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랑은 사랑이되, 자신을 버리고는 지속되지 못한다. 아니모든 사랑이 그런 것이라고,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은 그대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그대의 삶을 위해 나의 생명력을 북돋우는 일이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을 잘 보여준 것이 김선우의 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시가 보여준 ‘몸‘의 생동감이, ‘편협한 사랑‘의 정치가, 그래서 때로 ‘시체놀이‘를 수반한다는 것은 역설적이면서도 흥미로운일이다. 이제 시를 쓰는 일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하는갱생의 과정이 된다.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잠깐 죽은 척했던 게분명한데/정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느낀다. 적어도시를 통해 "새로 태어나는 척"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잠시 죽은 사람의 마음으로, 그의 시를 읽는 것이다. 
이장욱 시인

어른이라는 어떤, 고독


좁은 골목길 언덕에서 소녀가 칼등을 잡고 햇빛을 자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반달칼을 손톱에서 꺼내 허공을 긋던 소녀가 소년을 안는다 비닐봉지가 부푼다 흘러내리는 새싹들, 부서지는, 일종의 꿈들

있잖아 난 결국 너랑 자지 않을 거야
어제 배운 그 시기억나?
응 그림자를 팔아먹은 지 오래되었어
웅웅 그림자가 없으니 어른이 되어도 우린 함께 자지 못할 거야

침묵이 엄마인 검은 바람의 말, 담장 밑 깨진 화분에 가득고인 소음들, 잃어버릴 집도 돈도 부모도 가진 적 없는 꽃씨들, 떠도는, 일종의 방패인 칼들

그림자가 없는 소녀와 소년이 한낮 골목길 언덕에서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애들에게 들릴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인사한다

미안해.. 나도..... 사생어른이야……

쓸쓸하다
그림자의 사전 3


쓸쓸하다,는 형용사
하지만 이 말은
틀림없는 마음의 움직임

쓸쓸하다,를
동사로 여기는 부족을 찾아
평생을 유랑하는 시인들

유랑이 끝날 때
시인의 묘비가 하나씩 늘어난다

목련 열매를 가진 오후


목련꽃을 사랑하는 이에게
목련 열매를 마저 보여주어라

꿈지럭거리며 허물 벗는 무섬중 같은..

여러개의 심방을 가진 심장,
분열하는 붉은 열매를 찢고

꽃이 사뿐 날아오를 때

꽃을 기억하는 사람의
꽃이 아니라

꽃이 기억하는 열매까지
보여주어라

꽃으로 보여주어

연두의 내부


막 해동된 핏방울들의
부산한 발소리 상상한다
이른 봄 막 태어나는 연두의 기미를 살피는 일은
지렁이 울음을 듣는 일, 비슷한 걸 거라고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운다고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웃는다고도
최선을 다해 죽는다거나
최선을 다해 이별한다거나
최선을 다해 남는다거나
최선을 다해 떠난다거나

최선을 다해 광합성하고 싶은
꼼지락거리는 저 기척이
빗방울 하나하나 닦아주는 일처럼
무량하다 무구하다 바닥이 낮아진다

아마도 사랑의 일처럼

아직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꽃 피지 않는 봄이 올 것이다
시인의 부음이 그전에 당도할 것이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이주하는 구름들의 해진 눈꺼풀 위에 문 닫은 나무들의냉담 위에
비린 바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붉은 바람이

여러번 태어나도 매번 처음인
매번 연습이 모자라는 생
아직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며 깃발을 흔드는 죽은 시인이여 장미 열매를 쪼개고 뜨거운 붉은 차돌을 꺼내 손에 쥔 아직 살아 있는 시인이여
가로수 밑 식탁에 작년 꽃의 두개골을 올려놓지 말 것
기억을 두려워해 기억을 배신하는 눈보라
아직 때가 아니라고
웅얼거리는 하얗게 혼이 빠진 천둥소리 밑에서 불면을 향유하는 잠입자여
돈 때문에 질병 때문에 절망 때문에 질투 때문에 분노 때문에 전쟁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경쟁 때문에 증오 때문에

냉소 때문에 무지 때문에 무수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시취를 맡았다는 개들 아직 없고
미래가 중단되었다는 진단서 아직 없고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 방부된 속삭임,
아직 살아 있는 시인은 죽을 때를 기다렸다

희망은 아프다 아픈 곳에서 태어나는게 희망이므로
나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불치의 것들과 함께 끝까지갈 것이므로
저 숱한 죽음의 이유는 비루하다 최선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이런 말을 지껄이는 시인의 매장을 바라는 은밀한 마음들을 애도하며 시인은 썼다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것 ㅡ 그것이야말로 이시대의 불명예다

내 시는 명예의 쪽인가 불명예의 쪽인가

검은 밑줄이 시인이 남긴 마지막 기록이었다
밑줄의 오른쪽 끝에 힘이 들어가 씨앗처럼 잠시 반짝였으나

꽃은 피지 않았다
아무도 사랑 때문에 죽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으므로

아직
사랑해서 죽은 자,
마지막 시인이었다

시인의 말

뜻밖에도 설렌다. 처음 떠나는 모험처럼.

나는 여전히 시가
아름다움에의 기록의지라고 믿는 종족이다.
운명이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

이것은 처절하고 명랑한 연애시집이다.
라고 독자들이 말해주면 좋겠다.
사랑한
사랑하는,
아름답고 아픈 세상에 이 시집을 바친다.

2012년 새봄 강원도에서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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