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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고레에다 히로카즈보다 앞서 좋아하던 일본 영화감독이 있는데 바로 이와이 슌지이다. 나는 그의 CF 같은 영화들이 너무 좋아서 DVD도 몇 개나 구입했고 요즘도 생각날 때마다 틈틈이 본다. 이야기가 가진 힘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슌지의 영화는 시각적인 이미지로 관객을 압도시키는 ‘마’력을 지녔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화면이 이상하리만치 오래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관객의 시선을 줄곧 스크린에 붙들어 매는 힘 말이다. 최근 나오는 그의 작품들이 조금은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특수효과를 사용하지 않고 그런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예전에 이와이 슌지의 에세이집이 국내에 한 권 출간되었다. 『쓰레기통 극장』이라고 여러모로 이 책, 『걷는 듯 천천히』와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달라 비교해보는 맛이 있다. 슌지 감독의 글은 솔직히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대개 밑줄이 많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쓰레기통 극장은 두세 줄 그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나는 구절이 몇 개 없다. 어쩌면 나는 그의 영화에서나 느낄 수 있는 영상적 매력을 이 책에서 경험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상과 글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만 알고 씁쓸히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글이 영상에 호응한다고 해야 할까? 이와이 슌지 감독 일화처럼 나에게 영화란 보여줌으로써 가치를 얻는 예술이었다. 드러내야만 진실에 닿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영화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이 책이 나의 믿음을 재고하게끔 만들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상을 다루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가치를 얻는 행간의 매력을 스크린에 부릴 줄 아는 감독이기도 하다. 이건 분명 내가 알고 있던 관념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문학만의 미덕이라 믿었던 ‘행간’을 그가 어떻게 영화로 옮길 수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의 영화는 다분히 문학적이다. 바꿔 말해 그는 잘 찍는 감독이기 이전에 잘 쓰는 작가였던 것이다.
가능하면 영화에서도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 표현해보고 싶다. 문장에서의 '행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보는 이들이 상상력으로 빈 곳을 채우는 식의 영화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고 있다.
p.19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그의 영화와 많이 닮았다. 수록된 에세이 한편한편을 읽다 보면 그의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가 떠오른다. 그의 문장은 영화적이고 그의 영화는 문학적이다. 수많은 감독이 자신이 구상한 아이디어를 어떻게든 더 많이 보여줄까 고민할 때, 그는 어떻게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진실의 근삿값을 도출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바로 행간의 미덕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