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와 궁핍을 구분하는 것은 일차적 구분에불과하며, 단순하고, 그 자체로는 아직 충분히 정확하지 않다.
이 모든 일이 강제적인 필요의 산물만은 아니다. 인간은 달리 어쩔 수 없으므로 먹고 입고 집을 짓고 살지만, 그래도 그가 하는 것과는 다르게 먹고 입고 집을 짓고 살 수도 있다. 유행의 급변은 이것을 "통시적으로(dia-chronique)" 이야기하고, 현재와 과거의 매 순간 세계의 대립은 이것을 "공시적으로(synchronique)"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만 사물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아니라 "사물과 말"의 영역에 있다. 이때 이 "말"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의 - P437

미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 - P438

"나는 효율성을 가진 전통적 활동을 기술이라고 부른다"라고 마르셀 모스는 말했다. 결국 기술은 인간에 대해서 인간의 노동을 적용하는 활동, 태초부터 영구히 계속되어온 훈련을 의미한다.
기술은 역사의 넓이를 가지고 있고, 필연적으로 역사의 완만함과 모호함을 나누어진다. 기술은 역사에 의해서 설명되고 또 기술이 역사를 설명하지만, 그렇다고 그 둘 사이의 상관관계가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이와같이 역사 전체라는 극단적으로 확대된 영역에서는 하나의 움직임이 아니라여러 다양한 움직임과 다양한 반향, 다양한 "톱니바퀴의 물림이 있는 법이다. - P441

당시 중국과 이슬람은 오늘날 우리가식민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진 부유한 사회였다. 그 옆의 서구는 아직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3세기부터 장기적인 긴장이 물질문명을 흥기시켰고 서구세계의 심리를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역사가들이 황금에대한 갈망, 세계에 대한 갈망, 혹은 향신료에 대한 갈망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 실용적인 적용에 대한 추구가 늘 함께 있었다. 그 - P545

것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도록 인간의 노력을 경감시키고 동시에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세계를 장악하려는 의도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실제적 발견들의 축적, 그리고 에너지원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한 - P546

커다란 흥미는 유럽이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유럽의 참모습이었으며 우월성을 약속했다. - P547

기술은 인류의 생활을 앞으로 밀고 간다. 그러면서 기술은 작은 계단들을 올라가서 한단계 높은 층계참에서 새로운 균형을 이루고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무른다.
기술이 정체하는 것, 그리고 하나의 "혁명"에서 다음 혁명으로, 하나의 혁신에서 다음 혁신으로 진보해가는 것은 감지할 수 없는 정도이다. 이 모든 것은 마치 끊임없이 제동이 걸려 있는 상태와 같다.

농업이야말로 수천 년간 인간의 최대 산업이었다. 그런데도 기술의 역사에서는 그것을 흔히 산업혁명의전사(史) 정도로만 연구해왔다. 그리하여 기계역학, 야금술, 에너지원은일급의 지위를 차지한 반면, 농업 기술은 반복되는 일상이든 변화이든(농업역시 비록 아주 느리기는 하지만 변화한다) 간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쳐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 P568

화폐경제는 어느 곳에서도, 심지어 16-17세기, 나아가 18세기의 프랑스와같은 곳에서도 결코 완성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화폐는 단지 일부 지역과 일부 분야에만 파고들어갔다. 화폐는 그 자체로서보다는 그것이 가져온 것 때 - P579

문에 새로운 것이다. 화폐가 가지고 온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의 가격마저 급격하게 변동시키고, 인간이 서로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자기 자신도, 관례도, 인간의 오래된 가치도 무시하게 되는이해할 수 없는 관계가 그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상품이 되고, 인간 자신이
"사물"이 된다. - P580

도시는 경제팽창의 원인인 동시에 그팽창에 의해서 창출된다. 그러나 도시가 모든 종류의 경제팽창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게임을 이끌어가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어느 관찰 장소보다 도시에서 이 게임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 P646

대도시는 근대국가를 만들었고 근대국가는 대도시를 만들었다. 전국 시장은 대도시의 압력 밑에서 만들어졌고 국민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도시는 자본주의의 중심부에, 그리고 유럽에서 매일같이 다양한 물감을 섞고 있는 근대문명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가에게는 대도시가 무엇보다도 유럽과 다른 대륙의 진화에 - P747

대한 대단히 훌륭한 시약 역할을 한다. 그 시약에 의한 검사 결과를 잘 해석하면 물질문명의 전체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을 끌어내게 되고 그 역사의 통상적인 한계를 넘게 된다. - P748

대도시는 그 하나만으로 측정해서는 안 된다. 대도시는 도시체제 전체 총량속에 들어 있다. 대도시는 전체 도시체제를 활성화하고 전체 도시체제는 대도시를 규정한다. 18세기 말에 점진적인 도시화가 정착되어갔고 그것은 다음 세기에 더욱 가속화했다. 런던과 파리의 외면을 넘어서, 하나의 예술,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부터 새로운 예술,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이행했다. 4분의 3 이상이 농촌인 앙시앵 레짐의 세계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지고 쇠퇴한 것이다. 한편 대도시들만이 이 새로운 질서의 정착을 확고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대도시들이 이제 나타나게 되는 산업혁명에 구경꾼으로서참여한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은 런던이 아니라 맨체스터, 버밍엄, 리즈, 글래스고, 그리고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소도시들이었다. - P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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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는 시대, 나라, 문명에 따라 여러 면모를 띤다. 그에 비해 거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도 시작도 없는 사회적인 코미디이 - P242

다. 그 코미디는 사치를 주제로 하며 또 사치를 판돈으로 걸어놓고 전개된다. 이것은 사회학자, 정신분석학자, 경제학자, 역사가들에게 소중한 광경을보여준다. 물론 특권층과 관중들 그 특권층을 바라보는 일반 대중들―사이에 일종의 공모관계를 이루는 합의가 있어야 한다. 사치란 다만 희귀한 것이나 허영 정도가 아니라 성공, 사회적 매력, 가난한 사람들이 언젠가 도달하려는 꿈이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도달하는 순간, 이전의 영예는곧 사라져버린다. 어떤 의사 겸 역사가가 최근에 이렇게 쓴 바 있다. - P243

모든 사치는 낡은 것이 되고 유행은 지나간다는 것은 놀라울 것도 없는 교훈이다. 그러나 모든 사치는 타고 남은 재에서부터, 그 실패로부터 되살아난다. 사치는 사실 그 어느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사회적 수준의 차이를 반영하며, 이 수준 차이는 매번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 생겨난다. 이것은 곧 영원한 "계급투쟁"이다. 이투쟁은 계급만이 아니라 문명의 투쟁이기도 하다. 문명은 끊임없이 감시하고, 또 부자가 빈자에 대해서 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문명 간에 사치의사회적인 코미디를 행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상호적인지라, 짧은 거리이든 먼 거리이든 간에 문명들은 어떤 흐름들을 만들어내고 가속화된 교환을 유도한다. - P244

1350-1550년의 유럽은 1인당 기준으로 보면 생활수준이 높은 시기였다. 파국적인 흑사병이 지나가고 노동력이 모자라게 되자 일하는 사람의 노동조건이 대단히 유리해졌다. 이때보다 실질임금이 더 높았던 때는 없었다.
1388년에 노르망디의 참사회원들은 그들의 땅을 경작할 사람을 구하는 데 금세기 초에 6명을 고용할 수 있던 값으로 한 사람밖에 구하지 못한다"고불평했다. 바로 이 역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중세로 거슬러올라갈수록 더 큰 불행을 보게 된다는 단순론자들의 견해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들의, 다시 말하면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수준에 대해서 말하면, 그 반대가 사실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1520-1540년 이전에 인구가 그리 많지 않던 랑그도크에서는 농민과 장인들이 흰 빵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흘러 중세의 "가을"에서 멀어질수록 상황이 악화되어서 심지어 19세기 중반에까지 사정이 계속 나빠지는 곳도 있었으며, 동유럽의 일부 지역, 특히 발칸 지역에서는 20세기까지도 계속 악화되었다. - P256

부자들은 정교한, 어찌 보면 지나치게 정교한 소스들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후추, 향신료, 아몬드, 호박, 머스크, 장미수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첨가물을 다 섞었다. 그리고 랑그도크출신의 요리사들도 기억해야 한다. 파리에서는 이들을 최고로 쳤으며 아주비싼 값에 고용했다. 가난한 사람이 이 잔치에 끼고 싶으면 하인과 잘 통해놓든가, 아니면 베르사유의 "중고 음식 가게로 가야 했다. 이곳에서는 왕가에서 먹고 남긴 음식을 팔았는데, 베르사유 시민들의 약 4분의 1이 부끄러움도 없이 이 음식을 먹고 살았다. - P267

루이 14세의 궁정에서는 포크를 사용했을까?
몽토지에 공작은 "끔찍스러울 정도로 청결했다"고 생 시몽은 말했다. 그러나 왕은 그렇지 않았으니, 생 시몽에 의하면 왕은 닭 스튜 요리를 손가락으로 먹는 데에 아주 능숙했다! 부르고뉴 공작과 그의 형제들이 왕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이전에 배운 대로 포크를 들자, 왕은 사용하지 못하게했다. 이 일화는 팔라틴 백작부인이 만족스럽다는 투로 전했는데, 그녀로말하면 "식사 때 언제나 나이프와 자신의 손가락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17세기에 식사에 초대된 사람들에게 냅킨을 아주 많이 제공했던것이다. 그러나 냅킨이 개인 집에서까지 쓸 정도로 퍼진 것은 몽테뉴의 말에의하면 바로 그의 시대부터였다. 또한 그 때문에 식사 중에 여러 번 반복해서 물병과 대야를 이용해서 손을 씻는(lave-main) 관습이 생겼다. - P271

핵심적이고 대체가 불가능한 소금은 성스러운 음식이었다("고대 히브리어나 오늘날 마다가스카르어로 소금 친 음식은 성스러운 음식과 동의어이다"). 밀가루로 만든 무미건조한 죽을 먹는 유럽은 많은 양의 소금을 소비했다(1인당 하루에 20그램의 소금을 소비했는데, 오늘날의 두 배에 해당하는 양이다). - P275

값싼 단백질원인 치즈는 유럽의 일반 대중이 먹는 아주 중요한 음식이었으며, 유럽에서 멀리 떠나 살게 되어 치즈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큰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1698년에 프랑스 농민들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싸우는 군대에 치즈를 팔아서 큰돈을 벌었다. 그렇지만, 특히 프랑스에서그러했던 것처럼, 치즈는 요리에서의 큰 명성과 "고귀함을 아주 천천히 얻었다. 요리책에서 치즈는 아주 작은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했으며, 품질이나특출한 품명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염소의 젖으로 만든 치즈는 양이나 소의젖으로 만든 것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겨져서 경멸의 대상이었다. - P277

음식의 역사에서 후추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오늘날 후추는 단순한 양념류로서 결코 필수불가결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과거에는 수 세기 동안향신료의 하나로서 레반트 무역의 핵심 물품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후추와 관련되어 있었다. 15세기 해외 모험가들의 꿈도 후추와 연관되었다. 이때는 "후추처럼 비싸다"라는 속담이 있던 시대였다. 유럽인은 오랫동안 후추를 비롯해서 계피, 정향, 육두구, 생강 등의 향신료에 강렬한 열정을 품었다. 너무 성급하게 광기라고까지 말하지는 말자. 이슬람, 중국, 인도에서도 비슷한 취향이 있었을 뿐 아니라, 모든 사회가 음식에 열광했는데, 언제나 강렬하고 꼭 필요했으며 열광의 대상도 다양했다. 이것은 음식의 단조로움을 깨려는 필요에서 나왔다. - P291

너무 성급하게 설탕 혁명이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일찍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지만 또 극도로 느리게 진행된 것도 사실이다. 19세기 초에도 설탕은 아직 "깊이 있게"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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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간이 먹는 음식의 운명을 대강 결정하고 원격조정한 것은 오래 전에 일어난 두 혁명이었다.
구석기시대 말기에 "잡식동물인 인간은 큰 동물을 사냥하기 시작했고, 이때 형성된 "대육식주의"의 취향, 즉 "고기와 피에 대한 요구, ‘질소(窒素)에 대한 탐욕‘, 달리 표현하면 동물성 단백질에 대한 탐욕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원전 7000년이나 기원전 6000년에 일어난 두 번째 혁명은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이다. 이때에 곡물재배가 시작되었다. 사냥터나 조방적인 목축지역이 줄고 대신 논밭이 늘어났다. 그후 수 세기가 지나면서 점차 많은 사람들이 식물성 음식만 먹게 되었는데, 그것은 날것이든 조리한 것이든 흔히무미건조했고, 또 발효한 것이든 아니든 단조로움을 면치 못했다. 죽, 수프와 빵이 그것이다. 이제부터 인류의 역사에서는 두 종류의 인간들이 대립하게 되었다. - P140

16세기부터 북유럽의 밀이 국제 곡물 교역에서 점점 더 큰 중요성을 띠었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수출국 자신의 소비를 줄인 결과이다. 한 상업 사전(1797)에 나오듯이 폴란드가 매년 많은 양의 곡물을 수출하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유럽에서 땅이 가장 기름진 나라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나라와 그 주민들을 잘 아는 사람들은 다르게 평가한다. 왜냐하면 비록이 나라에 땅이 기름지고 또 훌륭한 경작지역이 없지는 않다고 해도, 다른나라에서는 더 기름진 땅이 있고 더 나은 경작을 하면서도 곡물을 수출하지않기 때문이다. - P166

도시의 임금노동자는 비참했고, 현물임금이 거의 같은 리듬으로 변화했던 시골 사람들 역시 비참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아주 명료한 규칙을 따랐다. 저급한 곡물에 의존하는 것이다. 즉, "더 싸면서도 충분한 칼로리를 제공하는 생산물에 의존하고,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 대신 전분에 기초한 음식을 먹었다." 프랑스 혁명 전야의 부르고뉴에서는 "중농(le gros laboureur)을 제외한 일반 농민은 밀을 거의 먹지 못했다. 밀과 같은 사치스러운 곡물은 판매하거나 어린 아이들을 위한 것, 또는 드물었던 경사를 위한 것이었다.……………밀은 식탁보다는 돈주머니를 위한 것이었다. 저급한 곡물은 농민들이 먹는 음식의 핵심을 이룬다. 꽤 유복한 집에서는 콩소(conceau)라고 부르던 혼합 밀이나 호밀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보리와 귀리를, 브레스와 손 계곡에서는 옥수수를, 모르방 지방에서는 호밀과메밀을 먹었다. 1750년경 피에몬테에서 평균 소비량은 (헥토리터 단위로)다음과 같았다. 밀 0.94, 호밀 0.91, 다른 곡물 0.41, 밤 0.45,122) 도합 1년에2.71헥토리터였다. 이 부족한 듯한 음식량 중에서도 밀이 차지하는 부분은그나마 얼마 되지 않았다. - P179

동아시아에서는 쌀은 많이 소비하고, 고기는 매우 조금 소비하거나 전혀 소비하지 않는다. 이런 여건에서 쌀이 얼마나 예외적으로 강력한독재자 같은지를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쌀값의 변동은 모든 것을 좌우했으며, 심지어 군인의 일당까지도 마치 변동비율제처럼 쌀값에 따라 오르내렸다. 일본은 그보다 더해서, 17세기에 개혁으로 결정적인 변화가 있기 전에는 쌀이 곧 화폐였다. - P199

오늘날 인디언 구역에서 옥수수를 기르며사는 농민들, 그중에서도 특히 안데스 산맥에서 사는 사람들은 흔히 너무나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이란 옥수수를 먹고 또 먹으면서 가끔 말린 감자로 보충하는 정도이다(우리는 감자의 원산지가 페루라는것을 알고 있다). 요리는 노천에 있는 돌로 만든 아궁이에서 바람을 맞으며한다. 오막살이집의 하나밖에 없는 방을 사람과 가축이 함께 쓰며, 언제나변함없는 옷은 초보적인 기술로 라마의 털실을 가지고 짠 것이다. 유일한낙은 코카 나무의 잎을 씹는 것인데, 이것은 배고픔, 갈증, 추위, 피로를 완화시켜준다.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옥수수를 (씹어서) 발효시킨 맥주 치차(chicha)가 있는데, 스페인 정복자들은 치차를 앤틸리스 제도에서 보고 나 - P210

서는 적어도 그 이름을 인디오 아메리카 전역에 퍼뜨렸다. 그 외에도 페루에서 나는 강한 맥주 소라(sora)가 있다. 이런 것들은 합리적인 정책을 추진한다는 정부들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금지시킬 정도였으나 헛일이었다. - P211

"농업혁명"은 기원전 - P236

8000-기원전 7000년의 오리엔트와 같은 몇몇 특권적인 곳에서만 일어난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파되어야 했으며 그 진보는 결코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경험들은 끝없이 긴 똑같은 여로를 따라가지만, 수세기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괭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부 원시인들도 그들의 은신처가되는 조건이 척박한 이곳저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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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시장경제는 물과 기름처럼 그렇게 확실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어느 사람, 어느 대리인, 우리가 관찰한 어느 활동이 경계의 이쪽 혹은 저쪽에 있다고 단호히 결정하는 일이 늘 가능하지는 않다. 따라서 물질문명(civilisation matérielle)과 공존하기도 하고 이를 교란시키기도 하며, 또 물질문명과 모순됨으로써 오히려 물질문명을 설명해주는 경제문명(civilisation économique, 이렇게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면)을 물질문명과동시에 소개해야 한다. 그렇지만 분명 그 둘 사이에는 경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매우 큰 중요성을 띤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경제문명과 물질문명의 두 요소로 구성된 이 복식부진화로부터 비롯되었다. 15-18세기의 물질생활은 거의 파악하기 힘들 정도 - P25

로 대단히 느리게 변화해온 고대 사회와 경제의 연장이다. 그 과정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 오래된 사회와 경제위에 필연적으로 그 무게를 짊어지우는 상부사회(une société supérieure)를조금씩 형성해갔다. 그리고 언제나 상부와 하부는 공존하되 그 각각이 가지는 크기의 비율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 P26

수는 세계를 분할하고 조직하며, 각각의 인류집단에 특정한 비중을 부여하는가 하면, 문화 및 능률의 수준, 성장의 생물학적(그리고 경제적) 리듬, 나아가서 그 병리학적 운명을 거의 고착시킨다. 중국, 인도, 유럽의 조밀한 인구는 잠복해 있거나 활동 중인, 또는 곧 퍼져나갈 태세가 되어 있는 질병들의 거대한 저장소이다. - P118

우리는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기간 동안 세계의 차별화된운명에 대한 일차적인 인식을 얻기 위해서 수를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커다란 덩어리들로 나뉘어 있었고, 이 각각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서로 다른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 사회 내부에서 보더라도 여러 집단의 일상생활이 서로 다른 것과 유사하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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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청 - 중국 최후의 제국 하버드 중국사
윌리엄 T. 로 지음, 기세찬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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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제국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중국이 고립된 채 다른 세계와 교류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청 제국 시대에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 끝 사이의 관계와 상호 영향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질적으로 활발해졌고, 또한 더 대립적이 되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관계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P12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의 역사를 다루는 책으로 사실상 하버드 중국사를 마지막으로 선택했다. 앞서 캠브리지 중국사를 읽으면서 청의 초중반 역사는 가볍게 다루고 후반부를 집중한다고 여겼는데 이는 페어뱅크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충격에 의한 청 제국의 근대화 담론에 의한 것이었다(유럽을 비롯한 서구 중심주의). 


청대 역사학 방법론은 시기에 따라 새로운 담론이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청대 역사학 관련하여 어떤 방법론이 전개되었는지 살펴보자. 우선 1970~1980년대에는 프랑스 아날학파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사적 시각에 입각하여 명청을 왕조로 구분하지 않고 단일한 역사적 시대였다는 의미로 ’제국 후기’로 부르자고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근대’를 가기 위한 과도기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서양의 역사적 관점을 중국의 역사에 적용하려한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신청사적 관점으로 그 전 왕조까지와는 달리 청은 다민족 정치체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채 이질적인 민족성을 대체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한족 중심의 민족 국가를 완성하기 위해 신장, 티베트, 만주, 대만 등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는 것에서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세 번째는 ‘유라시아적 전환’에 관점에 따른 것으로 17세기의 위기에 따라 금은의 유통과 기후 위기에 따른 재난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유럽의 도전과 아시아의 대응이라는 이분법에 의한 시각을 따르는 문제점이 있다.


청을 일으켜 세운 만주족을 어떻게 정의하고 분류할 수 있을까. 기존에는 종족과 같은 생물학적 범주의 개념에 따른 것이라 했지만 1980년대 들어오면서 맥락에 따른 역사, 사회, 정치적 협상의 산물로 생겨난 것으로 비중이 옮겨갔다. 개인적으로도 후자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중국사에서 제국의 규모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관점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즉 명과 청이 완전한 ‘동양적 전제 국가‘였다는 관점과, 그들의 신민들을 전적으로 자활하도록 내버려두고 ‘세금 징수, 치안유지를 맡는 대리인‘이라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맡았다는 관점이다.
이 두가지 관점은 모두 어느 정도 오류가 있다. 명과 청은 백성들을 전제적으로 위압하여 통제했지만, 반면에 일상생활에서는 국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기능들을 사적 영역의 개인 및 집단들에게 남겨두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또한 실질적인 중간 영역, 즉 청이 왕조의 존속과 백성의 복지에 관심을 두어 매우 활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던특정 정책 분야가 있었다. 이 분야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식량공급, 통화의 규제, 민사소송의 확대와 관리였다. - P100~101


청은 아이신 기오로 씨족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에서 시작되었다. 누르하치는 명 조정 하에 있던 부족장 중 한 명이었으나 다른 부족과 여러 관계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여진어를 만들고 팔기군 체제를 만들면서 통치력을 확대해나갔고 결국 독립된 국가를 만들었다. 

청은 대운하로 화중과 화남의 곡물을 북쪽 지역으로 공급하면서 둔전 체제로 변경의 둔전병과 가족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하면서 유사시 군을 지원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상인이 가진 곡물량에 따라 소금 독점권을 부여해줌으로써 북쪽 군영 지대에 저렴한 비용에 곡물 조달이 가능하게 했다. 또한 과거의 이데올로기인 유학을 버리지 않고 국가 통치 체제로 이용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종족 조직, 향촌 사회, 상인 조합이나 장인 조합 등의 자치 단체들은 지방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청 시기는 서양의 근대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구조적 변화를 경험한 시기였다. 인구가 급증하고 토지의 대규모 개간이 이루어졌으며 백성의 이주가 장려되었다. 이로 인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 간의 충돌 문제가 생겨났다. 과거를 통한 관료 선출 수는 극히 적어 급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위층에 올라가는 것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토지는 늘어났지만 수요가 많았고 특정층에 토지가 집중되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심화되었다. 그래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부유층도 상업을 통해 이득을 노렸다. 이는 대운하의 발달, 개인적인 이동이 가능해지고 상업적인 계약과 재산권 보호가 가능해진 덕분이었다. 멕시코, 포토시 광산 등에서 생산된 대량의 은이 중국에 유입되고 지세 납부를 은으로 하게 되면서 실물 경제는 확대되었다. 이는 서양이 들어오기 전 청의 내부 동력이 충분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방에는 신사층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관혼상제를 고수하는 등 전통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전당업, 고리대금업, 상업, 기부금, 의연금, 건설업 등에 종사하면서 부를 얻고 현직 관료와 친분 관계를 쌓으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중국 인구 중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항상 압도적으로 높았고, 서양에서는 중국을 오랫동안 전형적인 농업 사회라고 생각했지만, 중기의 청은 세계에서 가장 상업화된 나라였다. ‘경작과 독서‘라는 이상적인 신사-농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던 중국의 엘리트 가문은 상업을 통해 돈을 벌었다. 19세기에 중국에 들어와 중국인들에게 교역의 미덕을 전파했다고 자부한 서양의 자칭 ‘상업 개척자들‘의 생각은 단지 착각에 불과했다. 물론 청 제국의 총 무역량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외국 무역의 증가와 아편 전쟁 이후 중국 본토로 침투한 서양 상인들로 인해 조금 더 상승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은 청제국의 광대하고 번창했던 국내 무역의 규모에는 전혀 근접할 수 없었다. - P219


그러나 은이 전세계적으로 귀해지면서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외국과의 무역 수지에서 불균형 현상이 일어나면서 국내 제조업의 생산은 위축되었다. 이에 실업률은 증가하고 세금 부담률이 증가하면서 저항과 민란의 씨앗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인도 회사가 1680년 중국 남부에 처음 들어온 후 양국 간 무역이 시작된 뒤로 영국은 차를 늘어나는 차 수입에 대한 수지를 맞추기 위해 면화에서 아편으로 중국 경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청은 세수의 감소와 무역 수지의 불균형으로 해마다 토지세 수입의 25퍼센트에 상응하는 은이 유출되면서 고통을 겪었다. 사회 기반 시설은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방치되기에 이르렀고, 심각한 타격을 입은 공동체를 위한 구제의 노력도 뜸해졌다. 실질적인 소득과 관료들의 사기는 모든 면에서 떨어졌고, 부패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방위 예산이 증발해버리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국내외적 위협에 대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군사력이 취약해졌다. 이러한 불황은 태평천국 운동이 터지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국내외적으로 경제적 불황은 매우 폭넓게 감지되었고, 1840년대 즈음에는 경기 침체가청을 붕괴 직전의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 P280


광동무역 체제는 옹정제의 계승자인 건륭제가 시행한 세 차례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산물이었다. 1757년에 청 조정은 이후로 서양이 청제국과 무역할 수 있는 항구는 오로지 광주뿐이라고 공표했다. 두 번째로 조정은 1745년경에 광주의 지방관료들이 발의하여 시행하고 있던 담보제도를 승인했다. 담보 제도를 통해 입항하는 모든 서양 선박들은 중국상행으로부터 보증과 감독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1760년에 청조정은 1년 중 외국 ‘오랑캐들‘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간, 거주장소, 그리고 무역할 수 있는 대상들을 정한 일련의 상세한 규정들을발표했다. 외국 상인은 아내와 가족들을 동반해 중국에 들어올 수 없었으며, 상인들의 사적 이동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 P251


태평 천국 운동은 1840년대부터 반외세와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한족 우월주의와 결탁하여 신도를 확보해나갔다. 공자와 만주족 청 관리를 악귀로 지목하고 기독교가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 아닌 중국 고유의 전통 종교라는 등의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남경에서 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고 지도층의 내분이 발생하면서 동력을 잃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태평천국에 관한 역사서술은 냉전으로 알려진 팽팽한 이념분쟁의 선두에 있었다. 태평천국 반란군이 중국공산당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개별 학자들의 태도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이 반란은 거대한 역사 서술의 초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태평천국의 ‘혁명적인 운동‘이 청에 대한 한족의 해방전쟁일 뿐만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지주 계층과 그들이 지지한 봉건적 정권에 대항한 ‘농민 기의 의병을 일으킴)‘의 원형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이 토지의 집단화 정책을 공포했다는 사실은중국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태평천국운동 특유의 기독교적 믿음을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탁월한 혁명 이론에 앞서 모든 운동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미신‘이었다고설명했다. 냉전 시기에 태평천국을 연구한 서양과 중국 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된 태평천국운동을 철저하게 비판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집단화 계획을 위선적인 것으로 일축했으며, 심지어 태평천국의 환상은 전체주의적인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천국운동은 진정한혁명이 아니라 그저 거의 성공할 뻔했던 반왕조적 반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 P326


태평 천국 운동을 왜 후대에 소환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동치제 시기 청은 기계 산업 이전의 단계를 실현해나갈 정도로 중흥의 시기였다. 그러나 내부 개혁에 실패하면서 동력을 잃었고 청일 전쟁 이후 삼국 간섭까지 이어지면서 대외적으로도 힘을 상실했다. 


청 제국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적어도 두 가지의 다른 의미에서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중국, 일본, 서양을 통틀어서 정치적좌익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를 레닌이 정의한 ‘자본주의의 가장높은 단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인 자본주의 시대에 발전했던 생산, 개발, 잉여 축적의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전했던 영국과 같은 대도시 국가들에게서 중대한 문제로 나타났다. 1920~1930년대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혁명에서 제국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었고, 중국 내에서 실현되었던 제국주의의 정도는 굉장한 논란의 대상이자혁명 전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레닌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제국주의는 또한 매우 광범위한 시간적 틀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 시각의 제국주의는 서양 자본주의와 접촉한 직후의 중국 역사에 대한 분석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몇몇 학자들은 이를 현재까지도 적용하고 있다."
반면 비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은 ‘제국주의를 이와 완전히 다르게 정의했다. 이러한 정의는 경제적 개념이기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서구 열강(최종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확장을위한 세계적인 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개념을 사용하는 학자들은 강대국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세력 균형을 모색하는 가운데 인식된 외교적 의사소통의 체제를 제국주의로 간주하고 있다. - P407~408


제국주의에 대해 청은 혁명, 근대적 개혁주의, 대중적 반항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학생 운동, 손문을 비롯한 혁명가들의 운동은 1908년 무렵이 되면 영향력이 떨어지고 개혁주의 엘리트들이 부상한다. 이들은 철도 부설권 회수 운동, 자의국을 중심으로 하는 책임 내각 창설을 요구하는 등 개혁을 이끌었다. 광서제와 서태후가 죽고 나서 반란이 확대되고 드디어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선포된다. 


19세기 후반에 새로운 종류의 사회 진화론적 민족주의가 등장하여 민족국가의 올바른 기초는 종족적 또는 민족적 조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 탄생한 중화민국은 한족만이 독점하는 영역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청의 신민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다양한 비한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즉각적으로 일부 몽골족들은 자신들이 중화민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13년에는 동북 지역에 위치한 ‘만주족‘들의 고향에 주권 국가를 설립하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1932년에 일본에 의한 대리국으로서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아이신 기오로 부의를 수반으로 하여 설립된 거대한 괴뢰국을포함하는 다양한 ‘만주국들‘이 간헐적으로 선포되었다." 21세기 초반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티베트, 이슬람교도및 다른 분리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청의 멸망 이후 20세기 내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청 역사의 유산이다. - P504~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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