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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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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가 당연히 주관적이지만 책은 기대 이상이었다.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미국이 못 살 곳이고 유럽이 살기 좋더라라고 말하기는 쉽다. 물론 최근 유로존 위기를 보면 유럽이 정말 살기 좋은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저자는 '독일'은 괜찮다는 주장이니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미국과 독일의 산업 구조를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점이다. 독일에서는 제조업이 여전히 산업의 근간인데 육체적으로 고될 것 같은 이 제조업 덕분에 오히려 유럽 사람들은 긴 휴가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제조업이기 때문에 노동력이 중요하고, 그래서 노동자들이 회사의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 반면 미국이 1인당 GDP가 유럽보다 높을지 몰라도 평균적으로 보면 소득의 불균형이 극심하고 대다수의 인구는 저임금으로 높은 노동 강도를 견뎌야 한다. 미국의 GDP는 쓸데없이 높은데 왜냐하면 일하느라 지친 사람들이 소비로서 억눌린 욕구를 풀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에서 저자는 민주주의 시민으로서의 역량에서 양국이 큰 차이를 보인다고까지 설명한다. 일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직장 생활에서부터 이미 참여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경험을 하는 독일인에 비해 미국인들은 언제 해고될지 몰라 전전긍긍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산업구조의 차이뿐 아니라 독서 생활도 양국의 큰 차이다. 미국이 자극적인 TV쇼와 글씨가 적은 신문, 잡지에 낄낄대는 반면 독일은 실제로 사람들끼리 만나서 진지하게 대화하고, 신문은 글씨가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페이지수도 많다. 경영자들도 철학 책을 가까이에 두고 읽는다. 


미국도 독일도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책의 내용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상당히 그럴 듯 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미국적 삶이 많이 침투한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책이 주는 함의는 매우 실용적이고 실천적이기까지하다. 경영인, 사주, 재벌 언론에게 장악된 한국 사회의 현 구조가 지속된다면 사회의 불평등과 비민주성은 구조적으로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가 부럽더라도 한국에 적합한 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미국적 신자유주의의 병리를 치유하기 위한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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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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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소와 흄. 이들 각각이 한국에서 어떤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정치학, 그중에서도 사상을 주로 연구하는 나도 이 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아마도 루소는 '사회계약론'과 '에밀'의 저자로 가장 유명할 것이다(그 저작들이 어떻게 이해되고 오해되는지는 차치하고). 흄은 어떨까. 그런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해서 유명한지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도 그렇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누군지 잘은 모르지만 어쨌거나 서양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이 둘의 진면모를 한꺼번에 알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어떨까. 몰라도 사는데 지장은 없겠으나 조금이라도 서양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아니 우리는 모두 서구 근대가 만들어낸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근원에 대해선 조금이라도 알 필요가 있다. 둘의 사상에 대한 내용은 책의 11, 21장에 잘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엄밀히 말해 루소와 흄의 사상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지는 않는다. 중심 내용은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어떻게 우연히 만나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파국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책 속에서도 나오지만 둘의 기본적인 입장은 너무나 달라 학문적으로 소통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단기간에 파탄나고 서로 상대방을 헐뜯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 계몽주의의 시대라는 18세기를 살았던 두 사람은 이성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같은 입장이었다. 큰 틀에서 루소가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했다는 면에서 흄은 이성을 중시한 쪽에더 가깝다. 그렇지만 흄의 입장은 "이성은 감정의 노예이고, 노예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처럼 이성, 인과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적이다. 그러나 흄은 이성의 토대를 무너뜨린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성으로 이해가능한 것처럼 돌아간다고 이해한다. 무신론적인 흄은 이성도 맹신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인간에게는 누구나 공통된 어떤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토대로 사회원리를 구축한다. 그것은 바로 공감인데 맹자의 측은지심과 유사해보인다.

 

루소는 그 자신이 어떤 명확한 체계적 학문 세계를 갖고 있다고 봐야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유로운 사람일까. 책 속에서 당대의 지식인들은 루소를 미치광이로 생각했다. 물론 루소의 책들이 당대에 많이 팔렸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는 뜻이지만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루소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았다.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등 계몽주의의 핵심 인사들과 루소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연속적인 사회의 진보를 믿고 주장하는 계몽주의의 입장에서 원시의 자연상태가 최선의 시대였다는 루소의 주장은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으리라. 루소는 실제 삶에 있어서도 고독을 추구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에게 환호해도 조용하고 사람이 적게 사는 곳에서 지내고 싶어했다.

 

이런 루소를 흄이 영국으로 데려가 편의를 돌봐주는 과정에서 둘은 서로를 오해했고,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관계가 되어버렸다. 대강의 과정을 보자면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잉글랜드에서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했던 흄이 프랑스에서는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좋은 대접을 받은 후 프랑스와 스위스 모두에서 쫓겨난 루소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는데, 이번에는 영국에서 루소를 찬양하고 흄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영국사'의 저자로 부와 명성을 쥔 후 공직에서도 활약한 흄이 도망자 루소 때문에 자신이 주목을 덜 받게 된 것에 빈정이 상했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일단 루소가 흄의 호의를 악의로 오해하게되자 흄은 루소를 맹비난하며 루소를 비방하는 작은 책까지 출간하기에 이른다. 사람좋다는 평판을 평생 유지한, 보수적 인물인 흄은 루소에 대해서는 자제력을 잃고 무너졌다. 흄의 지인들은 미치광이 루소 때문에 흄이 변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책의 재미있는 다른 부분들을 짚고 넘어가자. 우선 책의 제목은 왜 '루소의 개'인가. 책에서 루소가 기른 두 마리의 개가 등장한다. 우선 duke 즉 공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개가 있었다. 그 개의 이름은 나중에 튀르크로 바뀌었다는데 아마 Turk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개는 잠깐 등장한다. 그 다음 개는 Sultan인데 책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Turk, Sultan이라면 이슬람식인데 루소가 왜 그랬는지도 궁금하다). 왜 루소가 기른 개가 중요한가. 그것은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존재들간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루소의 가치관 때문이다. 루소는 서로 독립적이고 동등한 존재 사이에 우정이 가능하며, 개라고 해서 인간의 지배를 받는 하등 존재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즉 '루소의 개'는 실제 루소의 삶에서 하녀이자 나중에 정식 아내가 된 르바쇠르만큼이나 중요했고, 그렇기 때문에 Sultan은 단순한 루소의 개가 아니었다.

 

이 책을 보면 18세기 영국, 프랑스가 편지, 신문, 살롱의 시대였음을 아주 잘 느낄 수 있다. 책의 많은 내용은 루소와 흄이 지인들과 주고받은(서로 간의 편지도 물론 있다) 편지들과 신문 기사들로 채워져있다. 편지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고, 주변 사람들과 돌려읽으며 토론거리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 쓴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출판되기도 했다. 살롱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성을 갖춘 귀부인들 이야기, '고백'에도 나오지만 루소가 아이들을 버린 이야기, 루소가 아르메니아식 옷을 즐겨입었던 이야기 등 잘 몰랐던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프랑스에서 버림받았던 루소가 어떻게 곧바로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토대가 된 인물로 추앙받으며 팡테온에 이장되었는지 궁금하다. 책에 내용이 나오긴 하는데 길진 않아 관련 내용을 더 살펴봐야겠다. 흄에 대한 설명도 꽤 유익했다. 정치사상 저술이 없다는 이유로 로크나 홉스보다 흄이 덜 중요한 인물인 것은 아니리라. 조만간 흄의 저작들도 읽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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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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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리뷰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를 회고하면 실망감이 앞섰다.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은 내가 원했던 책이지만 강신주 선생의 이 책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리뷰까지 써야하나라는 회의감이 생겼다. 게다가 책 제목부터 '괴로움'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왜 괴로워져야하나.  

하지만 책 읽기의 속도로 따지면 맹신자들보다 이 책을 훨씬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철학과 시를 논하는 괴로운 책인데?! 물론 빨리 읽을 수 있다고 좋은 책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 자신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일견 쉽지 않은 작업을 남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좋은 능력이라고 평하고 싶다.  

책은 각 장마다 한국 시인들의 작품 하나를 소개하고, 그 시의 의미를 규명하면서 그 작품을 보니 외국의 어떤 철학자가 떠올라 그 철학자의 사상을 소개하고 시와 연결짓는 작업들로 구성된다. 마르크스, 라깡, 카뮈 같이 누구나 들어보았을 법한 철학자도 있지만 이리가레이, 시몬 베유, 클라스트르, 블랑쇼 등 왜 강신주 선생에겐 굳이 그분들이 떠올랐을지 범인들은 의아해할만한 철학자도 많다.  

그러나 다행히도 저자는 이 생소한 사람들의 논의마저도 아주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때로는 너무나 평이하기에 이 철학자의 논의가 과연 별난 것이기는 한 것인지, 아니 특이함을 떠나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책의 출발 자체가 전편의 연속선상이고, 상상마당에서 이루어진 강의안의 모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책의 태생적 한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시의 세계에 무지한 나조차도 책에 소개된 시인들의 날카로운 시 언어를 저자의 설명을 통해 이해하면서 책의 미덕을 칭송하게 된다. 한국에 이렇게 좋은 시인이 많았고, 현재도 많구나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도 좋으려니와 특정 시를 대부분 생소한 외국의 현대 철학과 연결시켜 생각할 계기가 된 것도 좋았다. 또 하나의 미덕을 꼽자면 책에서 읽어볼만한 책으로 추천한 리스트들이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시중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쉽게 읽어볼 수 있는 책들을 통해 책의 내용을  심화해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책의 미덕들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입장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라깡과 이리가레이의 이야기들은 애초에 다를 수밖에 없는, 특히 라깡의 경우는 지나친 주장으로 보이는데, 간극을 말하는데 이리가레이의 결론에서는 남녀의 조화를 추구해야한다고 하니 그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다. 물론 마르크스 논의에서처럼 대상적 활동의 주체인 인간의 분투 자체가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넘어가기엔 책에 나온 철학자들의 입장이 너무 다양하다.  

이 책이 신간임에도 불구하고 저자께서 최근에 또 책(제자백가에 대한 것?)을 내셨고 나름 화제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주장들을 하셨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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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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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기 알라딘 신간평가단으로서 첫번째 리뷰 작성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료로 받는다는 것은 꽤 오래간만의 일로 내가 원했던 책 중 하나이기에 더 뜻깊다.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은 60년전의 책이다. 왜 지금, 이 책인가. 

 책의 부제가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이듯이 이 책은 반 세기도 더 이전의 인류 사회를 휘몰아친 온갖 대중운동들을 다루고 있다. 20세기 초반은 민족주의, 나치, 파시즘 혹은 종교적 광신주의까지 외부에서 보기엔 어딘가 미친 사람들의 움직임이 엄청난 결과(보통은 부정적인)를 불러일으키고 마는 시대였다. 에릭 홉스봄은 극단의 시대라고 명명했던가. 

아마 이 책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번역된 것은 여전히 대중운동이 도처에 만연해있고 이 책이 그런 현상에 대한 통찰력을 줄 수 있다는 출판사의 생각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대중들은 소위 '스마트'하게 아주 빠르고 그래서 단기적인 그러나 파괴력있는 집단행동을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중들이 정말 스마트하냐, 누군가의 스마트해보이는 주장에 휩쓸릴 뿐 아니냐는 우려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악이 정해지면 그 악을 응징하기위한 모든 행동은 정당화되기도 한다. 아마 작금의 현실이 이런 상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책이야말로 '스마트'하다. 60년전이라는 상황 그리고 저자 호퍼가 부두노동자였다는 상황을 감안하면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었을가 궁금하다. 책은 대중운동의 본질을 풍부한 사례를 통해 잘 파헤친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악용될 소지도 많다. 누군가 자신의 뜻을 대중의 의지로 포장해서 관철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현실 조작을 위해 책에서 제시한 방법들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이미 현실에서 작동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계속해서 지적되는 언론의 조작 방송 혹은 기사 시비의 이면에는 더 큰 권력의 의지가 작동할 수도 있고, 언론사 자체의 욕망, 자본의 논리도 작동할 수 있다. 하지만 책은 그러한 대중운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은 의존적 인간형으로 매우 나약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실제로는 생각이 없음에도 자신이 스마트하다고 착각하는 현대 사회의 인간 군상은 이미 대중의 가면 아래 붕어빵 노예가 되어버렸다.  

이 책은 마치 아포리즘으로 가득한 니체의 책을 보는 것처럼 짤막한 지혜의 말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어느 부분을 딱히 집중해서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체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흐름은 있다. 다만 동어반복적으로 보이는 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라 책 읽기를 조금 지루하게 만든다. 그러나 2012년을 목전에 둔 지금 1950년대 초반의 경고가 여전히 유효하고 심지어 상황이 더 심각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섬뜩하게 한다. 현대사회 이해를 위해 읽어봐야 할 책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다지 읽기에 어려운 내용도 없으므로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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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11-18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오는 저녁이라 리뷰보다 그림이 먼저 들어오네요.
아ㅡ 어묵탕에 소주 한잔~
크,, 사실 저도 저 그림으로 바꿀까 하다가 붕어빵으로 했는데...ㅋㅋ
술을 부르는 계절,,,10기 잘해봐요!!!
 
문묘 18현 - 조선 선비의 거울
신봉승 지음 / 청아출판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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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http://vieri.tistory.com/256)에 먼저 작성하고 여기에 올립니다.  

표지가 재미있다. 조선 선비의 그림인데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이게 무슨 실례야? 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거울을 보고 있는 거다. 얼굴을 가리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문묘18현의 거울을 보고 계신 설정이라니 재밌는 발상이다. 책의 설명을 보니 '이채'라는 분인데, 18현 중의 한 명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대학원에 있으며 조선 성리학을 피상적으로나마 많이 접하게 되는데 성균관에서 18현을 모시고 있는 줄은 몰랐다. 무지의 소치이겠으나 공자, 맹자 정도나 모시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모시는 분들이 꽤 된다. 책 맨 뒤에 보면 나오는데 5성(聖)이 있고, 공문 10철, 송조 6현, 동국 18현 등 총 39분이 성균관 대성전에 모셔져 있다. 성리학이라고 하면 주희가 가장 중요할텐데 위패의 위계에서는 독보적이진 않다. 그저 송조 6현의 한 명.  

공자가 최고의 지위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겠는데 설마 이름도 감히 부르지 못할 대성지성 문선왕(大成至聖 文宣王)이라는 칭호로만 되어있을 줄이야! 그래서 주로(신라, 고려의 인물도 있다) 조선 시대의 18명의 성현은 동방의 예를 아는 국가의 그나마 견줄만한 인물로서, 공자를 비롯한 21명의 중국인의 변두리를 차지한다.  

조선 성리학은 사대주의에 빠진 집단이라는 의혹을 많이 받기도 했는데 성균관에 모신 위패의 배치와 구조를 봐도 그런 생각이 커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원리로 삼은 것은 그것이 궁극의 진리라서가 아니라, 단순히 중국이라는 대국의 것이라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가 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을 대신해 대륙의 패자로 부상한 한족 중심의 명이 있는 상황에서 인접한 소국인 신흥 국가 조선이 명의 이데올로기를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청대의 성리학은 민족주의와 유사한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정치적으로 성리학을 해석하자면 이 책에 나온 18명의 성현들의 삶은 평가가 애매해진다. 적어도 이 책에 서술된 바로 그분들은 성리학을 거의 교조적으로 믿고 평생 그렇게 살아간 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리학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다양했다. 중국보다 더 진전된 나름의 학문적 심화를 이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중국이 특히 청대에 성리학에 국한되지 않고 더 다양한 학문으로 관심을 넓혔던 측면이 간과되고 있다. 성리학에 경도된 조선 사회는 그만큼 활력을 잃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실학의 존재를 말하겠으나 조금 공부해본 바로 실학은 결코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의미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어려운 경전의 의미를 깨치는 천재들이 다수이다. 가끔 천재가 등장하는 건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서구식 학문이 아닌 지혜로 가득한 동양의 고전들을 어린 나이에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지 상당히 의문이다. 지금보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조숙했으리라 생각되기는 하지만 그들의 천재적 재능은 과장이 있지 않을까. 한편 그들은 재능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나가는 나이가 반드시 이른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여러 사정이 있겠는데 그들이 반드시 정치를 잘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지나치게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리라.  

부모가 아프면 자기 살을 베어 바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효성의 산물이라지만 이런 이야기는 소름을 돋게 한다. 10대를 갓 넘은 소년은 그 행동이 어떤 의학적 효능이 있는지 알지도 못 한 채 선례가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했을 것이 아닌가. 마음이야 깊이 이해하지만 약간의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신봉승님의 책은 처음 읽어봐서 무어라 말하기 힘들지만 책 뒷날개를 보니 이런 종류의 책을 여럿 쓰신 분이다. 이 책은 18현의 위업에 대한 찬양과 그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시대에 대한 원망 등 감정적인 부분이 많아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섯 개 이상의 오타가 눈에 띄었다. 특히 이름을 잘못 쓴 것들은 치명적이다. 고쳐지길 바란다.  

비판적인 내용들을 적어보았지만 이전까지 접하기 힘들었던 주요 성리학자들의 개인사, 그들이 겪었던 정치적 고난들을 인물별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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