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0일 일제의 포츠담선언 수락 사실이 알려진 후 총독부는 종전 대책에 분망했다. 총독부는조선인 고위 관리, 친일파 등을 동원해 여운형과 접촉하며 치안유지회 등의 타협적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은 송진우 그룹과도협력을 모색했으나, 거절당했다. 8월 15일 일제 패망이 현실화되고, 소련군의 38선 이남 진주 가능성이라는 위기가 팽배하자, 여운형은 5개 조건을 제시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5개 조는 사실상 주요 행정권의 이양 혹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희망하거나 계획하지도 않았고, 평소라면 절대 동의하지도 - P83
않았을 여운형의 5개 조건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5개 조건은 여운형과 엔도 정무총감, 니시히로 경무국장의 논의·타협 과정의 산물이었는데, 총독부가 구상하고 있던 치안유지 협력책과 정치범·경제범 석방계획에 여운형이 적극 찬성하고 식량 사정 확인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하게 되자 실질적으로 주요 행정권을 이양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아가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조직이 합법적으로 간판을 걸고, 안재홍이 경성방송국라디오 방송을 하는 순간 전국에서 일본의 경찰치안과 행정력은 마비되었고, 한국인 관리 및 경찰은 잠적했다. 그 공간을 건국준비위원회와 치안대 · 보안대가 장악했다. 실질적인 권력의 이양이었다. - P84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인이 자유롭게 해방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해방의 공간이 열리자 폭발된 에너지는 총독부 통치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향해 달려나갔다. 총독부의 예상과 달리 일본인, 경찰, 관리에대한 공격은 미미했다. 대신 새로운 국가 건설의 에너지가 건국준비위원회로 결집했다. 무너진 둑처럼 한국인들의 환희와 열정이 쏟아져 내렸다. 치안유지회, 치안유지의 협력 정도로 생각했던 여운형 측의 신속한 대응은 총독부가 감당할 수 없는 한국인들의 에너지와 결합해 해방 한국의 시공간을 장악했다. - P95
8월 18일경부터 8월 25일까지 전개된 안재홍-김병로·백관수 중심의 교섭은 여운형이 테러를 당해 부재 중인 상황에서급격하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한민당 계열과 총독부가 희망하는 유지자대회 개최 방식으로 추진하다가,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건준간부진의 강력한 반대로 유지자대회는 무산되었다. 다음으로 유지자대회대신 건준 확대위원회를 개최하는 방식으로 일을 추진했는데, 여운형 위원장이 나타나 이들에게 의견 제출권만 주고 결의권을 주지 말라고 저지했다. 이 때문에 확대위원회를 소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민당과 이만규의 기록을 종합해볼 때 권태석-김병로 등의 논의를거쳐 확대위원회 명단은 8월 25일경에 결정되었지만, 여운형의 반대로회의가 연기되었다. 건준 내부에서는 당연히 한민당 계열의 주도와 결정 - P117
으로 확대위원회를 개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추가 인원을 더하는 방안이논의되었다. 안재홍의 주도로 한민당 계열과 타협을 한 이후 건준의 내부갈등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결국 8월 31일 여운형이 위원장 사표를 던지고 난 후에야 9월 1일 확대위원회 명단이 공개되었고, 9월 2일 건준 확대위원회 소집이 공표되었다. - P118
1945년 말에 이르러 인공은 최초의 목표였던 민족통일전선체로서 임시혁명정권이라는 스스로의 규정과는 다른 지점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공의 현실적 위치가 지방의 대중에게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P178
1938년 이후 열렬한 친일활동을 펼쳤던 이묘묵은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하자,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여운형을 친일파·공산주의자로 무고하는 한편 이를 발판으로 하지의 통역이자 문고리 권력으로 입신했고, 나아가 사상검사를 이용해 자신의 친일 기록을 소각하는 데 성공했다." - P224
베닝호프와 윌리엄스는 감리교 선교사의 아들이라는 공통점, 미국 선교사들이 수십년동안 한국에 기여한 업적과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를 미군정하에서 더욱 확산·정착시켜야 한다는 믿음,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 놓였던 한국인들의 자치 능력 및 정치 역량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불신과 저평가, 그리고 미군정 내에서 유례가 없는 그들의 결정적이고 중요한 위치 등을 종합한다면,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자신들이 정해야 한다는 일종의 복음주의적 사명과 의무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들은 감리교 선교사의 아들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확고한 반 - P252
소·반공의식을 한 축으로 하고, 기독교에 기초한 미국식 제도에 대한 확신을 다른 축으로 한 이들의 신념체계는 미군정의 수뇌부가 이견을 가질수 없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미국적 사유체계였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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