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번역가로 잘 알려진 이윤기 씨의 언어 철학 에세이다. 생전 그가 쓴 집필 노트 속 내용을 그의 딸이자 역시 번역가로 활동 중인 이다희 씨가 추려냈다. 그가 작고한 지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서야 그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그가 번역하거나 집필한 책을 단 한 권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을 딴 '이윤기체'가 있을 정도로 우리 문학계에 잘 알려진 작가라고 하는데 이런 기회로나마 문학과 등 돌리고 살아온 지난 시간을 확인하게 되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글 읽기'에 관한 한 나는 황희 정승만큼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글쓰기'에 관한 한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 길고 짧은 소설을 차례로 써내고 있지만 조금도 행복하지 못하다. 나는 큰 빚을 진 사람이다. 나에게 '글 읽기'의 행복을 안겨준 많은 작가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다. 부모의 사랑을 아래로 갚듯이 이 빚은 독자에게 갚아야 한다. (31p)



  글쓰기 실용서는 이미 시장에 깔렸고 그 가운데 괜찮다고 소문난 작품도 몇 권 읽어봤다. 그런데 이 책은 조금 다르다. 확실히 실용서는 아니다. 전반적인 내용도 쓰기 기술에 한정하기 보다는 읽고, 쓰고, 말하는 일테면 '언어 활용'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래라저래라, 이런 방법이 옳고 저런 방법은 틀렸다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언어가 어떻게 쓰이고 버려지는지 작가의 경험과 일화를 바탕으로 고백한다. 처음엔 당장 써먹을 만한 기술을 배워보려 펼쳤다가 맥이 풀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과 언어를 사유하는 끈덕진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흔해 빠진 기술 몇 가지를 배우는 일보다 더 무거운 주제가 오도카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의 주장을 감히 요컨대 '언어는 자유롭게 쓰되 우리 것은 지키자!'라 해본다. 우후죽순 늘어나는 통신어 체나 특정 지역에서만 쓰는 사투리? 얼마든지 써도 좋다. 다만, 우리의 말과 우리의 글, 우리의 언어를 잃지 말자. 이것이 골자다. 소통을 방해하는 한자어는 자제하고 누가 읽든 명명백백 알 수 있도록 언어를 사용하자. 통감한다. 작가의 말마따나 신조어든 사투리든 문맥과 어울려 호흡한다면 그것은 살아 숨 쉬는 언어로 청중과 독자의 마음을 울릴 것이다. 수많은 실용서의 기술보다 더욱 실용적이고 의미 있는 주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리는 이제 모터보트를 묘사할 수 있을 뿐, 거룻배를 묘사할 능력은 하루가 다르게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모터보트에 붙어 있는 스크루, 핸들, 엔진, 트로틀 같은 같은 기능적인 장치를 설명하려고 할 뿐, 거룻배의 덕판, 바우, 멍에, 창막이, 상앗대 같은 말과 그런 말에 묻어 있는 정서를 묘사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명사가 사막화 현상을 맞으면서 형용사만 현란하게 형용하고 동사만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대가 온 듯하다. (313p)



  더불어 작가는 우리 사회의 무분별한 외래어 남용 현상을 꼬집는다. 평생을 우리말과 외국어 사이를 왕래하며 그가 느낀 것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정서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말만 통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하나 단순해 보이는 명사 하나에도 사전적인 정의로 환원할 수 없는 사회적 결과물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작가가 말하는 정서는 곧 역사가 될 수도 있을 테다. 하나의 명사가 사라지면 또 하나의 역사는 지워지고 지워진 만큼 우리의 표현도 사라지는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다. 번역하고 싶어도 도무지 표현할 방법이 없는 작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성싶다. 책을 덮고 작가가 꼬집은 자국을 망연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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