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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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김사인

귓 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 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 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중에서​

                         

                          김사인 시인은 1956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대전고와 서울대​ 국문과에서 공부했다.

                          1981년[시와경제] 동인 결성에 참여하면서

                          시를 발표했으며, 1982년​부터는평론도 쓰기 시작했다.

                    ​      시집으로 [밤에 쓰는편지] [가만히 좋아하는]이 있고,

                          [박상륭 깊이 읽기] [시를 어루만지다]등의 편저서가 있다.

                          신동엽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십년째 고양시 일산에 거주하고 있다.

   ​ 

 

[가만히 좋아하는]과는 다르다.

아니다, 같다.

깊다.

묵직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무얼까?

아껴가며 먹고있다.

어린 당나귀가 당근을 오물오물 먹고 있 듯....

바짝 붙어서

 

 

불길한 저녁

 

고등계 형사 같은 어둠 내리네.

남산 지하실 같은 어둠이 내리네.

그러면 그렇지 이 나라에

'요행은 없음'

명패를 붙이고 밤이 내리네.

 

유서 대필 같은 비가 내리네.

죽음의 굿판을 걷자고 바람이 불자

공안부 검사 같은 자정이 오네.

최후 진술 같은 안개 깔리고

코스모스 길고 여린 모가지 흔들리네

별은 뜨지않네.

 

불가항력의 졸음은 오고

집요한 회유 같은 졸음은 오고

피처럼 식은 땀이 끈적거리네.

 

슬프자, 실컷 슬퍼버리자.

지자, 차라리

이기지 말아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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