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 -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 넘어서기 와이비 아카이브 2
지수걸 지음 / 역사비평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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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점거투쟁은 갑오변란과 청일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크게 달라진 정세와 조건 가운데서 전개된 assembly/occupy(이하 A/O 투쟁으로 줄여 씀)이었다. 이 책의 표제로 ‘모이고 모으자! 점거하고 담판하자!‘라는 슬로건을 특기한 것은 공주 점거투쟁 시기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한 공동투쟁의 목표와 방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호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떤 과거(의 이야기)이든 후대의 독자는 기존에 누군가가 정리해놓은 역사를 만나는 경험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 정리는 여러 번의 논란과 재고를 거쳐 가장 최근에 정설로 굳어진 것이다. 굳어진 정설을 깨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감히 그런 도전을 감행했다.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동학혁명 등등 다양한 용어가 있지만 이것이 교과서에도 일반적으로 쓰는 것이라 이걸 택하겠다)은 관련 자료와 데이터가 방대히 축적된 만큼 이미 충분히 많은 저서들이 나와 있다.

이 책은 동학군의 2차 봉기로 초점을 맞추었다. 장소는 호남이 아닌 호서, 충청 지역의 공주다. 공주라는 지역 이름만 보면 우금치 전투를 말하려 하는 것이구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갑오년 항쟁에서 공주를 중심으로 한 호서 지역의 역할이 간과되었기에 이를 복원해야 한다 말한다. 기존에는 지나치게 전봉준 중심의 호남, 남접 집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동학농민운동의 전개는 기존의 농민 전투(전쟁)이 아니라 임술년 이래 항쟁의 역사에서 어셈블리(도회)라는 말로 상징될 수 있는 비폭력적인 연대와 소통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모두 다 기존의 관점을 뛰어넘는 새로운 내용들이다.

기존 동학농민운동의 서술은 보통 호남 배경으로, 전봉준 중심으로 서술된 측면이 많다. ‘전라도 고부 군수의 학정에 못이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봉기를 일으켰고 놀란 정부가 부랴부랴 전주성에서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화약을 맺었다. 그러나 새로 파견된 안핵사의 농간에 다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했고 톈진조약의 발효로(구실이겠지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이에 농민들은 반봉건에 반외세 구호를 걸며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군 구식 무기에 밀린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며 대패했다.‘ 이렇게 말이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저자가 말하려고 한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학군의 2차 봉기는 남접 집단의 8월 27일 남원 도회나 전봉준의 9월 10일 삼례 재기포령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임기준과 이유상 등 공주와 충주 등 호서 지역의 척사유생들이 대원군 밀지나 고종 명의의 「조가밀지」를 받고 동학군과 함께 항일의려를 결성한 때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둘째, 기존 연구는 남북접 지도부 사이의 연대가 먼저 이루어진 후 최시형의 9월 18일 기포령이 나왔으며, 이에 의해 북접이 남접 전봉준과 협력하여 연합군을 결성했다고 본다. 공주를 점거하는 투쟁에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한 시기는 9월 그믐경이고, 그들이 연대한 이유는 일본군과 관군의 탄압 및 동학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셋째, 기존 연구는 11월 8일~11일의 우금치싸움을 포함한 일련의 투쟁을 공주 점거투쟁의 절정으로 이해하였으나 저자는 우금치싸움이 아닌 10월 23일∼25일 공주를 둘러싸고 금강 남북 양안에서 전개된 효포 싸움이 더욱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넷째, 남북접 동학군의 사망자 통계 사상자의 숫자가 과장되었으며 기존 연구는 공주 점거투쟁에서 동학군이 대규모로 참여하고 대규모 살상을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동학군의 대규모 사망은 그들이 정식으로 해산한 11월 중순 이후 집단 학살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다섯째, 저자는 동학 연합군의 공주 점거투쟁은 기존 연구에서 말하는 “병력을 몰아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중간 단계가 아니라, 호서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 공주를 점거한 상태에서 애국적 사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와 무장 시위(도회와 의거)를 통해 중앙군·감영군, 향리·군교·상인들의 호응을 유도하여 조선 왕조나 일본 정부와 정치 담판을 하려 한 최종 단계라고 했다.
여섯째, 공주 점거투쟁의 성격을 논하면서 저자는 이 투쟁의 주역이 농민군이 아니라 동학군이며 혁명군이 아니라 (무장)시위대/의려이므로, 이들을 전사라고 부르거나 이 사건을 내전이나 혁명, 심지어 전투로 부르는 것도 역사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느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기존은 동학동민군에 삼례 봉기를 주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주, 이인 등지의 충청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의 규모가 훨씬 컸으며 중요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렇듯 호남 중심의 배경 중심에서 호서 지역 배경으로 사건의 흐름을 재구성하려한 점이 엿보인다. 또 기존에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전제를 뒤엎고 공주 점거를 위한 투쟁이었음을 강조하고 공주점거 투쟁 시기 지방수령이나 척사 유생들이 동학군과 연대하지 않은 것은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나 동학군의 무기 열세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연대하고 협동하는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 것 등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고 새로운 의견 제시이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반침략 반봉건 민중 항쟁으로 일컬어지는 동학농민운동을 어셈블리(도회 또는 의거)라고만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의거와 전투를 그렇게 무자르듯 구획지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서다. 또 어셈블리라는 용어도 좀 난해한 측면이 있다. 저자는 굳이 어셈블리라는 용어를 쓰면서 기존에 도회라는 단어가 사어가 됐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그렇다고 한국에서 어셈블리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선뜻 와닿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말 호서 지역의 유생들이 고종 명의의 밀지를 받았는가. 저자도 이 부분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다 그런 설이 있다는 것만으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전봉준이 우금치 싸움을 결행(및 실패)하면서 정말 교단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했을까라는 것도 의문이었다. 전봉준은 호남 남접 기반의 대장군이었고 호남 남접은 당시 자료를 마땅히 기록하지 않았다(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해당 자료는 북접 동학교단에서 생산했기 때문에 신빙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를 비롯하여 저자가 전개한 논지가 추론에 기대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아서 아쉬웠다.

이렇듯 장점도 있지만 한계도 엿보이는 책이다. 근래 들어 읽은 책 중 가장 도발적인 책이었다. 실제로 이 책이 나온 뒤 여러 건의 서평이 올라와 논쟁이 되었다고 보았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역사는 1980년 이후 민중 중심의 역사 담론이 유행하고 2004년‘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봉건제도 개혁과 국권 수호에 기여한 인물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참여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며 민족정기를 선양하기 위해 위한 법률)이 제정되고 시행된 이후 민족적 측면이 강조되고 혁명화된 부분이 있어 보인다. 이 책이 시간이 흘러 그냥 묻히게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시선의 물꼬를 트는 책이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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