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월 9일의 참사를 일컫는 ‘피의 일요일‘의 대학살을 규탄하는파업과 시위의 물결이 일었다. 그 한 달 동안만 하더라도 전국에서 40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연장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노동자 시위였다. 그러나 파업은 제대로 조직되지 않았다. 파업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이 작성됐다. 게다가 사회주의 정당들은 아직도 대단히 허약했고, 유럽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정당 지도자들은 경찰로부터 지나치게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어서 선도적 역할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노동자들은 자력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 없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을 차르 정부 권위에 대한 혁명적 위기로 전환시킨것은 자유주의적인 중간계급과 귀족의 반응이었다. 1903년 이후 자유주의 성향의 전문직 종사자들과 젬스트의 활동가들은 국민의회에 대한 - P45

요구를 포함해 정치 개혁에 찬성하는 운동을 벌였다. - P46

레닌이 보기에, 1905년은 세 가지 사안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첫째,
‘부르주아의 파탄 및 전제정치 권력에 대한 정치적 저항세력으로서의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들의 파탄. 둘째, 농민층의 어마어마한 혁명적 잠재력. 셋째, 제국의 기반을 치명적으로 허물 수 있는 국경지역 내 민족주의세력의 잠재력.
그리고 그런 결론에 이르자 레닌은 근본적인 볼셰비키의 사상(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비교할 때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을 전개했다. 즉 노동계급의 ‘전위대‘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농민들 및 여러 민족들과 연합체를구성하는 경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우선적으로 거치지 않고도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견해였다. - P60

트로츠키는 러시아에 세워질 노동자들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들의 조직적인 저항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생각했다. 러시아에 들어설 노동자 국가의 존립은 그것의 국제적인 발전에 좌우될 운명이었다. - P61

스톨리핀은 구 엘리트 정치인의 전통적인 특권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을 멀리 떠나가게 했고, 두마가그의 앞을 가로막자 두마를 억압함으로써 자유주의자들을 멀어지게 했다. 이런 정치적 단호함은 그의 관료로서의 좁은 안목과 차르에 대한 의존에서 비롯됐다. 스톨리핀은 행정적 지시를 통해 개혁을 이룰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고,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층을 동원하기 위해 관료사회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만약 개혁의 수혜자인 농민들을 조직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를 자신의 고유한 정당을 세우는 일에 실패했다. 스톨리핀 개인은 존재했지만, 스톨리핀 추종자들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스톨리핀이 숨을 거두자, 그의 개혁 또한 그를 따라서 소멸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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