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이가 새 신발을 신고 왔다. 생긴 건 축구화 같아도
‘풋살화 라고 했다. 내가 잘 못 할아들으니까 또박또박 "풋,
살, 화, 풋살화예요. 축구화 아니고"라고 강조했다. 풋살화는축구화랑 바닥이 다르고, 그냥 운동화보다 발등 부분이 납작해서 공 차기가 좋다고 했다. 아버지랑 같이 인터넷 쇼핑몰을 둘러보며 골랐고, 자기는 3학년치고는 발이 작아서 치수를 정할 때 좀 고민했고, 지난주에 주문했는데 어제야 도착했기 때문에 오늘 처음 신었으며, 이걸 신었더니 잘 뛰어지는 것 같았고, 그런데 생각만큼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계속하려는 현성이를 간신히 말렸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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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하루를 넘긴데다 출산 후에도 출혈이 심한 난산이었다. 출혈이 그치고서도 증조모는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음식이 역하게 느껴져서 묽은 미음도 넘기지 못했다.
어쩌면 친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비 아주머니는 진땀을흘리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그동안 그녀에게 얼마나 의지했는지, 그녀와 주고받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 이해했다. 살아나게 된다면, 새비 아주머니는 생각했다. 삼천이가 살아나게 된다.
면 하늘 아래 부끄러울 것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하늘에 빌었다.
새비 아주머니는 고봉으로 푼 밥을 챙겨 증조모에게 갔다. 그러고는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증조모에게 밥을 입에 넣고 씹어서 사발에뱉으라고 말했다. 증조모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밥을 씹어 뱉고, 다시 씹어 뱉었다. 며칠을 계속 그렇게 하니 기운이 조금 돌아왔다. 밥알을 삼키지는 못했지만, 밥을 씹는 동안 나온 밥물이 목에 조금씩 넘어간 것이었다. 그다음은 묽은 미음. 그다음에는 조금 덜 묽은 미음,
다음에는 죽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증조모는 살아났다.
- P73

"아저씨가 일본 가서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없었어. 그런 건 철저히 숨겼던 거야."
그 말을 하고서 할머니는 한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봤다.
마치 그 자리에 할머니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듯, 방심한 것처럼 보였다. 아저씨의 사진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새비 아주머니가 그린 그림은 있었어. 연필로 그린 그림이었는데 서툰 솜씨였지만 누가 봐도 아저씨였어. 그 그림도 없어져버렸지만.....… 그래도 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새비 아저씨는 그만큼더 사는 거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모르는 새비 아저씨를 나도 그려볼수 있었으니까. 키가 크고, 목이 길고, 생전 본 적도 없던 백정의 집 - P81

에 가서 간병을 하고, 그 누구의 위에도 서려고 하지 않고,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그러다 혼자 일본으로 떠난, 지금의 나보다 한참은 어린이십대 초반의 남자를 그려볼 수 있었으니까. 그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는 자신이 죽고 나서 태어난 어느 사람에게 이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 P82

새비가할머니는 반듯이 누운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며 편지 낭독을 들었다. 그러다가도 가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했고, 두 손을 마주잡기도 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곁눈질로 보면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육십칠 년 전에 쓰인 편지가 남아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편지에서 새비 아주머니의 목소리와 손길이 그대로 느껴지는 게 더 놀라웠다. 마치 새비 아주머니가 내 속으로 들어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편지를 받아 읽었을 증조할머니의 마음도 내 안에서살아났다.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증조할머니의 모습이 내 눈에도 보였다. 나는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 P121

조선인들이 많이 죽었을 거라고 했어. 그즈음 히로시마에는 조선인들이 많았다구, 희자 아바이처럼 제 발로 간 사람은 드물고 끌려간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됐다. 나도 희자 아이가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몰랐어. 화천 사람들이 많았더라. 주소라도 받아놓았더라면 편지라도 부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고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다고 인타까워했어. 그 말을 하면서 회자 아바이가 얼마나 울던지…… 그 얼굴을 내 똑바로 처다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회자 아바이가 말했어, 조선 사람이고 일본 사람이고 중국 사람이고 간에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은 세삼천지 어디에도 없다고,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희자 아바이는 내 손을 붙잡고서 그 말을 및 번이고 반복했어.
회자 아바이가 어떤 사림이었나. 범시에 감사해하고, 매일 주어지는삶에 감사해하고 ...… 심천아, 우리가 새미에서 예전에 그렇게 굶을 때두, 목숨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한 사람이 희자 아바이었다. 처음엔 이런 미친 아바이가 있나 싶기도 했는데, 그게 회자 아바이 천성이었더랬어. 나두 집안이 온통 천주교 도여서 세례를 받았지만 믿음이라는것이 없었다. 그런데 회자 아바이는 달랐어.
- P123

기억하갔시오. 기래 내답했지. 그게 내가 희자 아바이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인 것만 같아서.
삼천아. 내 너한테 허풍을 떨었다. 희자 아바이가 곁에 있는 시간이어도 괜찮다고 했지. 아예 다시 보지도 못하고 헤어지는 것보다 낫다면서, 그런데 아니야. 희자 아바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거이 내가할 짓이 아니구나, 지옥이 있대두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기야, 삼천아.
내가 허풍을 떨어도 심하게 떨었어. 난 이걸 버틸 수가 없다. 버틸 수가없어.
삼천아,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그게 회자 아바이 유언이다. 희자아바이를 기억해줘, 삼천아.
- P125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 P130

그뒤로 언니가 다시 내 옆에 올 때면 나는 언니를 밀어냈다. 가까이 오지 마. 언니는 슬퍼 보였고 그런 언니를 보는 내 마음도 그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나의 세계에서 사라졌다. 가끔은 언니가 해싶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떠올렸고, 언니와 함께 놀 때의 감각을 떠을리기도 했지만 모든 것은 낮잠을 자다 꿨던 꿈처럼 실감을 잃어갔다.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한글과 숫자를 배웠고 시계를 읽는 법을 배원고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거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웠다. 나는 엄마에게 죽은 언니와 놀았다고 말하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
고, 문제가 없다고, 나는 언제나 잘 웃는 아이였고, 자라서는 잘 웃는어른이 됐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P171

할머니는 희자야, 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가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치받치던 두러몸이 그제야 몸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이란 신기한 감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할머니는 자신이 단 한 번도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가 대구까지 무사히 왔으리라고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희망이 꺾였을 때의 충격을 감당할수 없을 것 같아서 작은 희망까지도 모두 버린 채로 피난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다가 일어나서회자를 끌어안았다. 할머니의 품에 안긴 희자도 울기 시작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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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우에게 물었다.
지우는 개새끼라는 말은 개의 새끼라는 뜻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개는 가짜라는 뜻이라고, 그러니까 정상 가족‘ 이라는 테두리 밖의
‘가짜‘ 자식을 뜻하는 멸칭이라고 했다. 지우는 거기까지 설명하더니나쁜 말이네, 라고 말하고는 앞으로는 그 던어를 쓰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더니 개새끼. 미친놈, 씨발놈 어느 것 하나 쓸 만한 말이 없다.
면서, 인간은 왜 이렇게 치졸하냐고, 왜 꼭 약한 사람을 짓밟는 식으로밖에 욕을 못 만드느냐고 했다.
"참신한 욕이 필요해, 분이 풀리는 욕이 필요해."
그것이 지우의 결론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개새끼라는 단어를 종이에 펜으로 써보았다. 개새끼. 어원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로그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강아지를 떠올렸다. 자기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의 바짓자락에 붙어서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왜 개새끼라고 하나, 개가 사람한테 너무 잘해줘서 그런 거 아닌가.
아무 조건도 없이 잘해주니까. 때려도 피하지 않고 꼬리를 흔드니까.
복종하니까, 좋아하니까 그걸 도리어 우습게 보고 경멸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사람 아닐까. 나는 그 생각을 하며 개새끼라는 단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 자신이 개새끼 같았다.
- P13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이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P14

증조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잠시라도 뒤돌아보면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십칠 년 동안 살던 집, 누린내가 가시지않던 집, 똥지게꾼도 상대해주지 않아 스스로 오물을 퍼내야 했던 집해질녘 구석에 핀 꽃이 예뻐 바라보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날아온 돌에머리를 맞아야 했던, 무엇 하나 좋은 기억이 없던 집. 그 집을 떠나 기차역으로 가는데 그 짧은 길이 천릿길 같았고, 걸음걸음이 무거워 납으로 만든 신발을 신은 것 같았다.
그래도 떠나야 했다. 그게 사는 길이었으니까. 열차에서 노란 위액을 게워내면서 증조모는 생각했다. 잊을 거라고, 잊어버릴 거라고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할머니는 증조부가 증조모에게 왜 미쳤었는지 조금은 이해한다고말했다. 증조모의 눈 속에는 아이들에게서나 보일 법한 호기심과 장 - P34

난기가 있었다. 타고난 기질이 그랬다. 백정 딸 주제에 뭐가 당당하고즐거워서 저런 표징을 짓는 거지? 그런 이유로 어린 시절에는 맞기도했다. 고개 숙이고 걸어. 감히 양민과 눈을 마주치려 해?
그러나 중조모는 고개를 숙이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숙이려다가도 저절로 머리를 들게 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리 지어 날아가는 하늘의 새들을 쳐다보느라 넋을 놓았다. 만사를 궁금해했다. 세상이 궁금하고 사람이 궁금했다. 증조모가 증조부를 만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증조모는 역사 앞에서 삶은 옥수수를 팔았는데, 일이 끝나면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칠로를 따라 걸었다. 어느 날은 이 절로가 대체 몇리나 이어져 어디에 넣는지 궁금했다.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어 저쪽멀리서 철로를 따라 걷고 있던 남자에게 가서 물었다.
- 이 철길은 몇 리나 이어지는 기라요?
말을 뱉어놓고 나서야 증조모는 정신이 들었다. 백점이 양민의 길을 막았으니 호되게 맞아도 할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 어린 남자는 멀뚱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 P35

그들은 그저 그녀를 피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가도 그녀가다가가면 조용해졌고 도무지 끼워주지 않았다. 그녀가 인사를 하면고개를 돌렸다. 적극적으로 그녀를 위협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녀는공격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입었다. 그녀는 댓돌에 멍하니앉아서 마당에 떨어지는 햇빛을 바라보곤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빠르게 포기하고체념하는 게 사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삶에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그건 사치이기 전에 위험한 일이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 P54

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부정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그녀는 댓돌에 앉은 채 엄마가 알려준 방법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아픈 엄마를 버렸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엄마를 땅에 묻어주지 못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래, 그런 일이 있다. 그건 항상 그랬던 일이다.
엄마의 말대로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식의 생각은 오히려 그녀를 더 화나게 할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그래,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쥐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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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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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에서 빛이나는 작가는 간혹 장편에서 빛을 잃기도하는데 최은영작가의 빛은 어둠속에서도 찬란했다. 삼천이, 새비. 이 이름들에 빠져 백년의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마음이 반짝반짝해졌다. 어둑신한 절망에도 [밝은]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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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봄에 매력적이지. 당신은 한겨울에만 가봤잖소. 어느 호되게 추웠던 날 밤에, 당신 코가 푸르뎅해졌던 기억이 나는군, 분노로 눈은 휘둥그레지고 머리칼은일어서고, 추위가 마치 내 탓이라도 되는 양 날 노려봤잖소.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목소리는 다정하고 아련했다. 루실은 혹독했던 그 겨울의 한파를 떠올렸으나 어떤 애틋한 추엄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오직 호텔과 식당 사이를 정신없이 달리던 택시의 여정뿐. 우수에 젖든 찬란하든, 추억에 잠기는 건 샤를이었다. 늘 샤를이 추억을 간직했다. 순간 루실은부끄러워졌다. 그녀는 감정적으로도 샤를에게 얹혀살고 있었고, 이 부분이 다른 무엇보다 곤혹스러웠다.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진실을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가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가짐작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렇다, 그녀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비겁했다.
- P91

그들은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나, 그들의 육체는 한없는 열광과 경애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 감정은 기억력이 순간의 격렬함에 의해 증발해버리는 절대적인 감정이어서, 헤어진 뒤에도 구체적인 기억을, 가령 어둠 속에서 속삭였던 말 하나, 또는동작 하나를 절망적으로 더듬어보려 해도 허사인, 그런 절대적인 감정이었다. 그들은 거의 넋이 나가서 몽유병 환자들처럼헤어졌다가, 그로부터 채 두 시간이 못 되어 그것만이 유일한생존 요소, 유일한 현실이라는 듯 오로지 다시 만날 순간만을기다렸다. 나머지는 전부 의미 없었다. 오직 이 기다림만이 그들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시절 속에서, 다른 것들 속에서, 기다림 때문에 장애물이 되어버린 그 모든 것들 속에서 그들을지탱해주었다. 루실은 앙투안을 만나러 가기 전에 여섯 번이나 핸드백 속에서 차 열쇠를 확인했고, 앙투안의 집까지 가는길을 열 번이나 복기했으며, 평생토록 거만하게 방치했던 자명종을 열 번이나 곁눈질했다.  - P92

그는 또한 자신이 내적 갈등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라는 걸알았다. 실제로 그는 행복보다 불행에 소질이 있었고, 루실을보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는 그녀가 10년 전에 오직 한 번의 사랑을 했고, 그것마저 잊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들의 열정을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위태위태하고 환상적인 선물로 간주했다. 그래서 거의 미신적인 믿음으로 다음 단계를 계획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기를 좋아했고, 그를 그리워하기를 좋아했다. 그와 떳떳하게 함께 살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숨는 것도 좋아했다. 매 순간의 행복으로 충분해했다. 혹여 그녀가 두 달 전부터 상투적인 사랑 노래에 감동하는 자신에게 문득문득 놀라는 일이 있다 해도, 사랑 노래의 대략적인 주제인 ‘독점욕‘이나 사랑의 ‘영원성‘ 따위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도덕은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인 바, 의도치 않았으나 뿌리 깊은 냉소주의에 필연적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분별할 수 있다면 자연히 이 냉소주의에 이르게 되고, 사기꾼들이나 허언증 환자들만이 평생토록 너저분한 낭만주의에 빠져지낼 수 있다는 듯이.
- P95

샤를은 혼자서 뉴욕으로 떠났고, 여행 일정은 나흘로 줄어들었다. 루실은 푸르러지는 파리의 거리를 컨버터블로 쏘다녔다. 그녀는 여름을 기다렸고, 센 강을 감도는 냄새와 강물에비치는 그림자들에서 그것을 감지했다. 이미 이 먼지 섞인 냄새, 머지않아 생제르맹 대로를 잠식할 나무 냄새와 흙냄새를알아맞혔다. 커다란 밤나무들이 분홍빛 하늘에서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며 하늘을 거의 뒤덮었다. 늘 너무 이르게 켜지는가로등들은 겨울의 소중한 가이드 역할에서 여름의 기생충으로 전락하며, 직업적 자부심에 손상을 입었다. 여름의 가로등은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저녁 해와, 하늘 전체에드리울 기세로 일찌감치 하늘을 박차고 모습을 드러내는 여명 사이에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 P123

이 이단은 이제 그들이 서로 간에 어떤 변덕을 부리든, 그들의 힘을 넘어서서 존재했다. 앙투안은 정신적으로는 그녀에게 적대적일 수 있었으나, 그의 육체는 이제 그녀의 육체의 반쪽인 바, 그는 완전해진 기분을 느끼기 위해 그녀의 육체가 필요하고 그리울 터였다. 그들의 육체는 친구 사이인 두 마리 말과도 같았다. 말들은 주인들의 불화로 인해 잠시 떨어져 있을지라도, 결국은 쾌락의 햇빛이 찬란한 정경 속으로 함께 질주할 터였다. 그녀에게는 그 반대는불가능하게 여겨졌다. 욕망에 저항할 수 있으리라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야 할 필요성도, 정당성도 없었다. 이불평 많은 루이 필리프 시대4 같은 프랑스에서, 그녀는 뜨겁고도 격렬한 피에 이끌리는 것보다 더 고귀한 도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 P137

사랑하고, 아마도 지금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사랑하는것처럼. 그렇게 돼버렸다. 그녀의 사랑은 그렇게, 그녀와 태양과 안락한 삶과 심지어 사는 맛 사이에 장벽처럼 놓였다. 사실그녀는 부끄러웠다. 행복은 그녀의 유일한 도덕이었고 불행은,
그것이 스스로 부과한 것인 이상(게다가 그녀는 사회의 다른구성원들이 그러는 것을 평생 이해하지 못하고 나아가 끊임없이 나무라곤 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이제 나는 대가를 치르는 구나.‘ 루실은 혐오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생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나, 당대의 사회적, 도덕적 금기는 그녀를 잠식해버렸다. 다른 이들은 천 번도 더 직시했으나 그녀는 부끄러운 병이라도 되는 양 늘 조금은 물러서있었건만,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근심이 깊어졌고, 그런 만큼 혐오감도 깊었다. 그녀는 고통이라는 병을 얻었다. 이 고통은 어떤 달콤함도 끼어들지 못하는고통이었고, 가장 불쾌한 방식의 고통 중 하나였다.
- P154

"난 누구한테도 결코 잘했던 적이 없어요. 당신도 그저 몇몇상황에서 내 마음에 들었던 것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디안이 앙투안 앞에 꼿꼿이 서서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는 그녀가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스치는추억과 회한에 잠긴 얼굴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러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자코한 손을 내미는 데 그쳤고, 그 손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몸을기울이는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의 금발 목덜미를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 광포한 고통이 어렸다. 앙투안이 고개를 들자 그의 목덜미가 사라졌다. 디안은 웅얼거렸다. "잘 있어요." 그녀는 문에 살짝 부딪히며 방을 나선 뒤 계단에 들어섰다. 앙투안의 집은 4층이었고, 그녀가 더럽고 축축한 복도의 벽지에 저 유명한 얼굴과 이제는 쓸모없어진 아름다운 손을 기댄 것은, 2층에 이르렀을 때였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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