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의 쇠퇴는, 중앙 정부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그러한 권력이 점점 지방관들 손에 넘어가면서 국가와 사회 사이의 팽팽한 균형이 무너지는 현상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리고 몇몇 측면에서 이러한 쇠퇴현상이 실제로 19세기 동안 일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의 제도적 틀은 19세기의 가장 파괴적인 내전 가운데 하나 속에서도놀라울 정도로 중국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었다. 분명 바로 이 때문에20세기의 혁명적 전환들이 전국적 맥락에서 국가 보존을 주목표로 하여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건륭제 말기 이후 청 세력 감퇴를 검토할때 중국이 전국적으로 정치적 통합을심지어 학자 엘리트들의 공적인 삶에까지 침투해 있던 부패한 후원제하에서도 어느 정도나이루고 있었는지를 반드시 검토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시기 왕조 쇠퇴의 징조는 지방 정부의 착취, 출세 제일주의, 비능률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민중 반란을 야기하는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을 이해하려면 가경제 [1760~1820년)초의 정치적 위기가 미친 영향과 그로 말미암아 결국 정부가 추진한성급한 기초적 개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88

인구 압력의 영향은 청대에 들어와 대규모의 국내 이민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전달되었는데, 일반적으로 18세기 초 이후 인구의 지속적인 유입이 이루어지고 또한 반란이 가장 쉽게 발발한 곳이 바로 이들변경 지역이었다. 예컨대 타이완 섬, 쓰촨의 산간 지방, 광시의 낙후된향촌, 후난과 구이저우의 접경 지역의 먀오족 거주 지역 등이 그러했다. 이들 지역의 사회적 특징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지역들 속에서 일련의 반란을 조장한 몇 가지 공통적인 요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강력한 공동체 의식이나 준종족적 자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변경 지역 사람들의 종족적 이질성으로 인해 첨예화하고 때로는 언어의 불일치로 말미암아 더욱 심화되었다. 또 다른 한 가지 특성으로는 불안정한 변경 지대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비적들의 출몰이나 집단 간 분쟁으로 인해 고도의 무장화가 필연화된 것을 들 수 있다. - P222

근대로 진입하기 직전에 부패만이 아니라 상업화가, 그리고 타락만이 아니라 점증하는 사회적 복잡성이 중국 사회와내부의 권력 분배를 변화시키는 힘들로 작용하고 있었다. 전제군주제가 사적 집단들의 요구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면서 공공이익 분야의 범위를 지정하고 그것을 통제하던 중앙 정부 자체의 역할 또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 P266

역대 왕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반란자와의 타협은 결국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따름이었다. 즉 정복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민심을 잃어 황실이 제위를 보위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명이 바로 이렇게 망했으며, 도광제도 자기책임을 소홀히 하여 왕조를 멸망으로 이끌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제국 통치의 이러한 원리는 비록 아편전쟁으로 인해 바뀌지는 않았지만순수함을 잃고 말았다. 왜냐하면 편의라는 이름으로 도덕적 원칙을 - P350

제쳐놓고 임시로 서양과 타협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는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란의 핵심이 되었던 것은 굴복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즉각 결정하는 문제였다. - P351

당시 중국의 공식 문서들은 여전히이 번외의 이인들을 ‘영역‘ 즉 ‘영국 반역자‘로, 베이징 중심의세계 질서에 속해 있지만 그에 반항하는 반역적인 존재들로 묘사하고있다. 게다가 그들이 무력에 의존하는 것은 ‘반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실로 조약항 체제는 중국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de novos로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중국의 환경 속에서 자라나온 것이었다. 조약항 내의 외국인 거주지와 통상 지역을 지정하고, 상대국에 자국민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을 허용하며, 다른 외국과의 교섭에서 최혜국 대우 등을 규정한 새로운 조약의 조항들은 모두 중국전통의 확대였으며 제도로 볼 때 원래는 과거의 관습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었다. 항구들이 새로 개항된 1840년대에도 조공 사절단은 계속 베이징을 방문했다. 조선은 매년, 류큐는 7년에 한 번, 베트남과 시암은 3년마다 한 번씩 보내왔다. 조공에 관한 각종 규례와 기록들은세부적인 내용까지 하나하나 보존되어 있는데, 이번원을 통해 몽골이나 기타 중앙아시아 각 민족의 수장들이 표한 충성의 표시까지 기록되었다. 아편전쟁은 오늘날 회고적으로 볼 때는 하나의 대격변처럼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기록되지 않았다. - P382

포함 외교 - 즉 군사력, 특히 해군력을 이용한 강요-를 통해 시작된 불평등 조약 체제는 외국의 조약 열강들에게 중국 영내에서 상당 정도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모습은1860년에 이르러 확고해졌다. 즉 조약향의 자국민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치외법권), 조약항 내 조계들의 자치권, 중국 영해에서의 외국군함의 활동 허용과 중국 영토 내 외국 군대의 주둔, 외국 선박의 중국연해 교역과 내지 항해 허용, 그리고 조약에 의한 관세권의 제한 등이그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외국의 권리와 특권이 추가되면서 중국의주권 행사 범위는 한층 더 축소되었다. 상업, 재정, 군사, 산업, 기술등 여러 면에서 초강대국인 이들은 점점 더 중국의 전통 사회, 정치, 문화를 파괴적으로 잠식해 들어갔다. - P438

19세기 중반 중국의 농촌 사회는 각종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태평천국군은 이들과 겨우 사후에나 전술적으로만 협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좀더 쉽게진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태평천국은 전통 사회의 가치와 제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점령한 도시의 배후에 있는 내륙의 농촌에까지통제력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태평천국에게는 도시가 제국의 정통성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그곳에서만이 그들의 독특한 제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중국 고유의 농촌 조직 형태들은 오히려 정통 신사들에의해 쉽게 동원되었으며, 이들은 중심 도시를 태평천국군에게 점령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에서 지방 방어 조직을 이용해 농촌에 대한 통제력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태평천국과 이들이 통치하려고 한 농촌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간격은 종종도시와 농촌 사이의 간격과 일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격차는신기하게도 서양 세력이 조약항에 침투하면서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중국이 겪게 될 문화적 분열의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 P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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