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1949년에 출판되고 1953년에 번역됐지만, 제2세대 페미니즘은 아직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때였다. 적어도 나 같은 고등학생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보부아르의 책은1963년 베티 프리던 여성성의 신화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 세대에게 흡인력을 갖지 못했다. 더구나 우리는 이 책들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의 이야기로 느꼈다.)우리 또래의 남자애들도 고통받는 재향군인 세대가 아니었다. 군복을 벗고 회색 양복의 월급쟁이가 된 윗세대 남자들은 전쟁의 아드레날린이 끊어진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미 그들은 역시 참전 용사였던 휴헤프너의 유인작전에 넘어가 교외의 집과 아내를 떠나 플레이보이 버니랜드로 유입되고 있었다. - P418
한편 더 넓은 세상에서는 원자폭탄에 의한 절멸의 공포가 우리 머리위를 음산하게 맴돌았고, 매카시즘이 사회복지나 노동자 권리를 입에올리는 것을 반역적 공산주의 선동으로 만들었다. 헝가리혁명이 소련의 탱크에 의해 진압되는 것을 보며 우리 모두 공산주의가 얼마나 흉포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1930~1940년대에 대유행했던 구호들은 이때쯤 싹 들어갔다. ‘노동계급이나 심지어 ‘세계 평화‘를 언급만해도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붙었다. B급 영화의 세계에서는 화성인이지구를 침공하고 우리 뇌를 장악해서 동료 시민에게 해코지하게 하는내용이 인기였다. 바깥은 이처럼 공산주의자가 들끓고, 내부라고 다르지 않다는 암시였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 P419
루아의 인기 중 일부는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그녀의 인생 때문이었다. 루아는 무일푼에서 거부로 일어섰다. 하지만 루아에겐 요정 대모가 없었다. 그녀는 고초를 딛고 성공했고, 캐나다인들은 그 점에 공감했다. 그들도 고초를 겪으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학적으로도고초가 유행이었다. 포효하는 1920년대는 우리에게 위대한 개츠비』같은 부와 방탕의 이야기들을 주었지만, 더러운 1930년대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처럼 비참한 빈곤을 생생히 담은 책들을 낳았다. 로맨스 소설을 제외하면 소설에서 부자들이 종적을 감추고 대신 ‘민중‘ 이 들어섰다. 가브리엘 루아는 작품뿐 아니라 인생마저 시대와 맞아떨어졌다. - P423
그래서 루아는 박물관 구경과 연극 관람과 시골 여행 등 젊은 관광객이 으레 하는 일들을 하는 틈틈이 차선책에 매달렸다. 그것은 저작활동이었다. 인생을 모방하는 재능은 무대에 설 때만큼이나 소설을 쓸때도 유용하다. 거기다 그녀에겐 이미 글을 출판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녀는 파리의 한 유력 잡지에 세 편의 글을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역설적이게도 루아가 자신의 천직이 작가라는 것을 깨닫고 성공 가능성을 확신한 곳은 영국이었다. 1939년이 됐다. 많은 사람들의 예견대로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했다. 루아는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파리가 아니라지방을 여행했다. 그리고 그해 4월 대서양을 건너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더욱 거세진 가족의 압박에도 불구하고-실컷 놀았으니 이제는연로한 어머니를 봉양해야 하지 않겠어? -그녀는 생보니파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몬트리올에 정착해 길고 고된 무명작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생은 5년 뒤 ‘싸구려 행복의 대성공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 P427
싸구려 행복』을 통해 루아가 이룬 업적 중 하나는 진부한 경건함을배격한 것이다. 루아는 정직하고 심성 고운 농부에 대한 환상이 없다. 로즈안나의 모친은 시골 사람이지만 인정머리 없고 남을 헐뜯지 못해안달인 괴물이다. 그저 음식에만 후할 뿐이다. 도덕적인 빈민도 루아의 타입이 아니다. 빈민은 미덕을 가지기에는 너무 쪼들린다. (로즈안나가 기도하는 장면이 있다. 다른 소설이었다면, 또는 더 옛날 소설이었다면 이 대목에서 로즈안나에게 성인의 환영이 임했겠지만, 대신 그녀는 묵직한 달러 뭉치의환영을 본다.) 로즈안나의 끈덕진 인내만큼은 정말 놀랍지만, 사실 그녀도 처량한 골칫거리다. - P438
이 소설에서 도덕적으로 고결하다고 할 만한 유일한 인물은 중산층이면서도 겸손한 에마뉘엘이다. 하지만 그도 자신만의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플로랑틴을 이상화한다. 에마뉘엘은 일종의 부자의빈민가 탐방에 나섰다가 플로랑틴을 알게 됐다. 다시 말해 이 불쌍한얼간이는 사회적 양심에 고통받았고, 그 때문에 생탕리의 막다른 인생들과 어울리게 됐고, 결과적으로 신분에 처지는 결혼을 한다. 당연히그의 가족은 이 결혼을 기뻐하지 않는다. 루아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거부하는 동시에 그들이 사회로부터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함을 시사했다. 이 점이 소설의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또한 출판 시점도 시의적절했다. 전쟁이 끝나가고 있었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보다 공정한 부의 분배를논할 준비가 돼 있었다. - P438
작가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시대마다 요구하는 것이 다르고, 작가마다 염두에 두는 바가 다르다. 루아가 싸구려 행복에서 보여준 작가의 역할은 현재에게 내리는 미래의 수태고지였다. 루아가 절망의 바닥에 떨어진 로즈안나 앞에 나타나 "앞으로는 형편이 필 것이다"라고 말하는 상상을 해보라. 기분이 좋아진다. 1847루아의 다른 책들에도 제각기 미션이 있다. 루아는 커튼을 열어 사람들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창문들을 보여준다. 매니토바의 외딴 오지, 평범한 남자의 평범한 삶, 자기 고향 땅의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치열했던 거리들, 예술가의 다양한 여정 등. 그리고 그녀는 독자에게 창밖을 내다볼 것을 요청한다. 그 풍경의 빈약함, 가혹함, 생경함을 있는그대로 이해하고 나아가 공감할 것을 요청한다. 가브리엘 천사는 모든소통의 천사들 위에 있고, 소통은 루아가중히 여겼던 소양이었다. - P449
캐나다가 2004년에 발행한 20달러 지폐의 뒷면에는 가브리엘 루아의말이 프랑스어와 영어로 쓰여 있다. "예술이 없다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 아니, 알 수 없다. 정치적으로 갈가리 분열된 우리 사회를 생각하면더욱 그렇다. 데이터 수집과 과학의 분화와 특화가 한계에 달하면서그 반동으로 마침내 우리가 인간에 대한 보다 전일적 관점으로 돌아서고 있는 지금, 루아의 비전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유의미하다. - P449
이런 작가를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 정도의 다작과 다양성과 창의성과 강도는 퀘벡 문학에서, 아니 캐나다 문학에서, 아니 사실상 어느 문학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마리클레르 블레는 고유하다.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고, 예술을 제외한 어떤종교에도 가입돼 있지 않다. 그녀는 다만 부단한 탐험가다. "바람이 제멋대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못하나니, 성령에서 난 이가 모두 그러하니라(요한복음3장 8절)." 마리클레르 블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영을 따랐고, 그녀의 작품이 그 결과였다. 블레 없는 우리 문학을 상상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하다. - P476
이 일은 현재 우리 대부분이 당연시하는 하지만 오래지 않은 과거에 여성과 소녀들이 어렵게 쟁취해낸 권리가 언제든 박탈당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웁니다. 이 권리는 문화적으로 매우 얕게 심겨 있습니다. 이 권리는 역사적으로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고, 해당 문화권의모두가 열렬히 신봉하지도 않습니다. 다가오는 미국 대선의 남성 후보만 해도 그것을 믿지 않는 듯합니다. 그는 남성과 소년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롤모델로 작용합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성폭행 통계도 우리 시대를 잘 말해줍니다. 현재 #NotOkay 해시태그 아래 분노의 봇물을 이루는 여성들과 소녀들의 트윗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들이 물어보거나 궁금해합니다.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나요?" 저도 지칠 때까지 대답합니다. 물론이죠.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저도 한때는 10대 소녀였고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저도 한때는 기차역 같은 곳에 많이 출몰하는 더듬이들과 노출 아티스트들의잠재적 표적이었습니다. - P482
예술이 무슨 소용인가? 돈이 주요 가치척도인 사회가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예술과 예술가들을 싫어하는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예술가 본인들이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국의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확연히 싸늘해진 공기를 느낀다. 독재자는 무릇 억압하는 만큼이나 아부와 공물을 요구한다. ‘든지 닥치든지‘가 그들의 통치 원칙이다. 냉전 기간 중 수많은 작가, 영화제작자, 극작가들이 ‘반(反) 미국적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FBI의 방문을 받았다. 이제 그때의 역사가 되풀이될 것인가? 자기 검열이 시작될까? 미국에지하 출판의 시대가 열릴까? 출판에 따를 보복을 피해 원고가 비밀리에유통되는 시대로 극단적으로 들리지만, 미국의 과거 전적과 오늘날 권위주의 정권들의 세계적 발호를 생각할 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 P494
당연히 항의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고, 예술가와 작가들은 거기 동참하라는 요구를 받을 것이다. 대의에 목소리를 보태는 것, 이것이 그대들의 도덕적 의무가 아닌가? (유독 예술가들이 도덕적 의무에 대한 훈계를듣는다. 다른 직업인들, 가령 치과 의사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운명이다.) 하지만 창작자에게 무엇을 창조할지 지시하거나 남들이 세운 고매한 취지에 봉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 권고사항에순응하는 창작자들은 한낱 선전물이나 이차원적 비유만을 만들어낼공산이 크고, 그것은 뭐가 됐든 예술이 아니라 지루한 설교일 뿐이다. 무릇 범작들의 화랑은 선의로 도배된 곳이다. - P498
단기적으로 봤을 때, 아마도 우리가 예술가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늘 기대해왔던 것뿐이다. 한때 굳건했던것들이 무너져 내려도 그들은 그들만의 예술 정원을 가꾸는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하는 것. 그리하여 일시적 도피와 통찰의 순간을 동시에 제공하는 대안적 세계를 창조하는일, 우리가 처한 세계의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창문을 내주는 일,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트럼프 시대가 왔다. 위기나 공포의 시기에 우리 각자가 투표수나통계치 이상의 존재임을 일깨우는 것은 예술가와 작가들이다. 삶은 정치에 의해 어그러질 수 있고, 또 많은 삶들이 실제로 그렇게 됐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시대 정치인들의 총합이 아니다. 역사를 통틀어 예술에 거는 기대는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서 최대한 강력하고 웅변적으로인간됨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 P501
내가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1972년 이래 내게 붙은 죄목 명단에하나가 더 추가됐다. 참수된 남자들의 머리로 쌓은 피라미드를 올라가서 유명해진 여자(좌익 성향 잡지). 남성 예속에 환장한 도미니트릭스 (우익 성향 잡지, 내가 가죽 부츠를 신고 채찍을 휘두르는 그림까지 실었다). 토론토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본인에게 비판적인 사람이면 그게 누구든 백색 마녀 마법으로 소멸시킬 수 있는 고약한 인간. 내가 이렇게 무서운사람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급기야 여성들과도 전쟁을 벌이는 모양이다. 나는 졸지에 강간을 옹호하고 여성을 혐오하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됐다. 고발자들의 눈에 착한 페미니스트란 어떤 페미니스트일까? - P513
나의 근본적인 입장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도 범죄행위를 비롯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 즉 성자 같은 행동부터악마적 행동까지 온갖 행동을 다 할 수 있다. 여성은 범법 행위가 불가능한 천사가 아니다. 만약 여성이 천사라면 여성은 범죄 혐의로 재판정에 설 필요가 없다. 여성은 언제나 옳으니까. 이미또한 나는 여성을 자기 주도나 도덕적 결정 능력이 없는 아이로 보지도 않는다. 만약 여성이 아이라면 우리는 19세기로 후퇴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재산을 소유해서도, 신용카드를 가져서도, 고등교육을 받아서도, 출산 주도권을 가져서도, 투표를 해서도 안 된다. 북미에는 실제로 이 상태로의 회귀를 추진하는 유력 단체들이 있다. 하지만아무도 그런 단체들을 페미니스트로 보지 않는다. - P514
무엇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여성의 시민권과 인권이 존재하려면 우선 (법적 절차에 입각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포함한) 시민권과 인권부터 있어야 한다. 여성의 투표권이 있으려면 우선 투표권이 있어야 하듯이말이다. 오직 여성만 그런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어야 착한 페미니스트일까? 당연히 아니다. 그것은 남성만 그런 권리를 가졌던 과거 상황의 동전 뒤집기에 불과하다. 나를 고발한 착한 페미니스트도, 나 같은 나쁜 페미니스트도 위의전제에는 동의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우리가 서로 갈라지는 지점은어디일까? 그리고 나는 어쩌다 이 지경으로 착한 페미니스트들과 척을 지게 됐을까? 나는 지금껏 도의상 많은 청원서에 서명해왔다. 2016년 11월에도UBC 어카운더블(UBC Accountable)‘이라는 공개 항의서에 서명했다. - P514
사례의 목록은 길고 좌우익 모두에서 일어났다. ‘덕과 공포‘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저격당한다. 이때 반역자가 없었다거나 모든 목표 집단이 억울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런 시대에는 증거 우선 원칙이 무시된다는 뜻이다. 이런 일들은 늘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진다. 때로는 일시적이나마 정말로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하기도 한다. 하지만때로는 이런 일들이 새로운 새로운 탄압 형태들의 구실로 쓰인다. 역설적이게도 자경단 정의 - 재판 없는 선고는 정의의 부재에 대한 항거로 시작된다. 혁명 전 프랑스처럼 사법 시스템이 부패했거나 미국서부 시대처럼 무법천지일 때 사람들은 자력 해결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처음에는 양해 가능한 임시 자구책이었던 자경단 정의가 문화적으로 굳어져 집단 린치 관행으로 변질된다. - P517
이런 문화에서는 버젓이있는 사법제도가 팽개쳐지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권력 구조가 가동되고 유지된다. 예컨대 코사 노스트라도 원래는 폭정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됐다. 지금의 미투 현상은 망가진 사법제도의 징후이다. 여성들, 특히 성적 학대의 고발인들은 기업 조직을 포함한 제도권에서 공평한 발언권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그들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도구를 들었다. 그 결과 별들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 P517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해 사법제도를 무시한다면 무엇이 그 자리를차지하게 될까? 누가 새로운 실세가 될 것인가? 확실한 건 그게 나 같은 나쁜 페미니스트들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우파에게도 좌파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양극화 시대에는 극단주의자들이 승리한다.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종교가 되고, 그들의 견해를 추종하지 않는 사람은변절자 · 이단 · 반역자로 몰린다. 온건 중도파는 전멸한다. 소설가들이우선적으로 용의선상에 오른다. 그들은 인간에 대해 쓰는 사람들인데, 인간은 도덕적으로 애매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목적은애매성을 쓸어내는 것이다. - P518
이 사건을 둘러싸고 작가들이 분열해서 서로 맞서고 있다. 공격자들이 항의서를 여성에 대한 선전포고로 왜곡시켜 비방한 영향이 컸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나는 우리 모두ㅡ착한 페미니스트들과 나 같은 나쁜페미니스트들 모두가 비생산적인 논쟁을 멈추고 힘을 합쳐서 스포트라이트를 애초에 향했어야 했을 곳으로 돌리기를 촉구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UBC다. 심지어 보조 고소인 중에서도 두 명이 UBC의 조치를비난하는 입장을 냈다. 그들의 용기는 감사를 받아야 마땅하다. 최근 윌프레드로리에대학교의 경우처럼 UBC도 지난 조치에 대해중립 기관의 조사를 받고, 조사 과정과 결과를 공개할 것을 약속해주기 바란다. 그렇게 되면 UBC 어카운터블‘ 사이트는 목적한 바를 달성하게 된다. 그 목적은 결코 여성을 억압하는 데 있지 않았다. 책임의식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일이 어쩌다가 여성의 권리에 반(反)하는 일이라는 누명을 쓰게 됐단 말인가. - P519
학대받는 이들로 유지되는 부유한 도시,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떠나는 사람들(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의 오멜라스는 그런 곳이다. 따라서 내 질문은 이런 뜻이었다. 다수의 행복이 일부의 고통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세상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고통받는아이 없이 어떻게 오멜라스를 건설할 수 있을까요? 어슐러 K. 르 귄도 나도 답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르 귄이 평생답하고자 노력했던 질문이었고, 그 노력의 과정에서 그녀는 많고 다양하고 매혹적인 세상들을 너무나 능란하게 창조했다. 무정부주의자로서 그녀는 젠더 평등과 인종 평등을 이룬 자치 사회를 원했을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비(非)인간 생명체도 존중받는 사회를 원했을 것이고, 출산은 강요하면서 정작 엄마들과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 사회와 반대되는 아동 친화적인 사회를 원했을 것이다. 그녀의 글에서 나는 그렇게 짐작한다. - P521
학사 일정에 여학생들이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었지만 전면적 접근은허용되지 않았다. 식당을 지나갈 수는 있었지만, 감히 식당에 얼굴을들이미는 여학생은 남학생들이 돌처럼 던지는 빵에 맞을 각오를 해야했다. 르 귄이 작가, 그것도 사이언스 픽션 작가가 되자 해당 보루를 사수하려던남자들은 배타적인 빵 던지기를 재개했다. 르 귄도 알아챘고, 즐겁지 않았다.)르 귄은 래드클리프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프랑스 문학과 이탈리아 문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당시에 흔히 하던 말로 남자처럼 생각하도록 배웠다. 폭넓게 별나게, 엄중하게. 하지만 결혼과 함께 학계를 떠난 뒤 자신이 어떤 사회에 있는지 실감했다. 그곳은 법적 견지에서 여자들을 무책임한 열세 살짜리로 취급하는 사회였다. 자신이 성인임을 이미 깨우친 사람에게 이는 깡통 안에 화산을 봉하려는 것과 다름없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의 제2세대 페미니즘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이 세대의 미국 여성들이었다. 이때 그 깡통이 폭발했다. 그리고 이 시기가 작가로서 르 귄의 에너지가 폭발하던 시기였다. - P522
하지만 정치적 생각과 활동은 이 놀랍도록 재능 넘치는 여성이 이룩한 다차원적 삶과 작품 가운데 단지 한 가지 차원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어스시(Earthsea)‘ 3부작은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인상적인 탐구다. 어둠이 없으면 빛도 없다. 그리고 죽을 운명이야말로 모든 살아 있는 것에 실존을 허락한다. 어둠은 공포, 오만, 질투 등 우리 내면에 숨겨진 덜 유쾌한 면들을 아우른다. 주인공 게드는 자신의 그림자 자아에 맞서야 한다. 그림자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 이 투쟁을 통해서만 그는 온전해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용들의 지혜와 다툰다. 우리의지혜와 다르고 애매모호하지만 그럼에도 지혜인 건 분명하다. - P522
최근 나는 친구를 잃고 슬픔에 잠긴 어느 여성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나보다 훨씬 젊은 여성이었다. "어스시 3부작을 읽어요." 내가 권했다.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는 읽었고,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이제 어슐러 K. 르 귄이 죽었다. 부음을 듣고 이상한 환영을 보았다.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마법사게드가 한 아이의 영혼을 죽은 자의 땅에서 다시 불러오는 장면과 비슷한 환영이었다. 거기 불변의 별들 아래, 속삭이는 모래의 언덕을 고요히 내려가는 어슐러가 있었고, 멀어지는 그녀를 뒤쫓아 달려가며 울부짖는 내가 있었다. "안 돼! 돌아와요! 지금 이곳에 당신이 필요해요!" 특히 지금 이곳, 여성 비하‘가 일상화되고, 여권이 수많은 전선에서 -특히 보건과 피임 영역에서 후퇴하고, 기량과 지적 우월성으로겨루는 데 실패한 이들이 대신 제 음경을 무기 삼아 여성들을 일터에서 몰아내려는 땅에서 르 귄의 부재는 너무 뼈아프다. - P523
르 귄은 1970년대 초반에 이미 여성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목격했다. 때는 제2세대 페미니즘의 시대였다. 르 귄은 격분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있었다. 억압된 분노는 터질 수밖에 없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그런 분노가 여러 방향에서 불거졌다. 하지만 대개는 작업량과기여도가 컸거나 더 컸는데도 받는 대우는 훨씬 더 적었던 데서 오는분노였다. 당시의 유명 구호 중 하나가 "집안일도 일이다"였다. 여성들을 가장 분노하게 한 망언 중 하나는 놀랍게도 흑인민권운동계에서 나 - P523
왔다. "민권운동에서 여성의 유일한 위치는 누워 있는 것이다." 분노는 르 귄이 오래 씨름했던 숙제였다. 그녀는 2014년 「분노에 관하여 (About Anger)」라는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 P524
장기적 목표, 부단한 정의 추구. 르 귄은 여기에 생각과 시간을 많이들였다. 우리는 어슐러 K. 르 귄을 변치 않는 별들의 땅에서 도로 불러올 수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르 귄은 우리에게 다차원적 작품, 힘들여 얻은지혜, 본질적 낙천주의를 남기고 갔다. 그녀의 분별 있고, 명석하고, 교묘하고, 서정적인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 요긴하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그리고 그녀에게 감사해야 한다. - P524
소설 역시 투영과 환상입니다. 작가로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환상을그럴싸하게 만드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소설 쓰기를 폄하하는말이 아닙니다. 진실이 투영과 환상을 통해 드러날 수 있고, 또 실제로자주 그렇게 드러나거든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이 시인들에게 명했다시피, 소설은 진실을 말하지만 비스듬히 말합니다. 디킨슨은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실은 점진적으로 빛을 발해야 한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비추는 눈부신 만월이 아닌, 에둘러 보여주는 달빛. 이는소설 작가들을 위한 좋은 조언입니다. 저의 다음 타로카드 역시 달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번 카드의 명칭은 운명의 수레바퀴입니다. 저는 이를 소설의 중반을 대변할 카드로골랐습니다. - P537
소설가는 시간을 어떻게 구상할까요? 시간은 서사 안에서 어떻게배열될까요? 소설을 담는 책은 선형이지만, 다시 말해 페이지에 차례로 번호가 매겨지지만, 이선형 배치 안에서 시간이 처리되는 방식까지 항상 선형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시간 요소가 원을 닮을 수 있습니다. 서사 끝에서 중심인물이 다시 시작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되는 거죠. 초자연적이거나 부자연스러운 이야기가 아닌 한, 끝에 같은 나이로 돌아오진 않겠지만요. 또는 동시에 일어나는 이야기들이 평행하게 진행되다가 나중에 교차하는 구성도 있고, 시간이 역행하는 회상 장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구성도 있습니다. - P538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의 진입점은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가 비참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는 장면입니다. 그의 앞에 예전에죽은 동업자의 유령이 나타나고 이어서 세 개의 분리된 시간 보따리들-스크루지의 과거, 현재, 잠재적 미래-이 펼쳐지는데, 각각은 독자에게 스크루지의 인생을 보여주고 동시에 스크루지에게는 그가 어떤인간인지 보여줍니다. 이후 시간이 멈추고 되돌아갑니다. 스크루지는크리스마스이브를 처음부터 다시 살게 되고, 이번에는 훨씬 즐겁게 보냅니다. A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의 경우는 소설의 진입점이 줄거리의 시작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진입점에서 여주인공캐서린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그녀에게 집착한 나머지 각종 만행을저질러온 남주인공 히스클리프는 이미 중년입니다. 독자는 둘의 이야기를 다른 두 사람의 목소리로 듣게 됩니다. 한 사람은 히스클리프 소유의 집을 임대하려는 신사이고, 다른 사람은 주인공들의 집에서 하녀로 일했기 때문에 내막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을 아는 넬리입니다. 이상은 소설에서 시간이 배열되는 수많은 방식 중 몇 가지입니다. 이제 시험 삼아서, 누구나 아는 ‘빨간 망토』 이야기의 몇 가지 변형을 만들어봅시다. - P539
아니면 보다 불길한 관점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수사 스릴러에서 맡아놓고 쓰는 관점이죠. 이 방식은 시체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시체? 『빨간 망토』 이야기에도 여러 버전이 있는데, 어느 버전에서는 할머니와 늑대 모두 죽고, 다른 버전에서는 늑대만 죽습니다. 이야기를 두 가지로 하다가 독자에게 선택하도록 하면 어떨까요? 나만의모험담을 써보자 (Write Your Own Adventure Stories)』의 작가들을 포함해 여러 작가들이 시도했던 방식입니다. 샬럿 브론테도 소설 『빌레트』에서이 방식을 선보였죠. 이 경우는 사건 순서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입니다. - P541
화자가 여럿인 경우에도 사건 순서가 여럿입니다. 이런 구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서로 모순되는 설명들이 다중으로 얽혀 있는 구조를 일컫는 용어가 됐을 정도입니다. "아, 라쇼몽 기법" 하면 다들 알아듣고 끄덕거리죠. 어떤 소설 구조는 직소 퍼즐과 비슷합니다. 따로 놀던 조각들이 결국 하나의 그림으로 딱딱 맞아 들어가는 거죠. 또 어떤 구조는 클루(Clue) 게임을 닮았습니다. 작가가 단서를 뿌려놓고 독자는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줄거리와 구조가 어떠하든, 모든 스토리텔링 행위와 소설 쓰기 행위에는 공통적으로 있는 게 있습니다. - P541
인간사회는 끝없이 변화합니다. 따라서 ‘역사의 잘못된 편(the wrongside of history)‘에서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역사라는 게누가 정권을 잡고 못 잡았는지, 누가 지적 첨단에 있는지 아닌지를 의미하는 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종류의 역사에는 정해진 편이없거든요. 역사는 필연적 선형 진행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시작해「요한계시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의 도시가 일어나 모두가 영원히 행복해지는 결말은 없습니다. 인간의 권력과 유행의 진행에서 필연성이란 없습니다. 오늘은 역사의 옳은 편으로 보였던 것이 내일 잘못된 편으로 뒤집힐 수 있고, 그랬다가 내일모레 다시 옳은 편이 될 수도있습니다. - P545
소설 쓰기에서 포르투나 여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소설가입니다. 소설가가 시간을 배열하고 바퀴를 돌려서, 어떤 인물은 행복으로 들어올리고, 다른 인물은 밀어내거나 심지어 죽여 없앱니다. 어쩌면 소설의 시간은 바퀴와 도로의 조합입니다. 바퀴가 회전하면서 사랑의 부침과 삶의 흥망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바퀴는 회전하는 동시에 길을 따라 죽 굴러가고, 이에 따라 시간이 선형적으로 진행하잖아요 소설을쓸 때 여러분은 시계와 달력을 잘 봐야 합니다. X가 온실에 몰래 들어가 Y를 살해할 시간이 충분합니까? 여러분은 달도 주시해야 합니다. 알다시피 달은 환상을 의미해요. 사람의 운은 달과 같습니다. 항상 차올랐다 이울었다 하죠. - P545
하지만 우리가 어떤 카드를 택하든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만큼은 늘우리 마음 어딘가에 존재하면서, 소설의 사건들이 당위대로 풀리지 않을 때 우리에게 그럼 무엇이 당위인지 알려줍니다.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공정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직관적으로 압니다. 우리는세상사가 공정하기를 바라지만, 상황이 늘 그렇지는 못합니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소설로 치면 그것이 현실의 투영입니다. 이제 저는 카드 덱을 도로 거둬들여 제 마법사 재킷의 주머니에 넣겠습니다. 타로 덱의 마법사는 단지 저글러일까요? 때로는 그렇습니다. 소설가들은 나름 재주를 부립니다. 모자에서 토끼를 뚝딱 꺼내놓을 때도 꽤 많아요.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마법사 카드는 긍정적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소설도 그렇습니다. "당신의 책이 내인생을 바꿨어요." 사람들이 소설가에게 자주 하는 말입니다. 어떻게바꿨는지는 되묻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건 독자가 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 P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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