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유럽연합의 헤드스카프 논쟁

젠더 문제는 유럽통합 과정에서 유럽연합이 직면한 민주주의 결여 문제와 그 극복의 어려움에 관한 논의이며, 유럽적 가치와 정체성의 확립, 민주적 원칙과 소수의권리존중이라는 절차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유럽적 연대와 충성심을 창출하는 데 가장 근본이 되는 논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럽연합의젠더 평등 문제가 여성 이민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많이 남아 있다. - P232

오킨의 다문화 논의는 개인의 자율성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전통에서 집단 내의젠더 불평등 문제에 주목한다(Okin, 1999:23).
"따라서 문화적 관습이라고 하는 것들이 통상 여성의 삶에 많은 영향을미치고, 문화적 관습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여성에 대한 억 - P235

압이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를 실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문화적 관습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많은 문제점을안고 있다는 것이다(Okin, 1999: 16).

이처럼 젠더 문제를 둘러싸고 남성 우월적 가부장제하에서 문화적으로정당화된 폭력에 대한 인식과 관점의 차이 문제는 이슬람 가치의 후진성과 서구 가치의 근대성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이분법적 논의로 발전해 문화적 차이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유럽적 가치와 이슬람 가치간의 갈등은 또한 문화적 정체성 문제를 넘어 유럽적 가치, 유럽적 젠더 평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Al-Habri, 1999; Honig, 1999). - P236

1990년대 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는 부르카 착용을 의무화한것은 물론 여성의 사회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심지어 여성이 혼자 또는여성끼리 집 밖에 외출하는 것도 막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에 따라 유럽에서 헤드스카프 문제는 무슬림 여성의 인권 문제와 신체를 가리는 문제를중심으로 논쟁이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무슬림 여성의 헤드스카프 문제가유럽 내에서 미디어 이슈로 떠오르며 논쟁이 된 것은 9·11 테러 이후라할 수 있다. 특히 런던과 마드리드 테러 이후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자에대한 두려움과 연결되어 긴장이 고조되면서부터다.
최근 무슬림 여성의 헤드스카프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잘 알 수 있듯,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 영국 등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이민자 사회와의 갈등이 표출되는 가운데 무슬림 여성의 헤드스카프 문제는 가장 격 - P237

렬한 논쟁 주제가 되고 있으며, 유럽의 가치 · 정체성 문제와 유럽 사회에거주하는 무슬림의 통합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 P238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국적을 취득하지 않더라도 유럽 영토에 장기적으로 거주하는 이민자와 제3국인에게 유럽인과 유사한 권리를 보장한다. 유럽연합의 조약과 「기본권 헌장(Charter of Fundamental Rights)」을 근간으로 국적, 성별, 인종, 종교, 연령, 신체적 장애 및 성적 취향 등에 대한 유럽연합의 반차별 규정이 국가 차원에서 수용.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유럽연합 차원에서 헤드스카프와 관련된 법적 규정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이며, 각 정부의 입장과 이 문제를 다루는 재판소 및 일반 시민의 입장. 시각은 각국의 사회마다 차이가 있으며, 그에 따라 정책적 대응도 다르게 나타난다. - P241

프랑스와 터키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는 헤드스카프와 관련된법적 규정이 없지만, 무슬림 여성의 머리나 전신을 가리는 헤드스카프 문제는 유럽 사회 내 다문화주의 토대에 근거해 각 국가의 종교와 젠더 평등정책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작용한다. 그러나 최근 덴마크와 네덜란드의집권당 등이 기존의 관대한 규정을 없애는 행위나, 헤드스카프 금지를 위한 정당들의 상징적 시도들은 이슬람 소수집단을 같은 눈높이의 시민으로인정하려는 정당한 정책이라고 이해되기 어렵다. 기독교나 유대교의 복장과 관습은 서구의 보편적인 유럽적 가치로 당연시하면서, 무슬림의 가치들은 그 인종·문화성·종교성의 실제를 인정하지 않으려 세속주의와 중립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부분이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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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마지막 물결

제국의 관제 민족주의가 낳은 역설은, 점점 더 유럽의 ‘민족사로 여겨지고 그렇게 서술되는 것을 식민지화된 이들의 의식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때때로 개최하는 둔감한 축제들뿐만 아니라 도서실과 학교교실을 통해서도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베트남 젊은이들은계몽사상가들과 프랑스 혁명, 그리고 드브레가 ‘독일에 대한 우리의 세속적인 적대감‘이라 칭한 것에 대해 배우는 과정을 피할 수 없었다. 마그나카르타, 모든 의회의 어머니, 그리고 명예혁명은 잉글랜드 민족의역사라는 색칠을 입고 영국 제국 전역의 학교에 들어갔다. 홀란드에 맞선 벨기에의 독립 투쟁‘은 콩고 어린이들이 어느 날엔가 읽을 학교 교 - P181

재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필리핀에서의 미합중국 역사, 최후로는 모잠비크와 앙골라에서의 포르투갈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이러니는 이 역사들이 세기가 바뀔 무렵에는 유럽 전역에서 민족적으로정의 내려지고 있던 역사기술의 의식에 입각하여 쓰였다는 점이다. - P182

유럽에서나 식민지에서나 ‘청춘‘과 ‘청년‘은 활력과 진보, 자기희생적 이상주의와 혁명 의지를 의미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는 ‘청춘‘이 선을 그어 한정할 수 있는 사회학적 윤곽으로 작동했다고 하기힘들다. 중년이라도 청년아일랜드당에 속할 수 있었으며, 문맹이라도청년이탈리아당에 속할 수 있었다.

식민지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청년이란 무엇보다도 유럽식 교육을 취득한 일정한 규모가 되는 수의 사람들의 첫 번째 세대라는 뜻이었으며, 이렇게 그들은 언어적·문화적으로 부모 세대와, 그리고 식민지의 같은 또래 절대 다수와 구별되었다(B. C. 팔을 떠올려볼 것). - P183

‘인란더‘는 어느 종족언어집단에서 왔든, 어느 계급 출신이든 동등하게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참하게 평등한 상황에도 뚜렷한 둘레는 있었다. ‘인란더‘는 늘 ‘그래서 무엇의 원주민이라는 건데? 라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인들이 가끔 ‘인란더‘가 세계적 범주인 것처럼 이야기했다면, 경험은 그런 생각이 실제로는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란더‘는 색칠된 식민지에 그어진 가장자리 선에서 멈추었다. 그 너머에는 가지각색의 ‘네이티브‘, ‘앵디젠‘, 인디오(indio)들이 살았다. 더구나 식민지의 법률용어에는 외국인 동양인 (vreemde oosterlingen, foreignOrientals)이라는, 마치 ‘외국인 원주민‘이라는 양 모조 동전같이 의심쩍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범주가 들어 있었다. 주로 중국인 아랍인 · 일본인이었던 그런 ‘외국인 동양인‘들은 식민지에 살기는 했을지언정 ‘원주민 원주민‘ (native natives)들보다 우월한 정치적· 법적 지위를 보유하고있었다. - P187

‘앵도신‘의 식민 지배자들이 추구한 교육 정책에는두 가지 근본적인 목적이 있었고, 나중에 밝혀졌듯이 두 가지 모두는
‘인도차이나인‘ 의식의 성장에 기여했다. 한 가지 목표는 식민화된 민족들과 인도차이나 바깥의 인접한 세계 사이에 존재하던 정치적·문화적유대를 끊는 것이었다. - P190

교육 정책의 두 번째 목표는 정치적으로 믿음직하며, 은혜를 알고, 문화적으로 동화된 토착 엘리트로 복무할,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인도차이나인들을 신중하게 눈금을 잰 양만큼 생산하여 식민지의 관료제와대규모 영리사업체의 하위 직급을 채우는 것이었다. - P192

일부 민족주의자 이데올로그들의 방식대로 언어를 다루는 것, 즉 깃발이나 복장, 민속 무용 따위와 같이 민족됨의 휘장(emblem)으로 언어를다루는 것은 언제나 오해이다. 언어에 대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상상된공동체를 창조해 낼 수 있는 그 역량, 요컨대 특정한 결속을 구축할 수 있는 역량이다. 따지고 보면 제국 언어들도 마찬가지로 일상어였고, 그리하여 여러 일상어 중의 특정한 일상어였을 뿐이다. - P202

스위스 민족주의는 버마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보다고작 10년 정도 오래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민족이 국제적 규범이 되어가던,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민족됨의 ‘모델‘을 가져오는 것이 가능해진 세계사적 기간에 흥기했다. 스위스의 보수적인 정치 구조와 후진적인 사회경제적 구조가 민족주의의 홍기를
‘지연‘시켰다면, 53 근대 이전의 정치제도에 왕조도, 왕정도 없었다는 사실은 관제 민족주의의 과잉을 막는 데 기여했다(제6장에서 논의한 시암의경우와 대조해 보라).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 사례들에서처럼 스위스 민족주의는 20세기의 커뮤니케이션 혁명 전야에 출현했기에, 언어적 단일 - P208

성이 필요 없는 방식으로 상상된 공동체를 ‘표상‘하는 것이 가능하고도실용적인 일이었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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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우리돌의 들녘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러시아, 네덜란드 편 뭉우리돌 2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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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만이 관심거리가 된 듯하지 않나. 진단이 틀렸기를 바라지만, 공감이 사라진 시대가 온 것 같다. 인간성은 종적을 감추었고, 그 탓에 사회 각 분야에서 전에 없던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삭막한 삶은 철학을 일상과 분리시켰으며 문학은 시들어 힘을 잃은지 오래고 역사는 극소수가 즐기는 변방의 취미 정도가 돼버린 느낌이다. 사진은 어떤가. 이미지 한 장에 깃든 정신과 사상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기술에만 눈길을 준다.

최근 아버지에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광복 직전 일본 히로시마에 머물고 있었단 이야기를 들었다. 금시초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 P11, 12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은 이야기 두 번째, 러시아와 네덜란드 편을 펼쳤다. 이번에는 바다가 아닌 들녘이다. 러시아는 중국을 제외하고 특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한 공간이다.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면 흘려버리고 말 일들이 많다. 저자의 할아버지 이야기도 아버지께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면 영영 알 길 없는 일이 되었을지 모른다. 일본에 가게 된 이유가 강제 징용 때문인지 자발적 노동자로 간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공간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질문을 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러시아 이민은 1863년 연해주에 조선인들이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1883년 조선 월강 금지가 해제되고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본격적인 한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1891년 한인을 3단계로 분류하는데 원호는 러시아 국적 취득자로 규정하여 관리했다. 원호들에게는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고 가구 당 토지를 분배하고 조세, 부역, 군역 의무를 지게 하고 상투/댕기를 정리하도록 했다. 


연추는 조선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곳이다. 최재형은 일찍부터 가족과 함께 연해주에 정착한 1세대 한인 중 하나였다. 이범윤은 1903년 간도관리사에 임명되여 러시아와 함께 일본과 싸우다가 전쟁이 끝나자 연추로 이동했다. 연추에서 그는 최재형의 식객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이후 동의회가 창립될 때 둘은 구성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최재형과 이범윤은 물과 기름처럼 갈등했고, 결국 이범윤 측은 최재형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1909년 최재형은 총탄에 맞아 안타깝게 사망하고 말았다. 

저자도 말하지만 안중근에 대한 일화를 보니 영화 <영웅>에서 그가 의병 활동을 하다가 풀어준 일본 포로에 의해 본인이 오히려 쫓기는 사연이 나온다. 이걸 보고 있자니 그의 이론은 너무 거창했나 싶기도 하다. 나중에 그가 말했다던 동양평화론도 요원한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거창한 논리 앞에 인간의 이기심은 너무나 무기력하고 속수무책인 것이 아닌지… 

연추의 포시예트 항구는 당시로 말하면 코리아 타운이 형성된 곳이었다. 지신허는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이었는데 현재는 옛터만 남아 있다. 1937년까지 1천 7백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살 정도로 매우 큰 마을이었다. 이곳에 가수 서태지가 2004년 한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무엇이라도 남아서 사진 작가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것에 저자는 감사함을 느꼈다고 한다. 직접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아마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블라디보스토크를 선조들은 해삼위라고 불렀다. 신한촌 개척리가 세워지고 1910년 성명회를 조직하고 일부 한인들은 일본인을 상대로 무력 시위를 펼쳤다. 일본 영사관은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넣었고 1911년 개척리 철거를 확정한다. 3천 명의 한인들은 이때 철도 공사 현장이나 광산 노동 현장에 투입되기 위해 이동해야 했다고. 

1917년 러시아 내전 발발 후 1차 대전에 출전해 있던 러시아 내 체코 군단은 체코 독립운동 지도자의 의견에 따라 서부전선 합류를 할지, 동부 전선에 머물지 고민하다 체코 임시정부가 있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다. 체코 군단은 짐을 줄이고 경비를 마련해야 했고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무장 강화가 절실한 상황에서 서로가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영화 <놈놈놈(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배경 이야기인 철혈광복단의 15만원 사건도 시작은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엄인섭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에 파견된 중견 관료인 기토 가쓰미와 손을 잡고 1922년까지 밀정을 관리하며 독립운동에 혼선을 주었다. ‘15만원 탈취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의 밀정 노릇이 더 길게 이어졌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기 짝이 없다. 아무튼 일제는 더는 활용 가치가 없어진 그를 버렸다. 


네덜란드 헤이그는 현지명으로는 텐하그라고 불린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본래 1906년에 열리기로 되어 이용익이 특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다음 해로 연기되자 그 사이 사망한 이용익을 대신해 특사로 파견할 이를 구해야 했다. 이때 상동교회 교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던 상동파가 적극적인 역할에 나섰는데 이준이 상동파 청년회장이었기에 헤이그 파견자로 낙점되었다. 이상설 이외에 부사이자 통역인 이위종, 거기에 선교사 호머 헐버트도 제4특사로 함께 했다. 러시아 초대공사였던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헤이그 특사들을 위해 물밑에서 도왔다. 일제는 그를 갖은 고문, 협박, 회유 등으로 협력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거부한 채 러시아에 남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0년 경술국치가 단행되고 이범진은 10월 가진 재산을 모두 처분해 연해주 한인 사회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 미국 동포들을 위해 자금을 보내고 장례 회사를 찾아가 자신의 장례 비용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서 세 통을 작성한 뒤 한 작은 집에서 천장에 목을 매기까지… 그 마지막 가는 길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의 유해는 1911년 2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우스펜스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헤이그에 이준열사기념관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도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1992년 네덜란드 한 신문에 이준 열사에 대한 기사가 실려요. 그걸 본 거예요. 그리고 한걸음에 드 용 호텔 건물을 찾았죠. 1층은 당구장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2층에서 3층은 무주택자 임시 숙소로 쓰이고 있었어요. 건물 상태는 다 허물어져 가고 있었지요. 당시 건물은 헤이그 시 소유였는데 재개발이 추진 중이었어요. 건물을 구매하려면 공매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입주자에게 매매 우선권이 있었어요. 당시 시장에게 헤이그 특사와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설명하는 청원서를 보냈죠. 다행히 시장이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해주었어요. 그렇게 시 협조를 얻어 이 건물을 사게 됐죠. - P208

박물관 원장의 가이드에 따라 저자는 이준의 무덤을 봉환한 뒤 남은 원래 자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1907년 사망한 이준의 사인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가 순국한 방 벽에는 사망진단서가 걸려 있는데 사인이 빠져 있다. 7월 14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타살인지 자살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의 죽음을 그저 황망히 생각할 따름이다. 방 한 구석에는 이준의 무덤에 처음 썼던 비석도 놓여 있다. 그 비석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우수리스크에는 아픈 흔적이 많은 곳이다. 이상설이 눈을 감은 곳이고, 최재형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이상설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뿌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 - 이민원, <이상설>, 2017*


만주로 망명한 뒤 내내 국외를 떠돌던 이상설은 병석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가족들과 이별한 채 그리움을 안고 사망했으니 말이다. 

이범진도, 이상설도 마지막 가는 길이 참담하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끝맺음이 아름답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시 중심에서 떨어진 소비에트 스카야 언덕에는 1920년 4월 참변 당시 400여 명이 총살된 현장이고 최재형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 언덕을 무수히 올랐다는 저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그 긴 시간 동안 어떤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을까. 궁금증과 물음, 갈증으로 보낸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유시는 더 참담한 현장일 것이다. 간도 참변의 재현인 자유시 참변이 있던 현장이 아니던가. 참변 현장은 체스노코프역이고 독립군들이 매장된 곳은 클라드비세 공동묘지다. 자유시 참변 추모비는 현재 스보보드니 외곽 소벳스키 마을에 있다. 이 마을은 1937년 강제 이주 전까지는 한인 마을이었다고 한다. 과거 러시아 사람들은 ‘고려촌’으로 불렀다. 자유시 참변 당시 마을 인근에서 사망한 독립군이 묻힌 인연으로 2017년 6월 9일 추모비가 세워졌다. 생각보다 참 많이 늦었다. 비석에는 아래와 비문이 적혀 있다.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서력 1921.06.28. 흑강 자유시사건 독립군순절지. 1921년 이 땅에서 희생된 한인 빨치산 잠들다.*

같은 독립군들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어쩌면 남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더 충격에 빠졌을지 모른다. 한동안 해외 독립운동은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하바롭스크는 김유천 거리, 조명희의 흔적, 한인사회당이 창당된 곳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이제는 김알렉산드리아의 자취로도 알려진 곳이다. 김알렉산드리아는 1914년 홀로 우랄행 열차에 올라 혁명가의 길에 뛰어든다. 그녀는 현지 노동자의 인권과 처우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책임서기, 회계에 선임되었다. 1918년 체코 군단이 반볼셰비키 봉기를 일으키자 일본-서구 연합군은 군사를 개입시키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백군과 연합한다. 미처 피하지 못한 김알렉산드리아는 잡히고, 전향을 거부한 그녀는 31살의 나이로 순국한다. 김알렉산드리아의 처형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우초스 절벽 또는 죽음의 계곡으로 두 가지 설이 있을 뿐이다. 어디에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마지막에 죽을 자리를 스스로 선택했다. 주인 의식이 있었던 그녀는 마지막까지 참으로 아름다웠다.


다음 편은 중앙아시아와 중국 편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역시 기대되는 시리즈가 될 예정이다.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기록하는 <뭉우리돌을 찾아서>는 일상의 관심 밖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삶의 울타리를 넘으면 무관심의 들녘이 펼쳐진다. 거기서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총을 든 경비원들 뿐이었다. 그를 피해 잠시 긴장을 놓으면 어느새 버스가 떠나버리기도 한다. 들녘을 터벅터벅 걸어 어렵사리 목적지를 찾아가면 황량한 빈터가 전부이거나, 누군가 두 팔 벌려 환영해줄지 모른다는 상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 온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기록해놓을 순 없다. 또박또박 찍어 나가는 사진은 분에 넘치는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편하자고, 비용을 줄여보자고 카메라를 잘못 선택하면 두고두고 후회가 남을 것 같다. 누가 정해놓거나 시킨 게 아니다. 단지 당당하고 떳떳하고자 했을 뿐이다. 누구에게? 나보다 먼저 나라를 생각하며 지금을 존재케 한 과거의 그들에게. <뭉우리돌을 찾아서>는 내게 그런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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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우리돌의 바다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편 뭉우리돌 1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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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들고 동분서주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바로 현장만이 줄 수 있는 울림 때문이었다. 때론 그 진동과 떨림이 땅을 치며 우린 왜 이것밖에 안 될까, 하고 한탄을 하게 만들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들이 있어 내가 있으니. - P11


광복절이 있기 얼마 전 신임 독립기념관장 선정을 두고 여야는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이들은 건국절 논쟁은 그만 해야 한다고 말을 하던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헌법에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명백히 나와 있는 이 항목에 대해 대응하는 것이 어째서 논쟁이냐. 당연히 격렬히 싸워야 하는 논제이다.

광복절에 발표한 정부의 ‘8.16 통일 독트린’을 보니 뜬금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통일을 논하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노력 전개’, ‘북한 주민의 정보접근권 확대’, ‘북한 주민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인도적 지원 추진’ 이런 항목들은 북한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항목들 아닌가. 그냥 뱉고 보면 다인지… 대부분의 항목들이 실현 가능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지금 대한민국 내부 정치도 합치를 못하는 마당에 무슨…’ 이란 말이 맴돌았다.


누구나 인생에 한두번은 세계여행을 하는 날을 꿈꾼다. 저자도 그렇게 두 번째 세계여행을 떠났다. 어느 날 인도의 델리 레드포트에 들렀다가 그곳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립운동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후로 여행 목적을 바꿔 그 때부터 세계 곳곳에 산적해 있는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나와 무관한 관광지였다면 아마 그의 기존 계획은 변경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물론 평소 저자가 독립운동(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저자는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을 아우르는 여행기를 책에 내보인다. 


여행 목적을 바꾸게 한 장소인 델리 레드포트는 2차 대전 때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활동지였던 곳이기도 하다(인면은 인도와 버마, 전구는 전투 지역이다). 인면전구공작대는 1943년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 파견에 관한 협정’이 체결된 이후 2년 여간 심리전단(적군 회유 특수 작전) 작전을 단행했다. 2020년 정부는 광복 75주년을 기념하여 영국군과 공작대 사이를 오가던 연락장교인 롤런드 베이컨 대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정작 인면전구공작대 대원 중 대장 한지성은 서훈을 받지 못했는데 1948년 월북을 선택했기 때문인 듯하다. 

조선의용대로 중국 땅을 누비다 광복군 대장으로 멀리 인도까지 날아간 사람 그리고 북한에서 숙청당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분단이 낳은 비극의 주인공 한지성. 이 이야기를 좇아가다 보니 마치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한 또 한 명의 김원봉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젠 만성이 돼버려 잘 느껴지지도 않는 침잠한 슬픔들(P40). 


멕시코 이민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대략 알고 있었는데 그 뒷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이 몇 가지 있다. 먼저 멕시코 이민이 브로커인 존 마이어스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마이어스는 1904년 국내에 들어온 뒤 전국 11개 지역에 대리점을 설치하고 신문에 허위 광고를 게재(기후가 좋고 부자가 많은 나라… 한국인이 가면 반드시 이득을 볼 것 등등)하여 이민자들을 모집했다. 그렇게 모인 이민자들은 배에 올라 우여곡절 끝에 멕시코 해변에 도착했지만 하선이 허락되지 않아서 4일간 배에 머물렀다. 당시 현지 통역인 권병숙(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사촌)은 멕시코 애니깽 농장주 편에 서서 편지를 검열하거나 금지하는 등의 일을 앞장섰다고 한다. 남보다 못한 동포라니 희망에 부풀었던 이민자들을 두 번 죽이는 행동 아니었을지…


멕시코는 안창호와도 관련이 깊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이었던 그는 애니깽 농장주와 이민자들 간의 노동문제 해결하고 한인들을 하나로 모으는 대한인국민회 단체 지회 설립을 위해 멕시코를 방문했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 메리다 지방회 환영식을 치르는 등 멕시코 활동을 모두 끝내고 돌아가려던 그의 귀국행은 고행이 되고 만다. 1918년 6월 귀국행에 오른 뒤 1924년이 되어서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국이 일본의 식민지란 이유로 번번히 비자 발급을 거부당해서 미국->중국(1919), 중국->미국:입국 거절(1921), 중국->미국(1924) 이런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었다고. 1918년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이 최초 좌절되었을 때 안창호는 멕시코 제2의 도시였던 과달라하라의 프란세스 호텔에 머물렀다. 2016년에야 호텔 측에서 안창호가 머물렀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이 사실이 알려졌다고. 한쪽 벽면에는 안창호의 얼굴이, 한글과 스페인어로 기록 내용이 병기되어 있다. 


멕시코의 대표 독립운동가는 김익주다. 부끄럽지만 김익주의 업적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1920년 기준으로 김익주가 임시정부 등에 보낸 독립자금은 1,500달러에 이르렀고 대한인국민회 탐피코 지방회 결성에 앞장섰으며, 3.1혁명 기념식, 순국선열기념식 등을 주도했다(안창호가 멕시코에 들렀을 때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저자는 그의 손자인 다빗 킴을 직접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다빗 킴은 태평양 전쟁 후에도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할아버지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김익주가 많이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저자가 찍은 다빗 킴 사진이 인상적이었다(몇몇 중요 인물들의 경우 이런 기법을 써서 보여준다). 선명한 배경에 인물을 흐릿하게 처리하여 마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것 같은 묘사를 한다고 느껴졌다. 


일제의 한국 병탄 소식이 전해지자 애니깽 노동자로 왔던 이들은 1910년 독립군 양성을 위해 숭무 학교를 설립한다. 멕시코에 이민 온 이들 중 200여 명이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사 훈련 뿐 아니라 국어, 국사 교육 등을 철저히 교육했다고 한다. 다만 멕시코 혁명으로 1913년 짧은 세월을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독립자금 모금으로 독립운동가들을 계속 후원했다.


쿠바 이민은 멕시코 이민사에서부터 시작한다. 설탕 공급으로 유명했던 쿠바는 1차 대전으로 국제 설탕 가격이 오르자 불황의 늪에 빠진 것이다. 멕시코 한인 270여 명은 애니깽 산업이 저물자 더 나은 생활을 꿈꾸기 위해 쿠바 땅을 밟는다. 하지만 현지의 사정은 기대 이상으로 좋지 않았고 시련의 시작이었다. 

저자는 현지에 도착해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아무래도 쿠바는 한국과 제대로 된 외교 관계를 맺지 않은지라 더욱 정보가 부족했다. 인터넷 검색은 기본 흥신소도 찾아가보고 나중에는 국가보훈처에 민원까지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개인정보라 불가하다는 답변을 얻어 좌절했다고 한다. 사적지 자료와 위치는 거의 매번 같지 않았고 이 때문에 나중에는 화가 치밀어 독립기념관 관장에게 메일을 쓰기도 했단다. 국내 사적지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마당에 국외사적지 관리야 오죽하랴 싶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기계적이거나 성의 없는 답변은 너무하지 않나 싶기는 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건데…


쿠바에도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존재했다. 쿠바 지방회는 1945년까지 2만여 달러를 모금해 교육비, 외교비 등에 사용했고 매년 3.1혁명 기념식을 거행하는 등 독립을 향한 마음을 꾸준히 보탰다고 한다. 


저자는 빅토르가 운영하는 까사(민박)를 찾아갔다. 빅토르 호 차는 독립운동가 호근덕(1889~1975)의 후손이다. 호근덕은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임정에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돕는 데 앞장선 인물로 2011년에서야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빅토르가 직계 후손이라는 것도 2017년이 되어서야 밝혀져 서훈이 전달되었다고. 그는 최근까지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묘소를 열심히 관리하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애환을 달래고 있다고. 저자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가 되어 마지막에 방값과 식사비를 치르려고 하자 “내가 독립운동 사진을 찍겠다고 네 한국 집에 머물면 넌 어떻게 할 거니? 우리 아버지가 너에겐 돈을 받지 않으시겠대…” 


마탄사스는 쿠바 야구의 고향 같은 곳이면서 동시에 한인들의 정착 생활이 시작된 공간이다. 시내 외곽 핀카 엘 볼로는 1920년대 한인 100여 가구가 이주해 살던 곳이다.

엘 볼로 입구에는 2005년 미국 시애틀 한인연합장로교회가 후원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에는 한인들이 집단 거주했던 방인 기숙사가 있었고 옆 공터에서 3.1 기념식이 치러지기도 했단다. 독립운동가 임천택이 1932년 야학 교실을 열어 청년들을 상대로 교육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마을 한가운데 한글학교이자 교회로 쓰던 건물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집주인은 과거 그곳이 어떤 장소로 쓰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촬영을 허락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임천택은 본래 기독교 감리교도였다. 그러다 잡지 <개벽>의 이두성이란 사람 소개로 천도교에 대해 알게 되면서 천도교도가 되었다. 1933년 쿠바 천도교 종리원장으로 임명될 정도였는데, 1937년 최린 일파가 친일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접하고 분노하여 쿠바 천도교 종리원을 폐쇄하고 다시 감리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웃지 못할 사건이 있다. 

임천택은 쿠바 유일 한인 이민 역사서인 <큐바이민사>를 남기기도 했다. 딸인 마르따는 아버지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직접 답사를 하며 발품을 팔아 <쿠바의 한국인들>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소중한 기록을 남겨준 이들 덕분에 쿠바의 한인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카르데나스에는 독립운동가 이윤상의 딸 레오노르 이 박이 살고 있다. 이윤상은 1917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임정에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광주학생학일운동에는 특히나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이윤상이란 이름은 쿠바 한인 관련 기록에는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록에만 존재하다가 2018년 한 대학의 후손 찾기 봉사단의 노력으로 이윤상의 딸이 레오노르 여사라는 게 확인됐다. 그 전까지 레오노르 여사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쿠바 이민 1세대들은 모두 사망했다. 당시를 증언해줄 사람이 거의 남지 않은 상황이다. 먼지 수북한 자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갖고 있는 거라곤 사진 몇 장과 유품이 전부다. 게다가 쿠바 이민 초기 39개쯤 되는 성 마저 세월이 흐르면서 이 씨는 리Lee, 김 씨는 킨Kin 또는 킹King, 강 씨는 칸Kan,Can 등으로 변해 누가 누구의 핏줄인지 찾을 길이 더욱 묘연해졌다. - P241


하와이 이민은 대한제국이 허가한 처음이자 마지막 집단 이주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값싼 노동력이었고 농장주들은 중국인, 일본인 노동자 대신에 대한제국 노동자들에 주목했다. 그렇게 1902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로 넘어간 한인들은 모두 7,300여 명을 헤아린다. 대한제국은 이들에게 외교적 보호나 지원 등을 해주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외교권 박탈로 하와이 이민이 금지되었다. 이후에 이민자들은 미국 본토로 갈 것인지 곻샹으로 갈 것인지 하와이에 남을지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이렇게 미국의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19년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이 창단된다. 이 단체는 여성들이 근검절약해 독립운동에 나선 것으로 유명하다. 단원들은 후원금을 모아 매달 3달러의 회비를 보탰다. 

대한여자애국단에 있던 한성신은 <신한민보>에 이런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 여러분의 딸들이나 아내들이 나라를 돕겠다고 돈을 좀 청구할 때에 머리를 흔들어 거절하거나 성을 내지 마소서.

대한은 남자 여러분의 대한만 아니요, 우리 여자들의 대한도 되나니 여러분의 아내나 딸들로 하여금 책임을 다하게 하소서. 의무를 각근히 하게 하소서. … - P315


중가주는 독립운동의 금맥이 되는 곳이었다. 통역관으로 하와이에 간 김형순은 ‘넥타린’이란 품종을 개발하여 털 없는 복숭아로 백만장자 반열에 올랐고 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립운동 지원에 힘을 보탠 것이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도 마찬가지다. 

임정 초대 군무총장에 임명된 노백린은 대한인국민회 지원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에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해 비행 교관을 양성하는 데 앞장섰다. 일반 비행학교 교육생이 아닌 임정 산하 비행군단 소속 훈련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학교 설립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폭풍이 강타하여 후원자인 김종림의 쌀농사 업체가 큰 타격을 입는다. 이 때문에 비행학교는 문을 닫고 김종림의 사업도 이후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김종림은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자 60을 앞둔 나이에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에 지원하고 두 아들도 미 해군으로 참전하여 일본과 싸웠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2005년이 되어서야 김종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를 비롯하여 장인환과 전명운에 얽힌 이야기(너무 슬퍼서 눈물을 여러 번 훔쳤다. 마지막까지 슬프기 짝이 없는…), 이승만에 얽힌 이야기 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 책은 붙잡지 않았으면 포착되지 못했을 그 증거의 현장을 찾아 발벗고 나선 저자의 기록이다. 대부분의 현장은 침묵이 흐르고 말이 없다. 그는 그런 순간들을 마주하고 질문을 던졌다. 구체적인 대답은 나올 수 없지만 눈여겨 보지 않았으면 놓쳤을 현장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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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관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유럽 왕조들의 ‘귀화‘ 많은 경우 어떤 흥겨운 곡예가 필요했던 작전들 •는 이윽고 시턴-왓슨이 신랄하게 ‘관제 민족주의‘ (officialnationalism)‘라고 불렀던 것으로 이어졌으며, 차르식 러시아화는 이것의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일 뿐이다. 이러한 ‘관제 민족주의‘들은 특히 중세로부터 축적되어 온 거대한 다언어 영지에 대한 왕조 권력의 유지를귀화와 결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짧고 꽉 끼는민족의 피부를 제국의 거인 같은 몸통에 늘여 씌우기 위한 수단으로서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차르의 이질적인 신민 집단에 대한 ‘러시아화‘
는 그리하여 고래의 것 하나와 꽤 새로운 것 하나, 이렇게 두 가지 대립되는 정치적 질서를 폭력적. 의식적으로 용접하는 과정을 표상했다. - P139

관제 민족주의들은 반동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보수적인 정책으로서, 대개 자연발생적으로 선행했던 인민 민족주의 모델을 각색한 것이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유럽과레반트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지도 않았다. 제국주의의 이름으로 매우유사한 정책들이 같은 부류의 집단들에 의해 19세기 동안 예속된 광대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영토들에서 추진되었다. 마지막으로, 비유럽 문화 - P170

와 역사로 굴절해 들어간 관제 민족주의는 직접 예속을 피한 얼마 안 되는 지구(그중 일본과 시암)에서 토착 지배 집단에 의해 선택, 모방되었다.
거의 모든 경우, 관제 민족주의는 민족과 왕조의 영지 간의 불일치를은폐했다. 그리하여 나타난 범세계적 모순에 의하면, 슬로바키아인들은마자르화되고, 인도인들은 잉글랜드화되고, 한국인들은 일본화되겠지만, 그들은 마자르인들, 잉글랜드인들, 일본인들을 통치할 수 있는 순례에 참가할 허가를 받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들이 초대받은 연회는 늘 알고 보면 먹을 것이 없는 잔치였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이유는 단순히 인종주의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핵심에서 민족들- 헝가리 민족,
잉글랜드 민족, 일본 민족- 도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민족들은 ‘외국‘의 지배에 본능적으로 저항적이기도 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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