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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의 잘못
이번 달에는 내가 선정한 관심도서 가운데 두 권이나 선정이 되어서 무척이나 뿌듯했다. 특히 전공분야에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에 골라보았던 『데리다 평전』 과는 달리, 내게는 새롭지만 관심이 있는 분야인 경제나 국제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이 곁들여져 있을 것 같은 이 책은 내 눈길을 더 끌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 달의 신간평가단 관심도서 두 권 가운데 이 책을 먼저 집어들었다.
제목과 책 소개에서 짐작할 수 있었던 이 책의 내용은,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심리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지, 그리고 그런 경향은 어떻게 확산이 되었으며 그런 시대에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등등의 내용들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좌파적 성향을 가진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이 책의 제목에서 이야기하는 불안은 사람들의 불안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환호하고 있었고, 이 책의 저자는 책의 앞쪽 절반을 ‘세계는 좋아지고 있(었)다’는 내용을 설명하는 데 할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불안한가? 이쯤에서 우리는 이 책의 영어판 제목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Zero Sum Future : American Power in an Age of Anxiety. 이 긴 영어가 이 책의 원래 제목, 『제로 섬 미래 : 불안의 시대 속 미국의 힘』 이다. 이왕 영어 제목을 본 김에 책 표지를 좀 더 깐깐히 훑어보기로 했다. 책의 저자는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타임즈』 의 저널리스트이다. 이쯤되면 점점 (내 입장에서의) 혐의가 짙어진다. 다름이 아니라, 이 두 잡지는 경제적인 정책에서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대표적인 경제잡지이다. 또 책의 뒷면에 있는 하버드대학에서 경제사를 가르치는 니알 퍼거슨의 추천사. 이 사람은 공화당 성향의 네오콘이라고 부르기는 무엇하지만, 시장경제의 힘을 신뢰하며 그 힘을 상징하는 미국의 제국적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한 지식인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후반부가 되면 이 책이 강조하는 ‘불안’이란 누구의 불안인지가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가 말하는 불안의 시대란, 국제사회의 불안인 동시에 미국의 불안이다. 더 과장해서 저자의 입장을 이야기하자면, 미국의 불안이 곧 국제사회의 불안이다. 핵심은 간단하다 - 국제질서를 주도했던 미국이 더 이상 그 역할을 자임하지 않으려 하고, 또한 그 역할을 떠맡는데 힘이 부치자 그 역할을 대신하려고 하는 여러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국제적 춘추전국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미국의 역할 약화가 곧 국제사회의 불안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불안한가
‘아차, 내가 헛다리를 짚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선 이 ‘불안’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이 책을 뜯어보자.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내용은, 책 저자인 래치먼이 긴 시간동안 기자로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분석한 내용,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까지 종합하여 정리한 197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국제정세와 그에 대응하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다. 이들을 종합했을 때, ‘불안’은 현재 미국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압축적인 단어이다.
이것이 왜 불안인지는 이 이전의 시대와 대비시켜서 보아야 한다. 래치먼은 불안 이전의 시대를 ‘낙관’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이 낙관의 시대의 경향은 자유민주주의, 즉 시장경제와 인민주권적 민주주의가 결합한 특정한 정치적 형태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냉전시대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이념적 성채로서 미국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소비에트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가 무너진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전세계로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국가가 미국이었다. 실제로 이 이념의 확산을 위하여 걸프 전쟁에 개입하는 등 무력정책도 여러 차례 감행하였으며, 이런 활동에서 얻어낸 긍정적 결과들을 토대로 미국은 세계를 거시적으로 움직이는 국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에게 불안이란 미국이 이런 지위를 잃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미국이 지위를 잃어가는 일국패권주의의 후퇴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염려하는 바는 미국이 상징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쇠퇴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경제와 정치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이론적 토대이다. 이것의 쇠퇴는 곧 인간의 자유의 쇠퇴와 직결되며, 이는 곧 인간의 행복의 쇠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미국의 쇠퇴에 국한되는 것인지 혹은 진짜 인간의 행복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이 글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매우 모호한 형태로 나타난다.(이렇게 이 책이 읽히는 것을 보면, 나도 래치먼이 이야기하는 반동적 ‘반세계화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가보다.)
자유민주주의의 후퇴는 독재의 부흥과도 연결된다. 세계를 미국과 양분하려는 야심을 지니고 자신만만하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은, 래치먼의 분류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독재 국가이다. 이것은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미국이 예전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들조차 반미국적인 국민들이 성향 등등을 이유로 독재 국가들에 힘을 실어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념적 이분법이 적용되는 시기, 즉 냉전의 시대와는 다른 불안의 시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이런 국제정세가 형성되기 이전, 그러니까 저자가 ‘낙관’의 시대라고 부르던 시기에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세계가 경제적인 통합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경제의 통합은 좁게는 자유로운 무역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인류가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운명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전보다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불안의 시대의 국제정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더욱 힘든 구조로 재편되어가고 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앞으로 미국이(또는 국제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며,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매 순간이 바로 ‘불안’의 순간이 될 것이라는 게 래치먼의 경고이다.
이러한 분석에, 미국인이 아닌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여기에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포함된다. 물론 래치먼의 분석은 한국에도 어느 정도 적용이 된다. 표면적인데다가 군부정권의 연장이었다고 하더라도 1987년 한국 국민들은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았다. 또한 1992년 우루과이 라운드를 시작으로 세계시장에 편입하였고, 모두가 즐겁게 기억하는 1990년대 초반의 황금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것은 1998년으로 끝난다. 그 이후의 한국사회가 자유민주주의의 확장이었는가 생각한다면,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아마 저자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대체적인 경향’이다 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말한 이런 경향에는 빈부격차의 확대도 포함되어 있고, 그 또한 이를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말한 ‘낙관의 시대’ 동안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어두운 특징이다. 미국과 유럽 또한 예외일 수 없고, 미국의 추진하는 세계화 - 즉 자유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은 거의 모든 국가들은 빈부격차의 확대라는 수순을 밟아나갔다. 래치먼은 전지구적인 정치적 통합, 그리고 시장의 통합이 희망적인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이 시기를 ‘낙관’으로 정의하지만, 나는 반대로 이 필연적인 빈부격차가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충격을 들어 이 시기를 ‘불안’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세계를 진짜로 지배하는 것은 신념
이상의 논의에서 알 수 있는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그가 경제와 정치, 외교의 이야기의 저변에 깔려있는 심리상태를 드러내어 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널리스트로서의 태도일 수도 있고, 동시에 그가 실제로 이 세계를 여러 사람들의 신념과 심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 - 혹은 그 기반이 되는 아이디어를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빌려온 듯 하다. 그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후쿠야마의 생각에 따르면 따르면, 이 세계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모습을 규정하기 위해 여러 이념들이 등장해 각축을 벌였지만 최종적인 승리를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주어졌다. 그 이유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개인의 의지를 가장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 정치-경제 체제이기 때문이다. 나치와 파시즘의 붕괴, 소비에트 연합의 해체는 자유민주주의의 힘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들이다.
이 생각의 핵심은, 이것이 실제 ‘정말 그렇더라.’ 라는 사실판단이 아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준 일종의 담론이라는 것이다. 래치먼의 말대로, 그는 정치학이나 경제학보다는 헤겔의 철학을 기반으로 ‘역사의 종말’이라는 담론을 완성시켰다. 그것은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담론이 책과 사상의 형태를 갖추고 나온 뒤에 많은 정치가들의 지향점을 지배했기 때문에 실제로 효력을 발휘했다. 미국에 한정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국은 당시에 정말로 역사의 종말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이념적 힘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팽배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그러했고, 미국을 바라보는 다른 국가들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이 담론이 힘을 발휘한 세계가 바로 ‘낙관’의 시대이다. 조금만 면밀히 이 책을 들여다보면,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경제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거나 전쟁에서의 구체적인 손익계산서가 아니라 그 상황을 이끌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또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정치적인 지도자, 그리고 그 밖에 어떤 시대를 이끌어갔던 미국 외의 몇몇 국가들의 정치적 지도자나 관료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일관된 생각들은 세계를 실제로 그런 형태로 구획해나갔다. 다양한 인종과 국가가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강조했듯이 낙관의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모든 국가의 자유민주주의화라는 말로 표현되는 세계화이다.
불안의 시대를 움직이는 주체도 역시 어떤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힘이 아닌, 일종의 신념들이다. 물론 그러한 신념이 어느 정도는 물질적인 기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념의 진폭은 경제의 진폭보다 크다. 경제위기와 실패에 가까운 경과를 보여주는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그 밖에 미국 외적인 많은 징후들은 미국의 정치인과 미국 국민들에게 미국이 더 이상 혼자서 지구를 짊어진 거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미국 국민들은 점점 그 역할을 포기하라고 정부에 종용하고 있다. 반대로 미국 외의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던 ‘반미국-반제국’이라는 말을 경제위기 이후에는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런 자신감은 곧바로 국제정치 무대에서 반영되었고, 경제체제에 대한 논의와 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높아진 신념의 진폭이 경제의 진폭의 크기를 더욱 배가시키는 셈이다.
래치먼의 관점에 대한 의문
나는 그가 이야기하는 ‘반세계화주의자’로서 그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정말로 자유민주주의는 승리를 구가했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전도사로서 실제로 세계의 부를 늘리는 데 기여하였는가? 설령 정말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미국의 역할로서만 파악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이런 질문들에 나는 반쯤은 회의적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아주 매력적인 이념이자 동시에 정치, 경제적인 체제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민주주의는 이중적이다. 이 이중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다름아닌 미국의 금융위기 때였다. 저자도 인정하듯, 여러 구조조정과 흑자정부 같은 것들을 강요하던 IMF와 세계은행 같은 기관들은 미국에게만은 예외를 허가하였다. 세계경제에 미칠 파급력이 굉장하다는 이유였다. 이 행동은 미국 스스로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포기하며, 지금까지 넓혀왔던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정당성을 상실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사실 이 대목은, 비슷한 금융위기로 가장 혹독한 시절을 견뎌낸 한국의 국민인 나로서는 억울하기까지 한 대목이다.
저자는 낙관의 시대에 미국의 중흥을 이끌었던 핵심적인 요소로 기술의 발전을 미국이 주도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 기술은 한 편으로는 금융공학의 발전이고, 나머지 한 편으로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술의 발전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다시 말하면, 이것의 실체는 실물생산 즉 제조업 없는 성장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가치가 주식시장을 통해서만 거래되고 불어났는데, 이것은 저자가 파악한대로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어떤 물리적인 힘을 가진 존재나 계획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신념이었다는 것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입증한다. 왜냐하면, 숫자의 장난은 심리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물건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닷컴 버블의 붕괴,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08년 금융위기로 또 다시 증명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그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낙관’의 시대 전체가 사실은 불안의 시대의 연장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 같은 것들이다.
실물생산 없는 성장의 실물을 메꿔준 것은 결국 미국이 각국을 상대로 지고 있는 막대한 부채이다. 미국의 투자자, 미국의 거대 금융기업의 흑자는 미국 국가재정의 흑자로 연결되지는 못했으며, 미국 재정의 유지를 위해서 그리고 금융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미국 이외의 국가들은 정부 재정에서 흑자를 기록해 미국의 국채를 사들였으며 주주인 대형펀드에게 배당금을 쥐어주었다. 저자가 불안의 시대의 특징이라고 강조하는 제로섬게임은 이미 낙관의 시대에서부터 이런 형태로 시작되고 있었다. 블랙홀처럼 세계의 자본을 빨아들인 미국이었지만, 결국 그 형태가 채무로서만 가능했고 다양한 기법으로 그것을 메우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설령 세계의 부는 늘어났다고 하더라도, 전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빈부격차가 늘어난 것은, 낙관의 시대에 불어닥친 여러 국면의 경제위기들이 그 위기를 맞이한 당사자들에게 부자와 빈자로 갈라설 것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본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징성은 적었고, 그것은 주변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저금리정책의 주역인 그린스펀은, 본토에서의 위기를 여러 정책적 수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지연시킨 훌륭한 학자로 둔갑한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는 기본적으로 이 책의 관점을 신뢰할 수가 없다. 그는 미국적이다, 너무나도 미국적이다. 낙관은 미국의 낙관이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세계의 낙관이었는지는 의문이 먼저 앞선다. 당장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그가 낙관의 시대라고 제시한 기간의 절반 동안에 결코 ‘낙관’이 지배한 적이 없었으니까.
덧댐. 신간평가단 분위기를 보아하니 절망적인 평가들이 오고가는 듯 합니다...만, 사실 썩 읽을만한 책이긴 합니다. 너무나도 미국적인 시각이긴 하지만 그걸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하는 것도 쉬운 작업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