하려고, 배웠다. 배운 사람은 그런 걸 이해하려는사람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13)시인 김현이 쓴 《걱정 말고 다녀와》라는 산문집이다. "엄마가술에 취해 내게 전화하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시작하는 이 책은 술에 취한 (아빠가 아니라) 엄마라는 낯선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엄마가 되어본 것처럼, 저자는 다른 존재가 가까스로 되어본다. 애인의입장이 되어보고, 그날 보았던 한 남자의 입장이 되어보고, 카페를환하게 밝히는 어린 연인들의 입장이 되어보고, 오래된 수습사원이되어본다. 그리고 퀴어퍼레이드에 와서 북치고 고함치며 남의 축제를 방해하는 혐오세력의 입장이 되어본다. - P110

"아마도 스스로를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며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도 지친 몸으로 애인을향해 갔을 것이다. 그는 애인과 뽀뽀했을까.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얼굴로 애인의 얼굴을 마주 보고 그날 자신이 보낸 ‘혐오의 하루‘를 말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뽀뽀하기 위한 하루의 얼굴‘을 어디 감히그런 얼굴 따위가 이길 수 있으랴. 나는 뽀뽀하는 사람으로서 모든혐오와 차별에 반대한다." (42)자신을 뽀뽀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하고 혐오세력의 뽀뽀 불가능성을 예측하는 장면은 통쾌하고, 글을 마무리하며 켄 로치의 영화 <다정한 입맞춤을 인용하는 대목은 진실의 무게로 묵직하다. 가 - P110

만히 응시하고 넌지시 되어보는 이야기를 풀어놓다가 켄 로치 영화를 막판에 무심하게 곁들이는데, 그것이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처럼 절묘하게 본문과 들어맞는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부제가 ‘켄 로치에게‘다.
"그의 영화는 보는 이에게 요청한다. ‘그들의 애인이, 그들의 가족이, 그들의 친구가, 그들의 동료가 되어보십시오. 그러니까 그들이 되어보세요.‘ 이때의 되어보기는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라는 가상 체험이면서 동시에 나는 과연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를되돌아보는 현실 체험이다."(119) - P111

켄 로치의 ‘되어보기의 망토‘가 공용화되는 세상을 상상했다.
밥 먹는 사람이 밥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이때의 밥하기는여유 있게 놀다가 모처럼 하는 일회성 노동이 아니라 삼시세끼를차려내는 노동이 수십 년간 누적된 상태에서 중단 없이 이어지는반복성 노동이며, "견딜 수 없는 기분과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감정이 때때로 찾아왔"(13쪽)을 때에도 몸을 일으켜 차려야 하는 모진노역이다. 숟가락 하나 더 놓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고 입맛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이런 찬찬하고 총체적인 ‘되어보기‘란 어떻게 가능할까.
"켄 로치의 재현은 많은 경우 본 것을 다시 보라고 요청한다" (36쪽)고 김현은 전한다. 엄마에게서 엄마를 지우고 한 인간으로 다시 보고, "가장 빨리 미화되고 가장 느리게 진상이 밝혀지는 가족에의 환상"(103)을 차분하게 마주하라는 충고다.  - P112

정확하게는 세월호 유가족 인터뷰집 《금요일엔 돌아오렴》의 문장들이 생각난다. 내 평생 목도한 비참의총화,그 불가해한 사건의 실체를 나는 이 책으로 이해했다. 번호가 매겨진 희생자가 아닌 한 명한명 아이들이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었다.
는 건 어떻게 실감하는지, 슬픔이 정수리까지 꽉 찬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얼마나 휘청이는지, 대체 어떤 사건이 일어난 건지 부모들은 소상히 들려준다.
"전화로 미지 엄마한테 속옷서부터 팬티까지 얘기했지. ‘겉옷은무슨 색인데 이게 맞냐‘ 그랬더니 ‘맞다‘. ‘속옷은 땡땡이 입었는데이거 맞냐‘, ‘맞다‘. ‘팬티는 줄무늬에 뭐가 있는데 맞냐‘, ‘맞다."(54)미지 아버지 유해종 씨는 사고 한 달 만에 속옷 무늬로 딸의 시신을찾는다. 죽은 아이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물. 무늬도 색깔도크기도 제각각인 속옷은 아이의 몸과 취향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표지이자 엄마와의 내밀한 연결을 매개하는 유품이 된다. 아마도 미지 어머니는 일 인분만큼 줄어든 빨랫감에서, 보이지 않는 땡땡이무늬의 속옷에서 딸의 부재를 두고두고 실감할 것이다. - P116

소연 아버지 김진철 씨는 아이가 세 살 때부터 "도둑질만 안 하고" 다 해가며 홀로 아이를 키운 한 부모 가장이다. 세상에 딸하고나 둘만 남겨졌는데 잃은 그 아이, 딸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 왔을 때소포가 와 있었다. "풀어보니 소연이가 인터넷으로 산 책들인듸 소설책과 참고서였어유. 그걸 보고 엄청 울었네요. 그 책들을 샀을 때 - P116

는 열심히 살려고 그런 거 아니여유. 근디 죽어버렸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겄시유." (96쪽) 그 책들은 결국 딸의 친한 친구에게 주었다고나온다. 짧게 언급된 한 줄 문장. 나는 그 행간에 오래 머물렀다. 너무 빨리 간 아이의 너무 늦게 도착한 책들을 안고 오열하는 아버지.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책들을 건네주고, 살아 있는 딸의 친구를 보면서 부러움에 눈물짓고 소주를 들이켜다 쓰러져 잠들었을 아버지의 동선을 끝말잇기 하듯이 더듬더듬 그려보았다. 유통기한 없는 슬픔의 효소는 얼마나 오래 아버지의 술잔을 채웠을까. - P117

슬픔은 이토록 개별적이고 구체적이고 성가시고 집요하고 난데없다. 예습과 추론이 불가능하고 복습과 암기로 공부해야 하는과목이다.
나는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글쓰기 수업 교재로 자주 쓴다. 한국사회 모순과 부조리를 보여주는 사회학 교과서이자, 삶을 질문하게 하는 철학서,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다루는 문학 작품으로 더없다. - P117

"끼니는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더 이상 절약할 곳이 없다고 느꼈을 때 나는 세미나 뒤풀이 모임에 빠지기 시작했고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15)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을 경우, 메뉴와 가격을 선택하는 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195帝)
‘우리 때‘와 달리 혼밥이 왜 그리 유행하는지 잘 몰랐다. 요즘 청년들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스펙 관리만 하느라 밥도 혼자 먹고 깍쟁이처럼 뒤풀이도 안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500원, 1000원이 고민거리가 되는 "굶주림이 익숙해진 삶을 채무자-대학생은 피할 수 없었다. "밥 한 끼에 마음 졸이며 눈치를 보는 삶 속에서 음식뿐만 아니라 생활의 전 영역에서 스스로 단속하며 살아간다."(196) - P123

 나는 가난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틀에 박힌 말로 위로했는데 저자는 나은 답을들려준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는문화가 부끄러운 것이다."(102쪽)

가난은 상대적이나, 한 존재에게서 중요한 것들을 뺏어간다. 밥부터 포기시키고 밥이 매개하는 관계와 건강을 무너뜨린다. 가난은말을 가로챈다. 감추고 싶은 것은 강제로 노출시키고, 말하고 싶은것은 들어주지 않는다. 먹고살기 바빠 일일이 사정을 말할 기회가없다. 설명도 간단치 않다. 저자처럼 수년을 공부하고 책 한권 분량의 구조적 분석을 마쳐야 제대로 이해시킬까 말까다. - P124

모든 존재의 행위는 저 살려고 하는 일. 여성학자 벨 훅스가 말한 ‘감정적 자기 절단‘이 남자들 생존에 유리한 시대가 있었다. 그긴 세월 부작용이 일상의 폭력을 낳았음을 미투 운동이 증명한다.
미투 운동이 일자 술렁이는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은 잠잠했다. 참회하느라 그런다, 켕겨서 그런다, 조심하느라 그런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내가 볼 땐 몸치처럼 주춤했던 거 같다. 타인의 고통에 깊게개입하고 슬픔의 장단을 맞춰본 적이 없기에 언제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 - P127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 얼마 전 본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 P128

삶은 늘 우리의 경험과 인식을 초과한다. 문학으로 타인의 삶을상상할 수는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왜 결혼생활 10년이 넘도록 잘참다가 하필 그날부터 호텔로 갔는지, 기껏 가놓고 왜 그 방에서 아
‘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결혼 전 광고회사에서 일했던 ‘스마트한 여
‘성‘인데 어째서 이혼하지 않고 지리멸렬한 결혼을 이어갔는지, 매사합리적인 언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설명 불가능하다. 문학의 언어는 보여준다. 스스로 전개되는 삶을 통해 합리와 이성으로 기획된 세계의 빈틈과 모순을 드러낸다. 그래서 《19호실로 가다》의 첫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수 있다."(277쪽) - P131

"밥 안 해놓는다고 자주 갈등 겪어, 잠자던 딸 둔기로 살해한 아버지". 어느 기사 제목이다. 노예제 사회도 아니고 2018년 1월 19일에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니 믿기질 않아서 몇 번을 읽었다. 여자가 여자라서 화장실 가다 죽고, 안 만나준다고 전 애인에게 죽고, 밤늦게다닌다고 남편한테 죽고, 미용실에서 일하다 죽고, 술자리에서 희롱당하는 뉴스가 연일 터지는 와중에 유독 충격이었다.
나는 밥에 대한 글을 참 많이 썼다. 뇌의 반이 밥(걱정)으로 차있어서다. 누구나 자신이 속박된 주제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 밥얘기를 쓰면서도 스스로 검열했다. 글감치고는 시시한 거 아닌가, 그깟 밥이 뭐라고, 나라의 명운이 걸린 것도 아니고…… - P132

여성혐오로 인한 죽음, 그리고 성폭력 피해는 주식 시세나 날씨처럼 매일 생산되는 뉴스다. 한샘 기업 내 성폭력 사건이 폭로된 게불과 몇 달 전이고,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진 게 2년전이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서 서사가 되지 못한 채 눈송이처럼흩어져버린 힘없는 여성 피해자들 이야기는 반도의 땅 곳곳에 설산을 이루고도 남는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페미니스트가가리키는 여성이 처한 현실의 참담함이다. 여자는 밥하려고 태어나지 않았고 꽃처럼 꺾어도 되는 존재가 아닌데 밥 안 한다고 죽이고꽃 꺾듯 존엄을 꺾어버리는 무수한 사건들에도, 우리는 계속 놀라고 말리고 떠들고 분노해야 한다. - P134

난 그에게 공감 훈련을 위해 자신과 대화해보기를 권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라고 니체가 일갈했다시피, 가장 먼 타인인 자기 삶부터 들여다보고 자신과 소통을 시도하는 거다.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느낄 때 ‘왜?‘라고 질문하고, 좋음이란 무엇인지, 그것이 돈인지 관계인지 가치인지 정확하게 따지면서 글로 써보자고.
추상적인 다짐이 아닌 구체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 복기해보면자기 감정과 생각. 욕망의 여러 층위와 갈래가 보이고, 나라는 사람은 하나로 정리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자기에대해 섣불리 장담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서 타인도 함부로 재단하기 어려워진다. 조심스러워지는 일은 섬세해지는 일. 그렇게 내 판단을 내려놓고 남의 처지가 되어보는 게 공감의 시작이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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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사람의 말들이 내게로 온다. 한번은 역전 식당에 국밥 한그릇 먹으러 들어갔는데, 독상을 받아놓고 밥을 먹는 내 등 뒤로 주방 이모와 주인아주머니의 구성진 남도사투리가 윙윙거렸다. 스마트폰으로 행선지인 도서관 위치를 찾던 나는 한 대목에서귀가 번쩍 뜨였다. "그 여자가 얼마나 예쁜지 가을 고등어처럼 반짝반짝해야."
‘가을 고등어!‘ 나는 얼른 지도창을 빠져나와 검색창을 열었다.
‘가을 고등어 낚시‘가 연관 검색어로 뜬다. 가을 고등어는 다른 계절에 비해 지방이 올라 고소한 맛이 극에 달한다고 한다. 물오른 등 푸른 생명체라니. 싱그러운 말의 파동이 그대로 전해왔다. - P5

글을 써도 고통스럽고 글을 안 써도 고통스럽다. 그러면 쓰는게 낫다. 뭐라도 하다 보면 시간이 가니까. 슬프지만 일을 하고, 슬픈데도 밥을 먹고, 슬프니까 글을 쓴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으면 내일도 살 수 있다. 서툴더라도 자기 말로 고통을 써본다면 일상을 중단시키는 고통이 다스릴 만한 고통이 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우리뭐든 써보자고 하면 저마다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다. - P6

아름답거나 아릿하거나, 날카롭거나 뭉근하거나 타인의 말은나를 찌르고 흔든다. 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서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조금은 된 것 같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내가 편견이 많다는 사실을 안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어도 이 모양인가 싶어 자주 부끄러웠다.  - P7

핍보다 과잉이 들야 온전히 들리기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서는 일이 잘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동안 성급한 추측과 단정, 존재의생략과 차별에 대한 예민성을 기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삶을 담아낼 어휘는 항상 모자라고,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는 것. 이 예정된 말의 실패에 대해 황현산은 《말과 시간의 깊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제 정신에 들어있는 내용을 말로 소통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말이 그 정신 내용을 다소통시키는 것은 아니다. 말은 복수의 인간을 상정하지만, 정신에는 한 개인에게만 특수하게 해당되는몫이 항상 남아 있다."
나의 편견을 확인할 때마다 나의 소망은 구체화됐다. 모두를 설득하는 글보다 "한 개인에게만 특수하게 해당되는 몫"을 놓치지 않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 P8

"한 사람 한 사람 대단해 보여요." 같은 고백들. 물증은 없지만 말하자면 그렇다. 본디 글쓰기에는 한 사람 인격의 최상의 측면이 발휘되는 속성이 있다. 그 글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잡아준다. 한 사람을사연과 이야기의 존재로 바라보면 존경스럽다. 나는 길에서 만나는사람들을 틈틈이 관찰한다. 야쿠르트 아줌마, 버스 운전기사, 학원가는 아이를 보면서 저이는 어떠한 삶의 사정과 행로를 거쳐 지금여기에 있을까 상상한다. 한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적어도 무작정 혐오하기는 어렵다. 누구라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서로 아무런삶의 연결고리가 없을 때 더 쉽게 혐오하지만, 서로의 삶이 한 자락이라도 섞이면 이해하고 공감할 여지는 꼭 생긴다. - P9

그런 측면에서 글 쓰는 일은 좋은 직업 같다. 나는 인터뷰를 하고 글쓰기 강의를 진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깊고 내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삶을 위무하고 지혜를 안겨주는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선물 받는다. 혼자만 알기 아깝다. 이야기 전달자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소설가 위화도 "작가란 집시들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돈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 P10

그렇게 불확실한 날들을 10년쯤 보내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그어정쩡함이 글쓰기의 동력이었음을. 글 쓰는 일은 질문하는 일이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고 혼란스러워야 사유가 발생한다. 좋은 글이란 무엇인지, 아이가 잘 큰다는 것과 좋은 엄마가 된다는 건 어떤건지 온통 혼란스러웠고 그럴 때마다 하나씩 붙잡고 검토하며 써나갔다. 쓰는 과정에서 모호함은 섬세함으로, 속상함은 담담함으로 바뀌었다. 물론 글쓰기로 정리한 생각들은 다른 삶의 국면에서 금세헝클어지고 말았지만, 그렇기에 거듭 써야 했다. 어차피 더러워질걸 알면서도 또 청소를 하듯이 말이다. - P18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라는 니체의 말대로, 불확실한 삶의 긴장 상태는 글쓰기 좋은 조건이라고, 우리는 또 대부분 그렇게 산다. 주변을 봐도 고시 합격생보다는 준비생이 많다. 고액 연봉에 승승장구하는 직장인보다는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노동자가 다수다. 연인 관계도 팽팽한 사랑 감정을 느낄 때보다 지리멸렬하고 느슨해서 친구인지 가족인지 헷갈리는 시기가 길다. 그러니 어정쩡한 상태를 삶의 실패나 무능으로 여기지 말자고 했다. - P19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 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1574) 구원은 과거에 있다. 엄마가 되면서 상실한 ‘아이적‘ 감각을 복원하기. 이를 위해서는 엄마가 쓴 자식 양육서를 읽느니 딸이쓴 엄마 이야기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환경운동가이자 작가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앞부분에 나오는 엄마의 이 - P24

야기는 그런 점에서 귀했다. 사실 딸의 금발과 눈썹을 질투하는 엄마는 보편적이지 않다. 전래동화 캐릭터처럼 오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기심이라는 "감정을 이성적 명분으로 바꾸고 명분을사실로 바꾸는" 어머니, "내 삶에 분노를 쏟아내는" "나를 단한 번도 알아보지 못한" 저자의 어머니는 내 모습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나도 종종 딸을 향한 불안함이라는 감정을 기정 사실로왜곡할 때가 있고, 나의 풀리지 않는 화를 아이에게 퍼붓기도 한다.
보고 싶은 면에만 초점을 맞추니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으로 ‘연구 대상‘ 엄마를 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딸의 지적여정을 함께 하고 난 후, 나의 꿈은 정교해졌다. 스스로 좋은 엄마라고 착각하지 않는 엄마 되기, 아이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을 수시로그려보기. 그저 고양이처럼 말없이 아이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 P25

좋음과 나쁨의 전복이 아닌 규범의 용도 폐기. 누구도 소외되지 않으니 배려도 필요치 않은 상태. 누가 결혼했든 이혼했든 합격했든실직했든 발병했든 서툰 연극 배우처럼 구는 짓은 이제 그만이다.
나이 들면서 체지방이 늘 듯 안 쓰는 핸드폰 번호가 쌓인다. 번호는 정리해도 인연은 삭제되지 않고 내가 피해도 삶이 만나게 한다. 사는 동안 운명을 뒤바꿔놓을 결정적인 만남은 거의 일어나지않겠지만 신상 정보 업데이트가 안 된 지인들과의 애매한 만남, 아니 마주침은 종종 일어날 것 같다.
"우리의 인생은 (.…) 어릴 적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고, 협소하고, 단편적이다."(116) 이 단편적 만남, 하찮은 우연에 잘 임하고싶다. 안색을 살피고 고요를 챙길 것. 앞으로 수차례의 결혼식과 장례식 그리고 무수한 대중교통 탑승 기회가 남았다. - P30

저자의 일침대로라면 육성만 담지 말고 울림과 떨림까지 담아야 하고 그것은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저항"으로 가능하다.
이 무위의 글쓰기라는 경지는 아득하지만 일단 쓰기에 대한 열망으로 조급해진 마음은 누그러뜨려준다. 무언가를 즉각적으로 수행하려는 욕심을 무너뜨리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힘을 다스리라는 글쓰기의 이정표 앞에서 나는 또 가던 길 멈추고 숨을 고른다.
글이 불이 되는 글쓰기를 해낼 재주는 없지만 쓰면서 알아가고싶다. 전업 작가가 되고 싶으면, 혹은 되었다면 하루에 이삼십 장씩쓰라는 말보다 이쪽이 더 윤리적이며 매혹적이고 현실적이다. 이미글이 범람하는 시대에 제면기에서 면발 나오듯 줄줄 써대는 게 능사는 아니며, 그렇게 능력을 행위로 소모하다간 4대 보험 적용도 안되는 무명 작가로 과로사하기 딱 좋다는 자각이 아주 세게 드는 조언이다. 고마워요, 아감벤 씨, - P34

수레는 늘 엎드려서 네 발로 무지랑 눈을 맞추었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되기"인가. 자신의 고정된 위치를 버리고 다른 존재로 넘어가기. 한 사람의 놀이 능력은 곧 교감 능력이자 변신 능력이고 사랑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고양이는 만져지는 자연이다. 무지는 명당자리를 용케도 발견한다. 외출에서 돌아와 겉옷을 벗자마자 손 씻고 오면 그새 외투 위에 왕처럼 앉아 있다. 목도리 · 스카프부터 쇼핑백 · 책까지 폭신하든단단하는 보드랍든 뭐든 한 겹 깔고 본다. 커튼 사이로 한줌 별이 들면 그곳이 아무리 손바닥만 할지라도 몸집의 표면적을 최대화해 누린다. 볕을 모은다. 무지를 보면서 알았다. 나는 고양이를 싫어한 게아니라 고양이 키우는 걸 싫어했던 거구나. - P37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여섯 살 여자아이 ‘무니‘의 무지갯빛 표정이 화면을 꽉 채운다. 싸구려 모텔에서 단기투숙자로 미혼모 엄마와 사는 아이는 가난과 결핍의 공간을 생성과 자극의 놀이터로 만든다. 이 낙담하지 않는 악동은 자신의 신묘한 능력을 고백한다. "난 어른들이 울려고 하면 바로 알아." 엄마의 기후 변화를 귀신같이 감지하는 것도 아이고, 어떤 절망에 빠졌어도 라면 수프 같은 복원력으로 생기를 되찾는 것도 아이다.
"고통이 아픔을 준다는 것이 고통에 반대하는 논거가 될 순 없다"는 니체의 말을 생각한다. 인간은 최악의 상태에서 진정한 통찰과 만난다는 뜻이다. 한부모 가정 아이는 불행하다기보다 예민하다.
그 예민함의 촉수로 무니가 타인의 슬픔을 포착하듯, 또 다른 무니들이 삶의 무수한 장면을 읽어내고 속 깊은 글을 써내는 걸 나는 본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이혼은, 한부모 가정은, 누구의 무엇을 언제를 기준으로 결핍이고 약점인 것이냐고, 나와 내 친구가 오매불망걱정했던 그 작았던 아이들은 자기 고통을 응시하고 기록하는 사람으로 옆에 있다. - P42

소설을 읽다보면 바틀비가 답답하고 불안하다. 제 발로 사무실에 들어갔으면 일은 해야 하지 않나, 안 할 거면 왜 안 하는지 적어도 이유는 말해야 하지 않나,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나 싶은데 그 모든 걸 안 하고 ‘끝‘까지 버틴다. 그런 행동에 대한 속 시원한 해명 없이 소설은 장탄식으로 끝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102쪽)그 허탈함, 황망함, 난감함, 쓸쓸함 속에서 사유가 일어난다(좋은 소설인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을 생각했다. 처음엔 바틀비가 이유도없이 일하지 않는 게 이상했는데, 아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을 그토록 열심히 하는 게 이상하다. 바틀비는 왜 자기 생각과 입장을 설명하지 않을까 궁금했다가,
그럼 나는 구구절절 말함으로써 타인을 이해시키고 타인으로부터이해받은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회의가 들었다. 말하는 대로 이해받는다는 믿음이야말로 헛것 아닌가……… - P45

그간은 글쓰기를 열렬히 원하는 이들만 만났다. 만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비자발적 집단과의 수업에서 난관에 봉착했고 그 와중에 나는 얼굴이 자주 화끈거렸는데, 평소 목소리 없는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떠들고 다닌 게 생각나서다. 실상은 목소리 없는 자를 좀처럼 못 견디고, 논리적 전개가 아니면 상황 이해에 서툴고, 원활한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되면 구성원을 제쳐두기도 하는 사람이 나였다. 우선은 불안과 조급 없이 목소리 없는 이들과 ‘그냥 있는‘ 연습부터 해야 했던 것이다.
합리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삶, 실패로서만 확인되는 앎이 있다.
그것은 나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아내의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가확고한 남편이 정작 아내의 말을 듣지 못하듯이, 어떤 목표에 사로잡히면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실함의 중단, 합리성의 거부를 실천한 바틀비처럼 나도 성실함과 합리성의 스위치를 몸에서 꺼두어야 할까보다. 그래야 사람이 보일 것 같다. - P47

이 낯설고 익숙한 상황, 이야기의 전후 맥락을 살피기보다 자신을 불쑥 내세우는 남성성의 노출에 난 또 찔렸다. 이번엔 정신을 집중해 말했다. 내 몸을 통과한 폭력의 기억에 대한 가치 폄훼를 바로잡아야 했다. 당신의 발언은 내가 폭력의 당사자여도 문제, 아니어도 문제다. 용기 내어 자기 아픔을 터놓고 그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감응한 사람들에 대한 결례이자 업신여김이다. 폭력의 피해를 개인의 박복과 불운으로 취급하는 것, 수치심을 심어주어 침묵을 강요하고 사적인 문제로 돌리는 관습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양산하고방치하는지가 오늘 강의 주제라고 정리해주었다.
물론 냉정하거나 초연하지 못했다. 맥없이 터진 눈물을 꾹꾹 누르며 말했고 그는 주저 없이 사과했다. 자신이 강의 중간에 들어와서 앞의 이야기를 못 들었고 인문학을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라그렇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량한 눈매를 가진 그의 사과를 의심하진 않지만 변명을 듣고 나니 그의 언행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강의 내용 파악이 어렵고 공부가 부족하다고 여기면서도 스스로 말하도록 허락했고 기어코 한 수 가르치려 들었으므로, - P51

리베카 솔닛은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자신의 경험을 고백한다. 한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학대하는 아버지를 둔 탓으로 단정하는 저 장면은, 한국사회의 장대한 폭력에관한 서사를 한 여성의 트라우마로 간단히 환원해버리는 목소리와겹친다.
‘남자도 돈 버느라 힘들다.‘ ‘남자도 설거지 한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목숨도 던질 수 있다.‘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구구절절한 말하기는 (여성이 그렇다는 걸 알았다가 아니라) 남자는 이렇다는 걸 알아달라는 한 줄 요약으로 돌아오곤 한다. 이런 반복적인 상황이 나의 역량이나 경험 부족 탓이 아닐까 자책했으나 솔닛의 사례와 연결되니 보편적 젠더 현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 P52

"남자들은 감정이입의 범위를 넓혀서 다른 젠더와 자신을 동일시해보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다. 백인은 유색인종과는 달리 다른 인종에 동일시해보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지배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곧 자신만을 볼 뿐 남들은 보지 않는 것이다." (89) - P52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은 침묵하는 법을 익히고 남성은 감정을도려내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가부장제는 인간 본성을 왜곡시키고그 하자와 결함을 체화한 젠더 역할 수행을 윤활유 삼아 굴러간다.
말하기를 익히지 못한 여성이 공감을 배우지 못한 남성과 동료시민으로 살아가자니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맞추어 살자니 공부가 끝이 없다.
난 강연 중 눈물바람이 세 번째다. 두 번은 말하다가 혼자 울컥했다. 더 울어야 할 것이다. 내 나약함을 혐오하지 않기 위해 목표를바꾼다. 울지 않고 말하는 게 아니라 울더라도 정확하게 말하는 것.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깍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19쪽) - P53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난 그래도엄마가 됐을 거 같다. 아이를 무작정 좋아하는 데다가, 한 생명을 키우는 데 필요한 재화와 노동의 총량에 대한 정보를 알더라도 구체적인 실감은 어려우니 용감하게 출산의 길을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 놓고 여전히 생일날 온전한 식사를 위한 외출권과 효행 미역국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는 심정으로 살았으리라.
이러한 내 부산스러운 행동과 생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낳을자유‘다.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는 아이들의 평등을 지켜주는공적 자원 "281쪽)과 "아이를 낳지 않고 싶은 여성이 비난받지 않을 자유"(283쪽)가 확보된 상태. 특정 상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헌신하지 않는 관계 맺기가 가능하도록 가족제도가 개선될 때까지, 나는 무한한 모성을 강요하는 세상의 모든 면접관들에게 말씀드릴 작정이다. 엄마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 P57

결국 딸은 원하는 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네 상식과 내 상식의다름, 자기 불안의 겨룸, 상호 애환에 대한 무지, 욕망의 투사, 필요의 거래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 엄마와 딸. 그러나 패자가 정해진 싸움이다. "부모가 원하는 자리로 되돌아오는 자식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아이는 내 자식이고 나는 그 애의 부모이고, 그 사실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196쪽) 작은 인간‘의 태를 벗고 세상의중심으로 나아가는 딸아이에 비추어 ‘왜소해진 나‘를 본다. 더는 작지 않은 아이가 더는 쪼그라들고 싶지 않은 엄마를 흔들어 깨운다. - P72

"지금까지 제 글이 이상하고 못났던 것은 배움이 부족해서라고생각했어요. 필사를 하지 않아서, 단어를 많이 몰라서, 독서량이 부족해서. 그게 아니더라고요. 나를 생각하지 않아서였어요.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고독과 외로움이 괴로워서. 그럴 때 늘 찾았던친구들, 드라마, 영화, 책이 문제였어요. 나 자신과 생각보다 서먹한사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귀한 깨우침이 담긴 고백이다. 나는 수업과 강연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 아니 자기 삶을진득하게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는 걸 자주 느낀다. 그래 본 적이없어서인 것 같다. 한국에서 입시제도 위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에게 글쓰기란 남에게 평가받는 일이다. 출제자의도에 부합하는표준화된 ‘답‘을 찾다 보니 자기로부터 멀어지고 남의 사고에 집중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게 된다. - P74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합니다. 글을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무엇을 알고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48쪽) "미리 어떤 것을 써야지 생각하고 머릿속에 준비해둔 원고를 ‘프린트아웃‘한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218쪽)글쓰기를 시작하는 용기, 그리고 방법은 내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을 단서 삼아 이야기를 밀고 나가" 32 야 글쓰기에 힘이 붙고 논의가 섬세해지면서 자기의 고유한 목소리가 나온다. 엄마에 관한글쓴이의 고백처럼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 무지하고 자기와 서먹하기에, 글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는 쾌감도 크다. 그렇게 마음을 다쏟는 태도로 삶을 기록할 때라야 "신체에 닿는 언어"를 낳고 "그런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 (311쪽)진다. - P75

‘나는 왜 엄마만 미워했을까‘라고 글을 쓰는 딸이 어딘가에 있고, 다른 한쪽에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되는가‘를 생각하며 육아법을 설계하는 엄마가 있다. 저마다 속상하고 답답할 때마다 한 줄 한 줄 길어 올린 글쓰기로 자기 언어를 만들어가는 풍경을 그려본다. 그럴 때 존재를 옥죄는 말들이 "인정과 도리에 맞는 언어로 교체되고 세상이 좀 더 살만해질 거란 믿음이 내겐 있다. "그것은 채점자 앞에 제출한 ‘답안‘이 아니라 될수록 많은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 때문"(303쪽)일 것이다. - P77

이것이 눈물의 완창인가 박연준 시인이 친구 앞에서 마음 푹 놓고 실컷 울어댄 일이 있는데 그걸 두고 친구들이 "완창" (판소리의 한마당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일)이라 부르며 놀렸다고 한다. 한 세월떠나보내는 느낌, 사연 한편 완성되는 느낌으로 더없는 표현이다.
요즘 나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익사당하지도, 폭포 같은눈물에 잠식되지도 않는다. 재무구조가 개선되지는 않았지만 집은넓어졌고 조용히 울 수 있는 방도 생겼는데 예전보다 덜 운다. 나이들면 머리숱이 줄고 생리 양이 줄듯이 눈물도 줄어드는 걸까. "가끔그때가 그립다. 이제는 체력이 달려서 그리고 그만큼 슬프지가 않아서 완창을 할 수가 없다. 살면서 완창은 그리 자주 오는 것이 아닌가 보지?" (50)한 세월이 갔다. 눈물도 잦아들고 눈물의 목격자도 떠났다. 멀리서 지켜봤을 거 같다. 내가 모처럼 사연 있는 여자처럼 한바탕 운그 사연을 나의 스물두 살 자동차는 알리라. - P80

궁극적으로는 영웅이 필요 없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나는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다양한 면이 있다. 이러한 선과악의 복잡다단한 조합은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인격은 극히 다양한 속성의 복합체일 뿐만 아니라 그 속성들은 해마다, 심지어 시간마다 달라진다." (82쪽) 그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허물과 결핍의 존재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우상이 된다는 건 한 사람이 단순화·고정화·신화화된다는 뜻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그날 그는 용감했다." - P82

자신이 용감해지는 자리를 알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이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그나마 용감하다. 글 바깥에선 비겁하고 부산스럽지만 글 안에서만은 일관되고 침착하려 애쓴다. 글과 삶의(불일치는 내 삶의 영원한 화두다. 잘 존재하는 방법은 어렵고, 글쓰는 내가 가장 나으니까, 삶에서 그 비중을 늘리는 전략을 일찍이짰다.
글쓰기 수업도 그 일환으로 재밌게 하고 있다. 학인들은 매번말한다. "우리 수업에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와요." 그러면 내가정정한다. 좋은 사람들이 오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 P83

서로가 경쟁자 아닌 경청자가 될 때, 삶의 결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자가 될 때 우린 누구나 괜찮은 사람이 된다. 대인배라도 된듯한 그 착각이 좋은 글을 쓰게 하는 동력임은 물론이다. "작가란 최상의 순간에 자기 인격의 최상의 측면을 갖고 주로 글을 쓰고 실제로도 그래야 한다."(83) 저마다 삶에 몰입하고 자기 인격의 최상을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면 우상의 존재도 자연 소멸하지 않을까.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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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김태정

  청매화차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무슨 유명한 다원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초의선사의 다도를 본뜬 것도 아닌

  이른 봄 우이동 산기슭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래바람에 휘날리던 꽃잎 한 주먹 주워

  아무렇게나 말려 만든 그 청매화차

  한 사나흘 초봄 몸살을 앓다 일어나

  오늘은 그 청매화차를 마셔보기로 한다

  포슬포슬 멋대로 말라비틀어진 꽃잎에

  아직 향기가 남아 있을까

  첫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막 끓여온 물 속에서 화르르 펴지는 꽃잎들

  갈라지고 터진 입안 가득

  오래 삭혀 말간 피 같은 향기 고여온다

  누군가 내게 은밀히 보내는 타전 같기도 해

  새삼 무언가 그리워져 잘근잘근

  꽃잎 한점을 씹어보았을 뿐인데

  입안 가득 고여오는 꽃잎의

  은근하게도 씁쓸한 맛

  꽃잎의 향기는 달콤하나

  향기를 피워올리는 삶은 쓰거웁구나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중에서

  "청매화차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이 구절은 입안에 오래 남아있는 향기처럼 마음에 남는다. 매번 읽을 때마다 그렇고 가끔 나와 어울리지 않을 어떤 장소에서도 문득 떠오른다. '청매화차라니'는 가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한 체념과 포기의 상징 같은 것이다. 감정이입을 쉽게 하는 나는 시인의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에서 무너진다. 마흔의 나를 다시 만나는 것 같다. 시인의 생애는 '향기를 피워올리는' 거기 멈춰있고 (벌써 11주기가 지나간다.) 나는 여전한 진행형이지만 진행형일 뿐 '쓰디쓴 맛'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가을이면 단풍을 만나듯 시집을 만나본다. 시를 음미하듯 몇 편 읽고 나면 마음이 수굿해진다. 가난한 저녁도 힘이 된다.

  지난 주말은 웨딩홀 뷔페에서 접시 빼는 알바를 했다. '웨딩홀'이나 '뷔페'는 손가락도 남을 만큼의 내 일상에서 '청매화차라니' 같은 장소이고 어리버리한 신입 알바에게는 뒤섞인 음식 냄새만으로도 허기를 채울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은 다르다. 다른 기억으로 남는다. 화려한 음식들과 떠들썩한 '뷔페'의 구석에서 고개를 묻고 허기를 달래는 많은 종사원들 사이에 끼여 덜 불은 컵라면에 식은 김밥을 먹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의 삶을 살아갈 때 '달콤하고 은은한' 세상은 구현되는 것이다. 모두 같을 필요는 없다. '다름'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두 아이가 있다.

  첫아이는 '캄보디아, 푸옥'의 아이였는데 이사를 가면서 헤어졌다.

  두 번째 아이는 '말리, 사모리'의 아이였는데 올해 성년이 되어서 자립하게 되었다. 셋째는 '에티오피아, 하브로'의 아이와 만나게 되었고 이제 네 번째 아이의 사진을 어제 받았다. 어떤 아이가 올까 궁금했는데 '말리, 베마'의 이제 5살이 된 아이다. 사진을 보내려고 제일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여러 사람 앞에서 사진을 찍혔을 아이는 멀뚱한 날 것의 표정이다. 반갑고도 고맙다.

  후원자라고 하기에는 성의 없고 게으른 편이다. 1년에 한 번 선물을 보낼 뿐이고 편지는 아예 쓰지 않는다. 처음 두 아이 모두 헤어지게 되면서 겨우 한 통씩 보냈다. 아이들이나 사업장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성향적으로 뭔가 요란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돈 몇 푼으로 대단한 걸 한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편지'는 중학교 때인가 취미로 '편지 쓰기'를 적어 넣었을 정도로 편지 쓰기를 좋아한다. 이 정도나마 글을 쓰게 된 것도 무수한 편지 쓰기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편지'를 안 쓴다. 그 아이가 내게 고맙다는 것을 강제하기 싫다. '편지'를 쓰다 보면 서로 그런 뻔한 내용들이 오고 갈 것이 두렵다. '사랑'을 가장한 '애착'도 두렵기에 적당한 거리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편지를 쓰지 않기로 했다. '편지'는 작별 용이다.

  돌아보면 나에게도 '후원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많이 배웠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배움'이 간절하기도 했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환상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키다리 아저씨'는 부재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후원을 시작했다. 세상 어딘가의 한 아이를 위해서.

  내 마음은 그것이 전부인데 아이들이 주는 뿌듯함은 의외에서 발견된다. 가령 '청매화차라니'의 순간들마다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때가 그렇고, 적어도 세상에 와서 그럴듯한 일 한 가지는 하고 가는구나 싶은 안도감을 가질 때가 그러하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돕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착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조금 다른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린 것이 아니다.

  월드비전에서는 후원금의 절반은 지역에 쓴다 한다. 지역이 같이 좋아지는 것은 아이의 환경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방식이 좋아서 '월드비전'을 선택했다. 종교적인 것은 관심 없다. 한 아이에게 3만 원씩, 다른 단체인 유니세프에도 보내니 한 달에 십만 원. 사실 최저시급의 내 급여로는 버거운 금액이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알바 하루면 해결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몸을 움직여 일을 할 때까지는 계속 해갈 작정이다. 십만 원으로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뿌듯함은 '책 구매'와 함께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만든다.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청매화차라니'를 잊지 않고. '김태정'시인도 고개를 끄덕여주실 것이다.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청매화차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무슨 유명한 다원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초의선사의 다도를 본뜬 것도 아닌

이른 봄 우이동 산기슭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래바람에 휘날리던 꽃잎 한 주먹 주워
아무렇게나 말려 만든 그 청매화차

한 사나흘 초봄 몸살을 앓다 일어나
오늘은 그 청매화차를 마셔보기로 한다
포슬포슬 멋대로 말라비틀어진 꽃잎에
아직 향기가 남아 있을까
첫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막 끓여온 물 속에서 화르르 펴지는 꽃잎들
갈라지고 터진 입안 가득

오래 삭혀 말간 피 같은 향기 고여온다

누군가 내게 은밀히 보내는 타전 같기도 해
새삼 무언가 그리워져 잘근잘근
꽃잎 한점을 씹어보았을 뿐인데
입안 가득 고여오는 꽃잎의
은근하게도 씁쓸한 맛
꽃잎의 향기는 달콤하나
향기를 피워올리는 삶은 쓰거웁구나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쌀 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서서 바라보면/ 배고픈 애인아/ 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 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 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 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 겨울을 살자/ 이 겨울을 살자 <겨울산>부분


한 주먹 왕소금에도/ 상처는 좀체 절여지지 않아/ 갈수록 빳빳이 고개 쳐드는 슬픔/ 꼭 내 상처를 확인하는 것 같아// 소금 한 주먹 더 뿌릴까 망설이다가/ 그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제 스스로 제 성깔 잠 재울 때까지/ 제 스스로 편안해질 때까지// 상처를 헤집듯/ 배추를 뒤집으며/ 나는 그 날것의 자존심을/ 한입 베물어본다 <배추 절이기>부분

저녁상 물리고/ 설거지도 말끔히 끝낸/ 배부른 아홉시에는/ 슬금슬금 졸음 오는 아홉시에는/ 아직 잠들기엔 이른 아홉시에는/​마감이 코앞인 시나 한편/심심한 시나 한편 써야겠다//​ 언젠가 보았던 공장 담벼락 공고판/ ‘실밥 따는 아줌마 구함/ 1EA당 50냥/ 꼬마 시다 환영‘을 낙서처럼 끄적이면서/ 아직도 그 고단한 노임이/ 1EA당 50냥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꼬마 시다 환영이라는 속보이는 문구도/ 아랍을 겨냥한 미국적 속내를 닮았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배부른 아홉시에는/ 1EA당 50냥의 노동도/실밥 따는 아줌마도 꼬마 시다도/ 아프간이나 팔레스타인만큼 먼/ 강 건너 불빛 배부른 아홉시에는,​ <배부른 아홉시에는>부분

이것도 보릿고개 덕이라면 덕이겠다/ 궁핍이 나로 하여 ​글을 쓰게 하니/ 궁핍이 글로 하여 나를 살게 하니/가난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조력자인가 <궁핍이 나로 하여>​부분


부업이나마 한 일년/ 가윗밥을 넣고 아이롱을 달구어도/ 밥의 내력을 모른다는 시인/ 밤새 꾸벅이며 실밥이나 따고 있어라/ 하루종일 뺑이치는 미싱 소리에/ 서투른 가위질이나 하고 있어라// 그래도 모른다면/ 해가 지고 해가 떠도/ 기계가 멈추고 기계​가 돌아도/ 끝내 모른다면// 요 시인, 철 없는 시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만/ 생업과 부업의 차이/ 다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기계가 멈추고 기계가 돌아도/ 끝내 변하지 않는 사실/ 엄지와 검지의 굳은살로 밥이 된다는 것만 알아라/ 그것만 알고 있어라 <부업>부분

오늘은 조카가 선물해준 샤프로 시를 써보기로 한다/ 굵고 뭉툭한 연필심에 비하면/ 이 가늘고 날카로운 0.5밀리 샤프심은/ 가볍고 세련된 샤프의 자존심을 증거한다/ 아무리 정교한 세밀화라 해도/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샤프심은/ 가끔 내 삶의 미세한 신경회로를 건들이지만/ 그 정도 사소한 경박성쯤은/ 애교로 봐줄 아량도 과시하면서// 뒤꼭지만 눌러주면 무한정 심이 나오는/ 그의 놀라운 생산력은/ 몽당연필도 아쉬웠던 나의 어린 시절을 조롱하는 듯도 하지만/ 샤프로 시를 쓰는 오늘만큼/ 내 손아귀에서 내 어깨에서 내 삶에서/ 짐짓 무게를 덜어내고자 한다/ 그러므로 손끝의 힘을 빼고/ 빙판 위를 미끄러져 나가는 쇼트트랙 선수처럼/ 가볍게 여유롭게 어디 한번 중력을 탈주해보자/ 생계만큼 무거운 원고지의 중량을 통과해보자/ 그러나......// 처음으로 샤프를 쥔 손은 불안하고 또 불온하다/ 글자와 글자 사이를 곡예하듯 아슬아슬하다/ 너무 힘을 줘도 너무 힘을 빼도 안되는/ 그 적당히

세상의 불빛 한점


세상에 보태줄 것 없어
마음만 숨가쁘던 그대 언덕길
기름때 먼지 속에서도
봉숭아는 이쁘게만 피었더랬습니다
우리 너무 젊어 차라리 어리숙하던 시절
괜시레 발그레 귓불 붉히며
돌멩이나 툭툭 차보기도 하고
공장 앞 전봇대 뒤에 숨어서
땀에 전 작업복의 그대를
말없이 바라보기나 할 뿐
긴긴 여름해도 저물어
늦은 땟거리 사들고 허위허위
비탈길 올라가는 아줌마들을 지나
공사장 옆 건널목으로 이어지던 기다림 끝엔
언제나 그대가 있었습니다

먼 데 손수레 덜덜 구르는 소리
막 잔업 들어간 길갓집 미싱 소리
한나절 땀으로 얼룩진 소리들과 더불어
숨가쁜 비탈길 올라가던 그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허방을 짚는 손에
야트막한 지붕들은 덩달아 기우뚱거렸댔습니다​
​그대 이 언덕길 다할 때까지
넘어지지 말기를
휘청거리지 말기를
마음은 저물도록 발길만 흩뜨리고
그대 사라진 언덕길 꼭대기에는
그제 막 보태진 세상의 불빛 한점이
어둠속에서 참 따뜻했더랬습니다​

가을 드들강


울어매 생전의 소원처럼 새가 되었을까
새라도 깨끗한 물가에 사는 물새가

물새가 울음을 떨어뜨리며 날아가자
바람 불고 강물에 잔주름 진다
슬픔은 한 빛으로 날아오르는 거
그래, 가끔은 강물도 흔들리는 어깨를
보일 때가 있지
오늘같이 춥고 떨리는 저녁이면
딸꾹질을 하듯 꾹꾹 슬픔을 씹어 삼키는,
울음은 속울음이어야 하지 울어매처럼
저 홀로 듣는 저의 울음소린
바흐의 무반주첼로곡만큼 낮고 고독한 거
아니아니 뒤란에서 저 홀로 익어가는
간장맨치로 된장맨치로 톱톱하니
은근하니 맛깔스러운 거
강 건너 들판에서 매포한 연기 건너온다

이맘때쯤 눈물은
뜨락에 널어놓은 태양초처럼
매움하니 알큰하니 빠알가니
한세상 슬픔의 속내, 도란도란 익어가는데
강은 얼마나 많은 울음소릴 감추고 있는지
저 춥고 떨리는 물무늬 다 헤아릴 길 없는데
출렁이는 어깨 다독여주듯
두터워지는 산그늘이나 한자락
기일게 끌어당겨 덮어주고는
나도 그만 강 건너 불빛 속으로 돌아가야 할까부다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호마이카상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닮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동백꽃 피는 해우소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던/ 네루다 시집 속엔/ 오래 삭힌 멍처럼 빛바랜 쑥이파리 한점/ 매캐한 이 콧물과 재채기는/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그 말/ 때문이 아니라/ 다만 먼지 때문에// 바람이 꽃가루를 날려보내듯/ 먼지가 울컥, 눈물을 불러 일으켰나 <눈물의 배후>부분

미황사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 불생불멸…… 불생불멸…… 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봄산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었듯 봄산에서 한때,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진달래 향기에 깊이 취했던 것도 아닌데 등산객들의 발자국 어지러운 샛길, 길이 너무 많아 차라리 길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걸까요 길 안팎에서 한나절을 헤매었습니다 바람 속 무성한 시누대 숲은 좀처럼 길을 열어주지 않고 해묵은 낙엽들은 밑에서 아프게 바스라지는데

손바닥에 잔금이 이리도 많은 걸 보니 너도 잔근심이 많겠구나, 겨울 실가지처럼 무수한 손금에서 삶의 비밀을 뒤적이듯 봄산 난마처럼 얽혀 있는 샛길에서 길을 찾듯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었습니다 곧을 태 곧을 정, 까짓거 대나무처럼만 살면 될 거 아닌가 뜻도 모르는 채 내 이름 석자에 온 생을 맡겼습니다 곧고 곧아라 삶도 사랑도, 내 이름대로만 살면 될 거 아닌가 겁도 없이

봄도 아직 이른 봄이라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에 진달래 낯빛 핏기 없이 질려 있는데 시누대는 제 울음만큼 한매듭씩 자라나는데 내 몸이 내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여 나는 자주 휘청거리곤 했지요 대나무붙이들아 늬들도 과분하게 주어진 이름들이 부끄러워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거니?

손바닥의 잔금만큼 사소한 근심들이 거미줄 치던 세월, 시누대 그 고통의 생장점이 스스로 바람을 불러일으키듯 슬픔이 나를 팽창시켰고 나는 어느덧 손금 위에서 서성이지 않아도 좋을 나이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듯 봄산에서 한때,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길을 찾아헤매는 내 발자국이 길 위에 길을 보태었다는 걸, 산을 내려온 뒤에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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