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은 봄에 매력적이지. 당신은 한겨울에만 가봤잖소. 어느 호되게 추웠던 날 밤에, 당신 코가 푸르뎅해졌던 기억이 나는군, 분노로 눈은 휘둥그레지고 머리칼은일어서고, 추위가 마치 내 탓이라도 되는 양 날 노려봤잖소.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목소리는 다정하고 아련했다. 루실은 혹독했던 그 겨울의 한파를 떠올렸으나 어떤 애틋한 추엄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오직 호텔과 식당 사이를 정신없이 달리던 택시의 여정뿐. 우수에 젖든 찬란하든, 추억에 잠기는 건 샤를이었다. 늘 샤를이 추억을 간직했다. 순간 루실은부끄러워졌다. 그녀는 감정적으로도 샤를에게 얹혀살고 있었고, 이 부분이 다른 무엇보다 곤혹스러웠다.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진실을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가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가짐작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렇다, 그녀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비겁했다. - P91
그들은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나, 그들의 육체는 한없는 열광과 경애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 감정은 기억력이 순간의 격렬함에 의해 증발해버리는 절대적인 감정이어서, 헤어진 뒤에도 구체적인 기억을, 가령 어둠 속에서 속삭였던 말 하나, 또는동작 하나를 절망적으로 더듬어보려 해도 허사인, 그런 절대적인 감정이었다. 그들은 거의 넋이 나가서 몽유병 환자들처럼헤어졌다가, 그로부터 채 두 시간이 못 되어 그것만이 유일한생존 요소, 유일한 현실이라는 듯 오로지 다시 만날 순간만을기다렸다. 나머지는 전부 의미 없었다. 오직 이 기다림만이 그들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시절 속에서, 다른 것들 속에서, 기다림 때문에 장애물이 되어버린 그 모든 것들 속에서 그들을지탱해주었다. 루실은 앙투안을 만나러 가기 전에 여섯 번이나 핸드백 속에서 차 열쇠를 확인했고, 앙투안의 집까지 가는길을 열 번이나 복기했으며, 평생토록 거만하게 방치했던 자명종을 열 번이나 곁눈질했다. - P92
그는 또한 자신이 내적 갈등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라는 걸알았다. 실제로 그는 행복보다 불행에 소질이 있었고, 루실을보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는 그녀가 10년 전에 오직 한 번의 사랑을 했고, 그것마저 잊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들의 열정을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위태위태하고 환상적인 선물로 간주했다. 그래서 거의 미신적인 믿음으로 다음 단계를 계획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기를 좋아했고, 그를 그리워하기를 좋아했다. 그와 떳떳하게 함께 살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숨는 것도 좋아했다. 매 순간의 행복으로 충분해했다. 혹여 그녀가 두 달 전부터 상투적인 사랑 노래에 감동하는 자신에게 문득문득 놀라는 일이 있다 해도, 사랑 노래의 대략적인 주제인 ‘독점욕‘이나 사랑의 ‘영원성‘ 따위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도덕은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인 바, 의도치 않았으나 뿌리 깊은 냉소주의에 필연적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분별할 수 있다면 자연히 이 냉소주의에 이르게 되고, 사기꾼들이나 허언증 환자들만이 평생토록 너저분한 낭만주의에 빠져지낼 수 있다는 듯이. - P95
샤를은 혼자서 뉴욕으로 떠났고, 여행 일정은 나흘로 줄어들었다. 루실은 푸르러지는 파리의 거리를 컨버터블로 쏘다녔다. 그녀는 여름을 기다렸고, 센 강을 감도는 냄새와 강물에비치는 그림자들에서 그것을 감지했다. 이미 이 먼지 섞인 냄새, 머지않아 생제르맹 대로를 잠식할 나무 냄새와 흙냄새를알아맞혔다. 커다란 밤나무들이 분홍빛 하늘에서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며 하늘을 거의 뒤덮었다. 늘 너무 이르게 켜지는가로등들은 겨울의 소중한 가이드 역할에서 여름의 기생충으로 전락하며, 직업적 자부심에 손상을 입었다. 여름의 가로등은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저녁 해와, 하늘 전체에드리울 기세로 일찌감치 하늘을 박차고 모습을 드러내는 여명 사이에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 P123
이 이단은 이제 그들이 서로 간에 어떤 변덕을 부리든, 그들의 힘을 넘어서서 존재했다. 앙투안은 정신적으로는 그녀에게 적대적일 수 있었으나, 그의 육체는 이제 그녀의 육체의 반쪽인 바, 그는 완전해진 기분을 느끼기 위해 그녀의 육체가 필요하고 그리울 터였다. 그들의 육체는 친구 사이인 두 마리 말과도 같았다. 말들은 주인들의 불화로 인해 잠시 떨어져 있을지라도, 결국은 쾌락의 햇빛이 찬란한 정경 속으로 함께 질주할 터였다. 그녀에게는 그 반대는불가능하게 여겨졌다. 욕망에 저항할 수 있으리라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야 할 필요성도, 정당성도 없었다. 이불평 많은 루이 필리프 시대4 같은 프랑스에서, 그녀는 뜨겁고도 격렬한 피에 이끌리는 것보다 더 고귀한 도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 P137
사랑하고, 아마도 지금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사랑하는것처럼. 그렇게 돼버렸다. 그녀의 사랑은 그렇게, 그녀와 태양과 안락한 삶과 심지어 사는 맛 사이에 장벽처럼 놓였다. 사실그녀는 부끄러웠다. 행복은 그녀의 유일한 도덕이었고 불행은, 그것이 스스로 부과한 것인 이상(게다가 그녀는 사회의 다른구성원들이 그러는 것을 평생 이해하지 못하고 나아가 끊임없이 나무라곤 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이제 나는 대가를 치르는 구나.‘ 루실은 혐오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생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나, 당대의 사회적, 도덕적 금기는 그녀를 잠식해버렸다. 다른 이들은 천 번도 더 직시했으나 그녀는 부끄러운 병이라도 되는 양 늘 조금은 물러서있었건만,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근심이 깊어졌고, 그런 만큼 혐오감도 깊었다. 그녀는 고통이라는 병을 얻었다. 이 고통은 어떤 달콤함도 끼어들지 못하는고통이었고, 가장 불쾌한 방식의 고통 중 하나였다. - P154
"난 누구한테도 결코 잘했던 적이 없어요. 당신도 그저 몇몇상황에서 내 마음에 들었던 것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디안이 앙투안 앞에 꼿꼿이 서서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는 그녀가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스치는추억과 회한에 잠긴 얼굴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러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자코한 손을 내미는 데 그쳤고, 그 손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몸을기울이는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의 금발 목덜미를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 광포한 고통이 어렸다. 앙투안이 고개를 들자 그의 목덜미가 사라졌다. 디안은 웅얼거렸다. "잘 있어요." 그녀는 문에 살짝 부딪히며 방을 나선 뒤 계단에 들어섰다. 앙투안의 집은 4층이었고, 그녀가 더럽고 축축한 복도의 벽지에 저 유명한 얼굴과 이제는 쓸모없어진 아름다운 손을 기댄 것은, 2층에 이르렀을 때였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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