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소매 끝으로 나비를 날리며 걸어갔지 바위 살림에 귀화(化)를 청해보다 돌아왔지. 답은 더디고 아래위 옷깃마다 묻은 초록은 무거워 쉬엄쉬엄 왔지 푸른 바위에 허기져 돌아왔지 답은 더디고 - P10
불멸
나는 긴 비문(碑文)을 쓰려 해, 읽으면 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 사나운 눈보라가 읽느라 지쳐 비스듬하도록, 굶어 쓰러져 잠들도록, 긴 행장(行狀)을 남기려 해 사철 바람이 오가며 외울 거야 마침내는 전문을 모두 제 살에 옮겨 새기고 춤출 거야
꽃으로 낮을 씻고 나와 나는 매해 봄내 비문을 읽을 거야 미나리를 먹고 나와 읽을 거야
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 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 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 나는 나를 그렇게 기릴 거야 그렇게라도 기릴 거야 - P11
입춘부근
끓인 밥을 창가 식탁에 퍼다놓고 커튼을 내리고 달그락거리니 침침해진 벽 문득 다가서며 밥 먹는가, 앉아 쉬던 기러기들 쫓는다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 - P12
동행
절(寺) 벽에 그림자가 둘 물병 나눠 마시고 동쪽 서쪽 가리키는 듯 하나 일어나 물소리 쪽으로 가니 끈으로 매인 듯 마저 일어나 따르는데
어느 단풍 아래 돌 쓸고 앉아 붉은 술을 나누리라 단풍에 덮이리라
물소리 수척하여 돌과 귀신들 귀를 열리라 - P42
쑥대를 뽑고 나서
늦여름은, 스무여해 만에 뵌 고모나 고모집 돌담에 기댄 무화과나무나 그런 이름으로 불러도 될성싶다 빈 절 마당을 그렇게 불러도 되듯이
가장자리, 마당 가장자리 제 족속 집성촌을 빠져나온 쑥대를 뽑아내니 흙도 한무더기 무겁게 딸려나온다 슬펐다
손 씻기 전 손바닥의 쑥내를 오래 맡는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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