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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유명한 책인 '침묵의 봄' 출간 50주년을 기념하여 에코리브로에서 새로운 번역본을 내놨다. 이제서야 반강제적으로 봤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지만 역시 명저는 시대가 달라져도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책의 주제는 인간이 만들어낸, 이제까지 세상에 없었던 화학적 합성물들로 인한 환경 파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책 소개나 옮긴이의 말을 보면 이 책의 미덕은 시의적절함, 거대 기업에 맞선 저자의 용감한 태도 외에도 아름다운 문장에 있다. 확실히 수많은 과학적 사례, 이론들이 끝없이 등장하는 이 책은 이런 류의 책 중 비교적 읽기 쉬운 편이다. 


하지만 이미 검증된 이 책의 미덕들에도 불구하고 5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내게 고통이었다. 책의 내용이 이제는 뻔한 내용들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간만에 접한 화학, 생물학 이야기가 낯설기도 했다. 여전히 지속되는, 작금의 개탄할만한 환경 파괴로 인한 아픔때문만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책 읽기를 힘들게 했다고나 할까?


책을 통독하면 연실 고개가 끄덕여지며 50년대에 이렇게 상황이 안 좋았구나, 잘못된 정부 정책이란 참으로 파괴적이구나, 살충 노력이 오히려 더 악질의 해충을 만들어냈구나 등등 공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자세히 읽기 시작하면 내가 이런 걸 알아야되나,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읽을 필요가 있을까 등의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많은 경우 책 속의 사례는 당시에도 검증된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다시 검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출간 당시에는 어용학자나 기업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무수히 많은 사례들은 현재 독자인 나에게는 따분한 사례 나열로 다가오지만 당시로서는 레이첼 카슨이 최대한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피나게 노력했던 결과일 것이다. 여하튼 50년 후의 독자인 나에게 카슨의 책 속의 이야기들은 내가 60년대에 읽었다면 느꼈을 충격에 비해서는 상당히 미미한 파장을 일으킬 뿐이다.  


현대 사회는 카슨과 같은 분들의 노력에 의해 환경 어젠다가 국제 정치의 레벨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환경이 미국 뿐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 모두가 공감할 정도로 안 좋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예전 농약, 살충제 회사들의 후예인 대기업들이 환경파괴의 정도가 환경보호론자들에 의해 과장되고 있다고 하는 주장을 수용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이제 환경 보호라는 구호는 너무 들어서 오히려 위험성이 덜 느껴지는, 피로감에 젖은 상태가 아닌가 싶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글로벌 환경은 인류의 다수가 동시에 타격을 입을 수 있는 대재앙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이 책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는 이 지구가 인류 혼자의 것이 아니며 미묘하게 유지되는 균형 속에서 유지된다는 점이다. 새로운 기술들이 그것이 세상에 나올 경우 미칠 파급력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채 도입될 경우 발생하는 파괴력, 피해의 규모는 날로 커질 수밖에 없다. 


책의 1장은 파국의 미래의 일면을 우화로 제시하고 있다. 2012년은 다양한 종말론이 어떤 식이건 끝을 예언하는 시점이다. 그 예언이건 어떤 재앙에 대한 우려건 실현되길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환경 재앙은 이미 현실이다. 몇 년 전부터 극단적인 일기 변화가 발생하며 사람들의 삶에 큰 피해가 생기고 있다. 끝을 모르는 탐욕으로 특징지어지는 신자유주의, 금융 자본주의는 환경 재앙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최근 한국 출판계에서 작은 규모의 공동체, 조합형태의 기업, 자급자족의 삶을 강조하는 책들이 범람하는 것은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고전이라 불러도 좋을 이 책은 인류가 50년간 게으름을 피운 대가가 무엇인지 반성하라고 우리에게 질책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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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노하지 않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분노하지 않는가 -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
존 커크 보이드 지음, 최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좋은 말들로 가득한 책이 읽기에 거북하기도 하다. 이 책, 아니 하나의 팜플렛이라고 불러야 할까,은 하나의 선동서다. 그렇다고 과격한 선동은 아니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매우 단순하다. 1948년 발표된 세계인권선언의 100주년이 되는 2048년에 선언을 더 구속력있는 세계인권'조약'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움직임은 저자가 속한 버클리 대학에서 이미 추진되고 있다. 그리고 강요하지는 않지만 이 운동이 성공하도록 20.48 달러를 기부할 것도 요청하고 있다(대가로 이 책과 머그컵 한 잔을 주겠다고 한다). 


인권의 중요성은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교수가 쓴 글이라고 보기엔 구체적 설명이 매우 부족하다. 이는 이 책이 자세한 설명보다는 자신들의 프로젝트가 진행중인 웹사이트에 가서 의견을 올리고 토의하자는 하나의 가이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웹사이트에선 어떤 토의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차마 그것까지 확인하고 싶은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세계인권조약은 세계 '조약'이기에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서 조인되어야 한다. 모든 국가들의 의견이 그 웹사이트에 반영되어 최종 조약문에 포함될 수 있을까? 어떤 언어로 소통할 것인가? 강대국들은 항상 그렇듯 자신들만의 규약을 보편의 규약처럼 간주하여 강요할 것인가?


이 책, 그리고 이 운동의 가장 큰 모순은 사회가 국가를 간단히 규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약을 맺자고 한다. 조약은 국가가 주체가 되어야 하고 국가가 그 조약이 정확히 실행되도록 이해갈등을 조정하고 강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책은 국가, 정부의 이해관계, 그것들이 짠 구조 쯤은 세계인의 보편 지성으로 간단히 초월할 수 있다고 믿는 듯 하다. 그렇게 약화된 국가에서 어떤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설마 40년 후면 세계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48년까지는 앞으로 40년도 남지 않았다. 물론 나도 저자가 2048년에 자신이 꿈꾸는 멋진 세상이 완성되리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 이후 2148년에라도 그 이상이 이루어진다면 기뻐하리라. 하지만 이 책만 보고서는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알 수 없다. 


이 책이 이번 달의 리뷰 도서로 선정된 것은 의외였다. '침묵의 봄'은 워낙 유명한 책이라 유익한 면이 있겠으나 이런 종류의 책에서 실질적인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언제나 난망한 일이다. 


책은 어렵겠지만 일단 꿈을 꿔야 추진해보지 않겠는가, 시도라도 하다보면 뭐가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어떨지는 회의적이다.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선언(불과 50여개국이 참여했던)에도 불구하고 선언에 반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어떤 형식으로건 2048년에 세계인권조약이 발효되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켜지는 곳도 있지만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언론에서 이 책의 리뷰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예상대로 중앙일보에서는 계열사의 책이니만큼 내실은 없지만 리뷰를 하나 냈고, 미디어오늘에서는 책을 비판하는 것에 가까운 리뷰를 냈다. 언론의 자유는 이 책에서 첫째로 꼽는 자유인데 거대 언론사의 출판사에서 이런 류의 책을 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미디어오늘 리뷰는 변죽 올리는 내용이 많다는 단점이 있지만 한국에서 인권 운동의 한계를 지적한 면은 읽을 만했다.  


책을 사려고 생각하시는 분은 우선 이들의 근거지인 2048.berkeley.edu를 방문해볼 것을 권한다. 무엇이 나오는가. 아무 내용도 없다! 일시적인 정지 상태인지 알 수 없으나 이 프로젝트의 현실성 자체가 이미 의문에 빠진 것은 아닐까. 위의 주소 앞에 www를 붙이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냥 버클리 법대 메인 페이지가 뜬다. 


왜 분노하지 않냐고? 나는 분노한다. 이 허무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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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새해가 왔는데 출판계는 숨을 죽이고 있는지 지난 몇 달에 비해 신간이 눈에 띄게 적다. 그래서 고민의 시간은 더 짧아졌다.


1. 김시덕, 그들이 본 임진왜란, 학고재

 외국 이야기를 읽는 것은 자신의 상황과 시간적, 공간적으로 비교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임진왜란은 보통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로 결국 조선이 일본을 격퇴한 전쟁으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명청 교체기와 얽힌 동아시아적 사건이었다. 그동안 임진왜란에 대한 시각은 침략을 당한 우리의 시각에서 주로 다뤄졌다. 조선을 도운 명에 대한 자료는 많이 이용되는 것 같지만 침략자인 일본의 입장에 대한 글은 많이 보지 못한 것 같다. 풍신수길이 전국시대를 끝내고 내부 불만을 위해 조선을 침략한 것이었는지, 중화질서를 교란시키고 동아시아의 패자가 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본 입장에서 이 전쟁의 의미는 상당히 컸을 것이다.

 간단한 책 소개를 읽어보면 이 소설은 일본에서 에도 시대에 유명했던 임진왜란 관련 책들의 내용을 통해 그들이 이 전쟁을 어떻게 인식했고, 침략을 정당화하는지 분석했다고 한다. 원나라와 고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는 명분도 있었다는데, 나중에 구한말에 실제 한국을 구체적으로 점령할 때는 어떤 명분을 내세웠는지 궁금해진다. 장기적으로 보면 임진왜란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다이나믹스의 일부다. 그러므로 일본의 시각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2. 수전 벅모스, 헤겔, 아이티, 보편사, 문학동네

 제목만 보고는 황당한 소리를 하는 책 같았는데 저명한 출판사인 문학동네의 책임을 확인하고 주목하게 되었다. 저자인 벅모스는 제목만 들어본 책인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저자이기도 하다. 

 지식이 얕아 잘은 모르지만 헤겔이 살던 시기에 아이티 혁명이 있었고 그 사건이 어떤 식으로건 헤겔의 사고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추측은 납득할 수 있다. 더구나 책 소개에서 혼란스럽게 설명이 되지만 이 혁명이 헤겔 '정신현상학'의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의 실현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러나 저자는 헤겔이 아이티 혁명에 대해 침묵한 것보다 서구 지식인들이 이 둘의 연관관계에 대해 침묵한 걸 더욱 문제삼는다고 한다. 책 제목에 있는 보편사는 서구근대의 가짜 보편사에 대항한 다원주의의 담론도 아니고 제3세계적 보편사라고 한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보편적'인지는 책을 봐야 알겠지만 꽤 재미있는 추론이 전개된 것 같다. 헤겔 때문에 골치만 앓고 있는데 좋은 가이드가 될 것 같다.


3. 페리 앤더슨, 현대 사상의 스펙트럼, 길

 페리 앤더슨하면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라는 오래된 책이 떠오르는데 이 책은 2005년이라는 비교적 최근 저작이다. 제목은 다소 추상적인 '현대 사상의 스펙트럼'인데 내용은 좌, 우, 중도를 모두 다루고 있다. 말 그대로 사상의 스펙트럼인데 이 책에 눈길이 간 것은 칼 슈미트, 레오 스트라우스 등 악명높지만 학문적으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우파 거장들에 대한 설명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하이엑, 하버마스, 롤스, E. P. 톰슨,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호스봄 등 과히 현대 사상의 주요 인물이라 할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한편으로는 어떤 원칙에 의해 이 인물들을 선정했고, 스펙트럼상에 늘어놓게 되었는지 그 기준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책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믿고 읽을만한 저자의 책이라 기대가 된다.




4. 에이드리언 골즈워디, 로마 멸망사, 루비박스

 로마 멸망에 대해서는 에드워드 기번의 너무나 유명한 책이 있다. 이 책은 로마가 정말 멸망했는지를 묻고, 그렇다는 대답을 한 후 왜 그랬는지 과정을 객관적으로 추적한다고 한다. 

 원래 책 제목은 '로마 멸망사'가 아니라 '서구의 몰락'이다. 부제가 로마 초강대국의 죽음이다. 로마 멸망사라고 하면 단순한 과거 역사를 연구한 것으로 보이지만 원제는 현재 국제 상황을 반영한 것 같다. 실제로 책 소개에 나온 선데이 타임스의 서평은 현 상황을 후기 로마 시대와 비교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미국 패권을 과거의 제국과 연관시킨 책은 적지 않다. 아마 이 책이 정말 독특하거나 새롭게 기여할 점이 있다면 현재 상황을 염두에 두되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했다는 책 소개가 진실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로마 제국 멸망사는 진실로 미국의 몰락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5. 헤어프리트 뮌클러, 새로운 전쟁, 책세상

 이 책에 대한 유일한 100자평이 2점짜리 악평이라 얼마나 책이 별로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책의 목차는 나에게는 꽤 매력적이다. 근대국가가 폭력을 독점했다는 것은 널리 공유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국가가 통제하지 않거나 못하는 전쟁이 증가하고 이것을 저자는 '새로운 전쟁'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재미있는 건 새로운 전쟁이 사실은 새로운 게 아니고 근대국가들간의 전쟁이 핵심이었던 200년간이 오히려 예외적인 기간이라는 내용이다. 근대국가의 효력 혹은 적실성에 대한 논란은 워낙 오래되어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현재 국민적 정체성 이상을 잘 상상할 수 없는 우리에겐 근대국가 시기와 그 전후를 비교하면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좁은지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목차를 보니 많은 독자들에게 어필할 내용은 아닐 것 같다. 2점을 주신 분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다섯 개 리스트에 넣지 않았지만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도 중요한 저작이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84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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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천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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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불만으로 시작하겠다. 이 책은 너무 두껍다! 그런데 책이 약하게 제작되었는지 아니면 내가 실수로 펼쳐진 책을 세게 눌렀는지 읽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책이 두 개로 분리될 기미가 보인다. 하지만 내용을 생각한다면 이런 불만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이 방대한 내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우선 많이 오해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것으로 시작한다. 시장은 결코 자기규율적인 시스템이 아니다. 현대의 학문인 경제학 그리고 자본주의는 시장이 규제를 받으면 최적의 효율성을 발휘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원래의 경제학 그리고 정치경제학은 시장이 국가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 책은 바로 이 대목을 매우 설득력있게 설명한다. 그냥 국가가 아니고 폭력, 전쟁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막후의 배경이다. 


책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물물교환의 신화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인간들은 심지어 지금도 경제학에서 말하는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공산주의'적 요소가 여전히 인간 삶의 중요한 양식이라고 말한다. 


빚은 갚아야 하는가. 일견 대답은 명확해보인다. 누군가 내 돈을 빌려갔으면 당연히 갚기를 기대한다. 나도 어디에서 돈을 빌리면 당연히 갚으려고 노력하고, 제 때 갚지 못하면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부채를 갚지 않는 혹은 못하는 경우가 당연히 많았고, 많은 경우 부채는 탕감되었다. 그래야 사회가 굴러가기 때문이다. 


또 처음부터 절대 갚지 못할 빚이 있다. 신에 대한 빚, 부모에 대한 빚 같은 것들을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가. 


종교와 부채의 관계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웠다. 일상의 언어 생활에도 빚이나 금전 거래와 관련된 어휘들이 많은데 이미 고대부터 부채는 인간을 괴롭히는 문제였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 자연스럽게 부채의 언어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2008년 이후의 금융 위기 때문에 이 책이 더 주목받았을 터인데, 기대대로 책은 말미에서 현재의 금융위기에 대해 진단한다. 5천년 인류 경제사를 다루는 저자인만큼 현재의 금융 위기는 결코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등장과 자본주의만이 진리라는 환상이 만연한 것, 그리고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를 파기한 이후의 달러 중심의 국제경제체제가 이미 재앙을 잉태하고 있었다. 채권자의 이익만을 강조하는 풍조, IMF의 존재 모두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더할 뿐이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내용도 적지 않고, 인류학 내용이 많아 소화 불량이다. 더 제대로 흡수한 이후에 리뷰를 강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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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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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대의 송호근 교수님이 나름 야심작이자 역작을 내려고 하신 것 같다. 이 책의 계획은 거대하다. 그래서 이 한 권의 책에서 모든 이야기를 하지 못 하고 후속 연구에서 논의를 이어가겠다는 언급이 여러번 나온다. 어찌 보면 미완의 책이라는 말이기도 한데,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기존의 논의와 조금 다르기 때문에 불가피한 면이 있다 하겠다.


그럼 이 책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사실 제목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인민? 한반도의 북쪽에 있는 같은 민족의 이질적인 국가가 인민이라는 말을 자주 쓰다보니 남쪽에서 이 단어를 쓰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인민공화국의 인민을 말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사람을 의미하는 포괄적인 의미의 인민도 아니다. 책에서 대척점으로 세운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의 '적자'로서의 인민도 아니다. 이 책은 '근대 인민'을 말하고 있다. '근대 인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의 논의와 관련된 학문적 글들을 읽었던 입장에서 보자면 송교수님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책의 논지 전개에는 허점이 있다. 책의 틀은 성리학으로 빽빽하게 짜여진 지식국가였던 조선이 정조가 사망하며 시작된 19세기에 결정적으로 허술해졌고 그 틈을 타고 우연히 근대적이라 부를 수 있는 사회구조가 형성되고 근대 인민이 등장했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을 성리학의 지식국가로 파악한 것은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적절한 지적이다. 하지만 그 사회의 틀이 붕괴된 시점을 19세기 혹은 18세기로 봐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소지가 많다. 특히 송교수님이 18, 9세기 이전을 '중세'라고 지칭하고 있어 더욱 문제적이다. 한국사 시대 구분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인데 '중세'라는 시대를 한국사에 대입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조선 시대 대부분이 중세란 말인가. 조선의 균열의 시점은 왜란, 호란으로 인한 격변의 시대부터는 아니었을까? 책에서 말하는 근대 인민이 17세기에 등장하기는 어려웠을지 몰라도 사회적 변화의 시점을 고려할 때 더 앞당겨 잡아야했어야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19세기에 조선 사회의 농업 생산성이 늘고 인구가 증가했다는 서술은 경제사학에서는 반대의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어 수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내가 가장 의문을 제기한 부분은 위의 내용이지만 책의 구상과 전개에 있어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매우 많다. 성리학으로 짜여진 조선의 '지식 권력' 사회가 세도 정치 이후 지식과 권력이 분리되며 깨졌다는 사회 구조적 설명은 기존의 학계에서 많이 하던 말은 아닌 것 같아 이 책이 크게 기여한 부분일 것이다. 


공론장과 담론을 주요 개념틀로 채택했기에 놀랍지 않으나 훈민정음의 의미를 핵심적으로 다른 것도 적절했다. 요즘 반쯤 봤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성리학적 정치를 두고 밀본과 세종이 갈등하는 것처럼 나오는데 이 책은 세종이야말로 성리학을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기술한다. 한글의 정치, 사회적 의미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더 나와야 하고 많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천주교의 의미를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한 대목이다. 이는 조선의 통치구조를 종교, 향촌 질서, 교육 혹은 종교, 정치, 지식의 세 가지 기제로 설명하여 성리학의 종교적 성격을 매우 강조한데 따른 논리적 산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천주교가 한국 근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연구가 놀랄 정도로 적은 걸 감안하면 송교수님의 시도는 꽤 의미가 있다. 


본격적으로 사회과학을 시작한 세대의 학자로서의 책임감과 기존의 근대 연구들이 '미시사적'이고 '목적론적'이었다는 비판 의식에서 출발한 이 연구는 초기 단계이기에 갈 길이 멀다. 아마 제대로 된 평가를 위해서는 이어질 2권 혹은 3권을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시각을 던짐으로써 기존의 한국 근대사 연구에 파장을 일으킬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책을 잘 읽고 제대로 비판해주는 것이 독자들, 그리고 연구자들의 남겨진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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