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읽는다고 덤볐을 때 무모하리만치 겁이 없었다는 것을 이번에 재독하면서 깨달았다. 그때는 급하게 삼켜서(너무 짧은 기간에 읽으려고 했음) 그저 특정 부분에 꽂혔을 뿐 전체적인 이해에 다가가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작년 말 함께 읽는 책으로 선정되어 3달 간에 걸쳐 이 책을 재독할 수 있었던 점은 그런 의미에서 참 감사한 일이다.


이 책은 서설에 핵심이 집약되어 있다. 1~3부에 걸친 내용은 관련 예시로서의 나열로 보면 될 것 같다. 오리엔탈리즘의 전반기는 유럽(주로 영국과 프랑스), 후반기는 미국을 중심으로(제국주의의 패권의 이동에 따른) 서양이 바라본 동양에 대한 사고와 관념적 체계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동양은 중동, 아랍과 이슬람의 세계를 중심으로 다루어져서 이 세계에 대한 개념과 지식에 소홀한 나는 그 예시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고, 잘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지루하게 다가왔다. 한 번 읽어서 이해가 안 되어서 재독하면서도 한 챕터를 반복해서 읽은 경우도 있었다(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해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18세기 중엽 이후 유럽에는 동양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증대되었다. 유럽은 동양에 우위를 선점하며 군림했다. 동양에 관한 지식은 서양에 의한 지식과 힘을 배경으로 동양과 동양인, 동양세계를 날조했다. 담론은 상상의 지리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의 담론 속에는 동양을 말하고 쓰는 모든 것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동양을 이질적인 것으로 성격짓고 연극무대 속 삐에로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때의 동양은 유럽을 위한, 유럽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일 따름이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점령을 시도했다. 그는 이집트를 오리엔탈리즘의 무대로 포섭하기 위해 <이집트지>를 제작함으로써 기존의 이집트사나 동양사를 대체했다. 비록 이집트 점령은 군사적으로 실패했으나 동양을 유럽에 접근시키고 완전히 흡수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에르네스트 르낭의 저작,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수에즈 운하 건설, 영국의 이집트 점령).


19세기 초 문헌학이 도입되고 난 후 오리엔탈리즘은 비교 연구 분야로서 변모하고 동양은 서양에 지적으로 종속되었다. 사적인 오리엔탈리즘(동양 체제, 개인적 증언에 의존)은 전문적 연구로서의 오리엔탈리즘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로서 순례지는 서양인의 시선에서 살아 있는 그림으로의 동양으로서 자리하며 재구성되고 재조명되었다. 오리엔탈리스트는 인간을 집합체로 파악하고(유형화) 일반 추상 개념으로 인식해했으며 개인에 대한 관심에는 무지했다. 지식의 형태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앞선 학자로부터의 기술을 기반으로 이론을 답습함으로써 동양의 현실은 배제되는 오류를 낳았다. 따라서 동양은 실재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20세기 오리엔탈리즘은 기반 연구 조직의 확대, 지리학의 발전, 출판업의 발달 등에 의한 전파 능력의 증대의 영향을 받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오리엔탈리스트는 동양에 대한 서양 열강의 특별 대리인이나 대표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인종, 문명, 민족은 경계선에 따라 구성되었고 동양은 이야기에 의해 정의되었다. 

이슬람을 대상으로 하는 오리엔탈리즘은 현대사와 새로 업데이트되는 자료가 있음에도 문화적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이는 현대의 이슬람도 과거의 이슬람의 개념을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고 오리엔탈리즘 이론이 동서양의 차이를 더 심화시킨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2차 대전 이후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었으며 오리엔탈리스트가 없는 중동은 무시되고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여겨졌다. 미국이 주도하는 오리엔탈리즘은 문헌학적 학문 분야가 아니라 사회과학 분야의 하나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정부가 만든 중동연구소가 개설되면서 본격적인 아랍과 이슬람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지만 과거의 오리엔탈리즘의 관념은 반복되고 심화되었다. 동양에 있는 학생이 미국에 가서 연구하는 이들이 늘었으나 이들은 오리엔탈리스트 하의 관념을 배우고 자국에 가서 이 논리를 반복했다. 아랍과 이슬람은 서양의 시장체제에 완벽히 동화되어 동양에 관한 문화적 이미지는 획일화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관련하여 여러 욕심이 생겼다. 비코의 저서 읽기,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이해, 마르크스와 플로베르(읽기 싫지만 정말 책에 수없이 언급됨)의 저서 읽기다. 

이번 읽기도 결국 요약 정리한 것에 불과해진 것 같지만 처음보다는 더 나아졌다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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