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K. 르귄 
Ursula K. Le Guin, 1929~2018


1929년 10월 21일, 인류학자 앨프리드 크로버와 심리학과 인류학을 공부한 작가 시어도라 크로버 사이에서 태어났다. 북미 최후의야생 인디언으로 알려진 이시를 돌보며 기록을 남기는 등 아메리카 인디언 연구에 몰두했던 부모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은 르 귄의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래드클리프컬리지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학을 전공한 르 귄은 이후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1953년 프랑스로 건너가던 중 역사학자 찰스 르 귄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몇 달 후 파리에서 결혼한다. 1959년, 남편의 포틀랜드대학 교수 임용을 계기로 르 귄은 미국으로 돌아와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에 정착한다.
시간 여행을 다룬 단편 「파리의 4월(1962)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르 귄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며 ‘어스시 시리즈‘와 ‘헤인 우주 시리즈‘로 대표되는 환상적이고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낸다. 인류학과 심리학, 도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녀의 작품은 단순히 외계로서 우주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른 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깊이 있게 파고들어 독자와 평단의 사랑을 받았다. 총 21권의 장편소설, 11권의 단편집 4권의 에세이집, 12권의 어린이책 6권의 시집과 4권의 번역서를 출간했고,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팁트리상 등을 받았다. 또한 세계환상문학상을 비롯해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태평양북서부서점협회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미국 SF 판타지 작가협회의 그랜드마스터로 선정되었다. 의회도서관에 의해 ‘살아 있는전설‘로 지정되었으며, 전미도서재단에서 미국 문학에 대한 두드러진 공헌을 인정하며 수여한 공로상을 받았다.
2018년, 88세의 나이로 포틀랜드의 자택에서 영면했다.




데이비드 네이먼 David Naimon


작가이자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라디오와 팟캐스트 <책표지 사이Between the Covers>의 진행자다. 틴하우스를 포함한 여러 출판사에서 펴낸 그의 글은 2016년 최고의 짧은 소설The Best Small Fictions2016」에 수록되어 재간되었다.

어슐러 K. 르귄(1929~2018)을 기리며


교열 담당자는 빨간 펜을 썼고, 어슐러는 연필을 사용했다. 겨우 일주일 전에 어슐러가 넘겨줬던 이 원고에서는 연필과 펜의 의견이 일치할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었다. 우리가 광고문을 어떻게 내보낼지를 두고이메일을 주고받은 지도 며칠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이제는 내가 어슐러와 교열 담당자의 의견이 맞지 않은 부분에 끼어들 차례였다. 그렇게 한창 작업 중이었을 때 어슐러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주일이 더 지나고도 나는 여전히 내가 맡은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게이먼, 마거릿 애트우드, 조월튼처럼 위대한 작가들이 바친 헌사를 읽었다.
나는 어슐러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열정적인 좋아요! 사무적인 제생각은 다릅니다를. 그러다 보니 어슐러가 이 책에 얼마나 온전히 참여하고 있는지, 얼마나 눈앞의 일에 철저히 임하는지가 보였다. 어슐러의 강 - P7

력하고 자기주장 강하며 매혹적인 자아를 끌어내기에 너무 사소한 작업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온 세상을 담아내는 일이나 다름없다해도 말이다. 작가들을 위해 구글과 아마존에 도전한 어슐러, SF와 판타지계 속 남자들의 클럽에 맞섰던 어슐러, 지구, 우리의 행성인 바로 그
‘지구‘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한 어슐러.
어슐러는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본질이 같다고 보고, 똑같이 몰두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나도 똑같이 해보려고, 어슐러가 했듯이 언어에심혈을 기울이려고 했다. 여전히 이 책을 어슐러와 함께 출간하고, 함께 이 여정을 축복하겠다는 꿈이 사라져서 슬프다. 어슐러의 어떤 프로젝트라도 고마운 마음으로 참여했을 테지만, 특히 이 책, 어슐러의 길고놀라운 삶에서 마지막으로 나오게 된 이 책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이다.
어슐러를 작가로서 돋보이게 한 지점이 많지만, 그중 하나는 우리가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다는 상상이었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상상하고, 그 세상을 반영하는 언어를 창조하고, 어슐러가 그토록 아끼던 ‘지구‘를 기림으로써 그를 기리는 것은 우리 몫이다.


2018년 2월 1일데이비드 네이먼 - P8

서문



인터뷰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인터뷰어는 출판사 홍보팀에서 책에 관해 쓴 보도자료를 읽고 오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발췌 문장까지 갖춰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발췌 문장을 크게 읽고 나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 여기에서 하신 말씀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시죠."
그런 인터뷰어들은 책을 한 권 쓴 유명인들과는 잘 맞는다. 그 유명인이 실제로 그 책을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터뷰어도 실제로 읽지 않았으니까. 인상적인 한 구절만을 원할 뿐이다..
"여기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시죠"는 책에 정보나 메시지를 담았고, 그메시지가 전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되풀이해서 말할 열의가 있는 진지한 작가들에게도 통할지 모른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를 최대한 언어에 잘 담아보려고 고심한 작가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런 작가들도 자신들이 한 말이 큰 소리로 읽히는것이야 기쁘게 듣겠으나, 그 말을 다르게 표현하거나 더 잘 표현해야 한 - P9

다고 하면 기뻐하지 않는다. "나이팅게일에 대해 쓰신 부분이 참 흥미로운데요, 키츠 씨, 좀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운이 좋아서, 이런 준비되지 않은 인터뷰어와는 극과 극처럼 다른 분들을 만나왔다. 빌 모이어스와 몇 번 만나본 뒤 ‘좋은 인터뷰‘에 대한 기준이 영영 고정되기도 했다. 좋은 인터뷰란 계속하고 싶어지는 인터뷰다. 하고 있는 말에 대해 전부터 생각해보았고, 말하고 있는 지금도 상대방이 하는 말에 비추어 생각해보고 있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다. 그러다 보면 그 자리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서로 의견이맞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근본적인 의견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차이를 적대감 없이 말하고 답하다 보면 대화를 더욱 치열하고정직하게 끌어올릴 수 있다. - P10

이제 나는 질문 한두 개만 받아보아도 불만만 남을지, 노력에 보상받을지를 안다. 불행한 결말이 뻔히 보일 때, 그 인터뷰를 계속하기란 양쪽 모두에게 힘겨운 일이다. 내가 ‘대체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라고?‘ 하고 생각하는 동안 인터뷰어는 ‘맙소사, 또 10초 동안 침묵하다가 음, 이라고 하는군‘ 하고 속으로 한탄한다.
좋은 인터뷰란 멋진 배드민턴 랠리와 비슷하다. 두 사람이 셔틀콕을 계속 허공에 띄워놓을 수 있으며, 그러면 셔틀콕이 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KBOO의 매력적이면서도 펑키한 녹음실에서 서로를 처음 마주했을때 데이비드와 나는 조금 굳어 있었고, 낯을 가렸지만, 곧 대화에 빠져들었고 나는 우리의 셔틀콕이 날고 있음을 알았다.
소설가로서 나는 작품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끄러움 없이 말하지만, 시인으로서 이야기할 때는 수줍음이 많고 아마추어스럽 - P10

다.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보통 다른 시인들을 향해 말하게 되는데, ‘다른 시인들‘은 쉽게 만족하지 않고, 격렬한 자기 의견을 품고 있으며, 적대감이 강할 때가 많다. 배타적일 수도 있다. 글쓰기 워크숍에서낭독의 밤이 있을 때면 나는 산문 작가들과 같이 앉아서 시인들의 낭독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반면 산문 작가들이 낭독할 차례가 오자, 시인들은 모두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게다가 영역 문제에 딸려오는 일종의 ‘시인 언어 Poetspeak‘도 있는데, 그건 나의 언어가 아니다. 이런 모든이유에서 나는 데이비드와 시에 대해 인터뷰하는 것이 불안했다. 그러나 그 불안감은 바로 사라졌다. 대화에 푹 빠져드는 것만큼 빨리 불안을치유하는 방법이 또 있을까. - P11

나의 논픽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무섭다. 나는인터뷰어가 내가 읽은 적도 없는 쇼펜하우어나 비트겐슈타인, 아니면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내 글에 미친 영향을 논하려고 할까 봐 무섭다. 아니면 퀴어이론이나 끈이론string theory에 대한 견해를 물으면 어쩌나. 아니면 청중들에게 도가 사상이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하면? 아니면 제일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데) ‘인류의 미래‘에 대해 물어보면 어쩌나, 내가 스스로 얼마나 무지한지 안다고 해도, 그 모습을 전시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내 배움과 지성의 한계를 존중하고, 나에게 ‘델피의 예언자‘처럼 굴라고 하지 않는 인터뷰어가 고맙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일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는 인터뷰어를 만나게 된다.
데이비드도 일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누게 해준 KBOO에 감사드리고 싶다. 50년간오리건에서 예술과 사상의 자유와 관용을 지지하는 가장 강하고 끈질긴 - P11

목소리로 있어준 데 대해서도 고맙다. 미국이 아우성과 거짓말과 분별없는 폭력으로 갈가리 찢기느라 바쁜 중에도, 이런 목소리들 덕분에 아직 우리를 한데 묶어주는 내용을 들을 수 있다. 귀를 기울인다면 말이다.

2017년 10월 6일
어슐러 K. 르귄 - P12

소설에 대하여


어슐러 K. 르 귄은 말한다. "아이들은 유니콘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이들은 훌륭하기만 하다면 유니콘에 관한 책이 진실한 책이기도 하다는 점 또한 알지요."
성장기에 [어스시의 이야기들]을 읽던 내 경험이 바로 그랬다. 어스시에서는 마법이 흔했다. 마법사들이 지상을 걷고 용들이 하늘을 날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나를 ‘현실‘에서 멀리 데려갈수록 나는 진짜에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어슐러 K. 르 귄은 가슴속 깊이 작가, 그것도 소설만이 아니라 상상력의 작가다.  - P15

그리고 그에게 상상이란 남는 시간에만 하는 무의미한 활동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이게 만드는 권능이다.
"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용에게 잡아먹힐 때가 많지요. 속에서부터요"라고 경고할 정도다.
어려서부터 르 귄의 상상력이라는 날개를 타고 날아본 나로서는 ‘진짜‘
어슐러 K. 르 귄을 만나면 어떨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내 상상 속의작가를 몇 개만 떠올리더라도 어스시의 이야기들』에 나오는 마법의땅, 『어둠의 왼손』에 나오는 양성애 행성 게센, 『빼앗긴 자들』에 나오는아나레스의 탈권위 노동조합 사회 같은 세계를 만들어낸 마법사를 현 - P15

실 세계, 즉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사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여성, 나와똑같이 일상의 거리를 걷는 사람, 내가 곧 소설 쓰기의 기본 기술에 대해 인터뷰할 사람과 비교하면 어떨지를 말이다.
우리는 이 대화를 나누기 위해 포틀랜드 동부 깊숙한 곳에 있는 거대한자원봉사 체제의 커뮤니티 라디오 방송국인 KBOO의 스튜디오에서 만났고, 그곳에서 어슐러를 처음 본 나는 단단하고 냉철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바보들을 봐주지 못하는 사람. 오랫동안 잘 살면서 풍부한 경험을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경험이 모여서 살아 숨 쉬는 지혜같은 것으로 변화한 사람. 그리고 이런 지혜를 갖췄기에 가식이나 허세를 참아주지 않을 듯한 사람. 대화를 해나가면서 몇 번이나 확인했기에, 그런 첫인상은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 P16

이 현세의 실제 어슐러와 내가 상상한 다른 세상의 어슐러 사이에 모순이 있었냐고?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아 보였다. 실제와 상상 속을 분리할 수 없게 뿌리를 깊이 내리고 상상력의 가지를 하늘 높이 뻗어 올린작가였다. 그럼에도 작품 밖 세상에서의 어슐러에 대해 알면 알수록보이지 않는 작품 내부의 상상이 현실을 움직이는 것이지, 그 반대가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미국 SF 판타지 작가협회가 선정한 ‘SF 그랜드마스터‘이자 미국 의회도서관의 ‘살아 있는 전설로서 이 세상에서 지닌 명성에도 불구하고, 어슐러는 계속해서 오클랜드의 아나키스트 PM 프레스에서부터 시애틀의 페미니스트 SF 출판사 애크덕트 프레스 같은 소규모 독립 출판사에서 책을 낼 뿐 아니라, 소통에 대한 정신을 공유하고 또 주변부에 있어 상대적으로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을 키워야 한다는 데 관심을 둔KBOO 같은 방송국에 출연한다. 나로서는,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언정 - P16

어스시, 게센, 아나레스 같은 상상 속의 세계야말로 서로 맺는 관계에있어서나 땅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나 이 같은 상상 속의 대안적 삶이야말로 어슐러가 현실 세계에서 보여주는 이런 행동의 추동력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곧 가장 재미없어 보이는 요소들조차도, 이를테면 문법이나 구문이나 문장구조 같은 것들조차도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의해 생동력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히 말하자면 그 뒤에, 그 너머에 존재하는 마법 같은 뭔가가 있었다. 우리 문장의 걸음걸이, 길이,
소리, 우리가 사용하는 시제, 시점, 대명사, 그 모든 것에 나름의 역사와 이야기와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암시가 있고, 그 모든 것이 좋든 나쁘든 상상 속의 미래 세상을 향해 쌓아 올리는 건축 소재이자 구체적인몸짓이 될 수 있다. - P17

네이먼

그림이든 춤이든 음악이든, 대부분의 예술에서 모방은 배우는 과정의 일부 같아요. 기술을 연마하고,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죠. 가장 경험이 많고 창의적인 화가라 해도 보통은 선대 화가들처럼 그리는 시기를 갖거든요. 작가님은 글쓰기를 배우는 방법으로 모방을 추천하는 데 주저함이 없지만, 작가들은 전통적으로 모방 때문에 조금 힘들지 않았나요. - P17

르 귄

전통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최근에는 확실히 그렇지요. 예술의 경우에는 모방하는 사람이 모방을 배움의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표절이에요. 배우기 위해 모방하기는 하되, 출간하지는 말아야죠. 아니면 모방하면서 "이건 헤밍웨이 흉내입니다"라고 말하거나요. 하지만 인터넷이나 대학 내 경쟁은 모방과 표절 사이의 구분을 흐리는 경향이 있고, 이렇게 흐릿해진 상황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들이아예 모방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게 되는 거예요. 어리석은 일이죠. 우리는 좋은 작품을 읽고 그렇게 써보려고 하면서 배워야 해요. 피아노 연주자가 다른 피아노 연주를 하나도 듣지않는다면, 연주할지 어떻게 알겠어요? 전 우리가 모방을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 P18

네이먼


작가님은 소리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고, 언어의 소리가 모든 것의 시작점이며, 언어의 핵심은 물리적인 실체라고 하셨는데요.


르 귄


저는 제가 쓰는 글의 소리를 들어요. 아주 어렸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언제나 머릿속으로 소리를 들었죠. 알고 보니글쓰기에 대해 쓰는 많은 사람이 듣거나 귀 기울이지 않고,
좀 더 이론적이고 지적으로 인식하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몸안에서 글이 울리면, 스스로가 쓰는 글을 들으면 올바른 리듬을 들을 수 있고, 그러면 문장이 깔끔하게 이어지는 데 도움 - P18

이 됩니다. 젊은 작가들은 언제나 "자기 목소리를 찾는다"라는 말을 하는데요, 귀를 기울이지 않고는 스스로의 목소리를찾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쓴 글에서 울리는 소리는 그 글의작용에 핵심적이에요. 우리의 글쓰기 가르침은 그걸 무시하는 경향이 있죠. 아마도 시만 빼고요. 덕분에 우린 덜컥거리는산문을 만들어내면서도, 뭐가 잘못됐는지를 몰라요.



네이먼


2000년에 있었던 포틀랜드 문학예술 강연에서 이런 멋진 말씀을 하셨죠. "기억과 경험 아래, 상상과 창작 아래, 단어들아래에 기억과 상상과 단어 모두가 움직이는 리듬이 있습니다. 작가의 일은 그 리듬이 느껴질 만큼 깊숙이 들어가서, 그리듬이 기억과 상상을 움직여 단어를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 P19

르귄


그건 버지니아 울프에게 배운 거예요. 울프는 친구인 비타 ‘약20년간 울프의 연인이자 친구였던 20세기 작가 비타 색빌웨스트를 가리킨다. 올랜도』의 모델로도 알려져 있다‘ 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정말 멋지게 설명하죠. 스타일은 리듬이라고, ‘마음속의 파도‘라고요. 그 파도,
그 리듬이 말보다 먼저 존재하고, 단어들을 거기에 맞게 짜맞춘다고요.



네이먼


리듬 사용에 대한 아마도 최고의 예시로 버지니아 울프를 언급하기도 하셨죠.



르 귄


울프는 산문에서 길고 섬세한 리듬을 사용하는 놀라운 실사 - P19

례에요. 하지만 다른 작가도 얼마든지 있죠. 전 톨킨이『반지의 제왕』에서 쓴 리듬에 대해 에세이를 쓰기도 했어요. 짧은리듬이 반복되면서 긴 리듬을 형성하는데, 톨킨의 글에 나오는 순환적인 반복이야말로 그 글이 정말 많은 사람을 완전히사로잡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우린 이 리듬에 넋을 잃고 행복해지죠.



네이먼


작가님이 문법과 문법 전문용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 규칙들이 옳은지 따져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는 게 흥미롭습니다. 문법은 우리 직업의 도구인데, 너무나 많은 작가가 문법과의 관계를 피한다니 이상한 현상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셨어요. - P20

르귄


제 세대에서나 그 후로 한동안은―저는 1929년에 태어났습니다만 문법을 맨 처음부터 배웠어요. 조용히 주입받았죠.
우린 품사의 이름을 알았고, 영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지식도 얻었는데, 이제는 대부분 학교에서 그런 걸 가르치지 않아요. 요새 학교에서는 읽기도 예전보다 훨씬 적게 하고, 문법은 아주 조금만 가르치죠. 작가에게 이건 목공 도구 이름을 배우지도 않고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채 목공실에 내던져지는 상황과 비슷해요. 필립스 스크루드라이버로 뭘하죠? 필립스 스크루드라이버가 무엇이죠? 우린 사람들에게 쓸 준비를 갖춰주지 않고, 그냥 "당신도 쓸 수 있어요!" 아니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냥 앉아서 써봐요!"라고하고 있어요. 하지만 뭔가를 만들려면, 만들 도구를 갖춰야해요. - P20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중에서


그러자 정말로 평화가 찾아왔다. 바다에서 해변으로 평화의 메시지가 불어왔다. 세상의 잠을 더는 깨뜨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깊이 잠들어 쉬도록 달래며, 꿈꾸는 이들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성스럽고도 현명하게 확인토록 하고ㅡ또 뭐라고 속삭이는걸까, 릴리 브리스코는 깨끗하고 조용한 방에서 베개에 머리를 누인 채바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세상의 목소리는 너무 조용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없었지만, 그 의미가 분명하게 전해진들 달랐을까.

J. R. R. 톨킨의 [반지 원정대] 중에서

깊은 물속에 세워진 거대한 받침돌 위에 돌로 만든거대한 두 왕이 서 있었다. 둘 다 이마가 갈라진 채, 흐릿해진 눈을 찌푸리며 가만히 북쪽을 바라보았다. 둘 다 왼쪽 손은 경고하듯 손바닥을 바깥쪽으로들어 올렸다. 둘 다 오른쪽 손에는 도끼를 들었다.
둘 다 머리에는 부서져가는 투구와 왕관을 썼다. 오래전에 사라진 왕국의 말 없는 수호자들, 그들은 여전히 강력한 힘과 위엄을 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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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대화 


호르르, 바람이 세월을 밀어낸다. 그의 시간 한 줌이 바람속에 흩어져 흘러간다. 잣나무 가지가 쉴 새 없이 살랑이고그 사이로 갓난아이 눈망울같은 햇살이 어룽거린다. 아내가 묻힌 자리, 1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눈 밝은 사람이 아니라면 찾을 길 없이 녹음 짙푸러 여기가 거긴지 거기가 여긴지 풍경 사뭇 다르다. 매일 오는데도 한재정상 잣나무숲은 매일 모습을 바꾼다. 호르르, 바람결에 흔들리며 어어룽 숲 바닥에 내려앉는 햇살이 아내의 웃음처럼 수줍다.
이러고 있으니 좋은가?
평생 고생하여 마련한 선산이며 뒷산 놔두고 하필 여기에 묻히길 원한 것은 아내였다. 죽음을 예감한 순간, 아내는병원 창밖, 이제 막 새 움을 틔운 은행나무를 보며 말했다.
- P9

한재 잣나무숲에 가면 열십자 모양의 바우가 한나 있을것이요. 그 근방암 디나 뿌려주씨요.
한재, 라는 말이 아내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거무죽죽다 죽어가던 심장이 벌떡살아나 타닥타닥 시퍼런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백운산에서 1년. 85년 중 찰나와도 같은 그 짧디짧은 기억이 아직도 자네 돌아갈 곳이었단 말인가. 노여움인지 슬픔인지 질투인지 뒤범벅인 감정을 헤아릴길 없어 그는 묵묵부답, 일가친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유지를 따랐다.
그 뒤로 그는 매일 한재에 오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아이 넷 낳고 아이가 기억을 지워 아무일 없이 잘사는 것 같던 아내의 얼굴에는 문득문득 깊은 소(沼)의 바닥처럼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 P10

가서 바람은 오동나무 잎사귀를 조심조심 흔들고 포플러 잎사귀를 요동치게 하고 아낙 잃은 외로운 남정네의 한숨을 실어 늙은 과부 시리디시린 가슴팍을 두드릴 것이다. 바람은 그렇게 유정(有情)한 것들의 설움을 무심하게 실어나른다. 마당의 은행잎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늦가을, 아내는 저녁을 짓다 말고 불길이 제 치마폭을 삼킬 듯 너울거리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바람의 노니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이상하지라. 바람이 불면 시상이 한숨 같은 것으로나 꽉찬 것맹키 아득하고 서글프고 그래라.
그러면서 아내는 무안한 듯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잣나무숲에 일렁이는 바람은 누구의 한숨일까? 아내가 마음에품었던 그 썩을 놈이나 그놈 같은 어떤 이들의 서러운 한숨일까? 어쩌면 이 바람 속에는 아내 묻은 날 그가 뿌렸던 눈물이나 그날 이후 오늘까지의 묵묵한 그의 숨도 섞여 있을지 몰랐다. - P15

젊은이의 눈길이 잣나무숲, 햇살 어룽거리는, 지난가을의 낙엽 아직도 미처 썩지 않은 푹신한 땅바닥을 더듬는다.
아내 묻힌 거기 어디쯤, 아마 아내 아닌 다른 사람들도 거름이 되어 잣나무를 쑥쑥 키웠을 것이다. 사람의 몸뚱이를먹고 자란 잣나무는 그 어느 곳보다 무성히 짙푸르고 사람의 슬픔을 먹고 자란 바람은 그 어느 곳보다 처연히 서늘하다. 제 슬픔을 먼저 간 혹은 후에 간 사람들의 슬픔을 다독이듯 도련님은 잣나무숲 여기저기를 눈빛으로 어루만진다.
도련님의 눈빛이 더듬는 곳, 햇살이 반짝 빗방울처럼 튕겨오른다.
목심은 하난디라. 되련님도 나도……….
목숨을 버릴 생각 같은 건… 그는 해본 적이 없다. 도련님 따라 간이학교에 가서도 그는 갓 태어난 송아지 눈망울이 아른아른, 갓 돋아난 가지 떡잎이 어어,  - P22

사람이 좋아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도련님은 몰랐다. 혼령이 되어서도 도련님은 여전히 모른다. 도련님에게 신념은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무엇이다. 저 하나 바꾸기도 어려운 게 인생이란 걸, 부잣집도련님은 모른다. 아니 도련님은 아는 무엇을 그가 모르는것인지도 모른다. 그걸 굳이 부정할 생각도 없기는 했다.
도련님과 그는 타고난 태생만큼 다른 사람, 그러니 달리 산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믿었다.
사랑이 신념인 사람도 시상에는 있어라.
니 말이 맞다믄... 니도 고런 사람이겄제. 그래서 니헌티순심이를 보냈을랑가………. 그건 나도 모린다. 순심이를 살릴라고 생각형게 니배끼 생각나는 사람이 없드라. 그래 니헌티보냈다. 그래 니가 괴로웠을랑가, 고것까지는 나는... 생각을못 혔다. 아니 안… 혔다. 사람 살리는 것이 더 급했응게. 혀서 니는... 내가 미웁냐? - P25

죽어서 그의 곁이 아니라 도련님의 곁을 택한 것은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임도, 함께하여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임도, 그는 짐작한다. 그러면서도 아내의마음 전부를 갖지 못하여안절부절, 몸의 욕망이 끊긴 뒤에도 질기게 살아남은 마음의 욕망이 서글프다. 아내 묻힌 자리, 처연히 더듬고 있을 도련님의 시선조차 소화되지 않은채 그의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는다. 그러나 뜻밖에, 그 자리 더듬는 도련님의 시선은 청포묵처럼 담백하다. 사상이고 무엇이고 도련님만 해바라기하는 그 여자, 답답하여 내려보낸 그 순간, 도련님은 여자 향한 제 마음도 싹둑, 작두로 콩대 자르듯 잘라낸 것인가.
도련님은 왜 하필 그로 와 죽었소? - P31

나가 참말 죽었으까 운학아?
죽어 젊은 도련님이 살아 늙은 그를 응시한다. 아, 잣나무숲이 바람에 출렁인다. 바람이 잣나무숲에 고인 어떤 것들의 세월을 소환하여 거기 숨을 불어넣는다. 순심이가 눈물 떨구며 뒤돌아보고 도련님이 물푸레나무 지팡이 짚은채 잣나무숲으로 들어서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림자처럼으로 숨어든다. 바람의 숨결 닿는 곳마다 잣나무숲, 출렁이며 싱싱하게 살아난다.
이것이 시방 꿈이끄나.
그는 깨어나는 숲을 멀뚱멀뚱 바라본다. 동고새가 융단처럼 푹신한 낙엽더미에 입을 묻고 박수라도 치듯 머리를끄덕인다. 꿈틀꿈틀 싱싱한 벌레 한 마리 동고새 입에 낚인다. 먹이를 먹은 동고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휘휘휘 호로롱, - P33

봄날 오후, 과부 셋 


봄바람이 앙탈하는 아이처럼 마당을 휩쓴다. 어지간한바람에는 끄덕도 않던 남보라 빛 수국마저 미친년 널뛰듯몸을 뒤챈다. 간신히 매달려 있던 무거운 꽃송이가 뚝 부러질 것만 같다. 가만보니 그것은 수국이 아니라 빨랫줄에서펄럭거리는 남보라 빛 치마다. 요즘은 자꾸 헛것이 보인다.
헛것이 보인다고 한숨결에 한마디했더니만 서울사는 딸년은 짜증스럽게 헛것은 무슨, 백내장이 심해 그렇지, 무안하게 쏘아붙였다. 썩을년. 딸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백태 낀 눈이 빚어내는 착각이 그녀에게는 잠시의 현실이다.
그녀는 보송보송 마른 빨래를 걷는다. 반나절 만에 빨래를말린 성급한 바람처럼 그녀의 80년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누군가 그녀의 세월 밖에서 그녀의 한 삶을 지켜보고 - P37

사다꼬도 그게 부러웠구나. 어쩐지 그녀는 그런 사다꼬가 가깝게 느껴진다. 언제였는지, 갓 구운 카스텔라를 들고서점에 간 적이 있다. 학생들 등하교 시간이나 되어야 손님이 드는 서점은 고즈넉했다. 그렇게 자주 봐도영말이없는 하루꼬 남편이 불편해서 그녀는 창밖에서 서점 안을 기웃거렸다. 참고서를 들이는 참인지 두 사람은책뭉치를 풀고 있었다. 하루꼬의 앞머리가 흘러내리자 남편이 장갑을벗고는 천천히 쓸어올렸다.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귀 뒤로 넘긴 남편은 몇 번이고 하루꼬의 뺨을 쓰다듬었다. 다정하고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하루꼬가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 또한 다정하고 따뜻했다.
단 한 시간도 그런 세월을 살아보지 못했노라는 사다꼬의말을 그녀는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P59

하루꼬의 웃음을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하루꼬도 그 사실을 의식했는지 머쓱하게 웃음을 거둔다. 그러나 잠시의 웃음은 소녀 시절처럼 해맑다.
"자주 좀 모이자 영감도 없으니 나도 이제 놀러도 다니고 해야겠다."
웃음 끝에 사다꼬가 덧붙인다. 사다꼬는 지난 5년, 남편이 앓아누운 뒤로 아예 문밖출입도 하지 못했다.
"아이구, 언제는 사는 게 덧없다더니………."
"에이꼬 네 말이 맞다. 죽지 못할바에는 재미나게 살아야지."
사다꼬는 이렇게 불쑥 물러나서 사람 맥 빠지게 하는 데도사다.
"나 배고파. 뭐 먹을 거 없어, 사다꼬?"
그녀가 산해진미를 올려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하루꼬가 먹을 것을 찾는다. 하루꼬의 염장질은 이런 식이다. - P63

그는 얼룩 하나 없이 새하얀 행주로 상을 닦는다. 엊저녁 삶아놓은 것이다. 자기부터 자기를 대접해야 남한테도대접을 받는 법이야. 그래서 어머니는 입고만 나서면 흙투성이가 되고 마는 옷을 그악스럽게도 갈아입히고, 사과 하나 귤 하나도 예쁘고 좋은 것으로만 골라 먹였다. 그래 봐야 남들에게는 병신이었을 테지만 어머니만큼은 그를 부잣집 도련님처럼 위했다. 그는 보란 듯이 밥상을 차린다. 언젠가 어머니 간 뒤 군청 복지과라나 사회과라나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에 병신 아들 사는 꼴이안타까워 누가 민원이라도 넣은 모양이었다. 마침 밥을 먹으려던 차였다. 군불 지피고 나온 숯으로 구워낸 고등어자반까지 떡하니 놓인 밥상을 본 여직원이 어머, 호들갑스럽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어머, 저보다 훨씬 낫네요. 여직원은 염치도 좋게 자반을 손으로 죽 찢어 맛을 보았다. - P75

가슴이 두근거린다. 호아가 집에 있다면 아이가 저렇게 울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몸조차 가누지 못할 만큼 맞은 것일까. 아니면 호아도길호 어머니처럼 집을 나간 것일까. 어머니가 떠난 날처럼등골이 서늘하다. 드르륵, 문이 열린다. 저거침없는 손길은호아가 아니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길호형의 마음을 그는 알 것 같기도하다. 동네 아이들에게 병신 소리를 듣고 온 날이면 아버지는 그를 때렸다. 맞는 것은 그였으나 괴로운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주먹이 향한 것은 그가 아니라 아버지의 어긋난 유전자, 그러니까 곧 아버지 자신이었다. 호아를 때리는길호 형의 주먹도 어쩌면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 모른다.
그게 아버지가 견디는 방식이란다. 막막해서, 하도 막막해서 그러는 거야. 네가 이해하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은상처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길호 형도 아버지처럼 막막한것일까. - P79

손에 잡혀나오는 것은열쇠다. 버둥거리는 손으로 그는 허리춤의 쇠사슬에서 열쇠를 빼낸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손에 열쇠를 쥔 채 그가손을 뻗는다. 그의 말없는 말을 호아는 알아듣는다. 조심스레 열쇠를 잡는다. 이제는 담벼락 아래서 멍든 얼굴을 가린 채 숨어 있지 않아도 될까. 이곳이라면 취한 남편도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호이는 열쇠를 쥔 채 문을 열고 나선다. 끼이익, 돌아가야 할 곳의 냉혹함을 일러주기라도 할듯 쇳소리가 귀청을 긁는다. 비탈길을 내달리기 전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뒤돌아본다. 눈송이 같은 하얀 꽃이 철조망위로 조랑조랑 매달려 있다. 꽃송이가 바람에 살랑인다. 꽃송이를 흔든 바람이 향기를 안고 그녀의 품으로 달려온다.
그것은 그의 향기다. 열쇠를 꼭 쥔 채 그녀는 마을을 향해내달린다. - P90

맏이의 말이 가슴을 후빈다. 그는 묵묵히 도끼를 놀린다.
퍽, 퍽, 나무 쪼개지는 소리에 겨울 햇살이 시들어간다.
"아부지는 시방도 경우 쟈가 사람노릇 허고 살 것 같소?
꿈 깨씨요. 23년 만에 지 팔도 보돕씨 움직이는디 쟈가 지발로 걷는 꼴을 아부지 살아생전에 볼 수나 있을 것 같소?
행운의 사나이 좋아하시네. 그놈의 행운 개나 주라고 허씨요. 저놈 명운(命運)이 어매아배 다 잡아묵고 인자 나꺼잡아묵게 생겼단 말이요."
도끼가 갈 자리를 잃고 받침대에 꽂힌다. 한치만 어긋났으면 그의 정강이에 꽂혔을 것이다.
"주뎅이 못 닥치냐!"
순간, 우어, 우어어, 기이한 비명 소리가 그의 일갈을 눌러 앉힌다. 그의 귀가 경우 방을 향해 곤두선다. 어어. 분명경우 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도끼를 집어던지고 신발을 벗을 겨를도 없이 아들 방으로 내달린다.  - P149

머리를 침대 머리맡에 박으며 우어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놀란 그가 아들의 머리를 두 팔로 감싸 안는다. 지난 23년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아들의 목이 그의 팔 안에서 버둥거린다. 아들의 볼은 눈물로 온통 흥건하다.
"씨발! 벵신 자석만 끼고돌다가 인자 산 자석 죽는 꼴 보게 생겠네. 조오컸소!"
콰당, 대문이 거칠게 닫히고 아내의 곡소리가 늦가을 바람처럼 어지러이 집 안을 휘돈다.
"아이고오! 우리 경우가 그때게, 사고 났을 때게, 팍 죽어부렀으면, 그랬으면 좋았을랑가……."
울음 끝에 아내가 탄식한다. 아직도 경우는 그의 품 안에서버둥거린다. 버둥거림이 점점 힘차지는 것을 그는 온몸으로느낀다. 이것은 기적이다. 경우는 또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의 가슴이 벅차오른다. 시들어가는 햇살이 눈물로 번들거리는 아들의 뺨 위로 힘없이 내려앉는다. 벌써 짧은 겨울 낮이저물고 있다. - P150

핏줄 


왕시루봉이 구름 한 점 없이 말갛다. 오늘도 비 오기는글렀다. 장마철이 열흘 남짓 지났는데도 뜨거운 뙤약볕만내리쪼인다. 60년 경력의 농사꾼인 그도 철을 종잡을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매화와 동백이 시들 무렵 연노란 산수유가 들판에 봄빛을 불러오고, 아련한 연노랑 빛이 성에 차지않는다 싶을 즈음 진달래가 산등성을 벌겋게 물들이고, 그꽃들이 죄 사라진 뒤에야 봄볕에 지친 보랏빛 오동이 숨을헐떡이며 커다란 꽃잎을 축 늘어뜨려 여름을 알렸는데 요즘은 온갖 꽃들이 동시다발로 피어난다. 지난겨울에는 제가 무슨 고결한 매화나 되는 양 한겨울 눈 속에 움튼 버들강아지를 보기도 했다. 농사일에도 철이 사라진 지 오래다.
철따라 농사를 지었다가는 빚더미에 올라앉기 십상이다.
- P153

"밥 차례! 시방이 몇 신디……그는 괜히 아내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는 느릿느릿 얼갈이배추를 씻으며 콩닥콩닥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답이었다.
"넘들은 나이가 들면 둥글둥글 부처를 닮아간당만 우리집 영감은 먼 영문으로 늙을수록 심통만 늘어가 모리겄네. 묏자리를 잘못 썼능가, 집터가 안 좋응가…………"
제발 사근사근 말 좀 했으면 싶던 젊은 날에는 꿀 먹은벙어리마냥 입을 꽉 다물어 애를 태우더니 뒤늦게 말문이터졌는지 요즘에는 그가 한 마디 하면 백 마디로 돌아왔다.
늙은이 살가죽처럼 질긴 아내의 잔소리는 피하는 게 상책중 상책이었다. 아침부터 뭘 볶는지 온 집 안에 기름내가진동했다. 아침 밥상 위에 떡하니 올라온 것은 모양도 요상한 샛노란 부침개였다. - P172

내는요즘 들어 끼니마다 베트남 음식이 밥상 위에 올라왔다.
아내가 베트남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지난봄, 쑤언의생일이 지난 뒤였다. 한국에서 맞는 첫 번째 생일이라고 아내는 오랜만에 옛 실력을 발휘하여 백설기에 약밥까지 한국식으로 떡 벌어진 한 상을 차렸다. 쑤언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게 그 상을 받았다. 그날 밤 화장실에 다니러 간 아내가 찬바람을 몰고 혀를 차며 돌아왔다. 초봄이라 쌀쌀한밤공기에 잠이 깬 것인지 한참 뒤척이던 아내가 넌지시을 건넸다.
"영감, 쑤언이 봄이라요. 봄에 태어났다고 쑤언이랑마."
봄이 그렇게 예쁜 이름인 줄 그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쑤언은 베트남 얘기를 단 한 번도 입에 올린적이 없었다.
"초승달을 봅시로 울고 있어라. 월남이 그리운서. 하기사 여우도 죽을람시로 고향 쪽을 보고 죽는단디 워째 고향이 안 그립겄서. 짠하고 안됐어라." - P173

간간히 쑤언의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명조차 마음껏 지르지 못하게 만든 것은 비명을 질러봐야무용지물인 오랜 세월이었으리라. 으앙! 어미 대신 우렁찬비명을 지르며 아이가 나왔다. 잠시 후 분만실 문이 열렸다.
"사내아입니다."
간호사가 얇은 천에 둘둘 말린 아이를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저도 모르게 움찔 그는 눈을 감았고, 심호흡을 하며지발, 간절한 기도와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눈앞이캄캄했다. 까맸다! 어미를 쏙 빼닮아 새까맣고 오종종한 아이가 벌써 눈을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눈동자 검은 이 아이가 한산 이씨 28대손 이강호였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그는 엉거주춤 아이를 안은 채 화석처럼 굳었다. 아이고, 아가! 우당탕 문이 열리며 저만치 아내의 고함 소리가 아득하게 멀었다. - P178

고등학교 때부터 술 좋아하고 문학 좋아하던 박은 문청들의 잡소리 듣는 재미에 빠져 그냥저냥 식객으로눌러앉았다. 그러다 전쟁이 터졌고, 경기고에 다니던 박은영어 좀 안다는 죄로 선배 따라 켈로 부대원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잘도 일상으로 복귀했다. 박은 그게쉽지 않았다. 전쟁은 박에게 술로 남았다. 술 없이는 도무지시간이 흘러가질 않았다. 술을 마시면 시간이 훨훨 날아갔다. 술과 더불어 한평생을 하룻밤처럼 흘려보내는 것이 스물둘 박의 소원이었다. 그래도 평생이 하룻밤과 같지는 않았다. 술에서 깨고 보면 또 지루한 시간들이 막막하게 놓여있었고 하여 다시 술잔을 잡았다.  - P182

"얘, 너는 어디서 빌어먹니?"
발로 걷어차인 데다 곤한 잠을 깨웠는데도 취객은 성을내지 않았다. 나? 하고 반문하더니 가만히 제가 기대앉은집을 가리켰다. 그곳은 전쟁 전 최의 집이었다. 최의 가족은 죄 월북하고 남도부 부대원이었던 최는 홀로 남에 남았다. 복역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집은 백부가 차지하고 있었다. 자기 집에서 최는 더부살이를 하는 셈이었다. 최의 백부는 집안 말아먹은 좌익이라면 치를 떨었고, 하여 빨치산이었던 최에게 더 엄격했다. 늦잠을 자도 술을 마셔도 저놈이 저러니 빨갱이지, 귀에 딱지가 앉았다. 취한 최는 그놈의빨갱이 소리 또 들을까 싶어 통금 가까운 야밤에 집을 지고앉아 노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자는 동안 취기가 걷혔는지 최는 또랑또랑 되물었다. - P183

박은 이내 아쉬운 시선을 거둔다. 젊어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여자는 놓쳐도 술을 놓치는 법은 없던 박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팡이 짚고 돌아갈 길이 아득하다. 생각난 김에 박은 지팡이를 잡는다.
언제나처럼 김이 동작 빠르게 계산을 한다. 평생을 김에게 얻어먹었으나 박도 최도 미안한 기색조차 없다. 있는 놈이겨우 짜장면으로 생색이야. 그런 지청구나 먹지 않으면 다행이다. 평생 마음 놓고 얻어먹을 친구가 있다는 것도 생각하면 복이다. 부모 잃고 형제 잃고 꿈도 잃고 대신 친구 등쳐먹을 복은 챙겼다. - P206

혜화동 로터리에 차들만 분주하다. 로터리를 둘러싼 널찍한 인도에서 최와 박은 머뭇거린다. 택시를 잡을 곳이 마땅치 않다. 로터리를 돌아 나가는 차들이 대낮인데도 뒤엉켜 있다.
"여기서는 택시 잡기 어려워요. 성대 쪽으로 조금 올라가죠."
"흥, 너는 아는 것 많아 좋기도 하겠다. 예순 넘으면 잘난놈이나 못난 놈이나 똑같고, 일흔 넘으면 배운 놈이나 못배운 놈이나 똑같고, 여든 넘으면 산 놈이나 죽은 놈이나똑같다더라."
1-45지팡이 짚고 김의 뒤를 따라 로터리를 돌아나가며 박이또 쏘아붙인다. 최도 한마디 거든다.
"하나 더 있다. 얘. 빨치산이나 켈로나." - P207

김이 택시를 잡고, 몸 제일 불편한 최가 먼저 오른다. 지팡이 한 손에 들고 겨우 차에 오른 최가 문을 닫기 전, 박과김을 일별한다.
"간다."
김과 박은 고개를 끄덕인다. 작별은 평소처럼 무덤덤하다. 이내 문이 닫힌다. 멀어지는 차의 꽁무니를 박과 김이물끄러미 바라본다. 또 보자, 라는 인사가 언젠가부터 간다,
로 바뀌었다. 그러고도 몇 번 또 보았다.
끊임없이 차들이 로터리를 돌아 나오고 그중에는 박 태울 빈 차도 있다. 박의 인사 또한 간결하다.
간다."
언제나처럼 김이 마지막으로 남는다. 박과 최가 떠난 자리, 제 몸뚱이보다 더 무거운 한 삶을 지고 그 삶에 짓눌려허덕이던 그들의 무게 따위 존재도 하지 않았던 듯, 거리는평온하다. - P208

땅은 파도 파도 끝이 없다. 일을 하는 순간에는 끝이 없다는 생각을 지워야 한다. 농사일과는 다르다. 아무리 넓은논도 밭도 끝은 보인다. 끝까지 갈 일이 아득해도 하다 보면 어느 샌가 끝이 나 있곤 했다. 그는 고추 따기가 가장 싫었다. 계집처럼 쭈그려 앉아 고추를 따다 보면 허리가 끊어지거니와 무슨 놈의 고랑이 그렇게 긴지, 검푸른 고추 터널의 끝 부근에서 어룽거리는 빛 때문에 아득히 현기증이 일었다. 고추 딸 때가 다가오면 온종일 술에 취한 듯 세상이어지러워 차일피일 핑계거리를 만들었고, 꼭지가 말라들즈음에야 그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나섰다. 벼룩처럼 들러붙어 등골을 뽑아먹는 자식들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지게를 내던지고 훌훌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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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은 정말 높은 자리에 올랐지."
그렇게 말할 때 나는 니노의 눈빛에서 나를 자기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그의 말이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읽어냈다. 니노는 자기가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책이 성공은 했지만내가 탄원자로서 니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니노는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것 같았다.
‘넌 나 같은 남자를 놓친거야.‘
나는 임마와 함께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 자리에 내가 아닌 릴라가 있었다면 니노의 태도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는 릴라에게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끼고 말을 웅얼거렸을 것이다. 그렇게 허풍을떠는 자기 자신이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 P563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니노가 자신의 야망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사랑했던 사람은 릴라뿐이었다. 이스키아 섬에서, 그 후 일 년간 니노는 골치 아플 것이 뻔한 위험에 몸을 내맡겼다.
지금까지 그의 행적을 되돌아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니노는 이미 전도유망한 대학생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나디아와 사귄 이유도 나디아가 갈리아니 선생님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만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보다 상류사회인 것 같은 환경으로 진입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니노의 선택은 언제나 니노의 야망과 연관이 있었다. 엘레오노라와 결혼한 것도 그만큼 얻는 게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나 역시 니노 때문에 피에트로와 헤어졌을 때 중요한 출판사와 연관이 있었고 어 - P563

느 정도 자리를 잡은 성공한 작가가 아니었던가. 그런 내 배경은 니노의 경력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니노를 도와준 다른 여자들도 결국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물론 니노는 여자를 좋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선호했다. 니노의 지성이 만들어낸 산물은 소년 시절부터 그가 정밀하게 짜온 권력의 그물망 없이는 스스로 빛을 발할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릴라는 어떠한가. 릴라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데다 상점 주인의 젊은 아내일 뿐이었다. 스테파노가 릴라와 니노의관계를 눈치챘다면 둘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니노는 왜 릴라와의 사랑에 자기 미래를 걸었던 걸까. - P564

나는 임마를 차에 태우고 아빠를 보러 간다고 마음먹고 사준 새옷에 아이스크림을 흘린 임마를 야단쳤다. 나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로마를 떠났다. 지난날 니노가 릴라에게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니노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없는 어떠한 것을 릴라에게서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 순간 니노는 릴라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그 사실을 확인했을 것이다.
릴라는 지적이었지만 이를 활용해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란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귀부인처럼 자신의 지성을 허비했다. 니노는 바로 릴라의 이런 점, 즉 대가를 바라지 않는릴라의 지성에 매료되었다. 이러한 릴라의 특성은 다른 수많은 여성과 차별되는 것이었다. 릴라는 그 어떠한 가르침이나 필요 또는 목적에 굴복하지 않았다. 릴라를 제외한 우리 모두에게는 무언가에 굴복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시험과 실패와 성 - P564

공을 겪고 나서 우리 자신을 현실에 알맞게 재조정했다.
릴라는 달랐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릴라를 바꾸지 못한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릴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제멋대로인 데다 우매해지고 있지만 우리가 릴라에게 부여한 능력은 변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해질 것이다.
지난날 우리는 릴라를 증오하다가도 결국 릴라를 존중하고 두려워하게 되곤 했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면 나디아가 몇 번 만나지도않은 릴라를 싫어하고릴라를 해코지하고 싶어 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릴라는 나디아에게서 니노를 빼앗았고 혁명에 대한 나디아의 신념을 비웃었다. 릴라는 못된 데다 자신이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을 공격할 줄 알았다. - P565

릴라는 구제받고 싶어 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였다. 다시 말하면 나디아에게 릴라는 존경할만한 적이었고 그런 릴라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나디아에게 순수한 만족감을 줄 것이었다. 릴라에게 해코지를 하면서 파스콸레처럼 한 명을 마음먹고 희생양을 삼을 때와 같은죄책감은 느끼지 않을 터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비참해졌다. 갈리아니 선생님도 나폴리 만이 내려다보이던 선생님의 집도, 수많은 장서도, 그림도, 선생님과 나누었던 수준 높은 대화도, 아르만도도, 그리고 나디아까지.
나디아는 처음 학교 앞에서 니노 곁에 있었을 때만 해도, 부모님의아름다운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나를 맞이했을 때만 해도 정말 사랑스럽고 예의 바른 소녀였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서 훨씬 더 빛나는 옷을 입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자신이 누리던 수많은 혜택을내려놓았을 때까지만 해도 나디아에게는 특별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 P565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모든 혜택을 벗어던졌던 고귀한 이유는 사라지고 말았다. 나디아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토록 아둔하게 수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한 끔찍함과 모든 잘못을 벽돌공에게 돌리는파렴치함뿐이었다. 나디아가 한때 신인류의 선봉이라고 여기던 파스콸레는 이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불안했다. 나폴리를 향해 운전하는 내내 데데를 생각했다.
나는 데데가 나디아와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본모습을 잃게 하는 그런 실수 말이다.
7월 말이었다. 바로 전날 데데는 최고 점수로 졸업시험에 합격했다. 데데는 아이로타 집안의 일원이었다. 데데는 내 딸이었다. 그렇게 똑똑하니 결과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곧 있으면 데데는 나를 넘어설 것이다. 제 아빠도 마찬가지다. 내가 힘들게 노력하고 운이 좋아 이루어낸 모든 것을 데데는 마치 타고난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너무나 쉽게 성취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566

그런 데데의 계획은 무엇인가. 겨우 리노에게 고백이나 하는 것이다. 리노와 함께 침몰하는 것이다. 정의감과 연대감, 우리와는 다른어떠한 매력에 취해 자신이 누리는 모든 혜택을 포기하는 것이다.
데데가 허구한날 불평만 늘어놓는 리노에게서 대체 어떤 특출한 면을 보고 그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백미러로 임마를 바라보면서 불쑥 물었다.
"너는 리노가 좋으니?"
"난 별로예요. 리노는 데데 언니가 좋아하죠."
"어떻게 알아?"
"엘사 언니가 말해줬어요." - P566

"엘사 언니한테는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데데 언니요."
"너는 왜 리노가 싫어?"
"너무 못생겼거든요."
"그럼 너는 누가 좋은데?"
"아빠요"
나는 순간 임마의 눈에서 불꽃을 보았다. 그 불꽃은 임마가 조금전에 세 아빠에게서 본 것이었다. 니노가 릴라와 나락에 빠졌다면절대로 가지지 못했을 불꽃이었다. 파스콸레와 나락에 빠짐으로써 나디아가 영영 잃어버린 불꽃이었다.
리노를 따라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데데도 그 불꽃을 잃어버릴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자기 딸이 파스콸레 무릎에 앉는 것을 보고 갈리아니 선생님이 느꼈을 불쾌감을이해할 수 있었고 그런 태도가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릴라를 버리기로 결정한 니노가 이해되고 타당하게 느껴졌다. 솔직히말하면 자기 아들과 나의 결혼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시어머니가 이해되고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P567

엔초는 리노나 리노가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가 아니라 티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몇 년 살다가 죽으면 죽는 거야. 그걸로 끝이지. 언젠가는포기하게 돼. 하지만 아이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러고서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면 살면서 그 무엇도 아이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게 돼. 티나는 돌아올까 아니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까? 돌아온다면 살아서 돌아올까 아니면 죽어서 돌아올까?"
엔초가 속삭였다.
"매 순간 티나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묻곤 해. 거리에서 집시처럼구걸하고 있으려나? 슬하에 아이가 없는 부잣집으로 들어간 걸까? 사람들이 아이에게 몹쓸 짓을 시킨 다음 그 장면을 찍어서 사진이나영상으로 팔지는 않을까? 아이를 갈가리 찢어 다른 아이의 가슴에넣으려고 티나의 심장을 비싼 가격으로 팔아넘긴 건 아닐까?  - P575

만약그랬다면 티나의 나머지 부분은 땅에 묻혔을까? 아니면 태워버렸나? 그도 아니면 납치됐다가 사고로 죽어버려서 통째로 땅에 묻힌걸까? 만약 흙이나 불이 티나의 몸을 갉아먹은 것이 아니라면, 티나가 어디에선가 잘 자라고 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세월이 흐르면 어떻게 변할까? 길에서 마주치면 알아볼 수 있을까? 설령 알아본다 한들 티나가 사라짐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잃은 것을 누구에게서 돌려받을 수 있을까? 티나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런 어린 티나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누가 우리에게 알려줄까?"
엔초가 평소처럼 힘겹게 그렇지만 진중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 눈물 맺힌 그의 눈을 보았다. 그제야 나는 엔초가릴라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려고 한 - P575

다는 사실을 알았다.
엔초와 함께한 여행은 의미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엔초보다 감수성이 섬세한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엔초는 지난 4년 동안 릴라가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에게 속삭이거나 악을 쓰면서 한 이야기를들려주었다. 그러다 서서히 내가 내 일과 내 불만에 대해 이야기할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엔초에게 딸들 문제와 책, 남자 문제, 시시때때로 밀려드는후회와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글 쓰는 일이 이제는 의무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나를 실력 없고 무례한 별볼일 없는 여자 취급하는 사람들과 싸우느라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 P576

"그 사람들은 오직 내게서 독자들을 빼앗으려고 나를 괴롭혀 원가 심오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야. 그저 내가 발전하는게 싫어서 그러는거야. 자기들과 자기 애제자들을 보호하려고 보잘것없는 권력을 동원해 내게 해를 끼치려는 사람들이야."
엔초는 내가 감정을 쏟아내도록 내버려두었다. 엔초는 내가 모든일에 열정을 보인다고 칭찬했다.
"봐. 너는 매사에 열정적이잖아. 그렇게 열심히 사니까 네가 선택한 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거야. 그렇기 때문에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거야. 무엇보다도 이 열정에 네 모든 감정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너는 삶의 흐름에 떠밀려 갈 수 있는 거야. 물론 티나에게 일어난 일은 네게도 끔찍하겠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슬픈거야. 하지만 그 일은 이제 네게 먼 과거일 뿐이야. 릴라는 아니야. 지난 몇 년 동안 릴라의 세계는 떠도는 풍 - P576

문처럼 무너져 내려 티나가 남기고 간 공백 속으로 쓸려들어가 버렸어, 빗물이 홈통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말이야. 릴라의 삶은 티나에게서 멈췄어. 그래서 릴라는 티나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살아숨 쉬고 성장하고 번영하는 모든 것을 증오하는 거야."
엔초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릴라는 강해. 나를 막 대하고 네게 화를 내고 못된 말을 해. 하지만 멀쩡하게 설거지를 하거나 창밖으로 큰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던 적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 P577

나는 일에 치여서 한 번도 릴라의 새로운 열정에 대해 이야기를나눌 시간도 의지도 갖지 못했다. 릴라는 릴라대로 내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릴라가 어떤 일에 흥미를 느끼면 집착 수준으로 집중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릴라가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게 별로 놀랍지 않았다. 다만 엔초와 고함을 치면서 한바탕 싸우고 난 다음 릴라가 사라지고 밤늦도록 도시를떠도는 릴라 위에 티나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면 조금 걱정이 됐다.
그럴 때면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나폴리의 지하 터널과 망자의 머리가 겹겹이 줄지어 놓여 있는 지하 묘지가 떠올랐다. 방문객을 불행한 영혼들의 세계로 인도하는 푸르가토리오 아르코 성당의 까맣게 변색된 청동 해골 상들이 떠올랐다.  - P593

나는 다시 니노를 찾았다. 마리사에게서 니노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며 니노가 자기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긴 했다. 그러나 니노는 임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간접적으로나마 릴라에게 자기 권력을 과시하고 싶어서인지 내 부탁에는 바로 응해주었다. 하지만 니노마저 엔초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니노는 몇 번에걸쳐 몇 가지 가정을 들려주기는 했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신빙성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확실한 것은 나디아가 흐느끼며 자백할 때 엔초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앤초와 파스콸레가 트리부날리 가에서 열린 노동자와 학생들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었던 일을 폭로했다는 사실이다. 까마득히 먼 옛날 만초니 가에 있는 나토군 장교들의 사유지 앞에서 있었던 소규모 시위들에 대한 혐의를 엔초와 파스콸레에게 돌렸다는 사실이다. - P594

조사관들은 분명 파스콸레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범죄에 엔초도 연루된 것으로 몰고 가려 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정도일 뿐 그다음부터는 모든 일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나디아는 엔초가 비정치적인 성격의 범죄를 위해 파스콸레의 힘을 빌렸다고 증언했을 것이다. 아마 나디아는 브루노소카보의 살인을 포함한 몇몇 살인사건을 엔초가 기획하고 파스콸레가 실행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아마 나디아는 파스콸레에게서 직접 솔라라 형제를살해한 범인이 파스콸레와 안토니오 카푸초와 엔초 스칸노였다는말을 들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세 친구가 오랜 유대감과 그에 못지않게 해묵은 원한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 P595

복잡한 시대였다. 우리가 성장했던 세계의 질서가 사라지고 있었다. 올바른 정치 노선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연구하며 습득한기존의 능력이 언젠가부터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자니 마르크스주의자니 그람시 추종자니 공산주의자니 레닌추종자니 트로츠키 추종자니 마오쩌둥 추종자니 노동자니 하는 표현들은 어느덧 한물간 구호나 심한 경우 야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취급당했다. 지난날 혐오의 대상이었던 타인에 대한 착취와 최대 이윤추구의 법칙이 지금은 장소를 불문하고 자유와 민주주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 국가와 혁명 조직 내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으로 혹독하게 정산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너무나 허무하게 살해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고 평범한 사람들마저 우르르 떼를 지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니노나 아르만도 같은 사람들은 벌써 오래전부터 기류의 변화를감지하고 새로운 시기에 재빨리 적응했다. 그렇게 해서 니노는 국회 - P595

에 자리를 잡았고 아르만도는 방송 덕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주변사람들에게서 현명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던 나디아 같은 사람들은눈물 고백으로 양심 세탁을 했다.
파스콸레와 엔초 같은 사람들은 달랐다. 나는 그들이 여전히1960년대와 70년대에 배웠던 좌우명에 따라 생각하고 그러한 자기신념을 표현하고 공격하고 방어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파스콸레의 투쟁은 감옥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정부의 끄나풀에게 다른 사람을 고발하지도 않았고 변변한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파스콸레와는 달리 엔초는 분명 뭔가를 말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를 계산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자신의 모든 혐의를 부정했을 것이다. - P596

릴라는 나름대로 자신의 뛰어난 지력과 못된 성격과 비싼 변호사들을 총동원해 엔초를 곤경에서 구해내기 위한 싸움에 전력을 다했다. 엔초가 전략가라고? 투사라고? 수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베이직 사이트에서 일하면서 대체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솔라라 형제가 살해당했을 때 엔초는 아벨리노에, 안토니오는 독일에 있었는데 어떻게 셋이 함께 그들을 죽일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세 친구가 솔라라 형제를 살해했다 할지라도 삼총사는 고향 동네에서 워낙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얼굴을 감춘다 해도 동네사람들은 이들을 바로 알아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게 주장해봤자 소용없었다. 정의의 수레바퀴는 계속굴러갔고 나는 이러다 릴라까지 체포될까봐 두려웠다. 나디아의 입에서는 계속 새로운 이름이 튀어나왔다. 경찰은 트리부날리 가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을 몇 명 더 체포했다. 그 가운데에는 유엔 식량농업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고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 - P596

다. 경찰은 에넬사의 기술자와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잘 살고 있는아르만도의 전 부인 이사벨라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나디아가 건드리지 않은 사람은 단 두 명, 자기 오빠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릴라였다.
아마 갈리아니 선생님의 딸은 엔초를 끌어들임으로써 이미 릴라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릴라를증오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존경했기 때문에 오랜 망설임 끝에 릴라를 끌어들이지 않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믿고 싶은 것은 나디아가 티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파 릴라를 자기 일에 연루시키지 않기로 했다는 가정이었다. 아니 나디아는 그보다 어머니로서 그런 일을 겪은 이상 릴라가 다른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 P597

엔초의 혐의는 서서히 실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의는 전투력을 상실하고 기운을 잃었다. 수개월동안 제대로 따져본 결과 엔초가 저지른 일이 별일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파스콸레와 오랜 친구사이라는 사실과 산 조반니 아 테두초에서 노동자와 학생들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했었다는 사실 그리고 파스콸레가 숨어 있던 세리노산의 허름한 산장을 아벨리노에 사는 엔초의 친척 이름으로 임대했다는 것 정도가 사실로 판명되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엔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테러리스트 집단의 두목이자 야만적인 범죄의 기획자이자 집행인에서 일개 테러활동 지지자에 지나지 않는 걸로 밝혀졌다. 그 지지마저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한 개인의 의견일 뿐 그것이 한 번도 범죄행위로 발전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자 엔초는 집으로 돌아왔다. - P597

마리아로사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내린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평가는 사실로 드러났다. 아이로타 교수를 둘러싸고 휘몰아쳤던 언론의 광풍은 조금씩 수그러들었고 시아버지는 다시 자기 서재 안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가 법적으로는 결백하지만실은 분명 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죄인 취급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 결백할 거라고 생각했다.이미상황이 이 정도로 진정된 다음에야 나는 시어머니에게 전화해도되겠다고 생각했다. 시어머니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내 배려에 고마움을 표했다. 시어머니는 데데와 엘사의 생활과 학업에 대해 나보다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시어머니가 말했다.
"이 나라는 말도 안 되는 일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곳이야.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은 서둘러 이민을 가는 게 나아." - P610

솔직히 릴라는 니노의 운명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니노가 법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는 소식에 릴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릴라는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줄 만한 일이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니노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브루노 소카보에게 손을 벌렸지. 분명 한 푼도 돌려주지 않았을 거야."
릴라는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빤히 보인다고 했다.
"니노는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과 악수하면서 자기가 최고로 잘난줄 알았을 거야.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을 거야. 죄를 저질렀다면 분명 사람들이 자기를 더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랬을 거야. 제일 똑똑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언제나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렇게 했을 거야."
그게 다였다. 그런 다음부터 릴라는 니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 P612

어찌됐든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엄마에게 한마디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핵심이 명확한 연설을 늘어놓았다.
"리나 이모는 네게 정말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는구나. 엄마는좋아. 리나 이모가 뭔가에 빠지면 이모를 말릴 사람이 없지. 그렇다고 사람들이 가볍게 나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더구나 그 대상이 국회의원이나 장관이나 상원위원이나 은행가들이나 카모라라면 말이다. 세상 일이 쳇바퀴 돌 듯 반복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으레 한때는 상황이 좋아졌다가 안 좋아졌다가 때가 되면 다시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우리는 항상 열심히 노력해야 한단다. 우리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해. 실수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임마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P621

나는 엄마의 말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사실 내 딸은 내가 자기아빠에게 못되게 굴었으며 자기 아빠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내가 몰랐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정작 내게 예기치못한 영향을 미친 것은 ‘엄마는 책을 쓰지만 리나 이모 같은 선견지명은 없다‘는 말이었다. 임마의 말 때문에 나는 딸이 보기에 선견지명이 있는 여인인 릴라가 50세가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책을 읽고공부를 하고 글까지 쓴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피에트로는 예전에 그런 릴라의 행동을 티나가 사라짐으로써 생긴 괴로움을 잊기 위한 일종의 자가치유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고향에서 보낸 마지막 일 년 동안 나는 피에트로의 세심한 의견 - P623

릴라는 말을 얼버무렸다. 내게는 좀처럼 마음을 털어놓으려 하지않았다. 하지만 가끔 릴라답게 갑자기 흥분해서 나폴리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폴리가 평범한 길과 일상적인 장소로만 만들어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나폴리는 오직 릴라에게만 자신의 비밀스러운 광채를 드러낸 것 같았다. 릴라는 몇 마디안 되는 문장만으로 나폴리를 상징과 의미가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 바꾸어 놓았다.
릴라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일을 시작할 때면 영감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폴리에서 태어나 살면서 나폴리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 큰 태만이었다. 나는 이제두 번째로 나폴리를 떠나려 하고 있다. 내 인생의 전성기 삼십 년을여기서 보내고도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피에트로가 나의 무지를 비난했었는데 지금은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릴라의 말을 듣다보면 나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 P624

릴라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떤 다른 생각을 가슴속에 품어왔을까. 지금은 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릴라의 눈치아티나가 나의 임마콜라타 대신 납치됐다니 자기 딸이 납치된 게 내 성공 때문이라니. 그렇다면 엄마에게 그토록 애정을 보인 것도 불안한 마음에임마를 지키고 보호해주고 싶어서였던 것일까. 티나의 납치범들이실수로 데려간 아이를 내다버리고 원래 납치하려던 아이를 데리러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또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릴라의 머릿속에는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일까. 자신을 떠나려는 내게 벌로 마지막 독을 부어넣으려는 것일까. 아, 엔초가 왜 릴라를 떠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릴라와 사는 것이 너무나 끔찍해졌던 것이다.
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눈치챈 릴라는회피하듯 요즘 자기가 읽고 있는 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P631

하지만 말에 두서가 없었고 얼굴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릴라는웃으면서 아픔이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법이라고 중얼거렸다.
성당이나 수도원이나 책으로 가리려고 해도 소용없어. 책이 정말 중요한 것 같지? 그러니 너도 책에 네 평생을 바쳐왔겠지. 그래봤자 소용없어. 악은 결국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바닥을 뚫고 기어 나오16-458는 법이야."
릴라는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티나와 엄마와 나에 대한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회유적인 말투였다. 조금 전 자기가한 말에 대해 내게 사과하고 싶은 것 같았다. 릴라가 말했다.
"사방이 너무나 고요할 땐 별 생각이 다 떠오르곤 해. 너무 신경쓰지 마. 모든 사람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올바른 말을 하고, 모든일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고, 호감과 비호감,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나오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은 형편없는 소설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야" - P632

릴라가 속삭였다.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 티나가 돌아올 수 있어. 그러면 지금까지일어난 일은 아무 상관없어. 중요한 건 티나가 다시 이곳에 있다는사실이야. 정신을 딴 데 팔았던 엄마를 용서해주는 거야."
릴라가 말했다.
"너도 나를 용서해."
릴라가 나를 껴안으면서 그날의 대화를 끝맺었다.
"어서 떠나. 가서 지금까지 해온 일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하도록해. 내가 임마 곁에 있었던 것은 누가 그 애를 데려가 버릴까봐 겁이나서이기도 했어. 너는 너대로 네 딸이 리노를 버렸는데도 변함없이 - P632

리노를 사랑해줬지. 리노 때문에 많이 참았다는 거 알아. 고마워. 우리가 이토록 오랫동안 친구였고 지금도 친구여서 정말 기뻐."

티나가 내 딸인 줄 알고 납치했을지도 모른다는 릴라의 생각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릴라가 그렇게까지 생각하게 된 복잡하게 뒤엉킨 모호한 감정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런 릴라의 감정을 나름대로 정리해보려 했다.
그러다보니 정말 오랜만에 릴라가 자기 딸에게 어린 시절 내가 애지중지하던 내 인형의 이름을 붙였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물론순전한 우연이었다. 하지만 가장 무의미한 것 같은 사건 속에는 한번 발을 내디디면 빠져나올 수 없는 모래늪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법이다. - P633

그 인형은 어린 시절 다른 사람도 아닌 릴라가 제 손으로 창고 속에 내던진 바로 그 인형이었다. 내가 그 일을 두고 생각에 잠긴 것은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래 생각하지 못하고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희미한 불빛이 반짝이는 어두운 우물 앞에서 나는 끝내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사람들 사이의 깊은 관계 속에는 수많은 덫이 있고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려면 그 덫을 피하는법을 배워야 한다.
그때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그 일로 결국 우리 우정의 빛과 그림자와 릴라의 길고 복잡한 고통을 다시 한번 느꼈을 뿐이다. 그 고통이 여전히 릴리를 괴롭히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라는 사실을 또다시 깨달았을 뿐이다. - P633

릴라는 뛰어난 지성과 놀라운 기억력과 평생에 걸쳐 방대한 양의 책을 읽었는데도 (가끔 내게 책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내게 자기가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숨겼다) 기본적인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데다 서술가로서 갖춰야 할 능력이 없었다. 나는 릴라의 글이 너무나 좋은 글들을 그저 산만하게 모아놓은 것에 불과할까봐 두려웠다. 경이로운 문장을 잘못된 곳에 배치했을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맹세컨대 나는 단 한 번도 릴라가 상투적인 문구로 가득 찬하찮고 별 볼일 없는 글을 쓸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니 나는 릴라가 뛰어난글을 쓸 거라고 절대적으로 믿었다. - P635

릴라의 집착은 때에 따라 온도차가 있었다. 한번은 내 명성을 트집 잡아 악의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이름 하나에 딸린 이야기가 너무 많아. 유명하는 유명하지 않는이름이란 결국 피와 살과 말과 똥과 하찮은 생각으로 가득 찬 자루를 묶고 있는 끈에 불과해."
릴라는 이름 이야기로 나를 한참 놀려댔다.
"엘레나 그레코라는 끈을 푼다고 그 자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그 기능은 변하지 않아. 물론 그전보다 엉망이 되겠지. 특별히 장점이랄 것도 단점이랄 것도 없이 망가져갈 거야."
릴라는 기분이 특별히 우울할 때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이름이라는 매듭을 풀어 버리고 싶어. 풀어서 내다버리고 싶어. 잊어버리고 싶어." - P639

릴라는 평소에는 그보다 평온했다. 나는 가끔 릴라가 자기가 쓰고있는 글에 대해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전화를 걸었다. 그럴 때마다릴라는 여전히 글을 쓴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정했다. 그럴 때면 나는 왠지 릴라가 한참 창작에 열중하다 내 전화 때문에 놀란 것 같은느낌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전화를 걸었는데 그날 릴라는 마침 딱기분 좋을 정도로만 정신이 나가 있었다. 릴라는 모든 위계질서를부정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지만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장점인지는 잘 모르겠어. 주사위를 던졌는데우연히 좋은 숫자가 나온 것과 다를게 없는 것 같아."
평소 릴라가 하던 말과 별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날따라 릴라는 정확한 어휘력과 창의력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나는 릴라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느꼈다.  - P639

그해 12월은 정말이지 즐거웠다. 나는 58세에 벌써 할머니가 됐다. 나는 하미드를 품속에 꼭 껴안았다. 크리스마스 저녁, 나는 하미드를 안고 한쪽 구석에 앉아 평온한 마음으로 내 딸들의 젊고 활기넘치는 육체를 바라보았다. 셋 다 나를 닮기도 했고 전혀 닮지 않기도 했다. 아이들의 삶은 내 삶과는 너무나 달랐지만 그 아이들은 내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고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 생각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포기하고 멈춰설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고향을 떠났다가돌아갔다가 다시 떠나왔다. 그 무엇도 나를 내가 낳은 내 딸들과 함께 나락에 빠뜨리지 못했다.
우리 넷은 이제 안전했다. 나는 세 딸 모두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다. 이제 그 아이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살면서 다른 언어를 쓴다. 아이들에게 이탈리아는 휴가기간에나 잠시 머무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찬란한 장소이자 하찮고 비효율적인 곳이기도 하다. - P641

나는 하미드를 어루만지면서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했다. 결국나보다 훨씬 뛰어난 내 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나와같은 어려움은 한 번도 겪지 않고 살아온 내 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64 b아이들은 나로서는 아직까지 감히 생각조차 못하는 태도와 목소리로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권리를 주장하며 자의식으로 충만하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내 딸들과 같은 행운을 가진 것은 아니다. 부유한 국가에 만연한 평범함 속에는 부유하지 않은 세계의공포가 내재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공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폭력이 우리들의 도시와 일상에 침투하면 그제야 흠칫 놀라며 불안해했다. - P642

지난해 텔레비전에서 성냥을 가볍게 부딪혀 불을 붙이듯 비행기들이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 불을 붙이는 장면을 보고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데데와 엘사, 피에트로와 한참 동안 통화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보다 아래에 있는 세계에는 지옥이 있다. 딸들도 그것을 알기는 하지만 글로만 배웠을 뿐이다. 딸들은 분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누릴 수 있을 때까지 삶의 기쁨을 누린다. 아이들은자신들의 안락한 삶과 성공을 제 아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그 어떤 특권도 누려본 적이 없는 나야말로 아이들이 성공한 근원이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무엇인가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마 딸들이 쾌활하게 각자의 파트너를 내 책을 꽂아둔 책장 앞으로이끌었을 때였던 것 같다. 내 딸들 가운데 누구도 내 책을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내 딸들이 내 책을 읽는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딸들에게서 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도 없었다. - P642

그랬던 딸들이 그때만큼은 책을 꺼내 책장을 뒤적이기도 하고 몇 문장을 큰 소리로 낭독하기도 했다.
그 책들은 내가 살아온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글이었다. 나에게 영감을 주고 나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을 바탕으로 쓴 글이었다. 나는 나의 시대를 한 걸음 한걸음씩 걸어오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사유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악행을 지적했고 사람들을 악행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끝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사회 구제방안을 예측하고 제시했다. 일상적인 어휘로 일상을 표현했다. 나는노동과 계급투쟁, 페미니즘과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내 딸들이 그때 내 글을 되는대로 골라서 읽는 것을 듣고 있으니 당황스러웠다. - P643

엘사는 은근히 비아냥조로 내 데뷔작과 남성이 주조한 여성에 대한글,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을 낭독했다. 데데만 해도 엘사보다는 나를 더 존경했고 임마는 더 신중했다. 엘사는 글의 결점과 과한 부분, 과도한 감탄사를 연발한 부분과 지난날 내가 부정할수 없는 진실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고루해진 사상을 목소리로교묘하게 부각했다. 특히 엘사는 어휘를 짓궂게 물고 넘어졌다. 엘사는 유행이 지나서 지금은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단어를 두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
저 아이는 내 앞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나폴리에서 흔히 그러했듯 애정을 담아 사람을 놀리고 있는 건가. 엘사의 말투는분명 나폴리에서 익힌 것이었다. 하지만 한 줄 한줄 읽어나가는 동안 엘사는 번역본들과 함께 가지런히 꽂혀 있는 내 모든 작품의 하찮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 P643

나는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릴라와의 통화를 최대한 피했다.
이제는 릴라가 ‘내가 쓴 글을 좀 읽어봐 줘 몇 년 동안 작업한 결과야, 메일로 보내줄게‘라고 말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릴라가 정말 그렇게 말할까봐 두려웠다. 정말 두려웠다. 릴라가 내 전문 분야에 불쑥 침입해 작가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공허하게 만들 경우 내가어떻게 대응할지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분명 「푸른 요정」을 읽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찬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릴라의 글을 출간할 것이다.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모든방법을 총동원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짝꿍의 놀라운 재능을 발견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정체성이 확고한 어엿한 성인이었다. 나는 릴라 스스로때로는 농담 삼아, 때로는 진심으로 반복해 말했던 것처럼 ‘라파엘라 체룰로의 눈부신 친구 엘레나 그레코‘였다.  - P645

지금은 내게 속한 그 무엇도 세월을 견뎌내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내 작품들은 비교적 빨리 빛을 보았고 그 알량한 행운 덕에나는 수십 년 동안 내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왔다. 갑자기 그 환상이 희미해졌고 이제는 내 작품이 중요한 것같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릴라의 인생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릴라는 자기 부모님이 살던 집에 틀어박힌 채 도무지 내용을 예측할 수 없는 생각과 느낌으로 컴퓨터를 채워가면서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할머니가 다 된 지금이나 아니면 죽은 후에라도 예전에 릴라가 그저 자루를 묶는 끈에 불과하다고 했던 릴라의 이름이단 하나의 위대한 작품으로 영원히 남을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나처럼 수백만 페이지의 글을 쓰거나 내가 내 책으로 누렸던 성공을만끽하지는 못하겠지만 릴라의 책은 시간을 이겨낼 것이다. 수백 년동안 수많은 사람이 릴라의 책을 읽고 또 읽을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허비해버린 나와는 달리 릴라에게는 아직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내 운명은 질리올라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지만 릴라는 아니었다. - P648

또박또박 자기표현을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티나 생각이 났다. 기분이 특히 우울할 때면 릴라가 자기 딸에 대해 자세히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릴라가 교육받지 못한 사람 특유의 오만한 순진함으로 티나 이야기와 나폴리 이야기를 뒤섞었을 것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놀라운 결과물이 나올 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이내 모든 것이 내 상상일 뿐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안과 질투와 증오와 애정을 더하고 있었다. 릴라에게는 그런욕망이 없었다. 릴라에게는 평생 욕망이 없었다. 자기 이름을 연관지을 만한 계획을 세우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릴라는 내게 자기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에게 좋아할만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 P649

그럴 때면 나는 애초에 릴라의 원고는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그럴 것이라고 확신하곤 했다. 나는 지금까지 릴라를 과대평가했다.
릴라에게서 영원히 기억될 만한 것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런 생각을하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릴라를 사랑했다. 릴라가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릴라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은 나여야만 했다. 그것이 내 임무라고생각했다. 나는 어린 시절 릴라가 직접 내게 그런 과제를 주었다고 확신했다. - P650

나중에 『어떤 우정』이라는 제목을 붙인 소설은 내가 가벼운 우울증에 빠져 있던 그 시절 나폴리에서 탄생했다. 그때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었다. 물론 나는 그 글이 릴라와 내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에 위배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릴라가 내 행동을 참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과만 좋으면 결국 릴라가 내게이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고마워. 나 스스로에게조차 말할 용기가 없었는데 네가 대신 내이름으로 말해주었어."
이른바 예술가, 특히 문학가들은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우리는 그 누구에게서도 그 어떠한 권리도 위임받지 못했는데 마치 위임받은 것처럼 작업을 착수한다.  - P650

릴라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두려운 마음에 그러지 못했다. 릴라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고향동네 사람들과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을 쓰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내가 그럴 때마다 릴라는 고통스러울지라도 기어코 내 책이 형편없다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무질서함까지 고스란히 담아 현실을있는 그대로 들려주든지 아니면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의 가닥을새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나는 릴라에게연락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번에도 결국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릴라는 내 이야기를 탐탁지 않아 할 테고 내게 내색하지 않다가 몇년 후에야 내게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내게 이보다는 목표를 높게 잡아야 한다고 대놓고 말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가라앉혔다. - P651

어느릴라는 언제나 그랬다. 내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나를 소외시키고 나를 벌하고 좋은 작품을 썼다는 만족감까지 손상시켰다.
나는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자기삭제를 연출하는 행위도 이제 내게 걱정보다는 분노를 자아냈다. 아마 어린 티나와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네 번째 생일을 앞둔 아이의 모습으로, 가끔은 현재 임마처럼 30세의 다 큰 여인의 모습으로 릴라를쫓아다니는 티나의 유령과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오직 그리고 영원히 우리 둘만의 문제일 것이다.
타고난 천성과 자신이 처했던 환경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것을 내가 이루기를 바랐던 릴라와 그런 릴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나만의 문제일 것이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화가나서 나에게 복수하기위해 나도 자기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려는 릴라와 수개월동안 쓴 글로 그런 릴라에게 경계가 해체되지 않은 형태를 만들어주고 릴라를 이겨내 릴라에게 평안을 찾아주고 그로써 나도 평안을 찾으려 하는 나만의 문제일 것이다. - P654

나 자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영원히 끝내지 못할 것 같았던 이이야기를 끝마친 것이다. 이야기를 완성한 후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글을 꼼꼼하게 다시 읽어 보았다. 글을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 몇 줄이라도 릴라가 내 글에 들어와 글에 이바지한 흔적이 없는지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내 이 기나긴 글이 오롯이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릴라는 종종 내 컴퓨터에 침입하겠다고 나를 위협하곤 했지만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아마 애당초 그럴 능력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네트워크니 케이블이니 연결이니 전자세계의 요정들이 벌이는 일에 대해 무지한 늙은 여인의 오랜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을 것이다.
내 글에 릴라는 없었다. 내가 글로 쓸 수 있었던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릴라가 어떤 글을 어떻게 쓸지를 상상하다보니 내 글과릴라의 글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 P657

그러니 이 긴 글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릴라를 다시붙잡고 싶었다. 내 곁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내가 해낸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가끔 릴라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혼자 되묻곤 한다. 바닷속으로 사라진 걸까. 오직 릴라만 아는 지하 터널이나 갈라진 틈 사이로들어가버린 걸까. 강력한산을 가득 채운 오래된 욕조 속에 들어간걸까. 아니면 내게 공들여 설명해주었던 예전에 쓰레기 폐기장으로쓰이던 ‘석탄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버린 걸까. 산속 깊이 버려진 작은 성당의 납골당에 있는 걸까. 우리는 아직 모르지만 릴라는 알고있는 다른 수많은 차원 가운데 하나의 세계에서 자기 딸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닐까. 릴라는 돌아올까. 늙은 릴라와 다 큰 어른이 된 티나가 함께 돌아올까. 오늘 아침, 포 강이 마주보이는 작은 발코니에 앉아나는 기다려 본다. - P661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릴라는 나를 속였던 것이다. 우리의 우정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나를 제멋대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평생 ‘내‘ 육체와 ‘내‘ 존재를 빌려 자신의 구원을 이야기한 것이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반세기 이상이 걸려 토리노까지온 그 두 인형은 릴라가 잘 지내고 있으며 나를 사랑하고 이제 드디어 틀을 깨고 세계 일주를 할 생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지난날 릴라의 세계만큼 작아진 세계를 여행하며 새로운 진실에따라 젊은 시절 다른 사람들 때문에 또는 자기 자신 때문에 누리지못했던 삶을 살아가면서 늙어갈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나는 두 인형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나는 인형들을 내 책등에 기대어 놓았다. 보잘것없고 못생긴 인형들을 바라보고 있으니혼란스러워졌다. 소설과는 달리 진짜 인생은 일단 지나간 후에는 명확해지기보다 모호해지는 법이다. 릴라가 이토록 명확하게 자신을드러냈으니 이제 다시는 릴라를 보지 못해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 P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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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 말이 맞아. 글은 그저 쓰기 위해 쓰는 게 아니야. 정말 상처주고 싶은 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쓰는 거야.‘

몇 달 만에 릴라와 나는 좀 더 가까워졌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함께 장을 보기 시작했다. 일요일에는 큰길을 따라 허구한 날 똑같은 노점 사이를 돌아다니는 대신 나폴리 시내로 가자고 했다. 우리는 엔초와 함께 딸들을 데리고 따스한 햇볕 아래 바닷바람을 쐬러갔다.
우리는 카라치올로 가나 빌라 코무날레 공원을 산책했다. 그럴 때면 엔초는 티나를 목마 태우고 다녔다. 엔초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티나를 애지중지했다. 그렇다고 내 딸들을 소홀히 대하는 법도없었다. 엔초는 아이들에게 공과 달콤한 과자를 사주고 함께 놀아주었다. 그럴 때면 나와 릴라는 일부러 뒤처져 걸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과는 달랐다. 그 시절은 - P372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릴라는 자기가 텔레비전에서 들은내용에 대해 물었고 나는 릴라의 질문에 유창한 답변을 늘어놓았다.
나는 릴라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든지 출판계의 문제라든지 페미니즘계의 새 소식 등에 대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들려주었다.
그러면릴라는 살짝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내 말에 주의 깊게 귀기울였다. 질문할 때 빼고는 끼어들거나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식으로 릴라와 대화하는 것이 좋았다. 릴라가 감탄하는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때도 좋았고 내게 "너는 정말 아는 것도 많고생각도 많구나"라고 말할 때도 좋았다. 가끔 나를 놀리는 것 같기도했지만 그마저도 괜찮았다. 내가 릴라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부추길때마다 릴라는 괜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게 만들지 말고 너나계속 이야기하라며 몸을 사렸다.
릴라는 종종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대면서 내가 그들과 개인적인친분이 있는지 묻곤 했다. 내가 아니라고 하면 실망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나와 친분이 있는 유명 인사들을 보통 사람들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 내릴 때도 그에 못지않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 P373

내가 대답했다. 나는 릴라가 나를 상류사회의 일원이기는 하되 그들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릴라 자신도 내가 그런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릴라는 내가 내 동료들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으며 재미있어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이 계속내 동료로 남기를 바랐다. 가끔 릴라가 내가 정말로 대중에게 현실을 가르쳐주고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나에게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릴라는 내가 책을 쓰고, 잡지와 신문에 기고하고 가끔텔레비전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어야만 내가 고향에 남기로 한결정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게 그런 후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릴라의 친구이자 릴라와 이웃으로 지낼 수 있는 전제 조건인 것 같았다. - P374

전북릴라는 때때로 나와 아이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고 그런 릴라보다 내가 더 자주 릴라와 엔초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릴라 커플은우리 집에 올 때마다 당연히 티나를 데려왔지만 젠나로는 데려오지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젠나로는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젠나로는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엔초가 젠나로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에 릴라는 ‘이제 다 컸는걸.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라는 주의였다. 하지만 나는 릴라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안해하는 엔초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럴 때 릴라의 말투는 나와 이야기할 때 쓰던 말투와 똑같았다. 엔초가 고개를 끄덕이면 강장제 같은 무엇인가가 릴라에게서 엔초에게로 옮겨갔다. - P376

길을 가다가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릴라와 함께 장을 보러 나갈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릴라는 우리 동네의 중요 인사로등극했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릴라를 불러 세웠다. 그들은 릴라를 한쪽으로 데려가 존경을 담아 자신들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들이 릴라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면 릴라는 특별한 반응 없이 그들의말에 귀를 기울였다. 릴라가 새로운 사업에서 성공해서 사람들이 릴라를 그렇게 대하는 걸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여서일까. 아니면 마흔을 목전에 둔 지금 릴라가 발산하는 특유의 기운이무르익어 사람들의 눈에 릴라가 때로는 매혹적이고 때로는 두려운마법사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나도 잘 모르겠다. 물론 사람들이 나보다 릴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는 했다. 나는 유명한 작가인 데다 새책의 출간을 앞두고 출판사에서 신문지면에 내 이름을 최대한 많이초가 고개를 끄덕게로 옮겨갔다. - P376

거론하려고 한창 힘쓰고 있을 때였으니까. 『레푸블리카』지는 신간도서를 소개하는 짧은 기사를 게재하면서 내 사진을 꽤나 크게 실었다. 기사에는 "특히 엘레나 그레코의 신작에 대한 기대가 높다. 엘레나 그레코의 이번 소설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유혈이 낭자한나폴리를 배경으로 한다‘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태어난 고향에서 릴라 곁에 서면 나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릴라의 공적을 목격한 증인에 지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알아온 사람들은 고향에서 길을 가다 나처럼 존경받는 유명 인사를직접 볼 수 있는 것도 다 릴라와 릴라의 매력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 P377

안토니오는 릴라를 위해 그런 일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릴라와의 우정과 릴라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아니면 릴라가 안토니오의 고용주인 미켈레에게서 그를 빌려온 것일 수도 있었다. 릴라가 요구하는 것은 뭐든 허락하는 미켈레라면릴라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켈레가 정말로 릴라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있는 걸까.
내가 고향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던 것 같지만 아직도그런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예전과는 다른 몇 가지 징조를 느꼈다. 우선 릴라가 미켈레 이름을 언급할때 예전처럼 흡족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해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보다도 미켈레가 베이직 사이트에 나타나는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 P382

그 기사를 쓴 사람은 고향 동네의 역사에 대해 말했다. 심지어는돈 아킬레 카라치와 마누엘라 솔라라의 살해사건까지 언급했다. 특히 마누엘라 솔라라 살해사건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을 세우며 이를자세히 다뤘다. 그는 마누엘라 솔라라의 죽음을 두고 카모라 집안간의 세력 다툼이 가시화된 사건이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벽돌공이자 동네 공산당 의회의 전직 서기관인 ‘악명 높은 테131212러리스트 파스콸레 펠루소‘의 작품일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파스콸레에 대해서는 한 줄도 쓴 적이 없었다. 돈 아킬레나 마누엘라 솔라라에 대해서 언급한 적도 없었다. 카라치도 솔라라도 나에게는 희미한 윤곽일 뿐이었다. 사투리 억양과 몸짓과 때로는 공격적인 말투로 순수한 상상의 산물인 소설 속 인물들을 풍요롭게 해주는 희미한 윤곽과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사업에 참견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솔라라 형제의 영지‘가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소설을 썼을 뿐이다! - P396

릴라는결국 나는 그러기로 했다. 릴리는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자기가또다시 내 책에 대해 안 좋게 말했다는 것도 잊게 하려고 했다. 릴라는 처음에는 사투리로 말하다가 나중에는 중요한 순간에만 나오는표준어 실력을 발휘했다. 나는 릴라가 그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릴라는 지진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 2년 동안 릴라는 지진 때문에동네가 더 안 좋아졌다고 불평할 때 빼고는 그날 겪은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해왔다. 릴리는 그 사건 이후로 자기는 인간이 복잡한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인간이란 물리학, 천체물리학, 종교, 영혼,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자본, 노동, 이윤, 정치, 수많은 조화로운 문장과 그렇지 않은 문장, 내적인 혼란과 외적인 혼란으로 가득 찬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 P399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평생 내가 누린 행운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내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가독성이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었고 주인공 캐릭터를 완성한내 능력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내 작품을 두고 비정한 현실주의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었고 바로크적인 상상력을 강조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부드럽고 편안한 여성적인 서술방식을 높게 평가한 사람도 있었다. 긍정적인 평이 쏟아졌지만 각기 다른 부분을 강조했고 종종 서로 모순적이었다. 마치 비평가들이 서점에 있는 내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선입견이 만들어낸 가상의 책을 소환하는 것 같았다.
파노라마지 기사가 나온 뒤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모든 이가 동의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소설이 나폴리라는 도시를 서술하는 일반적인 방식과 전혀 다르게 나폴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고했다. - P402

병원 복도에서 릴라를 바라보니 나보다 더 지쳐보였다. 내가 없는동안 릴라는 한결같이 엄마 곁에서 자신의 다정하고 따뜻한 온기를불어넣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릴라는 며칠동안 집에도 가지 않고잠도 거의 못 잔 탓에 너무 피곤해서 시선이 흐릿해보였다. 나도 릴라와 마찬가지로 피곤한 상태였지만 그런 릴라와는 달리 내면에서환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다. 내 딸이 아팠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지금 내 모습에 대한 만족감을 지울 수 없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맛본 자유를잊을 수 없었다. 스스로를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과거가 없는 사람처럼 규정하며 맛본 희열감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 P410

임마가 퇴원하자 나는 릴라에게 이런 내 감정을 털어놓았다. 나는죄책감과 자부심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릴라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 대신 임마에게 무엇을 해줬는지 세세히 듣고 싶었다. 하지만 릴라는 내게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만둬, 레누. 이미 다 지나간 일인걸. 임마는 다 나았잖아. 이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있어"
처음에 나는 릴라 회사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문제였다. 릴라는 엄마가 병에 걸리기 직전에 내 앞으로 소송장이 - P410

날아올거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다름 아닌 카르멘이 나를 고소한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마음이 아팠다. 카르멘이, 다른 사람도 아닌 카르멘이 내게 그런 짓을 했다니.
성공에서 오는 희열은 그 순간 끝났다. 엄마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었다는 죄책감에 소송을 당해 돈과 명예와 기쁨을 비롯한 모든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해졌다. 갑자기 나자신이, 나의 일장춘몽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릴라에게 지금당장 카르멘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지만 릴라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릴라는 내게 말해준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릴라의 충고를 듣지 않고 카르멘을 만나러 갔다. - P411

나는 전보다 더 불안에 떨면서 신문 가판대에 갔다. 신문에는 티나와 함께 찍은 내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번에는 흑백사진이었다.
제목부터 소송을 언급하고 있었다. 기사는 이번 소송을 보기 드물게용기 있는 소설가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로 평했다. 고향 동네 이름이나 솔라라 형제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기사는 상당히 숙련된 솜씨로 이번 사건을 나라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탈리아의 현대화를 막는 중세적 잔재와 드디어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거스를 수 없는 정치적·문화적 개혁의 흐름 간의 충돌 현상‘의 일환으로 해석했다. 짧은 글이었지만 - P416

문학의 권리를 ‘암울한 지역 분쟁‘과 분리하면서 특히 결론 부분에서 이런 주장을 효과적으로 변론했다.
나는 안정을 되찾았다. 보호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를 극찬한 다음 릴라에게 신문을 보여주러 갔다. 나는 릴라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릴라가 내게 기대했던 것도 이런 게 아니었던가. 그간 릴라가 내게 부여한 힘이 실제로발휘된 것이다. 그런 내 기대와는 달리 릴라의 반응은 냉랭했다.
"왜 이 사람에게 기사를 쓰게 한거야?"
"뭐가문제야? 출판사가 내 편을 들어줬잖아. 이 소동을 잠재워주겠다는 거잖아. 나는 좋은 일인 것 같은데?"
"다 쓸데없는 소리야, 레누. 이 작자는 책 판매에만 관심이 있을뿐이야."
"그럼 안돼?"
"물론 그래도 돼. 하지만 기사는 네가 썼어야지." - P417

며칠 동안 나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사가 일으킨 파장은 꽤나 컸다. 나폴리 지역 신문들은 『코리에레 델라 세라지의 기사를 언급하면서 내용을 좀 더 심도있게 다뤘다. 나는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응원의 전화와 편지를 받았다.
몇 주가 지나자 소송당했다는 사실에 익숙해졌다. 작가 중에서 나와 같은 일을 겪거나 나보다 더 큰 위험에 노출된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후 일상이 모든 것을 잠식했다. 나는 얼마동안 릴라를 피했다.
잘못된 행동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책은 꾸준히 잘 팔렸다. 8월이 되자 나는 산타마리아 디 카스텔라바테로 휴가를 떠났다. - P422

베이직 사이트를 찾아갈 때마다 릴라는 알폰소와 뭔가를 모의하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려 하면 릴라는 무심한 동작으로 내게 잠시 기다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동네로 돌아온 카르멘과 알 수 없는 이유로 출발을 무기한 연기한 안토니오와 이야기할 때도 릴라는내게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릴라의 주변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릴라는 나를 자기 일에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나도 그 편이 좋았다. 그러다 두 가지 끔찍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릴라는 우연히 젠나로팔에 가득한 주사 자국을 보게 됐다. 릴라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것은 처음이었다. 릴라는 엔초를 부추겨 젠나로를 죽도록 두들겨 패게 했다. 건장한 두 사내는 서로 처절하게 치고받았다.  - P423

알폰소는 어느새 살이 쪄서 무거워진 자기 몸에서 계속해서 도망치려 했다. 며칠 동안 자취를 감출 때도 있었다. 다시 나타날 때면 언제나 얻어맞은 흔적이 있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마지못해서였다.
어느 날 알폰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릴라와 엔초가 사방으로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며칠 후 코롤리오 해변에서 알폰소의시신이 발견되었다. 어디선가 맞아죽은 다음 바다에 버려진 것이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잔혹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없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알폰소를 떠올렸다. 친절하고 세심한성격의 알폰소 마리사의 사랑을 담뿍 받고 약국집 아들 지노에게는괴롭힘을 당하던 알폰소를 말이다. 가끔 알폰소가 여름방학 동안에억지로 식료품점 진열대 뒤에서 일하던 모습을 애써 떠올려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그의 삶은 생각나지 않았다. - P425

알폰소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릴라는 알폰소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며칠 전부터 그에 대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는 믿지 못할 놈이라는 말만 우악스럽게 반복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난리를 치던 릴라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 집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나는 릴라가 나나 마리사보다 알폰소를 더 많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알폰소 스스로 자주 말했듯이 릴라야말로 어느 누구보다 알폰소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몇시간동안릴라는 모든 의욕을 잃고 하던 일을 멈췄다. 젠나로에 대한 관심도 잃고 티나도 내게 맡겼다. 릴라와 알폰소의 관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었던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릴라는 알폰소를 거울처럼 마주보고 알폰소에게서 자기의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몸에서 자신의 일부를 끌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두 번째 책에 쓴 내용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현상이라고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알폰소는 그런 릴라의 노력이좋았던 것이다. 그는 릴라에게 자기 자신을 살아 있는 재료로 제공했고 릴라는 그런 알폰소에게 형태를 만들어준 것이다. - P426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니 내 자신이 미켈레에게 잔혹하게 복수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그를 때리고 손톱으로 할퀴고물어뜯었다.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그러다 내 파괴 본능은 차츰 사그라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릴라 말이 맞아. 글은 그저 쓰기 위해 쓰는 게 아니야. 정말 상처주고 싶은 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쓰는 거야.‘
말의 힘으로 주먹과 발길질과 치명적인 무기에 맞서는 것이다. 대단치는 않겠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물론 릴라는 유년 시절 우리가꿨던 꿈을 아직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릴라는 누군가가 - P431

글을 써서 명성과 돈과 권력을 얻었다면 그 사람의 글은 천둥번개처럼 강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실제 글의 힘이란 릴라가 상상하는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책이나기사로 시끄럽게 떠들어댈 수는 있었다. 그런 시끄러운 소리라면 고대전사들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도 내지 않았던가. 진짜 힘과 가공할 만한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건 모두 연극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 시끄러운 소리로도 그들을 조금은 아프게 할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릴라에게 물었다.
"솔라라 형제가 두려워하는 게 뭐야? 뭘 알고 있는 거야?"
릴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키지 않은 듯 말을돌리다가 릴라가 대답했다.
"미켈레 회사에서 일할 때 나는 많은 서류를 봤어. 나는 그 서류들을 꼼꼼히 살폈지. 어떤 것은 미켈레가 직접 내게 주기도 했고."
릴라의 얼굴에는 아직 멍이 들어 있었다. 릴라는 괴로운 듯 인상을 찡그리면서 거친 사투리로 덧붙였다. - P432

티나와 임마가 바닥에 앉아 인형과 장난감 마차와 말을 가지고 놀면서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동안 우리는 부엌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릴리는 가방에서 많은 서류와 자기가 메모해 놓은 종이와 여기저기 얼룩이 묻은 붉은색 표지의 공책 두권을 꺼냈다. 나는 호기심에 붉은색 표지의 공책 두 권부터 먼저 펼쳐보았다. 먼 옛날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던 글씨체로 모눈종이에 쓴 회계장부였다. 문법이엉망인 문장으로 주석이 세세하게 달려 있었고 페이지마다 M.S.라는 이니셜로 서명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동네 사람들이 이른바 마누엘레 솔라라 부인의 붉은장부라고 부르던 것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았다. 유년 시절과 사춘기시절 ‘붉은 장부‘라는 표현은 위협적이지만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 P433

아니 위협적이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칭이나 (예컨대 그냥 평범하게 회계장부라고 불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색상에 상관없이 우리는 마누엘라 부인의 공책이 유혈이 낭자한 모험의 중심에 있는 비밀문서라고 생각하면서 흥분하곤 했다. 그 장부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정확히 모두 몇 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누엘라 부인의 붉은 장부는 내 눈앞에 있는 두 권의 공책처럼 학생들이 흔히 쓰는 공책 묶음이었다. 낡아서 오른쪽가장자리 아래가 파도처럼 일어난 흔하디흔한 공책 말이다.
나는 문득 기억 자체가 이미 문학작품이며 릴라 말이 옳았을지도모른다고 생각했다. 크게 성공했을지라도 내 책은 정말 형편없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된 글이기 때문이다. 거의집착 수준으로 세심하게 다듬은 글이기 때문이다. 일관성 없고 미학과는 거리가 먼 데다가 비논리적이고 뚜렷한 형태가 없는 지극히 평범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지 못한 글이기 때문이다. - P434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따라 문장이 사라지거나 아니면 어느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펜도 연필도 필요 없었다. 종이를 바꾸거나 타자기 롤러에 종이를새로 끼울 필요도 없었다. 화면 자체가 종이였다. 수정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항상 똑같아 보이는 유일한 종이였다. 화면에 쓰인 글은절대로 더럽힐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줄의 배열도 완벽했다. 솔라라 형제의 추잡한 짓거리와 캄파니아 지역의 비리를 규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도 정갈한 기운을 발산했다.
우리는 며칠 동안 함께 작업했다. 글은 인쇄기의 소음을 통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종이 위에 찍힌 까만색 점들로 구체화되었다.
릴라가 만족하지 못해 우리는 다시 펜을 들었다. 우리는 글을 힘겹게 고쳐 썼다. 릴라는 걸핏하면 화를 냈다. 나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높았다. 릴라는 내가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기를 바랐다. - P436

릴라는 내가 지식의 샘인 줄 알았는데 막상 지역 지리도 잘 모르고 관료 체계의 세밀한 부분에 대해서도 무지한 데다 시의회의 기능이나 은행의 위계, 범죄와 형벌에 대해 잘 몰라 문장마다 막히자나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나는 정말 오랜만에 릴라가나와 우리의 우정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느꼈다.
"그 자식들을 파멸시켜야 해, 레누. 이렇게 해도 안 되면 내가 그자식들을 죽여버리겠어."
우리의 머리는 오랫동안 서로 충돌하다 결국 하나가 되었다. 지금생각해보면 그런 경험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끝으로 우리는 모든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할 것은 다했다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지루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릴라는 우리의글을 다시 인쇄했고 나는 그것을 봉투에 넣어 출판사에 보냈다.  - P436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났다. 어느 날 아침 편집장은 내게전화를 걸어 나에 대한 과찬을 늘어놓았다.
지금이 자네 재능의 황금기인가보네."
편집장이 말했다.
"제 친구랑 같이 쓴 글이에요."
"최고의 실력을 발휘했어. 정말 멋진 글일세. 부탁이 있네. 이 글을사라토레 교수에게 좀 보여줘. 그가 이 글을 읽고 어떻게 해야 뭐든열정적인 글로 바꿀 수 있는지 배우게 말이야."
"니노와는 헤어졌어요."
"그래서 자네 컨디션이 그렇게 좋아진 게로군."
나는 웃지 않았다. 변호사들이 뭐라고 했는지 빨리 듣고 싶었다.
편집장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이걸로는 부족해."
편집장이 말했다.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단 하루도 그들을 감옥에보낼 수 없어. 이 정도로 솔라라 형제를 감옥에 넣기는 힘들어. 특히
"자네가 쓴 것처럼 그들이 지역 정치세력과 결탁한 데다 뭐든 살 수있을 정도로 돈이 많다면 더 힘들어." - P437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렇지 않은척했다. ‘에스프레소지에 글을 보낸 것이 릴라라는 걸 깨닫는 데는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항의를 하려고릴라에게 달려갔다. 나는 정말 화가 났는데 릴라는 평소보다 다정한 데다 기분이 좋아보이기까지 했다.
"네가 결정을 못 하기에 너 대신 내가 결정했어."
"나는 출간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을 내렸어."
"나는 아니야."
"그러면 네 이름으로 출간하도록 해."
"무슨 말이야? 작가는 너잖아."
릴라에게 내 불만과 불안한 마음을 이해시키기는 불가능했다. 내가 비판적인 말을 할 때마다 릴라는 태평한 태도로 맞섰다. 여섯 장의 페이지를 빡빡하게 채운 기사는 비중 있게 다루어졌고 예상했던대로 서명란에는 단 하나의 이름, 그러니까 내 이름만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릴라와 싸웠다. 나는 잔뜩 화가나서 릴라에게 말했다. - P440

‘너는 숨어 있고 싶어서 네 이름을 뺀 거야. 돌만 던지고 숨는 게편하니까. 네 계략에 이젠 넌덜머리가 나."
내 말에 릴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
릴라가 말했다. 릴라는 샐쭉해져서 에스프레소지에 내 이름만넣은 것은 자기는 아무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부를 제대로하고 유명한 사람은 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라면 그 누구라도두려움 없이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릴라의 말에 나는 릴라가 순진하게도 내 지위를 과대평가한다고 내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릴라는 짜증을 내면서 나야말로 내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한다고했다. 릴라는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해 주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지지받길 원한다고 했다. 자기는 오직 내 가치가 더 인정받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릴라가 외쳤다.
솔라라 자식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지켜봐."
나는 전보다 더 기운이 빠져 집으로 돌아왔다.  - P441

실제로는 내 이름으로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나는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되었다. 기사 덕분에 그동안 흩어져 있던 나에 대한 파편적인 정보들이 꿰맞춰졌다. 내가 소설가라는 직업적 소명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여성이 처한 현실을 비판하는 데 힘썼듯이 지금은 내 고향을 타락시키는 세력과도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60년대 말에 형성됐던소수의 독자층에 어느 정도 기복을 겪으면서 70년대에 형성된 독자층이 합해졌고 여기에 그보다 더 많은 새로운 독자층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첫 두 작품에 영향을 미쳐 두 책 모두 다시 출간되었고 세 번째 책이 꾸준하게 팔리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 작품을 영화화하려는 계획도 점점 구체화되고 있었다. - P433

그 모든 것이 내 일의 일환이었고 나는 날마다 내 일을 더 잘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법률적인 부분에서 도움을 주는 출판사 측과 나를 지지해주는 진보언론사,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독자와의 만남과 내가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에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단지 이런 이유만으로 내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완전히 안심하게 된 것은 솔라라 형제가 결코나를 해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중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그들은 최대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마르첼로와 미켈레는 새로운 소송을 걸지 않았을뿐 아니라 이후 모든 일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법률 집행관 앞에서마주칠 때에도 차갑지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상황은 이렇게 진정됐다. 실질적으로 일어난 일은 솔라라 형제에대한 몇몇 수사가 시작되고 그에 대한 수사 파일이 만들어진 정도였다. 하지만 출판사 법무팀이 예견했던 것처럼 수사는 곧바로 난항을겪었고 파일은 다른 수백 개의 파일 아래 파묻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됐을 거라고 상상했다. 결과적으로 솔라라 형제는 여전히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다. - P443

릴라 품에는 엄마가 안겨 있었다. 임마는 평소에 내가 자기한테신경을 써주지 않을 때 내 귀를 잡아당겼던 것처럼 릴라 귀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릴라는 엄마가 자기 귀를 지지든 볶든 신경 쓰지 않고 니노에게 푹 빠져 있었다. 니노는 유쾌한 태도로 미소를 띤 채 기다란 팔과 손을 움직이면서 릴라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러느라 니노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저런 식으로 자기 딸을 돌보다니. 나는 니노를 불렀지만 그는 내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것은 데데였다. 데데는 엘사와 함께 내 목소리가 너무 얇다고 비웃었다. 아이들은 내가 고함을 지를 때면 항상 그랬다. 나는 다시 한번 니노를 불렀다. 나는 당장 니노가 릴라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혼자서 내 딸들만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으면 했다. 하지만 땅콩장수의 휘파람소리 때문에귀청이 터질 것 같은 데다 마침 부품 하나하나가 다 덜컹거리는 것같은 엄청난 소음과 먼지를 일으키면서 트럭이 지나갔다. - P463

"티나는 어디 있어?"
"데데와 엘사랑 있겠지."
2011 (6릴라는 아직도 방금 전까지 니노와 수다를 떨면서 지었던 상냥한표정 그대로 말했다. 내가 대답했다.
"없던데."
나는 엄마 아빠가 시간을 내준 유일한 날에 릴라가 내 딸과 임마아빠 사이에 끼어들지 말고 엔초와 함께 자기 딸이나 돌보기를 바랐다. 하지만 엔초가 티나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면서 주변을 살피는동안 릴라는 여전히 니노와 이야기를 계속했다. 릴라는 그에게 예전에 젠나로가 사라졌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릴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느 날 아침 젠나로가 사라졌지 뭐야.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서나왔는데 젠나로만 없었어. 나는 정말 놀랐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알고 보니 공원에 얌전히 앉아 있었어." 그 이야기를 하면서 릴라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 눈빛이 공허해지더니 바뀐 목소리로 엔초에게 물었다.
"티나 찾았어? 어디에 있어?" - P464

나는 1995년에 나폴리를 완전히 떠났다. 모두들 나폴리의 부활을 떠들어대던 시절이었다. 나는 부활을 믿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새 역사가 완성되는 것을 보았다. 노바라 가에 개성 없이 밋밋해보이는 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모습과 스캄피아 지역에 새건물들이 우뚝우뚝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아레나차와 타데오가,
세사와 나치오날레 광장의 잿빛 바위 위로 화려한 고층 건물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나는 모습을 보았다.
프랑스와 일본에서 설계한 그 건축물들은 예측된 시행착오와 공사 지연 끝에 폰티첼리와 포지오레알레 사이에 위용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후 빠르게 광채를 잃어가더니 결국 빈민들의 소굴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활은 무슨 부활이란 말인가. 그 모든 것은 부패한 이도시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아무렇게나 분칠해놓은 현대화라는 이름의 화장품일 뿐이었다. - P469

마흔 살 이후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뒤쫓기가 버거웠다. 달력의 날짜는 마감일자로 대체되었고 햇수는 책출간을 기준으로 흘렀다. 나나 아이들과 관련된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한 날짜를 말하기가 힘들어졌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글로 남기려 했지만 갈수록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 일은 언제 일어났고 그일은 언제 일어났더라? 나는 반사적으로 모든 사건을 출간일 기준으로 기억했다.
그새 책도 많이 냈다. 덕분에 어느 정도 권위와 명성을 얻었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이들에 대한 부담감도 줄어들었다. 데데와 엘사는 피에트로의 권유에 따라 차례대로 보스턴으로 유학을 떠났다. 피에트로는 7,8년 전부터 하버드에서 정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제 아빠와 지내는 것을 편하게생각했다. 우울한 날씨와 거만한 보스턴 사람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한 편지를 빼면 아이들은 자기들의 삶에 만족했다. - P470

아이들은 지난날 내가 강요했던 선택에서 빠져나온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데데와 엘사를 떠나보낸 데다 임마까지 언니들처럼 유학에 집착하자 내게는 고향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때는 마음만 먹으면 다른 곳에서 살 수 있는데도 고향의 현실을 글 쓰는 자양분으로 삼기 위해서 위험한 고향 동네의 외곽 지대에 남기로 한 결정이 작가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그런 지식인이 너무많다.
PW그동안 내 작품세계는 방향이 달라졌다. 고향이라는 소재는 뒤로밀려났다. 어느 정도의 명성과 온갖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도 스스로 - P470

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한 장소에만 머무르는 것이야말로 오히려위선적인 태도가 아닐까. 그곳에 머물러 봤자 내 형제자매와 친구들, 그들의 자식과 손자손녀의 삶이 기울어가는 모습을 불편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말이다. 자칫하면 내막내딸도 그 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때 임마는 14세였다. 나는 엄마에게 남부럽지 않게 생활할 수있게 해주었고 임마도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임마는 상황에 따라사투리를 심하게 썼고 임마의 학교 친구들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 임마가 외출할 때마다 내가 너무 불안해하니 임마는 스스로 외출을 포기하고 집에 머무르곤 했다. - P471

내 삶도 제한적이었다. 나폴리 상류층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고 남자들에게 구애도 받고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항상 얼마가지 못했다.
처음에 똑똑하게 보이던 사람들도 결국 자기 불운에 실망해 화가 나있는 사내들일 뿐이었다. 유머 감각이 있었지만 사악한 면도 있는사람들이었다. 내게 자기 원고를 보여주거나 방송계나 영화계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나를 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기도 했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분발했다. 사회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나는 세련되게 차려입고저녁에 외출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불안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미처 현관문을 닫을 틈도 없이 집 앞에서 13세도 안 된 것 같은 두 소년에게 얻어맞고 물건을 강탈당했다. 두 걸음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던 택시 운전기사는 창문 밖으로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1995년 여름, 나는 엄마와 함께 나폴리를 떠났다. - P471

처음 몇 달 동안은 나는 내가 내 생애 최고의 작품을 썼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한번 작가로서 뛰어난 명성을 떨쳤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렇게나 많은 호응을 얻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2007년 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일 무렵 어떤 우정을 소개하기 위해 마르티리 광장에 있는 펠트리넬리 서점에 갔을 때 갑작스러운 수치심이 나를 엄습했다. 청중 가운데서 릴라를 발견할까봐 두려웠다. 릴라가 맨 앞에 앉아 있다가 내가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어나를 곤란하게 할 것 같았다. 그런 내 걱정과는 달리 그날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내 작품에 열광했다.
호텔에 돌아가 자신감을 조금 되찾은 뒤 나는 릴라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처음에는 집전화로 그다음에는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가 다시 집전화로 전화를 했다. 릴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후 다시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 P475

어떻게 해야 릴라의 슬픔을 글로 옮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릴라는 원래 그런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병이나 사고나 폭행이아닌 갑작스러운 증발로 딸을 잃을 운명이 삶속에 숨어서 릴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릴라의 슬픔은 응고될 수 없었다. 생명이 떠나간 육체를 절망하면서 부둥켜 안을 수도 없었고 장례식도 치를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걷고 달리고 말을 하고릴라를 껴안았지만, 이제는 망가져버린 티나의 유해를 앞에 두고 잠시나마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아마도 릴라는 방금 전까지 자기 몸의 일부분이었던 팔다리가 미처 - P475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그 형태와 실체가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이 일로 릴라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런 고통을 상상할 수도 없다.
티나가 실종되고 나서 10년 동안 나는 릴라와 같은 건물에 살면서 매일 릴라와 마주쳤지만 한 번도 릴라가 울거나 절망하는 모습을본 적이 없었다. 처음 얼마간 티나를 찾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동네를 헤맸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릴라는 너무 지쳐버린 것처럼 더는 티나를 찾지 않았다.
릴라는 부엌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철길의 일부와 약간의 하늘밖에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포기한것은 절대 아니었다. 모진 세월이 릴라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원래부터 좋은 편이 아니었던 릴라의 성격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릴라는주변에 불편함과 두려움을 퍼뜨리고 다녔다. 고함을 지르고 다투면서 늙어갔다. - P476

그것은 릴라가 슬픔을 치유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 시절 릴라는 생기를 되찾았고 티나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을 택했다. 릴라는 이제 티나가 당장 돌아올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릴라는 자신의 내면과 집 안의 공허한 공간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든 것 같은 빛나는 작은 형상으로 채우려 했다. 그렇게 해서티나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일종의 홀로그램이되었다.
이제 릴라는 티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보다는 티나를 자기 삶속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릴라는 내게 티나가 제일 예쁘게 나온 사진들을 보여주거나 티나가 한 살, 두 살, 세 살일 때 엔초가 녹음해두었던 테이프로 티나의 작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티나의 기발한 질문과 놀라운 대답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릴라는 항상 현재형으로 티나는 가지고 있고 티나는 그렇게 하고 티나는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 P504

나는 이게 언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릴라는 표준어의장벽 뒤로 몸을 숨겼고 나는 그런 릴라에게 사투리를 쓰도록 유도했다. 우리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때는 사투리를 썼으니까. 릴라가 사투리로 생각한 것을 표준어로 번역했다면 시간이 갈수록 나는표준어로 생각한 것을 사투리로 번역해야 했다. 결국 우리는 거짓된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릴라는 감정을 드러내야했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을 쏟아내야 했다. 나는 릴라가 유년시절의 언어로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하기를 바랐다.
‘레누,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딸을 잃었기 때문이야. 티나가 살아 있다고 생각해도 죽었다고 생각해도 힘든건 마찬가지야. 티나가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데도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에 힘들어.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곳에 있을 것 같아서 힘들어. 그런 장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밤낮으로 내 눈앞에서 티나가 끔찍한 일을 당하는 모습이 보여.
하지만 티나가 죽었다면 내 마음도 죽은 거야. 그건 진짜 죽음보다도 견디기 힘든 죽음이야. 진짜로 죽으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 P508

없게 되지만 마음이 죽으면 매일 모든 것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옷을 입고 먹고 마시고 일을 해야 해. 도대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건지 알수없는 너와도 이야기를 해야 해. 이렇게 예쁘게 차려 입고 미용실을 막다녀온 것처럼 머리를 하고 공부도 잘하고 뭐든 완벽하게 해내는 딸이 있는 너와 말이야.
쓰레기 같은 우리 동네 환경도 네 딸들을 망쳐 놓지 못하는 것 같아. 아니, 오히려 아이들에게 더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이런곳에서 살면서 네 딸들은 더 자신감이 넘치게 되고 거만해지고 뭐든다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 같아. 그런 딸들이 있는 너를 보면 화가나서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아.
그러니 가. 제발 가버려. 나를 가만히 내버려둬. 티나는 너희들 중누구보다 뛰어나게 될 운명이었는데 그런 티나를 데려가버렸어. 더는 견딜 수 없어‘
- P509

나는 릴라가 술에 취한 듯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털어놓게 하고 싶었다. 나는 릴라가 마음만 먹는다면 헝클어진 머릿속에서 그런 말을 꺼내놓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릴라는나와의 관계에서는 오히려 다른 때보다 덜 공격적이었다. 내가 릴라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은 실은 내 감정의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히려 내가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릴라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때로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입에 담지 못할 무엇인가가 릴라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 P509

나는 릴라가 삼천포로 빠져서 투덜거리면서 한 이야기를 치밀하고 세련되게 정리했다. 나는 내 엉덩이의 통증과 어머니에 대해 썼다. 주변에서 인정받을수록 내가 릴라와 나눈 대화에서 영감을 받아연관성 없어 보이는 사물이나 사건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점을 찾게 된다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정할 수 있었다.
릴라와 위아래 한 층을 두고 가까이 사는 동안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릴라가 나를 조금만 자극해도 텅 빈 머리가 영감으로 차오르면서 빠르게 돌아갔다.
나는 릴라에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도 항상그런 릴라의 능력을 인정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않은가. 나는 이제 내가 정말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내게 릴라가 주는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릴라가 내게 영감을 준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조차 숨기려 했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한번은 이런 사실을 글로 쓰기까지 했다. ‘나는 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속에 릴라를위한 자리를 마련해놓고 그런 릴라의 모습에 견고한 형태를 부여할 - P520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릴라는 릴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는 나처럼 하지 못하는 것이다. 티나의 비극과허약해진 릴라의 신체와 불안한 머리 역시 릴라가 처한 위기를 구성하는 일부 요인이었다. 하지만 릴라가 ‘경계의 해체‘라고 부르는 병의 근본적인 원인은 릴라가 릴라이기를 원치 않는 데 있었다. 그날밤나는 새벽 3시에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아침 9시에 일어났다.
그새 데데는 열이 내렸지만 엄마가 기침을 시작했다. 나는 집 청소를 하고 릴라가 어떤지 보러 내려갔다. 오랫동안 문을 두드렸지만릴라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는 발을 질질 끌면서 오는 발소리와 사투리로 욕을 하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한참동안손가락을 초인종에서 떼지 않았다. 릴라는 땋은 머리가 반쯤 풀린데다 얼굴에 화장이 번져서 전날보다 더 비탄에 잠긴 가면처럼 보였다. - P521

살다보면 삶의 주변부에 자리를 잡아 평생 변치 않을 배경으로 남을 것 같았던 것이 예기치 않게, 그것도 한창 바쁜 일에 쫓기고 있는순간에 무너져 내릴 때가 있다. 제국, 정당, 신념, 기념비 아니면 일상의 일부였던 주변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때가 바로 그랬다. 하루 걸러 하나씩 몇 달 동안 힘든 일이 잇달아 일어났고 전율에 전율이 뒤를 이었다. 소설이나 그림을 보면 암초나 뱃머리에 서서 영원히 휩쓸리지도 스쳐가지도 않을 폭풍을 마주하고 서 있는 인물들이 있는데 나는 한동안 내가 딱 그런 인물이된 것 같았다.
우리 집 전화가 쉴새 없이 울렸다. 솔라라 형제의 영역 안에 살고있다는 이유로 나는 엄청난 양의 글과 말을 쏟아내야 했다.  - P523

엔초는 처음으로 릴라에 대해 냉정하게 말했다.
"리나는 평생 분별력 있게 산 적이 없어."
그렇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릴라는 침착하고 사려 깊게 행동할 수 있었다. 신경이 극도로 예민했던 그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기분 좋은 날이면 릴라는 평온하고 다정했다. 나와 내 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내 출장 일정은 어떻게 되고 지금 어떤 글을 쓰고 있으며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 나에게 물었다. 데데와 엘사, 임마가 들려주는 비합리적인 교육 제도와 정신나간 선생들 이야기. 아이들끼리 다툰 이야기와 연애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면서 가끔분개하기도 했다. 게다가 릴라는 관대했다. 어느 날 오후 릴라는 젠나로의 도움을 받아 오래된 컴퓨터를 우리 집에 가지고 와서 내게사용법을 가르쳐준 다음 통보했다.
"선물이야."
나는 다음 날부터 컴퓨터를 사용해 작업하기 시작했다. 정전이 돼서 몇 시간 동안 들인 노고가 수포로 돌아갈까 두렵기는 했다. 그런 두려움을 제외하면 나는 컴퓨터에 열광했다. - P533

‘매일 아버지 노릇을 할 필요가 없어지니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되었네. 임마도 피에트로를 정말 좋아하고. 남자들은 다 똑같은가봐.
잠깐 같이 살다 아이를 낳으면 떠나보내야 하나봐. 니노처럼 경솔한 사람이면 아무런 책임감 없이 떠나는 거고 피에트로처럼 진지한 사람이면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필요할 때 최선을 다하는거야.‘
확실한 것은 정절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동거의 시대는 남녀를 불문하고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리노라 불리는 불쌍한젠나로를 위험하게 생각하는 걸까. 데데는 자신의 열정을 다 불태워버리고 난 다음 자기 길을 갈 것이다. 그러다 가끔 서로 만나기도 하고 다정한 말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어차피 이런 순서를 밟을 텐데왜 나는 내 딸에게 딸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요구하는 걸까. - P550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니노는 틈만 나면 릴라 이름을 들먹여 멀리서나마 자신이 릴라를 염려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니노의 눈앞에는 내가 있었다. 나는 지난날 그를 사랑했던 여자이자 지금 니노 곁에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고 있는 그의 딸의 엄마가 아닌가. 하지만 니노에게 나는 고등학교 책상에서부터 국회 의석에 앉기까지 자기가 걸어온 놀라운 행적에 대해자랑을 늘어놓을 수 있는 젊은 시절의 친구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니노와 만났을 때 그가 내게 해준 가장 큰 칭찬은 나를 자기와 수준이 같은 사람으로 취급해준 일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니노가 내게 말했다. - P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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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배 속에서 마치 움직이는 공기 방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신없이 움직여대는 바람에 잠을 자지 못하는 밤이면 나는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아이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했다. 니노를 닮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니노의 마음에들었으면 좋겠다고, 니노가 제일 사랑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언제나 비참한 감정이나 폭력적인 감정을 현명하게 다스릴 줄 아는 균형 잡힌 성격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이상적인 모습을 되찾으려 애를 써봐도 임신 말기에 나는도무지 안정을 찾지 못했다. 지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에는지진이 내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내면 깊은 곳, 배 속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 P251

하지만 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든 것이 지진의 여파만은 아니었다. 묘사력이 뛰어난 릴라의 암시도 한몫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길을 가면서 밀라노에서는 별 생각 없이 보고 지나쳤던 주사기가 길가에 떨어져 있는지 유심히 살피게 됐다. 동네 공원에서 주사기를 찾아내면분노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 당장 마르첼로와 내 동생들에게 쫓아가 한바탕 해대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결국 나는 가증스러운 말과 행동을 하고 말았다. 어느날 혹시 릴라에게 페페와 잔니 이야기를 했냐면서 나를 성가시게 하는 어머니에게 나는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어머니, 리나는 그 애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없어요. 마약쟁이 오빠만으로도 버겁다고요. 게다가 자기 아들도 걱정되겠죠. 우리 가족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리나에게 떠넘길 수는 없어요."
어머니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단 한번도 마약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입에 담아서는안 될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 P252

그 시절 나는 너무나 우울해서 선의의 거짓말조차 할 수 없었다.
엘리사가 어머니에게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고 다시는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한 데다 페페와 잔니도 어머니에게 내가 무슨 경찰이라도되는 것처럼 자기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게 하는 일이 다시는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나는 결국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릴라와 이야기를 했는데 릴라가페페와 잔니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내가 자신 없어 하는 것을 알아채고 우울하게 말했다.
"그래, 잘했다. 이제 그만 가보렴. 아이들을 돌봐야지."
나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며칠 동안 어머니는 더 불안해했다.
빨리 죽고 싶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그날 어머니는 평소보다 편안해 보였다. - P261

"불안해하지 마. 모유 안 나올라."
모유 이야기는 확실히 내게 도움이 됐다. 나는 임마콜라타와 가까이 있어야만 젖이 잘 나오는 것처럼 요람 옆에 꼭 붙어 앉았다. 여성의 몸이란 무엇인가. 배 속에 있을 때 아이에게 영양분을 주었는데태어난 후에도 아이는 여전히 내 가슴에서 영양분을 취하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도 어머니 배 속에 있던 시절과 어머니의 가슴에서 젖을 빨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생각이 났다. 어머니의 가슴은 내 가슴만큼이나 컸다. 아니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다. 어머니가 아프기 전까지만해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가슴을 두고 야한 말을 하곤 했다. 나는 어머니가 브래지어를 푼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젊었을 때도 늙었 - P276

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아픈 다리 때문에 자기 몸에 자신이 없었다. 항상 몸을 감추려고만 했다. 그러면서도 포도주 한 잔이면 아버지 못지않은 야한 말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면서 아버지의 외설적인 성향을 자극했다. 순전히 뻔뻔스럽게 연기하는 것이었다.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에 나는 달려갔다. 또 릴라였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여기 문제가 좀 있어, 레누."
"상태가 안 좋아지셨어?"
"아니, 의사들은 침착해. 그런데 마르첼로가 와서 미친 짓을 하고있어" - P277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자기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5세 때로 돌아가는가하면 어느새 12세 때로, 그러고는 14세 때로 미끄러져 들어가 그 시절 자신이 겪었던 일과 친구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어느 날아침 어머니는 내게 사투리로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단다. 나는 항상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 차례가 될 거라고는 한 번도생각해본 적이 없단다. 지금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구나."
한번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게 속삭였다.
"아이에게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이제 죽으면 나도 한낱 조그만 조각으로 부서져 버리겠지."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그제야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은 나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았다. 어머니는 나와 작별인사를 할 때면 먼 옛날 내가 어머니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어머니가 내 안에 쏙 들어와 계속 남고 싶다는 듯이 내 품에 꼭 안겼다. 어머니가 건강할 때는 어머니의 몸이 내 몸에 닿는 것이 싫었지만 지금은 좋았다. - P286

가끔 나를 다정하게 대해줄 때도있었지만 아버지는 대개 내 일에 무심했다. 어쩌다 어머니와 싸울때 내 편을 들어준 적이 있는 정도였다.
아버지와는 항상 피상적인 관계만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필요에 따라서 아버지에게 역할을 부여하기도 하고 박탈하기도했다. 그런데 내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특히 나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아버지를 주변부로 내몰았다. 그런 아내가 기력을 잃자 이제 아버지는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인사하면 아버지는 내 인사를 받아주면서 말했다.
"네가 어머니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오마."
가끔 이토록 평범한 아버지가 그 험한 나폴리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직장에서도 동네에서도 하물며 집에서조차 말이다. - P287

카르멘이나 알폰소와 보내는 아침시간은 기억에 남고 흥미로웠다. 두 친구와 있다 보면 몰락을 앞둔 어머니의 고향과 릴라의 영향아래 발전하고 있는 고향이 서로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카르멘에게 릴라가 내 어머니를 위해 한 일을 들려주었다.
카르멘은 만족스러워하면서 말했다.
‘누가 리나를 막을 수 있겠어."
카르멘은 릴라에게 무슨 신통한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했다.
어머니가 진료를 받을 동안 알폰소와 함께 깨끗한 병원 복도에서15분 남짓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됐다. 알폰소도 언제나처럼 릴라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데 열을 올렸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가감없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알폰소가 말했다.
"리나는 내게 전도유망한 일을 가르쳐줬어." - P289

알폰소가 말했다.
"리나가 없었으면 나는 뭐가 됐을까. 아마 보잘것없는 존재가 됐을 거야. 평생 성취감을 맛보지 못했을 거야. 그저 살아 숨 쉬는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1019알폰소는 릴라와 마리사를 비교했다.
"나는 마리사와 헤어졌어. 어차피 마리사는 마음 내키는 대로 바람을 피우고 다녔으니까. 자기 아이들에게 내 성을 물려주었는데도내게 화가 나 있었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나를 괴롭혀. 내 얼굴에 수없이 침을 뱉었어. 마리사는 내가 자기를 속였대."
알폰소가 변명했다.
"속이다니, 레누. 너는 지성인이니까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제일 크게 속은 사람은 바로 나야. 나 자신에게 속았거든. 리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그렇게 살다 죽었을 거야."
알폰소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 P290

"리나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은 내가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준 일이야. 리나는 내가 여자의 맨발을 스칠 땐 아무것도 느낄수 없지만 남자의 맨발을 만지고 싶은 욕망에 죽을 것 같다고 말할수 있게 해줬어. 그의 손을 쓰다듬고 손톱깎이로 그의 손톱을 다듬어주고 거뭇한 여드름을 짜주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줬어. 무도회장에서 그에게 왈츠를 줄 알면 내게 춤을 청해 달라고, 내게 얼마나 리드를 잘 하는지 보여 달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줬어."
알폰소는 머나먼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너랑 리나가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인형을 돌려달라고 했던 일을 기억해? 그때 아버지가 나를 부르면서 비아냥댔지. ‘알폰소! 네가 인형을 가져간 게냐?‘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던 건 내가 가 - P290

문의 수치였기 때문이었어. 내가 누나 인형을 가지고 놀고 어머니의목걸이를 하고 다녔거든."
알폰소는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누군가 말할 대상이 필요한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어. 물론 내가 생각하는 것과도 달랐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곤 했어. ‘내안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어. 이름조차 없는 어떠한 존재가 내 혈관속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어. 무엇보다도 그 존재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몰랐어. 그러다 리나가내게 억지로 리나 모습의 일부를 취하게 한 거야. 달리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리나가 어떤지 잘 알잖아. 리나는 이렇게 말했어.
‘이것부터 한번 해봐.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섞이기 시작했어. 정말 재미있었어. 이제 나는 예전의 나도 아니고 리나도 아니야. 조금씩 뚜렷한 형태를 갖춰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야." - P291

람이알폰소는 내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어 기뻐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우리 사이에 새로운 신뢰 관계가 형성됐다. 학창시절 집까지 함께 걸어오면서 생겼던 신뢰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나는 카르멘과도 더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그러다 카르멘과 알폰소둘다 각자 표현은 다르게 했지만 내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는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두 사건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두번 다 마르첼로가 병원에 왔을 때였다.
내 동생 엘리사와 조카 실비오는 평소 도메니코라는 노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에 왔다. 도메니코는 두 모자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가는 길에 아버지를 동네까지 태워다주곤 했다. - P291

하지만 명단의 일 순위는 누가 뭐래도 마르첼로였다. 알폰소 말로는 자기를 가장 증오하는 인간은 마르첼로라고 했다.
알폰소는 만족감과 불안감이 뒤섞인 말투로 말했다.
"마르첼로는 나 때문에 미켈레가 미친 거라고 생각해."
알폰소는 키득거렸다.
"리나는 내가 자기를 닮아가도록 나를 유도했어. 내가 자기를 닮으려고 애쓰는 게 좋았던 거야. 내가 자신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 왜곡하는지 보는 게 좋았던거야. 그 왜곡이 미켈레에게 끼친 영향도마음에 들었을 테고, 사실 나도 그래."
알폰소는 말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알폰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임마에게 젖을 먹였다. 알폰소와 카르멘은 내가 나폴리로 이사 와서 우리가 가끔 만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둘은 내가 고향에 완전히 동화되기를 원했다. 내가 수호신처럼 릴라를 보좌해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나와 릴라에게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자기들을 언제나 곤경 - P293

에서 구해주는 신처럼 행동해달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에 나는 자신들의 일에 더 관여해주길 바라는 그들의 요청이 부당한 압박으로 느껴졌다. 릴라도 나름대로 내게 항상 그런 압력을행사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내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알폰소의 목소리에 동네 사람들에게 나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것처럼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내 어머니의 힘겨운 목소리가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엄마를 품에 꼭 껴안고 바람을 막아주려고 포대기를 여몄다. - P294

릴라는 필요할 때마다 바로 나에게 달려와 주었다. 물론 카르멘이나 알폰소처럼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데데와엘사가 열이 나서 학교에 못 가게 될 때마다(임마가 태어난 후 약 3주 동안은 날이 추운 데다 비까지 와서 아이들이 자주 아팠다) 기꺼이 나서주었다. 릴라는 엔초와 알폰소에게 회사를 맡기고 타소 가까지 올라와 세 아이를 돌봐주었다.
나는 릴라가 내 아이들을 돌봐주는 게 좋았다. 아이들이 릴라와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유익했다. 릴라는 데데와 엘사를 막내와 친해지게 하는 방법을 알았다. 데데에게 책임감을 키워주고 엘사를 통제할 줄도 알았다. 미렐라처럼 아이가 울 때마다 젖꼭지를 입에 물리지 않고도 임마의 울음을 잠재울 줄도 알았다.
유일한 문제는 니노였다. 내가 혼자 있을 때는 항상 바쁜 니노가하필 릴라가 세 아이와 있을 때 기적적으로 시간을 내 나를 도와주러 집에 오기라도 할까봐 두려웠다. 그런 생각 때문에 마음속 깊은곳은 잠시도 편안하지 않았다. 릴라가 도착하면 나는 릴라에게 온갖당부를 늘어놓았고 병원 전화번호를 써주고 이웃집 안토넬라에게급할 때 연락을 달라고 부탁한 뒤 카포디몬테를 향해 달려갔다. - P295

하지만 그보다 더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는 두려움은 따로 있었다.
운전하면서 생각하다보면 그 일이야말로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가장 큰 것 같았다. 그 일은 바로 니노가 집에 있을 때 릴라의 산통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나는 겁이 나 죽겠으면서도 분별력 있는 어른 흉내를 내는 데데와 그 틈을 타 뭐라도 훔쳐보려고릴라의 가방을 뒤지고 있는 엘사와 배고픔과 기저귀 때문에 생긴 발진으로 괴로워서 흐느껴 우는 엄마를 요람에 내버려두고 니노가 급히 릴라를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장면을 상상했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니노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시간에 맞춰 30분 만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릴라가 없었다. 산통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릴라는 사물이 진동하면서 형태가 망가지는 순간을 참지못했다. 릴라는 어떤 고통도 힘들어했고 언어가 의미를 잃고 공허해지는 순간을 끔찍해했다. 그런 릴라를 알기에 나는 릴라가 고통을잘 견뎌내기를 빌었다.  - P296

의사는 한층 더 격앙된 어조로 외쳤다.
"친구들끼리 있으니 하는 말이에요."
의사는 기분이 상했는지 갑자기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의사는 뭔가 어색한 듯한 진지한 태도로 우리가 정말 릴라를 좋아한다면 (물론 여기서 우리란 니노와 나를 말한다) 릴라가 정말 좋아하는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릴라를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춤추는 것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릴라의 불안한 머리가 그렇다.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릴라뿐만 아니라 릴라 주변에 있는 모든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 의사는 그날 분만실에서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투쟁, 즉 어머니와 아이의 끔찍한 싸움을 목격했다는말을 되풀이했다.
"정말이지 기분 나쁜 경험이었어요."
의사가 말했다.
그렇게 태어난 릴라의 피조물은 여자아이였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아들이 아니라 딸이 태어난 것이다. 내가 병원에 가자 릴라는정신을 잃을 정도로 지쳐 있었는데도 내게 자랑스럽게 자기 딸을 보여주었다. - P300

아이들이 태어나자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릴라와 나는 서로 통화도 하고 두 갓난아이를 데리고 함께 산책도했다. 우리 이야기가 아닌 아이들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눴다. 적어도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실제로도 서로의 아이에게 세심하게관심을 기울이면서 우리 관계는 예전보다 풍요롭고 완전해졌다. 우리는 한 아이의 건강과 질병이 다른 아이의 건강과 질병을 선명하게비추는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마와 눈치아를 모든 면에서 비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두 아이의 건강을 지키고 병에 걸릴위험을 없애기 위해 언제라도 행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췄다. 이우리는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는 데 좋고 유용한 모든 정보를 공유했다. 누가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유아식을 발견하고 더 편한 기저귀를 찾고 기저귀 발진에 가장 효과 있는 로션을 찾는지 선의의경쟁을 벌였다. - P301

어머니는 릴라가 가진 힘과 마르첼로가 가진 힘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양쪽에 똑같은 압력을 행사했고 그 결과 어머니에게는 세상의 전부인 고향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식들의 안위를 보장받아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평화로운 기쁨 속에서 이틀을 더 버텼다. 나는 어머니가 사랑해 마지않는 데데를 어머니에게 데려갔다. 임마도 어머니 품에 안겨드렸다. 어머니는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던 엘사까지 다정하게 대했다. 나는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100세도 아니고 이제 겨우 예순인데 어머니는 얼굴이 쭈글쭈글한 반백의 노인이 다 돼 있었다. - P304

나는 처음으로 세월의 힘을 실감했다. 세월은 이제 나도 마흔의문턱으로 이끌고 있었다. 세월의 속도에 삶이 마모되고 죽음의 가능성도 구체화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일어날 거야.
피할 수 없어‘
임마가 태어난 지 두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내게가냘픈 소리로 말했다.
"레누, 이제 나는 정말로 행복하구나. 이제 내 걱정은 너밖에 없다.
하지만 너는 너니까. 너는 언제나 네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바로잡 - P304

았지. 그러니 나는 너를 믿는다."
어머니는 그대로 잠이 든 후 혼수상태에 빠졌다. 어머니는 그 상태로 며칠을 더 버텼다.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임마와 함께 어머니 병동에 있는데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멈추지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 소리는 병원에서 들리는 일상적인 소리의 일부가된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 소리를 참지 못해 그날은 울면서 집에 계셨다.
엘리사는 실비오에게 바람을 쐐주러 뜰로 나갔고 내 남동생들은어머니 병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침대시트 밑으로 드러난 밋밋한 굴곡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울 만큼 거대했던 어머니가 이제는 거의 사라질 것같았다. 나는 어머니의 무게 때문에 평생을 거대한 바위에 눌린 벌레처럼 살아왔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보호와 억압을 동시에 받았다. 나는 이제 그만 어머니가 헐떡거리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 당장그렇게 되기를 빌었다. - P305

놀랍게도 내 바람은 현실이 됐다. 갑자기 병실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일어나서 어머니 곁으로 다가갈 힘이 없었다.
그때 임마가 입술을 오물오물 빨면서 정적을 깨뜨렸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우리 둘, 그러니까 나와 잠결에도 아직자신이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고 싶어 내 젖가슴을 열심히 찾는 내 아이는, 그 병든 공간에서 어머니가 남긴 것 가운데 유일하게건강하고 살아 숨 쉬는 것이었다.
마침 그날 나는 어머니가 20년도 더 지난 먼 옛날에 내게 선물해준 팔찌를 차고 있었다. 평소에는 시어머니 취향인 세련된 장신구를착용했기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그 팔찌를 찬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머니에게 받은 그 팔찌를 자주 찼다. - P305

나는 좀처럼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눈물 한 방울흘리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따른 고통은 오래갔다. 아니 사실아직도 그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니가 무디고 속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두려워했고 그런 어머니에게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니 갑작스럽게 불어온 거센 비바람에 주변을 둘러 봐도 피할 곳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주 동안 밤낮 할 것 없이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어머니의 모습은 내 상상속에서 심지 없이 타오르는 수증기 같았다. - P306

어머니를 간호하던 때가 그리웠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었다. 나는 내가 어렸을 적 젊었던 어머니와 좋았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그때의 느낌을계속 간직하려 했다. 내 죄책감은 어머니를 붙잡아두고 싶어 했다.
나는 서랍에 어머니의 머리핀이며 손수건, 가위 등을 넣어두었지만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팔찌도 마찬가지였다. 임신 중에 엉덩이께의 통증이 재발해 임마를 낳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은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나는 그 통증을 어머니가 내 몸에 남기고 간 유산처럼 키웠다.
어머니가 임종 직전에 내게 한 말("너는 너니까. 그러니 나는 너를 믿는다")도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타고난 - P306

내 성향과 내가 받아온 교육을 고려할 때 나라면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돌아가셨다. 이런 생각은 나의 내면에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 내게 도움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제대로 봤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다시 나 자신을 열심히 돌보기 시작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나는 지엽적인 정치적 현안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다섯 개의 정당과 공산당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얽힌 음모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니노의 전문 분야였다.
그 대신 나는 부패와 폭력 속에 표류하는 이탈리아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예의 주시했다. 페미니즘 관련 서적도 꾸준히 읽었다. 두 번째 책의 성공에 힘입어 여성독자를 겨냥해서 새로 창간한 잡지에 기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새소설 작업이 꽤 진척되었다는 사실을 밀라노 출판사가 믿게 하는 데가장 많은 기력을 쏟아부었다. - P307

니노는 그전에도 내게 아이들을 돌보고 장을 보고 음식을 해주고집안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해보라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나는 니노에게 과한 요구를 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언제나필요 이상으로 경제적인 부담을 지우고 싶지는 않다고 대답했었다.
평소 나는 내게 도움이 되는 일보다 니노가 좋아할 만한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나는 지난날 피에트로와 겪었던 문제가 우리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나는 니노의 예상을 뒤엎고 바로 좋다고 답했다.
"그래. 좋아. 최대한 빨리 누군가를 좀 구해줘."
순간 내가 내 어머니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았다. 돌아가시기전의 가녀린 목소리가 아니라 전투력 충만하던 시기의 목소리 말이다. 돈이 무슨 상관이람. 나는 내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여기서 내미래는 몇 달 내에 소설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소설을 그 무엇도, 심지어 니노까지도 내가 내 일을 잘 해내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 P311

나는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두 권의 전작은 내게 어느 정도의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에는 번역본 출간도 한몫했다. 하지만 얼마전부터는 인세가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 집필할 소설의 선금으로 받은 돈과 아직 받지 못한 돈은 곧 바닥날 것이다. 늦은 밤까지 기사를써봤자 소정의 원고료를 받거나 그마저도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니 나는 결국 피에트로가 매달 꼬박꼬박 보내주는 돈과 니노가집 임대료와 공과금 명목으로 보태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니노가 아이들과 내게 옷을 사 입으라고 종종 따로 돈을 줬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폴리로 이사 오면서 내가 겪게 된변화와 수많은 불편과 고통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 P312

그날 저녁 나는 최대한 빨리 경제적으로 자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책을 내야 했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해야 했다. 글을 써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것은 문학적인 소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의 미래 때문이었다. 니노가 과연 나와 내 딸들을 평생 보살펴줄까.
내가 약간이나마 (정말로 약간일 뿐이었다) 니노만 믿고 있을 수없다고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 때문에 특별히힘들지도 않았다. 예전에 니노가 나를 떠날까봐 두려워했던 감정과는 달랐다. 갑자기 시야가 확 좁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먼 미래를 생각하는 대신에 지금 당장 니노에게서 받는 돈보다 더 많은돈을 받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돈이 과연 내게 충분한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 P312

나는 여전히 니노를 사랑했다. 나는 그의 길고 호리호리한 몸매와논리 정연한 지성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이뤄내는 일의 성과로도그를 매우 존경했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니노의 재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발전해 많은 사람에게 각광받았다. 경제 위기와건축업, 금융업과 민영방송을 잠식한 비밀스러운 자본의 움직임을분석한 니노의 최근 글은 큰 호응을 얻었다. 시아버지 마음에 들었다는 글도 아마 이 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니노가 어딘지 거슬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니노가 내전 시아버지가 다시 자기에게 호의를 보였다면서 좋아하는 모습에기분이 상했다. 니노가 언젠가부터 피에트로는 자기 아버지와 다르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도 탐탁지 않았다. 니노는 피에트로가 오로지물려받은 이름과 공산당에 대한 미련한 집착 때문에 존중받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별 볼일 없는 교수 나부랭이에 불과하다고 했다. 반면 그의 아버지 아이로타야말로 진짜 교수이자 사회주의 좌파 투쟁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면서 헬레니즘 문명의 근본에 대해 그가 집필한 저서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 P313

니노가 시어머니에 대해 새삼 호감을 표현했을 때도 나는 상처를받았다. 니노는 계속해서 시어머니를 홍보 능력이 뛰어난 대단한 여자라고 칭송했다. 한마디로 니노는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데 민감했다. 하지만 그만한 권위가 없거나 지금은 권위가 없지만앞으로 권위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밀어내버리거나 때로는 질투심 때문에 그들을 모욕하곤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때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분위기가변하고 있었고 기존의 글과는 다른 종류의 글이 힘을 얻고 있었다.
이제 아무도 극단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 P313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하지. 그건 정말 멋진 일이야. 그렇지만 엄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잘 몰라. 그러니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마치 그게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전부 뒤엎자고 하지. 하지만 너는 선생님께 지금이미 존재하는 세계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렴."
"어떻게?"
내가 물었다.
"법으로."
"판사들이야말로 통제해야 할 대상이라고 네 입으로 말했었잖아."
니노는 지난날 피에트로가 그랬던 것처럼 못마땅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들어가서 책이나 쓰도록 해."
니노가 말했다.
"나중에 우리 때문에 일하지 못했다고 하지 말고."
니노는 데데에게 권력 분할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 P317

그제야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릴라와 사랑을 나눈 다음에 나타난 사내와 릴라와 사랑에 빠지기 전, 어린 시절 내가 사랑에 빠졌던 소년 사이에 분열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니노는 언제나 한 사람이었다. 나는 실바나의 몸을 범할 때 니노가 지은 표정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니노의 표정은 그의 아버지 도나토 사라토레의 표정과 똑같았다. 마론티 해변에서 내 처녀성을 빼앗을 때의표정이 아니라 빌라 아주머니의 부엌에서 침대 시트 아래로 손을 넣어 내 다리 사이를 만지던 때의 표정이었다.
외계인 따위는 없었다. 그저 지극히 추악한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니노는 애초부터 자신이 그렇게도 되고 싶지 않아 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실바나의 엉덩이에 리드미컬하게 배를 부딪치면서 친절하게도 그녀가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애쓰던 그 순간, 니노는 진심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후에 내게 후회하면서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애원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맹세할 때 진심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니노는 애초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위로가 되어주지는 않았다. 나는 끔찍한 공포가 희미해지기는커녕 내 생각 속에서 확실한 안식처를 찾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참에 무릎 아래로 뜨끈한 액체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벌거벗은 임마가 내 무릎에 오줌을 싼 것이다. - P331

내가 대답을 피하자 릴라는 나를 몰아세웠다. 릴라는 이런 식으로내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내겐 다른 운명이 있다고 했다. 이렇게 살다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나 자신을 잃어버릴 거라고 했다.
나는 릴라의 목소리가 쌀쌀맞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를 릴라가 말리기 위해서 오랫동안 입을 다물어 왔던, 내가 알고 싶어 하던 일까지 말할 준비가 된 것을 직감했다.
나는 두려웠다. 하지만 그동안 몇 번이나 릴라에게서 진실을 들을기회를 엿보지 않았던가. 릴라에게 그 비밀에 대해 듣는 것도 지금릴라에게 달려온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던가.
"내게 할 말이 있으면 해."
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 P341

그제야 릴라는 마음을 먹었다. 릴라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릴라는 니노가 자기를 여러 번 찾았다고 했다. 나와 만나기 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자기랑 같이 살자고 청했다고 했다. 둘이 함께 병원에 내 어머니를 모시고 갔을 때는 평소보다 더 끈질기게 매달렸다고 했다. 릴라에 따르면 의사가 어머니를진찰하고 둘이 대기실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니노는 릴라에게나와 함께 사는 이유는 오직 릴라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좀 봐."
릴라가 속삭였다.
"이런 말을 하는 내가 못됐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보다 훨씬 못된 건 니노야 니노가 가진 최악의 악덕은 그가 얄팍한 인간이라는거야." - P341

그는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가끔은 돈에 복종하고 가끔은 존경심에 복종하고 때에 따라서는내 생각을 따르지."
안토니오가 속삭였다.
"상대방의 배신은 말이야. 적절한 시기에 알게 되지 않으면 알아봤자 소용이 없어.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뭐든 다 용서하게 되거든.
배신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애정이 조금이라도 식어야만 해."
안토니오는 그런 식으로 눈먼 사랑에 대한 고통스러운 문장을 혼란스럽게 늘어놓았다. 안토니오는 그에 대한 예로 지난날 솔라라 형제의 명령에 따라 니노와 릴라를 미행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자기는 솔라라 형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었다고 안토니오는 당당하게 말했다.
안토니오는 릴라를 미켈레에게 갖다 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릴라를 곤란한 상황에서 구출해달라고 엔초를 불렀다. 안토니오는 그때 자기가 니노를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도 했다.
안토니오가 중얼거렸다. - P344

"내가 그렇게 한 건 무엇보다도 네가 나 아닌 그 자식을 사랑했기때문이야. 또 그 형편없는 자식이 리나에게 돌아가면 리나가 그 자식한테 정이 들어 평생 신세를 망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안토니오가 결론을 맺었다.
"내 말 들어봐. 그때도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리나는 내 말을 듣지 않았을 거야. 사랑에 빠지면 눈만 머는 것이 아니라 귀도 멀게 되거든."
나는 기가막혀서 안토니오에게 물었다.
"니노가 그날 밤 리나한테 돌아가려 했다는 사실을 지금껏 한 번도 리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거야?"
"말은 해줬어야지."
"왜? 일단 내 머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하고는 다시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해봤자 골치 아픈 일만 일어날 뿐이야."
- P345

안토니오는 그새 정말 현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안토니오가 니노를 두들겨 패서 릴라에게서 억지로 떼어놓지 않았다면 릴라와 니노의 사랑이 얼마간 더 지속됐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평생 헤어지지 않고 릴라도 니노도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머리에서 바로 지워버렸다. 가능성이 없을 뿐 아니라 견디기 힘든 생각이었다. 나는 성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날 안토니오는 자기 나름대로 판단해 릴라를 구원했고 이제 릴라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그를 보낸 것이다.
나는 안토니오를 바라보면서 여자들의 보호자가 나타나셨다며 대놓고 비아냥댔다. - P345

나는 피렌체에도 안토니오가 나타났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내가한창 불안정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을 때 안토니오가 나타나 그울퉁불퉁한 손으로 나 대신 결정을 내려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생각했다. 수년 전 릴라 대신 결단을 내렸던 때처럼 말이다. 나는 심술궂게 안토니오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무슨 명령을 받았어?"
"리나는 나를 여기로 보내기 전에 그 얼간이의 면상을 박살내지말라고 했어. 하지만 예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하고 싶어."
"너는 믿을만한 사람이 못 되는구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무슨뜻이야?"
"상황이 복잡해, 레누. 너는 뒤로 빠져 있어. 만약 네가 사라토레아들 녀석이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달라고 하면 내가 그렇게해줄게." - P346

나는 안토니오의 어설픈 진지함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말았다. 소년 시절 동네에서 배운 말투였다. 강인하고 과묵한 사내다운 말투였다. 본래 수줍고 겁 많은 안토니오가 그렇게 되기까지얼마나 노력했을까. 하지만 이제 그 말투는 완전히 안토니오의 것이되었다. 다른 식으로 말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예전과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표준어로 말하려고 애를 쓰다보니 힘들어서 외국어 억양이 나온다는 정도일 것이다.
내가 웃자 안토니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창문의 까만 유리를 바라보면서 속삭였다.
"웃지마."
나는 날씨가 추운데도 안토니오의 이마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 P346

내게 우습게 보였다는 생각에 수치스러워서 땀까지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안토니오가 말했다.
‘내가 말주변이 없다는 거 알아. 나는 이탈리아어보다 독일어가더 편해."
나는 안토니오의 체취를 느꼈다. 먼 옛날 저수지에서 밀회를 즐길때와 똑같은 체취였다. 내가 사과했다.
‘난 지금 이 상황 때문에 웃은 거야. 너는 평생 니노를 죽이고 싶어했는데 나는 니노가 지금 이 순간 집에 오면 네게 그 자식을 죽여버리라고 할 테니까. 나는 절망해서 웃는 거야. 평생 이토록 수치스러웠던 적이 없어.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너는 상상조차 못할 거야. 지금 이 순간 너무 아파 기절할 것 같아서 웃은 거야." - P347

실제로 나는 힘이 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죽어버렸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아닌 안토니오를 내게 보내준릴라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안토니오는 그 순간 나에 대한 애정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유일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의 깡마른 몸과 큼지막한 뼈, 짙은 눈썹과 투박한 얼굴은 내게 너무나 친숙했다. 나는 그런 안토니오에게 혐오감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저수지에 있을 때면 추워도 춥지 않았지. 몸이 떨려. 네게 가까이가도 될까?"
안토니오는 나를 불안하게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토니오의 무릎 위에앉았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몸에 닿을까봐 두려워 팔을 벌려 소파의 양끝으로 떨구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몸을 기댔다.
안토니오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기댔다.  - P347

"맞아.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 누구도 그때 너를 원했던 것처럼 간절히 원하지 않았어. 니노마저도."
나는 오랫동안 말을 했다. 내가 안토니오에게 한 말은 진실이었다. 그 순간의 진실이자 먼 옛날 저수지에서 사랑을 나누던 시절의진실이었다. 안토니오는 내게 처음으로 성적인 흥분을 경험하게 해준 사람이었다. 안토니오 덕분에 배 속의 구덩이가 뜨거워졌다가 열리기도 했고 액체가 되어 뜨거운 나른함을 느끼기도 했다. 프랑코와도 피에트로와도 니노와도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도중에 발을헛디뎌 결국은 한 번도 그런 만족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분명치 않은 대상에 대한 기다림이기 때문이었다. 충족하기 가장 어려운 쾌락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오의 입에서 나는 맛과그의 욕구가 내뿜는 냄새와 그의 손과 허벅지 사이에 꼿꼿이 선 그의 커다란 성기는 비교 불가능한 ‘이전‘을 상징했다. ‘이후‘는 결코 - P348

통조림 공장 폐허에 숨어서 보내던 오후 시간과 비교할 수 없었다.
비록 삽입도 하지 않고 오르가슴을 느끼지도 못할 때가 많았지만 말이다.
나는 표준어로 안토니오에게 복잡한 이야기를 했다. 안토니오에게라기보다는 내가 저지르려는 일에 대해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내 행동이 안토니오에게 믿음을 주었는지 그는 만족스러워했다. 안토니오는 나를 껴안고 처음에는 어깨에 다음에는 목에 마침내 입술에 키스했다. 나는 평생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하지 못했다.
그날의 사랑은 20년도 지난 예전의 저수지와 타소 가의 방과 소파와 바닥과 침대를 이어주었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쓸어가버렸다. 우리를 갈라놓은 모든 것을 없애버렸다. 나라는 사람을구성하는 모든 것을, 그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렸다. 안토니오는 때로는 부드러웠고 때로는 거칠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분노와 불안감 속에서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고 그도마찬가지였다. 규율을 어기고 싶은 욕망이 내 마음속에 그토록 강하게 존재했는지 나는 미처 몰랐었다. 마지막에 안토니오는 경이로움에 정신을 잃었다. 나도 그랬다. - P349

농담삼아 한 말인데 안토니오는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안토니오는 사투리로 말했다.
"나는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어. 내 아내는 ‘지금 이 순간 전‘에는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모호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안토니오는 자기도내 생각에 동의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시간의흐름 밖에 또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기 나름대로 내게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인 현재의 시간이아니라 20년 전에 해당하는 어느 날 중에서도 아주 짧은 시간을 살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키스하고 속삭였다.
"고마워."
나는 안토니오에게 우리가 격정적인 섹스를 하게 된 각자의 잔혹한 이유를 눈감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우리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필요성만을 봐줘서 고맙다고 했다. - P350

나는 자랑스러웠다. 순식간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내 글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열광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헤프게 웃으며 내 글에 대한 칭찬을 제대로 듣고 싶은 마음에 편집장을 집요하게 심문했다. 나는 이내 그가 내 글을 일종의자서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폴리에서 가장 빈곤하고 가장 폭력적인 곳에서 겪은 내 경험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가 고향에 돌아가서 좋지않은 영향을 받을까봐 걱정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결국 내게 도움이 되었음을 인정해야겠다고 했다. 나는실은 그 책을 수년 전 피렌체에서 썼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거친 소설이야."
편집장이 강조했다.
"남성적인 소설이지.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섬세한 측면도 있어. 자네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어."
편집장은 기획적인 부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 P359

"나폴리 공기가 자네 재능을 꽃피우게 해주었나보군."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기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특히 아이들에게 다정해졌다. 출판사에서 남은 계약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도 나아졌다. 갑자기 나폴리, 특히 고향 동네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존재 정도가 아니라 좋은 글을 쓰기위해 필수적인 내 삶의 중요한 일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스스로에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감정이 순식간에 기분 좋은 만족감으로도약했다. 파국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일로 되레 문학적 수준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이는 내 글의 문화적·정치적 성향을 특징 짓는결정적인 선택이 되었다.
편집장은 이러한 사실을 권위 있는 말로 인정해주었다.
"출발점으로 돌아간 것이 자네에게는 일보 전진의 계기가 되었군."
물론 나는 편집장에게 피렌체에서 그 책을 썼다는 사실을 말하지않았다. 나폴리로 돌아간 것이 그 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 P360

스토리상의 전환점도 고향에서 일어났다.
나의 전 시어머니에게는 그런 사실을 이해할 만한 감수성이 없었고그렇기 때문에 내 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이로타 집안사람들 모두 그랬다. 니노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를 다른 여자들과 별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명단에 있는 여자들가운데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릴라도 내 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릴라는 내 원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내 원고를 좋지 않게 평가해 내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게 되자 릴라는 그녀로서는 드물게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나는릴라가 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릴라가 틀려서 기뻤다. 어린시절부터 나는 릴라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제야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 P361

드디어 나는 나고 릴라는 릴라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내게는 이제 릴라의 권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나만의 권위가 생겼으니까. 나는 나 스스로 강해졌음을 느꼈다. 이제는 내가 출신의 피해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 출신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출신에 어떠한 형태를 부여하고 나와 릴라를 비롯한 모두를 위해서 우리의 출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날 나를 나락으로 끌어내리던 것이 이제는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해줄 바탕이 되었다.
1982년 어느 날 아침 나는 릴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좋아. 너희 집 위층을 얻을게. 고향으로 돌아갈게." - P361

그때는 내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행복으로 충만했던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의 친구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느꼈다. 나는 릴라의 장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좋아했다. 릴라가 세상에 내놓은 그 작은 생명체에게도 똑같은 애정을느꼈다. 티나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뭐든 단숨에 익혔고 어휘력이풍부한 데다 놀라울 정도로 손재주가 뛰어났다. 나는 생각했다.
‘티나는 릴라랑 똑같네. 엔초는 별로 닮지 않았어. 눈을 크게 뜨는모습이나 가늘게 뜨는 모습도 그렇고 귓불이 없는 것까지 릴라를 똑닮았어.‘
나는 차마 내가 내 친딸보다 티나에게 더 이끌린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릴라가 자신의 능력을 다 뽐내자 나는 컴퓨터의 놀라운 기능에 대해 열렬한 반응을 보이고 엄마가 괴로워할 거라는 것을알면서도 티나에게 칭찬을 퍼부었다.
"우리 티나 정말 똑똑하네. 아유, 예뻐라. 말도 잘하고. 아는 것도많네."
나는 무엇보다도 내 책이 출간될 거라는 소식으로 불편해진 릴라의 마음이 누그러지기를 바랐기에 릴라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내 세 딸과 릴라 딸의 미래가 밝을 거라고 했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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