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디킨스의 은밀한 의도는 따로 있었다. 한때 이 작품의 가제였던 ‘쇠망치 (The Sledgehammer)‘가 암시하듯, 그의 의도는 그가 열중했던 사회정의를 향한 작은 문학적 봉기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탐욕과빈곤을 대비시키고, 개인적 박애의 확산이라는 해독제를 제안했다. 조지 오웰도 언급했듯, 디킨스는 사회적 부당함에 격노하는 사람이었지만 전면적 정치혁명을 촉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 에버니저 스크루지의 압도적인 장수와 인기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스크루지는 햄릿처럼, 자신을 낳은 원작에서 독립한 캐릭터들 중 하나다. 크리스마스캐럴』을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스크루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유가 뭘까? 내가 불멸의 스크루지를 처음 접한 것은 언제였으며, 어째서 나는 스크루지라면 사족을 못 쓰게 되었나? 날 때부터 스크루지를 알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1940년대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읽어주던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은 게 처음이었을까?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는 라디오 시대였으니까. - P196
어찌 됐든, 디즈니 만화의 스크루지 맥덕을 알게 된 일곱 살 무렵에는 나도 ‘스크루지‘란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맥덕의 늙고 교활한 껍데기 속에 다정하고 관대한 맥박이 뛰고 있다는깨달음도 포함돼 있었다. 아기 오리 세쌍둥이가 스크루지 삼촌이라면좋아 죽는 것이 분명한 신호였다. 맥덕은 장난치고 놀 때는 어린 조카들 못지않게 유치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웃기기도 엄청 웃겼다. 이것이 원작의 스크루지를 이해하는 한가지 열쇠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어린아이다. 우리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처음 만나는 그는 겉은 늙은이지만 상처 입은 아이다. 스크루지를 쓰면서 디킨스는 자기내면을 깊이 파고들었고, 자신의 창조물에 자신의 숨겨진 고통을 상당량 투영했다. 디킨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시기, 그의 무책임한 아버지가 채무자 감옥에 갇히고 어린 그가 학교를 떠나구두약 공장에서 일하며 궁핍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시절을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시절이 영원히 이어지진 않았다. - P197
비참한 곳에 방치되고 잊힌 의지가지없는 아이의 모습을 한 외로움. 이것이 스크루지가 연기한 디킨스의 악몽이다. 노년까지 이어진 스크루지의 구두쇠 성향을 낳은 것은 바로 이 악몽이다. 스크루지의 어린누이가 학교에 와서 그에게 집에 가자고 했던 순간도 아니었고, 스크루지가 페지위그 씨의 수습생으로 일하던 시절의 다사다난함도 아니었다. 스크루지의 유명한 욕설 "망할 성탄!(Bah! Humbug!)"에는 이런 뜻 - P198
이 있다. "나는 인간적 나눔과 행복의 가능성 따위 믿지 않아. 인생에서가장 중요한 시기에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이야." 환대와 박애라는 크리스마스 정신은 사기에 불과했고, 스크루지의 어린 시절이 그명백한 증거였다. 얼마쯤은 디킨스의 어린 시절도 그랬다. ‘누추하기짝이 없는 학교‘는 구두약 공장이었고, ‘아들을 방치하는 무정한 아버지는 빚지고 감옥에 가면서 아들에게 고통을 안긴 아버지였다. 스크루지의 심장은 여물기도 전에 시들어버렸다. 디킨스의 심장이 그렇게될 뻔했기 때문이다. 구두약 공장 시절로 인해 디킨스는 평생 두 가지 충동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하나는 파산에 대한 공포였다. 이 공포는 그를 광적으로돈벌이에 주력하게 했다. 다른 하나는 아랑을 베풀려는 욕망이었다. 만약 과거에 누군가 관대함을 베풀었다면 어린 디킨스는 구두약 공장의 노동을 면했을지 모른다. - P199
어린 팀을 더 간단하고 더 간접적인 방식으로 보내버리며 연민을 일으키는 것쯤 디킨스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팀은 구조될 수 있는 아이다. 과거에 구조되지 못했던, 또는 너무 늦게 구조됐던 스크루지와는 다르다. 그리고 스크루지 본인이 구조자가 될 수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아무도 베풀지 않았던 구원의 관대함을 이제그가 팀에게 베풀 수 있다. 그는 ‘제2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 그것은디킨스 본인은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그래서 그가 그렇게 반복적으로만들어냈던 자애롭고 유능하고 재정적으로 든든한 아버지다. - P200
우리 시대는 영혼의 구원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시대다. 대신 지연된 깨달음과 치유 과정을 즐겨 말한다. 어쩌면 스크루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해석이 무엇이든, 스크루지는 문학 캐릭터를 위한 유일하고 진정한 시험을 통과했다. 즉 그는 오늘날까지 새롭고 생생하게 남았다. 스크루지는 죽지 않는다! 티셔츠에 어울릴 문구다. 그렇다. 그는 살았고, 우리는 그와 함께 기뻐한다. - P201
대아, 맞다. 글쓰기. 삶.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것이 문제다. 삶을 살 수도 글을 쓸 수도 있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하기는 어렵다. 삶은 글의 주제가 되기도 하지만 원수이기도 하니까. - P202
독자에게 바치는 기도
미지의 독자여, 그대가 누구든 그대가 가까이 있든 멀리 있는, 현재의 사람이든 미래의 사람이든, 심지어 과거의 혼령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아니면 인생의 중반에 있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또는 이 가상의 양극을 잇는 연속선상의 어디에 위치하든 종교가 무엇이든, 종교가 있든 없든, 정치적 견해가 무엇이든, 정치색이있든 없든 키가 크든 작든, 머리가 풍성하든 벗겨지기 시작했든, 건강하든 아프든, 골프 선수든 카누 선수든 축구 팬이든, 어떤 스포츠를 하고 어떤 취미에 - P211
빠져 있는 그대가 작가이든, 독서 애호가이든, 아니면 교육제도의 강제에 따라 원치 않은 독자가 된 학생이든 그대가 어떤 방식으로 읽든 종이책으로 읽든 전자책으로 읽든 욕조, 기차, 도서관, 학교, 교도소, 비치파라솔 아래, 카페, 옥상정원, 손전등으로 밝힌 이불 속, 기타 무수히 많은 장소 중에서 그대가 읽는 곳이 어디든 우리 작가들이 말을 거는 상대는 언제나 바로 그대, 미지의 존재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인 그대입니다. 오 독자여, 영원히 살기를! (그대 개별 독자는 영원히 살지 않겠지만, 이렇게말해야 재밌고 듣기 좋으니까요.)우리 작가들은 그대를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상상해야 합니다. 그대가 없다면 글쓰기란 의미도 목적도 없는 활동이 되고 맙니다. 글쓰기는 읽을 자유가 존재하는 미래를 상정하기에 본질적으로 희망의 행위입니다. - P212
미지의 독자여, 우리는 마술처럼 그대를 만들어내고 불러냅니다. 보세요, 그대는 존재해요! 그대가 방금 여기서 그대의 존재에 대해 읽었다는것 자체가 그대가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려는 것이다. 2010년 7월 10일에 내가 이 말들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여러분이 종이와 화면을 통해 지금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 - P212
‘정치적 대리인으로서의 작가‘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려운 일이다. 나는 작가들을 딱히 정치적 대리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동네북이라면 모를까. 정치적 대리인은 의도적으로 선택한 행위이자 본질적으로 대단히 정치적인 행위를 암시하는데, 모든작가가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많은 작가들이 정치에 있어서 벌거벗은 황제를 본 아이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황제의 나체를 언급한다. 주제넘고 싶어서도, 찬물을 끼얹고 싶어서도 아니다. 단지 그들 눈에 옷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고함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한다. 위험한 종류의 순진함일 수는 있지만 흔한 일이다. 소설 『악마의 시』의 저자에게 파트와의 사형언도가 내려졌을 때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저자 살만 루슈디 (SalmanRushdie) 본인이었다. 루슈디는 그저 자신이 무슬림 이민자들을 문학적지도에 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 P214
소설가나 시인이 항상 이런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써야 한다는 뜻은결코 아니다. 소설을 그것이 내세우는 대의의 타당성이나 ‘정치적 정당성‘으로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검열로 이어지는 사고방식이다. 혁명은 종종 젊은 작가들을 잡아먹는 결과를 낳았다. 권력투쟁의 승자들이 한때 허용됐던 작품들을 이단으로 선언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내 모태 공산주의자 친구가 최근 자기 부모의 공산주의그룹을 두고 한 말처럼, "그들은 언제나 작가들에게 가혹했다". 혁명가, 수구 반동, 종교적 정통파, 또는 각종 대의의 열성 지지자들에게 소설과 시는 수상쩍은 것이며 부차적인 것이다. 많은 이들이 글 - P216
쓰기를 대의에 봉사하는 도구로 취급한다. 만약 작품이나 작가가 선을지키지 않거나 나아가 대놓고 선을 넘을 경우 해당 저자는 기생충으로매도되거나 배척당한다. 또는 처리된다. 파시스트들에 의해 재판도 없이 총살당해 암매장된 에스파냐의 위대한 시인 로르카(Federico GarciaLorca)처럼. 하지만 소설가와 시인에게는 글쓰기 자체가 직업이자 예술이며, 글쓰기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이는 설사 다른 충동이나 영향력이 글쓰기에 개입할 때도 변함없다. 자유에 다가가는 사회란 인간의 광범위한 상상력과 자유분방한 발언이 허락되는 곳이다. 작가에게 무엇을 어떻게 쓰라고 참견하지 못해 안달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중 일부는 토론회에 패널로 나와 ‘작가의 역할‘이나 ‘작가의 도리‘를 논한다. 마치 글쓰기 자체는 경박한 소일거리에 불과하다는 듯이, 애국심 고취, 세계 평화 함양, 여성의 지위 향상 등 뭐라도 대외적인 역할과 도리를 갖다 붙일 수 없는 글쓰기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듯이. - P217
짧게 답하면 이렇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환경‘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마시는 물, 먹는 음식- 이 없다면 어떤 문학도 없을 겁니다. 우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사람은 대개 물 없이 사흘이면 죽습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산소가 처음부터 지금처럼 지구 대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건 아닙니다. 산소는 녹색식물이 만든 것이고, 녹색식물이 지금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식물을 모두 없애버리면 우리도 없어집니다. 지구 온도가 더 올라가면 우리 행성은 살수 없는 곳이 됩니다. 모든 생명체가 해당되진 않겠죠. 바다가 끊어 없어지지 않는 한 일부 심해 생물들은 분명히 살아남을 겁니다. 하지만인류는 도리 없이 사라집니다. 이런 이유로 환경 보존은 문학 존속의 전제 조건입니다. 환경을 지금과 비슷하게라도 보존하지 못하면 여러분과 저의 글쓰기, 모두의 글쓰기는 그저 무의미해질 뿐입니다. 그걸 읽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테니까요. - P222
하지만 저는 예술과 자연이 그렇게 대단히 분리돼 있다고 생각하지않습니다. 예술은 원래 자연과 뒤얽혀 있었고 애초에 자연에서 나왔으며, 특히 문예는 한때 인간 종(種)의 존속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것이 저의 전제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두 갈래로 고려하고 싶습니다. 한편에는 구술이나 문자를 통한 스토리텔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야기의 기록과 전파 방법으로서의 글쓰기 자체가 있습니다. 먼저, 스토리텔링, 서사 행위라고도 하죠. 저와 함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실까요. 도시와 마을이 있기 전으로, 농경이 시작되기 전으로요. 스토리텔링에는 두 가지가 요구됩니다. 언어와 상징적 사고. 이 두능력은 아주 오래됐습니다. 최근 연구에서 네안데르탈인이 확실히 언어를 보유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장례 의식과 음악과 신체 장식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네안데르탈인이우리와 별개의 종이며 우리의 출현으로 멸종했다는 이전의 주장과 달 - P224
리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의 염기서열 일부를 공유한다고 합니다. 만약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이 교접해서 둘의 유전자를 모두 지닌 번식력 있는 후손을 낳았다면,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은 사실 같은 종의 하위집단들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이 분기하기 전의 공통조상 때부터 언어 사용과 상징적 사고가 있었을 겁니다. 또는 적어도그것을 가능케 할 패턴들을 보유했을 겁니다. 이처럼 언어와 상징적 사고는 까마득히 오래됐습니다. 개체발생은계통발생을 반복한다. 이것이 생물학이 주문처럼 외는 말입니다. - P225
이야기의 효과는 막강했습니다. 이야기에 보호기제가 내장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초자연적 존재가 이야기에 등장하게 됩니다. 마땅한 대우와 존경을 해주면 성공적인 사냥으로 우리에게 보상하거나 적어도 우리를 잡아먹지 않을 존재요, 사실 ‘초자연적‘이란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과 동떨어진 존재는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처음에는 자연에 있거나 자연을 이루는것들이었습니다. 환경에 있는 모든 것, 심지어 돌과 나무도 정령이 깃든 존재였고, 이 정령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경우 우리에게 등을돌리고 치명적인 불운을 안길 수 있었습니다. - P228
하지만 이야기 기록 기술들도 자연에서 나왔어요. 쓰기 위해서는 먼서 문자, 즉 상징체계가 필요했습니다. 때로 문자는 소리를 적는 기호였습니다. 이때는 소리 기호들을 연결해 단어를 만들었죠. 또 때로는문자 자체가 단어나 사물을 상징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문자와 중국문자를 비롯한 많은 문자들이 이렇게 사물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모든 문자가, 심지어 영어의 ABC도, 자연에 있는 형상들에 기초했다고 합니다. - P229
위기일발로 치닫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우리 작가들은 어떤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요? 어떤 종류의 이야기가 우리가 속한 인류 공동체에 도움이 될까요?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모르니까요. 다만 이건 압니다. 우리가 희망을 놓지 않는 한우리는 아직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할 것이고, 우리에게 시간과 재료가 있는 한 우리는 그것을 계속적어나갈 겁니다. 이야기를 하고, 듣고, 전달하고, 거기서 의미를 끌어내려는 바람은 우리 인간에게 내장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경‘, 그리고 앞서 언급한 환경에 닥친 온갖 위기들. 우리 작가들이 나서서 이것들을 다루게 될까요? 다룬다면 어떻게요? 설교 투의 경고를 통해서? 인류에게 주어진 최선의 선택을 착실히 실천하는 서사를 통해서? - P232
우리가 쓸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이 변화들을 반영하게 됩니다. 그러다 때로는 우리가 현대판 샤먼 무아경과 영적 여행을 통해 이계(異界)에서 뭔가를 건져내게 될지도 모르죠. 그 뭔가가 설명서는 아닐 겁니다. 설명서 같은 건 없어요. 그보다는 부적에 가까울 겁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부적이요. 효험이 있을지는 모르지만요. 아니면 위험 목록일 겁니다.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주문일 겁니다. 아니면 우리가 다시 동물과 대화하고 식물의 지시를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은유들이 어떤 형태를 띠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 P233
주인공은 과거를 낱낱이 기억한다. 그때의 폭력과 학대와 반목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와 동시에 한때 자기피부처럼 친밀했던 풍경이 세월에 의해 거리감을 입고 중립적으로 변해버린 것을 본다. 하지만 그 변화는 반전될 수 있다. 세월이 낡은 벽지처럼 벗겨져 그밑의 생생하고 놀랍도록 선명한 패턴이 드러날 수도 있다. 앨리스 먼로는 체호프와 자주 비교되지만, 어쩌면 세잔과 더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사과를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린다. 이 지독히익숙한 사물이 낯설어지고 어둠 속에 빛나며 신비로워질 때까지. 하지만그것은 여전히 사과로 남는다. 결국 먼로는 모종의 신비주의자가 아닐까?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가 말했다. "그대는 작은 것들에도 위대하게 임하시며, 어떤 것에도 작게 임하심이 없다." 앨리스 먼로에게도해당되는 말이다. ("아유 제발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적당히 좀 해요! 허버트는 하느님에 대해 말한 거잖아요! 저 동상이면 하루치로 충분하지 않아요?! 그나저나저거 청동인 건 확실해요?") - P236
선물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다. 선물은 전달을 통해 존속한다. 주는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영적 삶을 일으키고, 이를 통해 선물 자체도 재활하고 재생한다. 선물 주기와 예술의 관계를 탐구한 루이스 하이드(Lewis Hyde)의 명저 『선물(The Gift)』도 마찬가지다. 선물』은 절판된 적이 없다. 입소문과 선물을 통해 가지각색의 예술가들 사이로 지하 기류처럼 움직인다. 이 책은 내가 작가와 화가와 음악가 지망생들에게 어김없이 추천하는책이다. 이 책은 입문서가 아니다. 입문서는 넘쳐난다. 이 책은 예술가가 하는 일의 본질에 대한 책이자 예술 활동과 우리의 지극히 상업적인 사회의 관계를 다룬 책이다. 작문, 그림, 노래, 작곡, 연기, 영화제작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물』을 읽기 바란다. 여러분이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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