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열정과 냉정 사이 ㅣ 구름카페문고 3
최민자 지음 / 문학관 / 2015년 4월
평점 :
작가를 고를 때 유독 고려해서 보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묘사력’이고 또 두 번째는 ‘비유력’이다. 물론 서사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단 제외하기로 하고,
구태여 뒤에 힘 ‘력(力)’자를 붙이는 이유가 따로 있다. 묘사와 비유는 어느 정도 타고난 작가들만이 가진 능력이기 때문이다. 문장은 부단히 갈고 닦으면 는다. 그런데 이것(묘사, 비유)은 일종의 센스이며, 노오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이런 구절들 말이다.
손님을 배웅하러 엘리베이터 앞에 나왔다가 실수로 현관문이 닫혀버렸던 적이 있다. 빈손 맨발 차림이었던 나는 외출했던 딸애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없이 문 밖에서 서성거려야 하였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내 영역 안에 발 들이지 못하는 아이러니. 그때 알았다.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만이 구속이며 부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자유란 물리적 공간의 문제가 아닌 심리적 수용의 문제라는 것을. 마음 가는 데 몸이 가지 못할 때 삶은 감옥이 된다는 것을.
p.46
작은 방 서랍 안에서 얼차려 중이던 손톱깎이가 거실 탁자 위에서 뒹굴고, 부엌장 안의 차 숟가락도 열이 되었다 열둘이 되었다 한다. 며칠 전 그리도 찾아 헤매던 귀이개는 프린터 밑바닥에 얌전하게 엎드려 있었다. 숨바꼭질이 끝난 줄도 모르고 헛간 깊숙이 잠들어버린 어린 날의 친구처럼. (…) 녀석의 잦은 숨바꼭질은 저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의 허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숨는다는 것은 때로 존재감을 극명하게 확인받을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일 수 있을 테니까.
p.78 ~ 80
어떤가? 저런 비유는 단순히 ‘무엇은 무엇이다’로 끝나는 얄팍한 비유들과는 그 격이 다르다. 이건 일테면 똑같은 것을 보아도 다르게 보고 해석하는 사람들 특유의 통찰력에서 나오는 기술인 셈이다. 저런 문장을 한 번 읽고 나면 익숙하던 세계가 달리 보일 수밖에 없고 이게 바로 최민자의 비유력이 뛰어난 이유이다.
이 책 같은 경우 절판되어 구할 길이 막막했던 수필집 『꼬리를 꿈꾸다』와 『흰 꽃 향기』의 일부, 그리고 새로 쓴 수필 몇 편을 작가가 직접 골라낸 작품인데 종이책으로는 이미 절판되었으나 다행히 전자책으로 출간되어 있기에 냉큼 사 읽었다.
최민자 작가는 지금껏 내가 보아온 비유력을 가진 수많은 글쟁이 가운데 가장 빼어난 사람이다. 그녀의 비유는 읽는 내내 무릎을 때리게 만드는 어떤 근사함을 지녔다. 이 책 역시 그렇다. 『손바닥 수필』 출간 후 거진 4년 간 그녀의 글을 읽을 수 없다는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래서 더더욱 자주 옮겨 적고 자주 꺼내 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