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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택광이라 하면 요즈음 주목받기 시작한 좌파적 성향의 평론가인데, 사실은 난 그에 대해서 이 이상 무엇이라 말을 할 수가 없다. 그가 쓴 글을 읽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내가 책읽기, 여러 가지 담론에 대한 주목에 소홀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내 주위 여기저기에서 이름만 무성할 뿐, 내가 관심을 두는 여러 분야와는 접점이 잘 생기지 않았다. 크게 보자면 정치적인 성향이 일치하는데다가 문화이론 내지는 철학으로 그와 내가 묶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결론부터 말해서) 마르크스에서 라캉으로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랑시에르에 주목하는 그의 길은 내가 가고자 하는 길과는 들어맞지 않았다.

  이 책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있다. 하나는 자신의 이론적 입장에 대한 설명 비슷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간의 사회현상들을 분석한 결과를 그려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갈래가 어떤 지점에서 연결되는지, 그것이 명확하지가 않다. 이론 부분에서는 문화비평이라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문화비평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간주되는 신칸트학파에 대한 개괄이 있다. 그리고 그들과는 관점을 공유하면서 또 다른, 가장 현대적인 감각을 갖추었다고 할만한 문화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벤야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다른 이야기들도 있지만 내 기억에 가장 깊게 남을만큼 반복해서 등장하고 길게 설명된 것은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다른 한 부분, 즉 그가 사회현상을 직접 분석한 부분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욕망’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상징이다. 그리고 그는 상징을 문화와 거의 동일한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널리 알려져있듯, 이 두 단어를 가장 많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이론가는 바로 라캉이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의 빈도수에 걸맞게, 그의 사회현상 분석 또한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는 라캉의 구도를 거의 그대로 끌어와서 이야기한다. 궁극적인 무엇, 사건의 원인, 사람들이 열망하는 무엇은 실재계로서 실재하지만 절대 인지할 수는 없는 ‘그 무언가’가 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를 찾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특정한 문화현상으로서 드러난다. 이것이 곧 상징이며, 어떤 때에는 상상계의 산물이기도 하다. 최근에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이론가인 랑시에르에 이르면,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종잡을 길이 없어 그저 그가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이상한 것은, 그가 문화비평과 사회현상 분석의 방법론이라고 그토록 강조하면서 적었던 ‘철학’의 내용들이 이상하리만치 실제 비평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질문을 붙잡고 늘어져야만 했다. 단적으로 말해, 비평의 방법이라는 이론에 대한 설명에선 신칸트학파와 벤야민을 이야기하고, 실제 비평할 때는 라캉과 랑시에르를 인용하고 있다. 일관성을 찾기 힘들다. 대체 왜, 이럴거면 이론 파트에서도 자신이 지금까지 연구한 학자들 – 라캉과 랑시에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나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조금은, 뜬금없는 무리수 같은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신칸트학파를 칸트와 나눌 수 있는 이유는 인식론적인 입장의 차이 때문이다. 신칸트학파 사람들은, 칸트의 범주 개념을 무한히 펼쳐놓는다. 이는 칸트가 범주를 양, 질, 관계, 양상이라는 유한한 네 가지 분류체계(와 12개념으)로 제한한 것과는 대비된다. 범주란 인식의 토대를 만들어주는 틀이다. 칸트는 유한한 범주로 보편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려 했지만, 신칸트학파들은 이런 범주를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문화는 바로 한 사회가 이런 인식의 틀, 즉 범주들을 역사적으로 축적시킨 결과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자라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인식의 매개로 작용한다. 이것이 신칸트학파가 문화연구, 즉 사회현상에 대한 연구를 중요하게 여기고 이에 대한 학적인 연구를 최초로 시작한 까닭이다.

  이런 (내가 알고 있는 한의) 신칸트학파의 개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강조하는 무한한 범주와 인식의 구분이 라캉의 상징(상상)/실재계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이다. 범주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산물이고, 그것은 인식을 결정짓는다. 또한 칸트가 정의한 범주의 정의에 따라서, 사실 인간은 범주 없이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범주 자체가 인식을 결정짓는다. 라캉의 상징 또한 실재에 접근하는 매개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가 대타자라는 말에서 강조하듯이 어떤 의미에서도 실재(계) 그 자체에 인간은 접근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로지 상징(계)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신칸트학파의 범주와 라캉의 상징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신칸트학파에 대한 신나는 설명은 어쩌면 라캉의 이론적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간접적 방법일 수도 있다.

  내가 나름대로 조악하게 맞춰본 이 입장이 맞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내겐 어떻게 해서든 이 공백을 메워야만 했고, 그 까닭은 이론 부분을 벗어나자마자 뜬금없이 (내 추측에 의하면) 라캉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친절하게 부가되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회현상 분석에 들어가고 나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이 ‘중산층의 욕망’이 반영된 ‘쾌락의 평등주의’에 입각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가 아마도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가장 기본적인 틀인 것 같다. 쾌락의 평등주의는 주로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의미가 담긴 현상을 분석할 때 유용하게 쓰이는 것 같고, 중산층의 욕망은 모든 사회현상이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문화적 저변으로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그의 조감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적절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내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입장은 못되는 것 같다. 실제로 그가 쓴 꼭지들 가운데서는 흥미로운 독법들도 몇몇 있었기에, 그저 단순한 이론적 이념의 소산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종합해보면, 그의 문화비평은 라캉(그리고 랑시에르)가 세운 이론을 방법으로 사용해, 중산층의 욕망이 중심이 되는 쾌락의 평등주의를 보여주려고 하는 지속적인 노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글을 주욱 읽어내리다 보면,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다름 아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숨은 구조에 대해 관찰해보기로 하자.’ 이다. 그 구조란 다름아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이 두 가지, 바로 그것이다. 대개 모든 글의 구조가 이런 식으로 짜여있다.

  좋은 말로는 확고한 그의 시선 아래 이 사회의 현상들을 여기저기에 배치하여 자기 입장의 설득력을 높이려고 하는 포부로 읽힌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그가 개념화한 ‘문화비평’이라는 장르 자체가 지닌 태생적 한계일 수도 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문화비평의 목적은 ‘사회적인 현상을 통해 사람들을 그렇게 움직이게끔 만드는 구조를 포착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문화비평 영역을 처음으로 개척한 신칸트학파, 베버, 짐멜, 벤야민 등의 인물들은 다양한 사회현상에서 ‘모더니티’라는 단 하나의 주제를 읽어내고 여기에 천착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가 무의식 중에(혹은 드러내놓고) 이런 학자들의 태도를 따라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나, 다양한 사회현상에 대한 분석, ‘지금 여기에 대한 비평’이라는 광고문구를 달아놓았지만 사실 그가 내리는 결론은 거의 모든 글에서 똑같다. 그래서, 그가 지어놓은 틀의 적절함보다는 오히려 반복의 지겨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가 제기한 분석의 과정이나 결과가 아니가 그가 선정한 여러 가지 사건 자체들일 것이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 그리고 실제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잊혀진 사건들, 이 책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복각이다. 시류에 대한 비평을 실은 책들이 대개 이런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지만, 이 책은 조금 남다른 데가 있다. 그의 관심분야가 넓어서인지, 아니면 그만큼 한국에서 많은 사건들이 있어서인지, 그는 거의 모든 사건과 사고들에 대해서 분석의 틀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시대순, 의미순으로 차분하게 되짚어보는 데 더 큰 도움을 준 책이었다.

덧댐1. 딱 하나, 정말 인상깊게 남은 꼭지가 하나 있다. 예전에 개그콘서트에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코너인 ‘마빡이’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가. 그는 이것을 무의미한 노동이라는 개념과 연결지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만큼은 책을 덮고 난 다음에도 머릿속에 웃음과 감동으로 내내 남았다. 실제 개그콘서트의 마빡이보다는, 오히려 그가 쓴 마빡이에 대한 분석에 난 더 크고 즐겁게 웃었다.

덧댐2. 334페이지 각주 번호가 어긋났고, 357페이지 개그콘'스'트라고 인쇄된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마빡이 부분을 참 재미있게 보고있는데 콘'스'트라고 적혀있어서 김이 좀 샜네요. 다음 쇄에서는 아마 고쳐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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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날이 가면 갈수록 추천도서 선정이 어려워집니다... 관심분야도 점점 넓어지는데다가, 새로나온 책 모두를 볼 수 있는 기능을 알게 되면서(...) 수많은 책의 제목과 소개를 다 살펴본 뒤에 이것저것 골라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요. 하루를 꼬박 투자해서 선정하는 것인데, 가장 마지막에 고른 이 다섯 개는 어느 정도 직감에 기대는 일이 많습니다. 여튼 이번 달에도 다섯 개를 골라보았습니다. 

1.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저자만 보고 무작정 골라놓고 마지막까지 빼지 않은 책(...)입니다. 보수주의적 관점이 다분한 학자이긴 하지만 그가 만든 다른 다큐멘터리인 <Ascent of Money>를 정말 인상깊게 보았기 때문이죠. 그의 다른 책도 어서 보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 책 역시 그가 제작에 참여한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제가 보았던 그 다큐멘터리같은 포스를 책에서도 내뿜어주길 기대해봅니다. 그의 전공은 경제사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분야이지만, 서양의 경제사란 자본주의 이후에 문명사 그 자체이기도 할만큼 다른 많은 분야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지요. 세계사를 다시 정리해볼만한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 법의 재발견 

  제게는 저자에 대한 흥미는 둘째치고, 가정을 법으로 분석해본다는 책의 내용소개 자체가 끌립니다. 가장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가정의 영역에 가장 공적인 표상인 법이 개입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가정이 매우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회학이나 철학에서 다루는 이론적인 분석과는 또 다른, 다시 말하면 아주 실용적인 접근을 이 책에서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되네요. 

 

 

3. 로드 

  부제에서 볼 수 있는 '길의 사회학'이라는 문구가 제 마음을 잡아당깁니다. 길은 가장 중요한 사회간접자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 건축적 의미 이외에도 사회학적으로는 더 다양한 담론화가 가능하겠지요. 여섯 가지 테마로 나누어서 설명했다고 하니 그 내용이 아주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항상 길을 밟으면서 어딘가로 떠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길이 다르게 느껴질 것만 같아서요. 

 

 

4. 자기계발의 덫 

  자기계발, 이 책의 원제의 표현에 따르면 'self-help' - 일종의 자기위안처럼 보이는 이 트렌드가 어떻게 사회를 지배하는지를 분석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현재 한국의 문제이긴 하지만, 단지 한국사회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이 책은 미국사회에서 자기계발이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설명하였으니까요.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몇몇 자기계발서들도 그 유행이 미국발이었던 적이 많은 만큼, 이 두 현상은 분명히 유사할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분석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도 있겠지요. 

 

5. 그렇다면, 과학이란 무엇인가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검토해보니, 코끼리를 보면서 장님들이 서로 싸우는 표지가 아주 인상적이네요. 이제는 지나간 이슈가 되어버린 황우석 사태를 바라보면서, 인문학자들이 생각해야하는 질문은 바로 '과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 과학사회학의 상대주의에 경도되거나, 혹은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 정도의 소개에 그치는 자연과학 개론서에 그치게 마련이죠. 이 책은 그런 단점들에서 조금 벗어나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되는데, 내용은 과학철학의 쟁점들을 다루면서 저자는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최근의 성과들이 충분히 반영된, 과학에 대한 적절한 저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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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1-08-0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계발의 덫> 저도 좀 살펴보았는데요, 이 책 역시또다른 자기계발서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더라구요.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책은 자기계발서이긴 하지만 말예요.

박효진 2011-08-09 16:29   좋아요 0 | URL
목차와 출판사 책 소개만 보고 선정한 것이라...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선정되면 흥미롭게 읽어볼 수는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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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의 정신세계
뤼시앙 레비브륄 지음, 김종우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8월
38,000원 → 38,000원(0%할인) / 마일리지 1,14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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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신- 신의 부재는 입증되지 않는다
앤터니 플루 지음, 홍종락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8월
13,800원 → 12,420원(10%할인) / 마일리지 6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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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농업위기와 농업경기- 유럽의 농업과 식량공급의 역사
빌헬름 아벨 지음, 김유경 옮김 / 한길사 / 2011년 8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11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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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전환
루이스 멈퍼드 지음, 박홍규 옮김 / 텍스트 / 2011년 8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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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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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듯, 데리다는 이 시대에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 이를테면 뜨거운 감자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를 현재 철학사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대가로 칭송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적절한 단어들의 무의미한 조합으로 정말 자신의 철학이 추구한 목표라는 해체를 몸소 보여주었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그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는 아마도 두 극단적인 평가 가운데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 모습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단편적인 소개나 다른 비평의 도구나 이름의 차용으로서만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 데리다에 대해 이만한 연구서가 소개되는 것은 참 기쁜 일이다. 신간평가단으로서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나를 제외한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읽고 싶은 책으로 이 『데리다 평전』 을 골라주어, 꽤 무게와 값이 나가는 이 책을 신간평가단 명목으로 받아서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론으로서만 알려진 데리다에 대해, 이 책은 원제 ‘Jacques Derrida : A Biography’ 가 말해주듯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간간히 끼어있어 (데리다를 다룬 다른 책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조금이나마) 편하다. 당연하게도 그도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면서 철학을 시작한 것이 아니므로, 분명히 그의 철학에 영향을 미쳤을 성장의 과정을 엿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래서 데리다를 다룬 책 치고는 매우 쉽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서 책장 위를 한 발 한 발 밟아나갔다. 

  하지만 이런 일종의 ‘착각’은 몇 페이지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문학과 철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고 논문을 쓰기 시작한 이후의 부분은, 전기라는 제목이 무색하리만치 그의 저작에 대한 압축·요약에 숨이 가쁘다. 본격적으로 철학적 저작이 등장한 이후 그의 삶은, (이 책만 보았을 때는) 고민과 저술, 그리고 정말 피곤하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고 여러 운동들에 참여한 내용만이 간간히 언급될 뿐이다. 대개 전기라 함은 그 책에서 다루는 사람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주로 다루게되며, 따라서 주변인물의 인터뷰나 뒷이야기 등이 더욱 흥미진진하게 다가오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전기라기보다는 데리다 입문서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정도로 학술적 내용에 비중이 치우쳐져 있다. 따라서 삶의 궤적을 추적하며 사상의 편린을 엿보고자 하는 의도로 이 책을 집어드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사실 ‘평전’이란 이름에서 기대하는 내용은, 전기적 사실들이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그의 저서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책에 매우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제목을 평전이라고 하기보다는 그야말로 ‘데리다’ 라는 이름만 붙였다면 어땠을까. 그런 제목으로는 이미 여러 책이 나왔기 때문에 메리트가 없는 것일까.


관계

  이 책의 표지에는, ‘데리다는 탁월한 문화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오랜 전통의 연속이다.’ 라는 말이 써있는데, 매우 인상적이다. 사실 데리다의 인상은, 철학사의 가장 마지막 언저리에서 모든 이론과 학설에 대한 해체와 파괴를 기획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해체를 위해서 꼭 필요한 작업은 현재까지 세워진 여러 체계들에 대해 그 정합성을 아주 면밀하게 검토해보는 일이다. 데리다의 해체는, 사실 이런 분석의 다른 이름이다. 이 방법에 대해서, 이 책에서는 ‘그는 (분석철학의 논리적 연결 검토와는 달리) 어떤 이론에서 제기하는 세계를 그에 따라 아주 크게 그려본 뒤에, 그것이 정합적이지 않고 언제나 공백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데리다의 이런 철학사적 위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이 책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말이지만 아마도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겹쳐있다. 하나는 데리다가 연구하고 분석했던 여러 입장들과의 관계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대표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후설과 하이데거, 그리고 니체를 언급하고 있다. 이 관계는 데리다가 자신의 기획을 펼치는 데 기초가 되며 따라서 그를 규정하는 어떤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또 다른 대적자이기도 했던 구조주의가 세계에 대한 과학의 대상, 세계의 본질로서 제시하는 바로 그 관계이다. 그의 대적은 위에 말한 선배 철학자들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온 구조주의 학자들이기도 했다. 여기서의 관계는, 그가 해체하고 싶었던 종류의 그런 관계이다.

  이 두 관계는 서로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며 그의 작업을 구성해나간다. 그의 해체란 사실 후설이 추구하고자 했던 철학의 목표, 바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의식 자체로부터 길어낼 수 있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의 기나긴 여정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단순히 해체라는 파괴적 어감으로만 길어낼 수 없는 그의 철학‘함’은, 후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것을 어떤 지점에서,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부동의 원동자를 가정한 것처럼 후설은 현상학이라는 체계에서 완결의 지점을 상정했다면 데리다는 같은 탐구의 과정을 밟아가면서 그 상정이 없었을 뿐인 것 아닐까? 적어도 이 책은 데리다의 해체에 대해 이런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듯 하며, 설득력있는 설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니체와 하이데거는 미완의 대가들이다. 그들이 미완인 이유는, 데리다에게 와서야 완결되는 해체의 프로젝트를 아직 다 꽃이 피지 않은 형태로 철학의 역사에서 제시했기 때문이다. 니체의 입장과 해체의 연걸고리는, 사실 다른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매우 직관적이기까지 하다. 데리다가 ‘유럽적인 것’이라고 통칭하는 여러 속성들 – 이성, 남자(남근)적, 비혁명적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것들은 역사적으로 완결된 것으로 보여졌다. 그것에 대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분석철학과는 달리, 니체는 시적인 강론을 통해 그것이 내적 공백으로 인해 무너질 것임을 예언자적으로 선포했다. 물론 이것은 해석에 따라 그 공백의 위치가 달라질 수 있기에, (데리다조차도 여기에 해당할) 끊임없는 오독과 왜곡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유럽적인 것의 파괴라는 주제로 전유한 데리다 또한 어느 정도의 오독일지도 모른다.

  이 유럽적인 것과 관련해서, 하이데거는 후설의 적통이면서 일종의 이단이다. 인식론에서 출발해 인식의 종착점을 존재의 근원으로 삼은 후설과는 달리, 하이데거는 물구나무선 현상학을 존재론적으로 전회시킨다. 인식(론)의 근거는 결국 존재의, 존재자의 문제일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존재의 현상, 존재자의 현상을 규명하는 것이 현상학의 제1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 현상학의 첫걸음이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 존재는 결국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통찰에서도 드러나는데, 그가 끝내는 기초로서의 존재론을 정초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존재론이 은근하게 감추어진 독일 민족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이데거가 부활시키고 싶었던 ‘위대한 본질 연구의 전통’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이것이 더해져서, 그는 그리스-로마적 철학, 즉 유럽적인 것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타자

  데리다를 어느 정도 규정지을 수 있는 학문적 위치라는 의미에서의 관계와는 달리, 그가 명시적으로(또는 암묵적으로) 부정하고자 했던 구조주의 학풍에서 쓰는 ‘관계’라는 말의 의미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들에게 타자란 중첩적 관계의 총체이다. 소쉬르에게는 각 기호들이 차이에 의해서 맺는 관계들의 총체이며, 푸코에게는 다양한 사회적 권력 관계들의 총체이다. 이 책에 따르면 데리다와 평생동안 인연이 있었다는 알튀세르는, (그가 분석한 마르크스의 교설에 따라) 최종심급의 수준에서 구조화된 경제적 관계의 총합으로서 타자를 규정한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를 논할 때는 반드시 그 관계의 목표이자 대상으로서 타자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데리다가 타자에 대해 논할 때는 이들의 연구성과를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 성과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데리다의 존재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널리 알려진 ‘차연’이다. 차연의 개념은 구조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반구조주의적이다. 구조주의자들이 부정하였으며 부정하고 싶었던 전통은, 구체적 존재자로서의 타자 그리고 그 타자의 존재(성)을 규명해내는 것을 타자 자체가 발현하는 여러 속성들에 대한 명석판명한 인식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던 순진함이다. 타자는 관계들의 총합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알튀세르의 개념을 빌리자면, 철학은, 그것이 세계를 올바로 통찰하는 철학이라면 더 이상 철학일 수 없으며, 과학 – 구조에 대한 과학, 관계에 대한 과학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구조의 과학은 세계로부터 시간을 축출해낸다. 시간이 빠진 세계는 변화하지 않고 그 모습을 영원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태적으로 구조분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데리다가 구조주의로부터 얻어낸 결론은 바로 이 지점이다 - 시간의 배제는, 관념으로 세계를 붙잡으려는 고대 그리스 특히 플라톤의 부활이다. 세계는 곧 주체에게 타자인 모든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명백하게도 시간이 있거나 변화가 있다(사실 이 둘은 동의어이다.) 존재자 자체의 변화만큼이나 구조의 변화도 너무나 뚜렷하다. 따라서 존재자 자체로부터 인식을 구하던 전통만큼이나, 구조주의의 과학도 그 실패가 필연적이다. 존재자에 의해서든 구조에 의해서든 그 존재자 자체는 명확하게 밝혀질 수 없다는, 데리다가 내세운 대표적인 학술적 개념인 ‘차연’은 여기에서 탄생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데리다에 따르면) 이미 하이데거에 의해 어느 정도는 예언적으로 선포되었다.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한 내용이란, 타자란 관계든 의식이든 1차원적이고 평면적인 속성에 의지한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의 목소리로 타자에게 웅변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이성이나 합리 같은 분석의 방식이 아니라, 시인이 자신의 작품을 공표하는 것과 같이 함축적이고 은유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데리다의 수사법에 따라, 타자에게 닿을 수도, 닿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나 잘못 배달될 가능성이 있는 우편의 은유는 이같은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닿는 사건에 더 힘을 주어 말하고 있다면, 데리다는 필연이 아니가 우연에 달려있고 핵심은 그것이 ‘우연’이라는 점에 무게를 싣는다.

  이와 같은 서술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에서 누차 강조하는 것은 데리다가 그 스스로가 고유한 철학의 구축자이자 동시에 ‘충분히 급진화된’ 하이데거 또는 후설이라는 점이다. 그는 앞에서 살펴보았둣 구조주의에 의지하면서 그것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고 있다. 이런 결론은 그가 하이데거에서 종결되는 타자에 대한 의식철학의 전통에 충분히 기대고 있다는 반증이지만, 동시에 그 전통으로부터도 이탈한다.


글쓰기

  규명할 수 없는 타자라는 존재론적 결론은 수사학으로 넘어오면서 확정될 수 없는 텍스트의 의미라는 것으로 그 위상이 변화한다. 어떤 기호는 그것이 담지하는 의미를 그 어떤 순간에도 불변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기호를 읽으며 떠올리는 그 의미는, 이미 내가 읽은 그 시간의 의미이며 따라 그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리고 전혀 현재적이지 않은 ‘과거’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호의 해석에 있어서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실수를 범한다. 즉 그 ‘과거’의 기호가 과거로서 종결되지 않고 현재에도 동일한 의미를 계속 지니고 있다고 간주하는 습관이다.

  하지만 의미가 현전하지 않았다고 그것이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존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미의 현전 또한 우연적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고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끝없는 표지판으로서 의미를 향해 나아가야 할 길을 지속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것을 데리다는 ‘말소 하에 두기’, 즉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간주되는 기호 위에 X 표시를 함으로써 드러낸다. 무의미하지 않기에 종이 위에서 말끔히 지워서 드러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의미를 현전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것이 문학이든 철학이든 관계없이 이런 의미론적 상태에 대한 지속적 실천이다. 다시 말하면, 현전하는 의미를 향한 무한한 접근의 실천이다. 의미론과 존재론을 넘나들면, 글쓰기는 차연의 길을 따라 현전하는 존재를 향해 무한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에게도 그들에게 철학을 하는 고유한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데리다는 글쓰기라는 아주 평범하지만 복잡한 방법을 철학의 ‘방법’으로서 제시한다.

  그가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글쓰기라는 테마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평생동안 철학을 하는 동시에 문학에 대한 주제 또한 지속적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철학에 대한 글 이외에도, 문학과 그 비평에 대한 글 역시 지속적으로 생산해내었다. 그가 후설을 자신의 첫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도, 문학 – 넓은 의미에서 기호에 드러나는 의식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현상학을 택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미국에서 그가 주로 문학비평의 방법론으로서 인용되었다는 것이 그 반증이 아닐까. 이것은 이 책의 목차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철학자라기보다는 문학평론가에 가까운 폴 드 만과 친교를 유지했고, 그에 의해 미국에 소개된(?) 데리다는 철학자라기보다는 문학평론가였다. 이것은 (아마도) 현재의 경향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면이 어느 정도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래서 데리다의 이름을 철학서적보다는 문학서적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이 강조하는 사실 한 가지는, 이 주제 또한 하이데거를 비켜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후기의 주제는 다름아닌 시학이다. 철학의 방법이 데리다에게 있어서 글쓰기라면, 그에 비견될만한 하이데거의 방법은 시쓰기, 즉 시학인 것이다. 시는 영원히 드러날 수 없는 것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알레고리라는 특성 때문에 모든 주체들에게서 다르게 현전한다. 타자는 그 알레고리를 매개로 드러나는 바로 그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주체들이 대면하는 각각의 타자들의 총합 또는 그 이상이다. 일면 데리다적인 이 이야기는, 사실은 데리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이데거의 이야기이다.

  그만큼 이 책에서는 전반적으로 데리다와 하이데거와의 학술적 관계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 물론 20세기 전체를 뒤흔들었던 철학자이니만큼 그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몇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특히 강조되는 것은 데리다가 어떤 면에서 ‘하이데거의 적통’이라는 사실이다. 확실히 그의 연구는 데카르트-베르그송이라는 프랑스적 전통에서도 벗어나있고, 당시의 주류라고 할 레비나스에게서도 조금 비켜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그 스스로가 거장이면서 동시에 데리다를 예견한, ‘신화-문학적 선구자’이다.


『데리다 평전』

  이 책을 읽었으면서도, 데리다는 여전히 모호한 존재로 내게 남아있다. 그 스스로가 의미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결과일지도 모르고, 또는 이 책이 데리다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책에는 유령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현전하지 않았지만 현전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러나 막상 그 실체를 파악하려고 한들 결코 파악되지 않을 존재자들의 본성에 관한 은유로서 쓰이는 듯하다. 데리다는 그 스스로가 유령이면서, 유령을 좇아 자신의 철학을 펼쳤지만 그것은 유령을 유령이라고 규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으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을까?

  당대의 분위기와 데리다의 저술을 천천히 따라서 밟아나간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소 아쉬운 것은, 어느 정도의 편향이나 내용의 누락이 보인다는 것이다. 데리다에 대한 평전이니 어느 정도 그런 면을 감안하기는 해야하겠지만, 대립점을 명확히 소개함으로써 데리다의 입장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낼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구조주의와의 화합과 갈등 같은 국면이라든가, 후기의 대담집인 『테러 시대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하버마스부분을 건너뛴 것 같은 부분이 그렇다.

  헤겔 이후 대륙의 철학이 그렇듯 모순어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질적 변화와 다층적 세계를 지지하는 이론의 구조는 분석철학의 방법론에서는 수용되기가 약간 힘들고,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서로의 언어로 번역되기는 힘든 것인지, 이 책은 아예 그것에 대해 포기하고 있으며 (데리다 스스로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분석철학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군데군데에서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단순히 이렇게 치부할 수 있는 것만도 아닌데, 하는 불만 또한 드문드문 들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데리다는, 특히나 여러 가지 의미에서 주류의 철학 – 분석철학 – 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는 내겐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대륙의 철학의 어법에 익숙하다면, 이 책은 데리다의 일생과 그 저서에 대한 좋은 압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그리고 삶의 이야기를 주로 보고 싶었던 사람에게는 매우 힘든 벽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만큼 데리다의 저서가 어렵다는 것, 어려운 책을 압축해놓으니 그것이 결코 쉬울 리는 없으며 오히려 앞뒤의 맥락이 빠져있어 더 어려워진다는 것, 그리고 작업의 양이 워낙에 많으니 그것을 머리에 다 새겨넣기가 어렵다는 것이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난점이다. 내게는 공부를 하도록 이끄는 자극이 되었지만, 다른 이에겐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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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쿠리 2011-07-22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알라딘 메인 신간 안내에 떠서 리뷰를 보는데 또 선배님의 글이. 아 저는 05 ㅈㅇㅈ이에요.

박효진 2011-07-23 20:46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구나... 알라딘이 지금 나한테 공부시키는 중... 매달 마감 다가올 때마다 죽겠다 ㅠ.ㅠ
 
[불안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의 잘못

  이번 달에는 내가 선정한 관심도서 가운데 두 권이나 선정이 되어서 무척이나 뿌듯했다. 특히 전공분야에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에 골라보았던 『데리다 평전』 과는 달리, 내게는 새롭지만 관심이 있는 분야인 경제나 국제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이 곁들여져 있을 것 같은 이 책은 내 눈길을 더 끌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 달의 신간평가단 관심도서 두 권 가운데 이 책을 먼저 집어들었다.

  제목과 책 소개에서 짐작할 수 있었던 이 책의 내용은,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심리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지, 그리고 그런 경향은 어떻게 확산이 되었으며 그런 시대에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등등의 내용들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좌파적 성향을 가진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이 책의 제목에서 이야기하는 불안은 사람들의 불안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환호하고 있었고, 이 책의 저자는 책의 앞쪽 절반을 ‘세계는 좋아지고 있(었)다’는 내용을 설명하는 데 할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불안한가? 이쯤에서 우리는 이 책의 영어판 제목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Zero Sum Future : American Power in an Age of Anxiety. 이 긴 영어가 이 책의 원래 제목, 『제로 섬 미래 : 불안의 시대 속 미국의 힘』 이다. 이왕 영어 제목을 본 김에 책 표지를 좀 더 깐깐히 훑어보기로 했다. 책의 저자는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타임즈』 의 저널리스트이다. 이쯤되면 점점 (내 입장에서의) 혐의가 짙어진다. 다름이 아니라, 이 두 잡지는 경제적인 정책에서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대표적인 경제잡지이다. 또 책의 뒷면에 있는 하버드대학에서 경제사를 가르치는 니알 퍼거슨의 추천사. 이 사람은 공화당 성향의 네오콘이라고 부르기는 무엇하지만, 시장경제의 힘을 신뢰하며 그 힘을 상징하는 미국의 제국적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한 지식인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후반부가 되면 이 책이 강조하는 ‘불안’이란 누구의 불안인지가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가 말하는 불안의 시대란, 국제사회의 불안인 동시에 미국의 불안이다. 더 과장해서 저자의 입장을 이야기하자면, 미국의 불안이 곧 국제사회의 불안이다. 핵심은 간단하다 - 국제질서를 주도했던 미국이 더 이상 그 역할을 자임하지 않으려 하고, 또한 그 역할을 떠맡는데 힘이 부치자 그 역할을 대신하려고 하는 여러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국제적 춘추전국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미국의 역할 약화가 곧 국제사회의 불안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불안한가

  ‘아차, 내가 헛다리를 짚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선 이 ‘불안’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이 책을 뜯어보자.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내용은, 책 저자인 래치먼이 긴 시간동안 기자로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분석한 내용,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까지 종합하여 정리한 197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국제정세와 그에 대응하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다. 이들을 종합했을 때, ‘불안’은 현재 미국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압축적인 단어이다.

  이것이 왜 불안인지는 이 이전의 시대와 대비시켜서 보아야 한다. 래치먼은 불안 이전의 시대를 ‘낙관’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이 낙관의 시대의 경향은 자유민주주의, 즉 시장경제와 인민주권적 민주주의가 결합한 특정한 정치적 형태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냉전시대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이념적 성채로서 미국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소비에트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가 무너진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전세계로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국가가 미국이었다. 실제로 이 이념의 확산을 위하여 걸프 전쟁에 개입하는 등 무력정책도 여러 차례 감행하였으며, 이런 활동에서 얻어낸 긍정적 결과들을 토대로 미국은 세계를 거시적으로 움직이는 국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에게 불안이란 미국이 이런 지위를 잃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미국이 지위를 잃어가는 일국패권주의의 후퇴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염려하는 바는 미국이 상징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쇠퇴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경제와 정치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이론적 토대이다. 이것의 쇠퇴는 곧 인간의 자유의 쇠퇴와 직결되며, 이는 곧 인간의 행복의 쇠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미국의 쇠퇴에 국한되는 것인지 혹은 진짜 인간의 행복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이 글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매우 모호한 형태로 나타난다.(이렇게 이 책이 읽히는 것을 보면, 나도 래치먼이 이야기하는 반동적 ‘반세계화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가보다.)

  자유민주주의의 후퇴는 독재의 부흥과도 연결된다. 세계를 미국과 양분하려는 야심을 지니고 자신만만하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은, 래치먼의 분류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독재 국가이다. 이것은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미국이 예전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들조차 반미국적인 국민들이 성향 등등을 이유로 독재 국가들에 힘을 실어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념적 이분법이 적용되는 시기, 즉 냉전의 시대와는 다른 불안의 시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이런 국제정세가 형성되기 이전, 그러니까 저자가 ‘낙관’의 시대라고 부르던 시기에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세계가 경제적인 통합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경제의 통합은 좁게는 자유로운 무역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인류가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운명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전보다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불안의 시대의 국제정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더욱 힘든 구조로 재편되어가고 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앞으로 미국이(또는 국제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며,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매 순간이 바로 ‘불안’의 순간이 될 것이라는 게 래치먼의 경고이다.

  이러한 분석에, 미국인이 아닌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여기에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포함된다. 물론 래치먼의 분석은 한국에도 어느 정도 적용이 된다. 표면적인데다가 군부정권의 연장이었다고 하더라도 1987년 한국 국민들은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았다. 또한 1992년 우루과이 라운드를 시작으로 세계시장에 편입하였고, 모두가 즐겁게 기억하는 1990년대 초반의 황금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것은 1998년으로 끝난다. 그 이후의 한국사회가 자유민주주의의 확장이었는가 생각한다면,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아마 저자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대체적인 경향’이다 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말한 이런 경향에는 빈부격차의 확대도 포함되어 있고, 그 또한 이를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말한 ‘낙관의 시대’ 동안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어두운 특징이다. 미국과 유럽 또한 예외일 수 없고, 미국의 추진하는 세계화 - 즉 자유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은 거의 모든 국가들은 빈부격차의 확대라는 수순을 밟아나갔다. 래치먼은 전지구적인 정치적 통합, 그리고 시장의 통합이 희망적인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이 시기를 ‘낙관’으로 정의하지만, 나는 반대로 이 필연적인 빈부격차가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충격을 들어 이 시기를 ‘불안’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세계를 진짜로 지배하는 것은 신념

  이상의 논의에서 알 수 있는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그가 경제와 정치, 외교의 이야기의 저변에 깔려있는 심리상태를 드러내어 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널리스트로서의 태도일 수도 있고, 동시에 그가 실제로 이 세계를 여러 사람들의 신념과 심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 - 혹은 그 기반이 되는 아이디어를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빌려온 듯 하다. 그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후쿠야마의 생각에 따르면 따르면, 이 세계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모습을 규정하기 위해 여러 이념들이 등장해 각축을 벌였지만 최종적인 승리를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주어졌다. 그 이유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개인의 의지를 가장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 정치-경제 체제이기 때문이다. 나치와 파시즘의 붕괴, 소비에트 연합의 해체는 자유민주주의의 힘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들이다.

  이 생각의 핵심은, 이것이 실제 ‘정말 그렇더라.’ 라는 사실판단이 아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준 일종의 담론이라는 것이다. 래치먼의 말대로, 그는 정치학이나 경제학보다는 헤겔의 철학을 기반으로 ‘역사의 종말’이라는 담론을 완성시켰다. 그것은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담론이 책과 사상의 형태를 갖추고 나온 뒤에 많은 정치가들의 지향점을 지배했기 때문에 실제로 효력을 발휘했다. 미국에 한정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국은 당시에 정말로 역사의 종말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이념적 힘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팽배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그러했고, 미국을 바라보는 다른 국가들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이 담론이 힘을 발휘한 세계가 바로 ‘낙관’의 시대이다. 조금만 면밀히 이 책을 들여다보면,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경제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거나 전쟁에서의 구체적인 손익계산서가 아니라 그 상황을 이끌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또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정치적인 지도자, 그리고 그 밖에 어떤 시대를 이끌어갔던 미국 외의 몇몇 국가들의 정치적 지도자나 관료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일관된 생각들은 세계를 실제로 그런 형태로 구획해나갔다. 다양한 인종과 국가가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강조했듯이 낙관의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모든 국가의 자유민주주의화라는 말로 표현되는 세계화이다.

  불안의 시대를 움직이는 주체도 역시 어떤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힘이 아닌, 일종의 신념들이다. 물론 그러한 신념이 어느 정도는 물질적인 기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념의 진폭은 경제의 진폭보다 크다. 경제위기와 실패에 가까운 경과를 보여주는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그 밖에 미국 외적인 많은 징후들은 미국의 정치인과 미국 국민들에게 미국이 더 이상 혼자서 지구를 짊어진 거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미국 국민들은 점점 그 역할을 포기하라고 정부에 종용하고 있다. 반대로 미국 외의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던 ‘반미국-반제국’이라는 말을 경제위기 이후에는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런 자신감은 곧바로 국제정치 무대에서 반영되었고, 경제체제에 대한 논의와 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높아진 신념의 진폭이 경제의 진폭의 크기를 더욱 배가시키는 셈이다.

래치먼의 관점에 대한 의문

  나는 그가 이야기하는 ‘반세계화주의자’로서 그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정말로 자유민주주의는 승리를 구가했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전도사로서 실제로 세계의 부를 늘리는 데 기여하였는가? 설령 정말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미국의 역할로서만 파악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이런 질문들에 나는 반쯤은 회의적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아주 매력적인 이념이자 동시에 정치, 경제적인 체제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민주주의는 이중적이다. 이 이중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다름아닌 미국의 금융위기 때였다. 저자도 인정하듯, 여러 구조조정과 흑자정부 같은 것들을 강요하던 IMF와 세계은행 같은 기관들은 미국에게만은 예외를 허가하였다. 세계경제에 미칠 파급력이 굉장하다는 이유였다. 이 행동은 미국 스스로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포기하며, 지금까지 넓혀왔던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정당성을 상실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사실 이 대목은, 비슷한 금융위기로 가장 혹독한 시절을 견뎌낸 한국의 국민인 나로서는 억울하기까지 한 대목이다.

  저자는 낙관의 시대에 미국의 중흥을 이끌었던 핵심적인 요소로 기술의 발전을 미국이 주도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 기술은 한 편으로는 금융공학의 발전이고, 나머지 한 편으로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술의 발전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다시 말하면, 이것의 실체는 실물생산 즉 제조업 없는 성장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가치가 주식시장을 통해서만 거래되고 불어났는데, 이것은 저자가 파악한대로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어떤 물리적인 힘을 가진 존재나 계획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신념이었다는 것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입증한다. 왜냐하면, 숫자의 장난은 심리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물건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닷컴 버블의 붕괴,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08년 금융위기로 또 다시 증명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그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낙관’의 시대 전체가 사실은 불안의 시대의 연장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 같은 것들이다.

  실물생산 없는 성장의 실물을 메꿔준 것은 결국 미국이 각국을 상대로 지고 있는 막대한 부채이다. 미국의 투자자, 미국의 거대 금융기업의 흑자는 미국 국가재정의 흑자로 연결되지는 못했으며, 미국 재정의 유지를 위해서 그리고 금융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미국 이외의 국가들은 정부 재정에서 흑자를 기록해 미국의 국채를 사들였으며 주주인 대형펀드에게 배당금을 쥐어주었다. 저자가 불안의 시대의 특징이라고 강조하는 제로섬게임은 이미 낙관의 시대에서부터 이런 형태로 시작되고 있었다. 블랙홀처럼 세계의 자본을 빨아들인 미국이었지만, 결국 그 형태가 채무로서만 가능했고 다양한 기법으로 그것을 메우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설령 세계의 부는 늘어났다고 하더라도, 전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빈부격차가 늘어난 것은, 낙관의 시대에 불어닥친 여러 국면의 경제위기들이 그 위기를 맞이한 당사자들에게 부자와 빈자로 갈라설 것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본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징성은 적었고, 그것은 주변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저금리정책의 주역인 그린스펀은, 본토에서의 위기를 여러 정책적 수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지연시킨 훌륭한 학자로 둔갑한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는 기본적으로 이 책의 관점을 신뢰할 수가 없다. 그는 미국적이다, 너무나도 미국적이다. 낙관은 미국의 낙관이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세계의 낙관이었는지는 의문이 먼저 앞선다. 당장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그가 낙관의 시대라고 제시한 기간의 절반 동안에 결코 ‘낙관’이 지배한 적이 없었으니까. 

 덧댐. 신간평가단 분위기를 보아하니 절망적인 평가들이 오고가는 듯 합니다...만, 사실 썩 읽을만한 책이긴 합니다. 너무나도 미국적인 시각이긴 하지만 그걸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하는 것도 쉬운 작업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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