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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쓴 5백년 고려사 - 박종기 교수의 살아있는 역사 읽기
박종기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묵힌 먼지를 털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집의 먼지가 하루만 지나도 쌓이는데 세월이 훌쩍 지나간다면 어떻겠는가. 이 책도 언제 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묵힌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확인차 뒷면을 보니 2013년 6쇄본이라고 적혀 있었다. 책 제목으로 검색을 해보니 신판이 2020년에 나와 있었다. 신판이 나온지도 몇년 전인데 구판을 읽으려니 민망했지만 그렇다고 책을 폐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이기에 집어들었다. 내용에 변화가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앞으로 집에 있는 책들을 너무 묵히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이 책은 5백년에 가까운 고려사를 한 권에 담고 있다. 저자인 박종기 교수는 고려사 전공자로 관련 책들을 많이 내신 분이라 어느 정도 믿음이 갔다. 조선사는 사료가 많아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역사를 접할 수 있고 고대사는 사료는 적지만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으로 인해 오히려 역사가 제법 다뤄진다. 그러나 고려는 상대적으로 소략하게 가르치는데다가 그것도 외교와 문화 분야에 치중되어 아쉬운 점이 많다.
저자는 역사와 현실을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고려의 역사와 전통을 대한민국 사람들이 더 친근하게 느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 책을 썼다. 저자는 한국의 역사학이 식민주의 근대화론도 아니고 민족주의론도 아닌 제3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은 전쟁으로 인한 분단 이후 이념의 고착화로 여전히 이분법적 논리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고려의 역사를 확인하면서 오늘의 현실에 투영해야할 메시지는 특히 ‘다양성’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 같다.
고려왕조는 매우 다원적인 사회였습니다. 중앙에 외척이나 문벌집단과 같은 폐쇄적인 정치집단이 존재하면서도, 끊임없이 향리와 같은 지방세력을 중앙으로 흡인하여 새로운 관료집단인 사대부집단을 형성해 다양한 정치사의 전개가 가능했습니다. 또한 군현 지역과 부곡 지역 등 복합적이고 차별적인 지방제도를 통해 민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을 강화해나가는 한편, 청자와 불화로 대변되는 고도의 질을 추구하는 고급문화와 거대한 불상∙성황신앙∙향도신앙 등 지방세력의 독자적인 지방문화가 병존하는 사회였습니다.
고려가 이처럼 다원적인 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인적∙문화적 자원을 흡수하여 최초의 실질적인 민족통일을 완성했기에 가능했습니다. (P44)
고려왕조는 지방의 호족세력이 주축이 되어 세웠기 때문에 왕건은 그들을 포섭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호족의 근거지를 본관으로 삼고 성씨를 부여해주면서 그 지역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한다. 본관제가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덕분에 도망하는 민도 줄어들었고 토지를 개간하여 농업 생산량이 향상되어 향촌이 안정될 수 있었다.
고려의 기본적인 토지제도는 ‘전시과’였는데 이는 개인, 관청이 독자적으로 재정을 운영하도록 하고 국가세입지만 필요한 예산을 지급하고 국가가 조세를 직접 수취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직역(직업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토지가 1:1로 지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지역 간 발전 격차가 컸기 때문에 균형적인 발전이 필요해서였다. 다만 사전의 독자적인 운영이 소유권 분쟁을 일으키거나 탈점(오늘날의 ‘먹튀’라고 할까)까지 일으켜 항쟁과 민란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고려 신분제는 양천제로 양인에는 직역을 부담하는 정호, 일반 요역을 부담하는 백정, 기능직을 담당한 잡척이 있었고 천인에는 노비가 있었다.
고려는 전국을 경기, 5도, 양계로 나누었다. 경기는 개경을 포함한 중심 지역이고 5도는 지방 중심 구역, 양계는 군사 중심 지역이었다. 지방은 군현-주현-속현-향/소/부곡으로 명칭이 구분되었다. 주현은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는 곳이고 속현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점이 달랐다. 총 500 여개의 군현 중 370개의 속현, 130개의 주현이 존재했는데 고려 말, 조선 초가 되면 대부분의 군현이 해체가 된다.
고려의 외교를 보통 실리 외교라 부른다. 이 때 강동6주를 포함한 압록강 유역은 고려 뿐 아니라 부근의 국가들에게 중요한 위치였는데 방어적으로 요충지여서만은 아니고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러 외침이 있기는 했지만 고려는 몽골이 등장하기 전까지 실리적 외교를 펼쳐 나갔으나 그 이후에는 불가능해진다. 몽골은 쿠빌라이가 집권하면서 국호를 원으로 바꾸었고 국가의 성격도 바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고려의 대외정책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었으며 고려는 원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된다.
고려 문화 하면 팔만대장경, 불화, 석불, 청자 정도만 떠올렸는데 나전 기술과 팔관회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특히 팔관회는 고려가 천자국임을 과시하고 다양한 민간 신앙을 국가에 녹여내어 통합력을 높이는 구심점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다양성을 추구하는 고려 사회에 대표적인 문화가 아니었나 싶다.
고려 사회는 균분상속, 윤행봉사,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는 등 남성에게만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 문화였다는 것도 다시 새겨두고 간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Korea라는 명칭은 고려를 외국이 부르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공교롭게도 2주 전인가 <역사저널 그날> TV 프로그램에서 이 주제를 다루었는데 ‘고려’라는 명칭은 궁예가 먼저 쓴 것이라고 하더라. 물론 이것도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나 가설일 뿐 알 수 없다.
고려의 역사는 우리에게 전쟁과 외교, 화려한 문화 정도만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조차도 시험 공부를 할 때는 핵심만을 공부하듯 해당 부분에만 집중한 것이 아닐까 싶어 반성의 마음이 일었다. 역사는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측면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한 학문인 것 같다.
얇지만 꽤나 알찬 책이다. 책의 각 페이지에는 고려의 역사적 사건이 연도별로 적혀 있어 센스를 더했고 거의 매 챕터마다 저자의 메시지가 담겨 있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