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北漢)이 방산채(方山寨, 四川省 巴中市)와 아이채(雅爾寨) 두 성채(城寨)를 공격하였는데 이를 쳐서 물리쳤다.

황제는 이미 광남(廣南)지역을 평정하고 나서 점차 강남국(江南國)을 처리하고자 하였지만 정왕(鄭王)인 이종선(李從善)이 입공(入貢)을 하였으므로 드디어 이를 보류하였다. 강남국의 주군은 크게 두려워하여 이달에 처음으로 제도(制度)를 덜어내서 령(令)이라는 용어를 내려서 교(敎)라고 하고,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을 고쳐서 좌·우내사부(左·右內史府)로 하였으며, 상서성을 사회부(司會府)로 하였고, 그 나머지 관부의 명칭도 대부분 고쳐서 정하였으며, 궁전에서는 치문(?吻)19을 모두 제거하였다.


유창은 해문진(海門鎭)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진주를 채취할 수 있는 사람을 미천도라고 불렀다. 무릇 진주를 채취하려면 반드시 발에 돌을 매달고 허리에 끈을 달아서 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깊으면 혹 500척이어서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유창이 거주하는 건물은 모두가 대모(玳瑁)26·진주·비취로 장식하여 사치가 아주 사치하고 화려하였다.

송나라의 군사가 불 지르기에 이르자 반미 등은 불 탄 가운데서 얻은 진귀한 보배를 헌상하였고, 또 진주를 채취하는 위험스럽고 고생스러운 상황을 말씀드리니 황제는 급하게 소황문에게 명령을 내려서 가져다가 재상에 보이게 하였고, 이어서 조서를 내려서 이를 철폐하였다.

"근래에 전·복(?·?) 등 여러 주에 장맛비가 거듭하여 내리니 홍수가 걱정이다. 짐은 여러 차례 둑이 터져서 물이 넘쳐나서 일반 백성들이 거듭 곤란을 겪으니, 매번 전 시대의 책을 읽을 적에 경독(經瀆, 하류)을 자세히 고구(考究)하였다. 하후(夏后)에 실려 있는 것 같은 경우에 이르면 다만 황하를 이끌어서 바다에 이르게 하였는데, 산을 좇아서 내를 통하게 하였지 아직은 일찍이 힘을 가지고 여울져 흐르는 것을 통제하려고 넓게 높은 제방을 만들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전국시대부터는 오로지 이로움만을 찾아서 옛길을 막아서 작게 하여서 큰 것을 막았고, 사사로움으로 공적(公的)인 것을 해롭게 하여 구하(九河)의 통제는 드디어 무너졌고, 역대의 걱정거리는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무릇 진신(搢紳)과 많은 선비들, 초택(草澤, 초야)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평소에 하거(河渠)에 관한 책을 읽어서 물을 소개시키고 이끄는 대책에 깊이 밝은 사람이 있으면 나란히 궁궐에 나와서 편지를 올리는 것을 허락하며 역참(驛站)에 붙여서 조목조목 상주하면 짐이 마땅히 친히 살펴보아 그 좋은 것을 채용할 것이다."

여진이 백사채(白沙寨)를 공격하여 관부의 말 3필과 백성 128명을 약취(略取)하여 갔다. 이미 그리하고서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말을 가지고와서 진공(進貢)하니 조서를 내려서 이를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수령이 다시 와서 진공하며 이미 부락에 명령을 내려서 전에 노략(擄掠)하였던 백성과 말을 보내라고 했다고 말하자 조서를 내려서 그들이 전에 침구하여 노략하였던 죄를 엄히 책망하고 그들이 본받고 순종하겠다는 뜻을 칭찬하고 말을 진공하려한 사자를 풀어 돌려보냈다.

영경공주가 일찍이 옷에 수를 놓은 비취색 저고리를 입고 궁궐에 들어갔는데, 황제가 이를 보고 공주에게 말하였다.

"너는 마땅히 이것을 나에게 주고, 지금부터는 다시는 이러한 장식을 만들지 말라."

공주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용한 취우(翠羽)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공주의 집안에서 이것을 입으면 궁궐과 친척, 마을에서 반드시 서로 본받을 것이니 경성(京城)에서 취우의 값이 높아지고, 하급 백성들은 이익을 쫓게 되어 펼쳐 돌아가면서 판매하고 교역할 것이며 산 것을 상하게 하는 것이 넓게 물들어 갈 것이다. 마땅히 석복(惜福)을 마음에 두어야 하는데, 어찌 이 나쁜 것을 만드는 실마리를 열 수 있겠느냐?"

공주가 부끄러워하면서 사과하였다.

"관가(官家, 황제를 가리키는 말)께서는 천자가 되신 지 오래 되었는데, 어찌하여 황금으로 장식된 견여(肩輿)를 사용하면서 타고서 출입할 수 없습니까?"

황제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사해(四海)의 부유함을 가지고 있으니 궁전을 금은으로 장식한다 하여도 힘으로는 역시 처리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내가 백성들을 위하여 재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망령되이 쓸 수 있겠느냐? 옛말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리지만 천하를 가지고 한 사람을 봉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으니 만약에 자신을 봉양하라는 뜻이라면 백성들이 무엇을 우러러보겠는가?"

이승진이 말하였다.

"장종은 수렵을 좋아하고 고식(姑息)적으로 병사를 거느리기에 힘썼으니 매번 근교에 나갈 적마다 금병(禁兵)의 위졸(衛卒)들은 반드시 말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있다가 아이들에게 차갑고 춥다고 알리고 이어서 구해주기를 바라면 장종은 즉시 그 바라는 것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대개 위엄이 시행되지 않았고, 항상 하사하는 것에는 절도가 없었습니다."

황제가 넓적다리를 어루만지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20년간 황하를 사이에 두고 싸워서 천하를 얻었으면서도 군법을 사용하지 않고 이들을 단속하며 그 만족할 줄 모르는 요구를 멋대로 하며 이것으로 다가 갔으니 진실로 아이들의 장난이었다. 짐은 지금 사졸들을 어루만지고 기르는데, 진실로 작위를 주고 상 주는 것에서 인색하지 않을 것이지만 만약에 나의 법을 어기면 오직 칼날만 있을 뿐이다."

봄, 정월 정유일(6일)에 쇠로 부도(浮圖)와 불상(佛象) 그리고 인물의 쓸데없는 것을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농기구를 훼손하여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을 걱정한 것이다.

전에 운주(?州, 山東省 ?城縣) 노현(盧縣, 山東省 濟南市)의 현위(縣尉)였던 언릉(?陵, 河南省 許昌市) 사람 허영(許永)이 나이가 75세인데 예궤(詣?)18하여 말하였다.

"아버지 허경(許瓊)은 나이가 99세이고, 큰형은 나이가 81세이며, 다음 형은 나이가 79세이니 빌건대 가까운 지방의 관직 하나를 주셔서 가서 봉양하게 하여 주십시오"

경자일(9일)에 허경을 불러 편전에서 만나보고 근래의 일을 물었는데 허경은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다. 이어서 그에게 후하게 하사하고 바로 허영에게 언릉현령을 제수하였다.

북한(北漢)에서는 처음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군비(軍費)를 부담하게 하였고, 문무관원들의 녹봉을 감액했는데 재정에서 쓸 것을 공급하지 못하였던 때문이다.

갑자일(9일)에 요(遼)의 특리곤(特里?, ?隱)인 야율휴격(耶律休格, ? ~998)이 당항(?項)을 쳐서 이를 깨뜨렸고 그 포로와 획득한 것을 헤아려 올렸다. 야율휴격은 일찍이 북부재상 소간(蕭幹)을 좇아서 실위(室韋)와 오고(烏庫) 두 부(部)를 치는데 공로를 세웠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전적(戰績)이 드러났다.

이달에 고려왕인 왕소(王昭)가 죽고, 아들 왕전(王佃, 고려 5대 경종)이 즉위하였다.

3월 초하루 을묘일에 방주(房州, 湖北省 房縣)에서 후주(後周)의 정왕(鄭王, 953~973)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황제는 소복을 하고 발상하고 조회에 10일 동안 나가지 않았고, 시호를 공제(恭帝)라고 하고 경릉(慶陵)의 옆으로 돌려보내 장사지내게 하고 순릉(順陵)이라고 불렀다.

요(遼)에서는 황후의 할아버지를 한왕(韓王)으로 삼고 아울러 그 백부(伯父)에게 관직을 증직하였는데, 황후가 용사(用事, 집권)한 연고였다.

강남국에 기근이 들었는데, 강남국의 주군에게 조서를 내려서 유시하고 배를 빌려서 호남(湖南)지방의 쌀과 밀을 조운하여 그들을 구제 하였다. 신해일(27일)에 강남국의 주군이 사자를 파견하여 진공품(進貢品)을 올리며 은덕에 감사하였다.

야율찰극(耶律察克)이 세종을 시해하자 야율오진은 목종(穆宗)을 보호하여 어려움을 면하게 하고 여러 조정을 섬기면서 공로와 치적을 누차 드러났고 요나라에서는 의지하는 중신이었다. 죽으니 57세였는데, 요주(遼主)가 아프게 애도하며 3일 동안 조회를 거두었다.

계해일(10일)에 요(遼)의 유열(裕悅, 于越)인 야율오진(耶律烏珍, 屋質, 915~973)이 죽었다. 야율오진은 간결하고 조용하며 그릇이 되었고, 식견이 있었는데 일을 급하게 만나게 되어도 이를 처리하는 것이 종용하여서 다른 사람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

신미일(18일)에 여진(女眞)이 요(遼)의 변경을 침범하여 요의 도감(都監)인 달리실(達里迭) 등을 죽이고 변경에 사는 백성과 소, 말을 노략질해서 몰고 갔다.

6월 경인일(8일)에 여진이 그 재상으로 하여금 요에 조근(朝覲)하게 하였다.

공로를 세워서 당연히 관직을 올려 주어야 할 사람이 있었는데, 황제는 평소에 그 사람을 싫어하여 주지 않았다. 조보가 힘껏 그에게 주기를 청하였더니 황제가 화가 나서 말하였다.
"짐이 관직을 올려주지 않겠다면 장차 어찌 할 것인가?"
조보가 말하였다.
"형벌을 주어서 악한 것을 징계하고, 상을 주어 공로 세운 것을 갚아 줍니다. 형벌을 주고 상을 주는 것이란 천하 사람들의 형상(刑賞)이지 폐하의 형상이 아닙니다. 어찌 즐거워하고 화가 나는 것으로 이를 오로지 할 수 있습니까?"
황제가 듣지 않고 일어나니 조보가 그를 좇아갔다.

조보가 진수 지역으로 나가서 편지를 올려서 스스로를 변명하여 말하였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신(臣)이 황제의 동생이신 개봉윤을 가볍게 생각한다고 하는데, 황제의 동생께서는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덕을 온전히 가지었으니, 어찌 틈새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소헌황태후(昭憲皇太后, 902~961)가 크게 위독하실 적에 신이 실제로 고명을 들었는데, 신을 아는 사람은 군주이시니 원컨대 밝히 살펴 주십시오!"
황제가 그 편지를 봉함하여 이를 금궤(金?)에 감추었다.

기사일(19일)에 황제의 동생인 개봉윤 조광의(趙光義, 939~997)를 책봉하여 진왕(晉王)으로 삼았다. 산남서도(山南西道)절도사 조광미(趙光美, 947~984)를 영흥(永興)절도사 겸시중으로 삼고 황제의 아들인 귀주방어사(貴州防禦使) 조덕소(趙德昭, 951~979)를 산남서도절도사·동평장사로 삼고, 이부시랑·참지정사인 설거정(薛居正)을 문하시랑으로 삼고, 추밀부사·호부시랑인 심의륜(沈義倫, 909~987)을 중서시랑으로 삼고 나란히 평상사로 하였으며, 한림학사·지제고인 노다손을 중서사인·참지정사로 하고, 좌교위(左驍衛)대장군 판삼사인 초소보(楚昭輔, 914~983)를 추밀부사로 삼았다.
임신일(22일)에 진왕 조광의에게 조서를 내렸는데, 반열이 재상의 위에 있게 하였다.

11월 초하루 신해일에 요(遼)에서는 처음으로 목종(穆宗)을 시해한 역당(逆黨)인 근시 소격(?格)·화격(華格)·석곤(錫袞) 등을 붙잡아 함께 복주하였다. 요주가 도적을 토벌하면서 느슨하게 하자 논의하는 사람들이 이를 가볍게 생각하였다.

12월 무술일(18일)에 북한(北漢)에서 기원(紀元)을 고치려고 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요(遼)에 명령을 내려 주시기를 품의(稟議)하였다.

참지정사 노다손·지제고(知制誥) 호몽(扈蒙, 915~986)·장담(張澹, 919~974)에게 명령을 내려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장정·순자격(長定·循資格)》과 일반적으로 내리는 제서(制書)를 가지고 어긋나고 다른 것을 상고하여 정하고 중복되는 것을 잘라 없애며 빠지고 누락된 것을 보충하여 《장정격(長定格)》 3권, 《순자격(循資格)》 1권, 《제칙(制?)》 1권 그리고 《기청조(起請條)》 1권을 만들게 하였는데, 책이 완성되자 이를 올렸다. 반포하여 영구적인 격식으로 하니 이로부터 전선(銓選)과 주수(注授)하는 것이 더욱 조리가 있었다.

애초에 북한의 주군은 대내도순검(大內都巡檢)이었는데, 효화제(孝和帝)는 그가 어리고 나약하여서 유계흠(劉繼欽, ? ~973)에게 명령하여 그를 돕게 하고 금위(禁衛)의 일을 맡겼다. 북한의 주군이 서자 유계흠은 시기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병들었다고 사죄하면서 파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북한의 주군이 말하였다.
"유계흠은 다만 먼저 돌아가신 황제를 섬기었는데, 어찌 나를 위하여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인가?"
마침내 내쫓아 교성(交城, 山西省 呂梁市)에 거처하게 하면서 원침(園寢)을 받들게 하고 얼마 후에 사람을 파견하여 그를 죽였다.

3월에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요(遼)에 보냈었는데, 요의 사자인 탁주(?州, 河北省 保定市)자사 야율창주(耶律昌珠, 耶律昌朮, 929?~979)가 시중(侍中)의 직함을 덧붙여가지고 와서 빙문(聘問)하며 강화(講和)하였다.

요의 야율희곤(耶律喜袞, 耶律喜隱)이 스스로 고쳐 책봉하여 송왕(宋王)이 되어 뜻을 얻어서 교만하게 되었고, 요의 주군이 그를 불렀는데, 때맞추어 도착하지 아니하자, 화가 나서 그에게 채찍질을 하였다.
이로부터 분하여 원한을 가지고 반란할 것으로 모의하다가 합문사(閤門使)인 작고(酌古)의 아들인 해리(海里)에게 고발되니 야율희곤은 걸려들어 폐출(廢黜)되었다.

노다손이 이미 돌아오고 나자 강남의 주군은 황제가 남쪽을 정벌하겠다는 뜻을 가진 것을 알고 사자를 파견하여 책봉(冊封)받기를 원하였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고 이에 다시 합문사(閤門使) 양형(梁?, 928~986)을 파견하여 사자로 가게 하였다.
양형이 종용히 강남국의 주군에게 물었다.
"조정에서 지금 시료(柴燎)의 예(禮)를 거행하는데, 나라의 주군께서는 어찌 제사지내는 일을 돕지 않으십니까?"
강남국의 주군은 ‘에에’ 하면서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양형이 돌아오자 황제는 비로소 이를 칠 것을 결심하였다.

번약수는 황제에게 계문을 올려서 노모와 친척들이 모두 강남국에 있어서 이욱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우니 영접하여 치소(治所)에 오게 하기를 원하였다.
황제가 즉시 강남국주에게 호송하도록 조서를 내리니 강남국의 주군이 명령을 들었고, 무진일(22일)에 번약수에게 조서를 내려서 찬선대부로 삼고 또 사자를 파견하여 형주(?州)와 호주(湖州)에 가게 하여 번약수의 계책대로 큰 배와 황흑용선(?黑龍船) 수천 척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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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직후사 - 현대 한국의 원형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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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저자나 분야에 대한 신간 알림이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주기적으로 알라딘 새로 나온 책이나 새로 나올 책 코너를 뒤지곤 하는데 간혹 놓치는 책이 있을까 해서다.

이 책은 12월 말쯤 새로 나온 책을 확인하다 발견했다. 보자마자 눈이 '하트'가 되었다. 한국 현대사, 그것도 내가 가장 관심 있어하는 해방 직후의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3년이 한국 현대사의 중요 기점이 되었음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내가 왜 이 시기에 관심을 갖는지 생각해보았는데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었음에도 여전히 빈 공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시기의 역사를 볼 때마다 좋은 감정보다는 나쁜 감정이 일 때가 많고 답답함을 억누르기 힘들지만 갈수록 감정을 억제하고 거리를 두고 보려고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특히 이 시기 역사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한쪽의 주장에 휩쓸려서 다른 주장이나 입장을 배제하거나 무시하기 쉬워진다. 열린 자세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서문을 보면서 공감을 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한국 현대사의 제대로 된 통사를 찾기 어렵다는 사실 말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있지만 한국현대사를 왜 미국인이 이렇게 잘 알고 있는가 하는 놀라움, (개인적으로) 한국인 연구자들은 이런 작업들을 해주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 말이다. 지금은 그래도 발굴된 자료들이 늘어났지만 저자가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던 시절은 자료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 통사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다. 



이 책은 해방 직후 1945년만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1945년 해방 직후사'다. 『김규식 평전』의 원고 4부 작업을 진행하다가 방대한 양에 출판사 입장을 고려하여 별도의 단행본으로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기존에 『몽양 여운형 평전』과 『우남 이승만 연구』를 내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저자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개인 정치고문이었던 윌리엄스 소령과 관련한 기록(미국 장로교역사연구소에 소장된 윌리엄스의 강연)을 발견한다. 이는 이 책을 쓰는데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주로 기존에 알려졌던 해방 직후의 통념인 역사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한다. 


먼저 해방 후 건준의 성립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해방 직후 건준은 해방 당일 여운형과 조선총독부 정무 총감인 엔도가 만나 타협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총독부, 여운형, 한민당 측이 각기 다른 주장의 설명을 함으로써 도대체 진실이 무엇이냐 궁금함을 낳게 한다. 총독부는 종전 후 치안 유지를 위해 여운형과 거래를 했는데 여운형이 약속을 어기고 건준을 행정권 이양의 도구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여운형 측은 건국동맹(건준 이전 조직)을 기반으로 한 건국 준비로 총독부의 교섭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한민당은 여운형이 총독부와 친일정부 수립을 위해 거래한 결과 건준이 탄생하였고 총독부로부터 자금 지원까지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럼 결론이 무엇인가. 1945년 8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총독부가 종전 대책 수립을 위해 여운형과만 교섭을 한 게 아니고 여운형과 한민당계가 교섭을 진행했으며 해방 후 여운형과 한민당, 총독부 간에 건준의 방향성을 둘러싼 협의와 교섭이 긴밀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여운형은 해방 이전부터 한민당 계열과 교섭을 진행했으나 한민당 측이 거부함으로써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건준은 단시간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 미군정과 한민당의 공격으로 2차 개편, 3차 개편이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졌다. 나는 건준이 초반에는 통일을 지향하며 좌우합작 조직으로 탄생했으나 이후 좌익이 확대되면서 우익이 탈퇴하여 성격이 변화가 되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애초에 한민당은 건준에 참여를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민당은 해방 후 건준과 함께 치안유지회를 조직으로 변화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 때의 조직의 명단(한민당 인사들이 포함 등)은 보여주기 식이라는 이야기다.


민족통일전선을 주장했던 건준은 좌익 중심의 인공을 건설함으로써 수명을 다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인민위원회로 정권을 이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조선공산당은 이에 맞는 조직인 인공을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인공의 수립으로 건준 내부에서 갈등하던 좌우익의 정권 수립 방략이 흐름을 잃게 되었다.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의 해체를 요구했고 지방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중앙인민위원회와 지방인민위원회가 흐름을 달리 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윌리엄스는 해방 후 초반 하지와 몇 개월을 함께 일했을 뿐이지만 미군정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지 윌리엄스는 공주 영명학교를 설립한 선교사인 프랭크 윌리엄스의 아들로 제물포에서 태어났다. 그는 해군 의무장교로 한국 땅을 처음 밟은 하지를 에스코트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하지의 개인 정치 고문 역할을 맡게 된다. 그는 기독교, 연희전문학교, 친미, 반공의 입장에 따라 미군정에 인사를 좌지우지했다. 또한 이 무렵 한국에 있던 선교사 자제들이 미군정 초기 정책을 결정하는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고문회의의 인사는 이렇게 기독교, 한민당 출신자로 채워졌다. 


미군정에 또 주목하지 않은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하지의 공식 통역인 이묘묵, 조선총독부의 공식 영어 통역관 오다 야스마, 사상 전담 검사인 나가사키 유조 등은 여운형과 건준, 인공을 친일정권이자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으며 한민당은 친미적이고 좋은 교육을 받은 민주주의자 애국자로 둔갑시켰다. 그러면서 미군정 하의 권력을 꿰차고 승승장구했다. 한민당은 미군정의 핵심 정당으로 부상하며 권력을 독점하였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미군정은 미 국무부가 특정 정치 세력과 연계하지 말라는 지침(다자간 신탁 통치)을 위반하고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답습, 공산주의를 배격했으며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미군정은 한민당의 조언에 따라 한국인이 인공을 부정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생각하여 임정의 귀국을 서두르면서 정무위원회를 만들었다. 이승만은 10월 한국에 들어와 한민당 계열과 함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는데 이것이 미군정 하의 정무위원회이다. 그러나 귀국한 임시정부는 물론 좌익 세력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가를 거부하면서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전 미군정 하 과도정부를 세우겠다는 계획은 실패하였다. 

모스크바 3상 회의 후 정국은 반탁 운동 vs 찬탁 운동으로 휘몰아치게 되는데 1945년 12월까지 반탁 운동을 주도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한민당 계열이었던 것이다. 이 무렵에는 임정이 반탁을 주도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점은 여운형이 건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건국동맹의 준비를 오랫동안 해왔고 건준을 위해 한민당계와도 협상을 시도한 일이다. 또 단 몇 개월간 일했을 뿐인 윌리엄스, 주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끼친 영향이다. 한민당의 숨은 세력인 이묘묵, 오다 야스마, 나가사키 유조의 주장은 당황스러웠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나는 한민당과 이승만과의 조합으로 우익 정당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것이 미군정과 연결되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전 물밑 작업이 그리 이루어졌을 줄도 몰랐다.


까도 까도 놀라울 정도로 양파 같은 것이 이 시기의 역사가 아닐까. 

저자가 해방 후 역사를 연구해주어 독자로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숨어 있는 자료가 여전히 있지 않을까 궁금해하며 후속 작업이 이어지기를 고대한다. 특히 김규식 평전 작업이 얼른 끝마쳐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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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02-01 11: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늘상 알라딘을 뒤지곤 한답니다.
제가 모르는 책을 놓치게 될까봐요.

어제 도서관 희망도서 마감일을 앞
두고 부랴부랴 3권을 신청했답니다.

예전에 몽양 평전을 읽으면서 일본
군이 민정 이양을 위해 몽양 선생
과 접촉했을 정도로 적에게도 인정
받았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패전국이 분단되었어야 했는데,
왜 피해자인 우리가 분단이 되었
는지 아직도 억울합니다.

거리의화가 2024-02-02 09:06   좋아요 2 | URL
그러고 보니 희망도서를 놓치고 있었군요. 작년에 생각보다 일찍 희망도서 신청이 마감되는 바람에 신청 못한 책들이 꽤나 있는데 말이죠. 저도 확인해보고 신청해야겠습니다.

여운형 선생님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들 때가 많아요. 최근에는 그나마 공로가 인정되는 것 같지만 또 일부에서는 여전히 매도하거나 억측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어서...
분단으로 인해서 잃은 것이 너무 많고 지금도 그 피해가 지속되고 있어서 답답하고 화가 나죠. 그래서 더 들여다보고 공부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2024-03-06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06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군정 초기의 가장 중요한 인선의 통로는 고문회의의 조직이었다.
고문회의라는 조직 형태는 한민당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1945년 9월 22일 "명망과 식견을 구비한 인사로써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행정과 인사에 자문케 할 것"을 건의했고, 이것이 수용되었다. 윌리엄스는 하지로부터 미군정을 위해 전국 고문회의를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지만, 사실 이런 아이디어는 한민당에서 나왔고, 윌리엄스를 통해서 하지의 재가를 받은 것이었다. 고문회의는 일제 시기 어용기관이었던 중추원(中樞院)의 재판이었는데, 좌파는 인민공화국의 약화를 우려했고, 우파는 임시정부의 약화를 우려했다. 한국인들의 열광적 환호도 없었다. - P320

한민당은 미군정기 핵심 국가 권력기구였던 고문회의(김성수, 송진우), 경찰(조병옥, 장택상), 사법부(김병로), 검찰(이인) 등을 장악했다.
고문회의를 통해서 주요 직책에 한민당원을 추천했으며, 공권력의 핵심인 경찰, 검찰, 법원을 한민당원들이 장악함으로써 미군정기에 사실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했다. - P332

이승만과 한민당, 미군정은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슬로건으로 내건 정당통일운동의 일환으로 독촉중협을추진했으며, 이는 미국 기록에는 전한국국민집행부·통합고문회의·정무위원회로, 이승만 기록에는 국무회의 · 국정회의·민의 대표기관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독촉중협은 좌파와 중도좌파는 물론 임시정부 세력이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성립은 되었지만 내용적으로 실패를 면할 수 없었다.
또한 좌파·중도파 임시정부 세력을 포함한 민족통일의 완전체가 모스크바회담 개최 이전에 완성되었어야 하지만, 시기적으로 이미 늦은 상태였다.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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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를 대체할 한국인 인력이 부재하거나 부실한 상황에서 신뢰할 만한 인력이 필요했던 하지는 윌리엄스의 조언에 따라 "신뢰할 수 있는" 일제 시기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제와 가족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국무 - P262

부는 한국 내 주거·안전·생활상의 이유를 들어 선교사들의 한국 귀환에소극적이었던 반면, 하지. 맥아더 · 전쟁부는 한국 상황에 경험이 있는 선교사들을 활용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선교사업을 계속 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었다. 전쟁부와 미군정은경험과 능력이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주한 선교사 및 가족들이 필요했고, 선교사들은 한국으로 들어갈 비자와 입국 허가가 필요했다. 선교사들은정책 결정에서 직접적인 힘이 없었지만 미군정 고위 장교들과 한국 지도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들에게는 전례 없는 기회와 권력이기다리고 있었다. - P263

윌리엄스는 하지의 명령에 따라 고문회의에 충원할 개신교 대표 2명을 찾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친일파가아닌 목사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는 윌리엄스가 개신교 대표를 찾지 못하자, 나머지 종교 대표들의 임명을 거부했다. 결국 종교계 대표 5명은 임명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12명의 고문이 임명되었지만, 여운형은 고문 취임을 거부했고, 북한에 있던 조만식도 취임할 수 없었다. 45그러나 나머지 10명의 대표 중 다수가 기독교 평신도였으므로 전체 고문11명 중 기독교인은 6명으로 그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 P274

미군 진주 이후 처음 10여일 동안 24군단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G-2 Periodic Report)에 등장하는 주요 정보 제공자는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서상일, 김용무, 설의식, 김도연, 김동성 등 한민당 지도부였다. 이들은 여운형·안재홍 등과 건준·인공에 대한 모략적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며, 미군이 이승만·임시정부와 동반 입성하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과 이들에 대한 절대 지지를 표명했다. 이후 역사가 전개된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한민당이 미군 진주 초기 이승만과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열광적으로 주장한 것은 정치공학적인 술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뜻하지 않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일본군이 전달한 왜곡된한국 상황에 관한 정보로 의심이 가득한 채 진주한 미군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그 덕분에 미군 수뇌부에 훨씬 더 가까이, 훨씬 자주 접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미군 수뇌부의 신임을 얻어,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 P292

하지가 인정할 수 있는 기성의 주권 정부, 기성의 권력은 조선총독부와 그 행정력이었을 뿐 인민공화국 같은 자생적 토착권력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의일본인 고관들을 잠정적으로 유지하거나 고문으로 활용할 수 없게 되자 미군정은 직접 통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공화국 같은 현지 토착권력의 활용은 미국 본국이나 주둔군 사령관 하지의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았다. 또한 하지와 그의 군대는 수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적 세계에 익숙했기 때문에 미군 병사들은 인민공화국을즉시 적이나 라이벌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인민공화국의 지도자였던여운형은 한 달 넘게 하지를 만날 수 없었다. 진주 직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부정되었던 인민공화국은 1945년 12월 12일 미군정에 의해 공식적으로 불법 단체가 되었다. - P303

국무부는 현지의 강력한 요청을 수용할 수밖에었는데, 개인적 차원에서라도 임시정부와 관련 인사들을 활용하는 정책은 미국이 특정 정치세력과 연계되어 있고 그들을 후원한다는 정치적 혐의를 벗기 어려웠다. 미 국무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는 임시정부를비롯한 모든 한국인은 임시정부의 관리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귀국하는 한국인은 이런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요구하는 것이었다. - P311

맥아더에게 전달된 3부 조정위원회의 훈령 176/8호(SWNCC176/8)는 임시정부 혹은 유사한 정치조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고 규정했다. 다만 필요할 경우 그 조직 성원을개인 자격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124 3부 조정위원회는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간판으로 활용할 경우 미국의 공식 대한정책인 연합국의 합의에 따른 신탁통치 계획이 무산될 가능성을 우려하며 임시정부 활용을 반대했지만, 이 훈령은 하지에게 임시정부 활용에 대한 내락으로 받아들여졌을 공산이 컸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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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사 2 도시로 보는 시리즈
신윤환 외 지음 / 사우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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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 2편을 읽었다. 이번 편은 동남아시아 국가의 수도가 상당수 포함된 것이 눈에 띄었다. 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 마닐라, 프놈펜, 비엔티안, 이렇게 다섯 곳이다. 수도는 국가의 대표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발전을 위해 인력과 기술을 집중 투입한다. 그래서 그만큼 개발이 이루어지고 인구가 집중되어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는 화려함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 수도는 근대에 들어와 제국주의에 의하여 개발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으나 그 이전부터 왕국의 수도로 역할을 한 도시도 있다. 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 마닐라가 근대에 이르러 개발이 이루어진 경우라면 프놈펜과 비엔티안의 수도 역사는 그 시기를 꽤나 거슬러 올라간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은 크메르 제국이 멸망할 무렵인 1434년에 크메르의 수도가 되었으나 그 이후 캄보디아의 역사는 쇠락에 쇠락을 거듭해서 수도라는 게 별 의미가 없었다. 버려지고 잠시 수복되었다가 다시 버려지고, 나라가 힘이 없어지니 왕도 예전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여기는 1975년 크메르 루주군이 권력을 장악한 뒤 벌어진 폭압의 상처가 깊게 패어 있는 곳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론 놀 정권의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낀 시민들은 처음에 정권을 잡은 크메르 루주를 환영했다. 이들은 캄보디아 민족주의 정신으로 남베트남과 미국을 적대시하고 인민을 해방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막상 정권을 잡자 화폐와 사유재산, 종교를 없애고,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대학살에 나섰다. 크메르 루주는 당시 프놈펜에 살고 있던 모든 주민을 강제로 시골에 이주시켜 이 지역은 사실상 페허가 되어 있었다. - P16

크메르 루주 정권은 1981년 자진 해체했으나 이 때 새 정부에 도움을 준 베트남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물러나면서 1993년이 되어서야 캄보디아 왕국으로 국명이 바뀌고 시아누크가 왕이 되었다. 다행히 깊은 상흔을 뒤로 하고 현재 프놈펜은 빠르게 거점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도로, 빌딩, 공원 등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등 이제는 제법 수도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고.

1353년 지금의 루앙프라방에 란상 제국이 세워졌다. 1479년 다이비엣 공격으로 수도가 페허가 되면서 1560년 수도가 비엔티안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1828년 비엔티안은 시암 침략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프랑스가 들어오고 나서 1900년이 되어서야 재건되었는데 1940년 시암 공격으로 또 한번 파괴된 뒤 재건되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현재 라오스의 수도는 비엔티안이다. 라오스하면 ‘루앙프라방‘만 익숙하고 ‘비엔티안‘이란 이름 자체가 낯설었는데 16세기부터 한 왕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루앙프라방은 그 이전에 수도였고 당시의 왕궁과 사원이 남아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이기에 도시명이 익숙했던 것 같다.
작가가 라오스에 대한 역사와 관련 문물, 문화, 먹거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중에서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와 닿았다.
짧은 일정으로 가는 여행자는 여행지를 아무래도 깊게 들여다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 곳의 사람들에게 특별함을 느낀다면 아무래도 그 여행지가 더욱 오래 기억남는 것 같다. 개인의 역사는 역사에서 찾기 어려울 수 있지만 현재의 사람들에게서 삶의 향기를 느낄 수는 있지 않을까.

바나나 잎으로 살포시 싼 소시지와 파파야샐러드 봉지를 들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수많은 박물관과 기념관과 국보로 지정된 사원에서 찾으려고 했던 라오스의 역사는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역사책에서 빠졌을 뿐 그 땅에서 자신의 삶을 묵묵히 이어가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파탓루앙 회랑을 돌며 기도하던 사람들, 아누웡 왕 공원에서 과일을 팔거나 야식을 팔던 사람들, 빠뚜싸이 공원 분수대 근처에서 산책을 즐기던 가족들, 뚝뚝 택시비를 어떻게 흥정하면 좋겠냐고 물으니 수줍게 알려주던 호텔 직원. 그들이 없었다면 라오스라는 나라가 어떻게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을까? - P345~346

참! 프놈펜 말고 캄보디아의 도시가 하나 더 소개되었다. 시엠립인데 앙코르와트에 가려면 이곳을 거쳐가야 하기 때문에 유명하다. 시엠립은 앙코르 왕조가 있던 곳이고 왕조가 몰락한 후 19세기 후반까지는 태국이 점령했다가 이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860년 초 프랑스의 식물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베르 앙리 무오가 방문한 후 책을 출발해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사회에 앙코르 와트의 존재를 알렸다. 당시 앙리 무오는 약 400년 전에 멸망한 옛 도시 앙코르의 유적을 본 것인데, 당시 그곳에는 1000여 명의 승려가 기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앙코르 유적의 소유권을 차지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인근 태국을 공격하여 캄보디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고, 1863년 프랑스 보호령으로 삼았다. - P81

시엠립에는 앙코르 유적군인 프놈 바켕 사원, 앙코르와트, 앙코르 톰, 타 프롬 사원이 있고 앙코르 왕조가 성스러운 산으로 부른 프놈쿨렌산과 프놈쿨렌 폭포가 있다. 또 초기 왕코르 유적군인 프레아 코, 바콩, 롤레이 사원이 있으며 거대한 바다 같은 호수인 톤레사프도 있다. 올드 마켓 지역에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건축물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의 도시들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부는 마젤란이 닿은 곳으로 필리핀에서 가톨릭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라고 한다. 세부는 스페인령 식민지일 때 멕시코 남미 문화가 들어와 대농장과 지금의 다운타운 지역에 석조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이후 미국령 식민지가 되었을 때 도로나 근대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자카르타는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무역항(바타비아)이자 식민 도시로 개발이 되었다. 1961년 수도가 된 이후 자카르타는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 수 때문에 남쪽으로 도시를 확장하여 지금은 천만 인구가 되었고 규모가 커진 만큼 빈부 격차가 커졌다고 한다.

쿠알라룸푸르는 말레이시아 수도이자 최대 도시, 정치 중심지이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로 특히 중국인과 인도인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를 비롯한 고층 빌딩이 즐비하고 잘 닦인 도로, 편리한 교통 때문에 관광객들이 관광하기에 좋은 도시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도교 사원과 힌두교 사원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마지막으로 후에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후에는 베트남 중부 도시로 다낭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베트남 최초, 최후의 통일 왕조였던 응우옌 푹아인이 수도로 삼은 곳이었다고 한다. 현재 황성과 사원이 전하는데 안타깝게도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겪은 곳이라 온전하지가 않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구정 공세를 감행해 100개 이상의 남베트남 도시를 기습했다. 다른 도시는 미군이 수비게 다시 탈환했으나, 후에에서는 예외적으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북베트남에서 대략 5,000명 이상의 병력이 공격을 단행했고, 북베트남 인민군에 의해 후에 대학살이라 불리는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미군은 폭격기를 동원해 후에를 휩쓸었고, 이 과정에서 후에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 P273

다낭은 프랑스가 들어온 후 식민지 항구로 유명해졌다. 15세기까지는 강력한 해양 국가였던 참파 왕국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동서 무역의 요청지로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현재는 중부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중부 유일의 직할지다. 만약 후에의 유적이 온전했다면 다낭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을까.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정신적 문화 수도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왕불사상(왕=부처)이 잘 구현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승려의 신분적 위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윈난성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중국인의 비율이 50% 이상이라고 한다. 아마도 미얀마의 중국 같은 느낌이 아닐지…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동남아시아에 일찍부터 전파되었고 동남아시아는 이렇게 인도화되었다. 고대 왕국은 종교와 뗄레야 뗄 수 없는데 이런 불교가 수입되었으니 동남아시아의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인도화의 핵심은 바로 왕권의 확립인데, 4~6세기에 동남아시아 각 지역이 받아들인 힌두교와 불교는 왕권의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샤머니즘이나 토템, 애니미즘과 같은 토착 종교에 의존하던 지도자의 권력이 일시적이었다면, 힌두교 및 불교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 신과 왕을 동일시하기 시작한 인도화 이후 왕의 권력은 절대화, 영속화하기 시작한다. 힌두교 세계관의 절대 신인 비슈누나 시바와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자신을 신 혹은 부처의 화신으로 자임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고, 권력을 정당화하는 통치 방식이 바로 인도화의 영향이었다. - P185

만약 나중에 인도 등 동남아시아 국가를 가게 된다면 불교와 힌두교(신과 경전 포함)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다양한 경우 글쓰기 스타일에 따라 호불호가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은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소중하다.

총 13개의 도시를 소개하는데 나는 그 중 자카르타에 대한 소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도시 내부를 구석구석 소개시켜주는데 시기별로 가상의 인물 세 명을 등장시켜 그들의 일상을 따라 가며 알려준다. 이 방식은 마치 내가 그곳에 가서 그 사람들의 현장을 보는 느낌이어서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대중들이 그 나라의 역사와 도시, 문화를 이해하기에 탁월한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에는 감동이 일었다.

‘완벽한 승리‘ 혹은 ‘승리의 행위‘를 의미하는 자카르타는 대략 400년 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항이자 식민 도시로 개발되었다. 17세기 향신료를 운반하던 상선의 선원, 19세기 가난과 차별이 일상이었던 식민지의 소년, 21세기 도시 빈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에게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400년 동안 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였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자카르타는 항상 최첨단의 문물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였지만, 때로는 엄청난 환희와 극심한 고통 그리고 좌절감을 안겨준 도시였다. - P279

이 시리즈가 뒤이어 더 나올 수 있을까. 아직도 동남아시아의 도시 중 많은 곳들이 비어 있다. 독자로서 더 만들어져서 많은 곳이 소개되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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