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마지막 물결

제국의 관제 민족주의가 낳은 역설은, 점점 더 유럽의 ‘민족사로 여겨지고 그렇게 서술되는 것을 식민지화된 이들의 의식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때때로 개최하는 둔감한 축제들뿐만 아니라 도서실과 학교교실을 통해서도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베트남 젊은이들은계몽사상가들과 프랑스 혁명, 그리고 드브레가 ‘독일에 대한 우리의 세속적인 적대감‘이라 칭한 것에 대해 배우는 과정을 피할 수 없었다. 마그나카르타, 모든 의회의 어머니, 그리고 명예혁명은 잉글랜드 민족의역사라는 색칠을 입고 영국 제국 전역의 학교에 들어갔다. 홀란드에 맞선 벨기에의 독립 투쟁‘은 콩고 어린이들이 어느 날엔가 읽을 학교 교 - P181

재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필리핀에서의 미합중국 역사, 최후로는 모잠비크와 앙골라에서의 포르투갈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이러니는 이 역사들이 세기가 바뀔 무렵에는 유럽 전역에서 민족적으로정의 내려지고 있던 역사기술의 의식에 입각하여 쓰였다는 점이다. - P182

유럽에서나 식민지에서나 ‘청춘‘과 ‘청년‘은 활력과 진보, 자기희생적 이상주의와 혁명 의지를 의미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는 ‘청춘‘이 선을 그어 한정할 수 있는 사회학적 윤곽으로 작동했다고 하기힘들다. 중년이라도 청년아일랜드당에 속할 수 있었으며, 문맹이라도청년이탈리아당에 속할 수 있었다.

식민지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청년이란 무엇보다도 유럽식 교육을 취득한 일정한 규모가 되는 수의 사람들의 첫 번째 세대라는 뜻이었으며, 이렇게 그들은 언어적·문화적으로 부모 세대와, 그리고 식민지의 같은 또래 절대 다수와 구별되었다(B. C. 팔을 떠올려볼 것). - P183

‘인란더‘는 어느 종족언어집단에서 왔든, 어느 계급 출신이든 동등하게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참하게 평등한 상황에도 뚜렷한 둘레는 있었다. ‘인란더‘는 늘 ‘그래서 무엇의 원주민이라는 건데? 라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인들이 가끔 ‘인란더‘가 세계적 범주인 것처럼 이야기했다면, 경험은 그런 생각이 실제로는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란더‘는 색칠된 식민지에 그어진 가장자리 선에서 멈추었다. 그 너머에는 가지각색의 ‘네이티브‘, ‘앵디젠‘, 인디오(indio)들이 살았다. 더구나 식민지의 법률용어에는 외국인 동양인 (vreemde oosterlingen, foreignOrientals)이라는, 마치 ‘외국인 원주민‘이라는 양 모조 동전같이 의심쩍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범주가 들어 있었다. 주로 중국인 아랍인 · 일본인이었던 그런 ‘외국인 동양인‘들은 식민지에 살기는 했을지언정 ‘원주민 원주민‘ (native natives)들보다 우월한 정치적· 법적 지위를 보유하고있었다. - P187

‘앵도신‘의 식민 지배자들이 추구한 교육 정책에는두 가지 근본적인 목적이 있었고, 나중에 밝혀졌듯이 두 가지 모두는
‘인도차이나인‘ 의식의 성장에 기여했다. 한 가지 목표는 식민화된 민족들과 인도차이나 바깥의 인접한 세계 사이에 존재하던 정치적·문화적유대를 끊는 것이었다. - P190

교육 정책의 두 번째 목표는 정치적으로 믿음직하며, 은혜를 알고, 문화적으로 동화된 토착 엘리트로 복무할,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인도차이나인들을 신중하게 눈금을 잰 양만큼 생산하여 식민지의 관료제와대규모 영리사업체의 하위 직급을 채우는 것이었다. - P192

일부 민족주의자 이데올로그들의 방식대로 언어를 다루는 것, 즉 깃발이나 복장, 민속 무용 따위와 같이 민족됨의 휘장(emblem)으로 언어를다루는 것은 언제나 오해이다. 언어에 대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상상된공동체를 창조해 낼 수 있는 그 역량, 요컨대 특정한 결속을 구축할 수 있는 역량이다. 따지고 보면 제국 언어들도 마찬가지로 일상어였고, 그리하여 여러 일상어 중의 특정한 일상어였을 뿐이다. - P202

스위스 민족주의는 버마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보다고작 10년 정도 오래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민족이 국제적 규범이 되어가던,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민족됨의 ‘모델‘을 가져오는 것이 가능해진 세계사적 기간에 흥기했다. 스위스의 보수적인 정치 구조와 후진적인 사회경제적 구조가 민족주의의 홍기를
‘지연‘시켰다면, 53 근대 이전의 정치제도에 왕조도, 왕정도 없었다는 사실은 관제 민족주의의 과잉을 막는 데 기여했다(제6장에서 논의한 시암의경우와 대조해 보라).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 사례들에서처럼 스위스 민족주의는 20세기의 커뮤니케이션 혁명 전야에 출현했기에, 언어적 단일 - P208

성이 필요 없는 방식으로 상상된 공동체를 ‘표상‘하는 것이 가능하고도실용적인 일이었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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