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나는 한 명뿐‘이라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 삶을 혼자서 책임져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 여러 나이의 나를 떠올린다. 일곱살, 열다섯 살, 스물세살, 서른여섯과 마흔여덟 살, 쉰아홉 살, 기타 등등의 나를 스스로가 너무 못마땅해서 끈적끈적하고 희뿌연 기분에 잠겨 버릴 때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와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여기나는 무겁게 지쳐 있으나 거기 나는 상심을 털어내고 웃고 있구나.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힘이 난다. 책임감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다양한 시간, 다양한 공간, 다양한 우주에 내가 존재한다면.…… 어떤 세계에서 내가 슬퍼할 때 다른 세계에서 나는 기쁘다. 저 세계에서 내가 삶의 경이로움에 빠져 있을 때 그 세계에서 나는 전력을 다해 삶을 저주한다. 무수한 나는 나라고 말할수 없고 유일한 나는 찰나의 찰나. 우주는 아주 넓고 깊고 신비로우므로 내가 유일하든 무수하든 상관없을 테고, 허무하긴 마찬가지다. 허무를 잊지않으면 낙관할 수 있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담대해진다. 괴팍한 불안이혼자 지껄이도록 내버려두고 소설을 쓸 수 있다.
쓰다 보면 견딜 수 있다.


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차가운 수요일 오후 2시경, 할머니는 엄마가 쟁반에 차려온 마음도 약도마다하고 창을 조금만 열어달라고 했다. 엄마는 창을 열고 할머니 옆에 누웠다. 할머니의 고맙다는말에 엄마는 무언가를 느꼈고,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는 창에 담긴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지금은 맑다고. 엄마는 할머니의 말을 잘 들으려고 몸을 꿈틀거리며 할머니 가까이 다가갔다.
할머니는 1년 전쯤 병원에서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요양원 생활에 불만은 없었고 건강이회복되리라는 기대도 없었다.  - P9

할머니는 대부분 날들 건강했고 노환은 서서히찾아왔다. 늙으면 죽는다. 모두 알고 있잖아. 그렇다 해도 ‘할머니가 죽어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내게 커다란 산 하나를 옮기는 일과 비슷했다. 산을 절반도 옮기지 못했는데 할머니는 떠났다. 남아 있는 절반의 산을 바라보며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말을 종종 떠올렸다.
지금은 맑다.
엄마는 ‘맑다‘는 단어를 귀중하게 간직했지. 나는 ‘지금‘이란 단어에 집중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나. 지금은 금방 사라지지. 할머니가 죽었다는 건할머니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내게 시간이 있다는 것.  - P11

그때 내가 이해할 수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른의 일이었다. 죽음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사람들, 죽음이란 원래 그런 것임을 어렴풋이 경험한 사람들의 일. 이제 그들의 나이가 되어서 나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할머니가내게 남긴 2백만 원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못하는 거를 네 엄마가 하는 거고 네 엄마가 못하는 거를 내가 하는 거고.
나를 맡아 보살피던 어느 날엔가 할머니가 무심히 꺼낸 말.
언젠가는 네가 못하는 거를 네 엄마가 할 거고네 엄마가 못하는 거를 네가 할 거고. 그런 거다.
사는 게. 지금이 영영일 것 같지만 나중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고. - P21

나는 내 시간을 사는데 거기 누가 들어오는 거야 그런다고 내 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해가 뜨고 진다고 시간이 가는 거겠나. 내가 알고 살아야 그게 시간이지. 네가 지금 부모를 원망할 수는 있어. 원망하는 그 시간은 어디 안 가고 다 네거야. 그런 걸 많이 품고 살수록 병이 든다. 병이별게 아니야. 걸신처럼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지.
그때 나는 싱크대에 기대앉아 마늘을 까면서 할머니의 말을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가또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잔소리라고 생각했던 할머니의 어떤 말들은 내 몸에 체취처럼 스며들어 지울 수 없는 일부로 남아 버렸다.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라면 나는 지금 병이 든 상태인지도 모른다. - P22

교복이 한두 푼도아니고 가게 하는 입장에서야 교복을 또 사러 오면 이득이니까 말리지는 않겠지만 내가 진짜 손님입장에서 하는 말인데 내년이면 분명 후회할 거야.
엄마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 정도 후회는 매일 하고 살아요. 후회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고요.
아빠라면 돈만 주고 알아서 사 입으라고 했겠지. 내가 큰 옷을 입고 있어도 큰 옷인지 모르겠지.
내가 아빠 양복을 입고 있어도 그게 자기 옷인지모를 거다. 정말 그런지 확인해 보고 싶지만 그러려면 부산까지 가야 한다. 아빠도 아빠 양복도 너무 멀리 있다. - P52

‘지름길론‘을 짧게뻔한 대답을 듣지 않으려면 뻔한 질문을 피해야한다. 뻔한 질문을 하지 않으려면 시간과 정성을들여야 한다. 아빠에게는 내게 들일 시간과 정성이 없다. 그래서 나름 지름길을 선택한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는 대신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만 나를 생각하는지름길. 내가 그 틀을 벗어나면 ‘네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라고 말하면서 틀을 벗어난 나를 비정상으로 잘라 버리는 거다. 아빠가 생각하는 틀 안의 자식은 공부 열심히 하고 말썽 부리지 않고 예의 바르고 싹싹하고 정직한 사람. 아빠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신경을 써야 하니까. 골치가 아플테니까.  - P53

아빠에 비하면 엄마는 좀 복잡하다. 엄마에대해서라면 나쁜 말도 좋은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겠다. 엄마는 아빠와는 다른방식으로 나를 외롭게 한다.
나는 아빠에게 기대하는 게 없다. 사실 뭘 기대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기대하는 게 있다. 엄마는 아빠보다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오이와 양파를 싫어한다는 걸안다.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프다는 걸 안다. 필통에 연필을 넣을 때 흑심은 꼭 같은 방향으로 넣어야만 하고 조각난 지우개는 쓰지 않는 걸 안다. 내가 특별히 아끼는 옷과 좋아하는 가수를 안다. 잠을 못 자면 짜증을 부린다는 걸, 눕기 전에 손으로베개를 세 번 치는 습관이 있다는 것도 안다.  - P55

외박을하고 각방을 쓰더라도 같이 사는 건 같이 사는 것.
가구와 생활용품과 공기와 공간과 냄새를 공유하는 것. 상대의 흔적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 엄마와 아빠는 그걸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부산과경기도만큼의 거리가 필요했던 거다. 그리고 나를딱 중간에 뒀다. 마치 시소 받침처럼, ‘같이 살고싶지 않다‘와 ‘혼자 있고 싶다‘는 의미가 다르지 않나? 엄마와 아빠의 마음이 두 문장 중 어느 쪽으로기울었는지는 모르겠다. 엄마도 아빠도 나와 같이살기를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것, 내겐 이 사실이가장 중요하다. - P57

오늘 미지를 처음 만났는데도어쩐지 미지와 시내에 여러 번 다녀온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도 그랬다. 처음 가본 장소였고 처음만난 사람들이었는데도 오늘과 같은 날을 여러 번겪어 본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익숙한데왜 어색하지?
다시 통유리를 쳐다봤다. 거기 비친 나는 과거의 나 혹은 미래의 나였다. 그래서 무수히 겪어 본나였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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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책가방에는 금세 적응했다.


익숙하고도 어색한 날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 P79

바람을 타고 향기가 왔다. 라일락 향기라고 한수가 말했다. 우리는 라일락을 찾아서 비탈을 올랐다. 라일락을 찾으려고 했는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거대한 봄이 숨어 있었다. 숨어서 뽐내고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경쟁하듯 미끄러졌다. 스타킹이 찢어지고 블라우스가 더러워졌다.
웃음은 커졌다. 다람쥐다, 하고 말해서 다람쥐가사라졌다. 우리는 라일락을 찾지 못했다. 비탈을내려오자 다시 향기가 불었다. - P80

편지는 이상하다. 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펼치면 내가 전혀 몰랐던 마음이 펼쳐진다. 말은 사라지고 기억은 희미해져도 글자는 남는다. 비밀스러운 마음이 선명하게 남아 버린다. 내게 그걸 주면 나는 가진다. 편지를 쓸 때의 그 마음을 나는 확실히 가진다. - P86

여름에 나를 훑어보던 눈빛, 과학 선생이 뜬금없이여자들이 생리할 때 나는 냄새가 무슨 냄새랑 비슷하다고, 지금 이 교실에서 누가 생리를 하는지자기는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알 수 있다고 말하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을 때, 사회선생이 우유를 담아 놓은 통을 발로 차면서 젖통이라고 부르고 이상한 농담을 했을 때………. 쉬는 시간이면우리는 재수 없고 더럽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선생들의 기분 나쁜 말과 행동을 떨쳐 내려고 했다. - P87

이전까지 나는 나의 가난에 관심 없었다. 용돈이 부족할 때가 있었지만, 세상에는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기 때문에 용돈이란 언제나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은이 집에 놀러갔을 때, 은이가 주방 식탁 바구니에 담긴 만 원짜리 지폐 서너 장을 자연스럽게 집어서 자기 지갑에 넣는 걸 보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둑질을 보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은이에게 그건 도둑질이 아니었다. 생활 방식이었다.  - P88

아, 그리고 기말고사 칠 때 시험 감독을 보던 국어 선생이 내가 커닝을 시도한다고 오해하고는 갑자기 ‘이 돼먹지 못한 것이라고 소리 지르면서 화를 냈는데 (나는 문제를 다 풀고 시간이 남아서 잠깐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도 상당히 모욕적이었다. 선생은 내게 다가와서 나의 시험지와 OMR 카드를 거칠게 빼앗아 살펴봤다. 문제를 다 풀었다는 걸 확인한 뒤에도 선생은 계속나를 주시했다. 나는 기분이 나빠서 자리에서 일어나 OMR 카드를 교탁 위에 탁 내려 놓고 교실을나왔다. 너무 분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자기 멋대로 나를 의심해 놓고 사과도 없이 어쩜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교실 앞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에이씨 될 대로 되라‘라는 혼잣말이 튀어 나왔다. - P89

모욕감은 남한테서만 받는 게 아니라는 것, 내가나를 모욕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 P90

못된 것을 배웠다. 무례를 권력처럼 썼다. 내가 지금 힘드니까 너에게 너무해도 된다고.
길을 잃은 채로 너무 오래 살아서 길을 잃었다는사실조차 잊은 사람.
이 회사를 나가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는 생각을 주문처럼 하고 있다. 길을 잃은 게 아니야.
길은 없는 거야. 먹고 사는 건 중요한 문제다. 남지하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젊으니까. 나도늙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늙은이 취급을 하고있지. 삶이 길이라면 돌아갈 수 있나? 과거 어느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탈출하고 싶다. 어디로달려도 현재에 갇혀 있을 뿐이다. 나로 계속 사는건 지겹다. 일시 정지 버튼이 없다.
선배, 여기는 정말 너무합니다.
박수원은 나의 미래가 아니다.
누가 대신 살아 주지 않았다. 내가 살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과거는 꿈이 아니다. 나의 미래는 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모르겠다는 말이 지겹다. - P97

내게 편지를 쓰면서 나를 괴롭게 하는 것에 관해서만 가득 썼다. 이것이 지금 내 상태를 말해 준다. 해결될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고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자.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지금과 같은 나를 상상한 적도 없다. 과거가 아깝다. 살아갈 날보다 내가 분명히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 아까워. 겨우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 P98

아무도 내가 될 수 없고 나도 남이 될 수 없다.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자칫하면 나조차 될수 없다.
미래의 내가 이 편지를 아주 우습게 여기기를 바랄뿐이다. - P99

이모가 불을 끄며 말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누웠다.
미안해.
말하면서 이모는 울먹거렸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이모가 할머니를 이긴 것 같을때가 있다는 말은 취소. 이모는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다. - P120

넌 이유가 뭔데?
그냥, 짜증나니까.
그 정도로는 부족해.
미지는 가출 전문가처럼 말했다.
그런 이유로는 하루도 못 버텨. 잘 곳 없고 배고픈건 더 짜증나거든. - P121

진짜로?
갈 곳이 아예 없어야 해. 진짜 가출하려면.
미지의 말은 약간 어려웠지만 무슨 뜻인지 알것도 같았다. 외갓집에서 나간다면 엄마의 집을찾아가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지. 어찌어찌 엄마의 집을 찾는다고 치자. 엄마는 나를 다시 외갓집으로 보내지 않을까? 만약 엄마와 같이 살게 된다고 해도 그건 진정한 가출이 아니다.
돌아갈 집이 없어야 해. 집을 완전히 폭파시키고 나가야 해. 그래야 성공할 수 있어. - P123

기억은 거의사라졌고 마음은 예전처럼 애틋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난감을 간직하는 이유는… 버릴 수 없기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자 장난감에 지저분한 슬픔을 묻히는 것만 같고 내가 더 싫어졌다. 만약에 내가 사라진다면 결국 이렇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나를 찾고 슬퍼하겠지. 그리워하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드문드문 생각하겠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는 어떤 물건을 봐야 간신히 나를 떠올릴 테고, 언젠가는 그런 기억마저 사라질 것이다. 내가 만약천사의 장난감을 간직하지 않았다면 나도 천사를완전히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버릴 수 없어서 다행이다. 버릴 수 없다는 마음은 중요하다. 버릴 수 없는 것들을 더 많이 떠올리고 싶었다. - P126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더는 떠오르지 않았고.…… 가출이나 하겠다고 마음먹은 내가 우스웠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한 어젯밤의 나를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싶었다. 엄마가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엄마가 필요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마음대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집을 나갈 필요도 없고 누군가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어른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모도 어른이잖아. 어른인데도 할머니 눈치를 보고 데이트할 때마다 거짓말을지어내잖아. 생각이 점점 팽창해서 뇌가 간지러운느낌이었다. - P127

그리고 나는 자꾸만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재작년 여름에는 다리가 너무 아팠다. 앉아도누워도 아팠다. 키가 크느라고, 뼈와 근육이 자라느라 아픈 거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머리가 아플때도, 감기에 걸렸을 때도, 배앓이로 고생할 때도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몸이 싸우는 거다‘ ‘몸이 자라는 거다‘ 내 몸은 멋대로 자라면서 나를 아프게 하고 어른들은 나의 모든 통증을 ‘크느라 그런다‘는 한마디로 덮어 버렸다. 할머니는 할머니의 모든 통증을 ‘늙어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몸은자라고 늙는다. 통증을 느낀다. 정신은 몸인가? 영혼은?  - P130

사전에 정의된 ‘마음‘은 내가 생각하던 의미와비슷했지만 아주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마음‘
이 무슨 뜻인지 알고 쓰는 걸까? 우리는 서로 다른
‘마음‘을 같은 글자로 쓰는 거지. 각자 다른 의미를최대한 가까이 이어 보려고 계속 쓰고 말하는 거지. 그런데 어른들은 때로 내게 그 정도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나를 ‘몰라도 되는 존재‘로 치워 버린다.  - P131

나는 왜 태어났을까. 일찌감치 죽었으면 좋았을거다. 죽음이 뭔지도 몰랐을 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안타까워하지. 죽은 사람은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을 안타까워할 거다.
아픔이 뭔지도 모르는 천사는 엄마를 아프게 하고 죽었다.
천사가 죽었을 때는 그렇게 슬퍼했으면서 살아있는 나를 버렸다.
영혼에게 공간은 필요 없다. 천사는 그렇게 태어났다. 훨씬 넓은 세상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겨우 인간인 주제에 슬프다고 울었다.
내가 있는데 왜 그렇게 불행하냐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의 어두운 방에서 나는 나의 빛을 뽐내고싶었다. - P132

이모는사랑한다고 말하는 자기를 사랑한다. 이모는 행복해서 유치한 사람.
한수가 나쁜 년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겠다고말했을 때 나는 행복했다. 나는 내가 뭐라도 된 줄알았고 최소한 나쁜 년은 된 거니까.
간직하고 싶은 기억 같은 건 없다. 나는 없는 것같은데 없어지지도 않고.
나는 진짜 울어 본 적이 없다. 우는 나는 우습다.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겠지. 나는서로 모르는 것과 서로 잊은 것을 기억한다. 오직나만 우리를 망칠 수 있다.
나는 천사는 될 수 없다. 나는 악마는 될 수 있다.
모두 나를 견딘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지 않았다. - P134

진실이라 생각되는 것을 쓰고 나자 시시해졌다.
펼쳐진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 나는 방금 모든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세계를 경험했다. 이제 더는좋게 생각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예전처럼 틈새의 빛에 마음을 쏟지는 않을 것이다. - P134

해변은 휑했다.
아니, 가득했다. 비와 바람으로 거센 파도로.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파도소리 때문에 귀가 얼얼했다. 우산을 쓸 필요가 없었다. 눈물을 참을 필요도 울음소리를 감출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해변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에 서서 쓸모없는 우산을 간신히 들고 비 오는 바다를 바라봤다. 그건 정말…… 이상한 풍경이었다.
봄에 비가 내리면 꽃이 진다. 여름에 비가 내리면 개구리가 운다. 가을에 비가 내리면 낙엽이 물들고 겨울에 비가 내리면 눈을 기다리게 된다. 숲에 비가 내리면 나무가 자라고 논밭에 비가 내려서 - P164

면 곡물이 자란다. 운동장에 비가 내리면 흙이 젖고 도로에 비가 내리면 아스팔트가 식는다. 바다에 비가 내리면…… 바다가 된다. 바다가 될 뿐이다. 무수한 물방울이 거대한 물에 합쳐질 뿐이다.
대체 무슨 소용이지? 물은 물이 되고 물은 다시 물이 된다는 게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나밖에 될수 없다는 게? 물고기는 물고기로만 살고 새는 새로만 사는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자 너무 갑갑했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지? 신은 신으로만 살까?
신은 우주인가? 우주는 우주로만 존재할까? - P165

나는 계속 나일뿐이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 같고,이별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 같고, 포기를 위해 꿈꾸는 것만 같다. 가방에 국어사전이 있었다면 ‘허무‘라는 단어를 찾아봤을 거다. 내가 지금 느끼는이 감정과 ‘허무‘가 딱 들어맞는 단어인지 확인해봤을 거다. - P166

이별이란 이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일이란 걸. 이별은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 아닌가? 엄마와아빠는 아직도 이별 중일까? 벌써 이별했을까? 남과 남이 만나서 사랑하는 사이로 지내다가 다시남과 남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별은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겠지만… 완전히 처음과 같은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젖은 채로 바람을 맞으니 추웠다. 그만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계속 바라보고도 싶었다. 물이 물이 되는정직하고도 허무한 광경을 분노의 춤을 추는 비내리는 바다를. - P167

샌들을 벗어 젖은 모래를 털어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모는 야단맞은 아이처럼 작은 소리로 겨우겨우 고맙다고 말했다.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반드시 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던 엄마의 길 끝에는 집이 있었다. 엄마도 무서웠을까. 나를 보살피며 무서움을 덜어 냈을까. 엄마에게도 그리운마음이 있었던 걸까. 방금 이모가 말하길, 그리운마음은 착각이랬다. 이모는 오늘 무언가를 확인했다. 나도 확인하고 싶었다. - P169

올 때만큼 기나긴 길이 남아 있었다. 택시를 타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집에 닿으면 깜깜한밤일 것이다. 여전히 비가 내릴까? 집은 변함없을것이다. 우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방에서 똑같은 이불을 덮고 누울 것이다. 하지만 이모는 어제와는 조금 다른 사람으로 잠들겠지. 비 내리는 바다를 봤고 사실을 확인한 나도 조금은 다른 사람으로 잠들 것이다. 비는 비고 바다는 바다다. 섞인다고 하나가 되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이별할 수도 있다.
우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않을 것이다. - P170

하지만 글자 그대로 ‘추운 사람‘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춥게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추운 사람. 따뜻해지려고 노력하지 않고, 추운 상태로 존재하는 사람. 그래서 바라보는 사람을 춥게만드는 사람. 나의 문제집에 자기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쓰고 그것을 지우는 엄마는 무척 추워보였다. 나도 나를 형편없다고 생각할 때가 아주많지만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 엄마는 했다. 해 놓고 후회하듯 지웠다. 엄마는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훨씬 서투르고 나약한 사람인지도 몰라.
그렇다면 기꺼이 엄마의 핑계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내 핑계를 대고 잘 지내면 좋겠다고. - P181

나는 친구란 뭘까 생각했다. 우리는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떤 기억을 만들었나. 같이 있으면 재밌었고 질투했고 외로웠고 때로는 지겨웠고, 친하니까 더욱 비밀을 감췄던 우리들. 미지가 자조적으로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는 순간에도 ‘그래도 넌 인기도 많고 예쁘잖아‘라고 생각하면서 미지보다 더 불행한 이유를 찾으려는 내가너무 한심했다. - P204

많은 사람이 미지의그림을 보며 감탄했지만 미지는 자기 그림이 얼마나 특별한지 모르는 것 같았다. 숱하게 고백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미지는 누구나 고백을 받고 자기만큼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미지는 자기만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미지가 좋았다. 나의 미래보다 미지의 미래가더 궁금했다. 미지 말이 맞다. 나는 나에 대해서는 - P208

비관적인 사람.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 버리는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눈은 조금씩 쌓였다.
거뭇한 하늘은 점점 내려앉으면서도 차차 멀어지는 것 같았고.
비슷한 옷을 입고 겨울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은 자세히 보면 저마다 달랐다.
한때 나는 우리 모두 지옥에서 왔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행복할 수도 있다. - P209

이제 정말오지 않을 거라고 미지는 말했다. 같은 다짐을 계속하며 우리는 어른이 되겠지. 남들은 절대 알지못할 하루와 마음을 끌어안으며, 중요한 말일수록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하지않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 P210

깊은 비관에 사로잡힌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면 마찬가지일까.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까.
답장을 쓰고 싶었다. 펜을 들었다. 어린 나에게이런 문장을 주고 싶었다.
나는 불행하지 않다. 그래도 너는 행복하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위와 같은 문장을 줄 수 없다. 행복은 나의 몫이다. - P212

나는 다시 빠르게 일기를 훑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이모와 속초 바다를 보고 왔다‘라고 시작하는 일기에서 멈췄다. 그 일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비는 비고 바다는 바다다. 나는 나만 될 수 있다. 나는 남이 될수 없다.‘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 지난 번 카페에서. 1년 후에 정말 그 편지를 받을 수 있을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없지만, 그래도 변치 않은 부분은 존재할 테고, 일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순간 마치 만난 것만 같았다. 문장 속에서. 과거의 나를. - P221

말하면서 예감했다. 언제가 되었든 나는 이것을버릴 수밖에 없으리라. 엄마나 할머니의 손이 아니라 내 손으로 할머니가 내게 남긴 진짜 유산은 바로 그런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럼 테이프로 박스를잘 포장해 두라고 엄마는 말했다. 테이프와 가위를 찾아 박스를 밀봉하려다가 일기장을 살짝 들춰봤다. 입 속의 혀처럼 편지 봉투는 거기 잘 들어 있었다. 아주 닫아 버리기 전에 다시 한번 읽어 보고싶었다.
봉투를 열고 종이를 펼쳤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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