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
민병래 지음,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 기획 / 원더박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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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여러 권의 책이 나왔다. 그 중 먼저 읽어봐야겠다 싶은 것이 이 책이었다. 그동안 학살에 대한 증언이나 기록을 담은 책들은 있었는데 이 책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더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간토 지방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의미할까. 현재의 도쿄, 지바현, 사이타마현,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 가나가와현을 포함한 곳으로 일본의 동남쪽 끝에 해당하는 구역이다. 간토 대지진(관동대진재=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44초에 진도 7.9 규모로 가나가와현에서 가까운 사가미만이 진원지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지진의 초기의 미동은 12.4초간, 격동은 10분 동안 계속되었으며 사망자는 9만 9,331명, 부상자 10만 3,733명, 행방불명자 4만 3,746명, 가옥 전파 12만 8,266호, 가옥 반파 12만 6,233호, 가옥 소실 44만 7,123호, 유실 가옥 868호, 이재민 약 340 만명이 발생할 정도로 피해가 무척 컸다.

문제는 이때 6,661 명이나 되는 조선인과 700여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 100년이 지났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죽음에 사과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유언비어에 흥분한 자경단원이 저지른 일이고 일본인 희생자도 있다며 진상규명조차 외면하고 있다. - P18


학살의 원인은 과거 TV 다큐멘터리, 영화 <박열> 등을 보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인의 조선인 멸시만이 단순한 이유는 아님을 더 깨닫게 되었다. 그 이전의 역사적 배경을 통해 누적된 결과임을 이해해야만 사건의 진실에 더 다가갈 수 있다. 또 학살의 원인을 담은 증거 자료의 출처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되어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뼈아픈 부분은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기억하는 일을 거의 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 시민 사회 또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발품을 팔아 조사 또는 연구 작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내에는 단 하나의 추모비도 없으며 유족회도 구성되어 있지 못하다(중국에는 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인물들, 그리고 그 속에 세세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눈이 저절로 커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1.강덕상은 재일사학자로 1975년 ‘관동대진재’와 이를 보완해 2003년에 펴낸 ‘학살의 기억, 관동대진재’ 등을 통해 조선인 대학살에 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세상에 고발한 이후로 평생을 ‘조선인 대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분이다. 그는 국회도서관에서 ‘공문비고’를 발견한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일본에 있던 연합국사령부가 압수했다 반환한 이 문서는 해군성 자료로, 지진 당시 일본 내각의 여러 움직임을 담고 있다. 강덕상은 이를 재일사학자 금병동과 함께 정리하고 조선인 학살에 관한 다른 중요 사료까지 묶어 1963년 10월 ‘현대사자료6: 간토대지진과 조선인’이라는 자료집을 발견했다. 이 자료집은 일본 역사학계가 조선인 대학살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강덕상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학살의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거나 다른 분들의 연구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싶다. 그 분의 공이 참으로 크다 하겠다.


2.니시자키 마사오는 2009년 9월에는 도쿄도 스미다구 야히로 6-31-8에 추도비를 세우고 그 옆에 10평 안팎의 조그만 자료관을 열었다. 추도비 문은 다음과 같다. (...) 도쿄 시타마치 일대(서민층 구역)에서도 식민지 지배의 고향을 떠나 일본에 건너 온 사람들의 귀한 목숨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빼앗겼다. 이 역사를 마음에 새겨 희생자를 추도하면서 인권 회복과 양 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한다. 6년여를 그곳에서 먹고 자고 하며 생활했는데 혹시나 모를 극우단체의 공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도쿄의 모든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사료를 모아 기록을 모은 끝에 2016년 ‘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의 기록 - 도쿄지구별 1,100가지 증언’이란 책을 펴냈다. 그는 현재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2010년 일본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결성)’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오충공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모두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나는 두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다룬 수용소로 보내진 조선인들의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이 작품은 수용소에 갇힌 조선인을 인근 마을의 자경단에 넘겨 살해하게 한 놀라운 사실을 다뤘다. 당시 일본에 있는 조선인은 간토 대지진 학살에 따른 현장 상황과 이후의 반응에 따라 방침을 여러 번 바꾸었는데 마지막에는 현장을 달래기 위해 “그 성질의 선악에 관계없이 조선인을 무법으로 대우하는 것은 절대 삼가야 한다. 저들도 우리의 동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어조를 내보였다(전형적인 기만 작전). 수용소에서도 부상 치료를 받지 못해 끙끙 앓다 목숨을 잃거나 배급이 형편없어 하루 한두 개의 주먹밥으로 연명하면서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끔 만들었다. 또 고의로 빨간 딱지를 씌워서 불령으로 낙인찍히면 가차없이 처단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당시 수용소의 인원이 줄었다는데 탈주자에 대한 수색 작업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뭔가 냄새가 안 날수가 없는 상황이다. 


4.야마모토 스미코는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사실을 알고 추모하는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 대표로 칠순이 넘는 나이에 ‘요코하마에서 간토대지진시 조선인 학살’이라는 논문을 쓰고 팔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 현장해설과 강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소학교에 부임하여 조선인 차별의 실태에 눈을 뜨고 재일조선인을 위해 정규 외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육자로 일해온 그였다. 그는 “100주년을 맞아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 회원의 바람은 지금 모임을 사단법인으로 만들고 작은 추도비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모은 자료를 하나의 보고서로 발간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고 “나는 이 일을 조선인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일본인을 위해서 합니다. 사죄하지 않으면 불행이 반복되니까요.”하고 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5.김종수는 일본 경찰서를 찾아 보호를 요청했다 자경단의 습격으로 62여차례 찔리고 베여 죽임을 당한 구학영의 이야기를 발굴해내고 책으로 펴냈다[‘엿장수 구학영’(2021)]. 그는 특별법 제정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2013년 재정촉구 기자회견을 했다. 2014년 4월 7일 여야의원 103명의 서명을 받아 발의가 되었으나 본회의에 오르지 못하고 2016년 해당 안은 폐기가 되었다. 이후에는 하는 수 없이 특별법 제정은 잠시 미루고 간토학살 전시패널을 들고 어디든 달려가며 역사기행, 탁본 작업 등을 진행했다. 2017년에는 1923역사관을 세우는 작업에 착수해 2020년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을 완공했다.


6.가토 나오키는 신오쿠보에서 태어났는데 재일조선인이 많았던 동네여서 자연스레 조선인과 우정을 나누며 자랐다. 그런데 최근 재특회 같은 극우단체의 혐한 시위가 잦아지고 역사수정주의가 세를 얻어 가며 극우 정치인의 행동을 보면서 이를 막고자 항의 행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2013년부터는 거의 매주 신오쿠보 거리에 나섰고 친구들과 ‘민족차별에 대해 항의하는 행동’을 하고 글을 쓰겠다 마음먹은 뒤 블로그를 운영해 자료를 모으는 등 기록을 바탕으로 중계하듯 글을 써나갔다. 블로그의 글의 반향이 커 책으로 출간된 뒤에 현재는 일본 곳곳을 다니며 강연 후 독자와의 만남을 가지는 중이다. 100주기를 맞아 그는 요코아미초 공원의 추도비를 방위하는 싸움에 나선다. 


7.시각 예술가 이이야마 유키는 어느 날 오지뇌병원의 과거 기록 중 1930년에 입소하여 1940년에 죽은 조선인 환자 두 명의 사연을 접했다. 그들은 ”내 손이나 다리를 베어다오, 조선인을 죽여라“라는 말을 외치며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는 걸 들었고 이들이 간토대학살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고 있던 게 아닐까 추측했다(추측이지만 확률은 높다). 자이니치 래퍼인 FUNI는 이 두 명의 조선인 환자의 한을 담은 가사를 랩으로 읊어내 두 사람은 협업을 하고 <In-mates>라는 30분 남짓한 영상을 만들어냈다(일본에서 상영 거부 당함). 이이야마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보다 보통의 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연금을 국적이 다르다고 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작품의 동기를 발견한다. 또 장애인의 권리가 있다, 존엄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보면서 예술이 장애 문제를 어떻게 껴안고 갈지 고민한다”라고 말한다. FUNI도 “이제까지 작업은 자신의 감정을 랩으로 바꾸는 것에 머물렀으나 <In-mates>를 통해서 역사문제, 민족문제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앞으로도 주제의식 있는 곡을 쓰겠다“라고 힘차게 말한다. - P230~231


8.사진작가 천승환은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대학원에 들어가 미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길이 다큐멘터리 사진임을 깨닫는다. 이후 국외사적지 역사기행을 계획하고 국외 여행길에 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대한민국 국외 사적지 역사지도 작업’으로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관련 사적지 정보를 정리하고  지도화하여 온라인에서 누구나 방문할 수 있도록 사이트를 만들었다. 

올해 그는 80일간 간토 지방의 학살 사적지를 다니며 참배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 자료 또한 온라인에 무료로 공개될 예정이다.


뒷 편에는 부록으로 간토 대지진 학살 현장을 위한 다크 투어 안내서와 주석을 친절하게 담아 놓았다. 개인적으로 찾아가는 이들을 위해 링크와 지도, 사진 등이 첨부되어 있어 충분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메일과 홈페이지 등이 있으니 더 많은 자료를 얻는 방법도 가능하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현재판 주소이자 가이드라 할 수 있겠다. 나도 몸이 성할 때 꼭 이 곳들을 한 번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간토의 유족은 100년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에 나서려 한다. 제노사이드와 반인도적 범죄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건 반드시 처벌하고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게 국제사회의 원칙이다. 간토 조선인 학살의 단죄는 이런 원칙을 실현해 인간의 존엄성을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의원은 올봄 여야 의원 100명의 동의를 얻어 ‘간토대학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통과되면 무엇보다 진상조사에서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할 일이 있다. 우리 땅 어디에도 6,661 명을 기리는 추도물이 하나도 없다. 일본의 시민사회는 각 지역에서 뉘우침을 이끌어 내며 20여 기나 되는 추도비를 세웠다. 부끄러운 일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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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9-28 0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 사람이 많이 죽었네요 지진이 일어나고 죽임 당했다는 것만 알았지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몰랐군요 그때는 한국이 일본 지배에 있어서 더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광복 뒤에는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 제대로 하지 않은 게 지금까지 이어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사람이 다 잘 하기는 어렵다 해도 하려고 해야 할 텐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9-30 10:51   좋아요 1 | URL
네. 정부가 일본 측에 해명을 요구하지 않아서 더 묻힌 것이 크다고 봅니다. 추모비 하나 없다는 현실이 씁쓸했어요. 이제 꽤 많은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난 만큼 민간 단체와 함께 정부 측에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