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 삼층 석탑, 오리온 별자리, 새하얀 구름, 사이다 병뚜껑 따는 소리, 수평선, 개의 모든 것, 일곱 살 어린이와 하는 악수, 어린이이마에 맺힌 땀, 옥수수 삶는 냄새, 부처님 오신 날 무렵 거리의 연등, 반짝이는 모든 것, 작은 털장갑, 편의점 건너편나무 그늘, 가을이 왔다 싶은 아침, 옛날 동시, 「릴케의 로댕, 벚나무 낙엽이 깔린 길, 봄에 나뭇가지에 나는 새잎, 색종이, 코뿔소, 잡채, 오이지, 잠옷, 비누, 보온병, 양산, 국자, 전시회, 지도, 국어사전......
어린이 옆에서 어린이가 하는 걸 같이 하면 이상하게도어린이와 비슷해진다. 아름다움의 목록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더 자주 찾아내서 아이들과 나누고 싶다. 아니, 내가 말을 잘못 했다. 아이들과 아름다운것의 목록을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 끝도 없이 이어지도록, 그리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 P146

읽는 사람들은 읽는 세계 안에서 서로 알고 지낸다. 정치가 책을 미워하고 사회가 책을 소외시키고 경제가 책을의심해도, 독자는 계속 생겨난다. 브레히트는 "암울한 시대에도 노래를 부를 것인가? 그래도 노래 부를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대해"라고 했다. 우리는 계속 읽을 것이다. 우리 세계에 대한 책을. - P151

나는 시를 좋아한다.
이 문장을 쓰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맹세코 부끄럽지 않다. 그걸 말하기가 쑥스러울 뿐이다.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 마치 내가 시에 대해 잘 알고, 어쩌면 쓰기도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약간은 문학적 허영심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매우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거의 비밀인 것처럼 시를 좋아해왔다. 꽤 오랫동안.
청소년일 때부터 좋아하는 시들을 옮겨 적는 공책이 따로 있었다. 지금 이 문장을 쓰고 너무 부끄러워서 비명을질렀다. 처음에는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적었다. 한용운 - P152

의 「복종」이나 조지훈의 「낙화」, 김수영의 「」, 김남조의[편지] 같은 시, 용돈이 생기면 이름을 아는 시인의 시집을 샀다. 아는 시인이 많아져서 언젠가부터 공책을 접었다.
대신에 외우기 시작했다. 한 연이라도, 한 행이라도.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 정철의 「사미인곡」을 너무 좋아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외워버렸다. 지금도 마지막 부분은 외울 수 있다. - P153

대학에서는 이전 교육과정 내내 이름 한 번 들어본 적없는 여성 시인들을 알게 되었다. 시의 내용도 표현도 낯설어서 나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시 읽는 법을 아예 다시 배워야 했다. 이전의 시들로 아름다운 언어를 배웠다면, 새로 배운 시들로 날카롭게 찌르는 언어를 배웠다. 나는 둘 다 좋아했다.
한글 프로그램을 쓸 줄 알게 된 다음, 나는 시를 실컷 옮겨 적었다. - P153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 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윤동주, 「반딧불」 전문 - P155

솔직히 요즘 나오는 시집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거기에 가장 신선한 언어가 담겨 있다는 건 알기에 알쏭달쏭한채로 계속 읽는다. 한편으로 나처럼 옛날 문법으로 시를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시인들이 옛날 시도 계속 써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부끄러워서 말 못 해온 독자들이있다면 털어놓듯이 말해버리자. 시를 좋아한다고.
이런저런 고민으로 잠을 설치던 밤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출근 가방에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인의 시집을 챙겨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지금 교실 칠판 한구석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진은영 그러니까 시는」 중에서

우리는 우리를 안을 수 있다. - P156

아이들에게 학교는 개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공공의 장소다. 공교육이 무너졌다느니, 교사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은 정확하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다. 만일그런 위험이 감지된다면 시민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옳다. 비난은 학교에도, 시민의 한 사람인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난 자체에서 기쁨을 느낄 만큼 내면이 허술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열일곱 살에서 열아홉 살까지, 성인이 되기 전 가장 두렵고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안정된 곳에서 보냈다.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것이 정말 ‘행운‘이라는 점이다. 어떤 아이들에게는 학교마저 삭막하고 암울하다. 그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운에 맡길 일이 아니다. 학교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도록 부단히 애쓰는 한편, 그늘에 있는 아이들을 찾아내야 한다. 이제 나와도 된다고, 여기는 안전하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 P172

어린이들은 초등학교에서 ‘규범‘에 대해 배운다. 규범은 우리가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갈 때 지켜야 할 약속으로서, 이 안에 관습, 도덕, 법, 예절 등이 포함된다고 배운다. 즉 법도 인간이 만든 규범의 한 가지다. 이 말은 새로운 법이 필요할 때, 옛날 법이 절대적인 것인 양 거기 구속될 수 없다는 뜻이다. 법이 우리 생활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 이상, 삶이 언제나 먼저다. 법과 제도는 우리 삶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 신분제를 없애는데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스스로 원해서,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비록 삶의 환경이 다르더라도 우리 각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똑같은 권리를 인정받는다. 그게 인권이고,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 그 위에 인간이 있고 삶이 있다. 시민으로서 우리의 연대는 규범보다 먼저다. - P214

이 글을 쓰는 오늘, 방금, 2024년 7월 18일, 기쁜 소식을 들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대법관 김선수)가 사실혼관계인 동성 배우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낸 것이다. "지난 40여 년간 건강보험의 피부양자제도가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시행되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소득 요건과 부양 요건 등이 동일한 상황에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가족 결합의 변화하는 모습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 요구됩니다"라는 판사의 부연이 내 귀에 큰 목소리로 들렸다. 나는 이것이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가는 아주 큰 걸음이 되리라 믿는다. 이 판결이 있기까지 힘쓴 당사자들과 그들의 동료에게 축하를 전한다. 당연한 것을 위해 싸운 만큼, 마음껏 기뻐하고 그 권리를 누리시길 바란다. 또한 그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내가 사는 세상을 더 정의로운 곳으로 만들어준 데에, 어린이가 살아갈 세상에 더 큰 자유를 준 데에. 오늘은 기쁜 날이다. 우리 세계가 더 넓어졌다. - P215

가슴을 찢어놓는 것은 언제나 행복의 낱말들이다. 사랑, 축하, 벚꽃, 여행 같은 말들. 소박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그렇게 나를 낭떠러지로 끌고 가곤 했다. 예를 들면 내가 빌리지도 않은 돈을 갚아야 하던 시절에 그랬다. 한 번 거래한 적도 없는 은행의 독촉 전화를 받느라 사무실을 뛰쳐나가던 시절에는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게 두려웠다. 가족이 두려웠다.
그 무렵 어느 날, 친구가 대여섯 살 된 아이의 손을 잡고걸어가는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 장면이 눈이 아플 만큼 부러웠다. 다시는 그 길로 다니지 않았다. 나의 좌절과 슬픔이 남의 희망과 기쁨을 해칠 것 같았다. 적어도 나 자신은 해쳤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럭 - P216

저럭 이겨냈으며 그보다 더한 일들을 겪기도 했다. 이제는확실한 행복을 느낄 때도 있지만, 저 아래에 그때의 서늘함이 남아 있다. 웃을 때 조심하게 된다.
봄은 왜 매번 갑자기 올까. 마음이 아직 겨울에 있는 사람에게 봄은 어려운 계절이다. 밝은 데가 너무 많다. 어디를 가든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지루한 일을 보러 시청 같은 데를 가는 길에도 아득한 꽃향기를 맡게 된다. 얼었던 땅을 기어이 뚫고 자란 봄나물을 씹으면 서글퍼진다. 자연은 내 마음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않는 것이다. 다 잘 돌아가는데 내 자리만 없다는 생각에 무서울 만큼 외로워진다. 슬픔의 핵심은 외로움이다. 누가 같이 있어주면 외로움은 덜어진다. 그렇게 슬픔을 이겨내는 한 걸음을 뗄 수 있다.
- P217

언젠가 한 어린이가 책을 읽다가 장례식은 왜 3일이나하는 거냐고 물었다. "시간을 두고 슬픔을 나누는 거야"라고 설명했더니 다시 물었다.
"그런데 슬픔을 왜 나눠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했어요. 슬픔을 나누면 슬픈 사람이 많아지잖아요."
나는 당황해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진짜로 나누어 갖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을 표현하는 거라는 식으로 - P217

대답했던 것 같다. 다시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슬픔은 실제로 있어서 한번 생기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슬픔을 둘이 나누면 두 조각이 되고, 또 나누어서 네 조각이 되고, 그렇게 작아지다가 어느 만큼이 되면이제 가지고 있을만해지는 것이라고.
개인의 작은 고통을 다루어보기만 해도 평범한 일상과 사소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기쁠 때 조금은 슬픔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슬픔 속에서도 조금은 웃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봄은 슬픔과 함께 온다. 함께 기억할 일이 너무 많다. 조금 더 힘이 있는 쪽이 조금 더 짊어지면서 같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 좋겠다. 봄에 슬픈 사람들을 내버려두지도, 어서 이겨내라고 다그치지도 않을것이다. 다만 그들을 꽃이 만든 그늘로 초대하고 싶다. 나도 그 밝은 그늘에 함께 있고 싶다. 웃으면서도 울겠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울고 싶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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