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견제세력으로? 어떤 맞불로? 감지하기 힘들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도처에 편재하는 그 힘에 맞서려면 어떤 전투를 벌여야 할까? 싹을 틔우기도 전에 바로 질식당하고 소멸해버리지 않으려면 어떤 싸움을 걸어야 할까? 어떤 틈새를 파고들고 어떻게 우회할까? 어떻게 넘어설까? 어떤 식으로 훌쩍 도약해야 지구 전체를 쓰레기로 뒤덮어버린 그 시스템을 넘어설까?

그것은 우리 인간의 무한한 고독과 무한한 취약성을, 취약하지만 삶을 이어가려는 끈질긴 고집을, 분별없이 삶에 집착하는 고집을 보여준다.
〈걷는 사람〉은 꼼짝 못하게 굳어 있는 동시에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이 마치 넘실대는 순간 추위에 얼어버린 바다의 파도 같다.
그는 고독하다, 절대적으로 고독하다. 도무지 속을 파고들 수 없을 정도로 닫혀 있으며, 자기 안에 깊이 틀어박혀 있어 가 닿을 수가 없다.

그는 앙상하지만 무겁다. 아마도 홀로코스트와 부헨발트 수용소의 희생자들에 대한 앎으로 무겁다. 그는 늙었고, 시련의 흔적이 역력하다. 삶의 전장에서 무수한 타격을 입고 돌아와 기진맥진해 있다.
그는 세상의 무게에 등이 휘었다. 어쩌면 세상을 그렇게 만든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무한히 취약하다. 한 포기 풀처럼, 잔가지처럼 취약하다. 그토록 무력하고, 그토록 보잘것없다.

그는 소멸 직전이다. 어쩌면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걷고, 걷고, 걷고, 걷고, 걷고, 계속 걷고, 용감하게 계속 걸으며 앞을 똑바로 응시하고, 성큼성큼 걷기를 계속하고, 주춤거리지 않고, 잔유물들의 세계 속에서 쉬지 않고 걷는다. 무의미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고독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예고된 온갖 종말론에도 불구하고 계속 걷는다. 걷기를 멈춘다는 건 곧 죽음을 뜻하므로. 바람과 패배에 맞서 계속 걷는다. 자코메티처럼, 나처럼, 우리처럼.

라틴어로 레젠다legenda인 전설은 읽혀야 하는 것, 따라서 기억해야 하는 것, 우리가 금박을 입히거나 검게 칠해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으로 만드는 진실이다.

자코메티에게 예술은 모든 화려함과 풍요로움에 맞서 저항하는 것, 심지어 전적이고 단호하게 반대하는 것, 관광객을 끌어당기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현실을 장식하기를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예술은 젊은 사람들이 말하듯 너무 아름다운 아름다움인 비욘세와 제이지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완벽하게 상반되는 형태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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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의 대안적 메시지는 논쟁에 뛰어들고, 진보와 옛 - P60

것의 분리를 포기하고, 거주 가능성이라는 근본적 문제에관심을 기울이고, 생산보다는 거주 가능한 조건을 우선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려면 할일이 많지요! 우리는결코 근대인이었던 적도 없지만 이제 우리가 근대인이었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났습니다. 작업장은 완전히 열려 있어요. - P61

기술한다는 것은 앉는다는 것,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것, 토대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철학과 존재론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 나는 늘 실용적이고 - P77

경험적이라고 할 만한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래서 내가찾은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의존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적어보시오." 혹은 "당신이 무엇에 의존하느냐가영토를 정의할 겁니다." 이것이 내가 하려는 작업입니다. - P78

나는 여전히 학파를 만들지 않았지만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에 맞는 진정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학문 분과들이 집합적으로 작업하는 모델 말입니다. 그 학문 분과들은 매체도 각기 다르지만같은 문제에 접근하지요. 이러한 모델은 과학적 생산물을 내놓고 A급 혹은 B급 학술지에 발표한 후에 대중에게까지 확산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연구자 못지않게 혼란에 빠져 있는 대중을 향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모델이지요. - P110

"여러분은 과학자니까 사실을 생산해내십시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이자벨 스텡거스가 자기 방식대로부단히 보여주었잖아요. 사실들은 희박하고, 과학적 발견은 정말 희소하지요. 어디서나 통하는 과학적 방법에 - P130

대한 관념, 그러니까 하얀 가운을 걸치면 아무 말이나해도 과학적 권위가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관념은 완전히 허구입니다. 그런 건 사기예요. - P131

투사는 종교적 진리 양식을 차용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그 양식의 변동, 변화, 주석, 매개를 제거하고 완전히 세속화된 버전으로 도입합니다.
투사는 정치를 규정하는 행위들을 모조리 상실했습니다. 그와 달리, 특정 장소의 풍력발전소 문제, 또다른 곳의 이민자 문제가 규정이나 명령의 형태로 되돌아오기까지, 또한 명령이 마침내 실행되고 준수되기까지 어마어마한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활동가라고 부릅니다. - P156

자기가치관과 의견을 고수한다면 당신은 정치를 하는 게 아니고, 작전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게 전혀 아니에요.
그게 첫번째 정치적 과오입니다. 두번째 정치적 과오는
"난 이미 명령을 내렸고 필요한 것도 다 마련했습니다.
봐요. 벌써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이미 규정들을 다만들어놓았습니다"라고 하면서 다들 그대로 따라줄 거라 생각하는 겁니다. 이러한 과오 중 으뜸은 자기 의견을 믿고, 그것을 고수하고, 그 의견이 충실하게, 투명하 - P157

고 절대적으로 대변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 P158

어떤 존재가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다른 무엇을 거쳐야 하지요. 내가 여기 와서 당신과얘기를 나누기 위해 그전에 아침부터 먹어야 했던 것처럼. 아주 평범한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나는 삶의 끝까지나를 지속하기 위해 계속해서 타자를 집어삼킵니다. 이러한 성질을 지니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을 거치지 않는 한 결코 시간 속에서 지속할 수 없어요. - P169

그덧은 존재로서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은 토대를, 나머지 모든 것을 떠받치는 기저를,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그것을 정의해주지 않습니다. 철학은 겸손한 실행이요. 더욱이 그 또한 글쓰기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철학은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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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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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입성에 성공한 십자군은 이제 방어를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
예루살렘 초대 왕은 고드프루아가 맡았으나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동생인 보두앵이 18년 간 예루살렘 왕을 지켰다. 그 기간동안 십자군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부근 정복을 끝낸 뒤 에데사,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예루살렘으로 세력이 쪼개지면서도 통합 세력을 유지했다.

제2차 십자군의 발단은 에데사를 잃은 일 때문이었다. 그곳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 부근의 십자군 세력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중요했던 것이다. 사태를 심각하게 여긴 로마 교황도 자신이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대리 자격으로 수도사인 베르나르두스를 보내기로 한다. 1차 십자군이 민중들과 봉건 제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번에는 최고 권력자인 프랑스 왕(루이 7세)과 독일 황제(콘라트 3세)가 직접 참전했다. 이는 베르나르두스의 설득이 먹혔기에 가능했다. 또한 1차 때 부족했던 물자 보급 문제를 위해서 이번에는 이탈리아 해양 세력을 이용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난다.
다만 규모는 1차 십자군에 비해 소수였는데 그래도 정예병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소아시아를 지나면서 투르크군의 게릴라 작전에 당해 상당수의 병력을 잃고 황제가 부상을 당하는 손실을 입는다. 프랑스군도 적의 기습으로 병력을 일부 잃고 한동안 고립을 겪었다.
그래도 목적지인 다마스쿠스를 위해 남은 병력은 이동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군량도 부족해지고 십자군에게 특히나 익숙하지 않았던 극심한 더위는 그들을 곤란하게 했던 것 같다. 게다가 이슬람의 우누르였던 알레포 지역의 누레딘(그의 아버지인 ‘장기‘가 지략가였다)이 다마스쿠스에 온다는 소식을 듣자 십자군은 다마스쿠스에서 철수를 결정한다. 이로써 2차 십자군 입장에서는 전쟁이 실패했다.
독일 황제와 프랑스 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유럽으로 돌아간다. 로마 교황도 실패의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았다. 교황 대리로 떠났던 베르나르두스가 그럼에도 성인에 올랐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다치고 죽은 병사들은 자신의 고향도 아닌 외국의 어느 산야에 묻혔으나 책임을 지지 않았던 사람은 정작 성인에 오른다는 것이...

당시 이슬람의 시아파 주류는 셀주크투르크족이었고 수니파 주류는 아랍족이었다.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힘이 약해지자 재상인 샤와르의 아들 카릴이 수니파 권력자였던 누레딘에게 군대를 요청한다. 이때 장군 시르쿠의 조카였던 살라딘이 이집트로 향했다. 샤와르가 급사망(!)하면서 살라딘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 누레딘은 카이로(시아파)까지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최고 권위자는 누레딘이었지만 살라딘은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전진기지를 세우고 길을 나선다. 이때 유럽 세력은 올 여력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그리스도교 보호를 위해 나선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종교 기사단,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병사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세력 중심의 군대가 아코를 떠난다. 다마스쿠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목을 막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갈릴리 지방을 손에 넣는다. 사실상 팔레스티나 지방의 항구도시를 수중에 넣는 쾌거를 거둔 것이다.

1차 십자군 방어를 맡게 된 발리앙 이벨린은 60여명 정도로 예루살렘을 맡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 그는 기지를 발휘해 예루살렘 내 있던 16살 이상의 장정들을 모두 기사로 임명한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에서 그는 회담을 택한다.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생각이었기에 그의 결정은 현명했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이슬람 세력은 그렇게 88년 만에 예루살렘 성도를 자신의 영역으로 얻게 되었다.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수도사와 기사의 겸업 집단인 종교 기사단은 십자군의 산물이다. - P.34

중근동에 건설된 십자군 사이의 성채는 대표적인 것만 해도 백개가 넘는다. ‘성채가 아니라 요새‘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 소규모 건축물과 감시원만 두고 있던 탑까지 더하면 2백개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많은 방어 시설이 근동 서쪽 절반의 좁은 지역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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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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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지금까지 유럽 안에서 그리스교도끼리 해온 일을 이제 전도의 범위를 오리엔트로 넓혀 이슬람교도를 상대로 전개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포부의자 의지였다. 

당시 로마를 비롯한 서유럽은 가톨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비잔틴제국은 그리스 정교회, 동방을 비롯하여 에스파냐 등지까지 이슬람이 확장세를 떨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스교 측은 이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는 탈환이자 해방이라는데 상대 측에서 보기에는 과연 어떨지... 


아무튼 1차 십자군은 가난한 민중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데서 이후 십자군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은자 피에르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 있던 군중이 현재의 삶에 불만을 품고 일어났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차 십자군의 주요 멤버는 로렌 공작인 고드프루아와 그의 동생 보두앵, 풀리아 공작인 보에몬드와 그의 조카 탄크레디, 툴루즈 백작인 레몽, 교황의 대리인인 아데마르 주교였다. 


안티오키아로 향하는 여정길에서 십자군은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승리하고 에데사를 얻는다. 보두앵은 에데사 영주가 되고 주변은 에데사 백작령이 된다. 

십자군은 드디어 안티오키아에 당도한다. 안티오키아는 고대 번영 도시였으나 이무렵에는 쇠퇴의 길에 접어든 때였다고 한다. 안티오키아 성벽은 탑만 4백여개로 방어에 최적인 곳이었다. 당시 시리아는 셀주크투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시리아 영주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두 명의 칼리프(종교 지도자)가 존재했다. 바그다드는 아바스 왕조로 수니파였고 카이로는 파티마 왕조로 시아파였다. 


안티오키아 총독은 전투를 앞두고 그리스도교 신자 남성들을 그곳에서 추방한다. 그러자 안티오키아 위성 도시의 주민들이 봉기했다. 십자군은 이곳을 공격함으로써 안티오키아 공략에 대한 키를 얻는다.

그러나 어느 전쟁이든 문제가 되는 것은 식량의 부족이다. 1차 십자군 여정을 확인하면 너무 준비 없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전쟁을 하는데 식량과 무기, 교통 수단 등에 대한 준비는 기본인데 1차 십자군은 그 부분이 너무 미흡했다. 

식량이 부족해지자 십자군에 탈주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에 영국에서 군량을 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문제가 일정 해결될 수 있었다. 이때 군량 뿐 아니라 탑이 함께 도착했는데 이는 안티오키아를 공략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었다.

셀주크투르크군이 참여하면서 안티오키아 성벽은 무너진다. 그러나 셀주크 투르크군이 안티오키아 성벽을 둘러싸자 십자군은 성 안에 갇히고 이때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는 자기 군대를 철수시켜버림으로써 십자군을 분노케 한다. 

이때 셀주크투르군 내 분열이 일어나자 보에몬드가 그것을 이용하면서 십자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할 무렵 십자군에 참전한 제후는 이미 11명에서 6명으로 줄어 있었다. 제후의 수가 줄었다는 것은 민중군과 일반 병사들의 사상자 숫자는 훨씬 더 많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중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자는 얼마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십자군 전쟁을 다룬 국내 번역서 중 오랫동안 중쇄를 거듭하고 있는 책이다. 

십자군 전쟁사를 언젠가 읽어보겠다고 생각만 하고 미루다 이제야 읽어볼 결심이 생겼다. 그런데 막상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국내 번역서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선택지가 너무 좁았다. 

십자군 전쟁 자체만을 다룬 책으로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십자군 전쟁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책은 많이 있다. 그러나 당장 그 책들을 다 읽어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니.

결국 로마인 이야기도 거른 내가 이 책을 구입해서 집어들었다는 이야기.


이 책은 전쟁 자체에 대한 역사라기보다는 십자군을 이끈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역사서지만 딱딱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대중들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읽으면서 계속 찜찜한 것은 영웅 서사와 제국주의적 시각에 대한 불편함이다. 

문명과 야만을 구분짓는 것은 어느 한쪽을 문명으로 생각하고 전제한 개념인데 이것이 지금도 통용될 수 있을런지. 

저자는 재판을 하면서 유럽인, 그리스도교 관점에 대한 시각에서 아랍인의 관점에 대한 시각을 더해 균형감을 맞췄다고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었음을 느끼게 하여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도 중쇄를 거듭한다는 것은 독자들의 선택을 결국 받는다는 방증이겠다. 개인적으로는 십자군 전쟁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도록 새로운 흥행 대중역사교양서가 나왔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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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핑주의자 선언
익명 지음, 홍명교 옮김 / 미디어버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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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보다 이목을 끄는 신간이 없지만 그중에 간혹 눈길을 이끄는 책이 있다. 물론 관심이 가는 책들은 새 책 목록을 직접 읽으면서 고르거나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며 발품을 팔 때 더 많이 찾게 되지만. 이 책은 전자의 경우를 통해서 알게 된 책이다. 


제목이 탕핑이다. 음? 탕핑이라니? '탕핑'은 드러눕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탕핑주의자'는 '드러누운 사람들'이란 의미다. 드러누움으로써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례적 삶에 저항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애써 일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중국의 젊은이들을 파고들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몇 년전 '욜로'라는 말이 뜰 때가 기억난다. 이것은 지금도 통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지난 부모 세대 아래서 너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며 깨달은 바 있는 청장년층의 의지가 담긴 삶의 패턴이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욜로'적 삶의 연령층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 중 하나인 것 같고. 예를 들면 '인생 뭐 있어?'한 태도 말이다.

그렇지만 탕핑주의자들이 하는 말을 언뜻 생각하면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너무 천하태평 아니야? 게으름을 조장하는 행위 아니야?'로 볼 수 있는데 사회적인 요인들이 더해지면 그렇게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눕는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손쉬운 행동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로, 탕핑주의자들은 오히려 누워버리는 그 순간부터 이미 국가의 외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또 다른 종족집단을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몸을 뉘인 그 땅조차 이전의 국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편제 바깥의 땅이 되어버렸다. 만약 이러한 상태에서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길 원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주권이나 재산권과는 무관해야 하지 않을까?


처음에 '드러눕는다'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떠올린 장면은 전장연의 지하철 파업의 모습이었다. 파업을 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권리를 빼앗겼을 때, 내 목소리를 이웃 또는 사회가 들어주지 않을 때, 애초에 그마저도 권리 영역 자체가 없을 때가 아닐까. 절박함에 나오는 행동의 발로라 생각된다. 도저히 살아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면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 전장연 파업 때 유독 신문지상에서 본 단어는 그것이었다. '오죽하면 그럴까.' 그들의 파업으로 불편을 겪었을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하철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위해서 턱을 넘어야 하고 더 긴 시간을 돌아서 가야만 한다. 이마저도 모든 지하철에 관련 시설이 존재하지 않고 들쭉날쭉하다. 지하철만 예로 들었지만 다른 교통수단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애시당초 선택권 자체가 없는다는 것이 차별의 시작이 아닐런지.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서면, 마치 시시포스의 거대한 바위를 방불케 하는 어렵고도 힘든 일이 될 수 있을까. 영원히 그 문을 나설 수는 없겠지만, 계속해서 걷고 또 걷는다. 밥 먹을 때든, 아니면 잠을 잘 때든 말이다. 잠결에 꿈 속에서도 마치 이미 오랫동안 걸어서 쉬지도 못하는 것처럼, 노동의 의지는 이처럼 우리가 배척하는 노동의 신체 안에 관철된다. 앞서 찾아온 미래에서 우리는 이처럼 치유할 수 없는 가속주의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파업이라는 단어가 낮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 삶이 정상적으로만 흘러가는 경우가 오히려 더 드물었다. 급여를 받지 못해 소송을 걸어야 했을 때가 있었고 집이 날아가 길거리에 나앉아야 했을 위기도 있었다. 대통령의 무능과 아집에 칼을 들었던 촛불집회부터 시작하여 불과 몇개월 전 내란을 일으켜 국가적 위기 또는 재난에 봉착해 '이러다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니야?' 생각하여 국민적 행동을 해야 했던 일까지. 개인적 파업은 사회적 파업과도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드러눕는 행위는 '거부권'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를 확장해서 볼 수도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책에서도 관련한 언급이 나온다. 비단 이는 특정 계층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 전체에서 흘러나올 수 있는 이야기라고 말이다. 


탕핑주의는 어떤 한 사회의 순환로에서 벗어나 발생하는 게 아니라, 모든 고리로부터 발생한다. 탕핑주의는 특정 사회계층과 신분집단의 결별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에서 발생한다. 입시와 일, 보육과 가정을 이루는 것에 대한 거절을 연결시키고자 했고, 그렇게 해서 그것은 자연스럽게 현 질서 하에 억압받는 모든 세대를 연결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강요와 복종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 남성과 여성, 노동자와 실업자, 시민과 농민, 유목민, 건달, 학생과 지식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그리고 그밖의 성소수자들, 노숙인과 마이너스 주택 대출자들을 연결하고자 시도하는 것에 있다. 이보다 더 비밀스러운 협약 속에서 천천히 진행되는 총파업이 또 있을까?


아주 얇은 책이라 짧은 시간 내에 읽을 수 있지만 이처럼 생각을 확장할 수 있다. 특별한 것은 한글 뿐 아니라 한자, 영어로도 실려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독자를 위한 배려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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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4-29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가 똑같이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열심히 사는 사람도 대단하다 싶지만, 그렇게 해서 얻는 건 그렇게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즐겁게 열심히 하는 건 괜찮겠네요 사람마다 사는 건 다르고, 다르게 사는 것도 있다는 걸 알면 좋을 듯합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5-04-29 13:30   좋아요 0 | URL
중국의 젊은 세대의 생각도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쟁으로 인해 일부 나가 떨어지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 같고요. 얻을 것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시니컬해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순리인 듯도 합니다. 동일한 잣대로 볼 수는 없겠지요. 말씀대로 사는 패턴은 다르고 상황과 환경은 다를테니까요.

그레이스 2025-04-29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마드, 천개의 고원을 생각하게 하는 글일까요?

거리의화가 2025-04-29 13:31   좋아요 1 | URL
ㅎㅎ 제가 그 책을 오래전 찜만 해두고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 조금 더 지식력이 쌓이면 읽어야지 했는데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