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는 시대, 나라, 문명에 따라 여러 면모를 띤다. 그에 비해 거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도 시작도 없는 사회적인 코미디이 - P242

다. 그 코미디는 사치를 주제로 하며 또 사치를 판돈으로 걸어놓고 전개된다. 이것은 사회학자, 정신분석학자, 경제학자, 역사가들에게 소중한 광경을보여준다. 물론 특권층과 관중들 그 특권층을 바라보는 일반 대중들―사이에 일종의 공모관계를 이루는 합의가 있어야 한다. 사치란 다만 희귀한 것이나 허영 정도가 아니라 성공, 사회적 매력, 가난한 사람들이 언젠가 도달하려는 꿈이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도달하는 순간, 이전의 영예는곧 사라져버린다. 어떤 의사 겸 역사가가 최근에 이렇게 쓴 바 있다. - P243

모든 사치는 낡은 것이 되고 유행은 지나간다는 것은 놀라울 것도 없는 교훈이다. 그러나 모든 사치는 타고 남은 재에서부터, 그 실패로부터 되살아난다. 사치는 사실 그 어느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사회적 수준의 차이를 반영하며, 이 수준 차이는 매번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 생겨난다. 이것은 곧 영원한 "계급투쟁"이다. 이투쟁은 계급만이 아니라 문명의 투쟁이기도 하다. 문명은 끊임없이 감시하고, 또 부자가 빈자에 대해서 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문명 간에 사치의사회적인 코미디를 행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상호적인지라, 짧은 거리이든 먼 거리이든 간에 문명들은 어떤 흐름들을 만들어내고 가속화된 교환을 유도한다. - P244

1350-1550년의 유럽은 1인당 기준으로 보면 생활수준이 높은 시기였다. 파국적인 흑사병이 지나가고 노동력이 모자라게 되자 일하는 사람의 노동조건이 대단히 유리해졌다. 이때보다 실질임금이 더 높았던 때는 없었다.
1388년에 노르망디의 참사회원들은 그들의 땅을 경작할 사람을 구하는 데 금세기 초에 6명을 고용할 수 있던 값으로 한 사람밖에 구하지 못한다"고불평했다. 바로 이 역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중세로 거슬러올라갈수록 더 큰 불행을 보게 된다는 단순론자들의 견해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들의, 다시 말하면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수준에 대해서 말하면, 그 반대가 사실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1520-1540년 이전에 인구가 그리 많지 않던 랑그도크에서는 농민과 장인들이 흰 빵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흘러 중세의 "가을"에서 멀어질수록 상황이 악화되어서 심지어 19세기 중반에까지 사정이 계속 나빠지는 곳도 있었으며, 동유럽의 일부 지역, 특히 발칸 지역에서는 20세기까지도 계속 악화되었다. - P256

부자들은 정교한, 어찌 보면 지나치게 정교한 소스들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후추, 향신료, 아몬드, 호박, 머스크, 장미수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첨가물을 다 섞었다. 그리고 랑그도크출신의 요리사들도 기억해야 한다. 파리에서는 이들을 최고로 쳤으며 아주비싼 값에 고용했다. 가난한 사람이 이 잔치에 끼고 싶으면 하인과 잘 통해놓든가, 아니면 베르사유의 "중고 음식 가게로 가야 했다. 이곳에서는 왕가에서 먹고 남긴 음식을 팔았는데, 베르사유 시민들의 약 4분의 1이 부끄러움도 없이 이 음식을 먹고 살았다. - P267

루이 14세의 궁정에서는 포크를 사용했을까?
몽토지에 공작은 "끔찍스러울 정도로 청결했다"고 생 시몽은 말했다. 그러나 왕은 그렇지 않았으니, 생 시몽에 의하면 왕은 닭 스튜 요리를 손가락으로 먹는 데에 아주 능숙했다! 부르고뉴 공작과 그의 형제들이 왕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이전에 배운 대로 포크를 들자, 왕은 사용하지 못하게했다. 이 일화는 팔라틴 백작부인이 만족스럽다는 투로 전했는데, 그녀로말하면 "식사 때 언제나 나이프와 자신의 손가락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17세기에 식사에 초대된 사람들에게 냅킨을 아주 많이 제공했던것이다. 그러나 냅킨이 개인 집에서까지 쓸 정도로 퍼진 것은 몽테뉴의 말에의하면 바로 그의 시대부터였다. 또한 그 때문에 식사 중에 여러 번 반복해서 물병과 대야를 이용해서 손을 씻는(lave-main) 관습이 생겼다. - P271

핵심적이고 대체가 불가능한 소금은 성스러운 음식이었다("고대 히브리어나 오늘날 마다가스카르어로 소금 친 음식은 성스러운 음식과 동의어이다"). 밀가루로 만든 무미건조한 죽을 먹는 유럽은 많은 양의 소금을 소비했다(1인당 하루에 20그램의 소금을 소비했는데, 오늘날의 두 배에 해당하는 양이다). - P275

값싼 단백질원인 치즈는 유럽의 일반 대중이 먹는 아주 중요한 음식이었으며, 유럽에서 멀리 떠나 살게 되어 치즈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큰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1698년에 프랑스 농민들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싸우는 군대에 치즈를 팔아서 큰돈을 벌었다. 그렇지만, 특히 프랑스에서그러했던 것처럼, 치즈는 요리에서의 큰 명성과 "고귀함을 아주 천천히 얻었다. 요리책에서 치즈는 아주 작은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했으며, 품질이나특출한 품명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염소의 젖으로 만든 치즈는 양이나 소의젖으로 만든 것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겨져서 경멸의 대상이었다. - P277

음식의 역사에서 후추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오늘날 후추는 단순한 양념류로서 결코 필수불가결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과거에는 수 세기 동안향신료의 하나로서 레반트 무역의 핵심 물품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후추와 관련되어 있었다. 15세기 해외 모험가들의 꿈도 후추와 연관되었다. 이때는 "후추처럼 비싸다"라는 속담이 있던 시대였다. 유럽인은 오랫동안 후추를 비롯해서 계피, 정향, 육두구, 생강 등의 향신료에 강렬한 열정을 품었다. 너무 성급하게 광기라고까지 말하지는 말자. 이슬람, 중국, 인도에서도 비슷한 취향이 있었을 뿐 아니라, 모든 사회가 음식에 열광했는데, 언제나 강렬하고 꼭 필요했으며 열광의 대상도 다양했다. 이것은 음식의 단조로움을 깨려는 필요에서 나왔다. - P291

너무 성급하게 설탕 혁명이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일찍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지만 또 극도로 느리게 진행된 것도 사실이다. 19세기 초에도 설탕은 아직 "깊이 있게"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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