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만의 동료 중 하나가 찾아와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수년 동안 알자스 문제에 대한 한 가지 해결책으로서 독일 제국 내의 연방정부로 인정하여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안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만일 이러한 제안이 알자스인들에 의해 채택된다면 프랑스는 실지회복이라는 명분을 잃게 될 것이다. 얼마전인 7월 16일 프랑스의 사회주의 의회는 이에 대한 지지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독일 군부는 변함없이 각 지방마다 수비대를 주둔시켜야 하며 그들의 정치적 권리는 "군사적 필요"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1년까지 단 한 번도 헌법이나 자치가 허용된 적이 없었다. 베트만의 동료는 지금 당장 알자스의 자치를 위한 즉각적이고, 공개적이며 공식적인 회담을 제의하라고 그를 독촉했다. 이것은 아무런 결과 없이 시간만 끌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것을 검토하는 동안만이라도 프랑스에게 공격을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도덕적 효과는 기대할 수 있을것이다.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영국의 참전을 배제 - P153
시킨 채 자신의 병력을 러시아로 돌릴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제안의 작성자는 익명으로 남아 있으며 출처도 의심스럽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기회가 있었으며 수상 본인이 그것을생각해 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를 잡으려면 대담해야 하는데, 큰 키와 어두운 눈 그리고 잘 다듬어진 황제 수염의 인상적인 외모(façade)와는 달리 베트만은 테어도어 루스벨트가 태프트를 일컬어 말한 대로, "매우 나약한 남자였다. 결국 독일정부는 러시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낸 같은 시간 프랑스에게도 중립을 지키도록 유도하는 제안 대신 최후통첩을 보냈다. - P154
그날 저녁 몰트케는 동진을 거부했고, 펠트만 중위의 부대는 룩셈부르크의 트루와비에르즈를 점령했고, 메시미는 전화로 10킬로미터 후퇴를 재확인했으며, 해군성에서는 해군장관이 야당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는데 이중에는 후에 상원의원이 되는 비버브룩과 버켄헤드도 있었다. 기다리는동안 긴장을 풀어 보려고 저녁 식사 후 그들은 브리지 게임을 했다. 게임도중에 전령이 붉은색 전보 상자를 가지고 왔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치수가 가장 큰 상자였다. 처칠은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상자를 열고그 안에 있는 한 장의 서류를 꺼내 그 위에 써 있는 한 줄의 문장을 읽었다. 그것은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 P185
독일은 이 통첩 서두에서 지베-나무르 통로를 따라 프랑스군이 진격할 것임을 알려주는 "믿을 만한 정보"를 입수하였으며, "벨기에를 지나독일을 공격하려는 프랑스의 의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벨기에 측은 나무르를 향한 프랑스군의 움직임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본 적이없었고, 실제로도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 비난은 그들에게 아무런 인상도주지 못했다.) 계속해서 통첩은 벨기에군이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은 "스스로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이 적대적인 공격에 대해 선수를 칠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만일 벨기에가 독일의 벨기에 영토 진입을 "자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한다면 독일은 이를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유감"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만일 반대로 벨기에가 "우호적인 중립을 유지한다면, 독일은 "평화가 이루어지는 즉시 그 영토에서 철수하고, 독일군대에 의한 어떠한 손해도 보상하며, "평화가 확인되면 왕국의 주권과 독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할 것이다." 원문에는 앞의 문장에 이어 "벨기에가 제기하는 어떠한 보상 요구도 프랑스의 비용으로 지불할 것임을 기꺼이 동의한다"고 적혀 있다. 마지막 순간에 벨로브는 이 뇌물부분을 삭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 P192
"여러분들은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카이저는 8월 첫째 주에 출정하는 군대에게 연설했다. 8월 9일 독일 왕실 사관은오페르스도르프 백작이 오후에 방문하여 이 일이 10주 이상 계속될 수는 없다고 말했고, 호흐베르그 백작은 8주로 예상했으며 이 사태가 끝나면 "우리는 영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했다. 서부전선으로 떠나는 독일군 장교는 스당 기념일(9월 2일)에 파리의카페 드 라 뻬(Café de la Paix)에서 아침을 먹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러시아군 장교들은 비슷한 시간에 베를린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6주 정도가 일반적인 견해였다. - P217
직관으로 그랬는지 또는 고도의 지적능력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군인인 세 사람만은 수개월이 아닌 수 년간 길게 뻗은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길고, 소모적인 투쟁"을 예언한 몰트케가 그 중 하나였다. 죠프르가 두 번째였는데 그는 1912년 장관들의 질문에 대해 만일프랑스가 전쟁에서 먼저 승리를 거두게 되면, 독일의 국가적인 저항이시작될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양쪽모두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일 것이며 그 결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각각 1911년과 1906년부터 자국의 총사령관이었던 죠프르나 몰트케, 그 누구도 계획을 세우면서 자신들이 예견한 형태의 전쟁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이자 자신의 전망대로 행동했던 유일한 인물은 키치너 경인 - P218
데, 그는 최초의 계획에는 참여하지 않았었다. 8월 4일 이집트로 향하는증기선에 승선하려는 순간 급하게 소환되어 국방장관에 임명된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어떤 수수께끼 같은 신통력에 의해 이 전쟁은 3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를 믿지 않는 다른 각료들에게 그는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3년은 각오해야 합니다. 독일 같은 나라는 사실상 결말이 난 후에도 완전히 궤멸되어야만굴복할 것입니다. 그 과정은 매우 오래 걸릴 것 같군요. 지금 살아 있는사람은 누구도 그것이 얼마나 걸릴 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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