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를 대체할 한국인 인력이 부재하거나 부실한 상황에서 신뢰할 만한 인력이 필요했던 하지는 윌리엄스의 조언에 따라 "신뢰할 수 있는" 일제 시기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제와 가족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국무 - P262

부는 한국 내 주거·안전·생활상의 이유를 들어 선교사들의 한국 귀환에소극적이었던 반면, 하지. 맥아더 · 전쟁부는 한국 상황에 경험이 있는 선교사들을 활용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선교사업을 계속 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었다. 전쟁부와 미군정은경험과 능력이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주한 선교사 및 가족들이 필요했고, 선교사들은 한국으로 들어갈 비자와 입국 허가가 필요했다. 선교사들은정책 결정에서 직접적인 힘이 없었지만 미군정 고위 장교들과 한국 지도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들에게는 전례 없는 기회와 권력이기다리고 있었다. - P263

윌리엄스는 하지의 명령에 따라 고문회의에 충원할 개신교 대표 2명을 찾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친일파가아닌 목사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는 윌리엄스가 개신교 대표를 찾지 못하자, 나머지 종교 대표들의 임명을 거부했다. 결국 종교계 대표 5명은 임명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12명의 고문이 임명되었지만, 여운형은 고문 취임을 거부했고, 북한에 있던 조만식도 취임할 수 없었다. 45그러나 나머지 10명의 대표 중 다수가 기독교 평신도였으므로 전체 고문11명 중 기독교인은 6명으로 그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 P274

미군 진주 이후 처음 10여일 동안 24군단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G-2 Periodic Report)에 등장하는 주요 정보 제공자는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서상일, 김용무, 설의식, 김도연, 김동성 등 한민당 지도부였다. 이들은 여운형·안재홍 등과 건준·인공에 대한 모략적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며, 미군이 이승만·임시정부와 동반 입성하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과 이들에 대한 절대 지지를 표명했다. 이후 역사가 전개된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한민당이 미군 진주 초기 이승만과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열광적으로 주장한 것은 정치공학적인 술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뜻하지 않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일본군이 전달한 왜곡된한국 상황에 관한 정보로 의심이 가득한 채 진주한 미군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그 덕분에 미군 수뇌부에 훨씬 더 가까이, 훨씬 자주 접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미군 수뇌부의 신임을 얻어,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 P292

하지가 인정할 수 있는 기성의 주권 정부, 기성의 권력은 조선총독부와 그 행정력이었을 뿐 인민공화국 같은 자생적 토착권력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의일본인 고관들을 잠정적으로 유지하거나 고문으로 활용할 수 없게 되자 미군정은 직접 통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공화국 같은 현지 토착권력의 활용은 미국 본국이나 주둔군 사령관 하지의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았다. 또한 하지와 그의 군대는 수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적 세계에 익숙했기 때문에 미군 병사들은 인민공화국을즉시 적이나 라이벌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인민공화국의 지도자였던여운형은 한 달 넘게 하지를 만날 수 없었다. 진주 직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부정되었던 인민공화국은 1945년 12월 12일 미군정에 의해 공식적으로 불법 단체가 되었다. - P303

국무부는 현지의 강력한 요청을 수용할 수밖에었는데, 개인적 차원에서라도 임시정부와 관련 인사들을 활용하는 정책은 미국이 특정 정치세력과 연계되어 있고 그들을 후원한다는 정치적 혐의를 벗기 어려웠다. 미 국무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는 임시정부를비롯한 모든 한국인은 임시정부의 관리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귀국하는 한국인은 이런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요구하는 것이었다. - P311

맥아더에게 전달된 3부 조정위원회의 훈령 176/8호(SWNCC176/8)는 임시정부 혹은 유사한 정치조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고 규정했다. 다만 필요할 경우 그 조직 성원을개인 자격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124 3부 조정위원회는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간판으로 활용할 경우 미국의 공식 대한정책인 연합국의 합의에 따른 신탁통치 계획이 무산될 가능성을 우려하며 임시정부 활용을 반대했지만, 이 훈령은 하지에게 임시정부 활용에 대한 내락으로 받아들여졌을 공산이 컸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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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0일 일제의 포츠담선언 수락 사실이 알려진 후 총독부는 종전 대책에 분망했다. 총독부는조선인 고위 관리, 친일파 등을 동원해 여운형과 접촉하며 치안유지회 등의 타협적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은 송진우 그룹과도협력을 모색했으나, 거절당했다. 8월 15일 일제 패망이 현실화되고, 소련군의 38선 이남 진주 가능성이라는 위기가 팽배하자, 여운형은 5개 조건을 제시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5개 조는 사실상 주요 행정권의 이양 혹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희망하거나 계획하지도 않았고, 평소라면 절대 동의하지도 - P83

않았을 여운형의 5개 조건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5개 조건은 여운형과 엔도 정무총감, 니시히로 경무국장의 논의·타협 과정의 산물이었는데, 총독부가 구상하고 있던 치안유지 협력책과 정치범·경제범 석방계획에 여운형이 적극 찬성하고 식량 사정 확인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하게 되자 실질적으로 주요 행정권을 이양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아가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조직이 합법적으로 간판을 걸고, 안재홍이 경성방송국라디오 방송을 하는 순간 전국에서 일본의 경찰치안과 행정력은 마비되었고, 한국인 관리 및 경찰은 잠적했다. 그 공간을 건국준비위원회와 치안대 · 보안대가 장악했다. 실질적인 권력의 이양이었다. - P84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인이 자유롭게 해방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해방의 공간이 열리자 폭발된 에너지는 총독부 통치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향해 달려나갔다. 총독부의 예상과 달리 일본인, 경찰, 관리에대한 공격은 미미했다. 대신 새로운 국가 건설의 에너지가 건국준비위원회로 결집했다. 무너진 둑처럼 한국인들의 환희와 열정이 쏟아져 내렸다.
치안유지회, 치안유지의 협력 정도로 생각했던 여운형 측의 신속한 대응은 총독부가 감당할 수 없는 한국인들의 에너지와 결합해 해방 한국의 시공간을 장악했다. - P95

8월 18일경부터 8월 25일까지 전개된 안재홍-김병로·백관수 중심의 교섭은 여운형이 테러를 당해 부재 중인 상황에서급격하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한민당 계열과 총독부가 희망하는 유지자대회 개최 방식으로 추진하다가,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건준간부진의 강력한 반대로 유지자대회는 무산되었다. 다음으로 유지자대회대신 건준 확대위원회를 개최하는 방식으로 일을 추진했는데, 여운형 위원장이 나타나 이들에게 의견 제출권만 주고 결의권을 주지 말라고 저지했다. 이 때문에 확대위원회를 소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민당과 이만규의 기록을 종합해볼 때 권태석-김병로 등의 논의를거쳐 확대위원회 명단은 8월 25일경에 결정되었지만, 여운형의 반대로회의가 연기되었다. 건준 내부에서는 당연히 한민당 계열의 주도와 결정 - P117

으로 확대위원회를 개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추가 인원을 더하는 방안이논의되었다. 안재홍의 주도로 한민당 계열과 타협을 한 이후 건준의 내부갈등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결국 8월 31일 여운형이 위원장 사표를 던지고 난 후에야 9월 1일 확대위원회 명단이 공개되었고, 9월 2일 건준 확대위원회 소집이 공표되었다. - P118

1945년 말에 이르러 인공은 최초의 목표였던 민족통일전선체로서 임시혁명정권이라는 스스로의 규정과는 다른 지점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공의 현실적 위치가 지방의 대중에게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P178

1938년 이후 열렬한 친일활동을 펼쳤던 이묘묵은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하자,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여운형을 친일파·공산주의자로 무고하는 한편 이를 발판으로 하지의 통역이자 문고리 권력으로 입신했고, 나아가 사상검사를 이용해 자신의 친일 기록을 소각하는 데 성공했다." - P224

베닝호프와 윌리엄스는 감리교 선교사의 아들이라는 공통점, 미국 선교사들이 수십년동안 한국에 기여한 업적과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를 미군정하에서 더욱 확산·정착시켜야 한다는 믿음,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 놓였던 한국인들의 자치 능력 및 정치 역량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불신과 저평가, 그리고 미군정 내에서 유례가 없는 그들의 결정적이고 중요한 위치 등을 종합한다면,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자신들이 정해야 한다는 일종의 복음주의적 사명과 의무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들은 감리교 선교사의 아들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확고한 반 - P252

소·반공의식을 한 축으로 하고, 기독교에 기초한 미국식 제도에 대한 확신을 다른 축으로 한 이들의 신념체계는 미군정의 수뇌부가 이견을 가질수 없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미국적 사유체계였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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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국가와 대형 자선 재단이 국제개발 고유의 언어와 스타일, 문법을 통제하면서 여전히 담론 권력을 행사하고, 공여국으로 거듭난 후발 주자들이 근대의 성장·개발 중심성을 답습하고, 원조가 엘리트 권력의 지지 기반이 되는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지만(Kumar and Brooks 2021: 324), 글로벌 빈곤레짐의 참여자들이 특정 국가, 특정 이념에 따라 구획되지 않고 다변화되면서 한편으론 새로운 마찰과 틈새가 생기기도 했다. - P210

글로벌 빈곤 레짐은 일관된 구조를 갖는다기보다지역적·상황적 실천과 개입에 열려 있다. 한국이 이 레짐과 접속 - P211

하는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나라의 위상을 널리 알리겠다는 국가주의적 사고가 팽배하다는점, 그리고 정부·대학·기업이 긴밀한 공조하에 (특히 대학생) 청년을 해외 자원봉사의 주요 주체로 구성해내면서 실업의 ‘위기‘를로벌 리더 창출이라는 ‘호기‘로 바꿔치기했다는 점이다. 저성장시대에도 경쟁력만 부르짖는 환경에서 실존의 결핍을 호소해온 청년들이 열정 노동과 창의 노동을 불태우며 글로벌 빈곤 퇴치를 위해싸우는 가장 역설적인 전사가 된 것이다. - P212

양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빈곤 문화의 신자유주의적 생산에 주목하는데, 이는 "위기가 반복되는 신자유주의 흐름에서 하향 이동이나 삶의 격동을 경험하는 시타의 한국인 이주자들이 자신의 ‘정상성‘을 증명하고, 스스로를 ‘찌질이‘ ‘루저‘와 구분 짓기 위해 자의적인 빈곤 문화의 표식arbitrary cultural markers of poverty을 동원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일컫는다.(Cho 2018: 521) 빈곤-복지 연합, 그리고 이 구도에서 파생된 빈곤 문화나 의존성의 유령은 일국의 사회보장 정책 지형을 넘어, 한국과 중국 정부의 사회적 보호 외곽에서 살아가는 이주자들 사이 - P294

에서 적극적으로 소환됐다. 초국적 연결이 급증한 시대, 나락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빈곤 감각을 증폭시키는 시대에 빈곤·복지·노동 담론이 서로 맞물리면서 ‘빈민‘을 조립했던 문화 정치가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이주자, 난민 등) 정치적·경제적으로 취약한지위에 놓인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을 겨냥하는 낙인, 열악한 사람들이 서로를 구별 짓는 표식을 전방위적으로 확산해내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은 특정 개인의 상태가 아닌 관점에 불과하지만(Goffman 1963: 137), 빈곤 전염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관점을 인격화하는 데 몰입한다. - P295

프레카리아트는 Proletariat (프롤레타리아트)에 불안정한 위태로운‘이라는 뜻의 형용사 precarious가 결합된 단어다. 직장이 아닌 취업 ‘준비‘에 기약 없이 공을 들이는 청년도, 자국에서 잉여 취급을 받다 차이나 드림에 베팅한 중국의 한국인 이주자도 프레카리아트다. 이 단어는 신자유주의적 모델에 기반한 노동시장 유연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조합과 사회보장 시스템의 보호 바깥에서 떠돌게 된 불안정 노동자들을 주로 지칭하지만, 여성, 청년, 노인, 소수 종족, 장애인, 범죄자, 이주민 복지 수급자 등 삶의 불안과 노동의 불안을 동시에 떠안은 다양한 집단도 포괄한다. 과거의 안정된노동계급과 달리 "사회적 기억"이 부재하고, 소외, 아노미, 불안, 분노 등에 휩싸이기 쉽다는 점에서 가이 스탠딩(2014 58-59)은 이들을 형성 중인) "새로운 위험한 계급으로 명명했다. - P310

불평등이 만인의 언어가 되고 겹겹의 불안이 다수의 피해자‘ 선언을 부추기는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생명은 다른 생명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 폭우가 도시를 삼켰을 때 어떤 운전자는 물에 잠긴 승용차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만, 어떤 인간은 반지하에서 속수무책으로 주검이 되고 만다. 서로 마주치고, 연결되고, 다른 불안을 들여다보려는 수고를 포기한 채 각자가 방공호를 파느라 분주한 시대에 인류학의 자리는 어디일까? - P353

발전의 꿈이 아무리 집요하고 중독성 강하다 한들 누구도 삶의 취약성과 유한성을 피해갈 수 없다면,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취약성과 유한성을 개별 인간의 불행으로 남겨두기보다 지구생활자의 공통 인식과 감각으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제도, 교육, 운 - P386

동일 것이다. 기후변화와 팬데믹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위기를 논하는 공론장은 전례 없이 많아졌지만, 각자 알아서 방공호를 구축하던 사람들이 더 거대한 위기를 감지한다고 해서 곧바로 연결되는것은 아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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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수급이 빈곤네트워크의 의무통과점이 되었다고 내가 생각하는 까닭은, 정부 정책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서사,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모두 수급(기초법)을 경유해 그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공공부조의 수급자로 구획되면서 가난은 특정한 양식과 문법 안에 고이고 말았다. 빈곤을 우리 시대의 정치적 핵심 의제로 삼는 일은 그렇게 점차 요원해졌다. 빈곤이 ‘우리의 삶‘에서 ‘저들의 문제‘로고립되면서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빈곤을 끝 - P27

장내자는 결의를 압도해버렸다. - P28

의존성 논의가 복지 영역에서 특히 만연한 것은 사회복지야말로 후술할 사회적 빈곤‘ 의제와 조응하여 등장한 지식과 기술의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복지학 발전의 주요 참조국인 미국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전해온 사회공학과 개척 서 - P66

사를 중심에 둔 선별적 역사 서술이 결합하면서 자율적 개인과 독립을 이상으로 삼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자립‘을 숭배하고 ‘복지 의존welfare dependency‘을 경멸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시선을 부과하는 담론 권력으로자리 잡고, 이들의 사회 안전망을 최소화하는 정치 전략으로 작동해왔다.(O‘Connor 2001; Fineman 2004)이러한 흐름에 맞서, 진보적 사회복지학자들은 의존의 보편성을환기하며 복지 의존에 씌우는 혐의를 거둘 것을 호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지 의존을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증진할 수 있는 기초"
로 재정의하는 움직임(김병인 2017 88)이나 돌봄 윤리의 선언만으로 의존이 문제가 된 현실에 균열을 내기란 불가능하다. 복지가 직업화·제도화·산업화를 거치며 ‘성장한 역사란 뒤집어보자면 사회복지 체제 구축에 관여해온 종사자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 ‘의존해온 역사다. - P67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금융의 일상화로 투자가 주업이 된 사람들이 허다하고, 기술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임금노동의 비중은 계속 줄고 있지만, 빈곤 통치에서 임금노동이 갖는 위상은 여전히 견고하다. 노동이라는 기준이야말로 근대 빈곤 통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강제노역에서 근로연계복지에 이르기까지, 빈곤 통치의 역사는 인간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과 제도를 구축해온 과정이다. 여기엔 멀쩡한 노동자라면 수급을 신청할 이유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빈곤 통치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운동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계급은 물적 관계이지만 ‘노동자‘는 수많은 정체성 가운데 하나로 탈구된 지 오래이다 보니(신현우2022: 71) 이상적인 노동자의 ‘자격‘에 대한 암묵지를 발견하기도 어렵지 않다. - P105

인류학자들은 집home 을 건조물이나 자산에 국한하지 않고 일종의 희망이자 미래로, 세계에서 자기 자리place를 확보하려는 지속적노력과 꿈의 표현으로 봤다. 사람들은 집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물질성, 감정, 사회적 관계, 거주 실천의 교차 속에서 부단히 만들고, 이 실천 속에서 소속, 안전, 가치의 감각을 조율한다.(Samananiand Lenhard 2019 7) 이는 홈리스, 이주자, 난민에게 분명 더 위태롭고 고된 노동이다. 이 장에서 나는 가난한정으로서의 집‘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달리에서끼쳤는가를 살핀다. 집이 수많은 행위자의 실천이 매개된 결과라면, 과정으로서의 집을 기술하는 작업이란 이들의 실천이 더 너른공간과 더 긴 시간대에 걸쳐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었는가를 살피는 일이다.(Brun and Fábos 2015)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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