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인간이 먹는 음식의 운명을 대강 결정하고 원격조정한 것은 오래 전에 일어난 두 혁명이었다.
구석기시대 말기에 "잡식동물인 인간은 큰 동물을 사냥하기 시작했고, 이때 형성된 "대육식주의"의 취향, 즉 "고기와 피에 대한 요구, ‘질소(窒素)에 대한 탐욕‘, 달리 표현하면 동물성 단백질에 대한 탐욕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원전 7000년이나 기원전 6000년에 일어난 두 번째 혁명은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이다. 이때에 곡물재배가 시작되었다. 사냥터나 조방적인 목축지역이 줄고 대신 논밭이 늘어났다. 그후 수 세기가 지나면서 점차 많은 사람들이 식물성 음식만 먹게 되었는데, 그것은 날것이든 조리한 것이든 흔히무미건조했고, 또 발효한 것이든 아니든 단조로움을 면치 못했다. 죽, 수프와 빵이 그것이다. 이제부터 인류의 역사에서는 두 종류의 인간들이 대립하게 되었다. - P140

16세기부터 북유럽의 밀이 국제 곡물 교역에서 점점 더 큰 중요성을 띠었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수출국 자신의 소비를 줄인 결과이다. 한 상업 사전(1797)에 나오듯이 폴란드가 매년 많은 양의 곡물을 수출하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유럽에서 땅이 가장 기름진 나라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나라와 그 주민들을 잘 아는 사람들은 다르게 평가한다. 왜냐하면 비록이 나라에 땅이 기름지고 또 훌륭한 경작지역이 없지는 않다고 해도, 다른나라에서는 더 기름진 땅이 있고 더 나은 경작을 하면서도 곡물을 수출하지않기 때문이다. - P166

도시의 임금노동자는 비참했고, 현물임금이 거의 같은 리듬으로 변화했던 시골 사람들 역시 비참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아주 명료한 규칙을 따랐다. 저급한 곡물에 의존하는 것이다. 즉, "더 싸면서도 충분한 칼로리를 제공하는 생산물에 의존하고,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 대신 전분에 기초한 음식을 먹었다." 프랑스 혁명 전야의 부르고뉴에서는 "중농(le gros laboureur)을 제외한 일반 농민은 밀을 거의 먹지 못했다. 밀과 같은 사치스러운 곡물은 판매하거나 어린 아이들을 위한 것, 또는 드물었던 경사를 위한 것이었다.……………밀은 식탁보다는 돈주머니를 위한 것이었다. 저급한 곡물은 농민들이 먹는 음식의 핵심을 이룬다. 꽤 유복한 집에서는 콩소(conceau)라고 부르던 혼합 밀이나 호밀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보리와 귀리를, 브레스와 손 계곡에서는 옥수수를, 모르방 지방에서는 호밀과메밀을 먹었다. 1750년경 피에몬테에서 평균 소비량은 (헥토리터 단위로)다음과 같았다. 밀 0.94, 호밀 0.91, 다른 곡물 0.41, 밤 0.45,122) 도합 1년에2.71헥토리터였다. 이 부족한 듯한 음식량 중에서도 밀이 차지하는 부분은그나마 얼마 되지 않았다. - P179

동아시아에서는 쌀은 많이 소비하고, 고기는 매우 조금 소비하거나 전혀 소비하지 않는다. 이런 여건에서 쌀이 얼마나 예외적으로 강력한독재자 같은지를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쌀값의 변동은 모든 것을 좌우했으며, 심지어 군인의 일당까지도 마치 변동비율제처럼 쌀값에 따라 오르내렸다. 일본은 그보다 더해서, 17세기에 개혁으로 결정적인 변화가 있기 전에는 쌀이 곧 화폐였다. - P199

오늘날 인디언 구역에서 옥수수를 기르며사는 농민들, 그중에서도 특히 안데스 산맥에서 사는 사람들은 흔히 너무나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이란 옥수수를 먹고 또 먹으면서 가끔 말린 감자로 보충하는 정도이다(우리는 감자의 원산지가 페루라는것을 알고 있다). 요리는 노천에 있는 돌로 만든 아궁이에서 바람을 맞으며한다. 오막살이집의 하나밖에 없는 방을 사람과 가축이 함께 쓰며, 언제나변함없는 옷은 초보적인 기술로 라마의 털실을 가지고 짠 것이다. 유일한낙은 코카 나무의 잎을 씹는 것인데, 이것은 배고픔, 갈증, 추위, 피로를 완화시켜준다.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옥수수를 (씹어서) 발효시킨 맥주 치차(chicha)가 있는데, 스페인 정복자들은 치차를 앤틸리스 제도에서 보고 나 - P210

서는 적어도 그 이름을 인디오 아메리카 전역에 퍼뜨렸다. 그 외에도 페루에서 나는 강한 맥주 소라(sora)가 있다. 이런 것들은 합리적인 정책을 추진한다는 정부들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금지시킬 정도였으나 헛일이었다. - P211

"농업혁명"은 기원전 - P236

8000-기원전 7000년의 오리엔트와 같은 몇몇 특권적인 곳에서만 일어난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파되어야 했으며 그 진보는 결코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경험들은 끝없이 긴 똑같은 여로를 따라가지만, 수세기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괭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부 원시인들도 그들의 은신처가되는 조건이 척박한 이곳저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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