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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루소와 흄. 이들 각각이 한국에서 어떤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정치학, 그중에서도 사상을 주로 연구하는 나도 이 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아마도 루소는 '사회계약론'과 '에밀'의 저자로 가장 유명할 것이다(그 저작들이 어떻게 이해되고 오해되는지는 차치하고). 흄은 어떨까. 그런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해서 유명한지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도 그렇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누군지 잘은 모르지만 어쨌거나 서양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이 둘의 진면모를 한꺼번에 알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어떨까. 몰라도 사는데 지장은 없겠으나 조금이라도 서양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아니 우리는 모두 서구 근대가 만들어낸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근원에 대해선 조금이라도 알 필요가 있다. 둘의 사상에 대한 내용은 책의 11, 21장에 잘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엄밀히 말해 루소와 흄의 사상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지는 않는다. 중심 내용은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어떻게 우연히 만나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파국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책 속에서도 나오지만 둘의 기본적인 입장은 너무나 달라 학문적으로 소통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단기간에 파탄나고 서로 상대방을 헐뜯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 계몽주의의 시대라는 18세기를 살았던 두 사람은 이성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같은 입장이었다. 큰 틀에서 루소가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했다는 면에서 흄은 이성을 중시한 쪽에더 가깝다. 그렇지만 흄의 입장은 "이성은 감정의 노예이고, 노예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처럼 이성, 인과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적이다. 그러나 흄은 이성의 토대를 무너뜨린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성으로 이해가능한 것처럼 돌아간다고 이해한다. 무신론적인 흄은 이성도 맹신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인간에게는 누구나 공통된 어떤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토대로 사회원리를 구축한다. 그것은 바로 공감인데 맹자의 측은지심과 유사해보인다.
루소는 그 자신이 어떤 명확한 체계적 학문 세계를 갖고 있다고 봐야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유로운 사람일까. 책 속에서 당대의 지식인들은 루소를 미치광이로 생각했다. 물론 루소의 책들이 당대에 많이 팔렸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는 뜻이지만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루소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았다.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등 계몽주의의 핵심 인사들과 루소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연속적인 사회의 진보를 믿고 주장하는 계몽주의의 입장에서 원시의 자연상태가 최선의 시대였다는 루소의 주장은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으리라. 루소는 실제 삶에 있어서도 고독을 추구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에게 환호해도 조용하고 사람이 적게 사는 곳에서 지내고 싶어했다.
이런 루소를 흄이 영국으로 데려가 편의를 돌봐주는 과정에서 둘은 서로를 오해했고,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관계가 되어버렸다. 대강의 과정을 보자면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잉글랜드에서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했던 흄이 프랑스에서는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좋은 대접을 받은 후 프랑스와 스위스 모두에서 쫓겨난 루소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는데, 이번에는 영국에서 루소를 찬양하고 흄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영국사'의 저자로 부와 명성을 쥔 후 공직에서도 활약한 흄이 도망자 루소 때문에 자신이 주목을 덜 받게 된 것에 빈정이 상했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일단 루소가 흄의 호의를 악의로 오해하게되자 흄은 루소를 맹비난하며 루소를 비방하는 작은 책까지 출간하기에 이른다. 사람좋다는 평판을 평생 유지한, 보수적 인물인 흄은 루소에 대해서는 자제력을 잃고 무너졌다. 흄의 지인들은 미치광이 루소 때문에 흄이 변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책의 재미있는 다른 부분들을 짚고 넘어가자. 우선 책의 제목은 왜 '루소의 개'인가. 책에서 루소가 기른 두 마리의 개가 등장한다. 우선 duke 즉 공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개가 있었다. 그 개의 이름은 나중에 튀르크로 바뀌었다는데 아마 Turk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개는 잠깐 등장한다. 그 다음 개는 Sultan인데 책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Turk, Sultan이라면 이슬람식인데 루소가 왜 그랬는지도 궁금하다). 왜 루소가 기른 개가 중요한가. 그것은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존재들간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루소의 가치관 때문이다. 루소는 서로 독립적이고 동등한 존재 사이에 우정이 가능하며, 개라고 해서 인간의 지배를 받는 하등 존재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즉 '루소의 개'는 실제 루소의 삶에서 하녀이자 나중에 정식 아내가 된 르바쇠르만큼이나 중요했고, 그렇기 때문에 Sultan은 단순한 루소의 개가 아니었다.
이 책을 보면 18세기 영국, 프랑스가 편지, 신문, 살롱의 시대였음을 아주 잘 느낄 수 있다. 책의 많은 내용은 루소와 흄이 지인들과 주고받은(서로 간의 편지도 물론 있다) 편지들과 신문 기사들로 채워져있다. 편지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고, 주변 사람들과 돌려읽으며 토론거리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 쓴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출판되기도 했다. 살롱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성을 갖춘 귀부인들 이야기, '고백'에도 나오지만 루소가 아이들을 버린 이야기, 루소가 아르메니아식 옷을 즐겨입었던 이야기 등 잘 몰랐던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프랑스에서 버림받았던 루소가 어떻게 곧바로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토대가 된 인물로 추앙받으며 팡테온에 이장되었는지 궁금하다. 책에 내용이 나오긴 하는데 길진 않아 관련 내용을 더 살펴봐야겠다. 흄에 대한 설명도 꽤 유익했다. 정치사상 저술이 없다는 이유로 로크나 홉스보다 흄이 덜 중요한 인물인 것은 아니리라. 조만간 흄의 저작들도 읽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