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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과 그의 시대 3 - 열정과 냉정 사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1922~1945) ㅣ 김규식과 그의 시대 3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평점 :
드디어 마지막 편까지 왔다. 3권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의 가장 긴 시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분량이 상당한데 그럼에도 기존에 알지 못했던 사실과 흥미로운 인물들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나 이 시기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 독립운동사이자 한국 근대사의 압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선행 자료와 없거나 부족한 자료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든 행위, 자료들(문자, 구술 포함)을 엮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에 따른 결과이며 이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낸 저자의 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당연히 뒤에 애써주신 분들의 노력도 포함되겠다).
김규식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로서 또 한 번 부각이 되는 시기는 3권의 초반에 등장하는 1921~1923년까지의 활동들이다. 앞서 살펴보았으나 김규식은 이승만과의 갈등 끝에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다.
김규식은 1921년부터 1922년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했고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극동민족대회에서 그는 연설을 통해 “러시아 혁명과 마찬가지로 모든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불태우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한국 문제에 대해서 3건의 보고서가 제출되었는데 김규식은 1921년까지의 한국의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내놓았다. 극동민족대회의 결과로 중국은 국공합작이 도출되었으며 일본은 공산당이 결성되었고 한국도 민족통일전선 조직 및 정당조직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레닌이 제공한 60만 루블은 한인사회당과 상해 임정을 대표한 밀사 한형권과 박진순이 취득했다. 자금의 성격은 조선의 독립운동 대표단에게 전달하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이르쿠츠크파, 국민의회파가 극동민족대회를 주도하는 입장에서 전달된 레닌 자금의 처분을 둘러싸고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코민테른은 자금 중단을 하고 한국 대표단 외교교섭단 단장이던 김규식,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지도자들을 고려공산당 활동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내린다.
김규식은 한동안 침잠해 있다가 한중국제연대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중한호조사는 한중 인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사 16인 중 한국 측 위원 중 김규식은 부이사장, 여운형은 교제과 이사에 선임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간담회, 강연회 등 집회를 통한 한국 참상 알리기와 한국 독립 지원 활동을 요청하는 활동에 집중했다. 중한어학강습소를 운영하기도 했으며 참여 인원 중 아내인 김순애와 모택동도 있었다고 한다.
국민대표회의는 사분오열된 임시정부의 지도부를 개조하거나 제도를 변경 또는 새로운 대안을 창출하자는 공감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개조파, 창조파,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참여로 시작했던 회의는 마지막에 임시정부 창조파 인원만 잔류하면서 파국을 맞았다. 창조파는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국민위원회를 설립했다. 김규식은 국민대표대회 대표가 아님에도 5개의 행정부서 중 외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코민테른은 국민위원회 조직 형태에 대한 협의를 위해 김규식과 이청천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불렀다. 김규식은 이르쿠츠크파 후보 당원의 자격이었으며 이청천은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대 대표로서의 자격이었다. 국민위원회는 코민테른에 한국 독립운동 중심기관으로서 받아들여지기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귀결은 한국독립당이라는 정당이었다. 국민위원회는 노동자 농민에 기초한 독립 운동을 표방했으며 무장력과 국제연대를 강령으로 선택했다. 대표로 선출된 위원들이 총회 참석에 늦어져 연기되면서 1924년에야 열릴 수 있었으나 레닌이 사망하고 독일혁명도 실패하자 소비에트의 흐름이 내부 안정화에 집중하는 흐름이 생겼다. 국민위원회는 이렇게 씁쓸한 결말을 맞았다.
국민대표회의 후 김규식은 상해 프랑스조계 내 한인 유학생을 위한 중등 예비학교인 남화학원을 운영했고 상해 북단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일했다. 독립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1927년에는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유동열, 김영호 등과 함께 국민당(군벌인 풍옥상의 부대) 북벌에도 참여하여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8년에는 천진으로 거처를 옮긴 뒤 1929년부터는 북양대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처럼 독립운동을 하지 않을때도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생활 유지를 할 수 있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한국 독립운동의 흐름은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 세력과 김원봉 중심의 민족혁명당 세력 위주였는데 김규식은 이 중 후자쪽이었다. 그는 중국 측 요청으로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한중연대 조직 흐름에 참여했다. 이는 한국 5개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국 측의 민중자위동맹회가 합쳐져 만들어진 중한민중대동맹이었다. 김규식은 중한민중대동맹에서 선전, 모금 활동을 위해 미주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미국은 대공황 여파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재미한인 대부분이 실직과 궁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한인 사회에는 독립 진영 내분으로 인한 후유증이 여전하여 독립운동 열기가 침체되어 있었다. 김규식은 미 서부와 동부를 돌며 중한동맹지부 결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동부 지역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뉴욕지부를 만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와이에서는 이용직, 한길수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용직, 한길수가 미일개전과 한국의 반일 움직임을 미 정보 당국에 선전하고 있을 때 김규식은 미국 전역을 돌고 있었다. 짧은 하와이 방문 기간 동안 김규식은 미 육군 정보당국과 인터뷰(1933.7)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을 중한민중동맹의 하와이 미주 대표로 인정하는 신임장을 주었다. 두 사람은 이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김규식과 갈등을 빚었다.
그는 193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에 복귀했다. 임시정부와 이승만은 통일된 독립 운동의 흐름을 위해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경제적, 외교적 상황이 계속 나아지지 않자 김규식은 1935년 직을 사임하고 나와 사천대학에서 영문학 교수 생활을 시작한다. 사천대학에는 1942년까지 있었으니 제법 오래 있었던 셈이다. 이때 중국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지냈던 시간이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중국이 국민당과 공산당을 합작 선언을 한 뒤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경제 후원과 군사 지원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는 광복전선과 민족전선의 대립을 만들며 독립운동을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최창익을 비롯한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가 화북 지대로 이동하면서 중경에 남아 있던 김원봉 조선의용대 세력이 힘을 잃자 중국 국민당은 한국광복군에 힘을 실어주었다(이는 해방 후 국내파 정계 세력에 힘의 균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위기에 몰린 김원봉은 한길수, 재미한인사회와의 연계를 이용하고자 했다. 한길수는 김규식 및 중한민중동맹 관계가 이미 단절되었음에도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와 공식관계를 맺었다. 한길수는 중국 내 한인좌파운동 세력으로 미주를 대표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김원봉은 한길수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독당과 임정 주류 세력에 대한 비난을 하는 동시에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 세력을 과장하고(이미 조선의용대 주력군이 화북 지대로 이동했음에도) 화북조선청년연합회 및 동북항일연합군 등과의 연대를 강조했다(이 서신 내용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라 정말 놀라웠다). 이렇게 김원봉은 한길수를 활용하려 했고 한길수는 김원봉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늘리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한반도 신탁통치론은 1945년 동아일보 오보를 통해 보도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갑작스런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이해하게 되었다. 1943년 카이로 선언 이전 이미 1942년 미 포춘지에 중경의 신탁통치 반대 여론 움직임이 기사로 실렸고 1943년 4월 시카고선의 워싱턴회의의 결과 보고서가 있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1943년 중반 이후가 되면 임시정부도 사태를 관망하지 않고 신탁통치에 반대입장을 표명하게 된다. 카이로선언의 한국 조항은 미국의 대중적인 대한정책의 기조를 반영한 것으로서 강대국 간의 합의에 의한 공동 추구 표명 성격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와중에도 중국 내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 간에는 암살단 사건이 벌어지고 공금 횡령으로 잡음이 많았다. 이는 중국 정부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지원이 통일되지 않은 탓도 컸다.
중경과 미주는 연계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때도 이승만은 갈등의 축이었다. 재미한족연합회와 주미위원부, 임정의 상호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이승만은 재미한족연합회는 민회에 불과하다며 자신의 명령과 결정에 따라야 한다 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재미한족연합회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개인적으로 김구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참 여러 모로 아쉬운 대목이다. 이때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해방 후 이승만의 국내 지도자적 위치와 입장은 더 제한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1945년 임시정부는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김규식은 부주석의 자격으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가를 시도하며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군사적으로는 광복군-OSS 작전이 감행되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 시도도 이어졌다.
3권의 내용은 여기까지다. 원래 해방 후 내용을 담은 4권이 있었으나 <1945년 해방직후사> 단행본으로 기출간된 바 있다. 그 책을 읽으며 해방 후 정국을 정리해야 비로소 이 시리즈가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미 읽었으나 다시 읽으면 또 새로운 느낌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김규식이 해방 전 집필 중이었다는 영시집 <양자유경>은 1992년 출간되었으나 품절되어 구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해방 전 중국 내 독립운동 세력의 활동은 이미 나온 자료들을 통해서 알 수는 있으나 각 진영에 따른 입장 차이에 따라 기술이 제각각이라 진실을 파악하기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더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다행이다.
이처럼 8월 한 달은 <김규식과 그의 시대>를 읽으며 김규식의 개인 일대기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훓으며 보냈다. 찌는 여름임에도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며 보냈는데 저자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