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 B.C.15

남창위 매복의 상서

지금 폐하께서 이미 천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또 죽임을 가하시어 천하가 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으니, 이는국가의 큰 병폐입니다. 지금 군주의 명령을 범하고 군주의 위엄을 빼앗아 外戚의 권세가 날로 더욱 높아지니, 폐하께서 그 형체를 보지 못하시거든 바라건대 그 그림자를 살피소서. 형세가 군주를 능멸하고 권력이 군주보다 높아진 뒤에 막는다면 또한 미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上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 ≪漢書 梅福傳≫에 나옴-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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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만의 동료 중 하나가 찾아와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수년 동안 알자스 문제에 대한 한 가지 해결책으로서 독일 제국 내의 연방정부로 인정하여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안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만일 이러한 제안이 알자스인들에 의해 채택된다면 프랑스는 실지회복이라는 명분을 잃게 될 것이다.
얼마전인 7월 16일 프랑스의 사회주의 의회는 이에 대한 지지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독일 군부는 변함없이 각 지방마다 수비대를 주둔시켜야 하며 그들의 정치적 권리는 "군사적 필요"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1년까지 단 한 번도 헌법이나 자치가 허용된 적이 없었다.
베트만의 동료는 지금 당장 알자스의 자치를 위한 즉각적이고, 공개적이며 공식적인 회담을 제의하라고 그를 독촉했다. 이것은 아무런 결과 없이 시간만 끌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것을 검토하는 동안만이라도 프랑스에게 공격을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도덕적 효과는 기대할 수 있을것이다.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영국의 참전을 배제 - P153

시킨 채 자신의 병력을 러시아로 돌릴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제안의 작성자는 익명으로 남아 있으며 출처도 의심스럽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기회가 있었으며 수상 본인이 그것을생각해 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를 잡으려면 대담해야 하는데, 큰 키와 어두운 눈 그리고 잘 다듬어진 황제 수염의 인상적인 외모(façade)와는 달리 베트만은 테어도어 루스벨트가 태프트를 일컬어 말한 대로, "매우 나약한 남자였다. 결국 독일정부는 러시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낸 같은 시간 프랑스에게도 중립을 지키도록 유도하는 제안 대신 최후통첩을 보냈다. - P154

그날 저녁 몰트케는 동진을 거부했고, 펠트만 중위의 부대는 룩셈부르크의 트루와비에르즈를 점령했고, 메시미는 전화로 10킬로미터 후퇴를 재확인했으며, 해군성에서는 해군장관이 야당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는데 이중에는 후에 상원의원이 되는 비버브룩과 버켄헤드도 있었다. 기다리는동안 긴장을 풀어 보려고 저녁 식사 후 그들은 브리지 게임을 했다. 게임도중에 전령이 붉은색 전보 상자를 가지고 왔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치수가 가장 큰 상자였다. 처칠은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상자를 열고그 안에 있는 한 장의 서류를 꺼내 그 위에 써 있는 한 줄의 문장을 읽었다. 그것은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 P185

독일은 이 통첩 서두에서 지베-나무르 통로를 따라 프랑스군이 진격할 것임을 알려주는 "믿을 만한 정보"를 입수하였으며, "벨기에를 지나독일을 공격하려는 프랑스의 의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벨기에 측은 나무르를 향한 프랑스군의 움직임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본 적이없었고, 실제로도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 비난은 그들에게 아무런 인상도주지 못했다.) 계속해서 통첩은 벨기에군이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은 "스스로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이 적대적인 공격에 대해 선수를 칠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만일 벨기에가 독일의 벨기에 영토 진입을 "자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한다면 독일은 이를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유감"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만일 반대로 벨기에가 "우호적인 중립을 유지한다면, 독일은 "평화가 이루어지는 즉시 그 영토에서 철수하고, 독일군대에 의한 어떠한 손해도 보상하며, "평화가 확인되면 왕국의 주권과 독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할 것이다." 원문에는 앞의 문장에 이어 "벨기에가 제기하는 어떠한 보상 요구도 프랑스의 비용으로 지불할 것임을 기꺼이 동의한다"고 적혀 있다. 마지막 순간에 벨로브는 이 뇌물부분을 삭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 P192

"여러분들은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카이저는 8월 첫째 주에 출정하는 군대에게 연설했다. 8월 9일 독일 왕실 사관은오페르스도르프 백작이 오후에 방문하여 이 일이 10주 이상 계속될 수는 없다고 말했고, 호흐베르그 백작은 8주로 예상했으며 이 사태가 끝나면 "우리는 영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했다.
서부전선으로 떠나는 독일군 장교는 스당 기념일(9월 2일)에 파리의카페 드 라 뻬(Café de la Paix)에서 아침을 먹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러시아군 장교들은 비슷한 시간에 베를린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6주 정도가 일반적인 견해였다. - P217

직관으로 그랬는지 또는 고도의 지적능력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군인인 세 사람만은 수개월이 아닌 수 년간 길게 뻗은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길고, 소모적인 투쟁"을 예언한 몰트케가 그 중 하나였다. 죠프르가 두 번째였는데 그는 1912년 장관들의 질문에 대해 만일프랑스가 전쟁에서 먼저 승리를 거두게 되면, 독일의 국가적인 저항이시작될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양쪽모두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일 것이며 그 결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각각 1911년과 1906년부터 자국의 총사령관이었던 죠프르나 몰트케, 그 누구도 계획을 세우면서 자신들이 예견한 형태의 전쟁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이자 자신의 전망대로 행동했던 유일한 인물은 키치너 경인 - P218

데, 그는 최초의 계획에는 참여하지 않았었다. 8월 4일 이집트로 향하는증기선에 승선하려는 순간 급하게 소환되어 국방장관에 임명된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어떤 수수께끼 같은 신통력에 의해 이 전쟁은 3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를 믿지 않는 다른 각료들에게 그는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3년은 각오해야 합니다. 독일 같은 나라는 사실상 결말이 난 후에도 완전히 궤멸되어야만굴복할 것입니다. 그 과정은 매우 오래 걸릴 것 같군요. 지금 살아 있는사람은 누구도 그것이 얼마나 걸릴 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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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書에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人君은 편안하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으나 항상위태롭고, 보존하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으나 항상 망하니, 人臣이 權柄을 잡고있으면 國政에 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다. 지금 王氏 한 姓이 붉은수레바퀴와 화려한으로 꾸민 수레를 타는 자가 23명이고, 정사를 잡고 권세를 부리며, 五侯가 교만하고 사치하여 함께 형벌과복(관직)을 내리고 있으니,東宮의 높음을 인하고 甥의 친함을 빌려서 위엄과 복을 베풉니다." 하였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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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가 없는 이 엄청난 행사의 목적인 에드워드는 종종 유럽의 아저씨로 불렸는데, 유럽의 지배계층만 가지고 하는 얘기라면 이 별명은 문자 그대로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카이저뿐만 아니라 자신의처제이며 미망인인 러시아 황태비 마리에를 통해 짜르인 니콜라스 2세에게도 아저씨가 된다. 그의 질녀인 앨릭스는 짜리나이고, 딸 모드는 노르웨이의 왕비이며, 다른 질녀 에나는 스페인의 왕비이고, 셋째 질녀 마리에는 후에 루마니아의 왕비가 된다. 그의 처가인 덴마크 왕실은 덴마크의 왕위를 차지하는 것 외에도 러시아 짜르의 외가가 되며 그리스와노르웨이의 여러 왕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친척들 즉, 빅토리아여왕이 낳은 아홉 명의 아들과 딸들의 다양한 후손들은 유럽의 여러 궁정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다. - P53

유럽은 잭스트로(조각들을 쌓아 놓고 다른 조각들을 움직이지 않게 한 개씩 뽑아내는 놀이: 역주)처럼 섬세하게 포개진 칼 더미였는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 것을 건드리지 않고는 자기 칼을 뺄 수없었다. - P75

슐리펜은 프랑스군을 완벽하게 포위하기 위하여 자신의 우익이 최대한 멀리 서쪽으로 릴까지 진군하기를 원했다. "프랑스로 진군할 때, 최우측 병사의 소매가 해협을 스치도록 하라"고 그는 말했다. 더욱이 영국 - P84

의 참전을 고려하고 있던 그는 프랑스군과 더불어 영국의 해외원정군(BEF)을 갈퀴로 긁어 모으듯 우익이 휩쓸어 주기를 원했다. 그는 영국의지상군보다는 그들 해군에 의한 해상봉쇄라는 잠재적 위험에 더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의 지상군에 대해 신속한 승리를 쟁취하고, 영국의 적대적인 경제적 압박이 실효를 거두기 전에 전쟁을 조기 마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은 우익에 모아져야 했다. - P85

1910년 1월 자신의 두 번째 방문 때 윌슨은 포쉬에게 건넨 질문을 통해 프랑스 측이 기대하고 있던 영불동맹의 문제점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답을 들었다.
"귀측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영국군 규모는 얼마냐"고 윌슨이 물었다.
"단 한 명의 영국 병사만 있으면 되고, 우리는 그가 전사하도록 놔둘것"이라는 것이 포쉬의 전광석화 같은 대답이었다.
윌슨 역시 영국의 확약을 받고 싶었다. 독일과의 전쟁이 임박했으며불가피하다는 것을 확신했던 윌슨은 이 위급함을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 P119

주입하기 위해 애썼으며 그 자신도 이 생각에 완전히 몰입되어 버렸다. - P120

거대한 러시아군은 유럽에 대해 마력을 미치는 존재였다. 군사 기획의 체스판에서 러시아는 그 크기와 수에서 단연 최대의 기물이었다. 러일전쟁에서 보여준 형편없는 실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증기 롤러"라는 생각은 프랑스와 영국에게 안도감과 격려를 주었으며, 등 뒤에 도사린 슬라브족에 대한 공포는 독일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비록 러시아 군대의 결함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러시아 군대가 아니라 러시아의 겨울이 나폴레옹을 모스크바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자국영토인 크리미아에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에게 패하였고, 러시아의 엄청난 수적 우위 때문에 결국 졌지만 1877년 플레브나 공방전에서 터키가선전했으며, 일본군이 만주에서 그들을 물리치긴 했지만, 무적의 러시아군이라는 신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우뢰와 같은 코삭(Cossack) 병사들의 저돌적인 기병 돌격은 유럽인들의 마음에 너무도 생생하게 각인되어있었기 때문에 1914년 8월 신문 삽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코삭 병사들이 아직 러시아 국경에서 100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도 그 역 - P129

동적인 모습을 아주 상세하게 그릴 수 있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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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저녁에 진교역(陳橋驛, 하남성 봉구현 동남쪽)에서 유숙하는데, 장사(將士)들이 서로 더불어 모의하여 말하였다.
"주상은 어리고 약하여서 우리들이 죽을힘을 내어 국가(國家)를 위하여 적(賊)을 깨뜨려도 누가 이를 알아주겠는가! 먼저 점검(點檢, 조광윤)을 세워서 천자로 삼는 것만 같지 아니하며, 그런 다음에 북방정벌을 하자."

조서를 내려서 천하를 소유한 호칭을 정하여서 ‘송(宋)’이라고 하였는데, 관장하고 있는 절도(節度)의 주명(州名, 귀덕절도사의 치소는 송주) 때문이었다.

국운(國運)을 정하여 주(周)의 목덕(木德)을 받아서 이어서 화덕왕(火德王)으로 하고 색깔은 붉은색을 숭상하게 하였으며, 납제(臘祭)는 술(戌)을 썼다.

요인(遼人)이 체주(?州, 산동성 혜민현)를 침범하자 자사인 하남(河南) 사람 하계균(何繼筠, 921~971)이 뒤쫓아서 그 무리를 고안(固安, 하북성 고안현)에서 깨뜨리고 말 400필을 얻었다.

야율노호는 태조의 셋째 아들인데 성격이 잔혹하였지만, 서로(舒?, 述律) 태후가 그를 아주 아껴서 태종(太宗, 야율덕광) 시절에 세워서 황태제로 삼고 천하병마대원수를 겸하게 하였다. 태종이 난성(欒城, 하북성 난성현)에서 죽고, 영강왕(永康王, 야율올욕)이 진양(鎭陽, 항주의 치소)에서 즉위하니 이 사람이 세종(世宗)이며, 태후는 야율노호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하였다.
군사가 실패하니 대신인 야율오진(耶律烏珍, 옛 이름은 야율악질)이 야율노호를 마주하고 죄를 헤아리며 지독하고 포학하여 인심을 잃은 것을 헤아리니, 태후는 응답할 것이 없었고, 군사는 드디어 풀어졌다.

시신(侍臣) 가운데 군사가 주(周)에 패하여 삼관(三關)에서 땅을 잃은 것은 계책이 아니라고 추가로 허물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요주가 말하였다.
"삼관은 본래 한(漢)의 땅이니 지금 다시 그들에게 돌려주었는데, 무엇을 잃었는가?"
그가 나라의 일을 걱정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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