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네트워크의 형성 과정
철도, 선박부터 전보, 금융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중반부터 1차 대전이 일어나기까지 60년 동안은 전례없는 네트워크 형성의 시기였다.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1차 대전 중에 많은 네트워크가 해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수십년 동안 자기중심주의의 힘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세계를 뒤덮는 네트워크의 형성을 ‘세계화‘라고 부른다면(화려한 색깔의 모호한정의이긴 하지만) 1860-1914년은 세계화가 뚜렷하게 진행된 시기였다. 우리는 두 가지 사례 - 대륙 사이의 인구이동과 식민제국의장——에 대해서는 이미 논한 바 있다. - P1910

식민지 인도와 반(半)식민지 중국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두 나라는 자체적인 역량으로는 (민영이든 국영이든) 원양선단을 건설할 수 없었다. 이 방면에서 일본은 또 다시 아시아- 아프리카의 특수한 예외였다. 아무리 늦어도 1918년 이전에 일본의 군용과 민용 조선업은 다 같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일본은 상업해운과 해상군사력에서 세계의 선도국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일본민족 성공의 표지이자 동시에 성공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 P1916

교통의 역사에서 세계화로 나아가는 강한 흐름은 2차 대전 이후, 특히 비행기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이 더 이상 정치인, 기업가, 부호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20세기 60년대부터 형성되었다. 이런 발전의 기술적 기초는 항공 여객운송에 적용된 분사식 추진력이었다. 1958년 보잉 707 모델이 취항하면서 우리는 제트여객기의 시대로 진입했다. 19세기의 가장 대담한 환상으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한실이 되었다. - P1919

철도의 건설과 운행에는 강철기술, 기계제조, 채광, 통신, 지질, 교량건설, 터널건설, 기차역 설계, 공사현장 조직관리, 자금조달, 인사관리,
운행시간 조정 등 대량의 전문지식이 필요했다. 특히 철도사업이 아직 과학으로 자리 잡지 못한 초기에는 임시변통으로 해결책을 찾아내야 했다. 기술문제는 해결책을 찾아낸다 해도 토지를 징발하고 보상해야 하는 법률문제가 동시에 등장했다. 이 밖에도 철도는 항상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지니는 정치적 화제였다. - P1921

이제 개별 시장 상호 간의 반응은 빨라졌고 가격 수준은 근접했다.
주문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많은 업종이 대량의 재고를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이것은 소기업에게 특히 유리한 환경변화였다. - P1931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네트워크 접근권을 세밀하게 규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을갖게 되었다. 이 매체가 처음으로 사용된 크리미아전쟁에서 영국과프랑스의 지휘관들은 군사지식이 별로 없는 민간정치가들이 함부로보내오는 모순된 내용의 전보더미에 파묻혔다. 전보는 공정한 무대가 아니라 새로운 계층질서를 만들어 냈고 고위 관료들만 그것에접근할 수 있었다. 국외에서의 협상은 당연히 수도의 본부로부터접 내려오는 지시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전권을 부여받은 노련한 외교관이 큰 틀의 외교를 연출하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 P1932

노동력으로서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유럽화된 새로운 세계경제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이들은 상인으로서도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않고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더 힘든 일은 공업과 금융업에서 종속적인 지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1차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오직 일본만 이 분야에서성공했다. 일본의 공업은 아시아 시장에서 유럽/미국에 맞서 점차로경쟁력을 갖추었고 일본의 무역과 해운회사는 일본열도를 벗어나먼 곳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 P1941

19세기의 국제 화폐체계는 처음으로 몇몇 국가가 협력하여1540년대 이후로 전 세계에서 유통되어오던 귀금속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경제(와 기타) 방면에서 대외관계를 엄격하게 제한하던 국가 일본 그리고 특히 중국도 이런 화폐의 유통을 수용했고, (원인을 알지 못한 채) 화폐와 금속의 세계적 유통이 가져온통화팽창 또는 통화긴축의 피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P1951

19세기 70년대 초 이전에는 세계에서 영국이 유일하게 이런 통화체계를 채택하고 있었다. 영국에 대응하는 라틴화폐동맹이란 통화체계가 얼마가지 않아요절하자 금·은복본위제는 사라지고 유럽 각 국가는 앞다퉈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독일은 1873년에, 덴마크와 스웨덴은 같은 해에, 노르웨이는 2년 뒤에, 프랑스와 기타 라틴화폐동맹 가입국은 80년대에금본위제를 실시했다. - P1955

금본위제는 역설적이게도 자유주의가 같은 정도로 경제 메커니즘의 철칙‘에 굴복한 자본과 노동의 손을 잡은 경제질서의 규칙이자 상징이었다. - P1960

본질적으로 자본수출은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혁신이었다. 1820년무렵, 해외 직접투자는 아주 소액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장악했다. 그러나 1850년 이후로 필요한 조건들이 점진적으로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차입국과 대출국 모두에서특수한 금융기구가 세워졌고, 신흥 중산층의 저축이 축적되었고, 해외투자 기회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유동자산과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역사에 유례가 없는 혼합체가 사람들이 런던금융가라고 부르는 곳에 등장했다. - P1961

절대규모를 보면 지금은 백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지리적 분포는 넓어지지 않고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극도로 집중되어 있다. 세계의 자본네트워크는 무역네트워크나(1950년 이후의) 항공운수 네트워크처럼 고르게 두터워지지 않았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는 상당히 높은 정도로, 아프리카는 거의 완전히 자본의 흐름과 단절되어 있다. 이에 반해 거대한 규모의 자본이1913년에는 세계 금융체계의 주변부였던 지역(아랍산유국, 중국)으로부터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의 중심도시로 유입되고 있다.
20세기는 국제금융의 탈세계화를 목격했다. 가난한 국가는 1차 대전 전과 비교해서 외국자본 도입 경로에 접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좋은 소식이라고 한다면 정치적 식민주의가 몰락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외국자본이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경제발전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 P1967

1825년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새로운유형의 위기(국가채무위기)는 아무리 늦어도 19세기 70년대부터종의 지역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위기는 대부분 라틴아메리카국가 정부와 유럽 민간 채권자 사이의 충돌이었지만 정치적 또는 외교적 문제를 남기지 않고 해결된 적은 거의 없었다. 채권자는 돈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쌍방 정부가 담판해야만 해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금융제국주의가 국제금융시장에 강력하게 개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 P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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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루저의 나라 - 독일인 3인, 대한제국을 답사하다
고혜련 지음 / 정은문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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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에 대한 나의 생각은 늘 복합적이다.
한편으론 애썼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주저앉아버린 망국이라는 양가 감정이다.
사실 저 양분된 감정으로 설명하기에도 모자란 것 같지만.

개혁의 씨앗을 불태울 수 있었던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시절은 독립협회와 만민/관민공동회의 의지를 꺾어버린 이후로는 그 기회를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개항 이전에 자력을 키우고 외부에 귀를 기울였다면.
민심을 돌아보고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뇌물을 탐하고 백성을 수탈하고 임금은 아첨하는 자들의 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짓이 반복되니 민란은 끊임이 없었고 백성들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이 책은 대한제국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3명의 독일인이 조선을 왔다가 가서 남긴 기록의 흔적을 옮겨놓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물에 대한 소개와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까지 담고 있다.


특히 첫번째 크노헨하우어의 강연문(1901)을 신선하게 읽었다.
크노헨하우어는 1897년 채굴권을 취득한 후 광산 채굴 지역을 찾기 위해 대한제국을 방문하였다.
1898년 2월부터 1년 6개월 동안 체류하고 돌아가 1901년 2월 25일 조선에 관한 대중강연을 하였는데 그 전문을 실었다.

줄곧 등장하는 세창양행에 대한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1883년 고종은 조선사절단을 중국에 보내 조선의 근대화 자금을 위한 신용장을 발행하는 일을 하게 한다. 조선사절단은 상하이와 톈진에 머물면서 상하이의 자단메티슨, 톈진의 에드아르트 마이어와 만나서 지사 설립을 설득한다.
마이어는 독일 함부르크 상인 볼터에게 마이어회사의 지사를 설립 전권을 맡기는데 볼터는 제물포로 와 지사 이름을 세창양행으로 하고 조선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세창양행은 조선 최초로 차관 대출을 제공한 서양 기업이 되고 조선의 대출 지불이 끝날 때까지 증기선을 운행하면서 각종 이권을 얻는다.
1897년 가을 조선정부와 협상하여 세창양행은 광산 채굴권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읽으면서 몇 번 어이없거나 피식거리기도 했는데
차를 이용할 수 없는 조선에서 운송수단이라곤 가마나 마차였는데 그 울렁거림에 힘들어하고
체구가 작은 나귀에 짐을 균형있게 싣고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 모습을 놀라움에 보기도 한다.(입이 떡 벌어졌을듯)
말의 교환을 위해서는 통역이 필요한데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어하는 부분도 있었다.
외국인 고위 공무원에겐 숙소가 제공되는데 막상 배정받으려면 끈기있게 기다려야 한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때 조선인 통역사들은 별일 아니라는듯 구경꾼들과 끝없는 대화를 한다는 대목에서 폭소하게 만든다.
부처탄신일에 축제를 하는데 북과 태평소 소리를 듣고는 유럽인 청각에 통증을 유발시킨다는 것에도 일면 이해되는 부분이 있어 웃었다.
조선의 황폐한 산림을 보고 한탄하는 부분은 나조차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채굴권을 얻기 위해 방문했다.
따라서 조선 정부와 끊임없는 기싸움도 벌여야 했고 내정 장소로 정해진 강원도 당고개 주민들과도 대치하는 일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므로 강연에서 그가 한 말은 전적으로 독일의 이익 앞에 설 수 밖에 없으므로 그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예쎈은 독일 예술사학자로 1913년 미국을 거쳐 일본을 답사한 후 쓴 답사기 '조선의 일본인' 내용이다. 
예쎈은 식민지가 된 조선의 문화를 이왕가박물관을 방문해 유물을 들여다보며 든 생각과 일본인의 고대 문화와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의 문화를 수용한 일본의 변화를 관심 있게 지켜본다. 

예쎈은 동아시아의 고대 문화에 무척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본을 방문하고 자신이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여서 충격에 빠진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왜 자국의 고대 문화를 지켜내지 않고 서양의 문물을 그대로 수용하지 하는 의문을 보인다)
조선은 신분에 대한 차이에 따른 차이와 남녀의 차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수공업자들이 왜 천민 대우를 받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분노한다.
본인 스스로가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보니 장인 정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에 대한 체계성을 보고 놀라움을 보이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예쎈은 독일이 배울 식민지 정책 중 예술행정 정책을 눈여겨 본다. 
일본이 식민지 왕족을 공예품을 만들 수 있는 공예학교인 조선총독부공업전습소를 확장시켜 졸업하면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조선 일본의 박물관 상품을 생산하도록 만들었다고 한 것이다.
정작 이용되었을 왕족을 생각하면 뒷맛이 씁쓸하다. 

참고로 크노헨하우어의 강연문과 예쎈의 여행기에는 역사 오류가 등장한다.
조선에 대한 지식이 성립되어 있지 않았을테니 감안하고 보아야 할 부분이다. 

먼저 크노헨하우어의 강연문 中

일본인들은 12세기부터 조선을 주시했습니다. 때로는 한반도의 남쪽 전체, 심지어 신라조차도 일본 소유였습니다.
(중략)
일본은 16세기에 20년 동안 잔인한 전쟁으로 조선을 정복했습니다. 
평화협정으로 내건 조건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조선인은 매년 36명의 인간 피부를 일본에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이 고통은 완화되었지만 농산물 등이 이를 대신했습니다.



예쎈의 여행기 中

6년 동안 전쟁을 하며 힘들게 조선을 점령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곧 죽었다. 
그의 후계자는 조선에 관한 권한을 만주중국(청나라)에게 넘겨줬다. 
다만 항구도시 부산만 일본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일본은 수백년동안 조선 땅에 한발을 걸치고 있었다.

고려 왕조(935~1392)는 하위 왕국으로 중국에 귀속되었으며, 고려 말부터 한반도 지역에 지속적으로 고려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세 번째 라우텐자흐 헤르만의 '조선-만주 국경에 있는 백두산의 강도여행' 이다.
이는 1933년 8월부터 9월까지 압록강 어귀부터 백두산 천지까지의 여행기다.
그는 같은 해 7월부터 10월까지 지형학과 식물, 농업 등 경제 현황 탐사를 위해 조선을 여행하였다.
남으로는 제주도, 지리산, 동으로는 울릉도, 북으로는 백두산까지 이어졌다. 

그는 한 나라의 위도가 이리 다양한 것에 놀라며 기온차에 주목한다.
백두산을 여행하면서 수많은 식물을 수집하고 한라산의 수종과 비교하는 작업도 한다.
백두산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극찬한다. 
그의 여행기에 강도라는 단어가 왜 나오나 궁금했는데 여행하면서 몇 차례 강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저자는 이들을 독립군이 아닐까 추측한다. 게릴라 집단이라고 묘사한 걸 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라우텐자흐 교수의 여행기를 보니 솔직히 다른 걸 떠나서 너무 부러웠다. 
백두산 여행기가 이제는 너무 멀게 느껴져서인가. 


사실 대한제국이라고 하기에는 두 명의 독일인들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좀 애매하다.
용어에는 괄호 안의 설명을 통해 자세히 실어놓은 것은 저자의 정성이 돋보였다. (다만 너무 길어지는 경우가 있어 책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도 발생할 것 같아 이 점이 아쉬웠다. 차라리 아래 주석을 이용하거나 했다면 어땠을까)

독일인 3명을 통해 당시 대한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문화적 차이가 크니 조선인들의 태도나 생활 양식 등에 경계나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에 대한 무지, 그리고 선입견이 있는 상태에서 서술한 부분도 있지만 그것은 감안하고 보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한국근대사 자료를 얻은 것 같아 기분 좋게 읽었다.

조선의 사계절을 경험하며 봄과 여름에 같은 장소를 지나가게 된다면 마치 다른 곳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여름의 풋풋한 녹색의 향연, 다랑논에 심은 녹색 벼들이 찰랑거리는 풍경, 시골집 지붕 위 호박과 수세미 넝쿨, 수많은 녹색 풀들이 짚풀로 엮은 지붕과 울타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모든 것이 풍부하고 축복받은 땅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 P83

조선 관리는 친절하고 세련된 말투로 먼저 다른 주제를 꺼내 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매우 유감스러운 말투로 미안하지만 우리 지역에는 당신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 전혀 없으니 여기, 저기, 다른 곳을 찾아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방금 그곳에서 왔다고 하며 끈기 있게 반복적으로 묻자 고위 관리는 실례했다고 하며, 자신은 이곳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관리는 결코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 P97

조선의 회화와 목공예를 보면 전성기 때는 현재보다 월등한 수준의 공예품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대웅전의 앞 현관 옆에 정교하게 장식된 큰 동종이 있습니다. 안뜰과 사원 건축물 사이에 화강암 탑이 있으며, 탑의 장식으로 매달려 있는 귀퉁이 작은 종은 절반만 남아 바람따라 조용한 소리를 냅니다. 그 절반이 이미 도난당했으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습니다.도서관에서 꽤 오래된 비단 위에 수를 놓은 작품을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귀중한 보석, 인연옥으로 장식한 긴 염주 등은 사리함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모든 유물은 수준 높은 공예품이며 현재 아무도 그 수준을 따를 수 없습니다. - P113

우리는 종종 야영지에서 떨어진 5~6곳에서 불꽃 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우리 일행은 불을 지른 화전민 밭 한 가운데를 지나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아무도 이 무의미한 삼림의 황폐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의 법은 화전을 확실히 금지하고 있지만, 조선의 권력자는 누구인가요? 나는 묻습니다. 누가 과연 화전 금지 명령을 집행할 권한이 있는가요? 소나무만이 건축 목재로 보호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벌목한 후 식목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면 북쪽 삼림은 현재 남쪽처럼 황폐하게 변할 것입니다. - P127

조선 정부는 뒷문으로 비열한 행위를 하며, 외면하고, 번복하며 우리가 얻은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영사는 어떠한 것도 동의하지 않았으며 엄격하게 최혜국 약관에 의한 승인을 요구했습니다. 첨예한 분위기 가운데 외교각서를 교환하면서 외국인 고문이 설명한 덕분에 조선 정부는 이성적으로 돌아왔고, 마침내 우리가 선택한 당고개를 승인하였습니다.
고문 중 한 사람이 왕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절대 독일인들에게 농담하면 안 되며,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더 큰 배상을 요구할 것이며, 자오저우만의 점령이 그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 P140

불쌍한 고종은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부하들에게 여러 번의 공격을 받아서 의기소침하였습니다.
특히 여왕이 몇 년 전 일본인에 의해 굴욕적으로 살해된 이후 더 심해졌습니다.
그는 매우 지적이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단력 없고 탐욕스러웠던 그는 붕당으로 나뉜 대신들의 공놀이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돈을 갖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이 나라의 복지와 불행에 무관심하였습니다. - P150

그들은 무리를 져서 옮겨 다니고, 과일과 야채를 수확하는 일을 하는 허름한 노동자들이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이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재산을 조금씩 늘려가며,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하며, 자식들을 미국 학교와 도서관에 보낸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백인들과 합류하기를 원하지 않고, 절대로 동화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섬뜩한 것은 호놀룰루에서 관찰된 점이다. 이곳에 이주한 일본인들 수천 명은 표면적으로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곧 호놀룰루를 점령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들 일본인들을 절대 얕보면 안 된다. - P204

이들은 멍하니 한가하게 앉아 있거나 그저 서 있었다. 크고 바른 당당한 체구와 자랭긴 모습의 사람들은 상의, 치마, 바지, 신발 모두 흰색으로 차려입었으며, 머리는 뒤에서 흰 모자 안으로 감아 올렸으며, 대나무 틀 위에 느슨하게 말총으로 직조한 높고 넓은 차양 모자를 쓰고 모자 끈을 턱 아래에 묶었다. 수많은 상점 앞에서 기다란 담뱃대로 끊임없이 흡연을 하거나 수다를 떠드는 등 우아한 루저의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아내는 집과 안뜰 내부에서 대마나 면을 두드리며 빨래를 하는 등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한다. - P209

백정과 신발 제조업자는 이 사회에서 천대받는 신분이다. 동물의 표피와 살을 손으로 직접 처리하거나 바구니 제작자는 살아 있는 나무 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다루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예술가라 부르는 배우와 가수가 이러한 천민 계급에 속한다.
황동 공예품, 촛대, 등불, 담뱃대, 아름다운 쇠장식이 달린 목가구 등을 만드는 장인들이 있는 이 나라에는 모든 종류의 금속, 금, 구리, 철 등이 풍부하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업은 오랜 전통 작업이다. - P212

중국인보다 수준이 높았던 조선인들은 25개의 모음과 19개의 자음으로 아름다운 한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수준 높은 인쇄 기술로 제작된 한글 인쇄물 한 두 권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은 내게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 P224

총독부 보고서를 읽어보면, 토지 조사, 소유권 확인, 생산과 수출, 수입 조사 등 경제적으로 법률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한 회사는 1년 동안 7,300건의 재정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창조적이며 기술적으로 정제된 작업은 유명한 공예박물관의 지원을 받는다. 그것은 교토, 나고야, 도쿄 혹은 다른 도시의 상업박물관의 보조 상품 판매망과 연결되었다. 새롭게 추천하는 재료, 도구, 작업 방법은 마치 신지식을 주는 것처럼 포장되었다. 국가에서 추천하는 작업 유형은 이미 오래된 낡은 작업이었지만 기품이 있어 보이도록 포장했다. 게다가 이러한 판촉 정책으로 상품의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구매 욕구를 부르는 일본의 추천 상품은 부족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모든 학교 정책은 영리한 프로파간다가 될 수 있는 사례로 까다로운 유럽인들도 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P229

만주의 강도들은 절반 정도 훈련받은 정규 군인과 일반 중국인 집단이며 일본의 무력 진압에 대항하는 반일본 게릴라 집단이다. 이들은 듣기만 해도 용맹한 작전을 거침없이 수행하였다. 일반적으로 만주의 강도들은 이주민들이 거주하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흐르는 지역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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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2-01 2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의 언어 인쇄술, 기술 문화 모두 중국과 일본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수준인데,,,,

세도가들의 이권다툼과 분열,,
역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 같습니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2-02-02 10:45   좋아요 1 | URL
당시에는 조선에 대한 인식 자체가 외국엔 거의 없거나 있어도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았죠. 지금은 K-Culture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인정받는걸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외교의 중요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지요. 너무 퍼줘서도, 너무 밀어붙여도 안되는 노련함이 필요합니다.

바람돌이 2022-02-02 0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한제국의 탄생부터가 당대의 흐름을 거부하고 복고적 왕권강화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다보니 아무래도 긍정적 평가를 하기가 힘들어요. 이 책의 주인공들이 독일인들이라는 것에 약간 호기심을 느낍니다. 독일인들이 또 어딜 가나 자신이 본것들을 상세하게 기록하는데는 또 아주 뛰어나잖아요. ^^

거리의화가 2022-02-02 10:49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군주체제가 아닌 다른 정치형태가 되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아쉽습니다.
정말 별의별 이야기를 적어놓았더군요. 읽으면서 이런 기록이 남아서 다행이다 싶었어요. 물론 시선의 한계는 있습니다만 자료 자체가 평면적인 역사를 입체적으로 보게 해 주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되고 노동 환경이 좋아진 것이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1960, 70년대 아동과 여성 노동자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생산 압박에 쫓겨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던 때가 얼마 되지 않았다.

① 마을은 행정단위다. 예컨대 마을은 정부의 징세 단위이며 심지어 법률적으로는 독립된 법인이 될 수 있다.
② 마을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토지를 갖고 있으며 이 토지는 (러시아의 농촌 공동체 옵쉬나Obshchina처럼) 공동체의 결정에 의해서만분배되거나 재분배될 수 있다.

중국 남부지역에서 반드시는 아니지만 대체로 폐쇄적인 주민 거주지역과 맞물리는 (북부의 마을보다 좀더 확장된) 문중조직이 통합과조정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문중조직을 역사발전의 시각에서 본질적으로 낙후되었거나 나아가 ‘원시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문중조직은 고도로 효율적인 농업을 창조하는 조건이었다. 유사한 기능을 공유재산을 보유한 사원(寺院) 공동체가 담당했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 P1827

서술하는 과정에 삽입되어 있는 중국과 인도의 대비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의 양대 농업사회는 여러 면에서 유사했다. 농민은 원칙적으로 법률상 자유인이었다. 그들이 생산한 것은 일부는 시장에서 팔려나갔다. 경영의 가장 중요한 단위이자 원시 생산단위는 (때로는 소수의 하인과 고용 노동자의 도움을 받는) 가정이었다. 이 세 가지 특징은 인도/중국과 서유럽 —— 최소한 프랑스와 엘베강 서쪽의 독일의 공통점이면서 동시에 인도/중국이 19세기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노예를 사용하거나 예속적인 노동에 의존하는 플랜테이션, 라티푼티움, 대형 농업기업과 대비되는 점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서방과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동방이란 이분법적 구분은 착오다. - P1832

19세기를 통틀어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농업노동은 육체노동이었다. 유럽의 대부분 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26) 계층상황도 문화에 따른 차이는 없었다.
포메라니아(Pomerania)* 또는 폴란드 장원의 고용 농업노동자와 인도의 고용 농업노동자는 (각자 특유의 위계질서와 문화적 환경 안에놓여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물질적인 불안정 때문에 일거리를 찾아 사방을 떠돌아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환경과경험의 기본적인 유사성이었다. - P1834

자유주의 경제학은 국제교역이 ‘봉건적 제도를 해체함으로사람들을 낡은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노동의욕과 창의력을북돋울 것으로 예상했다.
예상은 실제로 현실이 되었다. 특히 외부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지않은 곳에서는 소농 경영자는 해외 판매망을 이용해 생산품의 판매처를 찾아냈다. 그러나 자국 정부(예컨대 일본)가 명확하게 수출을지지하고 이를 위한 법률제도와 필요한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했을때에만, 또는 식민정부가(정치적 안정을 위해 식민지 농민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외국 플랜테이션 기업을 억제하는 상황에서만 장기적인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조건이 갖춰지지않았고 그 결과 외부의 이해관계가 우위를 차지했다. - P1835

식민지 플랜테이션은 전혀 새로운 형태가 아니라 구시대 노예제 플랜테이션이진화한 산물이었다. 플랜테이션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도구였으며하나의 예외도 없이 열대지역 국가에서 등장했다. 공업과는 달리 플랜테이션 경제는 국민경제 발전의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 P1836

전체적으로 볼 때 19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아시엔다는 폐쇄된 왕국이었다. 아시엔다 내부에서 농장주가 모든 일을 독단했다. 법률제도는 매우 선진적이었으나 경찰과 법원이 채무고용농의 이익을 보호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그들의 생존을 보장해주던 마을 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P1839

19세기에 작업 장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다. 공장과 달리 조선소는 몇몇 문명에서 수천 년 동안 수공업노동 협업의 장소로서 알려져 왔다. 근대 초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조선업은 대기업 조직형식을 갖춘 가장 중요한 경제부문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 시절조선업은 목수들의 세계였고 그 뒤로 공업화를 주도하는 부문이 되었다. - P1843

19세기의 공장은 새로운 특성 - 이중성 - 을 지녔다. 공장은 대의 은형 생산 장소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행위의 장소였다. 각종 협력의형태와 권력의 등급이 공장에서 먼저 나타난 후 사회의 다른 부문에확산되었다. 공장은 가정과는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생산의 장소였다. 공장에서는 새로운 작업 습관과 리듬이 필요했고,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이념이 제한적으로만 적용되는 새로운 규범이 필요했다. 공장노동은 분업과 협력 - 노동자의 능력에 따라 분배되고 조정되는 이었다. 공장노동은 시발점에서부터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 방식을 시험해왔고 마침내 1911년에 뛰어난 관리자문가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가 작업과정의 속도를이고 보다 과학적으로 작업과정을 통제하는 심리물리학적 최적화이론 — 이른바 ‘테일러주의‘(Taylorism) —을 창안해냈다. - P1844

공장에서 어린 여성노동자를 맞이한 것은 공포스러운 작업조건이었다. 그들은 감시받는 대형 숙사에 기거하면서 한 가지 채소 반찬만곁들인 쉰밥을 먹어가며 하루 15-17시간을 일했다. 중간 휴식시간은매우 짧았고 성폭력은 빈번했다. 작업은 단조로웠으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누에고치를 삶는 솥 주변에서는 수시로 사고가 발생했다. 이런 환경은 무서운 폐결핵의 온상이었다.
같은 시기에 번성기에 들어간 면방공업의 작업조건도 이보다 나을게 없었다. 일본의 면방공업은 머지않아 견사공업보다 더 중요한 고용주가 되었다. 면방공업의 특징은 작업자를 극도로 피곤에 빠트리는 야간작업이었다. 1916년 이전까지는 하루 14시간 노동이 보편적이었다. 귀가 멀 정도의 소음 속에서 섬유조각이 떠다니는 공기를 호흡하며 아무런 방호장치도 없이 기계 옆에서 작업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기계에 말려들어가 목숨을 잃는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 P1846

운하공사는 노동의 세계가 직면한 새롭고도 가혹한 경험이었다. 수공업 공방에서 공장으로 가는 길이 19세기의 유일한 길이 아니었다. 매우 다양한 배경의 비숙련 노동자 군단이 미국의 운하 건설공사장에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들은 농촌에서 일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 새로운 이민자, 노예, 자유인 신분의 흑인, 여성과 아동이었다. 이들은 권력도 지위도 갖지 못했고 작업조건을 선택할 힘도 없었다. 이들이 연대하고 상호 부조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운하건설 작업에서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형성될 수 없었다. 지리적인 분포만 보더라도 운하건설 노동자의 작업 장소는 변방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공사 현장과 임시 숙소가 전부였다. - P1849

모든 대륙에서 철도건설 공사가 벌어지는 곳이면 지역의 경계를넘어선(흔히 국제적인) 새로운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 많은 대형 공사가 아시아 농촌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노동력 비축기지로부터 비숙련 노동력을 조달했다. 반면 철도 운영에는 높은 수준의 기술인력 기관사, 열차장, 철도 순시원, 철도 수리공 등 ㅡ 이 필요했다. 가변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사라진 적이 없는 인종차별의 벽 앞에서 멈추어야 했던 식민지 주민들에게 새로운 신분상승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 기회는 민족주의가 촉발한 권리요구와 관련성이 있었을것이다. 예컨대, 멕시코에서는 1910년의 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현지 노동자들이 미국이 출자한 철도회사에서 고위 기술직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전 세계에서 철도종사자 특유의 행태가 형성되었다. 철도가 국유인 곳에서 철도인의 행태는 더 뚜렷했고 ‘철도인은 공공의 권위를 대표했다. - P1857

선박은 군대와 플랜테이션을 제외하면 가장 폭력적인 작업 장소였다. 미국은 1850년이 되어서야 선상에서 행해지는 채찍 형벌을 폐지했다. 19세기 70년대까지도 영국 해군은 아주 잔혹한 형벌 도구인 끝부분이 ‘아홉 갈래로 갈라진 채찍을 사용하고 있었다. 장교가 수병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현상은 상선에서도 모방하는 완고한 관습이었다. - P1858

‘자유로운‘ 노동은 형식상으로나 법률상으로 어느 정도 모호하게정의될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노동이란 직접적인 외부의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 맺어진 계약관계이며, 이 계약을 근거로 고용인이 자기노동력의 사용권을 고용주에게 제공하고 그 반대급부로서 금전적보상을 받는다. 원칙적으로 이 관계는 쌍방 모두에 의해 해제될 수 있으며 고용주에게는 고용인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 P1866

노예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을 정의할 수 없고, 노예제 덕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노예주 역시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대서양 세계의 노예제는 일종의 노동착취 관계였고, 논의는 그런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 P1869

노예해방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자유란 전부가 아니면 전무의 문제도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는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정도로 찾아왔다. 한 사람이 자유로운지의 여부는 학술상의 질문이고 한 사람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가, 지금까지 어떤 권리를 박탈당해왔는가, 최근에 또 어떤 권리를박탈당했는가 하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이다. 브라질처럼 물질적 생존을 위한 사전조처도 전혀 없이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것’과 노예에 대한 사심 없는 배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해방노예는 사회와 자연스런 유대를 형성하지 못한 취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였다. 그들이 시장경제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초기의 완충장치가 있어야 했다. - P1871

1861년의 농노해방은 문화적 혁명이 아니었다. 전혀 목가적이지않은 농촌 상황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칠고 저속한 농촌사회의 기풍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농촌의 교육수준을 높이고 보드카 소비량을 줄이겠다는 계획도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해방‘은(서유럽 계몽주의의 관점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일어난 일들의 실상을 묘사하기에는 지나치게 과장된 용어이다. 미국 남부에서 해방노예는 ‘재건‘ 이후에도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 P1875

미국법원이 1821년에 처음으로 노동의 의무는 자발성을 바탕으로해야 하며, 노동자가 작업장을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물리적인 제재를 받는다면 자유로운 노동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런 해석은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북부의 주가 남부의 연방탈퇴를 반대하는 전쟁에서 ‘자유로운 노동‘은 전투구호가 되었다.
이와 함께 노동자에 대한 신체적 폭력의 사용은 본질적으로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미국 법원의 판례는 독자적인 가정을 가진 노동자와주인으로부터 부양받는 예속노동자·하녀 하인 사이의 구분을 없앴다는 점에서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방면의 법운용에서 미국이 영국보다 앞섰다. - P1882

노예제와 (특히 러시아의) 농노제가 그랬듯이 일종의 과도적 단계가 있었다. 영국에서도 비금전적 강제에 의한 노동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지 않았다. 성문법과 실제 사법판결 모두 기업주와 농업 고용주에게 노동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각종의 강제적인 수단 - 오늘날 우리가 ‘강제구류‘라 부르는 법절차와 유사한 —을 인정해 주었다. 수십 년 동안 강제노동의 잔재가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관계 속에 은폐되어 있었다. - P1883

세기 말에 등장한 새로운 요소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었다. 집단으로서의 노동자가 강대한 자본소유자에게 도전할 수 있는 조건이점차 형성되어갔을 때 노동시장의 불균형이 교정되었다. 그러나 국가입법으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담판(단체교섭, Collective bargaining)이 가능해졌을 때 노동운동은 비로소 돌파구를 찾았다. 여기서여러 장애를 넘어온 자유로운 노동의 발전은 하나의 역설과 마주쳤다. 노동자 쪽에서 담판을 독점하는 조직을 형성하여 시장의 자유를제한해야만 노동자 개인은 노동력을 구매하는 쪽이 갖고 있는 통제수단 -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를 서로 경쟁시키고 언제든지 해고할수 있는 힘 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 P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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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계년사 6
소명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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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계년사 6권은 1900년부터 1903년 시기를 다루고 있다.


내부적 개혁 동력은 진작에 꺾이고 오로지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고 권세를 탐할 생각만 하는 관리들.

백성의 생각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탁상 공론만 펼치는 관리와 고종 황제.

일본과 영국, 러시아 등 외국 세력의 이권이 야금야금 차지해가는 모습.

심지어 전 판서 민영주, 전 비서원 승 송정섭, 수륜과 장 강면희 등이 월미도를 일본인에게 돈을 받고 몰래 파는 일도 생겼다.

러시아 사람들이 용천 용암포에 와서 땅을 차지하고 물러나지 않자 일본과 영국도 이에 개입하기를 원해 이곳에 대한 개항을 정부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이때 조선은 러시아의 원조를 중요시 여겨 결국 용암포를 허가하고 만다. 이는 나중에 러일전쟁의 빌미가 된다는 안타까운 일.


그리고 대한계년사는 을미사변을 굉장히 디테일하게 다루는데 그 후폭풍이 이 시기에도 어김없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을미사변 때 서명한 대신들, 이재면과 김윤식, 여러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처형하길 요청하지만 고종은 허락하지 않는다.

일본으로 건너간 박영효는 현 정부를 수구당이 집권한 부패한 정권으로 여겨 전복할 기회를 몇 차례나 노리기도 했다.


1902년은 가장 중요한 일영협약이 있던 해이기도 했다.

일본과 영국은 암암리에 협약을 맺으며 청은 영국이, 일본은 조선의 이익을 가지고 있음을 약속한다. 두 나라 간의 교전이 발생하면 서로를 돕는다는 약속도 함께 이루어진다.


특이했던 것은 엄귀비에 대한 묘사가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1900년 8월 엄씨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순빈에 책봉되는데 정사에 자주 간여하며 주변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등의 묘사가 나온다. 엄씨는 1902년 10월 황귀비로 높여 책봉이 된다.

황제에게 총애를 받고 아들을 낳았다는 정도만 알 뿐 이렇게까지 좌지우지하는 인물인 줄 몰랐다고 해야할까. 

승정원 일기 등에도 찾아봤는데 엄귀비가 책봉될 때의 사실만 나오지 다른 이야기는 찾질 못했다. 관련하여 좀 더 정보를 찾아봐야할 것 같다.


다음 권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는 해이다. 더욱 암담한 이야기들이 이어질 것 같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로부터 각 도 수령들은 오로지 탐욕스럽고 포악하게 백성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일삼았다. 또 나라의 돈으로 이자놀이를 하고, 위에다 바치는 것은 그 날짜를 넘기곤 했다. - P37

러시아 공사가 하야시 공사를 향해 말하기를 ‘일본과 러시아가 모여 협상한 다음 한국을 분할합시다‘하니, 하야시 곤노스케가 말하기를, ‘이 문제는 우리 정부를 향해 할 일입니다‘ 하고 거절했다. 다시 일본주재 러시아 공사가 이토 히로부미 후작에게 한국을 분할하는 문제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역시 사절하고, 이타가키 다이조 백작을 시켜 ‘한국을 연합하여 보호한다는 주장‘을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상에게 알리도록 했다고 한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 P39

당시 이용익이 내장원을 자기 사저에 두고 황실의 재정과 부세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맡아서 관리하며 가혹한 세금 징수를 일삼으니, 백성들은 매우 원망하며 괴로워했다. - P46

김영준은 재판장이 되어, 선량한 백성들을 상대로 없는 사실을 꾸며 함정에 빠뜨리고 재산을 억지로 빼앗았다. 김영준이 처형되자,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 P61

각 고을의 수령들이 나라에 바치는 돈을 교묘한 꾀로 농락하고 거저 떼먹는 폐단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심지어 여러 해 째 기한 안에 돈을 못 바치기도 했다. 이때에 이르러 탁지부에서 그 액수가 군수 2백여 명 모두를 장차 황제에게 보고해 면직시키고 붙잡아다가 납부토록 독촉하려 했다.
각 고을의 수령과 그 친족들은 앞다투어 벗어날 길을 꾀하려고, 혹은 돈을 더러는 수표를 가져와 바쳤다. - P63

박영효가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나라의 일의 형편이 매우 위태롭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서 정부를 전복하고 수구당을 제거해 우리 대한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활동자금 10만 원을 변통하여 얻은 뒤에야 일이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중략)」 - P68

이근택은 오로지 인민을 모략해 죄에 빠뜨려 재산을 빼앗음으로써 황제에게 사적으로 바치고 자기를 살찌우는 짓을 일삼았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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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1-31 2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이 올려주시는 대한 계년사
따라 읽는 재미 만큼 한국 현대서
울분과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엄귀비 등에 업혔던 고종!(아관파천)

결국 황귀비가 되는 군요

화가님 설 연휴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福마뉘 ^ㅅ^

거리의화가 2022-02-01 19:20   좋아요 2 | URL
읽다 보면 진짜 분노가 여러 번 치밀어올라요 헌데 지금 정치판도 다르지 않으니 화가 나고. 이 시기 백성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여러 모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니…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각국이 언제 도약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시점을 확정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잘못 설정된 문제이다. 어떤 국가의 공업화는 갑자기 시작되었고 어떤 국가의 공업화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작되었다. 어떤 경제는 돌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어떤 경제는 몇 차례나 도움닫기 과정이 필요했다. - P1745

19세기 중반이 되자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업화는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상업적 교류와 국제협약(자유무역을 포함하여)은 전체 유럽시장의 통합을 촉진했다. 유럽대륙의 문화적 동질성이 과학기술의 교류를 더욱 쉽게 만들었다. - P1746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 선도 업종의 전환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많은 새로운 상황이 출현했다. 경제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국가에서 생산방식의 전반적인 기계화가 실현되어 공업화 이전의 소규모 공방‘ 이사라졌다. 자영 소기업주를 대체하여 고용된 직업적 경영자가 사회와 문화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와 함께 주식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유한책임회사가 흥기하기 시작했고 민간기업의 관리가 관료화되면서 화이트칼라‘라는 직업계층이 두각을 나타냈다. 생산이 집중되고 카르텔이 형성되면서 전통적인 경쟁 메커니즘이 제약을 받게되었고, 다국적 콘체른이 등장했으며, 상표가 마케팅의 주도적인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이런 목적으로 각지의 협력자와 손잡고 만든 전지구적 판매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 P1748

아시아의 근대 초기에 대한 적극적인 재평가는 "왜 유럽인가?" 라는 오랫동안 거의 모든 분석이 다 끝난 화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장점과 업적(로마법, 기독교, 인쇄술, 정확한 자연과학, 합리적인 경제관념, 경쟁적인 국제체제, ‘유럽인의 개인주의‘ 등)을 하나씩 열거한뒤 유럽 이외에는 이런 조건을 갖춘 지역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두리뭉실한 결론을 내려서는 설득력이 없다. 근대 초기의 유럽과 아시아는 상호 접근이 늘어갈수록 그들 사이의 질적·양적 차이는 좁혀졌고 (19세기 중반에 출현한) 세계를 성공자와 실패자로 나누는 이분법은 더욱 지지를 받기 어려워졌다. - P1750

에너지원은 19세기라는 음악의 주선율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에게 익숙한 에너지원은 (주로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힘이었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효능을 발휘하는 힘, 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여러 가지 기능과 작용을 하는 힘이 되었다. 19세기에 자연과학의 이상은 더는 근대 초기의 기계장치가 아니라 역동적인 에너지원과의 상호관계에 있었다. 그 밖의 과학 분야도 모두 이런 경로를 따라갔다. - P1755

19세기의 공업문명은 화석연료에 의존했고 에너지의 보다 효율적인 기술적 · 기계적 전환이 꾸준히 일어났다. 석탄을 연료로 하는증기기관의 사용은 그 자체의 나선형 발전과정을 열었다. - P1758

에너지가 풍부한 유럽은 비서방세계와 마주할 때 "에너지가 넘쳤다." 이 시대의 문화 영웅들은 무위도식하는 명상가, 고행승, 과묵한학자가 아니라 정력이 넘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vita activa) 실천가, 피로를 모르는 정복자, 두려움을 모르는 여행가, 지칠 줄 모르는 탐색자, 독재적이고 오만한 기업 경영자였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개인적인 패기와 활력을 통해 서방세계 힘의 본질을 보여줌으로써 찬탄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서방의 현실적인 우위는 태생적인 속성처럼 비쳤고 나아가 인종적 우위를 보여주는 표지로 인식되었다. - P1764

수출주도형 경제의 거시경제적 성공 여부는첫째, 생산이 노동집약적 가족기업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수출에서발생한 수익이 국내에 남아 사회 내부에 비교적 균등하게 배분되는지, 둘째, 수출상품 생산의 주력 형태가 다량의 저임금노동으로 생산하고 소유권이 외국기업의 수중에 있는 플랜테이션 또는 광산이어서 대부분의 수익이 국외로 흘러나가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첫 번째 유형의 구조가 두 번째 유형의 구조보다 국민경제와사회 전체의 발전에 유리했다. 두 번째 유형의 구조에서도 경제성장은 일어났지만 고립된 지역에 국한되어서 다른 경제 영역에 자극효과를 주지 못했다. 이 법칙의 중요한 예외는 남아프리카뿐이었다. - P1769

1912-20년, 중국 공업의 성장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88) 1920년 무렵, 중국은 취약하기는 하지만 발전 잠재력이 있는 공업화 경제의 기초를 갖추었다. 군벌의 혼전으로 인한 내정의 혼란, 경제발전 정책을 추진할 강력한 정부의 부재, 일본의 제국주의정책은 중국 경제의 도약단계가 반세기나 늦춰진 주요 원인이었다.
1980년 이후 위대한 도약이 시작되었다. 그 전의 중국 공업화 역사의특징은 제국 말기의 정부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한 지체된 발전과정이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가 저지된 1920년대의 도약이었다. - P1773

‘낙후‘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을 사용할 때는적용 대상이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어떤 시점에서는, 특히 19세기말에는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한 지역은 분명히 인도나 중국의 비교적 발달한 지역보다 앞서 있지 않았다. 경제적 성취를 판정하는 잣대는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소수의 대형 성장 지역이었다. 인도에서는 정부의 정책 때문이 아니라 민간 기업가의 결심의 결과로1910년 또는 1920년 무렵 몇몇 영역에서 대규모 공장생산이 등장했고, 이로부터 자기이익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공업 프로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되었으며, 인도의 도시지역에서 ‘현대화’를 기치로 내건 공업화와 기타 발전과정이 나타났다.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더라면 인도 경제는 ‘좀더’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인가? - P1776

메이지정부는 지속적으로 국영경제를 건설할 생각이 없었다. 초기 단계의 자극을 제공한 후 정부는 점차로 대다수 공업 분야에서 빠져나왔다. 이것은 정부의 예산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기업계의 선두주자들도 공업화를 전체 일본을 위한 애국사업으로 생각했다. 사업의 동기는 개인이익의 최대화가 아니라 조국을 위한 봉사였고 미국식의 놀라운 사치성 소비(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Veblen이 말한 과시성 소비)를 비난했다. 이런 국가관의 결과로 기업은 짧은 시간 안에 습득한 세계시장에서의 귀중한 경험을 서로 나누어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게 사회로 전파했다. 관료와 자본가들은 다양한 공업구조를 구상하고 또 실현했다. 이로써 일본은 수입의존성을 최대한 탈피할 수 있었다. 이런 정책은 국가의 안보를 고려한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메이지 과두체제는 물질적 발전의 약속과 실현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대중적 지지기반 — 어쨌든 그들은 전통적인 정치질서를 파괴했다 을 개선하고 넓히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이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투자하려는 민간 기업인들도 충분했다. - P1780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국 공업화의빠른 속도를 지나치게 극적으로 서술해서는 안 되며 미국 공업화의장기 연속성을 주목해야 한다. 그 밖에도 미국의 공업화는 주로 자본주의 시장역량의 자유로운 발전이란 법칙을 따랐지만 그것이 성공요인의 전부는 아니었다. 1862-1913년 사이의 (중간에 두 명의 민주당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를 제외한) 공화당 집권기에 연방정부는 공업화를 정책적 사업으로서 추진하면서 전국 시장의 통합, 보호관세, 금본위 화폐제도 등 중요한 제도를 실시했다. 정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공업화는 - 일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것이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고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ㅡ 역사적으로 예외에속한다. 서방의 자유주의 공업화와 동방의 국가계획 공업화란 양대모형이 선명하게 대립한 상황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 P1781

1913년 무렵에 몇몇 국가에서는 이미 전 지구적 범위에서 활동하는 국가자본주의가 등장했다. 공업화,구체적으로 말해 현지 에너지원을 이용하여 발전한 기계화된 생산은 모든 사례가 지역적 특성에 기반한 발전과정이었다. 반면에 19세기의 자본주의는 점진적으로 지역적 기업 활동을 전 지구적 범위의활동으로 확장시킴으로써 더 많은 가능성을 창조한 활동이자 경제제도였다. - P1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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